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기행백서서문2003/12/14

통일맞이 통일기행 백서 발간에 부쳐

여행은 ‘어둠’으로의 길 떠남이며, ‘결’과의 만남이다.

이시우

여행의 철학

여행은 갑골문에 많은 사람이 군기를 앞세우고 가는 형상으로 새겨져 있다. 갑골문이후의 금문이나 전문에도 그러한 형상은 그대로 전해지고 있으니, 여(旅)는 나그네를 뜻하게 되었지만 군대의 의미가 아직 남아 있는 말이다. 많은 사람이 행진할 때는 그 모습이 깃발을 앞세운 군대 같지만 혼자가 되었을 때는 나그네가 된다면, 이말에 담긴 군대와 나그네 사이의 역사적 간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역사를 움직이는 집단은 군대였다. 군대는 새로운 지배세력이 세상을 개척해나가는 전위대였다. 그래서 동양철학의 최고 개념중 하나가 된 도(道)도 원래 의미는 군대가 이방인의 머리를 잘라 땅에 묻고 지나가는 길을 뜻했다. 그러나 가장 강한 권력집단인 군대는 역사의 주동에서 반동으로 변했고, 박연암의 비유에 의하면 ‘천지에 천둥번개가 쳐도 귀머거리는 듣지 못하고 온 산하에 단풍이 들어 찬란해도 소경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의 관성이 그들을 농맹聾盲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 지배와 권력의 관성에 항거해야 했던 새로운 인물들은 세상을 떠도는 나그네가 되었다. 이들은 외로이 세상의 밖을 돌며 또 다른 세상을 보게 되었고 그 각성과 개안으로 역사의 새로운 주체를 만나게 된 것이다. 중국의 옛 시는 그 풍경을 이렇게 그린다.

何處秋風之 차가운 가을바람이 어디쯤 불어오고 있는지
孤客最先聞 외로운 나그네가 제일 먼저 듣네

군대가 주체가 되건 외로운 나그네가 주체가 되건 여행은 세상의 그늘을 찾아나선 길이란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역사의 주체인 그들이 세상의 경계를 넘어 선 여행을 그쳤을 때, 관성의 벽이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고, 그 벽의 그늘에 가리워진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냈다. 여행은 이처럼 그 본질에 있어서 낯선 세계와의 만남이며, 자신의 관성에 대한 반성이었다. 관광은 빛을 본다는 뜻이다. 그러나 빛을 보기 위해선 어두운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밝은 곳에선 빛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래서 어두운 자리로의 여행이 생략된 관광은 지루한 관성의 확산에 불과하다.

여행은 철학적으로는 ‘낯선 것’을, 미학적으로 ‘어둠’을 찾아나서는 길이다. 왜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여행이 필요한 것일까? 공자는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아는 것이 세상의 진리에 대한 인식이라면 좋아하는 것은 가치와 신념에 따른 지향이며, 이에 대해 즐기는 것은 인식과 가치의 완전한 체화하고 할 수 있다. 여행은 즐기는 것이다. 세상의 ‘어둠’에 대한 인식과 그 어둠을 만들어 낸 관성의 벽을 깨려는 가치지향적 실천이 생활속에 체화되어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그 때 세계를 변화시키는 주체는 최상의 지위와 역할을 얻게 된다.

즐거움은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다. 더 자세히 말하면 관계의 감성적 형식을 통해 만들어진다. 관계의 감성적 형식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것은 ‘결’이다. 바람은 존재의 개념이지만 바람결은 나와 바람이 만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관계의 개념이다. 반드시 주체가 세계와 만나는 순간에만 결은 발생한다. 숨결, 살결, 나무결, 흙의 결, 역사의 결까지 모든 결이 그러하다. 즐거움을 통해 살아있는 주체가 되려는 자는 ‘결’속에서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즐거움은 또한 완성이 아닌 과정이다. 언제나 진행형속에서만 즐거움은 발생한다. 바람결은 만지려는 순간 사라진다. 얻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다. ‘결’이란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칸트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무사심성無私心性’ 즉, 사심없음을 본성으로 하는 대상이다. 여행은 얻는 즉시 버리는 것을 필요로 한다. 얻기는 쉬우나 버리기는 쉽지 않다. 얻기만 하고 버리지 못하면 그것은 관성이 된다. 버리는 자만이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는 역설이 여행을 통해 배우는 미덕이다. 여행을 통해 결을 깨닫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여행이 즐거움이고 그 즐거움이 주체의 갱신이라면, 여행은 ‘어둠’으로의 길 떠남이며, ‘결’과의 만남이다.

