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편지2-5.24 2007/10/30

은옥씨

당신이 수고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는 이 감옥 담 안에서는 사실 헤아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김치관기자님으로부터 소식을 전해듣고 놀랐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옛날 노조활동시절로 돌아간것처럼 보여서 사실은 기뻤습ㄴ다. 그러나 옛날(’94,홍제동대공분실)감옥에서 나온지 얼마안되어 당신이 ‘신우신염’으로 쓰러졌던 기억도 내겐 아프게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는 사실 편하고 행복한데 밖에서 나라도 그렇게 뛰어 다니면 리듬을 잃고 무리가 올 것입니다. 부디 몸의 리듬을 잘 다스리며 움직여 주길 바랍니다. 여기 면회오신 이영순 의원이나, 오종렬의장님, 임기란어머님 모두 당신의 상태를 꼼꼼하게 관찰하고 계셨다는데 놀랐습니다. 나보다 당신을 더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부처님오신날 점심은 특식으로 삼계탕이 배식되어 사동이 떠들썩 했답니다. 직원들이나 사소들이 모두 내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합니다. 성의를 받지 못하는것도 상대에게 얼마나 짐이 되는지를 절감합니다. 보안과장님이 집에서 일하ㅏ 걱정돼서 달려왔다며 찾아오셨습니다. 구치소에서 건강이 너무 걱정되어 검사님께 빨리 기소해 달라는 부탁을 했답니다. 내일이라도 기소가 되면 단식이 ㅎ루라도 빨리 정리되지 않겠냐며, 다시 검사에게 전화를 하시겠답니다. 어쨌든 직원들의 배려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우성이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군요. 워낙 꿋꿋하고 듬직하니 나는 우성이에 대해 아무 걱정을 하지 않겠습니다. 우성이도 당신을 더 걱정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난번 면회오신분들께 단식을 정리하는데 대한 고민을 정리해서 편지를 내 보내기로 했습니다. 다음글을 홈페이지에 올려주시고, 통일뉴스측에도 전달을 해드리는게 좋겠습니다.

2007. 5.24 불탄일에 이 시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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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내가 믿는건 내 가슴뿐이야. 나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발도, 이빨도, 세치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헤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위 글은 소설가 한강의 단편 ‘채식주의자’의 한 구절입니다.
가슴만이 아무것도 죽일 수 없다는 작가의 통찰력은 제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무기가 될 수 있는 손도 발도 가슴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저를 이끌어 준 것은 명상춤을 하시는 이종희선생님으로 부터 스치듯 흘려들었던 말씀이었습니다. 이 선생님은 손바닥이란 말 대신 손가슴이란 말을 쓰셨고, 발바닥이란 말대신 발가슴이란 말을 쓰셨습니다.

가슴이 낯선 세상을 끌어안듯이 손도 발도 귀도 눈도 그리고 입도 모두 가슴으로 제 나름의 조건에 따라 세상을 끌어안는다는 생각은 제게 큰 깨달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아름다움은 낯선 세계로서의 ‘어둠’과 주체인 ‘나’의 관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결’인것까진 알았지만, 어떻게 관계를 맺게 되는지를 몰랐던 저는 비로소 오감이 제 나름의 가슴으로 낯선세계를 ‘끌어안음’으로서 생기는 결이 곧 아름다움이란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은 자유이자 구속이고 관성입니다. ‘결’에 집착하면 그것은 관성이 되고 이미 결이 아니게 됩니다. 가슴을 여는 것은 관성을 내려놓는 것이며, 채우는 동시에 비우는 것입니다. 끝없이 빈 가슴으로 낯선세계를 끌어 안아야만 자유로서의 결이 생깁니다. 단식은 제게 큰 비움을 주었습니다.

단식

생전 처음 해 보게 된 단식이 공교롭게도 국가보안법으로 저를 쫒던 경찰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순간 저를 압도해온 깊은 슬픔이 다른 무슨 생각을 해 볼 겨를도 없이 이 새롭고 낯선 상황에서 저에게 단식을 택하게 했습니다. 묵언과 단식이 시작되었습니다. 단식이 오래갈 것을 예감한 경찰이 도대체 어쩔 생각이냐고 물었을때 저도 모르게 입이 열려 튀어나온 말이 있었습니다.
“국가보안법을 끌어 안기로 했습니다.”
“언제까지 하실겁니까”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 말이 ‘국가보안법을 끌어안고 죽을 가오’로 이해된 것 같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무시코 내놓은 말이 경찰직원에겐 세치혀로 휘두른 폭력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내 입은 가슴이 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독설이 되고 무기가 되고 있진 않았는가? 뒤 돌아 보게 됩니다.

