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충지역의 외국사례와 한국 비무장지대의 기능 이시우 2004/10/17 387

한림대 DMZ 토론회 자료집 3

완충지역의 외국사례와 한국 비무장지대의 기능

김재한(한림대)

1. 2003년의 의미

비무장지대(DMZ)는 한반도의 상징처럼 되어있다. 2003년은 DMZ가 생성된 지 50년 되는 해이다. 공식적으로 종전(終戰)이 선언되지 못하고 정전(停戰)상태가 50년 동안 지속해왔다는 것은 긴장 국면이 반(半)백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는 특이한 역사적 희귀성과 더불어 한반도 안보의 불안정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규모의 돌발상황을 제외하곤 정전 상태가 50년이나 유지해왔다는 것은 그만큼 DMZ가 평화적 기능을 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이는 DMZ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던 외국의 DMZ와 비교해보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대목이다.

2003년은 정전협정의 50주년이기도 하지만 한미동맹의 50주년이기도 하다. 2003년 5월은 노무현 대통령이 생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달이다. 5월 14일 한미정상회담은 50년 된 한미동맹이 위기에 처했다고 말해지는 시점에 개최되기 때문에 큰 의미를 지닌다. 한반도의 정전협정은 한미동맹과 괘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한반도뿐만 아니라 20세기 대부분의 완충지대 또는 DMZ에 미국이 개입되어 있다. 미국이 각종 분쟁의 당사자 내지는 중재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2003년은 주월한국군이 철수한지 3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1973년 1월 27일 파리평화협정에 따라 3월 23일 한국군이 베트남을 철수하였고 3월 29일 미군도 완전 철수를 하였다. 북한, 통일, 안보 등의 이슈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남남갈등은 일부 사람들에게 한반도가 베트남식으로 적화통일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반대로 남한이 좀더 북한을 진솔하게 지원한다면 독일식으로 통일될 수도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음은 물론이다.

통일 시나리오의 명칭으로 독일식, 베트남식, 예멘식 등이 언급되어 왔다. 일방이 다른 일방을 평화적으로 흡수하는 독일식, 전쟁으로 통일하는 베트남식, 쌍방 합의로 진행되는 예멘식 등이다. 물론 예멘의 경우는 통일 이후 다시 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예멘식 통일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다. 또 독일형 통일을 자본주의로의 통일로, 베트남형 통일을 사회주의로의 통일로 보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또는 사회주의로의 통일이라고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오늘날의 베트남을 사회주의라고 부르기가 주저되기 때문이다. 통일모형으로 구분하기보다 독일형은 자본주의의 1차 승리, 그리고 베트남형은 사회주의의 1차 승리라고 부르는 식으로 1차 승리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른다. 좀더 구체적으로 기술하면 베트남형은 평화협정–>외국군철수–>공산화의 순서로 진행되는 유형이고, 독일형은 원조–>주민이탈–>자본주의화의 순서로 이해되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국의 비무장지대 또는 완충지역 사례들이 한반도 비무장지대에 시사하는 바를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특히 외국의 비무장지대 또는 완충지역의 역사는 한반도 비무장지대보다 더 오래되지는 않더라도 진도는 더 빠르기 때문에 시사하는 바가 크리라 생각된다.

2. 정전과 종전

비무장지대(DMZ)는 전쟁으로 탄생한다. DMZ는 종전(終戰)보다 정전(停戰)의 의미가 강하다. 전쟁을 끝내는 과정으로 탄생된다기보다 전투행위를 중지한 채 그 상태를 지속시키는 기능이다.

2003년 3월 30일 시작된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43일만에 끝났을 때에도 미국 부시 대통령은 “주요 전투작전이 끝났다(major combat operations have ended)”라고 표현했다. 테러와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혔다. 이는 전쟁 종식의 의미보다 적대행위 중지의 의미이다. 특히 미국이 승리를 공식선언하지 않은 것은 이라크국민을 의식한 측면도 있겠지만, 국제법상의 종전을 선포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제법상의 종전이 되려면 포로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미국이 석방하지 않고 조사하고 있는 이라크 포로가 2003년 5월 현재 아직 수천 명에 이르고 있다.

