2장 자주문예운동의 미학적 기초(1) 미학에 대한 견해20021202

제2장 자주문예운동의 미학적 기초
(1) 미학에 대한 견해
1) 감성적 형식을 통한 정신적 즐거움
2) 아름다움에 민감한 사람들의 특성
3) 아름다움에 대하여
1.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일까요?
2. 아름다움의 주인인 사람
3. 아름다움의 종류
ㄱ. 자연미와 인간미
ㄴ. 생활미와 예술미
4)추한 것에 대하여
5)숭고에 대하여
1.숭고와 미의 관계
2. 사회생활에서의 숭고
3. 자연에서의 숭고
6) 영웅적인 것
7) 비극에 대하여
8) 희극적인 것
1. 희극의 여러 가지 형식
ㄱ.놀라운 것
ㄴ.익살
ㄷ.역설
ㄹ.해학
ㅁ.인용,모방
(1)미학에 대한 견해

논어에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것만 못하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인식의 중요성을 얘기한 것이라면 좋아하는 것은 지향과 의지를 표현하며, 즐기는 것은 인식과 가치지향이 하나로 통일된 경지를 말합니다. 아름다움은 감성적 형식을 통한 정신적 즐거움 입니다.

1) 아름다움은 감성적 형식을 통한 정신적 즐거움
우선 아름다움은 형식의 문제입니다.
인류는 역사를 발전시켜오는 과정에서 형식, 구조, 질서등에 대한 효용성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돌칼의 대칭성으로부터 상대성이론의 새롭고 완벽한 증명구조까지 실용적인 것은 한결같이 내용뿐 아니라 형식에서도 뛰어난 감동을 준다는 것을 말입니다. 나아가 실용적이지 않더라도 형식이나 구조 자체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어있습니다. 꽃은 먹고살기에 급한 초기인류에겐 그다지 흥미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목축에서 농경으로 생활양식이 바뀌면서 인류는 식물과 친해지게 되었고 배게에 꽃잎을 넣어 향기롭게 하는데 쓰이지 않더라도 꽃자체를 좋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형식은 모든 사회 생활에도 존재합니다.
대중문예단체인 신바람에서는 뒤풀이에서 막걸리를 마실 때면 다같이 잔을 들고 “목 축입시다. 얼쑤! 상사디야” 라고 한 다음 술을 마십니다. 위하여 라는 구호가 지향에 대한 통일성을 확보해주는 반면, 얼쑤 상사디야는 그것을 넘어서는 즐기는 단계에서의 통일성을 확보해 준다는 점에서 신바람의 독특한 미적 형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의 대상은 감성적 형식입니다. 그러나 형식을 미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은 내용, 의미, 인식 등에 의해 제약됩니다. 과학에 문외한인 사람이 아인시타인 이론의 아름다운 구조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똑같은 빨간색이라도 그것이 장미꽃에 있을 때와 일곤이형의 코에 있을 때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은 아름다움의 대상이 형식이되 내용을 가진 형식이란 사실을 증명합니다. 앞서 예를 들었던 얼쑤 상사디야도 얘기가 잘모아지고 결의가 올라오는 분위기에서 그 자리의 주인공이 소리 먹일 때는 힘차고 우렁차게 울려 퍼지지만 아무나 흉내내서 소리 먹이면 우렁차지도 않고 영 김빠지는 분위기가 됩니다.
아름다움의 대상이 내용을 가진 형식이란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아름다움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강

광철 사무국장이 뀌는 방구는 생리적이라고만 보기에는 고도의 목적의식성과 조절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옆사람이 방구냄새를 피할 뿐 아니라 웃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내용을 가진 방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는 그것을 즐거워하고 누구는 그것을 불쾌해 합니다. 바로 여기에 아름다움이 사람마다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을 이해하는 열쇠가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객관적 대상과 사람과의 관계속에서만 생깁니다. 이론이 사람의 주관과는 관계없는 객관적인 세계 자체의 질서를 연구하는 것이라면 미는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속에서만 발생하는 것입니다.
“달이 저렇게 고운 줄을 예전엔 미쳐 몰랐어요.” 소월의 시처럼 어렸을 때도 늙어서도 저 달은 항상 있는 것이지만, 그제서야 달이 저렇게 곱게 느껴진 것은 사춘기에 자기의 존재를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달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과 달과 나를 연관짓고 싶은 가치가 통일될 때 아름다움은 발생합니다.
( 혹시나 해서 부연하면 지난번에 얘기한 “주체적인 조직은 좋아서 오는 조직”의 개념에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들의 조직”이란 개념은 포함되는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들의 조직이 좋아서 오는 조직의 개념을 포함하진 않습니다. 좋아서 오는 조직에는 종교, 도덕, 정치, 경제, 문예 등 모든 조직에 적용되는 개념인데 반해서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들의 조직은 도덕, 정치 등 연관은 갖기만 독자적인 형태을 갖는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름다움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현실속의 사람관계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이전에 한 풍물모임에서 회원들의 생일 축하를 해주지 말자, 대신 그 회원의 부모님을 찾아가서 여지껏 저희 동료를 이렇게 키워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드리는 문화를 만들자는 의견이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 제안은 말로만 가족과 함께 하는 활동이 아니라 진짜로 가족과 함께 하는 활동

의 구체적인 형식을 발견, 창조해 낸 일대 비약이었습니다. 모두가 찬성하는데 이것을 격렬히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뜻은 너무나 훌륭하다, 그러나 우리의 실정이 과연 그것을 책임질 수 있겠는지 타산하고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실행할 자신이 없는데 막연하게만 결의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그모임을 누구보다 아끼기에 나올 수 있는 용기있는 반대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체적이고 힘있는 실천이 따를 때만 그것은 아름다움이 됩니다. 조직적인 체계로 정착될 때 그래서 눈으로 보이는 것이 되었을 때만이 아름다움이 됩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논리나 이론보다 훨씬 높은 단계에서 인식과 가치의 통일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살아서 숨쉬는 것이 아니면 과감하게 반대할 수 있고, 작은 흠집도 없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입니다. 아니 아름다움을 찾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뛰어난 조직가로, 자상한 강습자로, 존경받는 창작자로, 이론의 천재로 됩니다.
감성적 형식을 통한다는 의미는 이처럼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를 전제로 내용을 가진 형식에 대해서 느낀다는 의미입니다.
정신적 즐거움이란 어떤 내용일까요? 아름다움은 생리적인 요구와는 무관한 정신적인 것입니다. 또한 소유욕 없는 순수 정신적인 것입니다. 배고픔, 성적충동, 사리사욕, 명예욕등도 그 충족의 정도에 따라 나름대로의 정서를 자극하지만 미적 감정은 뿌리를 달리합니다. 별이 빛나는 밤을 볼 수 있는 마음은 생리적인 쾌적함과 미의 감정을 구별해주고, 광활한 만주벌판을 그릴 수 있는 마음은 공포감과 숭고미를 구별케 해줍니다. 또 밤새워 진도아리랑을 지어부르는 마음은 웃음과 해학을 구별해주고, 부당하게 끌려가는 동료에 대한 애정은 두려움과 비극적 감정을 구별케 해줍니다. 이런 이유로 아름다움은 순수정신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의 형식은 소유하거나 소비할 수도 없고, 또한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관찰함으로써 환기되는 정서는 이기적인것과 관계가 없습니다. 이기적이지 않은, 이타적인 성격이 바로 끝없는 즐거움을 불러 일으키는 원천입니다.

