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타리 창작교실2001/11/18

다큐멘타리 창작교실

다큐멘타리 교실

사진에 사람이 없다.

1. 다큐멘타리 사진의 개념

1) 쾌락 향유 – 취미
2) 인식 – 증명과 증거,
3) 가치 – 진실에 대한 해석
4) 변형, 개조 – 표현과 소유
5) 창작, 표현 – 이상의 표현,

2. 다큐멘타리 사진의 구조

1) 취미로서의 사진
취미는 자발성에 근거하여 생겨나지만 개인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소련의 심리학자 우스나제와 그의 제자들이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다양한 요인들이 미치는 영향하에서 인간의 심리는 늘 특정한 행위에 대한 준비상태, 즉 그 행위에 대한 선호 상태에 있다는 점과 이런 심리적 경향성이 태도, 행위자체에 본질적인 영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정향이론).
취미에는 첫째, 미적 만족을 얻으려는 데서 드러나듯 일정정도 쾌락적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작품을 통해 작가와 접하려는 준비가 되어있는데서 드러나듯 소통적 방향을 갖습니다. 셋째, 새로운 지식을 얻고자 하는 인식적 방향을 갖습니다. 넷째, 자신과 유사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데서 가치적 방향을 갖습니다. 다섯째로 취미로서 사진을 수용할 뿐 아니라 공동창작, 추창작이라 할 수 있는 창조적 방향을 갖습니다. 사진취미와 여가는 개인적이라는데 가장 큰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취미는 사회문화적 요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변덕스럽게 선택합니다. 우선 취미에서 주체화 원칙을 확인하는 일과, 주체가 실현될 수 있는 취미 방향간의 구조를 밝혀야합니다. 첫째, 취미에서도 주체적 태도는 개인주의적인 태도와 구별됩니다. 권력기구들과의 갈등속에서 자신을 방어하며 이를 위해 환경을 변화시키려는 강한 행위자의 원칙이 주체적 태도라면, 상황에 적응하여 자기만의 자연상태로 회귀하려는 것이 개인주의입니다. 주체는 개인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지만 특수한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취미는 일상적이고 심지어는 습관적인 성격을 갖기에 취미 방향들은 쉽게 타성화 된다는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사진취미는 주체보다 기계 자체의 속성에 편입되기 쉬운 형태이기에 이런 습관화 타성화는 취미 방향들을 쉽게 비주체화 시킵니다. 주체의 중요한 조건중 하나는 자유입니다. 자유의 반대는 구속으로 생각하나 사실은 타성입니다. 주체화의 적은 타성인 것입니다. 전인적인 인격에 조화되지 않은 일시적 충동, 반성없는 정열 등에 의해 행위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행위로부터 소외됩니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자아를 기생적 자아 표층적 자아라고 했습니다. 취미의 쾌락적, 가치적 방향은 특히 그럴 위험성이 더욱 많으며 소통과 인식적 방향은 그 전체를 통찰하고 개조하려는 행위로까지 연결되기에는 현상적입니다. 그에 비해 취미의 창조적 방향성은 취미 전체에 대한 합리적 판단과 구체적인 경험과 정서 판단 등 주체화의 요소를 자체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취미의 방향은 어디로도 향할 수 있지만 그 구조상 주체화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은 창조적 방향입니다. 취미사진가가 예술사진가로 발전하는 방향은 취미의 동력을 올바로 확인함으로서 가능합니다.

2) 다큐멘타리사진의 구조와 기능
사진예술적 체계의 기본구조는 사진가 – 사진 – 감상자 삼요소의 정보체계적 관계입니다. 여기서 집중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것은 이 3요소의 체계가 끝없이 다양하고 급속히 변화하는 체계에서 구조의 동력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보자체는 이렇게 역동적 체계에서는 의미가 약화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웨스턴의 사진과 앗제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웨스턴의 사진정보는 뚜렷하고 정확하여 감상자의 감동도 뚜렷하게 됩니다. 이에 비해 앗제의 사진정보는 다양하고 애매하여 감상자는 자기 나름대로 상상하여 주관적으로 감상하지 않으면 밋밋하고 의미 없어 보일 뿐입니다. 웨스턴의 사진은 처음 볼 땐 감동이 뚜렷하지만 자꾸보면 심심해집니다. 전달의도가 강한 전쟁사진 등을 반복적으로 보게 되면 처음의 폭로된 참상은 점점 변질되고 무디어집니다. 그러나 이것도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슬픔과 죽음을 경험할수록 무디어지는 문화구조가 있고 더 예민해지고 승화되는 문화구조가 있습니다. 이런 복잡성을 감안할 때 창작과정과 감상과정 전체를 규정하는 시대정신과 문화에 대한 통찰을 전제로 다양한 속성의 동력과 원칙을 확인하는 게 중요합니다.
사진의 구성요소는 사람의 활동을 기준으로 봤을 때 5가지의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인식적 요소입니다. 사진은 객관적 기록이자 정보입니다. 이러한 인식적 요소는 경험적이거나 합리적 지식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이성적지식 자체는 주체화의 수단이지만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을 때는 주체를 억압, 소외 시킵니다. 증거로서 활용되는 이러한 정보는 산업사회, 정보화사회에서는 감시 통제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인식적 요소는 사진체계에서는 이론 학문적 요소로 들어옵니다.
둘째는 개조적 요소입니다. 사진은 사회적 영향력을 갖습니다. 그결과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1920년대 저널리즘사진을 언급하지 않아도 이해가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변혁적 행위는 낡은 제도를 변혁하는데는 성공할 수 있더라도 새로운 제도나 사회를 건설하는데까지 항상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또 새로운 억압적 질서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또 틀에 박힌 관례나 인습을 만들어 낼수도 있습니다. 기념사진 결혼사진 등을 보십시오. 때문에 자각적이고 정서적이며 사랑에 호소할 때 주체적인 변혁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개조적 요소는 사진모임이나 단체 등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개조사업을 담당하는 사진조직단위를 만들어냄으로서 사진구조에 들어옵니다.
셋째는 가치적 요소입니다.사진은 아무리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기록이라도 주관적으로 해석됩니다. 이것은 사진자체에 내재된 취향과 가치관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사진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러나 사진에 이데올로기로 가득 차 있다고 해서 윤리적 도덕적 충격을 더 많이 주고 사람들을 올바른 가치로 이끄는 것은 아닙니다. 사진이 낯익은 것이 될수록 윤리적 충격은 감소됩니다. 더구나 사진 이미지의 양적인 확산은 양심을 마비시키는 결과를 초래 합니다. 그래서 사진의 윤리적 내용은 취약한 것으로까지 보입니다. 윤리나 도덕으로부터의 자유가 반드시 전통가치에 대한 거부와 새로운 가치에 대한 긍정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복종하더라도 자유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주체화인 사랑과 배려가 전제된 복종과 추종은 오히려 존경과 흠모가 됩니다. 가치적 요소는 주로 이런게 좋은 작품이다라는 가치 판단에 따라 그 작품을 중심으로 동원하는 역할인 비평으로 들어옵니다.
넷째는 소통적 요소입니다. 사진정보는 지식을 전달할 뿐 아니라 전달체계, 소통체계를 구성합니다. 사진정보는 정보의 진리적 가치말고 얼마나 효율적으로 의사 소통되게 하는가하는데 본질적인 역할이 있습니다. 사진은 새로운 소통방식 즉 이미지를 보는 방법이나 행위를 통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보는 새로운 체계를 형성한다. 어떤 면에서 세계는 사진으로 보여지기 위해 존재하기라도 하는 양 이미지보기의 윤리와 문법을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정보와 이미지가 중심이 된 사회는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문제로서가 아니라 생산의 목적을 결정하는데 참여함으로써 주체를 실현합니다. 소통적 요소는 교육과 홍보, 소비의 형태로 사진구조에 들어옵니다.
다섯째는 창작적 요소입니다. 창작은 사람활동의 다른 측면을 모두 종합하므로서 자기 목표를 실현합니다. 설계와 시공 계획과 실천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 바로 창작입니다. 사람의 주체적 특질을 가장 잘 닮은 형태가 바로 창작활동입니다. 그런점에서 창작적 요소는 사진예술체계의 동력입니다. 창작적 요소는 말할 것도 없이 작품으로서 사진구조의 핵심에 들어옵니다.

다큐멘타리사진은 인간학적 본성을 실현하는 측면에서 주체성을 중심으로 하고 사진문화적 구조를 통해 발생발전하는 예술형태입니다.

3. 다큐멘타리 사진의 내용

다큐멘타리는 사람을 찍는 것이다. 결국 사람을 어떻게 보는가가 다큐멘타리의 발전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한 시대가 제시하는 인간 문제를 어떻게 제시하고 표현하는가 이것이 다큐멘타리 주제잡기의 핵심이다.
사진의 역사와 근대의 역사는 함께 시작된다. 근대는 역사상 최초로 사람을 발견한다.

1) 사진의 발생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처음부터 독립적인 예술형태로 분리 발전되는 경우란 거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술은 다른 예술형태와 혼돈된 미분화 상태를 거쳐 분화되면서 형태적 독립성을 획득하게 되고 다시 다른 예술 형태와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종합화 되어가는 법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진은 필름에 상을 정착시키는 기술의 성공을 기준으로 사진술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하나 이것은 처음 프랑스에서 사진술의 발명일을 국가적으로 발표, 공인하므로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진의 발생을 이때로 통용되게 하는데서 역시 제도의 위력을 실감케 합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필름 발명 이전에 그것 만큼이나 중요한 렌즈의 발명은 쉽게 묻어 버리는 편향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사진 기술적 측면에서도 불완전한 규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보체계에 따르면 사진 기술은 가치 중립적이지 않으며 사진가와 감상자를 매개하는 채널의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사진기술은 창작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정신과 밀접한 연관관계에 있게 됩니다. 일부에서 생각하듯이 사진기술로부터 사진적 세계관과 시대정신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적 요구와 창조능력의 발전으로부터 사진형태는 발전됩니다. 사진형태는 단순히 기술적 형식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생활로부터 창작과정과 내용과 형식, 작품이 존재하는 상황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렌즈의 낮은 심도에 의한 표현효과의 발견은 사진기술의 발전과정만으로는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진기술의 발명중 우리가 너무 쉽게 묻혀버린 것이 입체사진술입니다. 입체사진술이 사진발전의 주류를 차지하는데 성공했다면 사진의 역사는 몇군데 수정됐어야 했을 것입니다. 기술상으로는 더 힘들고 어려운 기술임에도 왜 사진의 일반적인 표현방법으로 승인되는데는 실패했을까요? 결론부터 얘기하면 시대정신을 담을 수 있는 정도까지의 내용성을 갖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조리개나 가까운 거리의 피사체가 갖는 낮은 심도효과가 어떻게 사진의 예술적 표현방법으로 자리 잡아 갔는지 그 과정을 볼까요?
카메룬 이전에도 낮은 심도로 찍힌 사진이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본격적으로 사진의 표현방법으로 된 것은 카메룬의 전시회 이후입니다. 렘브란트 자화상에 나타난 보는 방법의 변화는 곧장 카메룬을 비롯한 예술로서의 사진을 애타게 시도하던 작가들에게 깊은 공감을 일으켰고 자기 표현의 기준으로 되었습니다. 카메룬과 그의 동료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렘브란트가 표현하고자 했던 시대정신이었으며 형식이었습니다.
그럼 시대정신이 어떻게 사진을 미술이나 다른 예술 형태들로 부터 분화 발전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해 왔는가 이해할 필요가 생깁니다.