베트남의 DMZ는 1973년 파리평화협정(peace accord)에서도 언급되었지만, 그 탄생은 1954년 제네바 정전협정(agreement on the cessation of hostilities)을 통해서이다. 1954년 7월 20일 ‘인도지나(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정전에 관한 제네바협정’이 조인되었고, 7월 21일에 ‘인도지나에 관한 제네바회의 최종선언문’이 발표됨으로써 8년 간의 제1차 베트남전쟁이 종식되었었다. 제네바 정전협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지만, DMZ에 관한 각종 합의는 파리 평화협정 이후에도 더욱 준수되지 않았다.

1954년 베트남 군사정전협정에 따르면, 잠정군사분계선은 쿠아퉁강 하구에서 하천의 진로를 따르며 보호수 촌락에서부터 라오스 국경선까지는 위도선(대략 북위17도선)을 따랐다. 잠정군사분계선 양측에 폭 5km 이하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했으며(1조), 모든 군대와 군사시설은 협정 발효 25일 이내에 비무장지대에서 철수하기로 했고(5조), 행정, 구제, 허가된 특수 목적을 제외하곤 비무장지대의 출입을 금지하였다(7조).

섣부른 정전협정의 평화협정화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는 시각에 따라 다르다. 베트남이 파리평화협정 때문에 결국 적화통일되었으며 이는 베트남에게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다는 주장과, 반대로 남베트남에 의한 통일이 과연 베트남에게도 바람직했을 것인가 하는 의문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무력충돌만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상호경쟁적인 적절한 분단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DMZ 기능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평화협정은 평화에 결코 도움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http://grunt.space.swri.edu/visit.htm

3. 내전과 국제전

앞서 언급한 대로 비무장지대는 전쟁으로 탄생한다. 특히 국제전보다 내전(內戰)으로 탄생될 때가 많다. DMZ는 국제전 또는 국가간의 전투행위를 금지시킨다는 취지보다 내전을 중지시키는 성격이 강하다. 왜냐하면 국가간의 전쟁은 일방의 승리 또는 적당한 선에서의 전쟁종식이 되는 것이지 일시 중지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출처: nasaa-home.org/AF/new/americas.htm

내전의 성격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DMZ는 콜롬비아의 DMZ이다. 1980년대부터 여러 콜롬비아 대통령들은 내전을 종식시키려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998년 새로 선출된 파스트라나(Pastrana) 대통령은 좌익게릴라(FARC; Fuerzas Armadas Revolucionarias de Colombia, Revolutionary Armed Forces of Colombia)와 평화회담을 열어 FARC에게 스위스 영토 크기의 비무장지대(DMZ)를 부여했다. 반군들은 군사훈련, 외부공격. 마약거래, 납치 등을 위해 DMZ를 활용했다.

2002년 2월 평화회담이 결렬된 직후 DMZ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DMZ는 정부군과 반군간의 군사행위가 없었다는 것이지, 다른 지역에서의 정부군과 반군과의 충돌 그리고 DMZ내에서의 각종 폭력은 존재하였다. 반군은 납치인사 석방의 조건으로 DMZ의 존속을 요구하지만 거부되고 있다.

4.. 당사자와 중재자

DMZ는 당사국간의 정전협정 외에 유엔안보리에 의해서도 설치되기도 한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공격 이후 1991년 4월 3일 유엔안보리 결의안 687호에 의해, 이라크지역으로 10km(6마일) 그리고 쿠웨이트지역으로 5km(3마일)의 DMZ가 만들어졌다. 유엔안보리결의에 의해 유엔감시단(UNIKOM, United Nations Iraq-Kuwait Observation Mission)이 DMZ에서 감시활동을 수행했다.

유엔안보리에 의해 설정된 DMZ가 유엔안보리 결정에 의해 관리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서 UNIKOM은 유엔의 결의 없이 DMZ에서 철수한 바 있다. 쿠웨이트-이라크의 비무장지대 가까이에 “유엔 비무장지대, 미군 진입금지(UN DMZ, US Forces Do Not Enter)”라는 표지판이 있지만(연합뉴스 2003년 2월 26일), 이 표지판이 준수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베트남 DMZ도 제3국들이 감시하도록 되어있었지만 별 효과적이지 못했다. 아래 그림에서 교각의 남쪽 절반은 노란색으로 칠해졌고 북쪽의 절반은 붉은색으로 칠해졌었는데, 제네바협정 제34조에 의해 강 유역은 폴란드(사회주의국가), 캐나다(자본주의국가), 인도(중립국, 의장국)로 구성된 유엔위원회에 의해 감시되었다. 물론 국제감시위원회는 정전협정 위반을 제재할 아무런 강제력이 없었다. 따라서 DMZ에 관련된 각종 조항들은 제대로 준수되지 않았었다.

