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하기-교동의 한현호선생님2005/04/28

재작년 한 방송사에서 6.25특집프로를 만드는데 출연요청이 와서 간 적이 있었다. 춘천에서 한시간여를 촬영하고 철원으로 넘어가서 두분의 다른 출연자들과 합류했다. 한분은 한국전쟁참전용사회 철원지회장님이셨고 다른 한분은 백마고지전투에서 살아남아 철원에서 정착해 사시는 참전용사였다. 방송이 요청하는 것은 젊은세대의 평화운동가와 나이든 전쟁세대가 이제는 함께 백마고지현장에서 화해하는 내용의 장면이었다.

나는 그 프로가 담고자 하는, 과거와 화해하고 평화의 시대로 나가자는 선한의도에 동감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전쟁문제를 둘러싼 첨예한 긴장과 대립을 대충 얼버무려 버리려는 한없이 어설프고 가벼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마고지 전투는 아직도 남과 북이 전혀 달리 해석하는 전투중의 하나이다. 남에서는 남이 승리한 전투로, 북에서는 북이 승리한 전투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란 그 자체가 안개인데 그 오리무중에서 명백한 승리와 선명한 패배 따위를 가르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하다. 가치와 판단, 해석의 착시속에서만이 명확한 승리 따위가 가능할 뿐이다.

백마고지참전용사의 증언이 이어졌다. 세월의 탓일까 그분의 말씀 속에선 남도 북도, 자유도 공산의 이념도 언급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선명해 지는 기억은 전쟁 그 자체인 것 같았다. 폭격에 흙처럼 뒤집어쓰는 먼지 속에서, 뒤의 동료에게 총탄을 받으려고 뻗은 손에 아무것도 안잡혀 고개를 돌려보니 이미 동료는 땅바닥에 시체가 되어 있었다 한다. 그의 기억속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졸음이었다고도 했다. 그분의 뇌리속에 남아 있는 가장 선명한 기억은 승리가 아닌, 전쟁에 대한 환멸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 앞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속에서 싸웠던 너와 내가 적이 아니라 너와 나를 싸우게 했던 전쟁이 적이라는 생각이 강해진 것은 그때였다. 전쟁속에 묻혔던 너와 나의 이야기를 온몸으로 정성을 다해 경청하지 않고, 그 깊은 갈등과 상처를 덮어두고, 평화만을 향해 나아가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 아닐까.

전쟁시 강화에서 있었던 민간인학살 희생자들에 대한 위령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어느 모임에서 나오다가 스치듯 들었다. 일주일에 몇 번씩 무슨 무슨 행사의 초청장이 날라와도 대부분 가지 못하는 형편인데 스치듯 듣고 나서 장소가 어딘지 확인해보지도 않은 위령제에 참석하기 위해 나는 오래전에 예약된 일정인 듯 16일(토요일) 아침 집을 나섰다.

장소가 대충은 강화역사관일 것 같았다. 그러나 관광버스로 가득 찬 주차장 어디에도 위령제를 할 것 같은 분위기는 없었다. 전화를 걸어볼까 하고 전화카드를 사서 공중전화 앞에 섰지만 전화기는 아마도 오래전에 고장 난 상태인 것 같았다. 공중전화가 거기 말고는 없는 상황이라 망연자실해 있을 때 강화구대교 쪽으로 올라가는 세명의 무리를 발견했다. 막다른 길인데 사람들이 올라가는 것을 보니 거기가 집회 장소임에 틀림없을 것 같았다. 과연 그랬다. 위령제에 누런 잠바를 입고 모자를 눌러쓴 노인 한 분이 박종렬목사님 곁에 앉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분에게서 왠지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김포쇄암교회의 최태육목사님이 양민학살에 대한 조사연구를 발표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분의 발표는 짧았지만 충격적인 것이었다.

