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남한사진문화연구2001/10/01

1)남한사진문화연구

가) 남한 초기 사진의 전개 ― 보는 방식의 정착 ―

(가) 들어가는 말
서구에서 사진의 발명은 르네상스 이래 꽃피기 시작한 합리주의와 과학정신을 그 내용으로하는 인문주의의 성과였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는 서구인의 사고와 의식에 있어 전과 후를 갈라놓을만한 일대의 전환기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근대와 전근대를 나누는 기점으로 보여지는데 그런 의미에서 사진은 정확히 근대성이 산물이었다. 사물을 정확하게, 분석적으로 바라보는 근대적인 시각은 전래되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를 광학과 화학분야의 과학적 성과인 렌즈나 감광재료의 발명과 만나게 했다. 근대 이전의 신성중심의 세계가 만물을 덧없이 사라지는 신의 그림자로 보았을 때, 현실을 뚫어지게 직시하고 그것의 그림자를 종이나 금속판에 영속적으로 박아놓고자 하는 사진의 발명이야말로 낡은 세계에 대한 가장 불경스러운 도전이 된 것이다. 이렇게 1839년 프랑스 왕정협회가 사진의 발명을 공포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사진기라는 기계의 도래를 알리는 것인 동시에 ‘새로운 보는 방식’의 도래를 알리는 것이었다. 인문주의의 또다른 성과인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가 그랬던 것같이 전혀 새로운 시각매체인 사진의 발명 또한 이후 서구사회의 지식의 형태와 문화적 관습, 행위를 규정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사진이 복제기술 이전에 하나의 보는 방식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한국의 초기 사진사를 읽게 되었을 때 그 출발점에서부터 쉽지 않은 고민거리과 부딪히게 됐다. 그것은 한마디로 사진이 서구사회에서 빚어놓은 양상으로 미루어 볼 때 사진기의 도입으로 ‘우리가 사진을 찍게 되었다’고 하는 행위와 관습의 변화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 부분은 구한말 개항기에 산발적으로 있었던 외국인들에 의한 한국사진의 작업이나 진보적인 개화파 인사들에 의해 카메라가 도입되는 일련의 과정들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있어서의 사진의 도입은 맥루한이 그의 ‘미디어의 이해’를 통해 지적한 것같이 새로운 미디어의 도래, 즉 새로운 정신이 카메라라고 하는 인간시각의 확장자를 통해 바라보는 방식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구에 있어서 그러한 방식은 인간중심의 인식적 전환을 통한 합리주의와 과학정신의 토양에서만 가능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초기한국사진사를 바라보는 작업은 만만치가 않다. 우선 초기 사진과 관련된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사진의 본질을 딱딱한 기계의 껍질속에 담긴 하나의 정신 혹은 방식으로 보는 것이 그다지 새로운 바랑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진적 전통에서는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의 취지는 사진을 하나의 ‘보는 방식’으로 보고, 개화기에서 일제 강점기와 해방전후의 한국사진의 전개과정을 통해 그 수용과 정착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나) 사진의 전래
분단 이전의 한국사진사를 집중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최인진씨는 우리나라에 사진이 처음 도입된 시기를 김규진이 일본 유학에서 귀국해 소공동 자택에 천연당 사진관을 개업하게 되는 1903년으로 추정하여 보고 있다. 그 이전에 이미 김기수, 지운영 등에 의해 설립된 초기 영업사진관 형태의 촬영국들이 있었지만 이러한 초기의 시도들은 사료적인 가치만이 인정될 뿐 외세에 저항하는 갑신정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파괴됨으로써, 이후의 사진사에서 철저히 단절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그에 앞서 오경석, 김기수 등 중국에 왕래가 잦았던 역관들이 들여 온 외국인이 촬영한 초상사진들과 사진에 관한 기록들이 있었고 개항을 전후로 해서 신미양요, 병인양요를 통해 외국인들의 소박한 형태의 전쟁다큐멘터리 사진 작업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인진씨가 김규진의 천연당 사진관을 한국에 있어 본격적인 사진도입의 기점으로 보는 이유는 천연당 사진관이 그 영업적인 성공이나 기획력, 홍보 등에 있어서도 민간인을 상대로한 사진의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진도입의 기점문제가 한국사진사를 정리하는데 중요한 문제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이 글에서의 관심사는 사진의 도입시기를 몇 년으로 잡느냐라는 문제보다는 그러한 과정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사진이라는 전혀 새로운 서양문물에 대해 일반 대중들의 태도는 어떠했으며, 또 사진의 도입과 정착을 가능케하거나 그에 저항했던 시대정신의 내용은 무엇인가하는 점들이다. 