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편지3-6.20 2008/01/19

일평(一平)조남권 선생님으로부터 ‘서전집주’강독을 들을때 한문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싶어 고승전을 펼쳐 본적이 있었다. 그때 읽은 이야기중에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구마라집스님 이야기였다. 극락, 색즉시공 같은 개념을 만들어낸 구마라집은 타고난 어학실력으로 범어를 소화하여 우리가 알고있는 불교경전의 대부분을 번역해낸 실크로드 최고의 지성이었다.

잘 기억이 나지않지만 중국의 한 장군이 구자국까지 정벌을와서 구마라집을 옥에 가두고 그를 파계시킴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확인받고자 했다. 그 장군은 구마라집 앞에 한 여인을 데려다 놓고 그 여인과 자지 않으면 그 여인을 죽인다고 위협했다. 구마라집은 악과 싸우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고 스님의 목숨을 위협하는것으로는 그를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았기에 새로운 방법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때 구마라집의 나이 35세, 우연히도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마귀들과 목숨을 걸고 싸워 물리쳤던 나이와 같았다. 구마라집은 자신이 죽는것은 감수할 수 있었으나 처음 보는 연약한 여인이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때문에 죽게 된 상황때문에 심하게 번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 여인과 함께 자는 길을 택했고 중국의 이 장군은 구마라집의 파계를 선언하고 자신의 권위를 떨친다. 그리고, 인질로 구마라집을 끌고 중국으로 데려간다. 대충 그런 이야기로 기억된다.

그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고민을 잠시 해보다 책을 접었던것으로 만 기억이 남아 있다. 갑자기 구마라집의 이야기가 떠오른것은 6월6일 단식을 접겠다고 편지를 보내고난 한참뒤였다. 편지에 쓴대로 전쟁으로 인한 죽음을 생각하고 고뇌하여 독서하고 글을 쓰던 중이었다. 기력이 없어서 앉아 있는 시간보다 어쩔 수 없이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지던때 였지만 무릎을 꿇고 허리를 세워, 오랜동안을 앉아 있었다. 몇년전 접었던 책갈피를 펼쳐 확인이나 한것처럼 내가 구마라집이었다면?

인생의 길에 참으로 어쩔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순간이란 것이 있다. 나만의 결심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수많은 상황중 하나가 스님앞에 끌려온 여인일 것이다. 그 연인은 적의 조종으로 나온 사람일 수도 있고 스스로 스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설득하기 위해 나온 선한 이웃일 수도 있다. 나 하나의 자존과 신념때문에 다른 생명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은 죄악 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긴 고민 끝에 구마라집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악독한 중국장수의 목적은 여인을 죽이는데 방점이 있었던게 아니라 구마라집을 파계시키는데 있었다. 구마라집이 그 어떤 방법을 써도 파계시킬수 없다는것을 중국장수가 깨달았다면 여인을 죽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므로 여인을 죽이지 않을 것이고, 구마라집도 파계할 필요가 없을것이다. 결국 구마라집이 목숨을 던져서라도 그 상황에서 장수를 포기시킬 결심을 보여주지 못함으로써 여인은 살렸으되 불도는 지키지 못하고 말았다. 어쩌면 구마라집을 조롱하고 평생 죄과를 덮어씌우기 위해 여인도 죽여버렸을지 모른다.
” 인질이 된 여인을 살리려거든 무소의 뿔처럼 가라!”
내안에서 들려온 소름끼치듯 명징한 소리였다. 내의지와 달리 나로인해 옥담밖에서 인질이 되어 있는 수 많은 분들의 인연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보이질 않은 까닭에 6월6일 현충일에 단식을 멈추어 버리고 마는것 같은 석연찮음과 마음 무거움이 이제 어떻게 풀려야 할지를 알게되었다. 6월5일 이었다.

저녁이 다 되어 구치소직원이 휠체어를 끌고와 방문을 열었다. 어디를 가는가 하고 물었더니 어디를 가는지는 말했으나 왜 가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다시 물었더니 자기도 심부름만 하는것이라 모르겠다고 한다. 면회실이었다. 뜻하지 않은 손님이 들어오셨다. 처가 한상렬목사님을 모시고 온 것이다. 포옹으로 인사를 나누고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만약 내가 단식중인 누군가를 면회온다면 나는 그 앞에서 얼마나 큰 부담을 갖게되고 또 말 한마디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를 몰라 한참을 당황하고 허둥지둥할까? 그래서 면회오는 분마다 다시는 오지 마시라고 부탁을 드리곤했다. 권영길선생님을 시작으로 이영순선생님,민가협어머님,오종렬의장님, 백기완선생님을 이 자리에서 뵈었다. 이 난감한 상황에서의 만남을 통해 나는 한 시대의 거인들을, 또 그분들의 체험의 깊이와 사상의 경륜을 만났다.

구마라집은 색과 공을 나누고 그것을 다시 하나라고 말했다. 나는 그 심오한 이론에 무언가 결핍된 것을 느꼈다. 색이 어떻게 공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과정이 빠져있다. 이 결핍이 설명되지 않는 색즉시공은 자칫 관념의 유희로 현실의 참상을 가리는 타협과 회유의 언술로 될 뿐이다.

