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학관은 어둠, 결, 가슴-모두진술2007/10/30

나의 미학관은 어둠, 결, 가슴-모두진술

미학관

저의 창작관과 예술문화론의 바탕인 미학관은 어둠, 결, 가슴으로 요약됩니다.

1. 어둠의 미학

우리 몸의 중심은 어디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데모크리토스라면 ‘심장, 뇌’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에피쿠로스라면 ‘아픈 곳’이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의 어느 한 곳이 아프면 모든 신경이 그곳에 집중되고 아픈 것이 치유될 때까지는 몸의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의 중심이 아픈 곳이듯이 사회의 중심도 아프고 소외된 곳이다. 또한 세계의 중심도 전쟁과 기아의 고통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아픔이 있는 곳이야말로 사회와 세계의 문제가 집중된 곳입니다다. 그 문제가 풀릴 때 사회와 세계의 모순이 해결될 것입니다.

몸의 중심이 심장이나 뇌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사회의 중심도 청와대나 국회를, 세계의 중심도 백악관이나 미국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 또한 나름대로 중심일 이유가 충분하지만, 어느 자리에 자신의 입장을 세우는 가에 따라 미학관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아픔, 소외, 낯선 것 등을 미학적으로 통합한 개념으로 ‘어둠’이란 개념을 선택했습니다.

근대 서양사는 미학적으로 빛을 추구한 시대였습니다. 단테에서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빛에 대한 열광에서 빛에 대한 회의에 이르는 사이 이성은 혁명을 거쳐 실존에서 해체로 흘러갔습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에 이르러 빛에 대한 탐구는 그렇게 회의에 빠집니다. 빛보다 더 큰 어둠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현대우주물리학은 우주의 비밀이 빛을 발하는 항성에 잊지 않고 항성사이의 암흑공간, 즉 어둠에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빛의 시대에서 어둠의 시대로의 이행이 현대사상의 흐름이 되었습니다. 과학에서 카오스의 발견이 그러하고 철학에서 타자의 발견이 그러합니다.

어둠은 빛의 반대가 아니고 빛의 바탕이다. 어둡다는 것은 정체됨이 아니라 어두운 자리로의 끝없는 운동입니다.

어두운 자리로의 운동 뒤에는 결이 남습니다. 역으로 결은 어둠을 찾아가는 방법이 됩니다. 결은 볼 줄 아는 능력이 없으면 어둠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2. 결의 미학

세계는 결로서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물은 물결로, 바람은 바람결로, 숨은 숨결로 살은 살결로, 역사는 역사의 결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결은 세계가 존재하는 형식인 것입니다. 어둠으로서 낯선 것으로서의 세계는 수많은 결의 잠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결에는 발견되는 결이 있고 창조되는 결이 있습니다. 둘 다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 드러나지만 관계의 형식에 따라 차이가 생깁니다.

결의 발견과 창조에 대한 인류 최초의 기억은 석기 제작입니다. 돌로써 돌을 깸으로써 돌의 결이 드러나게 했습니다. 이것은 현대의 소립자물리학에서 소립자와 소립자를 충돌시켜 새로운 입자를 발견하는 것보다 더 획기적인 인간의 혁명이었습니다.

돌 속에 잠재되어 있는 돌의 결을 상상하고 돌로 돌을 깨서 그 결로 드러나게 한 것은 지금까지 혼돈이었던 자연에서 질서와 구조를 깨닫는 법칙의 발견이었습니다. 발견되는 결은 상상을 확신으로 전환시켰고 확신은 질서와 함께 관성도 부여했습니다.

발견되는 결의 특성은 반복적입니다. 누구에게나 반복되는 법칙인 것입니다. 그에 비해 창조되는 결은 항상 새로운 결입니다. 즉 비반복적입니다. ‘그’ 사람이 ‘지금, 여기’에서만 만들 수 있는 결입니다.

상식이나 낡은 패러다임의 법칙은 낯선 세계,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나면 낡은 관성이 됩니다. 예전엔 자유를 안겨준 법칙이 낯선 세계 앞에서는 구속 되는 것입니다. 발견된 결의 관성화와 구속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만들어지는 결, 결의 창조에 있습니다.

내 안의 낯선 내가 낯선 세계를 끌어안은 ‘목숨을 건 비약’을 통해 비로소 결은 창조됩니다.

상품을 예로 들면 서로 다른, 서로 낯선 사용가치가 ‘목숨을 건 비약’을 통해 교환됨으로써 가격이 형성될 가능성이 생기고, 그것에서 교환가격이 발견되듯이 결의 창조를 통해 서로에게 잠재되어 있던 결의 발견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즉 결은 본질에 있어서 창조되는 것입니다.

결은 가슴으로 세계를 끌어안음으로서 창조됩니다.