왜냐하면 서론에서도 밝혔듯이 사진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새로운 정신이며 그에 따른 ‘보는 방식’이라고 할 때, 우리나라에 있어 사진 도입의 진정한 의미는 서구문물의 피동적인 이식이 아니라 그러한 정신을 추적하여 사진적으로 보는 방식을 주체적으로 수용 혹은 재창조하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진행과정을 가름하는 척도로서 사진과 관련된 내부적 조건이 어떤 식으로 성숙해 갔는가를 짚어가는 것이 타당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 사진도입의 사상적 맥락―근대정신의 맹아로서의 실학정신
사진기의 전래에 앞서 사진원리의 도입은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다.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 수록된 칠실관화설이나 이규경의 오주행문장전산고에 나와있는 영법변증설은 우리나라에서 서구의 카메라 옵스큐라 원리에 대한 최초의 기록들이며 이들 실학파 학자들의 이용후생정신이 서구문물에 대한 과학적 탐구와 적극적 수용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조선시대의 성리학 중심의 유교적 전통과 그에 따른 오랜 쇄국정책은 이질적인 서구문물에 대해 위정척사라하여 표피적인 저항을 보였고 서양문물의 수용을 곧 외세의 침입으로 보았기 때문에 철저히 봉쇄하려 했다. 그러나 밑으로부터 올라오기 시작한 신흥계급에 의한 봉건적 신분사회에 대한 위협적인 조짐, 또 중국을 통해 조금씩 유입된 서구의 신문물 등은 영 정조 시대에 와서 어느정도 성리학 중심의 경직된 사고에 이완을 가져오면서 규장각을 통한 신학문 연구의 기반이 마련되고,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을 기본정신으로 하는 실학이라는 현실주의적 학문전통을 꽃피게 한다. 이때 들여온 원경설, 천리경설, 천측략설 등이 실학자들 사이에서 연구되는 가운데 이규경의 영법변증설은 소현세자가 중국에서 들여온 아담 샬의 만원경설에 기초해서 전체적인 광학 분야의 원리규명과 카메라 옵스큐라가 맺는 전도된 영상의 원리를 밝해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반해 정약용은 칠실관화설에서 카메라 옵스큐라에 의해 투영된 사물을 화폭에 그대로 옮기는 방법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이점은 정약용이 서화가로서 또 당대의 중요한 화론가로서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나, 중요하게는 그 저변에 이미 시작된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와 그에 따른 예술정신의 변화를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이전의 한국화 전통에서 관념산수, 문인화 등으로 나타나는 사의(寫意)정신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는 실득, 사진(寫眞) 정신에 의해 위협받고 있음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당시 실학파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화풍은 그 시기의 진경산수, 풍속화, 동물화에서 보여지듯, 자연주의적 기법 아래 막 싹트기 시작한 사실정신을 담고 있었다. 대상을 분석적인 눈으로 관찰하고 보여진 그대로를 옮겨놓으려는 진보적인 화가들의 요구야말로 카메라 옵스큐라라는 서양의 도구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있어 근대적인 전환점을 예고하는 듯했던 이 모든 변화의 움직임들은 머지않아 한계점에 부딪혔다. 가장 혁신적인 화론을 전개했던 정약용의 경우가 그렇듯이 대부분의 진보적 엘리트들은 개인의 작품과 이론에서 괴리를 보였고 조선후기의 정치권력이 또다시 보수화로 경변함에 따라 문화적인 복고가 진행되면서 미술계도 김정희류의 복고적 문인화풍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따라서 모처럼 정조와 실학을 거쳐 진행된던 학문적 르네상스는 대중적 확산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중도하차하게 되는데, 사진과 관련해서도 카메라 옵스큐라에 관한 연구 광학에 관한 관심들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연결되지 못한 채 이후, 실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개화파 엘리트들에 의해 사진을 도입하게 하는 사상적 토대로만 작용하게 된다.