http://www.virtualtourist.com/m/tt/ab27/

5. 경계장벽

DMZ는 군사분계선(MDL)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경계는 곧 분단을 의미할 때가 많다. 1954년 제네바회의에서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되었는데, 6마일 폭의 완충지역이 사실상(de facto)의 국경선이 되었다. 물론 1954년 제네바회의최종선언문과 1973년 파리평화협정에는 군사분계선이 정치적 또는 영토적 경계선이 아니라 단지 임시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사실상의 국경선이기 때문에 1954년 베트남 분할경계선에 대한 합의가 쉽지 않았다. 월맹은 분할경계선으로 북위13도선을 주장하였지만 중·소의 압력으로 양보하여 협정체결 수 시간 전에 극적으로 북위17선 근방으로 합의하였던 것이다.

독일은 분단국이었지만 그 경계선의 의미는 베트남과 판이하게 달랐다. 전투가 진행되었던 베트남과 달리, 독일은 동서간의 전투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독일도 군사분계선이 있었다. 2차 대전 이후 생긴 베를린의 군사분계선은 전시(戰時) 적대국간의 경계선이 아니라 전시(戰時) 동맹국간의 경계선이었다. 같은 동맹국이었던 미·영·불과 소련간의 대치였지, 동독과 서독간의 대치가 아니었다. 굳이 동서독을 대비시키자면 동독의 주민이탈방지벽이었던 것이다.

베를린에 장벽이 생기기 전에는 동서베를린간에 비교적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동베를린에 거주하면서 서베를린의 직장에 근무하였다. 1960년 말까지 250만여 명의 동독인이 동독을 떠났다. 1952년 동독당국은 베를린을 제외한 양독 국경지역에서 총기를 사용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베를린을 통한 동독 탈출이 많았다. 1949년부터 1989년까지 적어도 943명이 양독국경선에서 사살되었으며 그 가운데 764명이 베를린 장벽 건설 이후에 사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물론 일부 시체가 아직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동독경계선에서의 희생자는 950명 내지 1,00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계선에서의 사살에 대한 비판이 일자, 동독 당국은 1984년에 덤덤탄(dumdum bullet) 자동화기를 제거하였고 1985년에는 매설지뢰 대부분을 제거하였다. 통일 이후 나머지 폭발성 물질들이 제거되었다(Pfennig 2001).

독일의 장벽은 동독인들의 서독행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동독이 세운 것이다. 1961년 8월 13일 일요일 아침 세워진 철조망 방벽은 다시 장벽으로 공고화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직전인 1961년 6월과 7월에만 약5만 명의 동독주민이 동독을 떠났었는데, 1962년에는 21,356명에 불과했다. 동독의 고위관료들은 8월 13일을 실질적 건국일이라고 했으며, 사실상 이 때 동독이 경제력을 회복하였다(Pfennig 2001). 특히 이와 더불어 총기사용허가가 동독의 단기적 체제수호에 도움이 된 것이었다. 동독의 고위관료들은 베를린장벽을 반(反)파시스트 보호벽이라고 불렀다. 방벽 붕괴와 총기발사 금지는 곧 동독체제의 붕괴를 의미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열렸다. 장벽의 붕괴는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온 것이었다.

서독에서도 통일의 후유증으로 장벽의 효능에 대한 주장도 있었다. “왜 중국인은 늘 싱글거리며 웃고 있나? 그들은 아직도 장벽(만리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조크가 독일에서 유해하기도 했다(Pfennig 2001). 하지만 독일의 장벽에는 게이트가 늘 존재했다. 한국의 경우 그러한 게이트가 없다. 판문점 관리를 한국군에서 하는 경우에는 교류가능성이 높을 수도 있지만 관리주체가 누구이냐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장벽은 보호와 격리를 위한 것이다. 독일 장벽은 동독당국이 동독인의 서독행을 억제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라면, 한반도의 철조망은 군사적 목적을 위한 것이다. 지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독일의 경우 지뢰는 동독주민의 서독으로의 탈주를 막기 위해 자기 경계선에 설치한 것이었다. 즉 내부의 이탈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완충의 의미는 상대국에 대한 것인데, 독일의 경우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완충이라는 의미는 없었다. 특히 서독의 경우에는 그러한 지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에 전쟁의 경험이 있는 한반도의 경우는 상대방의 무력도발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다.