2) 근대성과 사진의 분화과정
ㄱ) 합리주의정신과 사진의 분화
왜 유럽 사회는(다빈치식으로 보는 방법으로부터) 렘브란트식 보는 방법으로의 변화를 요구했습니까? 그 사상적 배경에 근대정신(근대주의는 이데올로기가 된 정치이념이었습니다)이 있었습니다. 근대성, 근대정신은 무엇입니까?
근대성이란 르네상스운동으로부터 시작된 근대사회의 근원이 되는 사상적 흐름을 말합니다. 다빈치가 르네상스운동의 정신을 대변한다면 렘브란트는 종교개혁운동의 정신을 대변합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으로 완성된 근대사회의 실천적 모습은 오히려 근대성이라기 보다는 계몽, 합리주의 등 정치이데올로기화한 근대주의 또는 자본주의라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근대성의 핵심은 합리화와 주체화입니다. 보편적 이성으로서의 인간정신의 해방이라는 합리화와 주관적 감성의 해방으로서의 인간의지의 해방이라는 주체화를 동시에 요구합니다. 전자는 르네상스에서 후자는 종교개혁에서 주요 관심사였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의 모습을 봅시다. <직물조합간부들>의 집단초상화에 나타나듯이 그들은 집단의 일원이라도 자기모습을 후세에 전하고 싶어했습니다. 또한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는 공동의 노력에 참여하는 개인들이었습니다. 신성이나 주술, 왕권 등에 의존하지 않고 주체의 의지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로부터 집단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집단에 대한 복종과 귀의라도 자유가 되는 것은 종교개혁이 일구어낸 근대성입니다. 예수는 그의 아버지에게 복종하지만 법이나 질서를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네덜란드의 집단초상화는 그래서 종교개혁의 실현이었습니다. 이들이 ‘나를 돕듯 남을 도울 수 있는’데에는 경제적 여유로 인한 여가가 존재했습니다. 단적으로 여가는 터키에서 수입하고 개종시킨 튜울립을 네덜란드 최대의 시장으로 만들었습니다. 1637년 튜울립시장이 붕괴되면서 네덜란드의 경제도 흔들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유행한 여가 생활품목은 튜울립 대신 다양한 사치품이었습니다. 부르조아적 여가는 장점이자 한계였습니다. 초기에 그들을 주체로 이끌었던 자유는 갈수록 비속화 되어갔습니다. 자유행위의 반대는 강제된 행위가 아니라 타성적 행위이며 그 대표적인 것이 습관적 행위입니다. 부르조아적 습관과 일상생활은 대부분 습관적 행위를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데서 이뤄집니다. 습관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고 자발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든 자발성을 구속하는 힘입니다. 습관에 구속된 자아는 소외와 예속입니다. 잉여가치의 증대와 여가의 증대는 어느 시점에선가 개인주의화, 이기주의화 되어 갔던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근대정신을 정면으로 제기한 천재가 바로 렘브란트였습니다. 그는 진실을 찾으며 경험에 호소하는 정신을 표현했습니다. 그는 성서를 열심히 연구했지만 항상 자기경험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판화 <예수의 설교>에는 먹을 것을 주으러 가는 어린아이와 졸음을 억지로 참고있는 사람 등 이상화 되지 않은 현실의 다양한 인물에 대한 관대함과 배려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획일화된 이성이나 합리화에 편향되지 않고 이미 주어진 진리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의 힘과 판단으로 찾으려는 열렬한 탐구정신 이것이 렘브란트가 발견한 주체성이었습니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인간적 성실함은 이전 시기 모범이었던 영웅주의나 이상주의와 다른 정신적 힘을 발합니다. 렘브란트가 회화에서만이 아니라 당시의 지성사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던 것은 다른 부분과 비교해서 예술활동이 주체화에 기여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렘브란트에 의해 표현된 시대정신은 진정한 근대성으로 하여 2세기가 지난 뒤에 초상예술사진의 부활을 맞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초상화를 대신하기 위한 초상사진의 유행으로 보기 보다는 근대성이 다른 길로 접어드는 시대상황에서 초기의 근대정신을 수용하려한 사진가들의 노력으로 봐야합니다.
카메룬 등 19세기의 초상사진 작가들에게 렘브란트가 미친 영향은 다름아닌 탈권위, 탈절대를 지양하는 주체성, 근대성에 있습니다.
보는 방법의 측면에서 합리주의 시대는 귀중한 성과 또 하나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17세기 사람들에게 경험과 이성을 결합시킬 수 있는 것은 수학이라는 생각이 광범한 공감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때의 모든 철학자들은 또한 수학자들이었습니다. 수학은 신을 대신한 새로운 신앙이었습니다. 다빈치가 그랬던 것처럼 데카르트도 열렬한 호기심으로 사색하고 또 의심했습니다. 수학 신앙에서 우리는 렘브란트가 올라선 주체의 방향이 이성과 보편적 진리로 환원됨을 볼 수 있습니다. 합리화가 합리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 변형되는 지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리화는 사진술의 전제가 되는 업적을 쌓았습니다. 그것은 빛이었다. 데카르트는 빛의 굴절을 연구했고 호이겐스는 빛의 파동성을 입증했습니다. 유럽지성은 단테에서 괴테까지 빛에 매혹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욱 불을 붙인 것은 네덜란드에서의 렌즈의 발달입니다. 스피노자는 유럽 최고의 렌즈 제작자였습니다. 렘브란트의 뒤를 잇는 또다른 거장이 있었습니다. 바로 페르메르라는 화가입니다. 그는 렌즈가 달린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렸습니다. 다빈치 이래 우리가 본다는 것은 우리 관념과 이성에 의해 설계된 지각내용 또는 선입견을 통해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페르메르는 이러한 시각적 편견을 버리고 놀라운 인내와 탐구정신으로 렌즈의 착란원을 포착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착란원을 필름에 의해 화학적으로 정착시키기 이전시대에 이미 새로이 보는 방법을 개척한 것입니다. 관습이나 인습에 의문을 제기하고 주체가 경험한 사실에 돌아가려는 자세 합리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과학정신인 것입니다. 하루종일 방안에 틀어밖혀 사색하고 고민하는 생활문화가 생겨난 것도 이때입니다. 고독과 사색, 이는 합리주의의 문화적 토양이자 한계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주의는 주체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큰 위험과 어려움이 따릅니다. 진리에 대한 동의와 가치에 대한 합의를 요구하는 합리주의는 사랑의 감정에서 종교까지 예술에서 전통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눈에 비합리적이라고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거나 멸시하는 계몽군주나 권위주의로 떨어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공공성과 개별성을 공유하는 유적 존재이며 이들 두 영역에서 자유를 요구함으로써 주체가 되는 자주성과 창조성을 실현하는 행위자 입니다. 그러므로 인간행위를 과학기술적 사고와 도구적 이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민주화와 주체화의 길이 아닙니다. 수 많은 기념사진, 초상사진의 ‘사람은 모름지기 이러저러 해야 한다’는 기준은 바로 이러한 사고의 영향이며 그런 기준으로 찍은 사진은 촌스럽고 유치하며 우스운 사진이 됩니다. 사진 정보의 흐름에 있어서 작가와 감상자의 관계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으로만 맺어질 때 생기는 일입니다.

ㄴ) 계몽주의와 사진의 분화
네덜란드의 고독과 사색의 문화를 대신한 정신적 분위기는 1세기가 지난 뒤 프랑스에서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살롱으로 상징되는 대화의 문화였습니다. 그리고 살롱을 주도한 여성의 문화였습니다. 진지한 인간적 성실함이 주는 감동이 네덜란드적이라면 그렇게 진지하진 않지만 상대방에 대한 공감과 기지에 찬 마음씨가 주는 편안함과 예의는 프랑스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물론 궁정안에서 생겨날 순 없었고 상류계급이었지만 압도적 부자는 없는 시민사회의 것이었습니다. 살롱의 출입자들은 과학자와 철학자들이었으며 그 유명한 24권에 달하는 백과전서 사업에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지적 분위기는 살롱의 회합을 기품있게 했을 뿐 아니라 혁명정치의 선봉이 되었습니다. 또 과학의 선봉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네덜란드의 지식인들과 비교하면 진정한 과학자들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저것 관심은 많이 가졌지만 과학적 성과를 열매 맺은 것은 없었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애호가들이었습니다. 과학적 끈기는 사교적이거나 머리 회전이 중요하지 않은 환경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분위기는 정통적인 학문의 분위기이기보다는 설득적이고 계몽적이었습니다. 아주 난처한 문제 앞에서 인상을 구기며 깊고 날카로운 사색에 빠지기보다는 자존심을 잃지 않으면서 부드러운 미소로 넘어가며 설득과 대화로 공감적 분위기를 만드는데 더 능숙했습니다. 초상화도 권위적이고 기품이 있기보다는 비교적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려는 정신적 상태, 이것이 파리의 분위기였으며 1세기 뒤에 사진술의 연구가 동시간대에 많은 나라에서 연구되고 있었음에도 다름아닌 사진술의 탄생이 프랑스 것이 되게 된 토대였습니다. 니엡스와 다게르의 연구를 국가에서 사도록 중개한 아라고와 같은 관료와 시민사회의 주도성에 동의하는 정부, 백과전서를 만든 사회의 지성수준, 혁명이 근대정치영역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한 점, 프랑스혁명을 통한 주체의 광범한 진출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혁명은 더 많은 주거이전과 여행을 가능하게 했으며 국제적 차원의 문화를 형성시켰습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문화가 국가에 대한 찬양과 같은 애국심을 갖게 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계몽주의자들이 고안해 낸 이런 근대성의 개념은 혁명적인 것이었지만 그 이상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통과 권위에 대한 투쟁을 호소할 뿐 새로운 사회의 운영방식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근대성의 이데올로기는 주체성의 실현인 민주주의적 이념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이었고 보편적 원칙과 이성의 이름으로 교회와 군주의 권력을 비판한 것 뿐이었습니다. 결국 계몽적 이성은 신적 권위로부터 주체를 해방시켰지만 또다시 주체를 자신의 일반의지에 구속시킨 것입니다. 사진술 초기 테이나르, 뒤깡 등의 고대 건축사진들은 고전주의 화가 다비드의 고대 문명과 도덕에 대한 향수 뿐 아니라 신적 권위로부터 해방된 후 국가적 권위로 향하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느끼게 합니다.
사진의 발생과 관련하여 가장 직접적인 사상의 흐름은 계몽주의의 자연에 대한 견해와 관심으로부터 였습니다. 왜 그리도 상을 정착시키려는 시도가 열정적으로 진행되었을까? 자연주의 화가 코로는 ‘첫인상에 사로잡혀 당신이 진정으로 감응했다면 당신이 가진 감정의 순수함은 곧 다른 사람들도 감동시킬 것이다…….
그것들의 감상적 암시나 상징적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았던 대상들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 여기에 시간의 검인을 찍기 위해서이다’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은 종교적 윤리에 대항하여 자연의 법칙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이성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것은 우선 많은 논증들이 일치하기 어렵고 그에 따라 다양한 의견과 법칙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종교와는 달리 이성은 지배를 강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물의 자연적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쾌락을 가져다 주며 기호의 규칙에 상응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동양과 달리 서양에서 산이나 자연물은 극복의 대상이었지 감상이나 쾌락의 대상이 됐던 적은 이전에 없었습니다. 자연주의는 이런 이유로 공리주의적, 쾌락주의적 도덕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쾌락은 욕망의 대상을 억압하고 복종시키고 치욕과 고통을 줄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이성을 쾌락의 합리적인 조직자로 정의하는 이런 개념화는 이미 실패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성을 쾌락과 연결시키는 것은 주체화가 아니라 권력의 합리화일 뿐입니다. 이런 윤리와 미학의 결합은 인간을 신적인 법칙과 영혼의 존재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신과 자연, 영혼과 육체, 이성과 감성 등 모든 이원적 사고를 버리고 인간을 자연으로 보는 일원론적 관점을 부과하는 것입니다. 18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나타난 자연에 대한 광적인 신앙과 인상파의 자연에의 몰입과 도취가 이를 증명합니다.
자연을 사람의 손, 즉 인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리고 싶은 요구는 사진의 화학적 발명 즉 필름에 의해 성취됩니다. 카메라 옵스큐라가 아직 소수의 것이었다면 자연감광법은 자연주의 이념의 대중적, 세계적 확산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진초기역사에서 지금까지 계속 끊이지 않는 논쟁인 <사진은 세계를 기록할 뿐인가>, <보는 방법의 반영인가>는 사진 발생에서 자연주의적 사고방식의 영향력이 얼마나 집요한가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지성의 전통을 필요로 하지 않았거나 거치지 않은 나라에서는 위의 논쟁이 강건너 불구경처럼 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진은 합리주의와 비합리적인 자연주의와 계몽주의의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 등 다양하고 수많은 사상의 영향과 환경속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사진정보는 아무것도 아닌 것같으면서도 복잡하고 단순하게 한 듯 하면서도 난해하게 다가옵니다. 이것은 사진정보가 창작되는 상황과 조건이 이미 복잡하고 불안정한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이런 상황을 비트켄시타인의 말의 인용하면 사진은 용도다. 문맥에 따라 달라지고,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혼돈되고 불안정한 사진정보체계의 환경에서 큰 틀과 원칙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사진이 보여주는 현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근면한 노동자, 합리적인 시장 상인으론 부족하며 자신에 중심을 두고 정서적 존재로써 운명의 불확실성에 사랑으로 호소하는 주체가 되려는 관점에 서야합니다.

