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지대탄생존속의국제정치의미 이시우 2004/10/17 264

한림대 제 11차 DMZ 야외 토론회 자료집2

김 영 호 (성신여대 정외과)

서론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고 있는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는 한국전쟁 이후 체결된 정전협정에 의해 탄생했다. 휴전협정은 전투상태를 중단하는 잠정적인 조치일 뿐이고 한반도의 완전한 평화체제의 성립은 평화협정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끝난지 5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한반도 상에 공고한 평화체제가 단시일 내에 이루어질 전망은 매우 낮다고 할 수 있다. 평화협정없는 전쟁의 종식이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은 한반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과 소련에서 보는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 차원에서 전개된 냉전의 전개는 여타 국가들 사이에도 평화협정없는 불안정안 공존을 강요해 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 차원에서 전개된 냉전은 소련과 동구권의 사회주의체제의 붕괴로 막을 내렸고, 유럽 지역의 냉전을 상징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분단국가 독일은 통일되었다. 이와 달리 탈냉전 시기에도 한반도는 여전히 두 분단국가가 군사적, 이념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냉전의 고도(孤島)로 남아 있고, 비무장지대의 존속은 한반도의 특수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비무장지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에 의한 한반도의 분할선이었던 38선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이후 38선에 의한 한반도의 분단은 세계적 차원에서 전개된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 대결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분단 이후 38선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북한에 의해 남침이라는 군사적 수단과 전쟁을 통한 급진적인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방식은 38선이 갖고 있던 국제정치적 성격에 비추어볼 때 냉전적 양극체제 하에서 미국에 의해 수용될 수 없었다. 휴전협상 과정에서 공산세력은 스탈린의 지시에 의해 38선 상에서의 휴전과 38선의 부활을 추진했지만, 미국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유엔군이 제시한 휴전회담 당시의 군사적 접촉선이 군사분계선으로 결정되었다. 이 분계선을 기준으로 양측이 남북으로 2km씩 물러나서 일종의 완충지대를 형성함으로써 폭 4km, 동서 250km에 이르는 비무장지대가 38선을 대체하게 되었다.
이처럼 비무장지대의 탄생이 갖고 있는 국제정치적 성격은 그 존속과 관리 방식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은 주변 강대국들 모두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개입된 전쟁이었고,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위험이 매우 높았던 전쟁이었기 때문에 주변 강대국들은 비무장지대의 급격한 변화보다는 현상유지적 정책을 추구했다. 한미동맹의 체결과 미군 2개 사단의 주둔은 대북 억지체제의 구축을 통해서 한국의 안보 우려를 해소하려는 시도였다. 특히 한국전쟁 직후 비무장지대의 방어를 맞았던 미군 보병사단들은 북한의 남침시 미국의 자동개입을 보장하기 위한 인계철선(trip-wire)의 역할을 떠맡음으로써 미국의 현상유지정책의 상징이었다. 소련과 중국도 더 이상 북한의 남침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함으로써 한국전쟁 이후 판문점과 휴전선 상에서의 수많은 크고 작은 충돌에도 불구하고 비무장지대는 국제정치적 영향 하에서 존속되고 있다.
이러한 비무장지대에 대한 현상유지적인 정책은 국제정치적 상황의 변화와 한국의 꾸준한 국력의 증가로 인하여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정책에 의해 대체되기 시작했다. 1991년에 채택된 남북기본합의서의 12조와 19조는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끊어진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고,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문제를 남북한이 논의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지 못했지만, 비무장지대의 점진적인 변화를 위한 단초는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에 의해 열리게 되었다. 2000년 8월 제2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6.15공동선언의 구체적인 실천을 위해서는 군사분야의 화해협력이 중요하다는 인식 하에 2000년 9월 남북 국방장관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국방장관회담은 남북한 사이의 철도 및 도로 연결을 위해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를 개방하기 위한 구체적 논의를 진행시키기로 합의했다. 그 이후 남북한은 유엔사의 협조 하에 정전협정의 틀 내에서 일련의 군사보장합의서를 체결하고 남북 경의선과 동해선의 철도 및 도로 연결을 위한 공사를 완료한 후 2003년 1월 27일 비무장지대를 관통하는 임시도로 통행과 관련된 군사보장합의서를 체결함으로써 그 탄생 50년만에 비무장지대의 일부가 비로소 개방되었다. 비무장지대의 개방은 더 이상 급진적인 방식 혹은 현상유지적인 방식으로는 비무장지대를 관리할 수 없다고 하는 대내외적인 상황 변화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무장지대에 대한 급진적, 현상유지적, 점진적 방식의 관리와 변화의 추구는 38선과 휴전선을 탄생시킨 냉전적 질서의 성격 변화에 따라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비무장지대의 탄생과 존속의 국제정치적 의미는 세계적 차원과 한반도 차원이라는 양 차원에서의 냉전적 질서의 형성과 변화 과정에 관한 분석과 밀접한 연관성 하에서 고찰될 때 구체적으로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 글은 전후 문제처리를 위해 1945년 2월에 개최된 얄타회담이 한반도 냉전질서를 상징하는 38선 등장의 직접적인 출발점이 되었다고 보고, 그 회담에서 한반도의 분단까지의 시기를 살펴본다. 다음으로 이 글은 38선이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로 대체되는 결정적인 분기점이 된 한국전쟁의 발발과 그 영향을 분석한다. 전쟁의 방식을 통하여 38선을 제거하려는 북한의 급진적 방식이 국제정치적 압력에 의해 실패하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38선이 비무장지대로 치환되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또한 이 글은 한국전쟁 이후 비무장지대에 대한 현상유지적 정책을 통해서 한반도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주변 열강들의 노력을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들을 통하여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몰타(Malta)선언에 의해 상징되는 세계적 차원의 냉전 종식이라고 하는 외부적 충격에 직면하여 남한과 북한이 나름대로의 대응책을 모색해 나가는 과정을 살펴보고,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비무장지대의 변화에 끼친 영향을 검토한다. 또한 비무장지대의 일부 개방이 향후 한반도 냉전 질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얄타회담과 38선의 등장
비무장지대의 원형을 이루는 38선의 등장은 구한말 이후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던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 유지되고 있던 기존의 세력균형체제가 변형된 독특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전후 국제정치질서가 미국과 소련 사이의 양극적 구조에 의해 재편되면서 그 영향이 한반도에 그대로 반영되면서 한반도의 냉전 질서가 형성되었고 그 구체적인 표현이 38선에 의한 남북 분단이었다. 그 역사적 과정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우선 한반도가 서구적 근대국제정치체제로 편입되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유럽에서 형성된 무정부적 근대국제정치체제가 동양으로 팽창하면서 그 질서로 편입되기 이전의 한반도는 중국 중심의 중화질서(中華秩序) 하에서 중국을 사대의 종주국으로 삼고 일본을 교린(交隣)의 대상으로 삼는 조공체제(朝貢體制)에 속해 있었다. 군사적 우위를 갖춘 서구 열강에 의해 중국 중심의 사대질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한반도는 조공적 질서와 서구적 근대국제정치질서가 양립하는 과도기를 거쳐서 서구적 질서로 편입되었다. 당시 조선은 유교적인 부국안민(富國安民)의 원리에서 탈피하여 근대국가적인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원리에 기초하여 국력을 결집할 수 있는 내적 개혁을 달성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 열강들과의 적절한 전략적 관계를 통한 독립성의 확보에도 실패했다. 그 결과 메이지유신과 영일동맹을 통하여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대국으로 등장한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모두 승리함으로써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일본의 영향권 하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식민지 기간 중 3.1운동으로 등장하게 되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향한 지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미래는 일본과 주변 강대국들 사이의 전략적 관계의 변화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에 의해 태평양전쟁이 발생하고, 미국의 요청에 의해 소련이 이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식민지 한국의 미래는 미국과 소련의 전략적 관계에 의해 결정되게 되었다. 독일이 유럽 전쟁에서 항복하기 이전에 마지막으로 개최된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 미국과 소련은 전후 유럽의 질서 재편과 소련의 대일전 참여 문제를 논의했다. 이 회담에서 양국은 독일과 독일 점령 지역의 처리문제에 대해 잠정적인 합의에 도달하게 되고, 독일 항복 후 3개월 이내에 소련이 군사력을 아시아로 이동시켜 대일전에 참전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처럼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 지역의 문제는 유럽의 상황과 밀접한 전략적 연관성을 맺으면서 처리되었다. 이러한 연관성은 얄타에서의 잠정적인 합의를 미국과 소련의 어느 한 쪽이 먼저 무시하거나 어길 경우 다른 쪽은 상응하는 대응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반도의 냉전과 38선에 의한 남북 분단이 유럽에서 미국과 소련 사이의 합의 혹은 대결 상황 전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때문이었다.