저의 생을 걸고 혼신을 다해 만들어진 말과 글과 사진이 누군가에게 독이 되고 총칼이 되었다는 것은 제겐 깊은 슬픔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비수를 들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낯선 손님을 제 존재 전체로 끌어안기로 했던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결이 생기는지 관조해 왔습니다. 단식은 고맙게도 저를 치유해 주고 있었습니다. 먹는것을 등지고 나자 새로이 가슴이 열려짐을 느낍니다. 먹고사는 것이야말로 한편으로 모든 기회주의와 구차함과 범죄와 악을 합리화 할 수 있는 명분임을 이곳에서 배우게 됩니다. 먹는것에서 생존을 위한 고귀함과 탐욕과 쾌락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세끼 식사의 결은 ‘더 많이’,'더 맛있게’에 집착하는 순간 탐욕이 됩니다. 결은 사라지고 관성만이 남는것입니다. 잠시이긴 하지만 뭇 생명에게 신세지지 않고 스스로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이 상황이 얼마나 기쁘고 홀가분한지 모릅니다. 넘을 수 없을것 같았던 한계를 몇 번인가 넘고보니 참으로 크고 낯선 세계를 제 가슴에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법과 제도가 저를 구속하고 포박했지만 저 역시도 그 구속에 결박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단식이 시자된 슬픔의 이유였을 것입니다. 이제는 슬픔으로 저 스스로를 묶었던 결박을 풀 수 있을것 같습니다. 국가보안법이 저를 옥방에 가둔것은 사실이지만 이젠 더 이상 구속 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옥방은 ‘선방’이 되었습니다. 몇번의 위기를 넘겼던 단식은 저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가슴을 열 수 있게 해 주었고, 더 크고 낯선세계를 끌어안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어제(23) 면회를 하고서야 날마다 검찰청에서 촛불집회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이제 촛불집회를 저 때문에 더 이상 진행시키지 말아주실것을 부탁드립니다. 감옥에서 편히 있는 저 때문에 여러분들이 귀한 시간과 수고를 하고 계신 다는것이 제겐 너무도 큰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변경될 수 없는 집회가 있다면 기쁘고 즐겁게 마쳐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상상

이 상황을 끌어안을 수 있는 가슴이 열릴수록 제게 새로운 상상이 생겨남을 느낍니다.

이 모든 상황의 발단은 국가보안법과 유엔사였습니다. 6월까지 어떻게든 경찰과 만나지 않으려고 수배의 길을 택했던 것은 작통권 환수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내용이 정해지는 시기에 유엔사 강화론을 막아야만 작통권환수가 도루묵이 되지 않는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역사적인 2.13합의가 있었고, 이제 시간의 문제일뿐 평화협정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되는 촉박함이 우리에게 놓이게 되었습니다. 작통권환수, 평화협정, 국가보안법에서 이들을 관통하는 새로운 결이 무엇일까를 응시해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주장이나 제안이 아니라 그저 옥방에서의 0.75평짜리 상상일뿐이니 상상으로만 참고되길 바랍니다.

협상과정이 전혀 공개되지 않고 있는 작통권환수는 평화협정, 평화체제로가는 최대의 기회이면서 위기입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해방이후 미.소군정이 철수하고 난 뒤 작통권을 넘겨받은 남과북은 38선충돌을 격화시켰고, 이는 한국전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1953년 정전의 순간에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반대, 북진통일 노선을 미국이 제압하지 못했다면 정전조차 무산되었을 것이라는 사실등에 근거하여 평화를 주창하는 사람중에도 차라리 미군이 평화유지기능을 수행해주는게 좋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작통권 환수와 함께 국방비가 증가되고 군비증강을 추진하는 ‘자주국방론’이 그러한 우려의 근원중 하나일 것입니다.

작통권 환수가 자주로 귀결되고 군사위협으로 발전되지 않아야 평화체제로 이행하는데 위기가 아닌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고민되어야 할 두가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내적으로는 헌법3조’영토조항’의 개정문제이고, 구제적으로는 유엔사재조정 문제입니다.

먼저, 유엔사문제를 생각해 봅니다. 유엔사는 법적으로 북측지역을 점령대상으로 합니다. 1950년 10월 유엔총회결의가 법적근원입니다. 작전계획 5027-98이나 작전계획 5029등 유엔사/연합사 작전계획들과 이에따른 한미 독수리군사연습. 을지포카스렌즈연습등이 북에 대한 점령이나 진입을 전제로 할 수 있는 것은 유엔사의 점령자로서의 법적지위 때문입니다.