4. 다큐멘타리 사진에서 나타나는 사람 관계

우리는 사람과 관계 맺을 때 4가지 태도를 갖습니다. 추종하기, 배려하기, 눈치보기, 무시하기가 그것입니다. 추종하기는 내가 나를 버리고 상대방과 동일시 할때 생깁니다. 눈치보기는 나를 버리지도 상대의 주체를 인정하지도 못하는 긴장속에서 생깁니다. 배려하기는 나의 주체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주체도 인정하며 연대를 통해 주체를 실현하려 할때 생깁니다. 무시하기는 나의 주체만 인정하고 상대방의 주체는 인정하지 않을 때 생깁니다. 그러나 이중에서 추종과 무시는 결국 비주체화란 점에서 뿌리를 같이 합니다. 추종은 동일시하려는 자아의식이 너무 강해 주체를 포기한 일방적 의존이란 점에서 그렇고, 무시는 자신의 주체를 실현할 대상과의 관계가 단절된 자아의식이란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는 추종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또 다른 대상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주체를 포기한 추종은 과거에는 신 때문에 사람을 버리게 했고, 근대에는 돈 때문에 사람을 버리게 했으며 현대에는 문화 때문에 사람을 버리게 합니다. 이런 자리에 사람 사랑이 존재할 리 만무합니다. 눈치는 주체화를 실현할 수 있는 상태라는 긍정성과 언제든지 비주체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기회주의라는 부정성이 혼돈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하루는 배가 나온 상사한테 ‘그것도 인격’이라고 말해서 ‘그래도 자네 밖에 없어’하고 칭찬을 들었는데, 다음날엔 ‘아니 자네 날 놀리는 건가?’ 하고 꾸중을 듣습니다. 눈치가 없어서 나의 주체가 무시 당하든 눈치껏 해서 나의 주체를 인정 받든 그 차이는 크지만 눈치 보는 상태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은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눈치보기는 나의 주체에 대한 확신과 대상 주체에 대한 믿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체에 대한 확신과 대상에 대한 믿음이 충만한 상태는 오직 배려하기 밖에 없습니다. 배려하기는 대상과의 연관 속에서 나의 주체를 발견하고, 확대 실현하기 위해 대상과 연대하게 합니다. 나의 발전이 곧 대상의 발전인 상태. 이것을 일컬어 사랑과 평화라고 합니다. 사랑은 그래서 주체의 발견과 성장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이 전제되었을 때 눈치와 무시는 배려가 되고 추종은 존경이 됩니다. 사랑은 그래서 나를 개조하고 세상을 개조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개조하는 유일한 혁명입니다. 평화는 평등과 조화입니다. 배려하기에서만 평화는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최후의 목표로서 평화가 됩니다. 관계에서 사랑에 대한 호소는 곧 주체화이며 주체성이야말로 창조적인 행위자로서의 사람의 본질적인 속성입니다.
* 참고 자료 : 작가들