2) 아름다움에 민감한 사람들의 특성
첫째, 직접적인 감각적 접촉을 좋아합니다. 논리나 사고는 직접적인 감각적 접촉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물론 뉴튼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에 대한 영감을 얻었지만 그 순간 이후로 논리를 발전시키기 위해 날마다 사과나무앞에 있진 않았습니다. 사진 찍는 사람들은 건물벽에 비취는 햇빛의 미묘한 색변화를 찾아 노을이 지거나 해가 뜰때면 사진기에서 눈을 떼지 않고 홀린듯이 바라봅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직적으로 결정된 일이니까 당연히 따르겠지 하고 무관심해 하는 것이 아니라 쉬지않고 그 사람의 변화를 지켜봅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에 민감한 사람은 개인적 만남, 분위기 없는 행동을 하거나 뛰쳐나가는 사람에 대해 개인적으로 직접 만나서 풀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이 아름다움에 민감한 사람입니다.
둘째, 사람을 만날 때 사심이 없습니다. 미적 상황속에 있는 사람의 심리적 상태는 인식하는 과정에서 모든 실용적 목적을 배제하는 데 그 본질이 있습니다. 이론적 인식이 강한 사람은 성과나 결과를 중요시 합니다. 아름다움에 민감한 사람은 무슨 목적이 있어서만 꼭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으면서 친해지고 교감되어지는 과정 그 자체가 좋아서 만납니다. 실용적이거나 현실적인 목적이 앞서게 되면 성과나 결과를 확인해 보고 싶은마음이 듭니다. 확인하려는 마음은 미적형식이 아닙니다. 장산곶매 이야기를 혹시 아십니까? 황해도 장산곶에 아주 유명한 매가 살았답니다. 이매는 겨울이 되면 자기집을 부수고 만주까지 날아가서 곰과 일대 혈전을 벌이고 돌아옵니다. 집을 부수고 가는 것은 죽을 각오를 하고 가기 때문입니다. 장산곶매가 싸움에서 이기고 다시 둥지를 틀면 마을에는 잔치가 벌어지고 그해에 만선이 될 것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장산곶매를 보면서 사람들은 자기도 그렇게 살려고 하는 희망과 이상을 가졌고 장산곶매는 진취적인 삶의 상징으로 생각했습

니다. 그런데 언젠가 장산곶매가 혹시 다른데로 날아가 버리면 어떻게 될까라는 불안함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매의 다리에 장산곶매라는 표식을 끈으로 묶어 달았습니다. 그러고나서 어느날 매의 둥지에 구렁이가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산곶매가 피해 날아가도록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쳤지만 왠지 매는 날아오르지 않고 구렁이와 처철한 싸움을 벌이는 것이었습니다. 날아오르지 않는 매를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저러다 죽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나무밑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밤새 구렁이와 싸운 매는 구렁이를 물리치고 자신도 나무에 걸쳐진 채 죽고 말았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왜 매가 날아오르지 못하고 그렇게 되었는지 아침이 되어 나무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나무에 올라갔을 때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리에 묶어준 끈이 나무가지에 엉켜 날아오를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소유욕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확인하고 싶을수록 소유욕은 깊어지며 아름다움의 대상이 현실적인 이해 관계의 대상이 됩니다. 확인하지 않으려할 때 그 아름다움의 진가가 발휘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것을 발견해 갑니다. 얼마전 동네 골목에서 세 살된 아들이 비누방울 놀이하는 것을 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비누방울을 불어 놓고는 그것을 손으로 붙잡으려고 애를 쓰는것입니다. 물론 비누방울은 손에 잡히는 즉시 터져서 사라져 버리죠. 아무것도 남지 않는 손바닥을 몇번씩이나 경험하고서야 비누방울 잡기를 포기해 버렸습니다. 비누방울을 불고나서 바람을 따라 멀리 멀리 춤추며 날아가는 비누방울을 감상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확인되고 검증되어야 하는 세계가 있다면 확인되지 말아야 하는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혼동하면 확인 하려다가 함정에 빠지거나, 감이나 직관으로만 하다가 독선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월러스타인 같은 이는 미적영역과 과학적 영역의 혼돈으로 부터 미래의 전망이나 목표잡기에 열중하지마라 그러다가 이미 물에 빠져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미의 영역에서 한말이라면 명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한말이었을 때는 심각한 개량주의임을 알아야합니다.
얼핏 보기에 시간 낭비같은 만남에 사람들이 인간적이었다고 하는 것을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분위기 좋은 술집, 호젓한 산책길을 알아두는 것은 사람사업에서 중요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교육은 의식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함께 얘기하는 것이 됩니다.
셋째, 정서적입니다.
과학자에겐 판단에 있어서 정서적일 필요가 없고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뉴튼이 사과 떨어질 때 느꼈던 감동이 만유인력법칙의 진리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적관계에서는 직접적 체험과 감정의 강도 및 특성만이 판단의 유일하고 필수적이며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이성이나, 논리적 분석, 권위에의 복종이 아니라 나의 감정의 정조만이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거나 숭고하다거나 하는 평가를 내릴 수 있게 해줍니다. 나의 판단속에는 대상의 특질 뿐 아니라 내 자신의 고유한 체험까지도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거부할 수는 있어도 논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때문에 아름다움과 관계된 논쟁은 상대방을 자신의 입장으로 끌어들인다든지, 상대방을 도와 그가 자신이 느끼는 것과 똑같이 대상을 감지하도록 만들기 전까지는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논리와 정서와 도덕과 정치의 총체인 사람의 모임에서는 과학적 방향성 뿐 아니라 혈연적 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미적 관계는 인식관계나 도덕적, 종교적, 정치적관계 어느것 보다 훨씬 심오하고 완벽하게 개인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합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체험은 개성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주관적인 것이며, 세상에 둘도 없는 그 사람만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아름다움에 대하여
아름다움에 대하여

후보들의 공약이 나왔습니다. 나라의 상에 대해 “새로운” “당당한”등의 수식어가 등장했습니다. 김구선생이 말한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기엔 아직 우리 현실이 요원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북에서는 ‘강한’나라를 들고 나왔지만 실상 그 내용은 ‘당당한’나라가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강함보다 당당함이 더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강함의 기준은 당당함이라는 생각입니다. 부드러움의 기준도 당당함이란 생각입니다. 당당함에 기초할 때 강유를 아우를 수 있으니 아름다운 나라의 기준은 당당함에 근접해 있다고 생각해봅니다.