유럽과 아시아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얄타협정 중 유럽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것은 4대 연합국이 독일을 분할하여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소련에 의해 제시된 독일분할안을 미국이 수용함으로써 소련은 볼세비키혁명 이후 처음으로 베르사이유체제가 만들어 놓은 방역지대 너머로 자신의 세력권을 확장시킬 수 있는 계기를 포착하게 되었다. 또한 얄타회담은 독일점령 하의 국가들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해방유럽에 관한 선언”(Declaration on Liberated Europe)을 루스벨트의 제안에 의해 채택했다. 이 선언은 독일로부터 해방된 유럽의 국가들 내에서 민주적 선거절차를 거쳐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데 협력하기로 한 합의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루스벨트가 미국내의 여론을 만족시키기 위해 제시한 것이었고, 군사적으로 동구를 점령한 소련이 이 선언을 벗어난 정책을 펼 경우 이것을 규제할 어떠한 조치에는 미소가 합의하지 못했다. 따라서 유럽의 상황은 미국이나 소련이 갖고 있었던 어떤 정해진 청사진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얄타협정의 내용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의 구체적인 정책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는 유동적인 것이었다.
38선의 탄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얄타협정의 아시아 관련 부분은 미소 양국이 1년 뒤인 1946년 2월 동시에 극비의 합의문서를 공개하지 전까지는 그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 내용의 핵심은 독일이 항복하여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 2개월 내지는 3개월 후에 소련이 아시아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고, 그 대가로 소련은 아시아에서 1905년 러일전쟁의 패배로 제정 러시아가 잃어버린 이권들을 재확보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의 대일전 참여 지연으로 만주의 관동군이 일본 본토로 이동하여 결사항전을 벌일 경우 미국은 일본 본토 공격에서 약 100만 이상의 사상자를 낼 것으로 추정했고, 이러한 미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하여 미국이 일본을 공격하기 3개월 전에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여 만주에서 관동군을 봉쇄하여 패배시키기를 원했다. 소련은 당시 24개 사단과 42개 여단을 갖고 있던 일본의 관동군과 싸우기 위하여 최소한 30개 사단을 극동으로 이동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소련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에는 1천대의 열차가 필요했고, 그 이동 기간은 약 3개월이 소요될 예정이었다.
대일전 참전의 대가로 소련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빼앗긴 남부 사할린을 되찾고, 쿠릴열도를 합병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소련은 중국의 여순항에 해군기지 건설권을 확보하고, 남만주철도와 동청(東淸)철도 사용권 및 대련항 사용권을 포함한 만주에서의 우월한 지위를 보장받았다. 그대신 소련은 만주에 대한 국민당의 주권을 인정하고 국민당과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하기로 하고, 장개석과 사전 합의없이 소련과 일방적으로 중국문제를 합의한 데 대해서는 루스벨트가 책임지고 장개석을 설득하기로 합의했다.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아시아에서 확보한 이권들은 쿠릴열도를 제외하면 모든 것들이 1905년 러일전쟁 패배 이전 제정 러시아가 상실했던 것을 되찾은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러일전쟁 패배 이후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상실했던 러시아가 소련에 의해 다시 아시아 무대에 초강대국으로 재등장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록 내전이 진행되고 있던 중국의 상황이 유동적이긴 했지만, 소련의 재등장은 미국의 일본 점령과 함께 유럽과 마찬가지로 아시아도 미소의 세력권으로 양분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처럼 소련은 얄타회담을 통하여 유럽과 아시아에서 상당한 전략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스탈린은 얄타회담을 소련 외교의 빛나는 금자탑으로 여겼고, 가능하면 이 회담에서의 미국과의 합의를 지키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최근에 공개된 소련문서들은 보여주고 있다.
주변 열강들 사이의 지정학적 요충지에 위치한 한반도가 전후 어느 강대국의 완전한 영향권 하로 편입되어서는 안된다는 전략적 인식을 갖고 있던 루스벨트는 얄타회담 기간 중인 1945년 2월 8일 스탈린에게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실시 의사를 밝혔고, 스탈린은 여기에 동의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월 8일 소련이 대일전에 정식으로 참여함으로써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한반도를 둘러싼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3성조정위원회(SWNCC)는 8월 10일과 11일 밤에 사이에 38선을 한반도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 위한 군사분계선으로 황급하게 결정하고, 8월 13일 트루만은 이것을 승인했고, 그 내용은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 구체적 절차를 명시한 맥아더에게 보내는 일반명령 제1호(General Order No. 1)에 포함됐다. 8월 14일 미국은 이 사실을 소련에게 통보했고, 스탈린은 한반도 38선 분할에 관한 한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미국의 안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남한과 북한은 각각 미국과 소련의 점령 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얄타회담 이후 소련 외무성이 포츠담회담 준비를 위해 작성한 문서에 따르면 소련은 한반도에 소련에게 적대적인 정부가 들어서는 것에 반대하고, 신탁통치가 실시되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 한반도 전체를 군사적으로 합방하겠다는 계획은 갖고 있지 않았다. 또한 소련이 미국과 함께 한반도를 분할하여 점령한 직후에도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 방법에 관해서도 소련은 뚜렷한 청사진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1945년 9월에 작성된 문서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소련의 태도는 전후 유럽에서와 같이 아시아에서도 미국과의 합의인 얄타협정에 따라서 미국과의 협조체제를 유지하고 미국으로부터의 구체적인 정책 제안에 따라서 나름대로의 입장을 정리해 나가고자 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이후 한반도 문제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소가 한반도 상에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이 통일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남북한 내의 정당 및 사회단체들과 협의한 후 5년간의 신탁통치 기간을 거쳐 완전 독립국가를 수립한다는 데 합의함으로써 얄타회담 이후 가장 구체적인 안이 제출되었다. 그러나 남한 내부의 우파 단체들은 미소가 제출한 신탁통치안을 정면으로 거부함으로써 이러한 단체들을 협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미소 사이에 지리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1946년에 개최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그해 5월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1947년 5월 재개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여전히 통일정부 수립 절차에 대해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논쟁을 거듭하고 있었다.