출처: Pfennig 2001

출처: Pfennig 2001

*미등록, **1985년 10월부터는 제거되었음, ***1983년 8월 31일 당시 약 60,000개의 시설물로 439.5km까지 되었음.
출처: Pfennig 2001

6. 비무장의 분쟁동기와 중무장

무력충돌은 늘 비무장지대에서 시작되는 것도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무장화가 많이 된 곳에서는 무력충돌로 되는 것이 억제되기도 한다.

시리아와 인접한 이스라엘 북부지역 그리고 이집트와 인접한 이스라엘 남부지역에 설정된 DMZ도 이스라엘이 농업용으로 DMZ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시리아가 무력 제지하고, 이에 대해 이스라엘이 보복함으로써 1967년의 6일전쟁으로 비화되었던 것이다. 비무장지대가 1949년 7월 20일의 이스라엘-시리아 정전협정에 따라 설정되었지만 쌍방이 군대의 완전철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무장지대 조항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현재 중동의 DMZ는 사실상 경계의 의미는 상실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한국의 비무장지대를 중무장지대라고 하지만, 베트남 등 외국의 DMZ야말로 명칭이 잘못된 것이었다. 다른 지역보다 전투가 많이 행해졌던 곳이다. 이에 비한다면 한반도 DMZ는 제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7. 한국 개입

현재 유엔사(미군)가 맡고 있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 대한 경비책임을 한국군에 이양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2002년 연합토지관리계획(LPP) 협의 때 미국측이 제의한 것이다. 판문점 지역은 1991년 10월부터 판문점 군사분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 동서 1.6km 남북 1.6km 지역 경비책임은 한국군이 맡고 있다. 판문점 JSA는 현재 국군 1사단이 담당하고 있는 최전방 관측초소 ‘콜리어’지역을 제외하곤 국군과 미군으로 구상된 유엔사 경비대대가 경비책임을 맡고 있다. 만일 JSA에 대한 경비책임을 한국군이 맡게 된다면 DMZ 전지역의 경비/경계 책임을 한국군이 맡게되는 셈이다.

JSA 경비책임은 곧 미군이 DMZ에서 철수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미2사단이 경기북부지역으로부터 철수하는 것이고 따라서 북한도발억지를 위한 인계철선(tripwire)의 기능이 없어진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북한의 남침시 미군의 자동개입을 의미하는 인계철선 용어 자체에 대한 재검토 요구도 있다. 용어 자체가 주한미군에게는 매우 모욕적이라는 지적이다. 대신에 한국 정부는 전선의 동반자(frontline partnership)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출처:

2003년 4월 9일 ‘미래 한미동맹 정책구상’ 1차 회의의 공동보도자료에 따르면, “한국측이 군사능력 발전에 따라 선택된 일부 임무(selected mission)’에 대한 책임을 맡는다”고 하였는데, 그 임무란 주한미군이 수행해온 정보취득뿐만 아니라 북한이 DMZ에 근접해 집중배치한 방사포(다연장포) 및 장사정포 그리고 기갑전력 등에 대비해 미2사단이 구축해 놓은 대구경다연장포(MLRS)와 아파치공격헬기와 같은 포병 및 항공전력이 포함되는 휴전선 인근 전방지역 방어책임으로 추정되고 있다.

8. 통일전 접경협력

독일의 경우 접경협력은 서독의 일방적 협력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동서독 교류협력도 서베를린의 생존 차원에서 서독으로부터 170km 떨어진 서베를린을 연결하는 자유통행로를 확보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서독정부는 통행료 일괄지불, 조세지원, 교통로 건설/유지/보수비용 지불 등을 제공하였으며, 동독정부는 산재연금 수령자의 동독방문시 최소환전 면제, 정치범석방, 유로 수표와 신용카드의 도입 등을 제공하였다(강정모·박원규 2002).

