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통신 26 금강산 철길터에서-프레시안2010/04/23

기억의 흔적 속에 우뚝 선 강철
〈전태일통신 26〉금강산 철길터에서

2006-03-10 오전 10:14:27

전쟁은 사람만을 죽이는 게 아니다. 기억을 죽이고, 상식을 죽이고, 상상할 자유마저 죽인다. 그리하여 전쟁을 겪은 자의 가장 큰 불행은 상상할 수 있는 미래의 기준이 될 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됨됨이가 무엇인지의 근거가 되었던 과거를 기억할 수 없다면, 반성도 할 수 없고, 혁신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랬다. 기억이 무너진 자리의 허전함을 채우려는 욕망의 질주를 따라 우리는 고도의 속도로 변신하고 달려 왔다. ‘변해야 산다’가 이젠 시대정신이 되었다. 변해야만 살 수 있는 좌표 없는 현실을 만들어 낸 배후에 전쟁이 있다.

여기 금강산 철길이 있다.
조선의 모든 철도가 죽고살기의 전쟁 아니면 먹고살기의 경제만을 위해 만들어질 때 아름답게 살기 위해 만들어진 유일한 관광철도가 금강산선이다.

금강산선 철교. 침목 썩어 가루된 자리에 새순들은 노래합니다. 사람에게 베어지고 다시 버려진 뒤에 풀에게 썩어가는데 침목들은 그저 침묵할 따름입니다. ⓒ이시우

금강산 철길은 일제시기 민족자본의 힘으로 만들어져 철원과 내금강 사이를 운행하던 관광노선이며, 그 노정은 관동별곡의 여정을 충실히 이어 받았고, 조선후기 ‘금강산 산유록’ 류의 문화로 완성된 금강산 미학의 근대적 실현 그 자체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금강산 철길과 그 주변은 아이젠하워가 핵전쟁을 검토하기 위해 방문했던 곳이었고, 생물학전을 실험했던 곳이며, 그 결과로 유행성출혈열의 진앙지가 된 곳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사용할 고엽제를 실험했던 곳이고, 또 직접 살포했던 곳이다.

전쟁과 분단의 융단폭격을 맞고 죽고살기도 아니고, 먹고살기도 아닌 아름답게살기의 기억과 생활이 남아났을 리 만무했다.

하늘은 제 얼굴이 보고 싶어 비를 내렸습니다. 물 고여 길은 끊어져 있었습니다. ⓒ이시우

우리의 근대적 기획에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 사정에는 이런 이유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핵이니, 화학무기니 서슬퍼런 전쟁의 기획은 건재한데도, 아름다움을 찾기 위한 기획은 부재하다. 다시 근대를 질주하던 철길터에서 현대를 열어갈 미학을 사색한다.

아름다움이란 알고 보면 얼마나 슬픈 것인가? 그 비극을 성찰하지 않고, 어떻게 아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을 것인가?

시린 하늘 저 편으로 날아가는 새. 당신은 이유 없이 눈물 흐른다고 했습니다. 당신 안에 아픔의 지도가 많아 낯선 풍경도 쉬 지나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이시우

잊혀진 것들은 언제나 낮은 자리에 있다. 소외된 것들은 언제나 어둠 속에 있다.
잊혀진 것들은 자신을 잊혀지게 한 것들과 싸워야 한다. 소외된 것들은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 자신과 싸워야 한다. 단 하나도 놓치지 않는 처절함이 있기에, 단 한순간도 흐트러지지 않는 겸허함이 있기에 잊혀진 것은 역사가 된다.

못은 80년 동안 철로를 부여안고 자신을 박아 놓고 있었습니다. 때론 포화와 싸우며, 때론 무관심과 싸우며, 그러나 무엇보다 자신과 싸우며. ⓒ이시우

비극을 신명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작업이 금강산선의 복원일진대, 금강산 철길터엔 철없는 아지랑이만 피고 지길 수십 년이다. 잊혀진 것들과 잊고 있던 것이 만나야 한다. 만나고 나면 너무 쉬워 보이는 바로 그 만남을 위해 사실은 ‘목숨을 건 비약’ 이 필요하다고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통해 말하고 있다. 만남을 가로막았던 전쟁의 분신들과 싸우는 처절함의 어느 순간에 결사적인 비약이 이루어져 우린 비로소 만날 수 있다. 만나고 나서야 대화할 수 있다. 대화하고 나서야 기억될 수 있다. 나는 금강산 철길과 만날 수 있는가? 대화할 수 있는가? 그리고 기억할 수 있는가?

철길이 스스로 버티며 준비했던 시절만큼 이젠 우리가 그 준비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기억하는 자 있어 과거는 역사가 될 것이다. 상상하는 자 있어 미래는 현실이 될 것이다.

아련한 기억도 결국 역사임을 금강산 철길은 깨닫게 합니다. ⓒ이시우

눈 속 철도 종단면을 찾아냈을 때 철로는 누운 선이 아니라 우뚝 선 강철이었습니다. 50년 상처를 안고도 제자리를 지켜낸유연한 곡선의 강철이었습니다. ⓒ이시우

상상할 수 있는 힘은 이상이 되고 이상은 미래를 현실로 만듭니다. ⓒ이시우

이시우/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