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정리한 미학2008/01/20

저의 창작관과 예술문화론의 바탕인 미학관은 어둠, 결, 가슴으로 요약됩니다.

1. 어둠의 미학
아픔, 소외, 낯선 것 등을 미학적으로 통합한 개념으로 ‘어둠’이란 개념을 선택했습니다.

근대 서양사는 미학적으로 빛을 추구한 시대였습니다. 단테에서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빛에 대한 열광에서 빛에 대한 회의에 이르는 사이 이성은 혁명을 거쳐 실존에서 해체로 흘러갔습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에 이르러 빛에 대한 탐구는 그렇게 회의에 빠집니다. 빛보다 더 큰 어둠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현대우주물리학은 우주의 비밀이 빛을 발하는 항성에 잊지 않고 항성사이의 암흑공간, 즉 어둠에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빛의 시대에서 어둠의 시대로의 이행이 현대사상의 흐름이 되었습니다. 과학에서 카오스의 발견이 그러하고 철학에서 타자의 발견이 그러합니다.

어둠은 빛의 반대가 아니고 빛의 바탕입니다. 어둡다는 것은 정체됨이 아니라 어두운 자리로의 끝없는 운동입니다.

어두운 자리로의 운동 뒤에는 결이 남습니다. 역으로 결은 어둠을 찾아가는 방법이 됩니다. 결은 볼 줄 아는 능력이 없으면 어둠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1) 아픔
우리 몸의 중심은 어디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데모크리토스라면 ‘심장, 뇌’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에피쿠로스라면 ‘아픈 곳’이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의 어느 한 곳이 아프면 모든 신경이 그곳에 집중되고 아픈 것이 치유될 때까지는 몸의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의 중심이 아픈 곳이듯이 사회의 중심도 아프고 소외된 곳입니다. 또한 세계의 중심도 전쟁과 기아의 고통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아픔이 있는 곳이야말로 사회와 세계의 문제가 집중된 곳입니다. 그 문제가 풀릴 때 사회와 세계의 모순이 해결될 것입니다.

몸의 중심이 심장이나 뇌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사회의 중심도 청와대나 국회를, 세계의 중심도 백악관이나 미국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 또한 나름대로 중심일 이유가 충분하지만, 어느 자리에 자신의 입장을 세우는 가에 따라 미학관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2)소외
겨울의 언땅과 찬바람은 그저 피해다녀야 할 대상이었지만 저는 오랜동안 집을 나와 길 위에 서고서야 겨울의 언땅을, 허공의 찬바람을, 그들의 고독했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빛과 볕만을 추구하는 사람의 관심과 무관하게 그늘진 땅 찬바람이 존재하듯 세상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버려진 채 제 스스로 버티며 살아남고 있는가 다시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길위에서 삼보일배 명상을 하는 중에 무엇인가 번쩍이는게 있어 눈떠보니 라이터쪼가리였습니다. 문득 그것은 쓸모 없어져서 버려진 것인가? 아니면 버려져서 쓸모 없어진 것인가? 를 생각해봅니다. 한번 버려진 것이 본래의 것과 재결합하여 제구실을 하기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현실에서의 진정한 몰락과 실패는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버려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파괴보다는 관용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졌습니다. 그러나 파괴보다 더 가혹한 것은 버려지는 것입니다. 버리는 자는 고의로 버릴 수도 있고 실수로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쓸모없어서 버려질수도 있지만 버려졌기 때문에 쓸모없어진 것입니다. ‘나는 누군가, 무엇인가를 고의로나 실수로나 버린 적이 없는가’ 생각해 봅니다.

저는 우리몸의 중심은 아픈곳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출소후 저의 생각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아픔보다 더 가혹한 것은 소외입니다. 아픔은 그래도 소통되는 상태이며 이미 치유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소외는 아픔이면서도 아픔으로 표현되지도, 인식되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란 점에서 가장 가혹한 고통입니다.

3) 소통
버려진 것이 소통한다는 것은 지극한 정성과 목숨을 건 비약을 통해서야 가능합니다. 아무도 관심가져 주지 않는 들꽃이 소통하는 방법을 생각해봅니다. 1cm도 안되는 땅에 박혀 움직일 수도 없는 들꽃은 최대한 자기를 아름답고 향기롭게 만들어 벌과 나비를 유혹합니다. 벌과 나비는 그저 제 욕심을 위해 오는 것이지만 날개며 몸통에 꽃가루를 묻혀 날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우연히 다른 꽃에 가서 그 꽃가루들이 떨어져 번식이 이루어지고 들꽃은 들판을 뒤덮습니다. 사람은 들꽃보다 훨씬 진화된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지만 소통에서 배제시키는 방식 또한 진화하여 그런 사람이 소통에 성공하기란 때로 들꽃보다도 어렵습니다.