(라) 초기사진활동이 주체―진보적 엘리트;위로부터의 수용
우리나라에 처음 사진기가 소개된 것은 개화파 인사들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서구문물의 수용에 적극적인 당시의 진보적 엘리트들로서 중국이나 일본 등지에 왕래를 통해 서구문물과 꽤 친숙해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사진의 도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은 대부분 화원출신이거나 그밖에도 서화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었다. 최초의 촬영국을 설립한 김용원과 지운영은 *(최근 미술평론가 윤범모씨에 의해 1883년 지운영보다 1년 앞서 사진관을 개설하고 촬영활동을 펼친 서화가 황철이 최초라는 주장이 나왔다.) 각각 부사과의 화원과 당대에 이름있는 서화가였고, 초기 사진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김규진 또한 한때 영친왕의 그림선생으로 나중에 천연당 사진관 내에 서화연구회를 두어 활동하기도 했다. 이들 초기 사진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간추려 보면, 첫째, 실학적 전통의 맥을 잇고 있는 개화파였다는 점, 둘째, 당시 관직에 있으면서 공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사진과 접하게 되었고 후에 실질적으로 사진술을 들여왔다는 점, 셋째, 그림, 서예, 금석학 등에 조예가 깊은 사대부 출신의 서화가나 화원이었다는 점, 넷째, 훗날 사진을 들여오면서 영업사진관을 거점으로 활동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변을 겪으면서, 혹은 개인적인 이유로 나중에 다시 문인화풍의 서화로 복귀했다는 점 등을 들 수가 있다.
여기서 초기 사진활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서화와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은 서양의 경우에서도 초기 초상사진가들이 대부분 전직 화가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사진이 당시 회화와 밀접한 연관 속에서 발전해 온 것을 볼 때 그리 새로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인문주의의 합리적 사고와 과학적인이 사진의 발명에까지 이르게한 서양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은 사진을 하나의 새로운 정신이나 보는 방식의 전환으로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정신적 토대가 극히 빈약한 시점에서 사진이 도입됐다고 하는 점이다. 다시말해 서구 사진의 발전과정을 시각 혹은 시의식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회화의 발전과정과 자연스레 연관시켜 볼 수 있다면 우리에게 있어 사진의 도입은 하나의 이물질을 이식시켜 놓는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우리에게도 한동안 실학정신에 의한 사실적인 화풍이 있었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얼마안가 복고적인 화풍으로 선회하였고 그 정신적 맥은 회화에 있어 사실상 단절을 겪게 되었다. 이같은 상황을 사진의 도입이라는 사건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때 사진을 하나의 단순한 복제기계나 기술로 인식하고 있었던 초기 사진가들의 생각은 당연한 결론일 수도 있다. 사진을 하나의 기술로만 보는 관점은 초기 사진가들로 하여금 어떠한 표현상의 노력이나 창조적 고민도 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했고, 단순 복제작업만을 반복케 했다. 한마디로 당시의 사진가들은 사진기를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찍어야 할 지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인데 이렇게 사진이 의식없는 단순작업으로 전락하고 말자 처음에는 의욕적이었던 사진의 선구자들도 제각기 이전의 서화활동으로 복귀하고, 그에따라 처음에는 상층에 속했던 사진가의 지위도 장인의 위치로 떨어지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결과적으로 우리 사진의 발전을 오랜기간동안 방해하고 지연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마) 초기사진의 수용자―혼을 빼앗는 기계
사진이 처음 도입된 이후 오랜기간을 두고 계속된 민중차원의 절대적인 거부감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비롯됐다. 그 하나는 보수적 정치세력의 쇄국이데올로기에서 파급된 다분히 민족주의적인 발상인데 사진을 곧 외세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표피적인 저항으로 반응했던 점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에 사진이 도입된 것이 대부분 일본을 통해서였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경계는 곧 사진에 대한 저항감으로 표출됐던 측면이 강하며 그러한 것은 갑신정변 기간에 분노한 민중에 의해 김용원과 지운영의 촬영국이 보복의 대상이 됐던 점을 보더라도 분명해진다.