5. 다큐멘터리의 몇가지 주제
지역에 대하여

1. 지역의 정의
지역은 공간이다. 한축으로는 정치,경제,문화의 통합체계이고 또한축으로는 그것의역사,구조,기능이 총체화 되어 있는 공간이다.
우선 공간을 이야기해 보자. 첫째로 생리적인 공간이 있다. 화장실은 아무리 집단주의와 공동체를 강조하더라도 혼자만의 공간으로 설계되어 있다. 생리적 공간이 침해 당하면 개인의 원할한 생리활동이 침해 당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대인적 공간이 있다. 사람과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공간이다.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을 보면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있는 것을 볼수 있다. 마치 전기줄에 새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앉아 있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이 또한 사람마다 개인의 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대인적 공간은 문화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우리의 지하철을 보면 기둥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기둥을 등지고 바깥쪽을 향해 보도록 되어 있다. 원심력 적인 공간이다. 이에 비해 옛날의 멍석문화는 서로가 바라보고 앉도록 되어 있다. 구심력 적인 공간문화이다. 지하철의 기둥의자는 개인간의 공간을 최대로 확장시키고 서로간의 간격을 벌여 놓는데 목적이 있다. 멍석은 개인간의 공간을 최소화 하고 서로간의 간격이 쉽게 허물어 지도록 되어 있다. 기둥의자와 멍석의 공간문화가 수평 비교 될 수는 없다. 억지로 개인적 공간을 없애버리려고 하면 공공연하게 대인간의 긴장과 투쟁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취할 때 동료니까 꺼리낌 없이 같이 살자고 약속하고도 서로간의 생활 습관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여 갈라서는 경우가 생기는 것을 자주 본다. 전후 독일에서는 복구기간 동안 몇가족이 한집에 모여 살도록 하였다. 그러나 화장실이나 목욕탕을 같이 쓰는 문화가 부족했던 이들에겐 빈번히 싸움이 일어나고 결국 이 정책은 실패할수 밖에 없었다. 이제 사람들은 사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이 정치적으로까지 번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셋째, 사회적 공간이다. 단일한 문화를 갖는 공간과 이질적인 문화를 갖는 공간끼리 맺어지는 관계에 따라 사회적 공간의 성격은 달라 진다. 봉건시대의 공간은 지형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평지를 따라 다니기 좋은 곳으로 길이 나고 바위나 산이 막히면 돌아가고 하는 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풍수지리는 봉건시대의 공간관을 대표한다. 그런데 일제에 의해 신작로가 생기며 이런 공간은 파괴 된다. 신작로는 전통적인 마을사회의 공간을 해체하고 파괴한다. 공간 끼리의 긴장이 생기고 이는 곧 정치적인 문제로 되었다. 지역주의니 님비니 하는 현상은 공간을 둘러싼 심각한 정치 투쟁을 반영한다. 이제 사람들은 지역을 살아있는 유기적 공간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따라서 노동자에게도 사업장이 속해 있는 지역이나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은 유기적으로 연관되면서 자신의 생활을 규정한다. 지역은 단순히 노조파업때 주민들의 호응도를 이끌어 내거나 유지하기 위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지역은 형식적 본질에 있어서 있어서 공간이다. 그러나 지역은 반드시 내용을 가진 공간이다. 따라서 지역은 자체로서 고도의 정치,경제,문화적 의미를 같는 공간 유기체이다. 이런 이유로 지역의 구조와 본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사와 구조 기능세가지 측면에서 총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2. 지역의 역사
지역은 역사가 있는 공간이다. 숲이 마을이 되고 마을이 도시가 되어가며 발전하고 융성하는 지역이 있고, 흔적도 없이 역사 속에 사라지는 지역도 있다. 경상도는 조선시대 이래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왔고 유권자 9백만을 넘는다. 전라도는 계속 소외 받아왔고 유권자 3백 50만을 가지고 있을뿐이다. 충청도는 조선시대 이래 이승만 시절까지 가장 융성 했다가 현대에 와서 전라도 보다 더 소외되고 쇠락하게 되 었다. 강원도는 궁예의 태봉국 이래 역사에서 언제나 발전과는 무관한 곳이었고 유일하게 남한에서 자연이 합일의 대상이 아닌 도전의 대상인 곳이다. 오죽 했으면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것네]라는 말이 강원도의 이미지를 대표할까?
지역이 하나의 유기체적 구조를 가지고 발생하여 발전하는 과정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지역주의 즉 지역사상이다. 지역주의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치열한 투쟁의 산물이며 쉽게 청산되거나 극복되지 않는다. 따라서 지역주의의 두축인 지역사상과 지역정서를 알지 못하고 지역의 발전 전략을 수립할 수 없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한 지역을 선정하자. 충남 예산이다. 충남 예산을 대상 지역으로 선정한데는 두가지이다. 첫째, 97년 대선의 도화선이 된 보궐선거가 이뤄진 지역이란 점(이회창은 예산 보궐선거에서 자신을 미는 오장섭의원의 당선으로 한나라당 후보 경선에서 승리한다) 둘째, 대선승리로 정권교체가 이루어 졌지만 기존의 지역패권세력이 언제든지 반격할 수 있는 가능성을 97년 예산 보궐 선거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예산 보궐 선거는 보수주의의 논리가 어떻게 지역의 현실생활에서 구체화 되는가를 보여준다. 예산 보궐선거는 이회창의 고향이 예산임을 내세워 득표하려는 신한국당 후보와 오랜동안 확고부동의 터밭을 일궈온 자민련과 국민회의의 진보적 세력(예산에선 진보적이다)까지 가세한 자민련 후보와의 선거였다. 신한국당 오장섭 후보는 초대국회의원을 지낼 때 이지역의 오랜 중심지였던 읍내의 버스 터미널을 예산 외곽으로 이전 시키는데 이 때문에 구 예산읍의 상권과 생활권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구 지역을 중심으로 학교, 주택, 상가, 교회등이 모두 밀집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군민들을 경악케 한 것은 새로 옮긴 신터미널의 부지가 오 후보의 개인 사유지로 엄청난 부동산 이득을 포획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오후보는 아무리 지역 유지라 해도 인심을 잃은 상태였다. 반면 자민련후보는 김종필 대통령을 꿈꾸는 예산 사람들의 열망에 농민회, 주민단체등 새롭게 형성된 진보세력의 지원을 받는 국민회의가 가세하여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처럼 유불리가 뚜렸한 조건에서도 오장섭 신한국당 후보가 승리함으로써 이회창은 자민련의 아성인 충청도에 교두보를 마련하고 경선승리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다. 예산 사람들이 김종필을 버리고 이회창을 선택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여기에 지역주의의 견고한 생활논리가 있다. 이 이야기의 가설은 멀리 조선 건국초로 거슬러 가서야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충청도는 지금도 초등교육을 받지 못한 산골 농사꾼이라도 한문을 쓰고 읽을 줄 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지방과 축문을 쓰고 읊을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활이 고달프고 어렵더라도 제사만은 잘 모셔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 유교문화의 영향이다. 충청도는 특히 조선 중기 권력의 핵심이었던 노론계열의 지역적 근거지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이학파로부터 비롯되는 조선의 자유주의 세력들은 인조반정이후 조선 중,후기의 지배 세력이 된다. 율곡학파를 실제로 형성하고, 동방예학의 종장으로 불리워지는 김장생의 활동무대가 충청도 연산이다. 그의 문하로 아들 김집을 비롯 송시열, 송준길, 이시백, 이유태, 신흠, 이경직등 임란이후 노론을 형성한 당쟁과 권력의 핵심 인물들이다. 이로부터 연유하는 유교주의는 왜 김종필을 버리고 이회창을 택하는가? 이 수수께끼를 풀기위해서는 더 멀리 정도전과 정몽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묘에는 정몽주가 배향되어 있고 정도전은 유학의 역사에서 족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이자 조선의 역신이었고 정도전은 조선의 개국공신 중에서도 일등 공신인데 말이다. 그뿐인가? 조선 후기 까지의 유학의 기본적인 논리틀은 정도전의 논리를 벗어난 적이 없고, 언로사상이니 과거제도니 하는 국가경영의 기본틀도 그의 저서인 경국대전과 삼봉집을 벗어나지 않았다. 사상논쟁에 있어서도 불씨잡변(불교논리를 비판)을 능가하는 치열함을 보여준 학자는 조선 후기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간혹 역사는 이성계가 정도전을 이용한게 아니라 정도전이 이성계를 이용하여 조선을 개국한 것처럼 묘사하기 까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도전의 숙명적 경쟁자였던 정몽주가 어떻게 문묘에 배향되었는가? 여기에는 조선 유학의 뿌리인 의리 사상이 깔려있다. 의리사상은 정몽주와 길재에 의해 정립되었다. 정몽주의 의리사상은 자아인격의 확립으로서의 충실忠實, 인관관계에 대한 의리로서 충신忠信, 국가사회에 대한 의리로서 충성忠誠, 도덕 법칙에 대한 지절로서 충정忠貞이라는 네 단계로 발전 했고, 그 마지막 단계는 충절의 완성이자 인류에 대한 헌신의 실현이었다. 따라서 여기서 의리정신이란 단순히 왕조에 대한 충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작게는 고려왕실에 대한 충절을, 크게는 현실대응과 유학계승까지 관통하는 실천의지를 포괄하는 것이다. 성리학에 있어서 참된 학문은 문장으로 표현 되기 보다는 인격으로 우러나고, 독실한 실천을 통해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역사적으로 계승된다는 것이 공통된 신념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뛰어난 이론가요, 정치가인 정도전은 오히려 의리를 배반한 쿠데타세력으로, 정몽주는 성현으로 문묘에 배향된 것이다. 이것이 유교의 의리 정신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김종필은 아무리 실력자라 해도 쿠데타 세력이며 권력의 정통성이란 면에서 반동적 보수란 혐의를 벗기 힘들고, 이회창은 전주이씨이자 원칙주의자이고 서울대 엘리트그룹의 지배세력을 상징하는 점에서 정통보수로서의 이미지를 갖추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병역기피가 이회창에게 그토록 큰 짐이 된 것도 반동보수와 정통보수를 구별하려는 논리와 정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지역주의는 오랜 역사를 통해 견고하게 형성 되었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예산은 같은 독립운동가라도 윤봉길은 기억하지만 박헌영을 기억하진 않는다. 충청도는 유관순의 만세운동은 기억하지만 계룡산을 중심으로한 중부 빨치산 활동은 기억하지 않는다. 50년이 채 안되는 진보사상의 역사는 600년 보수사상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해방전후라는 격렬한 시대였기에 그정도나마 진보의 시를 뿌린 것인지도 모른다. 지역주의는 이처럼 오랜 역사속에서 발생하여 다른 사상과 투쟁하며 단단하게 유지되고 발전된다. 그렇게 형성된 것이 지역사상이고 지역정서이다. 이러한 지역주의는 단순히 관념이 아니다. 거대한 물적 토대를 가지고 지역의 요소요소에 자기의 물적 토대를 건설한다. 쓰러져가는 먼지투성이의 사당, 잡초무성한 무덤, 그저 자연스럽게 흐를뿐인 듯한 시냇물 줄기와 산줄기조차도 지역주의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역주의의 역사적 실체인 지역의 구조에 대해 주목하게 된다.

3. 지역의 구조
지역은 7가지의 요소로 구성 된다. 지역주의와 지역의 장기계획, 단기 계획, 지역통합체계, 지역의 지배집단, 지역사람들, 지역의 기술문화적 수단이 그것이다.

1) 지역주의
지역주의 즉 지역 사상과 지역 정서는 그 지역을 움직이는 거대한 중심축이다. ‘우리가 남이가’야 말로 모든 논리를 뛰어넘는 600년의 역사적 구호인 것이다. 근대성의 기준인 합리성과 상식의 논리가 이 구호 앞에서는 왜소하고 궁색한 것이 된다. 우리는 아직도 사상적으로 근대 이전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예외 없이 600년의 보수지역주의는 확인 될 것이다. 노조활동을 하다보면 지역에 따라서 노조활동의 양상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한다. 울산의 노조운동이 강성 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봉건적 지역토대가 미약하고 대신 임노동관계, 자본주의적 관계에 의해 새롭게 구성된 신흥도시이기 때문이다. 경제외적 강제가 상대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비해 마산, 창원, 대구, 대전은 투쟁의 격렬성이 울산 못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지역의 역사 때문에 노동자와 자본가 경찰등이 지역적 연고로 묶여있다. 그래서 파업이 한창일 때 아버지 친구인 경찰서장이 노조위원장을 찾아와서 ‘우리가 남이가’를 얘기한다. 노동자들은 자본의 불합리와 맞선 싸움을 고민 할 뿐아니라, 문중의 시향때 마다 만나는 경찰서장이나 안기부 친척과 가족과 문중의 대소사를 얘기해야 하는 문제를 고민해야한다. 물론 이런 지역적 연고가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앞 공장에서 파업을 하면 뒷공장 동생과 동생 친구들이 싸움 지원을 오고 그러다가 뒷공장도 파업에 돌입하는등 예상치 못한 변수들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자연발생적인 노조의 이념은 아무리 거세게 몰아칠 때 조차도 심해의 바닷물을 움직이지 못하며 오히려 이 심해의 바닷물에 의해 포섭되기 조차 한다. 따라서 이런 지역주의와 지역정서를 노동운동은 고민하게 된다.
각 지역별로 보면 경상도는 많은 서원문화에서 보여지듯 유교이데올로기의 엘리트들을 수백년동안 배출한다. 이황이 성리학의 전면에 등장하기 이전에 김숙자, 김종직, 조광조등의 쟁쟁한 사림파에 의해 성리학의 근거지가 마련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귀향하여 후진을 양성하는데 여기에는 대토지 소유주들이라는 경제적 토대가 있었다. 이것이 호남사림과 영남사림의 근본적 물적 토대의 차이이며 조선조 이래로 현재 까지 이런 현상은 변화되지 않았다. 근대혁명을 경험해 보지 못한 600년전의 사회정치구조가 그대로 온존한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진주에서는 대규모 민란이 있었고 신돌석 장군에 의해 최초의 농민 군대가 형성될 정도로 항쟁의 역사가 두터움에도 불구하고 진보주의의 씨를 만들지 못한 것은 지역주의가 워낙 강고한 때문이다.
이에비해 전라도는 권력의 외곽에 있었던 관계로 저항의식과 상대적으로 유학의 계승관계가 느슨하여 사상적으로 자유로울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전라도는 진보사상이 비교적 쉽게 뿌리 내릴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3대 민족종교가 전라도에서 나온 것은 이런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모악산의 증산교, 고부의 동학교, 벌교의 대종교, 모두 전라도가 출생지이다. 최시형은 경주출신이지만 전라도에 와서야 동학을 펼 수 있었다.
북한지역은 변방지역이라는 이유로 과거제도등 유교적 사회정책이 거의 실시되지 않다보니 유교적 보수주의로부터 자유로울수 있었고, 해방전에는 기독교 사상이 해방후에는 마르크스주의 같은 진보사상이 급속도로 받아들여 질 수 있었다. 지역주의는 실제 역사속에서 형성, 발전된 공고한 틀이다. 현재도 지역주의는 계속 뿌리를 굳히기 위한 투쟁을 계속 하고 있다. 이런 시도가 근래 가장 치열했던 97년도 월간 조선의 부록중에는 서울의 궁궐을 소개하는 총천연색 부록이 있었다. 서울 궁궐이란 이조의 이데올로기가 숨쉬는 실체이며, TV드라마에서는 대선을 앞둔 미묘한 시기에 [용의 눈물]이 절찬리에 방영되었다. 이 또한 이조의 역사이다. 또한 서울시의 2000년대 개발계획에는 서울 정도 600년이란 개념을 전략기조로 깔고 있다. 그러나 서울의 역사 자체를 놓고 본다면 이미 2000년 전에 백제의 한성시대가 있었다. 백제고분군에서 보듯이 백제는 한반도 뿐아니라 중국, 일본까지 그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문화 강국이었다. 이에 비해 이조는 어떤 변명에도 불구하고 경복궁의 해태상에서 보듯 건국초부터 이조말까지 중국 사대주의에 몸살을 알아야만 했던 왕조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신한국당 경선에 나선 이씨 성의 후보들이 모두 [전주이씨]였다. 모 후보는 자신의 소개 맨 앞에 성종대왕 몇대손이라고 소개하고 있을 정도였다. 전주이씨 족보에는 이승만이 대통령이 아니라 왕으로 되어 있다. 이들의 일련의 계획은 새로운 지역주의로서 이조의 유교 이념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근대화 = 서구화라는 박정희 주의가 서구이데올로기인데 반해 유교는 동양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강조하며 유교는 요즘 여기 저기서 학문적 유행을 타고 있다. 그렇다면 지역주의로서 유교는 왜 그다지도 중요한가? 두가지 배경이 있다. 첫째, 프랑스 구조주의자 라깡은 탈근대성을 얘기하며 탈근대 이데올로기로서 동양철학에 주목을 돌린다. 서양철학이 갈때까지 가니까 이제 드디어 동양사상에 관심을 갖는다는 유아적 환상에 휩싸인 말들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 둘째, 샤뮤엘헌팅턴이란 미국의 미래학자가 쓴 문명충돌이론에 따르면 냉전해체후 세계는 서로 다른 문명간의 충돌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기독교 문명권인 유럽과 미국 은 단결하고 다른 문명권 예를들면 동아시아의 유교 문명권을 경계하라고 얘기한다. 이는 냉전이란 말을 문명이란 말로 바꿔치기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계속 말 하길 이제 근대화=서구화가 아니며 각 문명마다 근대의 형식이 다르다고 치켜세운다. 이는 새로운 냉전질서로 가고자 하는 교활한 술수인데도 냉전이데올로기의 확장 전술이란 측면보다 독자 문명권의 건설이란 측면을 과장하며 유교에 몰두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김용옥은 유교를 통해 주체사상을 재해석하며 유교의 포괄범위를 논리적으로 확장하고 있고, 고대 홍일식 총장 같은 이는 문화민족주의를 얘기하며 그 핵심으로서의 유교문화를 실천적으로 확장해가고 있다. KBS는 몇해 전 만화 영화 [공자]을 방영했다. 미국이 푸코의 구조주의를 만화로 소개했던 방식으로…
이처럼 지역주의는 어느새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의 이데올로기전략사업으로 추진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지역주의 전략에 주목해야한다. 그러다보면 단서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들은 보통 [21세기를 향한 무슨 무슨 전략계획]이란 이름을 띄고 있을때가 많다.