1.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세상을 아름다움이란 창문으로 봅니다. 세상엔 아름다운 것이 참 많다고 하죠. 그러나 아름다움은 갯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말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무한한 아름다움의 세계를 보기 위해 아름다움이란 창문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사람이 어떤 이해와 요구를 갖고 세계를 대하는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신적 현상중의 하나입니다.
여주 신륵사에 촬영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까지 합하여 세번째 가는 곳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신륵사앞의 모래밭에 수련회를 갖다가 수련회가 끝나고 여기까지와서 신륵사를 안보고 갈 수 있냐하여 관광객의 입장으로 갔었습니다. 이때는 친구들과 함께 대웅전에서 기념사진 한 장, 문화재인 대리석탑앞에서 한 장, 경치좋은 강가의 정자에선 각자가 폼잡고 독사진 한 장씩, 나중엔 그렇게 몰려다니는게 귀찮아서 마루에 앉아만 있다가 ‘이제 간다’ 소리에 우르르 몰려 나가며 매표소 앞에서 전체 사진을 찍고 버스에 올라타 춤추고 놀며 왔었습니다. 이때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며 마구 끌려다니며 내가 여기 왔었노라 하고 찍은 졸린 눈의 기념사진 뿐입니다. 이때 신륵사는 맹목적 소유의 대상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불교학생회 일을 할 때인데 강에 물고기를 풀어주는 방생법회 때였습니다. 이때는 대웅전에서 108배 절을 하고 탑주위를 돌며 강가에 물고기를 풀어주면서 나도 모르게 숭고한 정취에 빠져들었습니다. 이때 대웅전의 부처님과 교교한 달빛을 받으며 서있던 석탑은 나도 부처님처럼 살아야 겠다는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신륵사에 갔을 때는 사진을 찍으러 갔습니다. 신륵사에 대해서 공부도 많이 했지만 그것만으로 사진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 마음의 풍경과 신륵사의 풍경이 만나 대화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사진기를 들었습니다. 이때 신륵사는 무한한 정신적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었습니다.
세계의 중심에 선 사람이 어떤 이해와 요구를 앞세우고 세계를 대하는가에 따라 사람과 세계 사이에는 전혀 다른 관계가 생깁니다. 어떤 이해와 요구인가에서 ‘어떤’이란 의미는 의식이 물질을 반영하는 형식을 뜻합니다. 그래서 종교적 요구를 앞세우면 신(세속적인 권력을 반영하는)에 종속되고자 하는 의지가 신앙의 형태로 나타나고, 과학적 요구를 앞세우면 진리를 밝히고자 하는 의지가 개념이나 이론의 형태로 나타나며, 예술적 요구를 앞세우면 산사람의 생활을 그리고자하는 의지가 형상의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한가지 주의할 것은 예술이 미의 집중된 표현이긴 하지만 아름다움은 곧 예술이다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종교적인 것과도, 과학적인 것과도, 예술적인 것과도 모두 연관되어 있습니다. 종교이건 과학이건 예술이건 사람의 사회적 요구에 맞는 대상은 기쁨과 만족을 줍니다. 여기서 아름다운 것은 우선 정신적 쾌감의 대상으로 되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아름다운 것은 정신적 쾌감을 주되 감성적인 형식으로 다가옵니다. 서애 유성룡은 [병법]에서 일(事)이 그 차례(序)를 얻으면 예(禮)라하고, 물(物)이 그 화(和)를 얻으면 악(樂)이라 하니 군사들이 질서있고 마음이 하나로 화합하여 있는 것도 예악의 원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군사문제를 보는 데서 도덕과 미의 통일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름다움은 정신적인 요구로부터 출발하여 정신적 쾌감의 대상이 될 뿐아니라, 감각을 통해 파악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름다움은 감성적 대상이 사람의 정신적 요구에 맞는가 안맞는가, 맞으면 얼마나 맞는가하는 관계를 표현하는 현상입니다. 이 정의에는 아름다움이란 창문 바깥의 세계는 감성적 형식을 통해 파악된다는 것 하나와, 한편 아름다움은 창문 안쪽에서는 사람의 요구에 맞는 것이라는 것 하나가 전제되어있습니다. 감성적 형식이란 문제는 이해를 했을 것 같은데 사람의 요구라는 것이 도대체 뜬구름 같이 다가갈 것 같습니다. 사람의 요구란게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자의적인 개념이 아닌가 싶기도 할듯하구요. 지나간 강의에서 밝혔듯 이 말은 대단히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과정을 거쳐 형성된 개념이기 때문에 다시 한번 설명이 필요할 것같습니다. 창문의 바깥쪽과 안쪽중 두 관계의 중심은 안쪽의 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2. 아름다움의 주인인 사람
사람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이는 세계에서 주인의 지위를 가지고 세계를 지배하며 창조적 능력으로 세계를 개조하고 스스로를 고도로 규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사회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철학적인 범주에서의 사람이란 개념은 사회역사적인 범주에서는 민중이란 개념이 됩니다. 여담으로 사람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자연이 파괴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가끔 있습니다. 자연이 파괴되는 것은 사람, 민중을 중심으로 보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 돈을 중심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주인인 사람은 자연에만 맡겨두면 갈수록 혼돈에 빠지는 것을 관리하며 조화시킬 줄을 압니다. 하지만 동물이나 주인의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은 자기 편한 것만을 생각할 뿐 관리하거나 조화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자기만 편하려고 무조건 내다버린 공해에 자기목을 조이게 됩니다. 결국 자연은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즉 민중을 중심으로 아름다움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 편한대로 아름다움을 창조한 사람들은 결국 그렇게 창조된 잘못된 아름다움에 목 조이고 말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관념중심의 미학이라고 합니다. 사람중심의 아름다움에 대한 견해를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 마음이라는 말로 바꿔치기한 견해입니다. 아름다움은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또는 무조건 우기면 아름다워진다는 갓이죠. 아름다움의 세계에서 이런 대표적 공해물질은 광고입니다. 광고는 수준이 낮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목적의식적인 파괴자입니다. 세제광고를 예로 들어 볼까요. 세제가 강물오염의 주범인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명하고 깜직한 배우가 나와서 광고하는 걸 계속보면 자기가 그 세제를 쓰는 것이 그 배우처럼 아름답게 사는 비결인 듯 착각하게 됩니다. 어려운 말로 잘못된 미적 이상을 갖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 미적 이상이 미의 법칙과 질서에 맞는지를 판단할 겨를도 없이 사서 씁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요. 하지만 세제를 쓰는 모습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상업광고는 자본을 토대로 무조건 이게 아름답다고 우기는 관념론적 미학의 대표적 창조물입니다. 이처럼 아름다움은 주관적인 것으로, 객관적 현실과 분리되어서 존재한다는 것이 관념론적 미학입니다. 이것은 마음 씀씀이가 어떻든 발모양만 예쁘게 만들어서 꽃신에 맞추려는 팥쥐의 미학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미의 법칙이 밝혀지기 전의 전근대적인 견해로 인류가 아름다움을 성취하는데 많은 장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가 계속 판을 치는 것은 자본의 목적의식적인 결합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근대적인 견해는 아름다움은 누가 봐도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객관적 실재이다라는 견해입니다. 이런 견해는 아름다움의 법칙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의 의도대로 찍은 사진에 대해 서로 평
가받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함께 품평회를 하다가 ‘그건 내맘이니 간섭하지마’하는 일방적인 견해는 전근대적인 미학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이 객관적 실재라는 발견은 사람, 민중이 아름다움의 주인이 될 수 있는 토대와 가능성을 열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물질중심의 미학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현대적 견해는 미가 본질적으로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것이라는 것이 밝혀진 성과를 토대로 하면서, 사람을 떠난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과의 관계속에서만 미적 대상이 미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현대미학사상은 그에 기초하여 미를 가르는 유일한 기준은 사람, 민중의 자주적 이상이라는 사실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움의 기준문제가 해결됨으로써 현실의 다양한 미적 현상들의 본질을 옳게 밝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 민중의 자주적 이상을 중심으로 할 때 아름다운 것은 감성적 대상이 사람, 민중의 이상에 맞는 것이며, 숭고한 것은 사람, 민중의 이상에 맞을 뿐 아니라 그것을 끊임없이 높여주는 것이며, 비극적인 것은 사람, 민중의 이상이 유린된 것이며, 희극적인 것은 사람, 민중의 자주적 이상에 맞지 않는 것이 맞는 것처럼 위장한 미적 현상입니다.