버림받고도 버림당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버림이라는 구조적 폭력이나 구조적소외를 능히 극복하고 소통에 성공할 수 있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들꽃처럼 간절한 사람, 어느 누구의 주장도 진정성 없는 것이 없습니다. 진정성 있음을 전제로 그 다음은 소통입니다. 소통은 형식입니다. 속으면서도 통할 수 있는 형식입니다. 예술이 허구임을 알면서도 현실보다 더 위력적으로 소통되는 것이 그와 같습니다. 신파가 통하는 시대가 있고 통하지 않는 시대가 있듯이, 거짓과 위선이 통하고, 진실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있습니다. 소통은 사회제도의 한 부분입니다. 국가보안법은 정상적인 소통을 가로막는 제도로 굳어져 있습니다.

소통을 위해서는 상대방을 향해, 상대방을 위해, 상대방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역설적으로 나를 향해, 나를 위해, 나 스스로를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를 상상할 바탕인 내가 구성되어 있지 않은데 상대와 소통될 리 만무합니다. 결국 나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는 실체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아픈 곳이 있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나 스스로의 소외를 고민하면서 관성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4) 관성
중생이라도 오늘 깨달았다면 그는 부처요, 부처라도 오늘 닫혀 있다면 그는 중생이란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소통을 포기한 상태가 관성입니다. 구속이나 통제가 아니라 소통이 필요없다고 합리화하고 스스로 최면을 건 상태가 관성입니다. 아픔이면서도 아픔을 드러내지 않거나 드러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아픔보다 가혹한 것이 소외라고 했습니다. 무엇인가에 의해 버림받는 소외도 있지만 스스로 버리고도 버린줄을 모르는 소외도 있습니다. 후자가 즉 관성입니다. 소외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소외가 관성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유의 반대를 구속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속을 외부로부터 강요되기 때문에 마음 깊은 곳에서 저항하고자하는 자유의지를 막지 못합니다. 그러나 관성은 외부로부터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고 합리화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관성이 자유의지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감옥과 죽음의 구속에 맞서 저항할 수 있는 사람도 관성에 대해선 저항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관성은 저항이 아니라 성찰을 통해 극복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작의 자유에 이르는 최후의 관문은 관성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리하여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관성이란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5)고통의 바다
고통은 소외를 발견할 수 있는 통로이자 계기입니다. 아픈 부분만을 볼 것이 아니라 아픔을 통해 아픔을 소통시키고 있지도 못한 숨어있는 구조전체를 통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방에서 아픈부위가 아닌 다른 부위에 침을 놓는 것은 이같은 원리의 치료방법일 것입니다. 아픈곳에만 집중하다보면 보이지 않는 전체구조를 간과할 수 있습니다. 또한 희망대신 절망에 낙관대신 비관에 집착하는 것으로 오해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지점에 이르러 왜 인류의 스승들은 ‘고통’만이 아닌 ‘고통의 바다’를 언급했는지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세상살이에는 세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지주의 방법, 장사꾼의 방법, 뱃사람의 방법입니다.
지주는 땅에 울타리를 치고 토지의 이름으로 나아가서는 영토의 이름으로 경계를 확정하는데 골몰합니다. 그는 그 울타리안에서 군림합니다. 비가오지 않으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게합니다. 굿은 비를 내리게 하는데 아무런 물리적 도움이 안되지만 비가 안오는 것이 계기가 되어 불만을 품는 공동체안의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는 유용합니다. 그는 울타리 밖의 세상에 대해 배타적이며, 강요든, 억지든, 설득이든 울타리안에서만 소통이 되면 그만입니다. 가장 공고한 관성과 제도를 선호합니다.