또 연결기반 조성 외에 동서독의 접경지역협력은 재난에 대비한 협력체제 구축과 자원 공동관리이다. 기본조약에 의해 국경위원회(Grenzkommission)를 설치하여 홍수, 화재, 산사태, 전염병, 병충해발생, 환경오염 등에 대하여 밀접한 정보교환체계를 구축하여 공동으로 대응하고 지하자원도 공동으로 관리하기도 합의하였다. 동서독간 국경위원회는 남북한 직접교류에 참조해야 할 조직이다. 이 기관에서는 동서독 접경지역에서 발생하는 자연재해 공동방지, 환경오염 방지, 국토이용, 수자원관리, 도로연결 등의 협력사업을 추진한 바 있다. 국경정보교환소(Grenzinformationsstelle)를 운영하다 상주대표부를 설치하게 되는 진전을 보였던 것이다. 즉 사소한 협력이 신뢰구축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일방적 협력은 동독이 서독을 무력으로 침공할 것이라고 아무도 믿지 않았던 신뢰관계에서 가능했음은 물론이다.

독일의 통일전 접경지역지원정책은 반드시 분단이라는 것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서독 접경지역의 범위는 내독간 국경(1,393km)뿐만 아니라 체코와의 국경(358km)과 북동해안선(384km)을 따라 설정되었는데 주로 발전되지 못한 외곽지역을 중심으로 추진되었었다. 한국의 경우는 독일보다도 훨씬 심한 군사적 대치이기 때문에 군사시설보호에 묶여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9. 통일후 접경지역 관리

베를린 장벽의 잔해는 일부 기념으로 간직되어 있고 일부는 외국으로 보내어졌다. 일부는 가짜와 함께 판매되기도 한다(Pfennig 2001). 베를린장벽은 도시 심장부에 있어 고가의 부동산이기 때문에 보존이 쉽지 않았다. 서베를린을 둘러싼 지뢰밭은 제거되었고, 동독국경수비대의 차량통행을 위한 도로는 사이클트랙, 스케이트트랙, 산책로로 활용되고 있다.

베트남의 DMZ는 밀림이었으나 전쟁을 통해 특히 미군이 시야확보를 위해 대량의 소이탄(napalm)과 제초제를 투하하였었다. 오늘날에도 산림이 아직 울창하지 못하다. 지뢰도 완전히 제거되지 못했다. 미군의 폭격에 피해 건축한 여러 땅굴은 4년 동안 숙식을 하기도 한 장소였지만 이제는 관광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DMZ에 있는 땅굴(Vinh Moc Tunnel)은 베트남남부에 있는 쿠치(Cuchi) 땅굴과 달리 전투 목적보다 주로 주거 목적으로 사용되었었다. 200명의 사람들이 주거하였었는데 600명 가까운 사람들이 거주한 적도 있으며 2년 동안 17명의 아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며, 동시에 마지막 폭격에서 150명의 사람들이 매몰된 곳이기도 하다.

미국이 자본주의경제를 수호한다는 대의명분하에 베트남전쟁에 개입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그러나 통일베트남은 오늘날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어쩌면 미국은 사회주의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에 패배한 것이다. 부정부패가 많은 쪽이 패배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10. 한반도 비무장지대의 확대

한반도의 비무장지대는 여러 역기능에도 불구하고 순기능도 존재하고 있다. 적어도 전쟁이 재발되지 않았으며 생태계도 적정 수준 보존되었다.

DMZ의 역기능을 억제하고 순기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비무장지대의 확대가 필요하다. 비무장지대뿐만 아니라 일정 규모로 무기 배치를 제한하는 지대와 장거리화기 배치를 제한하는 지대를 운용한 이스라엘-이집트간의 시나이협정도 그러한 예이다.

남북한 접경, 나아가서 한반도 전체와 동북아 전체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는 현재 남북한 접경지역에 관한 기존 개념과는 다른 새로운 개념을 모색해야 한다. 정전협정에 의한 비무장지대 개념은 남북한간의 협력·화해와는 거리가 먼 유엔사(미군)와 북한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성격이 강하고, 접경지역지원법에 의한 접경지역 개념도 북한과의 아무런 관계가 없고 남한 내부의 일로만 인식되는 것이다.

접경지역의 기존 특징은 명목과 현실 그리고 지역내의 이질성이라는 두 가지의 양면성을 지닌다. 이와 관련된 접경지역의 두 가지 독립변수를 들고자 한다.

먼저, 인구 조밀도이다. 정전협정에서 출입인원을 제한하는 비무장지대, 그리고 가파른 산악지역처럼 사람이 다니기 힘든 지역의 인구는 희박하다. 나머지 지역들은 주둔군인들이 밀집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주둔군인들이 많다고 해도 대도시의 인구밀도를 따라갈 수 없다. 즉 지역마다 차이가 있을지라도 대체로 인구밀도가 희박하고 드문드문하다.