최근 공개된 소련문서들에 기초한 냉전 연구들은 1947년 6월 5일 마샬(George C. Marshall) 국무장관의 하바드 연설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추진된 유럽경제부흥안인 마샬 플랜(Marshall Plan)이 유럽에서의 미소 냉전 대결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는 사실에 일치된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얄타협정을 준수하면서 미국과의 협조체제를 유지하고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던 스탈린은 마샬 플랜이 소련 체제를 파괴하려는 청사진을 미국이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고 믿고 동구권 국가들에 대한 지배를 강화시키게 된다. 이러한 마샬 플랜에 대응하기 위해서 1947년 9월 스탈린은 즈다노프(Andrei A. Zhadanov)로 하여금 자본주의권과 사회주의권의 대결을 상징하는 양진영 이론을 제시하게 하고 코민포름을 결성하여 동구권 국가들의 결속을 강화시키게 되면서 유럽에서의 미소 냉전 대결은 본격화되었다.
마샬 플랜에 의해 촉발된 유럽에서의 미소 냉전대결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의해 한반도의 분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행되고 있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의 한반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 합의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비밀회담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1947년 10월 18일 제62차 회의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고 그 이후 한반도에서의 미소 합의는 불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교착상태가 계속되자 미국은 소련에게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할 것을 요청했고, 소련은 이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적 편의를 위해 그어진 38선은 남북 분단선으로서 고착되게 되었다.
구한만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한반도는 일본의 몰락으로 생겨난 아시아 지역에서의 공백상태를 메우기 위해 이 지역에 진출한 미국과 소련에 의해 점령된 이후 두 초강대국의 냉전 격화로 인하여 38선을 기점으로 양국의 이념을 대변하는 두 분단국가로 분단되었다. 서로 상충되는 이념을 갖게 된 두 분단국가는 한반도 상에서의 독점적인 주권의 행사를 주장하면서 각각의 이념에 기초한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38선 상에서 국지전인 분쟁을 거듭하게 된다. 그러나 한반도의 냉전질서는 언제든지 열전으로 폭발할 가능성을 안고 있었지만, 미국과 소련 중 어느 한 측이 전면전을 허락하고 지원하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 전쟁가능성은 적었다. 왜냐하면 당시 두 분단국가는 각각 미국과 소련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독립성을 대내외적으로 보장받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1949년 10월 중국공산혁명의 성공 이후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권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전략적 상황과 북한의 무력통일론을 이용하여 아시아 지역에서의 미소 사이의 세력균형을 공산측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급격하게 변화시키려는 과정에서 소련이 북한의 남침을 승인하고 지원함으로써 발생하게 되는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38선은 비무장지대로 치환되는 계기를 맞게 된다.

한국전쟁과 비무장지대의 탄생
38선의 탄생 과정은 국제정치적 요인들에 의해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38선을 제거하거나 변화시키려는 시도 역시 국제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 그러한 시도가 당시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의 국가이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할 경우 38선의 지위 변경에 관한 한 남북한의 자율성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38선은 전세계적 차원에서 세력권을 형성하고 경쟁하고 있던 미소 대결의 한반도적인 축소판이었던 것이다. 한반도 분단 이후 38선의 지위를 급진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중국 내전의 결과에 의해 영향받았다.
두 분단국가의 등장에 의해 한반도 냉전 질서가 형성된 이후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사이의 내전이 계속되고 있었고, 이 내전의 결과는 아시아 지역의 세력균형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 지역과 관련하여 미소 사이에 이루어진 얄타협정의 중요한 합의사항의 하나는 소련이 장개석 국민당정부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국민당의 중국과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한다는 것이었다.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세력의 승리로 인하여 기존의 중소동맹조약을 대체하여 소련이 공산중국과 신조약을 체결하게 될 경우 그것은 얄타협정의 합의사항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중국의 공산화는 전후 장개석의 중국을 세력균형의 한 축으로 만들어 아시아 지역의 질서을 유지하려던 미국의 얄타체제적 구상이 심대한 타격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중국이 갖고 있는 이러한 딜레마를 인식한 봉쇄전략의 입안자인 케난(George F. Kennan)은 중국을 배제하고, 미국, 소련, 영국, 서부유럽, 일본을 세계전략의 중심축으로 하는 “다섯개 중심국가론”을 제시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이들 국가 중 미국이 소련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을 미국의 동맹권으로 흡수하여 장기간에 걸쳐 소련을 봉쇄한다면, 소련은 미국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그 내부로부터 붕괴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케난의 봉쇄전략은 중국에 관한 한 얄타체제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었지만, 중국의 공산화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미국과 소련에게 직접적인 전략적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인접한 한반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중국공산당의 승리가 거의 확실시되던 1949년 6월 모택동은 즈다노프의 양진영 이론에 따라 대소일변도정책을 선언하고, 혁명 성공 이후 중국 내부의 반공산혁명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공고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신생 중국에 대한 외부 세력의 간섭과 침략을 막기 위해 소련과 신조약을 체결하기를 원했다. 중국공산혁명의 성공과 모택동의 신조약 체결 요구는 스탈린에게도 커다란 딜레마를 제공했다. 신조약의 체결은 당시까지 아시아 지역에서 유지되어 온 얄타체제의 틀이 깨어진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스탈린으로서는 유럽에서 미국의 마샬 플랜 시행 때와 마찬가지로 아시아에서도 대미관계에서 중요한 정책적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모택동과 달리 이미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북한에서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과 북한의 지도자들은 1949년 3월 스탈린과의 모스크바 회담 때부터 계속해서 북한의 남침을 승인하고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38선은 미소의 합의에 의해 그어진 국제전 분할선임을 강조하고, 남한이 먼저 북침을 해올 경우에 한해서 북한은 반격을 가할 수 있다고 못박았다. 그 이후 스탈린은 계속되는 북한의 남침 요청을 승인하지 않았고, 1949년 10월 소련의 사전 승인없이 대규모 국경분쟁에 당시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 군사고문단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한 후 북한으로 하여금 전면전으로 비화될 수 있는 대규모의 국경분쟁을 도발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북한의 남침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해 오던 스탈린은 모택동과의 중소동맹조약 갱신을 위한 모스크바 회담이 진행되고 있던 1950년 1월 30일 김일성에게 남침을 승인하고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게 된다. 이미 스탈린은 1월 19일 주북한 소련 대사 스티코프(T. F. Shtykov)로부터 김일성이 다시 한번 남침을 승인해줄 것을 요구했다는 전문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스탈린의 한국전쟁 결정이 공산중국과 신조약을 체결하고 얄타회담을 완전히 폐기하기로 한 스탈린의 결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북한의 남침을 승인하기 전에 이루어진 1949년 12월 16일 모택동과의 첫 번째 모스크바 회담에서 장개석과의 구조약을 신조약으로 갱신하자는 모택통의 제안에 대해서 스탈린은 구조약을 완전히 폐기하고 신조약을 체결하기 보다는 구조약의 구체적 조항들을 형식적으로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실질적으로 구조약을 변경할 것을 제의했다. 스탈린은 얄타협정은 미국과 영국의 합의 하에 체결된 것임을 강조하고 그렇기 때문에 구조약의 어떠한 조항도 변경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자신을 포함한 소련 권력층 내부의 의견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로서 그는 소련이 구조약의 어떤 한 부분이라도 변경시킬 경우 미국이 쿠릴열도와 사할린 등과 같은 얄타협정의 다른 조항들에 대한 변경을 요구할 수 있는 구실을 줄 것이라는 사실을 들었다. 따라서 그는 구조약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스탈린이 구조약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제1차 회담의 입장을 변경하여 신조약을 체결하기로 한 소련의 변화된 입장을 모택동에게 정식으로 통보한 것은 1950년 1월 2일 저녁이었다. 스탈린은 몰로토프(V. M. Molotov)와 미코얀(Anastas Mikoyan)을 모택동의 숙소로 보내 이러한 결정을 알려주고 주은래가 조약의 구체적 내용을 협의하기 위해 1월 20일까지 모스크바로 오는 데 동의했다. 그리고 신조약 체결을 위한 모든 조치는 1월말까지 마무리짓기로 합의했다. 바로 이 1월말은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 승인 의사를 통보하는 것과 일치한다.