2) 지역의 전략계획
올해 중반 서울시는 [2000년대 서울]이 어떻게 변화 시킬것인가에 관한 전략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이것에 기본안을 제공한 사람은 건축가 김석철씨이다. 그 핵심은 한강을 중심으로 서울의 모든 문제를 풀어가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분단 때문에 성산대교 이하 서해까지 철조망이 쳐져서 정치적 호수가 되어 버린 한강을 개발하여 통일을 이루고 21세기 동북아의 중심도시가 되게 하자는 구상이 기조를 이룬다. 한강을 둘러싼 생활권은 이 계획 발표전부터 부동산 시세가 뛰고 있다. 대표적으로 자유로를 끼고 있는 파주, 문산 지역은 땅투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김석철씨의 애초 취지대로 통일연습공간으로서의 서울은 흡수통일적 개발논리에 날개를 달아준 꼴이 되고 말았다.
또한 이 계획은 통일후 수도를 서울로 하기 위한 흡수통일적 발상으로 변질되어 가게 해선 안된다. 성산대교부터 서부전선 까지 곧장 이어져 있는 철조망을 걷어내고 한강 하류지역을 개발하자는 논리에는 서울의 유교지역주의와 함께 우려할 만한 지역주의가 있으니 파주문산의 유교지역 주의이다. 이곳은 조선 최대의 상업교역지로 중국과 통하는 관문이었고 이런 지역적 부를 토대로 율곡이이 학파를 형성한 지역이다. 서울이 영정조의 탕평시대에 의해 만들어진 패권지역이었다면 조선시대 노론세력의 패권지역인 기호지방의 핵이 바로 파주지역이다. 똑같은 개발붐이 철원의 그것과 달리 극성스럽게 일어나는데는 그동안 분단 때문에 소외 되었던 파주유림의 지역정서가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진행되는 한강중심의 통일연습공간으로서의 서울개발계획은 흡수통일식 개발붐으로 오히려 통일망국론을 불러올지 모를 일이다. 이런 전략 계획을 노동자와 시민등 민을 중심으로한 내용으로 바꿔내기 위해선 자본과 권력이 주도하는 개발중심의 ‘통일연습’이 아니라 민간통일운동 중심의 ‘통일연습’이 되어야 한다. 보수적 유교주의를 중심으로 한 한강개발이 아닌 단군사상과 현대통일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민간 통일운동의 계획이 있어야 한다. 나는 그 가능성으로서 강화도와 영종도 인천시를 연결하는 삼각띠를 정점으로 하고 한강하류를 포함하는 경기, 서울의 일부지역을 [평화문화교류지대]로 설정하고 발전시켜나가는 전략적 계획을 수립할 것을 제안한다.
새로운 전략하에 만들어질 통일연습공간은 3가지의 조건이 통일될 수 있어야 한다. 첫째는 오랜 역사속에서 공고하게 구축되고 현재에도 그 생명력이 살아있는 민족생활의 동선(動線)이어야 한다. 강화도는 고조선 시대에 북방식 고인돌과 더불어 남방식고인돌 개석식 고인돌 유적이 다양하게 발굴되는 지역이다. 한 지역에서 이토록 많은 양식의 무덤형식이 발견된다는 것은 무덤이 한시대에서 최후로 변하는 마지막 문화양식이란 점을 생각할 때 강화도가 고조선의 문화적 용광로 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는 곧이은 삼국시대에 국토의 모태를 뜻하는 혈구진(穴口陣)으로 개칭되어 해상 교역의 중심지로 일찍부터 발전된 것에서나 고려, 조선에 이르는 시기 침략과 저항의 시작점이자 최후 방어선이 되었던 것을 봐도 증명되는 사실이다. 우리민족은 강화도를 거쳐서 한강을 올라오는 동선을 통해 세계와 만나고, 세계와 싸웠던 것이다. 분단되기 이전 민족 최대의 동선은 바로 강화-한강띠였다. 이 동선이 분단의 장벽으로 가려질 순 있지만 사라지진 않는다. 역사적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비무장 지대의 평화적 이용가능성이다. 성산대교 이남의 한강 지역은 군사적 긴장이 매우 높은 곳으로 김포평야부터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북을 마주보고 있다. 이러한 군사적 긴장은 어떤 개발도 불허해 왔으며 그 결과 홍수때마다 최대의 피해지역이 되고 있다. 임진강의 경우는 강물의 수위변동이나 관측을 전혀 할 수 없어서 언제든지 수해피해에 노출되어 있다. 군사적 이유로 접근이 금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무장지대가 우리에게 남겨준 유일한 재산은 환경자원이라고 생각하지만 한강-임진강-강화띠의 경우는 환경지대가 사람의 발길을 막는 배타적 방법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이 함께 주고 받는 방법에 의해서만 온존히 보존될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또한 IMF에 의한 거대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업을 이곳을 중심으로 벌일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서울, 경기, 인천지역의 실업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것이며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IMF처방이 갖는 외향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전략적 계획하에 민족경제를 일으키는 시범적 사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강변의 철조망을 걷고 사람과 자연이 호흡하는 새로운 환경 지대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이 지역에 대한 충분한 조사연구가 진행되어야한다. 이러한 환경지대는 경제교류지대로서의 성격보다는 문화 교류지대로서의 가능성을 열 것이다.
세 번째는 21세기를 향한 지역적 거점으로서 역할해야 한다는 점이다. 남북은 통일을 원하지만 중국은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한반도의 전쟁과 긴장을 원하지도 않는다. 중국이 원하는 것은 평화이다. 중국은 이미 1992년부터 인민일보를 통해 중화민족주의를 선언하고 있다. 이것이 홍콩반환의 이념적 바탕이기도 했다. 화교중심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통일시키는 틀로서 민족주의를 들고 나온 것이다. 미국의 IMF침탈을 방어한 중국은 오히려 동아시아 전체, 최후의 목표로는 일본을 향해 자신감있게 나아가고 있다. 그 중간의 지정학적 위치에 한반도가 있다.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 끼어 그들로부터 활용당할 수도 있고, 우리가 그들을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선 밀려서가 아니라 주도적으로 중국, 일본을 쥐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전략적 대안이 필요하다. 이 과정은 또한 남북이 통일로 나아가는 과정과 연계되어야 한다. 남북이 주체로 서지 못하는 이상 중국, 일본의 활용이란 사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조건을 모두 가능케 하는 주제는 무엇인가? 남북은 통일을 지상과제로 하지만 현재의 수준에서는 남북기본합의서 수준의 화해가 문제이다. 화해의 전제는 불가침선언과 평화협정이며 이는 현단계의 근본문제가 평화로 됨을 알 수 있다. 중국, 남, 북의 공통된 주제인 평화의 문제를 실현하고 공고히 해나갈 수 있는 실천, 준비공간으로서의 평화 지대는 이런 이유로 하여 절실하다. 그 다음은 평화지대의 내용이다. 정치적 내용은 이런 시범공간을 통해서 완전히 실현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치는 전국적 단위와 내용을 갖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의 문제는 금융전쟁이라 일컬어지는 현재의 세계적 상황에서 평화롭게만 진행될 사안은 아니다. 총없는 전쟁으로 더욱 긴장이 고조될 수도 있다. 문화를 내용으로 할 때도 남북이 탄탄대로를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분야에 비해 여유가 있다. 각국의 문화는 그 자체가 고도의 정치성을 갖기도 하고, 거대한 구조를 통해 저강도 전쟁의 무기가 되기도 하지만 정치나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이해와 교류의 공간이기도 하다.긴장속의 이해, 투쟁속의 관용 아마도 이런 개념이 평화문화 교류지대의 모습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지역주의는 차이의 통일, 평등과 조화, 원융과 같은 개념으로 되어야 한다. 이런 지역사상을 제공할 역사적 뿌리는 강화에 가장 공고히 버텨 서 있다. 강화는 이런 의미에서 이 계획의 전략적 거점이다.