자본론 1권 ‘상품의 교환’에는 ‘목숨을 건 비약’이란 개념이 한 줄 지나간다. 저절로 이루어질것 같은 상품의 교환이, 사용가치가 어떻게 교환을 통해 가치로 전환되는가에 대해 공학적인 설명대신, 결정론적인 논리대신, 신비하고 추상적으로 보이기까지한 개념을 쓰고 있는 것이다. 소금을 일용품과 바꾸기위해 히말라야의 벼랑을 지나 수개월의 여행을 한다는 캐러반의 현실이 모든 상품교환에 내재된 본질이라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색과공의 전환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자는 목숨을 건 비약을 체험하고 이해하는 자이다. 절박한 상대를 향해 무엇인가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그만한 체험을 감당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특권임을 나는 안다. 이 면회실에서의 만남은 그래서 참으로 특별한 것이었다.

오종렬의장님은 조직의 요구로서 단식 중단을 설득하셨고 준엄한 명령으로 포박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백기완선생님은 ‘단식은 죽을 걱정따윈 내려놓고 하는거야 오직 의지만 붙잡고 나가야 되는거야’,'그리고 저항을 시로 쓰라고. 그것이야말로 해방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보다 이처럼 강한 영웅이 되기까지 백선생이 거쳐왔을 고난과 외로움의 무게를 가늠해보고 있었다. 그리고 검찰청에서 봤던 문정현신부님의 ‘너무 슬퍼서 눈물이나’라던 천진하기까지 했던 순수한 동정심과 날마다 촛불집회에 참석하러 익산서 올라오신다는 함께함에 대한 지극한 정성을 전해들으며 투쟁가 운동가로만 보아왔던 나의 편협한 시각을 반성하게 되었다.

또 하나의 만남이 있었다.

어느날 ‘그날이 오면’ 서점에서 양심수들에게 보내는 책이라며 ‘소금꽃나무’라는 책이 배달되었다. 김진숙, 민주노총부산본부지도위원이란 직함이 저자의 첫 약력이었다. 자신이 겪었던 열사들의 삶을 뛰어난 글 솜씨로 잔잔하고도 강렬하게 전해주고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고 거리를 두려했었던 한순간 한순간의 현장에 가장 아프고 피해갈 수 없어 맞닥뜨려야 했던 순간에 저자가 허둥대고 난감해하며 무력하게 느꼈던 감정들이 나를 부끄럽게하고 숨고 싶어지게 했다. 참으로 명작이다. 그녀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절창이었다.
구마라집의 선택에 대한 내마음의 결론과 더불어 나의 결심에 그것은 분명 영항을 주었다.

면회실 책상의 맞은편에 앉은 한상렬목사님과 말없이 눈빛이 마주쳐 있었다. 지금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것을 생각하고 있는지 먼저 물으셨다. 그것은 예리한 의도를 담은 뭔가를 작심한 질문이었다. 나는 순간 나의 생각을 말 할뻔 했다. 오늘까지에 이르러 도달하게 된 결론을 나는 말하지 않고 묵묵히 피해갔는데도 목사님은 벌써 내 마음 한가운데 들어와 있었다. “수많은 단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처음 전태일평전을 읽었을때 언젠가 나도 분신 할 수 밖에 없겠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단식을 할 때마다 어떤 절박한 순간에 이를때마다 나는 그 생각을 씻어버리지 못하고 다가서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생각을 완전히 씻어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부활절주간에 기도를 하다가 허세욱열사의 분식소식을 들었습니다. 그의 투박하지만 명료한 유서를 읽었습니다. ‘나는 한번도 나 아닌적이 없다’ ‘나는 민중을 구하기 위해서 산다’ 나 아닌것은 어떤것도거부하고 내가 생각하고 판단한대로 살았다는겁니다. 운전이나 하는 사람이 어떻게 민중을 구할까 싶지만 그렇구나 민중은 민중만이 구할 수 있구나 나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독택시에서 그 분은 “나는 한번도 윗자리에 서 볼려고 한적이 없다” 오늘날 모든 조직의 분열이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긴것 아닙니까. 저는 참으로 부끄럽고 죄송했습니다. 운동의 지도부인 내가 죽었어야 하는데 허세욱열사가 나를 대신해서 죽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살아야겠다. 더 열심히 살아서 그 분이 못다한 일을 해야겠다.” 그러면서 나는 수십년간 씻어버리지 못했던 죽음에 대한 각오와 미련을 씻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 선생을 보는 순간 알았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전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참으로 수많은 고비를 넘나들며 체험하지 않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말씀을 나는 듣고 있었다. 이미 나를 다 알고 계셨으므로 나의 답변과 내심을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나로인해 밖에 계신분들이 인질이 되어 있었다는 생각은 대단히 빗나간 판단이었다. 깨달은 민중이 있고, 위대한 스승이 있었던것이다. 시대의 아픔과 그 중심에 선 시대의 스승을 묵묵히 뒤따르는 일이 역시 내가 할 일이었다.