장사꾼은 울타리를 거부합니다. 자기와 뜻이 맞지 않아도 어떻게든 상대방과 소통하여 물건을 파는 능력이 있어야합니다. 심지어 사기를 칠 때조차도 상대방과의 합의와 소통이 필요합니다. 장사꾼은 소통과 교환을 법이나 폭력으로 막지 않는 시장이 있으면 됩니다. 또 그런시장이 막히거나 없을 땐 만들어내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뱃사람은 아무런 경계도 없는 곳에서 자연의 거대하고 불안하며 끝없이 변화하는 구조에 민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장사꾼은 소통되는 곳만 찾으면 되지만 뱃사람은 소통되지 않는 숨겨진 구조까지 대비하지 않으면 방심하는 순간 목숨을 잃습니다. 고통의 땅이나 고통의 시장이 아닌 고통의 바다를 응시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통은 이미 소통되고 치유되고 있는 것이지만, 소통조차 되고 있지 않은 숨어있는 고통, 관성의 이름으로 스스로 외면하고 있는 고통의 구조 전체를 통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에 대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땅위에선 우공이산과 필사즉생의 신념과 힘만 있으면 무엇이든 끌어당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에선 내가 상대방의 배를 끌어당기는 만큼 나 또한 끌려가게 됩니다. 작용만이 아니라 반작용까지 생각해야하는 공간인 것입니다.

고통의 바다에서 예술과 미학의 기여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의 봉합이 아닌 통찰을 통해 세계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었던 변방은 곧 중심이 되곤 했습니다. 중세유럽질서의 변방에 있었던 단테는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신곡’을 써 토마스아퀴나스의 중세를 넘어 르네상스를 열었으며, 3세기동안 이탈리아어를 유럽문명의 중심언어가 되게 하였습니다. 중세를 지탱해온 방대한 논리체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뛰어 넘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술로 상상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인도불교의 최변방에 있었던 신라에서 의상과 원효는 신라를 불교사상의 수입국에서 수출국이 되게 하였고 궁예는 고대에서 중세로 나아갈 길을 열었습니다. 이러한 역전의 단초를 마련한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는 미학적 도상이었습니다. 유교중화의 변방이었던 조선에서 송강 정철과 겸재정선은 율곡이이를 발전시켜 새로운 성리학의 세계를 미학으로 구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단테처럼 한글을 아시아의 중심언어로 하는데까지 이르진 못했지만 조선내부의 중심언어로서의 지위를 확립하는 데는 분명 기여한 바가 컸습니다. 이들이 변방에서 중심으로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창조적 상상력을 가로막을 중심의 질서가 느슨한 변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라시아, 세계 냉전체제의 시발이자 최후의 변방인 한국은 중심보다 더 강한 냉전의 질서가 남아 있어 상상력조차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습니다. 국가보안법은 고통의 바다를 보지 못하게 하는 울타리안의 퇴락한 샤먼의 주술이며 율법입니다. 이러한 주술이 필요한 사람들이 우리사회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샤먼의 주술에 의존하는 순간 바다에 뜬 배는 생존을 담보할 수 없으며 더우기 변방에서 중심으로의 소통 따위는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바다위에선 작용이 반작용이 되고마는 역설을 통찰해야 합니다.

6)간절함
여의도를 출발하여 삼보일배명상을 하며 서강대교를 건너던 첫날 조각도처럼 날라와서 체온을 깍아내는듯한 강바람을 만나야 했습니다. 한강이 얼마나 험악하고 거친 곳인가를 이전에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은 차를 타고 건넜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그 거칠고 험한 것을 알게 된 것은 한강이 변한 것이 아니라 제가 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느려지고 낮춰지니 세상의 숨어있던 구조와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그 세찬 북서풍의 와중에도 기적처럼 온화한 바람결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간절한 자만이 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간절함은 막막함입니다. 그 막막함 앞에서의 절박함입니다. 답 없는 질문이며 문 없는 출구입니다. 그리하여 시인 문익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역사를 산다는 것은 벽을 문으로 알고 걷어차는 일이다.’

아무도 벽에서 문을 보지 못할 때 문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간절한 사람입니다. 그 간절함으로 역사에 제 몸을 던진 사람만이 작고 여리고 숨죽여 흐르는 숨어있는 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간절하다는 것은 반복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지루한 반복과 좌절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안의 결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거대한 고통의 바다를 통찰하고 결을 발견하며, 생존할 수 있는 자는, 그리하여 간절한 자입니다.

가래침도 껌자국도 담배공초도 조용히 머릴 대고 가까이 하면 다 제나름대로의 결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관성을 벗지 않고 스쳐지나가는 눈으로 보니 오물일 뿐입니다. 그것이 곧 차별심입니다. 원수같은 사람이라도 고요히 다가가 경청하면 그 나름의 결이 있으니 경청할 일입니다. 서로가 담벼락을 마주한 듯 막막할지라도 간절하게 다가가고 또 다가가면 결국 우리는 모두 작용과 반작용의 바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성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간절함은 드러난 아픔을 치유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드러나지 않은 아픔의 구조까지 통찰하기 위해 아픔속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고통의 바다에 몸을 던지는 일입니다. 아픔을 치유할 뿐아니라 아픔자체를 긍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식과 고행은 몸 전체에 고통을 주지만 아픔은 몸을 절박하게 하고 조절하게 하며 제 스스로 미세한 결조차 발견하게 합니다.
예술가를 잠수함의 토끼에 비유한 것은 저돌적인 시대의 선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민감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민감함으로 새로운 결을 만들고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간절한 자가 민감해질 수 있습니다.