유엔사를 내세울 수 없다면 북에대한 점령은 유엔헌장 2조의 위반이 됩니다. 또한, 비무장지대등을 중심으로 한 위기발생기 유엔안보리의 결의 없이도 전시고 돌입할 수 있는 유엔사의 위기조치관리권 역시 한국군에게 반횐될 작통권을 무시하고 주도권을 장악하는데는 아무런 법적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유엔사의 국제법적 지위에 대한 재조정이나 유엔사해체가 수반되지 않으면, 평화체제로의 이행은 굴곡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두번째, 대한민국 헌법3조의 문제입니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3조의 소위 영토조항은 한반도 북측지역을 대한민국이 되찾아야할 수복지구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유엔사가 점령자로서 북을 적대국으로 상정하는데 비해, 헌법3조는 북을 해방지역, 자유화지역으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비교됩니다. 그러나, 이는 해방 후 미군정이 한국을 해방지역으로 선포하고도 실제로는 적대국에 적용하는 점령정책을 폈던 경험에 비추어 보듯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헌법3조가 개정되지 않는다면 자주국방력 강화작업으로 진행될 새로운 작전계획, 군사연습, 위기관리등은 북측 지역 수복을 목표로 하게됨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역시 평화체제협상과정에서 난관을 조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헌법3조는 그 근거가 된 유엔총회결의에서 조차 인정되고 있지 않으며, 혈맹인 미국도 부정해온 조항입니다. 외국과의 각종 협약을 체결할때도 실제 영토는 남측지역으로만 실효성을 한정하고 있습니다. 조약이나 협정을 체결한 관리들은 헌법을 위반하고 실제로는 북측지역의 반국가단체를 국가로 인정하는, 반국가 행위를 하는 모순에 처해 있습니다. 북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9조를 약 40년전 개정하여 인민정권의 관할지역을 한반도 전체가 아닌 북방부지역으로 한정한 것에 비교하면 남측의 현실에 대한 인정이나 대응이 너무 오랜기간 미루어지고 있다는 평가도 나올법 합니다. 헌법3조의 개정이 북의 위협에 노출시킬것이란 우려는 최소한 헌법의 차원에선 가능치 않다고 판단됩니다. 헌법3조가 개정된다면 ‘국가보안법’은 존립근거가 없어져 자동소멸됩니다.

북측지역을 대한민국 영토로 규정하는 한 정상국가가 아닌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반국가단체, 내란단체 또는 괴뢰정권이 장악한 미수복지구로 되기에, 이를 근거로 ‘반국가’행위를 처벌하고자 하는 법이 ‘국가보안법’입니다.

국가보안법을 새로운 상위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헌법3조 개정’이란 생각입니다.

잠시 지도력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력에서 제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국제적 의제 설정능력입니다.

북이 한반도 차원의 통일의제를 설정하고 전쟁에 돌입했을때 그는 세계차원의 ‘반공’이란 의제로 한국전쟁을 세계전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미국이 손을 떼려할때마다 벼랑끝전술로 미국을 몰아세우는 노련함도 보였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지도력에서 제게 가장 인상적인것도 국제적 의제 설정능력입니다. 이승만대통령이 ‘반공’을 내걸었다면 김정일위원장은 ‘핵’을 내걸었습니다. 벼랑끝 전술로 미국을 몰아세운 집요함도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입니다.

한반도 평화체제에서 북이 도달한 주동이 위치를 남측이 따라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면 남측의 입지가 불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평화정착 과정이 진행될 지도 모릅니다. 경쟁을 유발시킬 필요야 없지만 남.북이 비슷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이 향후 한반도체제에서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남측이 평화체제 수립과정에서 발휘할 수 있는 국제적 의제가 저의 상상력으로는 ‘유엔사해체’입니다. 유엔사 해체는 북이 일관되게 주장해온 의제 이기에 북을 이롭게 한다는 판단에 주저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북을 이롭게 할 의제입니다. 그러나 남이 주도권을 쥐면 남을 더 이롭게 할 의제라는 사실을 통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후락씨가 북의 지하철을 보고와서 남쪽에도 지하철을 건설하기로 했었습니다. 그것은 북을 흉내내고 북을 이롭게 하는 선전수단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남측을 더 이롭게 하는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소재가 아니라 맥락을 주도하는 지도력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력을 생각할 때 마다 고려원종을 생각하게 됩니다.