철학사상은 논리와 개념으로만 표현되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철학이 미적 언어로 표현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아는 것이 진리에 대한 인식을 뜻한다면, 좋아하는 것은 진리를 향해 가려는 의지를 표현합니다. 즐기는 것은 지향할 뿐 아니라 하나로 체화가 된 경지를 말합니다. 아름다움도 그와 같습니다. 강하기 이전에 당당하고 그럼으로서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나라. 우리가 가져볼 시대의 상이 아닐까요?

3. 아름다움의 종류
ㄱ. 자연미와 인간미
자연물에 대해서건 사람에 대해서건 추함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은 발생합니다. 자연의 색이나 음향이 사람의 정서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그것이 사람의 생활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감하기씨의 소설 완전한 만남중에서 비전향 장기수들이 있는 특별사동 앞마당에 꽃도 잎도 피지 않은 겨울 나뭇가지들이 독자들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나뭇가지 자체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 나무를 겨우내내 가꾸며 봄을 준비하는 장기수의 숭고한 인품과 만나기 때문입니다. 자연미는 이처럼 사람의 생활과 결부되어 나타나지만 자연에는 직접 인간생활을 연상시키지 않고 쾌감을 주는 아름다운 것도 있습니다. 나무에서 느끼는 균형, 대칭, 조화는 사람의 사회적 실천과 결부되어 사람에게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초기 원시 인류의 생활에서 실용적인 돌도끼나 돌화살촉은 대칭을 이룰 때 가장 사회적인 요구를 충족시킨다는데로부터 생활과 직접 결부되지 않는 조건에서도 아름다운 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이런 이유로 하여 사회적 단위인 민족, 계급, 개인에 따라 다르게 느껴집니다.
우리민족은 다른 나라 사람과 달리 끝없이 펼쳐진 초원이나 사막보다 금수강산을 더 아름답게 느낍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가을은 노동에 대한 희열로 하여 환희와 낭만을 불러일으키지만 무위도식하는 착취세력에겐 역사의 전면에서 밀려나는 정서를 반영하고 쓸쓸하고 서글픈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또 개인의 개성적 특성에 따라 활짝핀 꽃을 좋아할 수도 있고 막 피어나는 꽃을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중심의 미학관은 개인과 계급과 민족의 통일로서의 사람을 중심으로 한 미학관이기 때문에 구분되기도 하지만 통일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자연미가 사람의 사회적 실천이 반영되는 지점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된다면 인간미는 그의 고상한 정신도덕면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의 모든 풍모와 가

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의 사상의식입니다. 또한 인간의 육체미도 중요합니다. 육체미에는 얼굴의 조형미와 육체적 균형미가 있습니다. 얼굴의 조형미는 인간의 형태미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아름다운 얼굴은 인간의 고상한 내면 세계를 드러내는데 도움을 줍니다. 육체적 균형미도 사람에게 쾌감을 줍니다. 80년대 젊은이들 사이에 자신을 민중적으로 보이기 위해 일부터 소탈하게, 좀 심할 때는 지저분하게 하고 다니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움에 대해 사상의식적인 면만을 일면적으로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인 면에서는 별차이가 없겠지만 미학적으로는 몹시 낙후한 관점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육체미도 인간미를 규정하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인간미를 규정하는 요인은 또 자연과 사회에 대한 깊은 지식과 건강한 체력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창조적 능력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ㄴ. 생활미와 예술미
사회생활에서 아름다운 것은 즐겁고 보람있는 생활입니다. 즐거운 것은 자주적인 요구를 실현해 나가기 때문이며 보람있는 것은 아무리 어려운 역경속에서도 그것을 헤쳐나가는 인간의 창조적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인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생명은 죽어서도 이름을 남긴다는 사회정치적 생명이며 이런 생명을 지니고 자주적인 생활을 누리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생활입니다. 자주적 요구를 누리는 생활도 아름답지만 그것을 실현해 나가는 창조적 생활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89년 1차 전국노동자문예패 수련대회가 밀양에서 있었는데 그때 일이 문득 생각납니다. 처음 그런 걸 해보는터라 즉석에서 선발된 진행자들도 정신없고 노동자 문화패들도 정신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장 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한 곳은 화장실 이었습니다. 화장실 하수구가 막히고 물이 빠지지 않아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데다 나중엔 드디어 자연화장실을 이용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누구하나 치우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치워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지저분하고 북새통인 화장실을 반나절 내내 물퍼내고 치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건물관리자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88년 철도파업 때 해고된 3명중 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화장실을 치운 후로 이것이 집행부에 알려져 이렇게 아름다운 생활을 모범을 본받자며 간부들이 먼저 앞장서서 신발 가지런히 놓기에서부터 밥할 때 쌀 흘리지 않기 등, 생활수칙을 정해 실천했습니다. 덕분에 소란스럽던 첫날이 지나가고 다음날부턴 깔끔한 환경속에서 수련대회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생활미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잘 정돈된 사무실, 가지런히 놓여진 신발, 정갈하고 소탈하며 아름다운 옷차림, 고상한 말투, 항일유격대원의 총구에 꼽혀진 코스모스…. 이런 것은 정신적 쾌감을 줄 뿐만 아니라 실용적으로도 높은 효율을 발휘합니다. 요즘에 우리 사회풍토를 보면 편하게만 살려는 풍조가 많이 있는데, 이것은 결코 자주적인 생활이 아닙니다. 어려운 난관을 헤쳐나가며 보람있는 삶을 사는 과정에 즐겁고 자주적인 생활이 있는 것이지 남들이 땀흘려 이룩한 보람을 거저 먹으려는 자세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예술미는 생활미가 집중된 것이며 예술적 형상을 통해 반영된 것입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예술은 아름다운 생활을 높은 예술적 형상으로 반영한 예술입니다. 그러나 예술은 생활미에 종속된 것은 아닙니다. 상대적인 독자성이 존재한다는 것이요. 김정일회원이 찍은 성남복정동의 화훼마을 사진을 보십시오. 이 사진이 사회적 폭로를 목적으로 하기 보다는 사람이 사는 것같은 따뜻한 정이 느껴진다고 평가된 데에는 뒤의 배경을 이루는 나무들의 영향이 절대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나무를 가리고 한번보면 더 실감이 날 것입니다. 팍팍한 생활속에서도 자연을 느낄 줄 안다는 것은 높은 수준의 생활미를 읽을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실제하는 나무의 인상은 사진에 나타난 나무의 인상처럼 이런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의 짙고 옅음이 만들어 내는 이 사진의 분위기는 생활미와 예술미를 판별하는 기준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느끼게 합니다.