1950년 1월 20일 주은래가 모스크바에 도착한 후 1월 22일 스탈린과 모택동은 다시 회담을 갖고 신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을 마무리짓게 된다. 스탈린은 구조약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던 기존의 입장을 바꾸어 신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재차 통보했다. 이에 대해 모택동은 신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얄타협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스탈린에게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스탈린은 이제 얄타협정을 완전히 폐기처분하여 없애버리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나아가 스탈린은 신조약 체결이 얄타협정을 위반하고 이러한 결정이 중국과 소련에게 불이익을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양국은 지금부터 미국에 대항해서 싸워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얄타회담의 성과를 소련 외교의 빛나는 업적으로 여기고 있던 스탈린이 아시아에서의 얄타협정을 폐기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유럽과 아시아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기존의 얄타회담에서의 미국과의 합의를 완전히 파기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아시아에서 얄타협정에 의해 성립된 현상태를 변화시켜 미국과의 냉전대결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기 위하여 중대한 정책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스탈린이 한국전쟁 결정 직전까지 38선과 얄타협정이 미국과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아시아에서의 양국 사이의 세력권 분할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그가 이러한 입장을 갑자기 변경하여 얄타협정의 폐기와 동시에 남침을 승인한 것은 중국혁명의 성공으로 인하여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권에게 유리하게 전개된 전략적 상황과 김일성의 무력통일론을 이용하여 미국과의 냉전대결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기 위하여 적극적인 공세정책으로 전환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한국전쟁의 발발은 미소 냉전 대결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 전쟁의 전개과정과 결과는 세계적 차원의 미소 냉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38선의 위상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미국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북한의 배후에는 소련이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미소 합의에 의해 그어진 38선은 비록 분단선이 되었지만, 미국에게는 세계적 차원의 냉전 대결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해야 하는 봉쇄선이었다. 따라서 북한의 남침은 한국을 미국의 영향권으로부터 제거하려는 스탈린의 롤백(rollback)정책을 의미했다. 미국은 소련과 북한의 의도를 좌절시키기 위해 한국전쟁에 개입했다. 부산방어선을 중심으로 교두보를 확보한 미국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승리 이후 북한지역을 소련의 영향권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해 38선 이북으로 롤백을 추구하게 된다. 북한의 남침을 승인하기 이전에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과 북한의 패퇴와 같은 위기 상황에 대비하여 김일성으로 하여금 모택동으로부터 한국전쟁에 대한 사전 동의를 얻도록 했다. 유엔군이 중국 국경선 근처로 진격해 오기 시작했을 때 모택동은 이러한 사전 약속과 중국의 안보적 고려 때문에 한국전쟁에 직접 개입하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 상에서 직접 전쟁을 벌이게 되고, 그 영향으로 생겨난 양국의 적대적인 관계 때문에 한국전쟁 이후 미국은 중국위협론에 근거하여 한반도와 아시아 지역의 전략을 마련하게 된다.
한국전쟁 직전 미국은 병력과 국방비의 부족으로 인하여 미소 냉전 대결에서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고, 이승만의 거듭된 한미동맹조약의 체결과 대규모의 무지지원에 대한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1947년 6월 작성된 미합참의 비상전쟁계획인 문라이즈(MOONRISE)는 소련의 전쟁 목적이 아시아 지역보다는 유럽이나 중동 지역에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있다고 보고, 아시아 대륙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모스크바 등 소련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들에 대한 공격 통로를 확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소련과의 전면전에서 아시아가 미국의 군사작전에서 갖는 중요성은 그만큼 떨어지게 되었고, 한반도는 미국의 아시아 지역 방위선에서 제외되었다. 한국전쟁은 미국의 군사전략적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한반도 상에서의 미국과 중국 사이의 군사적 충돌로 인하여 미국 내에서는 중국위협론이 급격하게 부상하게 되었다. 중국위협론은 중국을 주요 적국으로 상정하는 계기를 부여함으로써 한국전쟁 이전과 달리 한반도의 군사전략적 가치가 그만큼 부상하는 것을 의미했다.