“양민 학살은 전쟁 전인 1945년 해방직후부터 자행되었다. 대문리지서에서 학살이 있었고 선원면장이 칼에 맞는 자상을 입은 일이 있으며, 선원면의 고 아무개란 분등 두분이 예비검속 후 사망했고, 양사면사무소에서 송길용이란 분이 미군에게 항의하다 학살되었고, 서북청년단이 조직됨으로서 강화도의 우익세력이 조직력을 갖게 되었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좌익세력에게 피랍되어 77명의 경찰 공무원등이 산옥조합(?) 인해성에서 학살된 일이 있으며, 장영순외 10여명이 송악산 부근에서 학살된 일이 있었다. 좌익에 의한 학살사건들은 이외에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으며 현재 공식적으로 추모되고 있다. 그러나 우익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던 학살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들 사건 자체가 우선은 객관적이고 제대로 알려져야 우리는 역사적 상처를 제대로 치유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온수리 신사터에서 10월 초순 재판받으러 가는 사람들(어린이들도 구경삼아 따라갔던 듯)이 길옆 야산에서 학살되었다. 서검도, 불음도, 아차도, 서도, 교동도 석모도등지에서 엄청난 학살이 있었다. 석모도 어류정에서는 100명 정도가 죽었고 지금 백만평관광단지 조성중인 매음리에서도 엄청난 학살이 있었다. 교동의 경우에는 달우물에서 18명을 비롯, 강화전지역보다 더 많은 인원이 교동에서 학살 되었다. 갑곶, 송해, 산이포, 찬우물에서도 학살이 있었다.

김포의 경우 대곶면 율생리 소하리 골짜기에서 100여명이 죽었고, 양택리 해안가와 군하리 유리마을지나서 레미콘공장터에서도 학살이 있었고, 김포시청 뒤에서도 학살이 있었다. 목사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직업이기도 한데 조준홍씨라는 분의 아버님은 여러번을 찾아가 설득하고 기도해 드렸지만 아직까지도 입을 열지 않으시고 계시다. 읍내리(?) 바닷가 선상에서 가족이 윤간당한 후 학살당한 것으로만 알고 있다.

가평, 양평, 포천, 서울 서부지역, 파주등은 아직 사실 자체가 드러나지도 않고 있다. 과거의 상처를 다시 들추어내야만 하는 양민 학살에 대한 조사 작업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부탁이다. 지금이라도 밝혀질 것은 밝혀져야 한다. 말해질 것은 말해져야 한다. ”

초면인 최태육목사님의 균형잡힌 관점과 차분한 목소리의 호소에는 울림이 있었다. 잊혀진 전쟁의 현장을 찾으며 느꼈던 마음속의 번뇌와 편린이 미력하나마 남아 있어 그분의 호소에서 울림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했다. 말하지 않는 자가 말하게 할 수 있는 힘은 온 정성을 다해 진심으로 경청하려는 자세가 그에게 전해졌을 때이다. 목사님의 말씀대로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강화유족회 서영선회장의 소개로 두분이 앞으로 나가셨다. 그중 한분이 박종렬목사님 곁에 앉으셨던 누런잠바의 그분이었다.

성함은 한현호. 어눌한 말투로 당신의 이력을 소개해 나가셨다. 나는 정면으로 쏟아지며 작열하는 태양에 오히려 눈앞이 가려지는 흰 어둠속에서 그분이 말하는 이력을 쫒아 드라마 같은 상상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 첫장면은 어느 영화의 도입부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일본군비행기가 동네 하늘을 날아가며 전단지를 뿌린다. 전단지엔 소년 비행병 모집이란 글씨가 박혀있다. 그것을 들고 한현호씨는 일본으로 건너갔고 비행대에 편입되어 대동아 전쟁에 참전한다.