몸의 중심은 심장이나 뇌가 아니라 아픈곳이다. 아픈곳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고 아픈곳이 치유되기전까지 몸은 안정과 조화를 이룰수 없기 때문이다 . 몸의 중심이 아픈곳이듯 t사회의중심도 세계의중심도 아픈곳, 시대의 사상이론과 사상감정은 아픈곳으로부터 나온다. 큰 아픔과 큰 슬픔을 크게 감싸안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큰 스승이다.

6월6일 현충일 10시쯤이었나보다. 사이렌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잠시 멍해있다가 백팔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로만 놔두는 것은 안될일이었다. 피해를 받은 사람도 가해를 가한사람을 끌어 안을 수 있어야한다. 현충일의 영령은 더구나 가해자이기보다 똑같은 분단과 전쟁의 피해자이다. 내 온힘을 다해 그 상처를 끌어 안고 싶었다. 그래야 이 단식을 제대로 접고 화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무장지대를 향해 서는게 맞을것 같았다. 그리고 절을 시작했다. 쓰러지듯 몸을 낮추고 현기증을 이겨가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체력이 심약해져 있는 상태라 계속하기 쉽지 않아 쉬다 말다를 반복하며 백팔배를 마쳤다. 그리고는 그냥 쓰러져 다음날까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6월7일 아침 구치소 직원들이 죽물을 먹는것을 보기위해 찾아왔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이젠 서툴러진 숫가락질로 반수저정도 죽물을 떠서 입에 넣었다. 순간 놀랐다. 죽도 아닌 죽물 반숟갈이 입안으로 들어갔을뿐인데 생명의 기운이 온몸에 가득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소박한 식사로도 생명력을 체감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도록 감사했다. 맛있는 식사란 얼마나 사람에게 집요한 유혹인가. 앞으로의 복식에서 그 유혹의 포로가 되지 않을까 두려움도 몰려왔다. 극단의 선택은 고통스러울지라도 잡다한 번뇌를 끊기는 좋으나 모호한 경계에 자신을 세운다는것은 고통보다 더한 유혹과 번뇌를 초래할 것이었다.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관성이다. 구속에 맞서 죽음으로 항거하는것보다 관성을 성찰하고 극복하는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구속은 외부로부터의 강제에 대해 저항하고자하는 자유의지까지 막을 순 없기에 각오가 어려울뿐 자유의 각오와 결심만 선다면 구속에의 저항과 저항의 자유는 성취될 수 있다. 그러나 관성은 외부의 구속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선택한것이라고 합리화 한것이기에 구속인것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 구속과는 투쟁을 하지만 관성은 성찰을 해야한다.

나 자신에게 가하는 합리화에 얼마나 솔직할 수 있을까? 얼마나 투철하게 반성할수 있을까? 구속에의 저항은 외부로 쉽게 표현되지만 관성에 대한 성찰은 스스로만이 헤쳐나갈 긴 여정이다. 6월 10일 하루 단식을 했다. 6월 15일도 그렇게 했다. 복식의 유혹에 내자신 얼마나 덫씌워져 있는지도 궁금했고, 무엇보다 역사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온몸으로 각인해 주고 싶었다. 6월 25일도 그렇게 해야겠다.

몸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단식중엔 운동장을 나가는것 자체가 불가능했는데 이젠 30분정도 뛰고 걷고를 한다. 그리고 열사와 순국영령들이 못다한 삶을 더 열심히, 한순간이라도 살기위해 건강해져야 한다는 서원을 세웠다.

강화의 김정택목사님이 당신이 보던 단식책을 넣어주셨다. 꼼꼼히 쳐진 밑줄과 행간과 여백에 적어놓으신 단상을 보며 환경농업에 대한 고민이 먹는문제와 새로운 건강과 생명에 대한 고민과 맞닿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질좋은 음식을 적게 먹는 소식운동과 유기농업을 연계시키고자 하는 고민에서는 농업살리기가 농부만의 몫이 아닌 도시 소비자의 식문화운동의 몫이기도 함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책의 단식,소식이론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과학적 검증의 몫이겠지만 내게 참으로 새롭고 좋은 이론이란 생각을 준것은 적게 먹으므로서 세계가 더 평등해 질 수 있고 더구나 더 건강해 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건강과 나눔을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생활의 혁명이 될 수 있다는 대목은 깊이 고민해볼 만 하다. 세상의 구조를 바꾸는 일과 더불어 나를 바꾸는 일이 분리될 수 없다. 지금의 소박한 식사가 어느기한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보완되어 아예 생활이 되도록 실천해 볼일이다.

바쁘신 시간을 내어 면회와 주시는 분들과, 옥방에서 공부와 글쓰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열심히 책과 자료를 옮겨주신 분들과 사진가분들과 작가분들의 맹렬한 활동과, 사진전에, 서명에 수고를 마다해 주시기 않는 단체분들의 정성에 깊은 감사와 존경의 인사를 드립니다.

2007. 6. 20
이 시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