한국전쟁의 휴전과 동시에 미국은 1953년 10월 한미군사방위조약의 체결과 한국군 20개 사단 창설의 지원에 동의하고, 미군 2개 사단을 한국에 주둔시키기로 결정함으로써 한국에 대한 방위공약을 분명히 했다. 한미동맹체제의 성립은 얄타체제에 의해 성립된 38선과 그 변형인 휴전선을 한국전쟁 이전처럼 정치적, 외교적 차원에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력을 동원하여 안정화시키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었다. 이 조약의 체결로 한국은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둥둥 떠 다니는 신장(腎臟)같은 신세에서 벗어나 비로소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군사적 보호 하에서 정치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하게 된고, 비무장지대의 점진적인 변화를 도모할 수 있는 국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미국은 한국전쟁 기간 중 소련을 배제하고 일본과 단독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동시에 미일군사동맹을 맺음으로써 유럽과 마찬가지로 아시아 지역도 미국과 소련의 영향권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한국전쟁의 결과 주변 강대국들과 남북한 모두 직접적인 군사력을 동원하여 비무장지대를 급진적인 방식을 동원하여 제거하겠다는 전략은 더 이상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휴전선과 비무장지대는 남북한 사이의 수많은 크고 작은 분쟁에도 불구하고 주변 강대국들의 현상유지적 정책이 반영되어 안정화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두 분단국가 사이의 적대적 상호작용은 더욱 심화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남북한 화해와 통일 뿐만 아니라 비무장지대의 개방이라든지 평화적 이용 등에 관해서는 지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비무장지대의 성립과 관할의 법적 근거가 되는 정전협정에 한국이 서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내세워 북한이 한국을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북미회담을 고집함으로써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위상 변화에 대한 한국의 역할을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휴전협상 과정에서 북한측은 유엔군측에게 한국 정부로부터 정전협정 준수에 대한 보장을 받았는지를 여러 번 물었다. 또한 유엔군사령관은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을 대표해서 정전협정에 서명했고 정전협정의 유지를 위해서는 한국의 협정 지지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한국이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북한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에도 북한은 정전협정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일련의 시도들을 했지만 비무장지대에 대한 현상유지적 정책을 추구한 한국과 주변 강대국들의 노력으로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한국전쟁 이후 비무장지대 존속의 국제정치
한국전쟁 이후 냉전이 종식되기 이전까지 시기의 한반도 냉전 질서는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된 미소 냉전 대결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한국전쟁과 같이 열전으로 비화되지 않고 안정적인 국면 하에서 일정한 조정기로 들어서게 된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승만과 김일성은 두 분단국가 사이의 체제 경쟁에 대비하여 내부의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취하게 된다. 한국전쟁 기간 중 1952년 5월 이승만은 자신의 대통령 당선을 보장받기 위해 임시수도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골간으로 하는 헌법개정을 단행하고 국민 직선에 의해 대통령에 재선된다. 한편 1953년 8월 김일성은 자신의 정치적 숙적이었던 국내공산주의를 대표하는 박헌영과 남로당계를 숙청함으로써 자신의 독재권력을 확고히 다지게 된다. 한국전쟁 휴전 이후 남북한 쌍방에 의해 계속된 전쟁 위협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는 군사력과 경제력 건설을 통한 체제경쟁의 시기로 돌입하게 된다. 또한 한국전쟁을 경험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비롯하여 자신의 영향권 하에 있는 국가들의 호전적 정책으로 인하여 제3차 세계대전에 불가피하게 이끌려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지극히 조심스러운 정책을 추진하게 됨으로써 한국전쟁 이전 38선을 중심으로 대규모 국경분쟁이 빈발했던 것과는 달리 비무장지대는 크고 작은 남북한 사이의 분쟁에도 불구하고 전면전을 막기 위한 완충지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동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대소 봉쇄정책을 추진해온 미국은 한국전쟁 직후 지속적으로 한국정부에게 한일관계 정상화를 촉구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재무장과 재부상을 우려한 이승만은 자신의 임기 중에 한일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또한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의 정당성의 기반을 일제 식민지 시기 반일독립운동에서 찾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요구에 따른 한일관계 정상화를 주도하기는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1961년 5월 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에 성공한 박정희는 1965년 한일외교관계를 정상화시키게 된다. 남한의 쿠데타 직후 북한은 중국과 소련과 동시에 군사동맹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반도 냉전 질서는 미국-일본-한국을 잇는 3국과 소련-중국-북한을 연결하는 북방 3국 사이의 공식적인 동맹관계가 양립하면서 한국전쟁 이후 진행되어온 안정화의 국면은 더욱 강화되었다. 왜냐하면 비록 한반도가 분단되었지만 두 분단국가가 각각의 동맹체제를 통하여 세계적 냉전 대결 구도로 완전히 편입됨으로써 미소가 또 다른 세계대전을 희망하지 않는 한 한반도에서 전쟁의 재발은 사실상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후 1965년부터 중국은 문화대혁명이라는 국내적인 혼란기와 대외적 고립의 시기를 거치게 된다. 이 시기에 중국은 스탈린 사후 등장한 후루시초프의 대미화해노선을 수정주의로 비난하고, 중소국경에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함으로써 1947년 즈다노프의 양진영 이론의 선언과 1949년 모택동의 대소일변도정책 선언 이후 단일의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던 사회주의권에는 본격적인 균열이 생겨나게 되었다. 중소분쟁에 직면하여 북한은 대내적으로 김일성 유일체제를 강화시키고, 대외적으로는 중소 등거리 외교정책노선을 채택하여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게 된다. 중소분쟁의 격화는 중소가 북한의 무력통일론을 함께 지원한 한국전쟁 직전의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전략적 관계가 북방 공산 3국 사이에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과 한반도 냉전 질서는 오히려 열전으로 비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줄어든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전쟁의 격화와 더불어 1967년과 1968년에는 북한의 국지적 도발이 한국전쟁 휴전 이후 최고조에 달하게 됨으로써 비무장지대의 존속이 가장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1954년부터 1992년까지 북한이 일으킨 총 3,693건의 도발의 약20%가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1968년 1월 21일 북한은 31명의 무장게릴라를 침투시켜 박정희의 암살을 기도했고, 곧 이틀 뒤인 1월 23일에는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Pueblo)호를 납치했다. 박정희에 대한 암살 기도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 여부에 따라서 비무장지대의 존속과 한반도의 평화는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베트남전쟁에 개입하고 있던 미국은 한반도에서 또 다른 전쟁이 발생함으로써 아시아 지역에서 두 개의 전선이 생겨나는 것을 막기 위해 박정희의 대북한 군사적 보복 정책에 반대했다. 또한 푸에블로호와 함께 남치된 미국 승무원들을 무사히 귀한 시키기 위해 미국은 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판문점에서 북한과의 비밀협상을 통해서 1968년 12월 23일 승무원 82명과 1명의 시신을 북한으로부터 인도받고 이 사건을 마무리지음으로써 비무장지대는 열전의 현장으로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미국 내에서 존슨 행정부의 베트남 정책에 대한 불신과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전 여론이 본격적으로 표면화되면서 존슨은 베트남과의 평화회담을 제의하게 되고, 미국은 베트남에서의 명예로운 철수라는 정책적 목표를 추구하게 된다. 베트남전쟁의 종결을 대통령 선거의 공약으로 내세운 공화당의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미국은 닉슨독트린을 발표하여 아시아 지역에서의 주둔 미국의 병력 감축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당시까지 미국의 아시아 전략은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중국위협론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중국과의 관계정상화를 통하여 중국의 대소일변도 노선을 변경시켜 미국과 중국이 연대하여 세계적 차원의 냉전 대결에서 소련의 패권질서에 대항해 나간다는 키신저의 삼각외교(triangular diplomacy)노선을 미국은 채택하게 된다. 이 삼각외교 노선은 소련에게도 엄청난 압력을 가하게 됨으로써 소련 역시 미국의 데탕트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으로 인하여 국력과 위신에 심대한 타격을 받았고, 미국의 동맹체제 내에서 꾸준한 경제발전을 이룩한 서독과 일본은 경제력의 면에서 세계적 세력균형의 또 다른 중심축으로 떠올랐다. 서독과 일본의 경제적 부흥과 키신저의 삼각외교가 맞물리면서 이 시기의 국제정치질서는 이른바 다극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중국위협론의 변경과 동시에 미국은 닉슨독트린을 통하여 한국전쟁 이후 아시아 지역에서 성립된 일본과 한국과의 동맹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병력 감축을 단행함으로써 한반도 냉전 질서는 일정한 조정기를 거치게 된다. 닉슨독트린과 미중 관계정상화는 남북한으로 하여금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증가시켰다. 그 결과 남북한은 적십자회담과 7.4공동성명의 채택을 통하여 남북 관계를 유화적 국면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이 과정에서 비무장지대 내의 판문점을 통한 남북한 사이의 인적 교류는 일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1969년 7월 닉슨독트린이 발표되었을 때 한국정부는 주한미군의 일부 철수 가능성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1970년 3월 미국은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인 미제7사단을 한국으로부터 철수한다는 국가안보정책결정서(NSDM 48)채택한 후 한국정부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1971년 철수를 단행하게 된다. 동시에 미국은 한국에 남아 있던 미제2사단을 휴전선에서 후방지역으로 배치하여 북한의 남침시 미군이 자동적으로 전쟁에 개입되는 것을 방지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1개 사단의 주둔과 함께 한미동맹조약을 유지하고, 향후 5년간 1억 5천만불의 군사원조를 제공하기로 한국에게 약속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미국은 주한미군의 일부 철수에도 불구하고 대북한 억지력은 유지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미국은 당시 베트남에 파병된 2개 사단의 규모인 약5만의 국군 병력을 한국으로 원상복귀시킬 경우 철수하는 주한미군 1개 사단이 남긴 군사력의 공백을 메울 수 있다고 보았다.