인구 희소성이 생태보전에 긍정적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인구가 희박하니 긴장이 해소되지는 못하고 있다. 어느 정도의 인구밀집화가 필요하다. 그 대상으로는 상주인구뿐만 아니라 유동인구도 포함된다. 전방의 모든 지역을 대상으로 상주인구와 유동인구를 늘이는 것은 환경적인 면에서 많은 문제를 가져다준다. 따라서 특정 지역에 국한하여 유동인구 특히 남북한간의 왕래를 증대시키는 것이 접경지역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데에 일조할 것이다.

접경지역의 두 번째 독립변수는 무장화 수준이다. 정전협정에서는 휴대무기 제한 등 비무장지대에서의 비무장화를 규정하고 있다. 비무장지대를 제외한 접경지역에서는 중무장화되어 있는 현실이다.

무장화는 인구 희소성을 가져다 주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지뢰이다. 지뢰는 남북한의 상호교류를 억제하는 면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차별 개발을 억제하는 면도 있다. 지뢰밭은 전쟁도발과 난개발을 억제하였는데, 적어도 자율적으로 평화와 자연을 보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효과적이었다. 즉 무장화되어 있는 것은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하여 생태 보전에 긍정적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무장화는 긴장해소는커녕 긴장을 높이는 대표적인 요인임에는 틀림없다.

비무장지대의 긴장완화적 기능을 극대화시키고, 접촉억제적 기능을 극소화시키는 노력의 일환으로 기존 합의를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 필요하다. 비무장지대의 부정적인 요소도 합의사항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지, 합의사항을 지켰기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비무장지대는 비무장지대의 본래 취지에 맞게 재조정되어야 한다. 비무장지대가 진정한 의미의 비(非)무장지대가 되어 군인은 국경관리인의 기능을 하는 것이 남북한 쌍방에게 이익이 된다. 군사대결의 긴장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기 위한 목적의 비무장지대는 무장해제가 될 때 그 존립근거가 인정된다. 반대로 중(重)무장화된 비무장지대는 비무장지대의 존립근거를 위협하는 최악의 상황이다. 전쟁억지라는 상호이익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비무장지대를 이름 그대로 비무장하여 화력을 후방으로 배치해야 한다.

군사적 차원의 비무장지대 확대도 필요하다. 남북한 쌍방은 상대방의 화력이 전진배치되어 있고 따라서 기습공격(surprise attack)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전진배치된 군사력은 상대를 기습공격하기에는 유리하지만, 상대의 선제공격에도 그만큼 취약하다. 전쟁승리에는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상대방 공격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억지(deterrence)와 방어(defense)에는 그렇게 도움되지 않는다. 반면에 후방배치된 군사력은 상대를 기습공격하는 기동력은 떨어지지만, 상대의 선제공격에 살아남아서 상대에 반격하는 이차공격력(second-strike capability) 면에서는 오히려 유리하다. 접경지역의 화력을 후방으로 이동시켜야 한다(김재한 1996).

1953년 7월 26일 열린 휴전협상 제10차 회의에서 공산측은 비무장지대를 38선에서 쌍방 10km로 할 것을 제의한 적이 있으며, UN측도 7월 27일 제11차 회의에서 비무장지대를 당시 전선으로부터 20마일로 할 것을 제안하였었다(이문항 2001, 80). 즉 쌍방이 비무장지대 효과의 실제적 발효를 위해 지금보다 더 넓은 폭을 구상했던 것이었다.

오늘날 남북한 접경지역에 대한 여러 제안들이 많은데,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용어가 ‘평화’인 듯하다. 평화에 대해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평화라는 용어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남북한이 서로 다른 의미로 말하기도 하며, 심지어 남한 내부에서도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 평화지대라는 개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혼선을 야기할 수 있다.

여기서는 비무장구역(DMA: De-Militarized Area)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 개념은 이미 고유명사화 되었으며 또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비무장구역 개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비무장화는 소극적 의미의 평화에 불과하다. 무기만을 줄이는 것이지, 적대감을 줄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장 적극적 의미의 평화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소극적 의미의 평화를 취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 의미의 평화만을 추구하는 것은 이념적으로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친 태도이다.