다른 하나는 당시 민중의 삶에 뿌리깊게 퍼져있었던 샤머니즘적 관습의 영향을 꼽을 수 있다. 최인진씨는 우리 사진의 정착을 저해했던 샤머니즘의 영향에 대해 이규경의 개화백경에 수록된 사진기편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893년 버드 비숍 여사가 한국에 온 후 사진을 찍으려 했을 때 모두 도망쳐서 인물사진 한 장 찍지 못했다. 그것은 사진이 자기의 목숨을 빼앗가 가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사진기에 자기의 금지가 비치기만해도 1년 내에 죽고 집이 비치면 가문이 멸망한다고 믿었다. 게다가 이와같은 생각은 나무나 성벽 등 풍경에까지 미쳐 사진에 찍히면 1년 내에 모두 시들어 버리거나 무너진다고 믿었다. 또 사진을 자주 찍으면 명이 단축되고 3명을 촬영하면 가운데 사람은 죽으며 부부가 같이 사진을 찍으면 이별한다는 등의 미신 때문에 사진의 정착에 방해가 되었다.”
사진을 외세와 동일시하면서 경계했던 것이나 샤머니즘적 관습에서 비롯된 불합리한 오해는 그 동기나 배경을 달리함에도 불구하고 초기 사진의 정착과 발전에 있어서는 다같이 전근대적인 한계로 작용하면서 정상적인 발전을 지연시키는 요인이 됐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바) 일제 강점기의 한국사진―내용없는 양적 팽창의 시기
한국사진사에서 사진의 대중화가 이루어진 것은 안타깝게도 일제 강점기를 통해서였다. 사진과 관련해서 이 시기에 이루어진 중요한 변화로는 사진을 취미나 예술활동으로 전개하는 아마츄어 사진가들의 활동이 왕성했다는 점, 사진기와 감광재료의 직수입상이 생겨 수급이 원활해졌다는 점, 한국인중에도 외국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생겼다는 점, 그리고 경성사진사협회 등 영업사진가들의 권익단체가 결성됐다는 점과 YMCA 등에서 근대적 형태의 사진교육이 진행됐다는 점 등을 들 수가 있다.
이러한 객관적 조건들의 변화가 대부분 일본이 영향이며 그것이 사진의 양적 팽창과 대중화에 결정적으로 작용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사진재료상이나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공모전들이 많이 생김으로 해서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활동을 크게 자극하게 되고 그것은 잘하면 사진의 질적 변화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는데 그 원인을 추정해 보면 첫째, 사진의 이해와 창조적인 수용을 위해 필수조건인 근대적 의식으로의 성숙이 자생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 둘째, 일제에 의한 강압적인 근대화가 사회 문화 각 분야에 파행적인 결과를 예견했다는 점, 셋째, 외국의 예술사조, 유파들이 우리의 현실과는 무관하게 무분별하게 들이닥쳤다는 점, 넷째 문화통치 기간에 설립된 민간신문들의 역할의 사진저널리즘이 정착에까지 미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일제말기의 탄압정치의 강화로 사진활동 또한 엄격히 규제됐다는 점 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통틀어 볼 때 사진이 전개 양식은 내용없는 양적 팽창으로 일관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동안 한국 사진은 전통적 산수화의 사진적 형태인 조잡한 풍경사진들과 일본에서 들어온 인상주의 기법의 회화주의 사진들이 주도했으며 이같은 미학의 부재현상은 민족의 해방기에 와서도 한동안 사진활동 전반에 걸쳐 방향성의 상실을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요소들을 찾아본다면 한국인 영업사진가들로 결성된 경성사진사협회의 강화회 활동, YMCA 주최로 사진의 계몽주의적 정보전달기능을 십분 이용한 한등회 활동 등을 꼽을 수 있겠고 이런 활동들은 예술로서의 사진의 모색, 하나의 보는 방법, 혹은 보여지는 방법으로서의 사진의 제기능에 대한 거의 최초의 본격적인 고민이라는 점에서 더욱 자세히 연구되어져야 할 것이다.

(사) 맺는 말
이제껏 간략하게 개화기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진의 전개과정을 ‘보는 방식’의 정착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봤다. 그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보는 방식’의 부재에 따른 방향성 상실의 역사였다. 또 그것은 사진의 도입단계에서 유교적 전통이나 샤머니즘, 합리적 정신의 결여 등이 청산되거나 발전적으로 전개되지 못한 채 일제 침략기를 맞아 부푼 흥분만을 안은 채, 여기 저기서 열린 광복사진 공모전이나 기념전시회 등을 통해 내용도 제대로 채우지 못한 사진들만이 쏟아져 나와 우리 사진계에 또 한번이 좌절을 맛보게 한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같은 한국 사진계의 방향성 부재는 거의 처음으로 리얼리즘 사진의 대안을 보여준 1948년 임석제 예술사진 개인전시회가 열리는 시점까지도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