1971년 2월 한국 정부는 베트남 주군 국군의 철수를 단행함으로써 주한미국 철수의 군사적 공백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걸고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의 개발이라는 전형적인 부국강병책을 추진하게 된다. 동시에 박정희는 내부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해 3선개헌에 뒤이어 자신의 장기집권을 영구화하는 유신헌법을 채택하게 된다. 나아가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서 남북한의 평화적 공존을 모색하기 위해 북한과 7.4공동성명을 채택하게 된다. 이 시기 북한도 남한의 유신체제의 도입과 거의 동시에 김일성을 주석에 추대하는 헌법 개정을 통하여 김일정 유일체제를 더욱 확고히 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일어난 한반도 주변 국제정세의 변화와 남북한 사이의 일시적인 관계 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냉전 질서는 얄타회담과 한국전쟁 이후에 나타난 근본적인 변화와는 달리 주한 미국의 일부 철수와 후방 배치와 더불어 기존의 한미동맹체제 내에서 일정한 조정의 국면을 맞이했을 뿐이었다.
이처럼 한반도의 대내외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던 냉전 질서의 조정 국면이 북한의 계속된 도발과 박정희의 부국강병노선에 의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은 키신저를 통하여 교차승인안을 제시하게 된다. 이 안은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외교적으로 승인하고, 소련과 중국이 한국을 각각 승인함으로써 한반도 냉전 질서를 주변 4대 강대국의 합의 하에 안정화시킨다는 전략적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적 구상은 한반도의 분단을 영구화시킬 것이라는 남북한 내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을 뿐만 아니라 주변 강대국들도 이 안에 적극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실현되지 못했다. 또한 한국은 북한의 “하나의 조선정책”에 대항하여 두 분단국가의 존재를 국제적으로 승인받고 남북한 간의 평화공존을 유지하기 위해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안을 통하여 한반도 냉전 질서의 안정화를 모색했지만, 북한과 공산측의 반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비록 교차승인안과 유엔동시가입안이 이 시기에 실현되지는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냉전 질서는 조정 국면을 거치면서도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월남 공산화 이후 북한의 호전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질서 하에서 비무장지대는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닉슨 행정부 이후 등장한 미국의 카터행정부는 주한미군을 완전히 철수시키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철수가 가져올 대북한 억지력의 손상을 우려한 행정부 내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그 공약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또한 1979년 소련의 아프카니스탄의 침공과 함께 철군계획은 취소되고 말았고, 닉슨행정부 이후 조정을 거쳐온 한반도 냉전 질서에는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 이후 미국은 레이건의 등장 함께 군사적 우위에 기초한 대소압박전략을 구사하게 되고, 경제적 침체를 거듭하던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개방과 개혁 노선을 채택하게 됨으로써 세계적 차원에서의 냉전은 그 대단원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소련의 붕괴에 의한 미소 냉전 대결의 종식과 함께 한반도 냉전 질서에 대한 변화의 기대는 비무장지대의 개방과 평화적 활용에 대한 요구로 표출된다.

냉전의 종식과 비무장지대
한반도의 냉전 질서와 비무장지대의 위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세계적 차원의 냉전 종식은 유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케난은 대소봉쇄정책을 제시하면서 소련 체제는 이성의 논리를 따르지는 않지만 힘의 논리에는 대단히 민감하다고 보았다. 베트남전쟁의 패배, 이란대사관 미국인질 사건,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 등으로 인하여 실추된 미국의 국력과 위신을 만회하기 위해 레이건은 대규모의 군사비와 군사력 증강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레이건의 정책 중 미소 냉전 대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전략방위계획(SDI)이었다. 이 계획은 소련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미국 본토에 도착하기 전 우주 공간에서 파괴시키는 군사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기술개발이 성공할 경우 기존에 유지되어온 미소 사이의 핵억지체제는 무너지고 미국은 소련과의 군사력 경쟁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레이건의 군비증강 정책은 미소 사이의 군비경쟁을 가속화시킬 것이라는 일부의 우려와는 달리 케난의 예측대로 소련을 군축 협상으로 끌어내는 효과를 가져왔다. 1985년 3월 실권을 장악한 고르바초프는 1986년 10월 레이카비크에서 열린 제2차 정상회담에서 미소가 5년 내에 전략핵무기를 절반으로 감축하고, 10년 내에 모든 탄도탄 미사일을 파기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정상회담은 미소 냉전 대결의 마지막 분기점 중의 하나였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경제의 침체로 인하여 더 이상 미국과의 군비경쟁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내적 개혁에 유리한 대외적 환경을 만들어내기 위해 레이건에게 전례가 없는 극적인 군축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 군부는 정상회담에 나선 고르바초프에게 전략 핵무기를 감축하는 대신에 미국의 전략방위계획에 대해서 실험실 연구는 허용하되 실전 배치는 하지 않겠다는 확약을 받아오도록 요구했다. 실제로 고르바초프는 다른 의제들이 거의 합의에 이른 회담의 마지막 시점에서 전략방위계획에 대한 소련 군부의 요구 사항을 레이건에게 제시했다. 이미 레이건은 회담 개최 이전부터 이 계획은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못박아 두었었기 때문에 고르바초프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그 결과 제2차 정상회담은 이 회담 중 이미 합의한 사항조차 파기되기에 이르렀고,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의도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전략무기 감축을 통해 미소 군비경쟁을 완하시켜 대내적 개혁을 위한 유리한 대외적 환경을 조성하고, 대내적 경제 재건을 위한 재원을 확보하려던 고르바초프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1987년 12월 제3차 정상회담에서 중거리핵전력(INF) 감축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그것은 제2차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가 기대했던 극적인 효과를 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미 고르바초프 등장 이전에 소련 권력층 내부는 일종의 자중지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3년 스탈린이 갑자기 사망했을 때 권력 승계 투쟁이 진행되면서 소련 지도부는 한국전쟁을 중단하고 휴전협정을 체결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달리 브레즈네프 이후를 향한 크레믈린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소련 지도부는 아프카니스탄 침공을 결정했는데, 이 과정에서 브레즈네프는 전혀 정책결정 과정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소련은 이미 경제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체제 자체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가속화되었을 때 1991년 8월 소련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고르바초프의 몰락과 동시에 소련 자체의 몰락을 가속화시켰고, 그해 12월 고르바초프는 사임하게 된다.