4)추한 것에 대하여

아름다움과 관련해서 인류는 전혀 상반되면서도 아름다움을 오히려 강조하는 새로운 영역을 발견했습니다. 추함이 바로 그것입니다. 위의 사진은 피선영씨가 남대문 시장에서 촬영한 작품입니다. 얼핏 보기엔 흔한 사진소재의 하나일 수 있었지만 품평회에서는 이 사진의 깊은 의미와 본질을 잘 밝혀 냈습니다. 나온 얘기를 종합하면, 우선 왜 이런 장면을 하필 담으려고 했는가? 사람의 추한 모습을 모르게 찍는다고 하는 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 사람을 아름답고 따뜻하게 보는 눈이 필요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들이 쏟아지자 선영씨도 심하게 동요했습니다. 정말 자기가 그런 문제가 있는 것같기도 하다. 그러나 상반된 얘기도 나왔습니다. 이 사람을 몰래 또는 매정한 눈으로 찍었다기보다는 뭔가 동정을 가지고 찍은 건 아닌가? 이런 현실을 정확히 보여줌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충격을 주고 관심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던가? 선영씨 말이 그런 측면도 있는 것같다고 했습니다. 한 장의 사진만으로 선영씨의 의도가 충분히 드러나진 않았지만 이어서 발표하는 사진들에서 후자의 입장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추하다는 것은 사람 중심의 미학관으로 볼 때는 사람의 자주적인 요구와 맞지않는 상태에서 비롯되는 정서적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이 사회적 존재로서 즐겁고 보람있게 살고자 하는 자기 요구와 지위를 갖지 못하고 비참하게 타락된 상태를 반영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추함이 아름다움의 세계에서 얘기되는 것은 추함 그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그 추함을 통해서 아름다움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를 불어넣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영씨의 사진이 추한 것을 그냥 개념없이 찍었던 거라면 아름다움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지 못할텐데 추한 자주성이 짓밟혀진 이 행인을 찍음으로서 이런 추함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 현실을 정확히 보고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 가자는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름다움을 거론하면서 선영씨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이끌어줄 이유가 생기는 겁니다. 이

처럼 추함을 지나가는 흥미거리나 값싼 동정으로 보지않고 추함의 본질을 사회적 관계속에서 철저히 파헤치고자 했던 작품들이 주명덕씨의 ‘홀트아동복지회의 입양아’ 사진이나 임응식씨의 ‘구직’같은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들입니다.
그러나 추함을 다루는데 있어서 주의력을 집중해야할 대목이 있습니다. 추함 자체를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세계와 인연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느꼈던 것이 있었습니다. 꽃을 사다가 꽃병에 꼽지 않고 벽에 걸어 말리는 게 언젠가부터 우리의 버릇이 됐습니다. 이전엔 말라 비틀어진 꽃은 버리는 게 상례였습니다. 그것은 추한 꼴을 보기 싫은 사람의 자주적 요구의 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시든꽃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허무주의적인 미학관을 가지고 있었던 예술가와 그 주변사람들에 의해 선호되었습니다. 추한 것을 역사의 전면에 드러내 아름다움에 대한 강렬한 충동과 의지를 불러일으켰던 미학상의 성과를 허무주의적인 예술가들은 추한 것 자체에 탐미해 들어가는 것으로 노선을 변경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의 남관 화백은 그런 사람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이슬을 머금은 장미에서보다도 시든꽃, 말라비틀어진 꽃에서 아름다움을 본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아름다움의 세계를 넓힌 게 아니라 왜곡시켰습니다. 추함 그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아니면 그것을 통해 아름다움에의 강렬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는 이거다하며 갈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선영씨의 작품도 그런 애매한 경계에 놓여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경을 집중해서 사진밑에 흐르는 작가의 세계를 파고 든다면 객관적으로 밝혀낼 수 있습니다.

5)숭고에 대하여

92년 범민족대회때의 일입니다. 원래 중대에서 대회를 하기로 했다가 공권력의 침탈로 부득이 서울대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스피커며 음향시설도 제대로 준비 안되고 사람들은 산을 넘어 간신히 모여 들었습니다. 공권력과의 숨바꼭질로 극도로 피곤한 상태에서 하늘도 무정하게 장대같은 비가 쏟아졌습니다. 피곤에 찬비까지 맞는 몸은 저절로 오돌오돌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괜히 이러고 있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 데려온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절망감까지 들면서 피곤이 엄습해왔습니다. 어찌나 피곤했던지 선채로 비를 맞아가며 앞사람에 기대 졸다가 함성소리에 깨어보니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오돌오돌 떨며 모여 있던 사람들의 체온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어깨에서 김이 무럭무럭나고 있었고 비가 아무리와도 이젠 추운게 아니라 후법지근 해지기까지 한것입니다. 집단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깨달았습니다. 고난을 전망으로 바꿔내는 민중의 힘앞에 차가운 장대비는 오히려 초라해 지고 말았습니다. 숭고미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숭고미는 사람들의 자주적인 이상보다 훨씬 높게 표현되는 미적현상을 얘기합니다.숭고도 미와 마찬가지로 대상이 아니라 숭고한 대상이 가지고 있는 숭고함을 가르키는 범주입니다. 숭고를 어떤것으로 이해하는가는 미학의 중요한 논의의 문제입니다.
인류역사의 초기 시대에는 숭고를 어떻게 생각했을가요? 큰바위나 위협적인 짐승,강이나 산처럼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에서 고대인들은 숭고를 느꼈읍니다. 이들에게 숭고에 대한 상징은 곧 종교였습니다. 자연적 대상으로부터 숭고의 지위를 물려받은 종교의 지도자들은 이런 공포의 대상을 극복하게 해준 사람들이 됩니다. 이슬람교의 마호멧은 모든 사물이 신의 대리자인 자기의 말에 따른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러자 그중 한사람이 당신이 진정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뒤에있는 큰산을 이앞으로 갖다놔 보시오라고 요구했습니다.그말을 들은 마호멧은 아마 당신은 신의 권능앞에서 무릎 꿇으리라 라고 하

고서는 돌아서서 산을 향해 엄숙하게 주문을 외우기 시작 했습니다.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죽이고 이 역사적인 신과의 만남에 온신경을 쏟는 눈치였습니다. 한참이 지나자 마호멧은 돌아서서 신을 향해 머리를 숙이라고 호령하면서 방금 신이 자기에게 교시하길 이산을 움직여 이앞에 갖다놓으면 여기있는 사람들이 모두 산에 깔려 죽을것이기 때문에 산을 움직일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때는 영생교 교주의 사기극 만큼이나 어처구니 없는 이 사건에 거기 서있던 사람들은 모두 머리를 숙였습니다.신과 대화할수있는 그의 능력 때문이었죠. 마호멧은 자연으로 부터의 공포를 뛰어 넘을수 있는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으로 되는 것입니다.이처럼 자신을 능력과 한계를 뛰어넘는 대상앞에서 사람은 두려움을 갖게 되고 이러한 두려움과 공포가 살려는 의지에 다다랐을때 사람은 그 대상을 향한 강렬한 충동,도전,외경,과 같은 상태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바로 숭고의 감정이 되는 것이지요.이에 근거하여 관념중심의 미학에서는 숭고를 정신적인 것으로만 보면서 사람의 공포감과 연결시킵니다. 대상이 인간을 압도할때 그에 대한 공포감을 느끼게 되며 이런 공포감을 극복하게 되면 삶에 대한 감정이 자극되어 그 대상을 외경하게 되는데 이것이 숭고라는 겁니다. 밤에 북한산을 가보면 여기저기 큰바위밑에서 촛불을 켜놓고 지성을 드리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무당이 되기위해 신기를 받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서 숭고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지고 자기한테 달려드는 조상신에 대한 공포입니다. 92년에 유행했던 종말론도 그렇습니다. 종말에 대한 공포가 그들에겐 숭고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일본인들의 신사의식도 그중하나입니다. 일본인들은 천황과 같은 절대자에 맹목적으로 헌신하고 투신하는 속성이 있습니다.그 대상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않고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존재로 느껴지는 대상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맥아더가 극동사령관으로 일본에 있을 때 천황을 대신해서 그를 숭배하게 됩니다. 관념중심 미학에서 얘기하는 숭고는 인류가 세계를 상징