2. 결의 미학

세계는 결로서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물은 물결로, 바람은 바람결로, 숨은 숨결로 살은 살결로, 역사는 역사의 결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결은 세계가 존재하는 형식인 것입니다. 어둠으로서 낯선 것으로서의 세계는 수많은 결의 잠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결에는 발견되는 결이 있고 창조되는 결이 있습니다. 둘 다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 드러나지만 관계의 형식에 따라 차이가 생깁니다.

결의 발견과 창조에 대한 인류 최초의 기억은 석기 제작입니다. 돌로써 돌을 깸으로써 돌의 결이 드러나게 했습니다. 이것은 현대의 소립자물리학에서 소립자와 소립자를 충돌시켜 새로운 입자를 발견하는 것보다 더 획기적인 인간의 혁명이었습니다.

돌 속에 잠재되어 있는 돌의 결을 상상하고 돌로 돌을 깨서 그 결로 드러나게 한 것은 지금까지 혼돈이었던 자연에서 질서와 구조를 깨닫는 법칙의 발견이었습니다. 발견되는 결은 상상을 확신으로 전환시켰고 확신은 질서와 함께 관성도 부여했습니다.

발견되는 결의 특성은 반복적입니다. 누구에게나 반복되는 법칙인 것입니다. 그에 비해 창조되는 결은 항상 새로운 결입니다. 즉 비반복적입니다.’그’ 사람이 ‘지금, 여기’에서만 만들 수 있는 결입니다.

상식이나 낡은 패러다임의 법칙은 낯선 세계,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나면 낡은 관성이 됩니다. 예전엔 자유를 안겨준 법칙이 낯선 세계 앞에서는 구속 되는 것입니다. 발견된 결의 관성화와 구속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만들어지는 결, 결의 창조에 있습니다.

내 안의 낯선 내가 낯선 세계를 끌어안은 ‘목숨을 건 비약’을 통해 비로소 결은 창조됩니다.

상품을 예로 들면 서로 다른, 서로 낯선 사용가치가 ‘목숨을 건 비약’을 통해 교환됨으로써 가격이 형성될 가능성이 생기고, 그것에서 교환가격이 발견되듯이 결의 창조를 통해 서로에게 잠재되어 있던 결의 발견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즉 결은 본질에 있어서 창조되는 것입니다.

결은 가슴으로 세계를 끌어안음으로서 창조됩니다.

3. 가슴의 미학
‘내가 믿는건 내 가슴뿐이야. 나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발도, 이빨도, 세치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헤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위 글은 소설가 한강의 단편 ‘채식주의자’의 한 구절입니다.
가슴만이 아무것도 죽일 수 없다는 작가의 통찰력은 제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무기가 될 수 있는 손도 발도 가슴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저를 이끌어 준 것은 명상춤을 하시는 이종희선생님으로 부터 스치듯 흘려들었던 말씀이었습니다. 이 선생님은 손바닥이란 말 대신 손가슴이란 말을 쓰셨고, 발바닥이란 말대신 발가슴이란 말을 쓰셨습니다.

등의 맞은편을 가슴이라 합니다. 손등의 맞은편은 손바닥이라고 하기보다 손가슴으로, 발등의 맞은편을 발가슴으로, 귓등의 맞은편을 귀가슴으로 콧등의 맞은편을 코가슴으로, 눈등의 맞은편은 눈가슴으로 불러봅니다.

가슴이 낯선 세상을 끌어안듯이 손도 발도 귀도 눈도 그리고 입도 모두 가슴으로 제 나름의 조건에 따라 세상을 끌어안는다는 생각은 제게 큰 깨달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가슴은 끌어안습니다. 눈은 보여서 보는 게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을 봅니다. 귀는 들려서 듣는 게 아니라 듣고 싶은 것을 듣습니다. 본다는 것은 눈가슴이 세계의 형상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귀가슴이 세계의 소리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의외의 것을 본다는 것은 귀가슴이 세계의 소리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의외의 것을 본다는 것은 눈가슴이 더 활짝 가슴을 열어 낯선 것, 의외의 것을 끌어안은 것입니다. 의외의 것을 듣는다는 것은 귀가슴이 더 활짝 가슴을 열어 낯선 소리, 의외의 소리를 끌어안은 것입니다.

