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하기-오영호,함혜란선생님 부부2005/05/21

경청하기

오영호, 함혜란 선생님 부부

오영호 선생님을 만나러 간다. 오영호 선생님은 서울대 농악대 출신으로 터울림등 문화단체에서 활동하시다가 10년도 전에 강화에 내려와 자리를 잡으신 분이다. 농민회, 생협, 마리중학교등 강화도의 시민단체를 만드는데 거의 관여 했으며 지금은 출판일을 하시고 계신다.

지난 목요일 불현듯 시간이 나서 찾아가기로 했으나 저녁에 선약이 있었던 관계로 취소되었다. 부인인 함혜란 선생은 일요일에 당신께서 직접 우리집으로 찾아오시겠다고 했다. 그 일요일이 되었다. 풀도 뽑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했다. 12시가 되었는데 연락이 없어 혹시나 싶어 전화를 드렸다. “저 오늘 오실수가 있는지요?” “아 예에에 제가 갈 수 있습니다.” “그럼 혹시 몇시 쯤 오실 수 있겠는지요?” 저녁엔 약속이 있고… 두세시경 쯤 가겠습니다.“ ” 예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나 전화를 끊고 나니 뭔가 오선생님의 답이 흔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 내가 찾아가야지 어쩌면 당신이 직접 오시겠다고 한말은 인사치레로 하신말일 수도 있었어.’

그러나 한편으로 남은 빨래도 더 해야겠고 고민이 되었다. 조금 기다려 보자. 그러나 역시 여기로 오시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청하는 것은 내가 아닌가? 상대를 섬기고 모셔야 할 내가 오라가라 해서야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이다. 시간이 더 흘러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서둘러 전화를 해야 했다. 비누 묻은 손을 서둘러 씻고…

“저 오 선생님 제가 댁으로 가면 안될까요. 폐가 되지 않는다면요” “그럼. 그러시죠”

‘그래 잘했다. 전화 걸길 천번 잘했다. 내가 가는게 맞는 것이다.’

생각보다 오선생님 댁은 멀었다. 1시간 반이 넘게 걸었는데 아직 집이 눈에 띄지 않는다. 걷기는 경청의 준비이다. 상대방을 경청하기 위해 내안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혹시라도 비우지 못 한 게 있으면 비울 시간을 가져야 한다. 정성을 다해 만날 자세를 가다듬고 호흡을 고르고 옷매무새를 고쳐야 한다. 나를 맞이하는 상대가 어떤 상태이든 나는 그렇게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민들레가 세상을 점령한 듯 사태가 났다. 작은 우주를 창조한 민들레의 수고에 고개가 숙여진다. 찾아가는 길 제법 옷깃을 날리는 봄바람에 영원히 보존되도 아까울 홀씨들은 속절없이 공중에 흩어지고 순식간에 민들레는 앙상한 씨자루만 남는다. 그리고 말라간다.

그러나 민들레는 나를 버림으로써 더 큰 나를 얻게 될 것이다. 내가 만들었다고 내가 쥐고 있을 필요 없다. 오히려 잘 버리기 위해 그토록 완벽한 소우주를 창조해야 했던 것이다. 온 정성을 다해 창조되지 않으면 제대로 버려질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의지도 갖지 못한 채 내던져지지만 어젠가는, 어떻게든 씨앗이 뿌리를 내릴 것이라는 확신 하나 정도는 갖고 있는 것으로 인정해주고 싶다. 거대한 나에 대한 확신 없이는 나는 영원한 작은 나일뿐이다. 문득 학생 때 학습했던 ‘류적존재’란 말이 스쳐갔다.

류적존재란 결국 관계적 존재이다.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존재의 본 모습인것이다. 온 정성을 다해 자기를 꽃 피우고 속절없이, 미련없이 버릴 수 있는 존재야말로 관계적 존재의 상징이 아닌가.

나는 아직 버리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함혜란 선생님이 아들과 세차를 하고 있으시다.

함:아이구 여까지 걸어오셨어요?

이:집이 좋군요.

함:얘는 얼마나 걸리는가가 궁금한가 봐요?

이:한 1시간 반 정도요 넉넉잡아 두시간이면 올 수 있는 거리입니다.

오영호 선배가 방에서 내다보고 밖으로 나오신다.

오:그래 어떻게 지내세요

이:잘 지냅니다.

오:계속 강화에서 작업하고 계시는 거예요?

이:예 그렇게 지내다가 요즘엔 나가 있는 일이 많습니다. 제가 한말에 제가 꼬리를 잡혀서요. 저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을 벌이고 말았습니다.

오:무슨일을 벌이셨어요(모르셨나. 그보다 내가 처음부터 설명할 기회를 주시는가보다)

이:한강하구에 평화의 배띄우기라구요

오:그전부터 계속 사진 작업은 해 오셨쟎아요.

이:이제 진짜로 할려구요

오:아 진짜루…

이:우선 간단히 설명을 좀 드릴까요.

마당에 마침 탁자모양의 것이 있어서 그 위에 지도를 펴고 설명을 드렸다.

이:그래서 지식만으로는 사람을 움직일 수가 없고 정성과 공을 드려야 되는데 역시 그것만으로로도 안되고 지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 지혜를 얻으려고 왔습니다.

함: 뭔가 정성드려서 준비하는 느낌이 막 드네요.

오:지혜는요. 그냥 궁리해보는 거죠. 궁리하면서 하는거죠. 그리고 이건 당연히 해야할 일이니까…학생때 그랬듯이 지금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면 해야죠.

이:맞습니다. 해야할 일이면 한다. 사실 그런 소박함이 가장 힘이 있는 것인데요. 제가 한분 한분을 찾아가서 뵙고 만나 얘기를 들어보니 다들 이제는 신중해 지신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전에 운동권이셨던 분들보다 운동권에 참여하진 못했지만 호감을 가지신 분들이 더 적극적이신 것을 느낍니다.

오:그렇지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조직이나 단체에 속해서 활동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런분들을 앞에 모시는 것을 주저하는 것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오:그럼요. 당연히 그렇구말구요. 그런분들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 주시면 일이 훨씬 힘이 붙죠. 그리고 각자가 하는 일들이 이런 큰 줄기로 자꾸 수렴되도록 해야지요. 각자가 하는 일은 작기도 하고, 작은 난관에 주저않기도 하는데 이런 중심이 생기면 훨씬 멀리보고 갈 수가 있어 좋지요. 그래서 그것들이 각자 나가되 중심으로 수렴되도록…..

어쨌든 이건 중요한 일이네요. 힘 닿는데까지 하겠습니다.

나는 오선배에게서 무슨 지혜를 얻었나? 돌아나오며 자문해 본다. 특별한 것은 없다. 그러나 기분이 이렇게 좋을 수 없다. 산마루를 넘어 갈 때 쯤에서야 알았다. 그가 바로 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