과 비유를 통해서만 인식할수 있었던,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던 시대조건에 근거해서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인류역사가 발전된 이후에도 계속 남아있습니다. 과학이 가장 발전된 나라인 미국에 역설적으로 가장 많이 존재합니다. 폭력영화나 공상과학영화가 그것입니다. E.T는 외계인에 대한 숭고의 감정을 만들어 내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E.T에 대한 숭고는 E.T를 현실로 만들어낸 헐리웃에 대한 숭고로 이어집니다. 미국은 관념론적 숭고를 벗어나게 해준 엄청난 과학의 성과를 다시 헐리웃에 관념론적 물신숭배로 되돌려 놓은 것입니다. 헐리웃은 그래서 역사 퇴보의 산물인 관념중심의 미학을 생산하는 전초기지입니다.
신과 관념을 부정하고 세계를 물질적으로 바라보려한 사람들은 숭고를 달리 해석했습니다. 바위에 기도하는 것은 분명 허구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혀 뜬금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작은 돌맹이에도 신은 깃들어 있다고 생각할텐데 왜 작은 돌맹이는 화단의 장식용으로 갖다놓고 즐기려하고 큰바위 앞에서는 기도를 하는가?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에서는 발을 담그고 자연을 즐기는데 태종대밑에서 거대하게 소용돌이 치는 파도를 보면서는 자살충동을 느끼게 되는 걸까? 답은 양에 있었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현재 상태보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이 양적으로 거대하게 압도할때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초기에는 그것이 물질적 대상에만 존재하는것으로 생각했지만 사람의 주관적 상태와 무관하게 물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보게 되고 여기서 주체의 현실보다 훨씬 뛰어 넘는 이상이 대상에 담겨있을때 숭고를 느끼게 된다는 사실을 밝혀 냈습니다.이로써 물질중심의 미학은 두려움 때문에 칼을 든 강도가 숭고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양적으로 크다고 해서 입 큰 개구리가 숭고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재와 이상의 변증법에서 이상의 양적인 압도가 숭고의 원인이라는 생각

은 인간의 이상에 대한 정확한 해명을 결여하고 있었습니다.인간의 가장 숭고하고 높은 이상은 사회주의,공산주의 체제의 완성 이라고 생각한 소련이 스탈린 이후 체제 유지를 위해 사람을 획일적으로 통치 함으로써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는 더이상 사람에게 숭고한 이상으로 되지 못했습니다.그들은 물질세계와 체제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 즉 민중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중심의 미학에서는 숭고가 대상이 사람의 자주적 요구를 훨씬 높게 실현하는것이라는 새로운 견해를 내어 놓았습니다. 물질중심의 미학을 계승한 이 견해는 실재와 이상의 변증법에서 이상의 정확한 내용이 사람,민증의 자주적 요구라는 것을 밝힘으로서 이전의 견해를 혁신 하게 됩니다.사람의 자주적 요구란 사람,민중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며 사회 역사 세계의 주인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숭고는 사람의 자주적 요구라는 내용을 가질때 정확한 내용으로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이상을 높게 실현하기 때문에 숭고함을 느낀다는것에는 양은 표현되어 있는데 방향은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어 거대한 구름을 만드는 사진이 발표되었을때 어떤 사람은 과학기술이 일본제국주의를 멸망케 한데서 원자폭발에 숭고함을 느꼈지만 대부분은 원자탄이 앞으로 인류에 끼칠 악영향에 대해 공포감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상에 대한 정확한 방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민중의 자주적 요구라는 내용을 가질때 이런 오류와 혼란을 극복할수 있습니다. 앞서 얘기했던 체제의 문제도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그것이 사람,민중이 주인으로 설 수 있는 체제 여야 한다는 방향을 정확히 가져야 합니다. 민중을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체제나 사회구조는 결코 숭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자연에 대해서도 설경을 보며 누구나 숭고의 감정을 느끼는것은 그것이 자연을 개척하고자 하는 모든 인간의 지향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본가나 지배계급에게는 자연

이 자신만의 이윤이나 지배적 이익을 높게 실현하기 위한 대상일 뿐이지만, 민중에게는 모든 인류의 삶의 질을 높게 실현할수 있는 대상으로 된다.
숭고는 그 속성상 보다 높은 요구와 이상이 실현될 미래에로 지향하는 것이 특징입니다.이처럼 숭고가 미래적인 성격을 띠며 보다 높은 요구를 실현하는데 있고 미의 기준이 민중의 자주적이상을 척도로 한다면 숭고는 민중의 자주적 요구를 끊임없이 높여주는 현상이 되는것입니다.
숭고는 또한 낡은것 보다는 새것에 특징적인 현상입니다.왜냐하면 숭고는 사회미학적 견지에서 보면 현재의 미적이상에 적응할 뿐아니라 무한한 발전가능성과 전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낡은것에서가 아니라 새것에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숭고는 고유한 정서적 특징을 가집니다. 미가 기쁨 환희같은 미적 쾌감을 정서적 특징으로 한다면 숭고는 단순한 미적 쾌감이 아니라 사람들을 무한히 격동시키고 높은 정서적 앙양을 일으키게 합니다.그래서 경탄의 감정을 가지게 되며 높은 미적 흥분에 휩싸이게 됩니다.또 그러한 높이에 다다르게 하려는 열렬한 지향과 정서적 앙양을 불러일으킵니다. 숭고는 이러한 정서를 토대로 자기앞에 조성된 어떤 난관도 극복하고 모든것을 다바쳐 도전하고 투쟁하도록 고무시킵니다.
숭고는 구체적으로 고상한것, 위대한것, 장엄한것으로 표현됩니다.

1.숭고와 미의 관계

숭고는 본질적으로 미의 범주에 속합니다. 숭고는 아름다운 이상을 표현하는 독특한 현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숭고가 미와 동일 한것은 아닙니다.예를들어 미가 이슬을 머금은 꽃이라면 숭고는 광활하게 펼쳐진 설경이라고나 할까요. 모든미가 숭고한 것이라고 할수 없지만 모든 숭고는 아름다운 것입니다.숭고는 인간의 자주적 요구가 실현된 조건에서는 미로 전화 됩니다.
유홍준 교수가 극찬한 불국사의 돌로 쌓은 축대는 불국사를 지은 표훈국사등이 부처님의 나라를 어떻게 형상화 할까를 고민하다가 부처님이 득도한 수미산을 형상 하기로 하고 수미산을 형상 하는데 수미산은 자연이니까 자연을 형상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연석을 깍지 않고 있는 그대로 모양을 맞춰가며 쌓아 올린후 그렝이를 해서 장대석을 수평으로 고르게 된 것입니다.때문에 축대는 단순히 절을 짖기위한 토대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수미산 즉 부처님의 나라를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숭고한 종교감정을 범접할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대상이었습니다.그러나 종교적 환상과 권위가 없어고 입장료만 내면 들어갈수 있는 오늘날 석축은 자연과 인공의 절묘한 조화로 우리의 미적 쾌감을 주는 대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2. 사회생활에서의 숭고
숭고는 자연보다 사회에서 보다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사회 생활이란 기본적으로 자주적인 요구를 걸고 싸워나가는 과정이며 터전이라고 할수있습니다.그래서 자연과의 싸움은 노동이나 생산활동이 되고 사회관계 속에서의 싸움은 사회운동으로 나타납니다.투쟁하는 생활은 현재의 미적요구에도 맞을뿐아니라 그들을 보다 높은곳으로 이끌어가는것으로 하여 숭고한 감정을 일으킵니다.