끌어안는 것은 본질에 있어 목숨을 건 비약을 통해 낯선 세계와 만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낯선 세계로서의 ‘어둠’과 주체인 ‘나’의 관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결’인것까진 알았지만, 어떻게 관계를 맺게 되는지를 몰랐던 저는 비로소 오감이 제 나름의 가슴으로 낯선세계를 ‘끌어안음’으로서 생기는 결이 곧 아름다움이란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은 자유이자 구속이고 관성입니다. ‘결’에 집착하면 그것은 관성이 되고 이미 결이 아니게 됩니다. 가슴을 여는 것은 관성을 내려놓는 것이며, 채우는 동시에 비우는 것입니다. 끝없이 빈 가슴으로 낯선세계를 끌어 안아야만 자유로서의 결이 생깁니다. 단식은 제게 큰 비움을 주었습니다.

풀은 수억년 적응된 결을 따라 씨앗을 틔우고, 줄기를 세우고, 잎을 뻗고 꽃받침을 벌리고 꽃술을 제치며 마침내 꽃가슴을 엽니다. 그러나 꽃은 최선을 다해 가슴을 열 수 있을 뿐 벌과 나비가 와서 안길지 말지는 우연에 맡겨진 자연사적 과정입니다. 그 우연을 최대한 필연으로 바꾸려고 꽃은 최고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창조합니다.

사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슴을 열고 세계를 끌어안습니다.
사람은 낯선 세계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함으로서 새롭고 낯선 나를 찾습니다.
상상이 절망적인 미래와 본질적인 연관을 향하면 이상이 됩니다.
상상은 추동력을 주지만 이상은 확신을 줍니다.
확신으로 인해 추동력은 항상적인 것이 됩니다.

끌어안는 것은 추동력과 확신만으로는 안 됩니다. 소통될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소통은 고통입니다. 나의 가슴들이 끌어안기엔 세상이 큰 것일 때 가슴들은 땀을 흘립니다. 땀을 흘려도 끌어안기엔 세상이 더 클 때 가슴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눈에선 눈물이, 손발에선 물집이 터져 흐릅니다. 눈물을 흘려도 끌어안기엔 세상이 너무 클 때 가슴들은 피땀을 흘리고 피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종국에서 끌어안음은 목숨을 걸기까지 하는 일입니다.

낯선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 가슴을 연다는 것은 낡은 나를 깨는 고통의 과정인 것입니다. 그 소통이 성사되는 순간 결이 만들어집니다. 결이 창조되고 나서야 내안에 숨어있던 또 세계 속에 감추어져 있던 결이 비로소 발견되는 것입니다. 법칙의 발견입니다.

결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아픔이 없는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가슴을 열어 끌어안음도 끌어안음을 통해 창조되는 결도 결국은 낯선 것입니다. 미학의 본령은 그리하여 다시‘어둠’의 미학입니다.

나의 창작의 성과를 회고해 보건대 낯선 세계를 끌어안기 위해 땀 흘리고 눈물 흘리고 피눈물을 흘리고 심지어 목숨을 걸었던 주제의 영역에서 스스로 보기에 좋은 창작의 성취를 이룬 것이 증명됩니다.

‘대인지뢰’와 ‘비무장지대’ 작업은 이론, 가치, 교육, 조직의 모든 영역에서 폭넓은 활동의 성과가 있었고 그 만큼 높은 완성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작품의 90%는 이론으로, 9%는 실천이로, 1%는 영감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나의 창작관이지만 1%의 순간이야말로 목숨을 건 비약과 결이 창조되는 순간입니다.

1%의 순간에 90%의 이론을 주입하려 하거나 목숨을 건 치열함을 반영시키려는 집착을 홀연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99%의 노력과 기반 없이 1%의 영감은 존재할 수 없지만 1%의 순간엔 99%는 모두 버려야 합니다. 강을 건너는데 사용한 배를 강을 건너고 나서도 짊어지고 가서는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이 결로서 남을 뿐입니다.

그 사진을 보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다면 사진가는 피눈물을 흘린 것입니다.그 사진을 보고 평화의 각오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진가는 죽을 각오를 했던 것입니다.

창작표현의 자유란 감옥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유입니다.
창작표현의 자유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유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창작표현의 자유란 관성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