또한 고르바초프는 소련 제국에 포함된 동구권의 국가들이 소련의 경제에 엄청난 부담을 준다고 판단하고, 이들의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허용하는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1990년 발틱 3국의 독립은 소련 제국 해체의 신호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 연방 자체의 해체로 직접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냉전 종식 과정은 케난이 이미 “다섯 개 중심 국가론”에 기초하여 대소봉쇄전략을 제시했을 때 이미 예견된 바였다. 미국이 일본, 서독, 영국, 서부 유럽을 포함한 국가들을 미국의 동맹권 내로 흡수하고 경제력의 발전이라는 체제 경쟁에 돌입한다면, 경제적으로 탄력성을 상실한 소련과 그 제국은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내부로부터 붕괴할 것이라고 케난은 주장했던 것이다. 물론 냉전 기간 중 키신저의 삼각외교와 데탕트정책이 궁극적으로 냉전의 평화적 종식에 기여했지만, 이러한 전략들은 케난의 봉쇄전략을 그 기조로 하면서 약간의 변화를 가미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소련의 변화와 더불어 한반도 냉전 질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중국은 키신저의 삼각외교에 의한 대중국 포용정책에 상응하여 1978년 집권한 등소평의 지도 하에 4대 근대화 노선을 표방하고 실용주의적 노선을 채택하게 된다. 중국은 근대화 노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반도를 포함한 주변 국제정치 환경의 안정이 필요했다. 따라서 한국전쟁 직전의 상황과는 달리 중국은 한반도 냉전 질서의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현상태를 유지하는 정책적 노선을 추구하게 된다. 그 결과 비무장지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1985년부터 1991년 사이에 비무장지대 내에서 북한에 의한 무장공격과 무장침투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고, 남북 쌍방에 의한 교전도 급격하게 줄어들게 된다.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등소평의 실용주의적 노선의 채택 이후 집권한 노태우 정부는 한반도 냉전 질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북한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기 위해 미국이 제시했던 교차승인안을 중심으로 하는 북방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이 정책의 목적은 과거 북한의 동맹국이었던 소련과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고, 이들이 북한의 모험주의적 노선을 지지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한반도 냉전 질서의 안정화를 추구하는 데 있었다. 한국은 1990년 9월 소련과 국교를 정상화시켰고, 1992년 8월에는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하게 된다. 그러나 교차승인안의 또 다른 한 축인 북한과 미일 사이의 외교관계 정상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한국의 외교적 성과는 북한에게 상당한 압력으로 작용했다.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과 더불어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정책을 추진하여 한반도 냉전 질서의 안정화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당시까지 북한은 소련을 포함한 유럽 사회주의체제의 붕괴와 중국의 개방 노선에 의해 국제적으로 고립상태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인 “하나의 조선” 정책을 여전히 고집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북한의 노선은 사회주의권의 변화와 북방정책의 성과로 인하여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또한 북한이 유엔동시가입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한국만이 유엔에 회원국으로 가입하게 되고, 북한은 옵서버로 남겨되는 외교적 수모를 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북한의 유엔동시가입은 북한의 지배이념이 특정 정책의 지표가 될 수 없고 이미 결정된 행동과 정책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핵 및 인권 문제 등으로 인하여 유엔 회원국으로서 안게 될 많은 부담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유엔에 가입한 것은 주권을 대외적으로 인정받음으로써 국가의 생존을 보장받으려는 적극적인 노력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은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고 판단하고 대외적으로 주권을 인정받아 생존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유엔동시가입에 동의했다. 물론 무정부적 국제정치현실에서 주권을 대외적으로 인정받는다고 해서 그 국가의 생존이 완전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취약한 국가들일 경우 대외적으로 주권을 인정받은 나라의 사망률이 훨씬 낮다는 것이 기존 경험적 연구의 결과이다.
북한의 유엔동시가입은 생존우위전략에서 비롯되었지만, 한국의 또 다른 목적은 유엔동시가입을 통해 한반도에 존재하는 두 분단국가의 존재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음으로써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차단하고 평화공존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남북한의 유엔동시 가입으로 남북한 불가침선언을 둘러싼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었고, 1991년말 남북한은 남북불가침 약속을 포함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남한과의 합의를 통해서 북한은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러한 상황의 전개는 세계적 차원에서의 냉전 종식 이후 한반도 내부의 냉전 질서의 안정화에 기여하게 된다.
그러나 1989년부터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지 시작한 북한의 핵무기 개발 계획은 탈냉전기 한반도 냉전 질서의 안정화를 저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했다. 1991년말 남북한은 한반도 비핵화선언에 합의했지만, 북한의 핵 개발은 이러한 대내적 합의 사항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또한 북한은 경제난과 식량난이 가속화되면서 군사력을 지탱할 수 있는 경제력의 약화를 보완하기 위해 핵무기 개발에 나섰던 것이다. 한반도 핵 위기는 북한의 핵 개발로 인한 한반도 내에서의 군사적 하부구조의 극적인 변화를 막고, 일본의 핵무장화를 우려한 미국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인하여 1994년 10월 제네바에서 미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함으로써 한반도 핵위기는 일단 그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이 합의서의 핵심은 당시까지의 북한 핵무기 개발 계획을 동결하는 대신에 미국은 북한에게 2개의 경수로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미국은 북한에 대해서 핵무기 위협과 사용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함으로써 대북한 핵억지의 포기를 약속했고, 북미 외교정상화를 위해 협상을 진행하기로 했다.
한반도의 핵 위기를 처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추진해오던 남북정상회담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노태우 정부 당시 남북정상회담은 거의 성사 단계에까지 이르렀지만, 미국의 강력한 반대와 개성이라는 회담 장소 문제로 인하여 실현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 1994년 6월 핵 위기의 와중에서 김일성이 북한을 방문한 카터를 통해 전달된 남한측의 남북정상회담을 정식으로 수용함으로써 최초의 정상회담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해 7월 김일성의 갑자스러운 사망으로 인하여 정상회담의 개최는 불투명해 보였지만, 1997년 8월 김정일은 기존의 국방위원장 자리 뿐만 아니라 정식으로 조선노동당 총비서에 취임하여 내부체제를 정비한 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 동의하게 된다.
남북정상회담의 개최는 김대중 정부가 추진해온 대북한 햇볕정책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다. 정상회담 결정과 관련하여 식량난과 경제위기에 직면한 북한은 실질적인 경제 지원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은 남한이라는 현실 인식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집권 이후 김대중 정부는 민간교류와 경제협력을 확대하고, 금강산관광을 통하여 북한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게 된다. 특히 2000년 3월 김대중정부는 베를린선언을 통하여 북한의 경제난 해소를 위해 북한의 도로, 항만, 철도, 전력, 통신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비롯하여 북한의 식량난 문제 해소를 위해 비료를 비롯한 농업개혁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천명했다. 이러한 대규모의 대북한 경제지원은 그때까지 진행되어온 민간 지원과 경협의 형태로는 어렵기 때문에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이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의했다. 그 결과 그해 4월 남북정상회담의 개최가 발표되었고, 드디어 2000년 6월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게 개최되었다.