3) 지역의 전술 계획
뉴욕시 롱아일랜드의 도로를 달리는 운전자들은 이상한 광경을 볼수 있다. 도로 중간에 놓인 육교의 높이가 다른 도시보다 훨씬 낮은 것이다. 육교높이가 평균2.7미터에 불과 하기 때문에 이 지역 도로에서는 과도하게 화물을 적재한 대형트럭이나 버스는 운행하기 힘들다. 그런데 이 특이한 도로구조가 실은 한 건축가의 뿌리깊은 인종적 편견의 산물이란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20년대 뉴욕시의 공공건축을 거의 주도하다시피한 건축가 Robet Moses는 흑인 및 소수인종에 대한 깊은 편견과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Moses는 새로 만들어지는 롱아일랜드 해변의 휴양지가 중산층 이상의 백인들만을 위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이지역에 대한 흑인과 소수인종, 빈민층의 접근을 차단하고자 마음먹었다. 그가 생각해낸 방법은 버스등 의 대형 대중교통수단이 이도로를 이용할수 없게 만들어서 자가용이없는(당시는 자가용의 보급이 일반화 되지않았다.)빈곤층의 접근을 차단하는 것이었다.이를 위해 Moses는 도로 전체에 걸쳐 200여개의 육교를 건설했고 구조적 차단을 더욱 확실히 하기위해 뉴욕 도시철도가 이 지역으로 확장되는 것을 막았다.
건축과 도시계획은 이런 정치적 의도와 가치관이 기술에 반영되는 가장 보편적인 경우이다. 예를 들어 군중폭동과 시가전을 방지할 목적으로 고안된 파리의 ‘방사상 대로’는 1789년 대혁명 이후 여러차례 반복된 시민봉기에서 좁은 파리의 가로와 골목은 바리케이트를 쳐서 봉쇄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시가전의 무대가 되었다.1848년 혁명이후 집권한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의 조카인 3세)은 시가전의 재발을 방지하고, 만일의 경우 신속하게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리중심가의 대대적인 재개발을 명령했다. 이에따라 좁은 구가로들이 철거되고 군대이동과 군중진압이 용이한 폭넓은 방사상 대로가 만들어져 파리의 중심부는 오늘과 같은 모습을 띄게 된 것이다. 1976년 서울대가 동숭동에서 관악산 밑으로 이전을 했을 때 이전 장소와 건물 배치구조를 놓고 유사한 비판이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예를들어 도로나 철도를 건설할 때 지형적 요인이나 건설 비용등의 문제외에도 노선이 통과하는 주변 지역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특정기술을 선택하므로서 얻게 되는 경제적 이익을 상쇄할 정도의 정치적, 사회적 부작용이 없는지 그럴 경우 다른 대체 기술의 선택이 가능한지 하는 것도 검토 해 봐야한다. 또 특정 기술의 채택이 불가피하다 해도 기술의 구성이나 배치방법등을 바꿈으로서 기술의 채택으로부터 파생되는 사회적 충격을 최소화 할 방법은 없는지도 찾아봐야 할것이다.이는 결국 가치의 우선순위 문제이다.(1997.4 중등 우리교육 126쪽)
여의도 광장을 뜯어 내고 공원으로 만든다는 것은 환경이란 주제로의 전환이면서 집단주의 문화를 가족주의와 개인주의문화로 바꾸는 전술적 사업이다. 서울시는 이를 위해 1단계로 97년 말에 여의도 샛강을 생태공원으로 조성해서 언론에 흘려서 시민들의 반응을 읽어보고 곧장 여의도 광장 뜯기 공사에 들어갔다. 샛강의 생태공원은 전술적 사업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략적 사업은 전술적 사업의 홍보와 모의 실천적 성격과 연계되어 긴밀하게 추진된다.

이런 의미에서 평화문화교류지대 계획은 자기의 전술적 사업 계획을 갖게 된다.
이에 강화도의 단군유적을 중심으로하는 10월 전민족문화 축제를 제안한다. 8.15 광복절 행사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그 사상적 뿌리를 역사적으로 더 높이 상승시켜 고조선의 평화사상의 거대한 흐름속에 용해시킬 수 있는 이 계획은 강화도의 단군조선문화와 서울의 통일운동을 육로가 아닌 수로 즉 한강으로 연결시키는 운동을 펼치므로서 한강하류에 쳐진 철조망을 걷고, 통일연습이 민족대단합정신을 전파하는 축제가 되게할 수 있다.

4) 지역의 정치,경제,문화 통합체계 (예: 동부문화쎈타)
지나다니는 길 기억하기놀이
5) 실질적 주도집단과 대표(집집마다의 정보)
6) 지역 지배권력의 구성원– 근거지를 통한 기동전 (이란,바스크)
(관공서,민간조직,기업,단체,정보기관, 집집마다의 정보등)
7) 지역의 기술문화수단 — 각종 시설물,
문화축제, 호수에 던지는 돌의 파문–지역은 시간의 이미지가 축적된공간
지역 공간 문화를 통한 거점 확보
문화벨트의 형성

노동에 대하여
1. 노동, 아름다운 노동
1) 책으로 노동운동을 배운 사람들
노동자 학습 때 노동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먼저 할지, 노동법을 먼저할지 토론이 붙은 적이 있었다. 나중에 지나고 보니 노동법을 먼저 한 사람은 자기 권리찾기에는 민감하여 자꾸 간부가 되고 투쟁에는 앞장서는데 현장으로 돌아가서 일하며 동료들과 어울리는 것에는 잘 적응을 못하는 것이다. 물론 학습만의 차이로 돌리기엔 무리한 해석일 수 있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든 지식은 무엇을 위한 지식인가? 누구를 위한 지식인가? 하는 가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고의적으로 악용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무의식적으로도 악용될 수 있다. 노동운동 초반에, 책으로 노동운동을 배웠던 사람들이 있다. 노동자의 역사적 지위와 역할에 대한 선언적인 단어로 머리가 가득차 있던 사람은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에 대한 추상적 이해로, 타락한 현실에 노출되어 있는 노동자의 구체적 생활상에 금방 실망하고는 자신의 추상수준의 혼란을 걷잡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야학하다 그런 경우는 덜했고 노조하다가 그런 경우는 더했으며 무슨 정치활동을 하다 그런 사람은 더욱 심했다. 치열한 현실에 맞부딫칠수록 당위는 더 심하게 파산되는법, 이런 경우에 노동운동은 살아있는 사람의 운동이 아니라, 관념의 운동이었던 것이다. 노동운동에 대한 사회과학적 지식이 주는 전망은 새로운 가치에 대한 기준이 없을 때 이미 낡은 것이다. 왜냐하면 전망은 지식의 문제만도 신념의 문제만도 아니며 신념과 과학이 통일된 주제이기 때문이다.

2) 투쟁으로 노동운동을 배웠던 사람들
노총산하 노조 교육을 갔다가 들은얘기다. 어떤 사장이 이런 말을 했다. 노조간부를 해고시키고, 구속시키고 별수를 다 써봤는데도 안되드라 그런데 한번은 미친척 하고 핵심간부 4명을 한사람씩 불러서 책상위에 5천만원씩 올려놓고 이걸 가져가든지 싸움을 다시 해보든지 알아서 하라고 하니까 4명 다 조금 고민을 하더니 돈을 챙겨들고 소리 없이 나가 더란다. 그래서 이사장 왈 “2억 쓰는 게 파업해서 손해 보는 것보다 이문이야”
자연 발생적인 노동자의 투쟁은 추상화된 계급이 아니라 개인을 찾고자 한다. 이점에서 개인의 권리를 찾으려는 부르조아적 시민운동과 같은 지향을 갖는다. 경제주의적인 노조운동은 나의 필요 때문에 단결한다. 나의 자생적 요구로부터 일어난 단결투쟁은 나의 요구인 소비와 복지가 1차적으로 해결되면 즉시 해체되어 버리고 만다. 소비문화가 단결투쟁보다 상위의 개념이 되어 있는 것이다. 열심히 임금인상투쟁을 해도 기분좋게 술을 마신다든지, 차한대 뽑아서 유지비 대다보면 게눈 감추듯 사라진다. 남들처럼 살아보자는 문화적 가치에 구속되어 있는한 노동운동은 합리주의적 질서와 권력에 봉사하는 운동이 되고 만다. 노동운동이 주체적인 삶의 운동이 되려면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과 투쟁 뿐 아니라 새로운 문화적 가치에 대한 답을 줘야한다. 투쟁은 노동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이다. 실천은 주체의 행위일뿐 주체 자체는 아니다. 역사적 자각이 있는 실천만이 주체의 실천으로 된다.

3) 예술로 노동운동을 배운 사람들
문화패 출신 노조 위원장을 우리는 간혹 만난다(지하철 석치순 전위원장. 민노총 김영대 한때 문화패의 조직적 고민 중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문화패간부가 노조위원장 되는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였다. 고민의 속도 보다 위원장을 요구하는 현실의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대부분은 좋게 보내주는 것으로 끝나고, 문화패 핵심간부를 노조에 내준 문화패는 정체상태를 벗어날줄 몰랐다. 사람 키워 놓으면 다 여기저기로 빼앗긴다는 푸념만 남긴 채… 나는 빼앗기는(?) 아쉬움보다 키워내는 자부심에서부터 전망을 찾고자 한다. 왜냐하면 위원장이 되고나서 문예적 감각을 잃어 가면서 조합원들한테 팍팍해져간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팍팍해 지는 지도자와 관료화되는 조직은 유럽에서처럼 노동당, 공산당, 사회당등이 노동운동에 자신의 논리를 부과하고 노동운동을 정당에 의해 지도 받는 ‘대중운동’으로 기능적 분리를 한다. 그리고 노동운동가를 조직의 질서와 권위의 감옥에 가둔다. 그래서 이 문제는 문화패만의 문제가 아닌 노동운동전반의 문제이다. 노동운동은 정치적 노동운동 이전에, 아름다운 노동과 신명나는 노동운동에 대해 얘기해야한다.