3. 자연에서의 숭고
자연에서의 숭고는 인간의 무궁무진한 창조적 힘과 자연의 무한한 전망과 발전가능성을 암시해 주며 그것으로 사회미학적인 의의를 갖습니다. 자연은 자연의 무한성과 영원성을 확증해 주므로써 사람에게 큰희망과 포부를 주며 그걸 정복하려는 지향과 투지로 불타게 하므로서 숭고한것으로 됩니다. 이런경우에는 장엄하다고 표현되겠지요.
자연은 또한 인간의 창조적 활동에 의해 정복되고 개조된 자연에서 인간의 무궁무진한 창조적 힘과 인간의 위대함을 보게 됨으로서 숭고한 감정을 불러 일으킵니다.
숭고는 사람,민중이 자신의 자주적 요구를 실현하고자하는 높은이상과 의지를 갖게 하며 그 실현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려는 정서적 충동과 격정을 만들어 냄으로서 삶에서 중요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러한 숭고미를 찍기 위해서는 자신부터가 숭고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생각하며 다음에는 숭고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영웅적인 것에 대해서 얘기 해 보겠습니다.

6) 영웅적인 것
80년대의 사진들, 특히 시위 사진중 대다수는 영웅적인 노동자 ,투사의 모습을 찍는데 바쳐졌습니다. 이문열씨는 영웅시대라는 소설로 이를 비꼬았고, 90년대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많은 작가들은 영웅들을 패배한 개인의 허무와 우울로 바꾸어 갔습니다. 영웅의 문제는 우리 스스로를 뒤돌아봐야 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영역인 것 같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아직도 우리는 영웅을 필요로 하는 시대에 살고 있고 또, 영웅들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영웅하면 비범한 기질을 가진 걸출한 사람이 생각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질이 무엇을 위해 비범하며, 누구를 위해 걸출한가에 대한 답 없이 영웅을 얘기할 순 없습니다. 영웅적인 것은 용감하고 대담한 행동 자체가 아니라 집단을 위해 모든 것을 다바쳐 헌신적으로 일하고 싸우는 미로 표현되며 사람들을 적극적 행동에로 추동시키는 미적 현상입니다. 영웅적인 것은 우선 민중의 역사적인 위업을 위한 숭고한 정신과 세계관에 기초하여 발현되는 미적 현상 입니다. 이런 숭고한 정신없이 개인의 부귀 공명을 위해서 취해진 행동은 아무리 적극적이라 해도 사람들에게 공감을 줄수 없으며 오히려 혐오감을 줍니다.
영웅적인 행동은 의지력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의지력은 신념에 기초하며, 신념은 세계관에 기초합니다. 세계관이 확고히 서지 않으면 자기 행동의 정당성과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질수 없게 되며 행동의 일관성을 유지되지 않으며 시련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영웅적인 것이 숭고와 유사하면서도 다른점은 사람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미적현상이란 점입니다. 숭고는 적극적인 행동을 언제나 전제로 하지 않으며 주로 정신적인 미로 나타납니다. 그에 비해 영웅적인 것은 사람의 생활에서 발휘되는 적극적인 활동과 위훈에서 표출되며 그것을 직접 따라 배우도록 추동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지난시기 영웅적인 것을 비범한 행동으로 이해하는 경향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영웅적인 것은 숭고와는 달리 사회 현상에만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자연은 목적의식적인 행동을 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동으로 추동시키는 것은 영웅적인 것 뿐아니라 고상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상한 것은 내면 세계에 깊이 작용하여 점차로 행동적인 것이 된다는 점에서 직접적 행동에로 추동시키는 영웅적인것과 다릅니다. 또한 미나 숭고와 비교해 볼 때 영웅적인 것은 자체에 그것을 포함하면서 가장 높은 형태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7) 비극에 대하여

비극하면 우선 죽음이 생각납니다.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중요하기 때문에 죽음은 무조건적으로 비극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극이 아니라 단지 두려움입니다. 사람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인간적이지만, 사람의 본질을 놓치므로해서 추상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맙니다. 모든 죽음이 비극이 아닌 것은 예를들면 안중근의 죽음과 이등방문의 죽음에서 드러납니다. 안중근과 전봉준의 죽음이 비극적인 것은 우리의 이상을 구현하고 그것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전 생애에 걸쳐 우리의 사랑과 존경과 공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비극은 자주적인 이상이 무참하게 유린될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비극적 생활자체는 인간이 바라는 삶이 아니지만 비극을 체험하는 비극적인 사람은 우리에게 동정의 대상이 됩니다. 비극은 자주성을 유린당한 민중들이 겪게되는 고통과 죽음이며 그로하여 사람들에게 동정과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미적 현상입니다.

비극적인 것은 나름대로의 정서적 특징이 있습니다. 자주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몸부림치다 죽어간 전태일에게는 동정과 연민을 느끼지만 그에게 죽음을 강요한 사회에 대해서는 분노를 느끼게됩니다. 비극적 정서는 민족적, 계급적 성격을 갖습니다. 탄압과 지배를 통해야만 자기존재를 유지할수 있는 민족이나 계급에 있어서는 비극적 감정의 색채가 비관과 공포,우울,허무의 감정으로 받아들여 집니다. 그러나 탄압과 지배를 받는 민족이나 계급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비애가 아니라 비분의 감정으로 나타나며 증오의 감정으로 승화 됩니다.
비극적인 것은 또한 비극적 대상의 구체적 특성에 따라 매우 섬세하게 나타납니다. 비극은 대상이 아니라 과정의 특징을 규정합니다. 어떤 대상도 그 자체가 비극적이거나 희극적일 수는 없습니다. 비극이나 희극적 성격은 오직 어떤 행위만이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비극이나 희극적인 것은 행위 뿐아니라 세계 자체까지도 포함하는 미나 숭고의 영역보다 훨씬 협소합니다.
비극은 낙관적입니다. 왜냐하면 자주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주인공의 죽음이 그의 이상의 몰락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인공의 죽음은 그의 도덕적 승리와 정신적 불멸성을 의미하며, 불굴성과 장차 다가올 승리의 화신이 됩니다.

8) 희극적인 것

희극적인 것 하면 우선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마 우스운 것 일 겝니다. 그러나 우스운것과 희극적인 것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갖습니다. 우스운 것은 심리적 생리적 현상이고 희극적인 것은 미적 현상입니다. 희극적인 것이 인간만의 능력인데 비해 웃을수 있는 능력은 일부 고등동물에게도 존재 한다는 사실입니다. 웃음과 미소는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으로 위장하여 모순되는 현실이 대상입니다. 위장되고 모순된 현실의 본질이 밝혀질 때 생기는 만족감이 희극적인 것이 됩니다.
희극적인 것은 비극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주적 이상과 현실의 충돌로부터 비롯됩니다. 비극이 현실에 의한 이상의 패배로부터 비롯 된다면, 희극은 이상에 의한 현실의 패배로부터 비롯 됩니다. 자주적 이상에 모순되는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양 위장된 현실을 폭로하고, 그 모순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은 부정의 극복과 해방을 의미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희극적인 것을 통해서 환기되는 웃음이 지닌 교육적 힘이 있습니다. 희극적인것의 본질은 자주적 이상으로부터 현실의 한계와 장애가 부정되거나, 비웃음 받거나, 심판되거나, 폭로, 비판, 거부되는데 있습니다.