3. 가슴의 미학

등의 맞은편을 가슴이라 합니다. 손등의 맞은편은 손바닥이라고 하기보다 손가슴으로, 발등의 맞은편을 발가슴으로, 귓등의 맞은편을 귀가슴으로 콧등의 맞은편을 코가슴으로, 눈등의 맞은편은 눈가슴으로 불러보고 싶습니다.

가슴은 끌어안습니다. 눈은 보여서 보는 게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을 봅니다. 귀는 들려서 듣는 게 아니라 듣고 싶은 것을 듣습니다. 본다는 것은 눈가슴이 세계의 형상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귀가슴이 세계의 소리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의외의 것을 본다는 것은 귀가슴이 세계의 소리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의외의 것을 본다는 것은 눈가슴이 더 활짝 가슴을 열어 낯선 것, 의외의 것을 끌어안은 것입니다. 의외의 것을 듣는다는 것은 귀가슴이 더 활짝 가슴을 열어 낯선 소리, 의외의 소리를 끌어안은 것입니다.

끌어안는 것은 본질에 있어 목숨을 건 비약을 통해 낯선 세계와 만나는 것입니다.

풀은 수억년 적응된 결을 따라 씨앗을 틔우고, 줄기를 세우고, 잎을 뻗고 꽃받침을 벌리고 꽃술을 제치며 마침내 꽃가슴을 엽니다. 그러나 꽃은 최선을 다해 가슴을 열 수 있을 뿐 벌과 나비가 와서 안길지 말지는 우연에 맡겨진 자연사적 과정입니다. 그 우연을 최대한 필연으로 바꾸려고 꽃은 최고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창조합니다.

사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슴을 열고 세계를 끌어안습니다.
사람은 낯선 세계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함으로서 새롭고 낯선 나를 찾습니다.
상상이 절망적인 미래와 본질적인 연관을 향하면 이상이 됩니다.
상상은 추동력을 주지만 이상은 확신을 줍니다.
확신으로 인해 추동력은 항상적인 것이 됩니다.

끌어안는 것은 추동력과 확신만으로는 안 됩니다. 소통될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소통은 고통입니다. 나의 가슴들이 끌어안기엔 세상이 큰 것일 때 가슴들은 땀을 흘립니다. 땀을 흘려도 끌어안기엔 세상이 더 클 때 가슴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눈에선 눈물이, 손발에선 물집이 터져 흐릅니다. 눈물을 흘려도 끌어안기엔 세상이 너무 클 때 가슴들은 피땀을 흘리고 피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종국에서 끌어안음은 목숨을 걸기까지 하는 일입니다.

낯선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 가슴을 연다는 것은 낡은 나를 깨는 고통의 과정인 것입니다. 그 소통이 성사되는 순간 결이 만들어집니다. 결이 창조되고 나서야 내안에 숨어있던 또 세계 속에 감추어져 있던 결이 비로소 발견되는 것입니다. 법칙의 발견입니다.

결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아픔이 없는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가슴을 열어 끌어안음도 끌어안음을 통해 창조되는 결도 결국은 낯선 것입니다.

미학의 본령은 그리하여 다시 ‘어둠’의 미학입니다.

나의 창작의 성과를 회고해 보건대 낯선 세계를 끌어안기 위해 땀 흘리고 눈물 흘리고 피눈물을 흘리고 심지어 목숨을 걸었던 주제의 영역에서 스스로 보기에 좋은 창작의 성취를 이룬 것이 증명됩니다.

‘대인지뢰’와 ‘비무장지대’ 작업은 이론, 가치, 교육, 조직의 모든 영역에서 폭넓은 활동의 성과가 있었고 그 만큼 높은 완성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작품의 90%는 이론으로, 9%는 실천이로, 1%는 영감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나의 창작관이지만 1%의 순간이야말로 목숨을 건 비약과 결이 창조되는 순간입니다.

1%의 순간에 90%의 이론을 주입하려 하거나 목숨을 건 치열함을 반영시키려는 집착을 홀연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99%의 노력과 기반 없이 1%의 영감은 존재할 수 없지만 1%의 순간엔 99%는 모두 버려야 합니다. 강을 건너는데 사용한 배를 강을 건너고 나서도 짊어지고 가서는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이 결로서 남을 뿐입니다.

그 사진을 보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다면 사진가는 피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그 사진을 보고 평화의 각오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진가는 죽을 각오를 했던 것입니다.

창작표현의 자유란 감옥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유입니다.
창작표현의 자유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유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창작표현의 자유란 관성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유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유의 반대를 구속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속을 외부로부터 강요되기 때문에 마음 깊은 곳에서 저항하고자하는 자유의지를 막지 못합니다. 그러나 관성은 외부로부터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고 합리화시켜 놓은 것이다. 그래서 그 관성이 자유의지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감옥과 죽음의 구속에 맞서 저항할 수 있는 사람도 관성에 대해선 저항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관성은 저항이 아니라 성찰을 통해 극복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작의 자유에 이르는 최후의 관문은 관성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