“그 다음엔 비루빈(필리핀)에 파견됐어요. 거기서 공군으로 군무했지요. 전쟁 끝무렵에 가서는 미군이 비행기를 다 파괴하고, 태평양 너머로 건너갔던 일본공군 애들은 겁나서 돌아오기도 하고 그랬어요. 한국인들은 전방배치해서 군함가미가제로 이용할려고 했어요. 근데 비행기가 다 파괴되고 업스니깐 제대로 이용도 못한거죠. 그러고 나는 포로가 돼서 부산으로 도착했어요. 거기서 서울까지 기차로 와서 서울서 교동까지 걸어서 집을 찾아온거죠. 그리고 나서 해방 되고, 난 공군에 지원해서 공군사관학교에 입학을 했죠. 그리고 소위까지 임관돼서 당시 여의도 비행장서 근무하게 된 거예요. 인천직업학교라고 있어요. 내가 1긴데. 같이 근무하던 애 중에 거기 2기 되는 놈이 있었는데 얘가 비행기 타고 훈련하다 그냥 북으로 넘어간 거예요. 나는 그 즉시로, 그때 김창용이 한테 붙들려 가서 이태원서 고문… 정말 징그럽게 당하고… ‘사실대로 불어’ 그러면 ‘나는 아는 애니까 식당가서 같이 앉아 밥먹은 거 밖에 없다.’ 그러면 또 고문해서 불라고 하고, 그러면 나는 ’나는 아무 죄도 없다… ’그렇게 끝까지 버틴 거예요. 근데 6.25터지니까 무데기로 석방 시키드라고, 그래서 교동으로 돌아왔는데 가만히 잘 지내고 있는데. 한부동이라고 있었어요. 부랑자로, 아주 못된 짓은 혼자 다 하고 돌아다니던 놈인데 8240부대 이런데하고 연계가 되서 치안대장이 돼 가지고 나를 빨갱이로 모는 거예요. 친구 그것 땜에… 그래서 곧장 인천 해병대로 보내져 갔고 군함위에서 그냥 재판이 벌어졌어요. 군법재판이지. 뭐 볼 것도 없었어요. 95%가 다 사형이었으니깐. 나는 그나마 천만 다행으로 10년형을 받았어요. 거기서 곧장 마산 형무소로 이송됐죠. 거기서 1년반동안 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왔어요. 그래 교동으로 돌아와 보니 백석포 부둣가에서 어머니가 총살당해서 이미 돌아가신 거예요. 치안대장이 어머니를 8240부대에 넘긴 거예요. 그걸 최근에 알았는데 어떻게 알았냐면.. 명치대 나와서 교동금융조합장 하던 사람이 있었어요. 이 양반 수원서 사는데 전화가 왔어. 내가 니 어머니 죽인 사람 알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부동이를 알게 된 거예요…. ”

한현호선생은 일본군에 입대하여 전쟁포로로 돌아왔으나 다시 공군으로 입대 할 수 있었던 내력에서 보이듯 반일민족운동가도 진보인사도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은 사소한 우연을 거대한 오해로 만들고 결국 한 인간의 일생을 완전히 파괴하고 말았다. 이는 전쟁이 이념만의 문제가 아님을 여실히 증명한다.

1907년 네덜란드 헤그에서 체결된 ‘육전법규와 관습에 관한 조약’에 따르는 부록규칙에는 평화적 도시와 농촌에 대한 무차별 폭격과 포위의 금지와 점령지역에서의 무고한 평화적 주민들에 대한 박해와 학살의 금지를 규정하고 있다. ‘교전단체로 승인된 이후 이들 법규에 대해 위반하는 행위는 전쟁범죄로 인정된다’고 국제법 사전은 쓰고 있다.

양민에 대한 학살이야말로 전쟁의 가장 명확한 실패이다.

몽골침략과 양대양요에 이어 한강하구가 유라시아체제에 편입된 채 지금까지 이어져오게 한 역사적 사건이 한국전쟁이다. 이 과정에서 겪을 수 밖에 없었던 한을 풀지 못하고 평화의 바다로 나아가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누구도 꺼내기 싫어하는 역사이다. 그러나 해원 없는 화해는 위선이다. 전쟁에 대한 처절한 성찰 없는 평화는 그 자체가 이미 폭력이다.

잔인한 4월을 봄의 환희로 넘치게 하는 생명의 힘처럼 유라시아평화체제의 봄바람이 되어야 할 한강하구가 꼭 보듬어 안아야 할 역사 한편을 확인한다.

고개 들어보니 철없는 꽃들은 눈부시게 흐드러지기만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