진정한 비무장이야말로 평화의 필수적이고 핵심적인 구성요소이다. 민통선북방지역을 포함한 접경지역을 비무장지대처럼 휴대무기에 제한을 가함으로써 비무장지대의 확대가 가능하다. 더구나 비무장화의 확대는 우발적인 단순 충돌이 전쟁으로 치닫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금강산 육로관광 도로 개설에 북한 군부가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바로 비무장지대의 폭 50m 도로 관통이 안보의 취약성을 증대시킨다는 북한 군부의 군사전략적 판단에서라는 분석이 있다.

비무장지대의 개방을 안보적인 측면에서 더 취약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비무장지대의 남·북방한계선에 배치된 중화력 때문이다. 만일 전력을 후방배치한다면, 이러한 취약성은 크게 감소할 것이다. 즉 비무장지대(DMZ)의 개방을 가져오기 위해서라도 비무장구역(DMA)의 확대가 필요하다.

접경지역의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남북 직접교류, 더 많은 인구, 비무장화가 필요하며, 반면에 접경지역의 생태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비무장화보다 출입제한과 같은 인구 희소성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접경지역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위 그림은 접경지역을 4개 구역으로 구분한다. 비무장 생태보호 구역, 비무장 개발가능 구역, 무장가능 생태보호 구역, 무장가능 개발가능 구역 등이다.

생태보호구역(ECA: Eco-Conservation Area)은 환경생태뿐만 아니라 문화유적도 보전하는 지역이다. 개발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접경지역의 개발이 곧 난개발이자 남용이며 따라서 사람의 발길을 끊는 것이 낫다는 입장이고, 반면에 개발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보존이 곧 방치이며 적절한 개발이 오히려 올바른 국토이용이라는 입장이다. 또 민간인의 접근을 금지한 군사시설이 생태환경을 보전했다는 주장과 반대로 훼손했다는 주장이 대립되기도 한다. 실제로 촌락이 전혀 없는 지역에서 아사(餓死)하는 야생동물의 개체수가 많고, 또 조류를 비롯한 야생동물들이 민가 근처에만 서식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많으면 생태환경에 도움되지 않으며, 남용된 개발보다는 차라리 방치된 보존이 보존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생태보호구역에서는 출입금지를 원칙으로 하지만, 환경생태, 고중세 역사유적, 한국전 사망자 시신, 전쟁과 분단 유물 등에 대한 남북한 공동 조사·관리 그리고 솔잎혹파리, 말라리아, 광견병 등에 대한 남북한 공동방제에 국한하여 출입을 허용한다.

무장가능 생태보호 구역은 현재의 군사시설보호구역 가운데 생태환경이 잘 보전되어 있는 지역에 해당한다. 반면에 무장가능 개발가능 구역은 군사시설을 비롯한 각종 시설로 생태환경이 훼손된 지역에 해당한다.

비무장구역도 개발이 가능한 구역과 개발이 금지된 구역으로 구분된다. 비무장 구역은 생태보호 구역이든 개발가능 구역이든 모니터링을 허용해서 비무장여부에 대한 철저하고 투명한 감시를 인정한다.

먼저, 비무장 생태보호 구역은 무장과 개발을 동시에 금지시키는데, 사실 인간의 출입과 무기 소지가 엄격히 통제되는 전형적인 비무장지대가 이 구역에 해당되어야 하나, 현재의 비무장지대에서는 목초를 소각하거나 벌채하고 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의 비무장 생태보호 구역은 아니다. 비무장 생태보호 구역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자연훼손을 금해야 한다.

이미 환경파괴된 비무장지대 지역은 비무장 개발가능 구역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환경파괴여부가 개발가능 구역 포함여부의 판단기준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다시 말해서 비무장 개발가능 구역은 환경보전의 절대적 가치보다 남북한 협력이라는 가치에 더 기여할 수 있는 구역으로 각종 시설과 이용을 허용하는 구역이다. 이 비무장 개발가능 구역에서는 무기 비소지자의 출입이 자유롭다.

남북한의 실질적 협력의 공간은 이 비무장 개발가능 구역에서 설정될 수 있다. 경의선과 금강산육로도 모두 이 구역에 해당한다. 기존에 평화 농장, 평화 마을, 평화 공장 등의 실체가 있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대로 이러한 공간에 ‘평화’라는 명칭 대신에 ‘비무장’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면, 비무장 도로(경의선 도로, 금강산 육로,…), 비무장 철로(경의선 철도, 경원선 철도, …), 비무장 농장(철원 농장, …), 비무장 공장(파주 공장, …), 비무장 산(금강-설악 연계의 산악지역, …), 비무장 어장(NLL남북22마일해역, …), 비무장 영공(서울-평양 직항로 구간, 양양공항 기점 특정 구간, …) 등이 가능한 예이다.