1. 희극의 여러 가지 형식

ㄱ.놀라운 것
잡색은 풍물굿을 할 때 악기를 치는 치배 말고 분장을 하고 나와 안끼는데 없이 간섭하고 다니며 사람들의 신명을 긁어 내고 웃음을 자아내는 배우입니다. 평소에 조용하던 자기 남편이 갑자기 풍물판에 여장을 하고 나타나서 여인네 처럼 배배꼬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참다 참다 웃음을 터트립니다. 언제 저런 면이 있었나 싶지요. 희극은 이처럼 일상적이 아닌 한번쯤 그렇게 되보고 싶은 것을 현실에서 행할 때의 놀라움과 기이함으로부터 생깁니다. 음악에서는 리듬의 흐름이 갑자기 느려지거나 갑자기 빨라지면서 생각지도 못한 순서가 이어질때 희극적이 됩니다. 좌도 임실지역 -풍물의 겐지겐 가락이나 아기 코끼리의 걸음을 흉내낸 영화 음악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기이한 것이 기이해지기 위해서는 첫째, 전혀 기이할 것이 없는 일상의 맥락이 존재해야 합니다. 사무실에서는 대단히 웃기는 사람이었는데 큰 자리에 세워놓으면 전혀 웃기지 못하여 안타까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무실에서의 일상적인 분위기에서 전혀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은 행동이나 표현을 했을 때 그것이 사람을 웃기는데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그들의 일상적인 흐름을 발견하고 그 상황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기발한 것을 내어 놓아야 하는데 그렇게 할려면 목적의식적인 노력이나 뛰어난 감각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기이한 것은 나름대로의 법칙과 질서를 가지고 있는것이어야 합니다. 말꼬리 이어가기 놀이를 봅시다. 비누-누전-전기-기술-술상-상술-술자리…앞 사람이 말한 끝말과 같은 말로 시작되는 단어를 찾아 이어가는 이 놀이는 단어와 단어간에 전혀 내용적 공통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형식적 공통성만이 있습니다. 현실은 이런 형식적 공통성을 인정치 않기 때문에 이를 가능케하는 놀이공간이 기발한 것이 되고 재미있어 지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형식적일 뿐이지만 나열되는 단어에 깔려 있는 무의식적 경향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무의식을 색다르게 인식할 수 있는 방법과 나름

대로의 질서있기에 이것은 기이한 것으로 됩니다. 놀라운 것, 기이한 것은 소련의 미학자 바흐찐에 의해 희극적인 것의 최초 형태이 밝혀 졌습니다.

ㄴ.익살
노래율동할 때 특별한 내용과 연결되지 않으면서도 그 행동이 웃음을 자아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이는 유랑극단이나 써커스의 어릿광대의 몸짓이 웃음을 일으키는것과 유사합니다. 익살은 의미 없는 우스운 행동을 통해 희극효과를 얻으며, 최소한의 정신적 내용만을 보여주는 형식입니다. 익살은 어린아이한테서 많이 발견됩니다. 어린시절의 특징인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초기시대에 발전했다가 역사가 흐르고 인류의 정신세계가 성숙 단계에 이르면서 소멸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한편으로 반복 되는법. 새로운 집단에 의해 새로운 문화가 발생하는 초기시절에는 익살적 형태의 희극요소가 나타납니다. 자신들 끼리는 대단히 희극적이지만 남들이 볼때는 유치해 보이는 일이 발생하는 것은 이런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방된 낡은 문화가 아니라 새로운 문화라는 증거 이기도 합니다.

ㄷ.역설
흥부전을 읽다보면 착한 흥부를 칭찬하는 내용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실사구시적이며 생활력있는 신흥 계급 놀부를 칭찬하고 오히려 순박할 뿐 무능하기 짝이 없는 흥부적 인간형에 대한 강한 비판이 깔려있습니다. 모나리자나 다빈치 말년작인 세례자 요한 같은 작품은 찬란한 르네상스의 인문주의 문명을 상징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르네상스의 이성주의가 다다를 세상의 결과에 대해 말세적 염세주의와 통렬한 조소가 그 묘한 미소마다 깔려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세계와 속으로 추구하는 내용이 다르다거나 서로 대립되는 것 같은 형상을 혼합시킴으로써 도출되는 특수한 효과와, 이처럼 복잡하고 미묘하게 짜여진 구조등은 고도의 문명발전단계에서나 가능한 형식입니다. 그래서 진리인 것 같은것에서 위선을, 지성적인것에서 무식함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으로부터 전혀 중요하지 않음을 폭로 합니다. 역설은 가장 좁은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폭발적 모순을 표현합니다. 자기를 해고시킨 인사부장에게 찾아간 위원장이

{인사부장님께 정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덕분에 맘대로 노동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노조가 와해되면 제일 손해보는 사람이 누군줄 아십니까?}
{그야 위원장 당신이겠지}
{아뇨 저는 제일 이익을 봅니다. 이제 해고 까지 됐으니 노동운동가로 행세 할수 있게 되서 맘먹기 따라서는 출세길이 열리지만, 인사부장님은 장기근속자여서 정리해고 대상1 순위 아닙니까? 그런데 노조가 와해되면 아무도 싸워줄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어떤 사람의 역설은 냉소로 이어져 독설에 가까운 경우가 있고, 어떤 역설은 예리하고 모욕적이지만 분노는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겐 간단한 익살이나 노골적인 풍자보다는 언중유골의 유연하면서도 강직한 복합적 희극의 형태가 익숙한 것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코메디 프로 미스터 빈이 익살을 추구하는데 비해, 챨리 채플린은 익살로부터 역설로 고양하는 법을 충분히 이해한 예술가 였습니다. 누가 더 머리속에 미적 쾌감을 오래도록 남게 하는가는 현대적 미감을 어떻게 구현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ㄹ.해학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님과 나 사이의 이별이라는 부정적 요소를 인정하고 긍정할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비판이 원망투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심각하고 신랄한 것이 아니라에 부정적 요소에 대한 유쾌한 비판입니다. 이것이 해학과 풍자의 차이입니다. 또한 비웃음(냉소)이 사람의 비속하고 배은 망덕한 속성에 대해 나타나는 태도라면, 해학은 착한 사람의 작은 약점이나 실수, 고의가 아니라 능력이 부족하여 자주적 이상에 맞지 못하는 속성을 나타내는데 대한 태도입니다. 비웃음이 비난과 무례로 파괴적이라면 해학은 즐겁거나 아니면 아리랑처럼 슬플수도 있지만 상처나 모욕을 주지는 않습니다.

ㅁ.인용,모방
훌라송이란 곡에 붙여진 노가바(노래가사바꿔부르기)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노동자다 좋다좋다.
같이죽고 같이산다 좋다좋다.
무릎끓고 살기보다 서서죽길 원한다.
우리들은 노동자다.}
패로디라고도 많이 얘기하는 이와 같은 방법은 실제나 혹은예술적 행위에 대한 단순한 모방입니다.형식은 그대로 보존하고 내용을 달리할 때 패러디라 하고, 반대로 내용은 그대로 두고 형식을 달리하는 것을 트라베스티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모방은 대상에 대한 비판으로 변화 됩니다. 인용이 악의에 차있건, 선의에 차있건간에 인용되는 대상에 비판 받을 만한 약점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가장 충격적인 인용이었던 마르셀 뒤샹의 수염달린 모나리자의 경우는 모나리자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동성애적 속성을 끄집어 내고 있습니다. 인용꾼들은 이미 있는 대상의 약점을 찾아내어 과장을 통해 우습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점이 역설과 유사한 점입니다. 그러나 인용은 자신의 목적을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 합니다. 이점이 역설과 다른 점입니다.

2002.12.1 수정.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