2. 사람의 활동인 노동, 노동중의 노동인 예술노동
노동은 세상을 개조하는데 그 본성이 있다. 예술활동도 노동의 측면에서 보면 예술을 통한 개조다. 노동에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있다. 정신노동은 반영형태에 따라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개조해야할 세계의 본성과 변화의 이치를 밝히는 노동이 있다. 학문의 형태로 나타난다. 둘째, 일정한 가치관에 따라 사람들을 동원하고 관리하는 노동이 있다. 정치, 종교등 가치활동 형태를 통해 나타난다. 셋째, 일하는 사람간의 소통과 교제를 원할하게 하는 노동이 있다. 주로 언어활동을 통해 나타난다. 육체노동은 정신노동의 요구에 따라 직접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킨다. 예술은 이 네가지 측면을 모두 포함한다는 점에서 다른 노동과 다르다. 에술은 첫째, 표현대상에 대한 지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예술이 개념적인 지식의 나열이 될 때는 물론 형상으로서의 예술적 본성을 깨는 것이 되지만 개념적 지식은 예술 표현의 인식적 전제가 된다. 그래서 아는 만큼 느낄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둘째, 예술은 객관적인 인식과 더불어 주관적인 가치 판단을 자체에 필수적으로 포함한다. 예술은 아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좋아한다는 것은 단순히 가치판단이 아니다. 대상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좋아하게 되면 더 자세히 알고 싶어지고 더 깊이 느끼게 된다는 점에서 가치판단의 적극적인 역할이 있다. 셋째, 예술은 소통적 계기를 갖는다. 어떤 경우에도 예술은 소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낯설게 해서 새로운 충격을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가장 평이한 소재나 주제, 민족적인 색깔이 짙은 기호를 찾으려한다. 어쨌든 소통방법은 예술적 숙련도를 측정하는 중요 부분이다. 넷째, 최종적으로 예술활동은 현실대상을 개조함으로써 자신의 활동을 모든 사람의 재부로 생산한다. 그것은 작품이다. 작품이 공업적 생산품과 다른점은 오로지 하나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데 있다. 공산품은 순수한 의미의 사회적 생산이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설계도가 있으면 누가 만들어도 똑같은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피타고라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중국의 주비산경(피타고라스의 정리와 같은 내용의 달력계산표)으로도 창조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예술은 누가 만들어도, 하다 못해 모방한 작품일 때 조차도 같은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예술작품이 하나하나로 완성된 노동의 산물임을 의미한다. 파편화 될 수 없는 완성된 노동으로서의 예술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별이 없어지는 노동의 궁극적 이상으로 비유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3. 자주적 노동과 예술적 노동

예술적 노동이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확산되고 있는 현상은 이러한 사실을 잘 반영한다. 예룰들면 노동조합 임투문화 교실에 예술이 아니면서도 현실적 필요에 의해 많이 등장했던 선전, 선동 훈련같은 과목을 보자. 선동술, 또는 웅변술은 이미 희랍시대부터 예술의 중요 형태로 여겨질 만큼 그 뿌리가 깊다. 선동술은 단순히 정치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단계에서 표현하는 단계로 발전되어 있다. 레닌식의 논리적 선동의 시대는 가고 킹 목사나 백기완선생 같은 감성적이며 예술적인 선동의 시대가 오고 있다. 이런 선동의 구조를 잘 보면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내용이 구체적이고 생생한 현실묘사와 결합되어 있다. 내용으로서의 이념과 형식으로서의 형상의 결합이란 점에서 선동술은, 응용예술, 실용예술의 형태로 예술문화의 구조속으로 들어온다. 또한 조합문화에 대한 많은 기획의 필요로부터 자생적으로 제기되는 기획 교실의 경우를 보자. 처음엔 일을 추진하기 위해 구색 갖추기용으로만 여기던 기획술은 잘 뜯어보면 예술노동으로서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정보의 수집, 분석, 종합에서 요구되는 인식능력, 좋은 정보와 나쁜정보를 파악하는데서 요구되는 가치판단 능력, 정보를 가공하여 기획의 씨앗을 잡아내고 구체적 계획을 수립하는데서 요구되는 상상력 (의식개조능력), 일을 추진하는데서 요구되는 숙련도(노동능력), 기획안을 설득력있게 해설하는데서 요구되는 소통능력과 표현력이 바로 그것이다. 기획자는 단순히 실무집행 공무원이 아니라 응용예술가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직 사업가들의 대화술 또한 주체간의 진정한 존중과 소통을 기반으로 형상적 계기를 통하여 설득과 교양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응용예술로 된다.(대화술에 대해서는 신바람 소식지 14,15호 “국민이 주인으로 나서는 새로운 시대의 예술형태 대화술” 참고)
이처럼 시대와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영역의 노동활동에서 노동의 예술화가 진행되는 것은 자주적 노동의 합법칙성과 예술적 노동의 합법칙성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4. 노동의 이상과 예술
노동자가 예술을 자기 손에 거머쥔다는 것은 노동의 이상을 획득하게 됨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념적 노동운동에 대해 익숙해져 있다. 어떤 때는 그 꼬리표를 떼고 싶어하고 어떤 때는 확실하게 달고 싶어했다. 이념은 전망적 요구라는 점에서 사람을 높고 멀리 바라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념은 밤 하늘의 별을 보다가 시궁창에 빠질 우려와, 당위만을 위한 당위가 되어 관성에 빠질 염려가 있다. 이념이 주는 과격한 이미지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관성화에 있다. 관성이란 운동의 정지요, 운동의 정지란 생명의 상실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념은 애초의 목적을 상실하고 변질, 퇴색되어 한순간에 고무신 바꿔신 듯 바꿔신는 일이 왕왕 생긴다. 그에 비해 이상이란 이념과 같이 전망적인 요구이면서 구체적이고 생생하여 사람을 추동하는 계기를 갖는다는 점에서 이념과 다르다. 또한 이상은 감정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강한 감염력을 갖고 미적 체험을 불러일으킨다. 일하는 사람들은 이념보다 이상의 형태로 미래를 만난다. 역대 사상가들이 홍길동전이나, 유토피아,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와 같은 소설을 써서 자기의 사상을 이해 시키려고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술의 씨앗이 되는 작품핵에서 이상은 가장 결정적인 기준이자 성분이다. 노동자들의 촌극짜기를 하다가 ‘우물을 깊게 팔려면 넓게 파야한다’는 속담을 바꿔 ‘진짜 노동자는 소모임속에서가 아니라 민중의 바다속에서’라는 작품핵을 내오는 것을 보았다. 이 작품핵에는 한 노동자가 자주성을 쟁취해 나가는 과정에서의 전망적 요구가 생생하게 담긴 씨앗을 가지고 있다. 작품핵의 완성도와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것은 이상이며, 역으로 이상을 가장 살아있는 형태로 성장 발전시키는 것은 예술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말에 공감한다. “위대한 예술가 이면서 위대한 사상가가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5. 노동자 문예운동
예술은 노동자를 노동자 답게 만드는 가장 힘있는 수단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안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안다는 것이 인식적 측면을 얘기 한다면, 좋아한다는 것은 아는 것을 기반으로 가치를 통일시켜가는 과정이며, 즐긴다는 것은 인식과 가치의 통일이 완성되어 세계의 주인이 됨을 뜻하며, 세계를 자기뜻대로 변화시키는데서 구속이 없어진 상태를 말한다. 즐긴다는 것은 저항을 넘어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가진 주체로 섰음을 의미한다. 이것을 인간정신의 반영형태에 따라 구분지어보면. 안다는 것은 과학의 영역이고, 좋아한다는 것은 종교와 정치의 영역이며, 즐긴다는 것은 예술의 영역이다. 시대정신의 발전의 단계로 보면, 안다는 것은 과학적 합리주의의 근대이전을 상징하며, 좋아한다는 것은 합리성과 저항정신의 근대를 상징하며, 즐긴다는 것은 세계의 주인으로서의 현대를 상징한다.
노동자가 노동자 다워진다는 것의 현대적 의미는 자기의 자립적인 이상을 자각하고, 노동자로서의 집단성을 획득함이 전제 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반위에서 지배질서에 대한 적응이 아닌 저항을 통해 자기의 문화적 가치를 건설해야한다. 이상, 조직, 저항, 문화의 4가지 요소가 충족 됐을때, 노동자는 노동자 다워 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속성을 키워가는데 있어서
예술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첫째, 이상은 생생한 형상을 통해 표현된다는 점에서 예술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둘째, 조직은 실제 사람을 꼬시고 설득하고 사업을 통해 무엇인가를 개조해 나가는 계기가 논리 뿐 아니라 정서적이고 감정적 계기를 갖는다는 점에서 예술의 정서적이고 추동적인 속성과 연관된다. 셋째, 저항에 있어서는 사람을 추동하는 계기가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예술은 구체적이고 정서적인 감염력을 갖는 속성으로하여 집단적 저항에로 사람을 불러일으키는데서 큰 역할을 한다. 네째, 문화는 현실에서 분위기나 느낌등으로 접수된다는 점에서 예술의 구체적 형상적 속성이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이처럼 노동자의 본성과 예술의 본성이 서로 일치하는 지점에서 노동자 문예운동은 발생한다.
이처럼 노동자에게 있어서 예술은 자신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가장 힘있는 수단이며, 예술은 노동의 본성과 만남으로서만 자신의 시대적 과제를 완수 할 수 있게 된다. 노동자 문예운동의 이런 본성으로부터 다음의 명언은 타당하다. 예술의 천재가 아니면서 노동자의 자주성을 실현 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는 없다.