이러한 구역 구분은 개별 지역 사정뿐만 아니라 전체 지역들과 조율되어야 한다. 생태보호는 띠(벨트)로 접근해야 하고 군사시설은 거점 위주로 접근해야 하는데, 현재는 반대로 접근되고 있는 실정이다.

절대보전의 핵심(core)지역을 중심으로 외곽의 완충(buffer)지역과 전이(transition)지역을 설정하는 방식은 권역 단위로 접근되기가 쉽다. 무장구역이든 비무장구역이든 생태보호 구역은 전체가 선으로 연결되게끔 생태연결로(eco-route)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비무장지대가 지금껏 생태 복원과 보전이 비교적 잘 된 것도 바로 연결로라는 이유 때문이다. 비무장지대 일원에 지정예정인 ‘접경생물권보전지역’ 자연생태공원도 띠의 개념으로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군사안보와 지역개발도 벨트로 접근되기도 한다. 다만, 생태보호가 동서 횡단의 축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면, 개발은 남북 종단의 도로로 추진되고 군사안보는 화력과 병참의 거점간 연결선으로 방어망과 저지선이 결정되는 것이다.

남북한이 구역을 설정할 때에는 기존의 비무장지대를 절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각각 군사분계선(MDL) 이남과 이북만을 관할하되, 자신이 관할하는 구역 내에서 기존의 비무장지대 일부와 민북지역 일부의 기능을 맞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상대방의 구획과 연계하여 자신의 구획을 설정해야 할 것이다.

상대방 구획을 임대하는 방안도 있다. 예컨대 북한의 특정 지역을 안보상 비무장을 시키거나 생태보전을 시킬 필요가 있다면 그 지역을 임대하여 해당 비무장구역 또는 생태보호구역으로 지정하는 방안이다. 그 경우에는 최소한의 관리·감시 인원이 파견될 수 있어야하며, 임대비용은 금강산관광사업에 소요되는 비용보다 적게 들 것이다.

만일 그러한 구획설정에 합의가 성사되지 않으면, 먼저 각 구역의 면적만 남북한이 합의하고, 다음으로 그 책정된 면적을 자국 관할 내에서 배분하는 구체적 구획설정은 각자가 알아서 결정하고 상대방에게 통보만 해 주는 것도 가능하다. 각자 군사전략적 측면에서 무장구역과 비무장구역을 구분·설정하며, 또 생태적 가치가 높은 지역 또는 현재 69㎢에 이르는 미확인 지뢰지대 가운데 지뢰제거가 어려운 지역을 생태보호구역으로 하고 그렇지 않은 지역을 개발가능구역으로 설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면적단위의 비무장구역 증대와 생태보호구역 신설은 군사분계선에서 일괄적으로 2km, 10km, 20마일 등 일정 거리 후방으로 물러나는 방안보다는 복잡하지만 상대적으로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방안이다. 남북관계의 진전에 따라 구획이 재조정되고 합의하에 증감이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상의 구역설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새로운 평화협정이 있어야 한다. 일방의 출입인원을 1,000명으로 제한하는 정전협정 규정은 경의선만 개통되어도 문제가 될 수 있으며, 구획 자체가 바뀌기 때문에 새로운 협정이 필요한 것이다.

더구나 구획 설정은 해당 주민의 입장에서는 규제를 받는 것으로만 인식되지 새로운 기회를 제공받는다고 인식되지 않는다. 위대한 자연유산을 물려받았는데 이 유산이 부귀영화의 수단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구조적 빈곤의 빌미가 된다는 피해의식을 해소시켜야 할 것이다. 무장구역 또는 생태보호구역으로 설정된 토지는 다른 보상수단이 없으면 적절한 가격으로 정부가 매입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강정모·박원규. 2002. “남북한 경제 균형발전을 위한 북한 경제 회생방안” 『비교경제연구』9권1호.

김재한. 1996. 『게임이론과 남북한관계 – 갈등과 협상 및 예측』. 수정판. 한울.

이문항. 2001. 『JSA – 판문점(1953-1994)』, 소화.

Pfennig, Werner. 2001. “The Rise and Fall of the Berlin Wall and the Korean DMZ,” The Korean DMZ – Reverting beyond Division, edited by Chae-Han Kim. Seoul: Sow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