김대중정부는 대북포용정책과 함께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를 정책적 목표로 내세웠다. 한국이 구조를 해체하는 정책을 취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현재의 구조로부터 국가이익의 추구에 제약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과 북한 중 현재의 구조로부터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국가가 현상타파정책을 추구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국가는 현상유지정책을 고수하려고 할 것이다. 탈냉전 이후 한반도의 상황은 북한이 한국보다 한반도 냉전 구조 하에서 훨씬 더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남북한 사이에 벌어진 국력과 경제력의 차이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또한 북한의 핵 개발 시도는 현재의 구조 하에서 북한이 전략적으로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급격한 군사력의 균형을 파괴시켜 현상태를 타파하려는 정책으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비무장지대의 개방과 점진적인 변화의 가능성은 현상타파정책을 추구하는 북한의 정책과 김대중정부의 냉전 구조 해체 전략이 맞물리면서 열리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 직후 8월에 열린 제2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남북한은 군사 분야의 화해협력 없이는 다른 분야의 협력도 매우 어렵다고 판단하고 2000년 9월 남북한은 남북국방장관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2000년 9월말 제주도에서 열린 한국의 조성태 국방장관과 북한의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공동 명의의 공동보도문을 채택하고, 남북 연결 철도, 도로 공사와 관련하여 비무장지대 내에서 남북한의 인원, 차량, 기자재의 왕래를 허가하고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군사 실무자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공동보도문은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개방에 관한 남북한 관할지역 설정 및 관리와 관련된 사항들은 정전협정에 기초하여 처리하기로 합의함으로써 군사 실무자 회담의 법적, 제도적 근거를 제시했다. 그 이후 남북한은 남북국방장관 합의에 기초하여 2000년 11월부터 2003년 1월말 사이에 총 16차례의 남북군사실무회담을 개최했다. 그 결과 남북한은 유엔사의 협조 하에 정전협정의 틀 내에서 일련의 군사보장합의서를 체결하고 남북 경의선과 동해선의 철도 및 도로 연결을 위한 공사를 완료한 후 2003년 1월 27일 비무장지대를 관통하는 임시도로 통행과 관련된 군사보장합의서를 체결함으로써 그 탄생 50년만에 비무장지대의 일부가 비로소 개방되었다.
비무장지대가 탄생한 이후 최초로 남북한 사이의 육로통과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고 지뢰가 제거됨으로써 비무장지대는 남북 화해협력을 위한 장으로서의 구체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비무장지대의 개방과 관련된 제도적 장치는 여전히 정전협정의 틀 내에서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비무장지대에 대한 급격한 변화의 시도가 아니라 현실적 한계를 인정한 위에서 추진된 점진적인 변화의 시도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군사보장합의서의 체결과정에서 한국은 유엔사와 긴밀하게 협조함으로써 비무장지대가 갖고 있는 국제정치적 성격을 여전히 인정하면서 점진적인 변화를 모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냉전의 종식과 더불은 비무장지대의 위상에도 점진적인 변화가 야기됨으로써 향후 비무장지대를 통한 남북한 사이의 교류협력의 증대와 함께 한반도 냉전 질서에도 일정한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결론
38선의 탄생과 비무장지대의 등장과 존속에 관한 이상의 분석은 한반도가 조공체제의 파괴와 더불어 서구적 근대국제정치질서 하에 편입된 이후 등장하게 된 주변 강대국들의 세력균형체제의 독자적인 한 축을 형성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한반도는 주변 강대국들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의해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냉전 질서는 구한말 이후 탈냉전기까지 지속되고 있는 세력균형체제의 독특한 한 형태에 불과하다. 장기화된 미소 사이의 냉전 대결 과정에서 미국은 대중국 포용정책인 삼각외교와 대소 긴장완화 정책을 통하여 세계적 전략 구도의 변화를 시도했지만, 그러한 변화에 적응해 나가기 위한 남북한의 정책적 선택의 폭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이상의 분석은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 의한 도발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처럼 비무장지대의 위상을 급진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더 이상 추구되기 어렵게 되었고, 이러한 인식이 남북한으로 하여금 점진적인 변화를 모색하도록 하는 현실적 기반을 형성했다. 이러한 기반 하에서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한 사이에 체결된 일련의 군사보장에 관한 합의들을 통하여 비무장지대가 개방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진전에도 불구하고 비무장지대의 위상은 한반도의 통일이 달성될 때까지 남북한 사이의 역관계 뿐만 아니라 국제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탈냉전 이후 세계적 냉전의 유산의 하나로 남아 있는 비무장지대의 존속은 국제정치현실의 불가항력적 측면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통일 이후에도 커다란 변화가 없을 것이다. 통일한국의 등장은 한반도가 갖고 있는 지정학적 중요성이 두 분단국가가 존재하던 상태보다 훨씬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한반도에 대한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의 대립도 더욱 첨예화될 것이다. 이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세력균형체제가 통일 이후에도 한반도에 대해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게 될 경우 단순히 비무장지대가 아니라 통일 한국 전체가 동아시아지역에서 주변 강대국들 사이의 세력균형 질서 하에서 일종의 완충지대의 역할을 떠맡게 될지도 모른다. 국제정치를 주도해오던 지역이었던 유럽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의 전개와 함께 냉전 질서의 완충지역으로 전락했다. 유럽보다 국력이 훨씬 더 취약한 통일 한국은 언제든지 국제정치적 압력에 의해 또 다른 완충지역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 경험과 국제정치적 현실을 무시하고 한반도 냉전 질서를 급격하게 변화시키려는 남북한 자체의 시도는 언제든지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역이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소련의 군사적 지원 하에 38선을 폐기처분하고 한반도 냉전 질서를 타파하려고 시도했던 김일성의 무력통일론은 아시아 지역에서 스탈린의 전략적 의도를 관철시키려는 데 역이용당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세계적 차원의 냉전 대결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50년여년에 걸쳐 존속해 오고 있는 비무장지대의 위상를 변화시키는 것이 어려운 가장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이러한 한국전쟁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으로 인하여 한반도 냉전 질서를 무력으로 해체하고 비무장지대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남북한 뿐만 아니라 주변 강대국에게도 정책적으로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었다. 최근 비무장지대의 개방을 계기로 하여 남북한은 전쟁의 결과 탄생한 비무장지대를 평화의 지대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대내적 역량을 보여줌으로써 한반도 통일에 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획득해 나가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탈냉전 이후 국제정치 질서는 걸프전쟁과 이라크전쟁을 거치면서 급속하게 미국의 패권적 질서로 재편되고 있다. 향후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확보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한국이 미국과의 긴밀한 공조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무장지대의 안정화와 관련하여 한미공조의 구체적인 내용은 정전협정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제도적 틀이 마련되지 않는 한 정전협정의 틀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조 하에서 한반도의 냉전 질서와 비무장지대를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세계적 차원의 냉전 질서의 해체는 소련이라는 국가의 붕괴를 통해서 가능했던 것처럼 한반도 상의 냉전 질서도 북한의 변화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 북한의 핵무기 개발 시도에서 보는 것처럼 그 변화 과정에는 여러 가지 난관들이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한미동맹체제 하에서 분단을 평화적으로 관리하면서 북한의 점진적인 변화를 유도하여 평화적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현실적 조건들을 창출하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