여행의 대상
여행은 자연과 역사와 문명을 대상으로 한다. 여행은 주인인 사람과 세계와의 만남이기에 자연과 역사와 문명도 사람의 활동인 생활과의 관계에서 그 의미가 파악되기 마련이다. 자연은 생활의 조건이며, 역사는 생활의 과정이며, 문명은 생활의 결과이다. 생활의 중심은 일이다. 일없는 여행이란 즐거움 대신 허무를 가져온다. 주인없는 구조만을 보게한다. 여행의 한 페이지에서 고택을 만났다고 해보자. 관광객의 입장에서 기껏볼 수 있는 것은 아는만큼보는 것이다. 주인의 입장에 서야 살림집이 보인다. 그것도 등기상의 주인이 아니라 집을 끝없이 쓸고 닦고 하는 머슴의 입장에 서야 보인다. 청소는 때를 털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때를 묻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청소한 공간만큼 자신이 주인인 공간이 된다. 그래서 일한만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청소야말로 자연과 역사와 문명의 통일체로서의 집의 결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정확한 기준의 하나이다. 일은 때로 고통스럽고 고단한 것이지만, 고통은 보람을 통해 즐거움으로 전화한다. 일하는 주인의 관점에 섰을 때, 여행은 자연과 역사와 문명에서 원융과 조화를 발견하게 된다.

통일기행
생각해보면 기행은 여행의 기록인데 왜 우리는 ‘느끼는’ 감행도, ‘함께하는’ 동행도 아닌 고작 ‘기록하는’ 기행이란 개념을 고안해 냈을까? ‘관광’이란 단어에서 연상되는 춤추는 전세버스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여행’이란 단어에서 떠오르는 레저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진지한 답사나 기행쪽에서 새로운 개념의 돌파구를 찾으려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 기행은 어색하다. ‘여행’이나 ‘관광’의 내용을 새롭게 바꿔나가던지 그 언저리에서 다시 찾아볼 일이다.
통일은 분단의 극복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분단의 상처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도, 홀연히 뛰어넘어 너무 빨리 샴페인을 터트리는 것도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 통일이 보람있고 즐거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선 더 큰 바탕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 큰 바탕이 민족이었다. 통일은 민족이 하나됨. 그것이었다. 통일기행이 비무장지대와 민통선사이를 벗어나게 된 것도 ‘전쟁과 분단’에서 ‘민족’의 의미를 찾아내기 시작한 때문이다. 강화의 고인돌에서도 통일의 미학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민족미학의 원형이기에 가능하다. 통일미학의 그릇은 민족미학에서, 통일사상의 기반은 민족사상에 찾아지는 것이 순리인 것이다. 민족이 복고나 자국가중심주의의 좁은 틀에서 이해되는 것은 곤란하다. 이미 민족은 국제정치학과 지정학이 관통하는 중심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시간으로 보면 분단이란 화두는 전쟁 전후 50년 정도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유라시아 대륙차원의 지정학적 질서가 민족과 본격적으로 충돌한 것은 100년 전이고, 더 거슬러 가면 몽골제국시기이며, 공존한 것은 선사시대까지 올라간다. 민족미학이 유라시아차원의 문명 교류사와 함께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정도면 통일기행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가 된다. 그렇다. 통일의 시대란 풀한포기 돌하나도 통일의 눈으로 느끼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시대이다. 통일기행은 통일을 논리적으로 연구하는 단계에서, 실천하는 단계를 지나, 즐기는 단계에 들어선 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현상이다 그러하기에 통일기행의 대상이 넓어지는 것은 그 내용이 깊어지고 있음을 반영한다. 통일기행의 방법론은 본질적으로 논리적일 수 없다. 여행은 감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통일기행이 더 본격화될 앞으로의 시대는 통일미학을 요구한다. 통일기행의 방법론이 통일미학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통일기행은 무엇이 옳은가를 넘어 무엇이 아름다운가에 대한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이미 급진전된 민통선관광이나 금강산관광, 평양관광은 이러한 요구를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만들어 놓았다. 금강산관광과 평양관광이 독립된 개념으로만 얘기될 뿐 통일관광으로 통합되지 않는 것은 지리산관광이나 설악산관광이 통일관광으로 통합되지 않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아직 우리는 통일기행의 방법론을 통일의 시대에 맞는 것으로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도 통일미학은 통일기행의 발전을 위해서나, 즐기는 통일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나 중요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6.15공동선언의 실천사항을 유심히 살펴보면 많은 부분이 관광사업이다. 우리는 통일을 관광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즐거움이 차고 넘쳐 지루한 논리의 벽을 갇혀 있는 연합과 연방의 공통점을 찾아 통일국가로 나아갈 것이다. 통일관광이 곧 통일이다.

이 백서가 그 첫 계단이라도 될 수 있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