탁월한 국제적 정세인식 능력을 바탕으로 불안한 정권기반을 반열에 올려 놓았지만 원나라와 손잡는 대신 삼별초를 버린 원종처럼 미국과 손잡는 대신 항일운동세력이나 좌익을 버렸습니다. 개인의 성공을 민족모두의 성공으로 통일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국제의제와 국내의제의 통일성과 일관성은 지도력의 완성에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입니다.

저의 상상력은 ‘유엔사 해체문제’와 ‘헌법3조 개정’문제 정도에서 멈추고 마는군요. 그저 좁은 옥방에서의 상상일 따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단식에 대한 제 마음의 결정을 말씀드려야 겠습니다.

현충일

5월 22일 민노당 이영순 의원님과 민가협어머님들, 그리고 오종렬의장님이 구치소로 찾아와 주셨습니다.

문정현신부님 권오헌선생님의 면회와 권영길의원님의 면회에 이어 세번째 면회였습니다. 특별면회실을 갈 때마다 항상 무거운 마음인데, 예상했던대로 단식을 멈춰달라는 간절한 호소의 말씀들 이었습니다. 한 말씀 한 말씀에 배인 구구절절한 배려와 사랑에 저 또한, 눈물이 맺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문득 저의 단식이 밖에 계신 많은 분들을 인질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저의 단식이 생각과는 많이 다르게 알려져 버렸고,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이 손을 떠나 버린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옥방안에서 담 밖의 소식에 지나치게 소홀했던 탓입니다.

이젠 그 모든 상황을 끌어안아야 할 상황이 왔음을 느낍니다. 면회오신 분들께 정치적 의미의 단식은 당장 멈출테니 이제 그만 걱정을 접어주시길, 그러나 개인적으로 마음을 마무리 할 시간이 필요할것이란 말씀을 드렸지만 설득시켜 드릴 수 없었습니다. 다시 한번 지나온 과정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6/6 현충일에 단식을 내려놓기로 하였습니다. 지금의 상태에서 6/6까지가 짧을 수도, 길 수도 있는 시간이지만 이번엔 목적이 생겼습니다. 달력에 박힌 빨간 글자만큼이나 제 마음엔 이 날이 크게 다가와서 각인됨을 느낍니다.

어찌보면 현충일과 국가보안법은 정 반대편에 서 있는 두 실체를 상징할 수 도 있습니다. 저는 강화에 살면서 전쟁으로 갈갈이 찢겨진 역사의 초상을 경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좌익에게 참살당한 아버님의 시신을 손수 묻어야 했던 한 노인과, 우익에게 주살당한 어머님의 시신을 바다에 수장하고 같은 동네에서 50년을 피해자로만 살아남아야 했던 모진 할머니의 인생을 압니다.
어떤 이성으로도 설득될 수 없는 원한과 분노의 원체험을 가진 분들께 이젠 털고 화해하잔 말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보았습니다. 그 한과 슬픔을 온전히 끌어안지 않고, 눈물과 감동으로 부등켜 안지 않고서는 역사와의 화해는 불가능한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비수로 다가온 국가보안법, 유엔사, 그 모두를 끌어안겠다고 저는 가슴을 열었습니다. 제 마음속에서 그것은 허영일지도 모른다는, 관념주의 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유혹을 몇 번이고 내려놓아야 했고, 다시금 부활하는 의심의 옹졸함을 넘어서야 했습니다. 이제 묵언과 단식을 시작하게 했던 깊은 슬픔이 제 안에 남아 있지 않음을 바라봅니다.

계획없이 제 삶이 반응하는 대로 시작되어 흘러온 단식이지만, 그리고 이 작은 옥방에선 자유를 얻게 해 준 ‘끌어안음’이었지만, 이 조차도 누군가에겐 위선이고 가증스러움이고 폭력이고 무기 일지 모릅니다.

현충일의 순국열사와 또 다른곳에서 피흘려 쓰러져간 선열들의 역사위에 저의 사건은 일엽편주만도 못한 미미한 것임을 잘 압니다. 그래도 저는 무작정 현충일의 강가에 저의 배를 정박시키고자 합니다. 물가의 풀 한포기 만이라도 위로 할 수 있다면 앞으로 넘어야 할 고비도 더 큰 배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6월 6일 현충일에 이르러 여러분께 심려와 수고를 끼쳤던 단식을 접겠습니다.

과분한 관심과 애정을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2007. 5. 24. 이 시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