통일에 대하여

1. 통일
통일의 목표 – 강화도에서 얻은 교훈
책으로 읽는 강화도와 직접 보고 느끼는 강화도와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어느책이고 강화도는 투쟁과 항전의 땅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종이 위에 그려놓은 허상이 아니라 역사라는 점에서 깊이 공감되는 바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번 가본 강화도에 가서 느끼고 오는 것은 강화도의 역사와 항상 반대의 것이었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밟히는게 유적지요 전적지인 강화도에서 민족의 강인한 투쟁정신을 찍지 못하는 것도 미안해 해야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진 찍는 사람에게 강화도는 참으로 사진 찍기 어려운 곳으로 찍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통일사진기행에서는 강화도를 두 번째 촬영지로 잡았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거기에 마니산 참성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통일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민족정신의 뿌리를 확인 하는 작업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일이기 때문입니다. 흐지부지 포기한 일을 ‘해야한다’는 이유만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 중의 하나였습니다. 우선 강화도 공부를 다시 해야했습니다. 뭔가 놓친게 있기 때문 아닐까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각자 공부한 내용과 경험을 다 쏟아 놓고 맥을 잡아 갔습니다. 정말 보지 못한게 있었습니다. 그토록 치열한 투쟁과 항전의 목표가 무엇이었을까? 왜 그런 투쟁과 항전을 시작했을까? 투쟁과 항전의 출발과 목표가 일치한다는 생각에 미쳐서야 숙연한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바로 평화 였습니다. 평화는 강화도의 역사의 흔적과 그와는 정반대의 천연덕스럽게 쾌청한 하늘과 자연을 모두 납득시킬만 했습니다. 강화는 투쟁과 항전의 정서를 뛰어넘는 원초적 평화의 정서를 갖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은 그 엄청난 상처와 시련을 모두 포용하는 평화와 원융의 상징일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약한 감상적 평화가 아니라 피빛 진흙 구덩이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의 평화, 수단으로서의 평화가 아닌 궁극적 목표로서의 평화, 이것이 바로 강화도가 통일을 앞둔 우리 민족에게 던져주는 잔잔한 이야기였습니다. 통일은 민족운명체를 복원하는 일입니다. 민족운명체는 평화로부터 평화를 향하여 발전합니다. 평화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투쟁일 때 그 또한 의미 있습니다.간혹 통일의 목표가 발전과 성장이라고 생각해서 다른나라보다 앞서고 때론 지배라도 하기 위한 조건인 것 처럼 생각하는 국내의 국수주의자나, 우리의 평화가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중국,미국등의 실용주의자의 태도는 평화를 목적으로 보지 않고 수단으로 보는데서 비롯됩니다. 평화는 평등과 조화입니다. 평등은 자기를 기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기준으로 자기를 낮추는 것이며, 조화는 둘이 한곳을 바라보고 하나가 되어 걸어가는 것입니다. 평화야말로 주체가 주체답게 발전할수 있는 지향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원효의 화쟁사상이나 조선조 유학자 기정진의 원융사상은 참고되는바가 있습니다.
* 화쟁(和爭)사상 : 원효의 시대는 중국의 불교이론이 물밀 듯이 수입되던 시기였고 그로부터 여러 당파가 만들어져 대립논쟁하던 시기였습니다. 원효는 이를 통일하기 위하여 당시 모든 불교이론을 전체적 입장에서 이해하여, 언뜻보기에 대립적이고 모순되는 이론들의 각각의 가치를 밝혀주고 그것들이 하나로부터 비롯됨을 깨닫게 했습니다. 원효는 서로 달라보이는 모든 것도 일심(一心)으로부터 비롯되므로 하나의 뿌리를 두고 있으며, 말뜻을 올바로 이해하고 자기의 집착을 버리는 태도를 가지면 대립과 다툼을 지양하고 화쟁할수 있다고 했다.
* 원융(圓融)사상 : 조선조의 유학자 기정진은 현상과 본질은 둘이 아닌 하나의 원리 즉 일리(一理)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고 수많은 다양성과 복잡성이 융통성있게 조화되어 하나로 일치된다는 원융사상을 폈다.
2. 통일의 관점
우리는 사람과 관계 맺을 때 4가지 태도를 갖습니다. 추종하기, 배려하기, 눈치보기, 무시하기가 그것입니다..추종하기는 내가 나를 버리고 상대방과 동일시할 때 생깁니다. 눈치보기는 나를 버리지도 상대의 주체를 인정하지도 못하는 긴장속에서 생깁니다. 배려하기는 나의 주체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주체도 인정하며 연대를 통해 주체를 실현하려 할 때 생깁니다. 무시하기는 나의 주체만 인정하고 상대방의 주체는 인정하지 않을 때 생깁니다. 그러나 이중에서 추종과 무시는 결국 비주체화란 점에서 뿌리를 같이 합니다. 추종은 동일시하려는 자아의식이 너무 강해 주체를 포기한 일방적 의존이란 점에서 그렇고, 무시는 자신의 주체를 실현할 대상과의 관계가 단절된 자아의식이란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는 추종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또 다른 대상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주체를 포기한 추종은 과거에는 신 때문에 사람을 버리게 했고,근대에는 돈 때문에 사람을 버리게 했으며 현대에는 문화 때문에 사람을 버리게 합니다. 이런 자리에 사람 사랑이 존재 할 리 만무합니다. 눈치는 주체화를 실현할 수 있는 상태라는 긍정성과 언제든지 비주체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기회주의라는 부정성이 혼돈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하루는 배가 나온 상사한테 ‘그것도 인격’이라고 말해서 ‘그래도 자네 밖에 없어’하고 칭찬을 들었는데, 다음날엔 ‘아니 자네 날 놀리는 건가?’ 하고 꾸중을 듣습니다. 눈치가 없어서 나의 주체가 무시 당하든 눈치껏 해서 나의 주체를 인정 받든 그 차이는 크지만 눈치 보는 상태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은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눈치보기는 나의 주체에 대한 확신과 대상 주체에 대한 믿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체에 대한 확신과 대상에 대한 믿음이 충만한 상태는 오직 배려하기 밖에 없습니다. 배려하기는 대상과의 연관 속에서 나의 주체를 발견하고, 확대 실현 하기 위해 대상과 연대하게 합니다. 나의 발전이 곧 대상의 발전인 상태. 이것을 일컬어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그래서 주체의 발견과 성장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이 전제 되었을 때 눈치와 무시는 배려가 되고 추종은 존경이 됩니다. 사랑은 그래서 나를 개조하고 세상을 개조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개조하는 유일한 혁명입니다.

3. 통일의 본성

사랑과 평화가 통일의 관점과 목표라는 점을 얘기 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물이 운동하는 것은 관점과 목표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강물은 강가의 바위와 무수히 부딪치며 하나의 목표를 향해 흘러갑니다. 그러나 강물이 그럴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곳으로 모이려는 본성 때문입니다. 본성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모든 사물이 운동하게 하는 원인입니다. 본성과 맞으면 화합하고 본성과 맞지 않으면 대립 투쟁합니다. 본성은 사물의 다양한 속성중에 가장 본질적인 속성을 말하며, 사물의 질이 되는 공고한 틀 입니다. 우리를 통일로 지향하게 하는 본성은 개인의 운명이 곧 민족의 운명이라는데 있습니다. 민족이 운명공동체라는 본성으로부터 분단이 민족운명체의 본성을 실현하는데 질곡이 되기에 분단상태를 극복하려는 것이며, 통일이 민족의 본성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란 점에서 통일조국을 건설하려는 것입니다. 북한의 물피해로 인한 농업기반의 와해는 남한의 농업이 회생할수 있는 상생구조가 와해됐음을 말하며 남과 북은 현재의 상태대로라면 식량무기를 앞세운 선진제국의 하부구조로 편입되는 고통을 감수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핵공방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에서 만일 핵이 터지면 남한이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북의 운명은 곧 남의 운명입니다. 분단의 피해는 둘의 힘이 하나로 분열된데 있는게 아니라 하나조차도 제힘을 내지 못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삼면이 바다인 반도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동해에 있는 배는 서해로 갈수 없습니다. 배한척이면 다 될 수있는 일도 반드시 두척이 있어야 합니다. 분단은 민족역량을 반감시키는게 아니라 소멸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합니다.
민족애와 민족자주의식을 기반으로 운명공동체로서의 민족을 회복하고 실현하고자 하는데 통일운동의 본성이 있습니다.

6. 다큐멘타리 사진의 형식

1) 사진과 언어
상형문자는 그림으로서의 성질과 문자로서의 성질이 분화되기 전의 상태를 보여준다. 그 이후 그림과 문자는 다른 길로 발전한다. 시각적 관습과, 언어적 관습을 중심으로하는 공고한 현실 반영 체계가 분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생각을 지배하는 언어와 현실을 구성하는 시각이미지는 전혀 다른 체계이기 때문에 서로 보완되어 사용된다. 둘의 관계는 주로 시각이미지를 문자가 지시하는 관계에 있다. 예를들어 ‘돌’ 사진과 ‘주춧돌’이라는 말은 그것이 다른돌이 아닌 주춧돌이란 사실을 명확히 한다. 보통 사진에서 언어는 제목을 붙이는 정도로 절제되어 사용된다. 그 작용이 미미해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는 그 반대로 사진의 가장 중요한 내용을 규정하고 지시해 버린다. 사진에 제목붙이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신문등의 사진에 붙는 설명 글은 더 복잡하다. 그래서 신문사진은 때때로 설명글을 가리고 보면 이게 무슨 사진인지를 전혀 알 수 없는 사진도 있다. 언어와 사진의 결합은 가장 간편하고 쉽게 진행되지만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것 일수도 있다. 그래서 때로는 ‘무제’ 라고 이름 붙이기도 하는데 무제는 제목 없음이 아니라 무제라는 제목이 되어버리고 만다. 즉 제목이 사진을 지시하는 관계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언어가 사진을 일방적으로 주도할 수도 있고, 사진이 언어를 풍부하게 재현 시킬 수도 있다. 또는 각각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만날수도 있다.
2) 사진과 음악
말에는 의미적 측면과 억양적 측면이 있다. 의미는 지시하는데 구체적이고 억양은 정서를 표현하는데 구체적이다. 사진 또한 의미와 지시적 측면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분위기와 정서적 측면을 갖는다. 들중에서 음악이 사진의 정서적 측면과 친근한 것은 만할 것 없다. 사진에서의 정서적 측면은 내용으로부터 우러날수도 있고, 형식으로부터 우러날수도 있다. 어느것이나 리듬적 요소와 연결된다고 하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사진과 음악적 요소는 슬라이드와 같이 영화도 아니면서 사진도 아닌 새로운 장르의 발전과 함께 자기 존재의 필요성을 발견하게 된다.

3) 사진과 시간
연극의 수천단어의 대사를 몇몇의 배우가 아니라 수천명의 배우가 동시에 소리치고 연기했다. 이것은 연극인가? 무의미한 장난인가? 전달하려는 내용이 있었고 알아듣지 못했을 뿐 전달했으니 했으니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극도 아니다. 연극은 수천단어의 대사를 시간속에서 연기해야 한다. 그래서 말의 순서와 감정의 시간적 흐름이 중요하다. 그러니 이것은 연극의 형식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사진에서는 이러한 시간압축이 가능하다. 초가집과 멀리 보이는 아파트를 같이 찍어 놓으면 거기에서 일어나는 많은 시간의 얘기를 연상할 수 있다. 그래서 사진은 시간의 흐름을 전제로 하는 연극적 갈래와 상호 보완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위에서 본 장르의 결합방식과 같이 자신의 작품이 어떤 갈래와 결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까지 구상이 섰을 때 창작기획은 힘이 붙는다.

7. 다큐멘타리창작 기획

1) 자료의 조사
2) 느낌 마구 이야기 하기등 감잡기.
3) 자료 수집과 분석 – 자료수집원을 확보하기
4) 작품핵 잡기
5) 촬영 기획안
6) 촬영 구성안

다큐멘터리 창작기획
창작과정은 결코 신비한 영감과 직관에 의한 과정이 아닙니다.철저한 조사와 준비,계획을 요구하는 것이 창작입니다. 기획은 아이디어와 유사하나 그아이디어를 어떻게 표현하고 실현할것인가를 일목요연하게 나타낸다는 점에서 다릅니다.기획이란 어떤 목표를 정해서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구상,제안 실천의 모든 체계를 말합니다.기획력 즉 기획능력은 기획자에게 요구되는 능력으로 예술적 능력과 유사한 미적능력입니다

기획은 조직경영기획부터 문예기획,홍보기획,동원 기획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어느것이나 공통되는 체계와 방법을 갖고 있습니다.기획의 기본 체계를 보면

4단계 10과정을 꼭 기억해 두십시오.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2단계4과정의 기획의 씨앗 잡기 입니다. 이것은 창작에서 작품핵을 잡는 과정과 거의 같은 구조를 같습니다.기획 씨앗 잡기를 중심으로 전후 과정의 방법을 따져가 보겠습니다. 모든 방법은 출발조건으로 부터 시작해서 목표달성으로 끝을 맺습니다.출발조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점과 입장의 통일입니다.어떤 문제를 어떻게 풀려고 하는가가 서로간에 정확히 회의를 통해 합의 되어 있어야 겠다는 것입니다. 이 회의의 내용을 명문화 할수 있는 문서양식을 만드는 일이 맨처음 할 일 입니다.

출발조건 합의문

번호
19 년 월 일

* 제 안 자 ;

* 기 획 자 ;

회의를 통해 합의된 내용을 기획자는 다시 정확하게 파악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그래서 8가지의 점검표를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