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의 평화주의

강화의 평화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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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본성을 꿰뚫어 본다는 것은 역사와 사회구조를 아우르는 예지와 통찰을 요구한다. 한사람의 개성을 파악하기도 힘든데 훨씬 더 큰 집단인 지역성을 파악하기가 힘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어설픈 인상으로 대상을 규정짓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두려워 하며 글을 쓴다.

강화도 고인돌 축제

지난 7월 21일에는 강화군청에서 강화 고인돌 축제 준비보고회가 있었다. 이 행사는 강화군이 학생들의 선사시대 체험 교육과 관광수입을 올리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군수님을 비롯 교육청, 시민단체, 요식업회, 숙박업회, 경찰, 군부대까지 강화의 모든 인사가 참여하고 있었다. 작년부터 이 행사에 강한 관심을 갖고 있던 강화 도장리의 인천카톨릭대 최기산 신부는 이 행사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강화는 경주보다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경주가 한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지라면 강화는 전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지 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화에 오는 사람들이 단군과 조상들의 역사에 대해서 관광객으로서 둘러보고 그냥가는 것이 아니라 고인돌 위에 꽃 한송이라도 올려놓고 머리 숙이므로 해서 그 의미를 되새겨 보자는 데 의미가 있다.” 강화 역사살리기 여론을 주도하는 분의 말씀답다.
강화군청 문화체육계장인 문경신씨에게 강화의 지역정신을 한마디로 단군주의라고 표현해도 되느냐고 물었을때 ‘큰무리가 없을 것 같다’고 답했다. 이번 행사를 기획한 서울광고기획이 제작한 강화 고인돌 축제 포스터에는 그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단군의 뿌리를 찾아서 - 시조 단군이 하강 하신 후 참성단을 축조하시고 천제를 올리신 땅, 그의 할아버지 또 그의 할아버지 였을지 모를 청동기인들의 숨결이 간직된 바로 그곳, 강화에서 6일간의 멋진 축제가 벌어집니다.]
여기에는 두가지 문제점이 발견된다. 첫 번째는 단군주의의 문제이다. 강화사람 대부분이, 또는 강화 이외 지역의 사람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강화에서 단군의 신화가 시작되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된 것이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나 이는 사실자료가 희박하다. 과연 강화의 정신을 단군주의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 두 번째는 단군조선과 청동기시대를 분리해서 보는 역사관의 오류이다. 이는 고고학연대와 역사연대를 통일해서 볼줄 모르는 시각에서 연유한다. 청동기 시대는 곧 단군 조선시대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조차 고조선 시대를 선사시대로 분류해 놓고 있다. 문명국 고조선이 아니라 미개 원시인 시대의 이미지로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고인돌 축제는 강화의 지역정신을 표현하는 문화제란 점에서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역정신은 최종적으로 문화를 통해서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는 단순한 기획이 아니라 지역의 역사와 구조를 꿰뚫는 예지와 통찰의 결과이다. 그동안 강화의 지역정신과 문화에 대한 풍부한 연구가 결코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를 종합할 민관의 조직체계가 미비하고 뭣보다 지역의 전략과 전술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이번 고인돌 축제도 지역내부의 의견이 있었음에도 서울에 있는 기획사의 기획으로 치뤄지는 것은 아직 지역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성장시키기 위한 전략부재의 문제를 과제로 남기고 있다.

강화 사람들
지역문화는 결국 사람관계의 공간적 틀속에서 이뤄진다. 지역사람간의 관계는 지역정신이 문화로 꽃피우게 되기까지 최종 변수중의 하나가 된다. 결국 지역의 전략전술도 사람관계를 어떻게 새로이 조직할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도 강화도의 단군주의는 저항에 부딪친다. 인천카톨릭대학은 이제 생긴지 얼마 안된 대학이지만 강화도의 대학으로 뿌리박기 위해 많은 연구학술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연구성과와 관계없이 지역에서 세력으로 자리를 잡아나가는 과정은 여러 마찰과 갈등을 빚을 수 있다. 인천카톨릭대의 강화연구사업에 대해 성공회측의 모인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카톨릭에서 과연 강화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언급할 자격이 있는 것인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대찬성이지만 역사적으로 봐서 성공회의 양해와 협력을 구하는게 순서 아닌가” 강화 성공회성당을 보면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주1)

그러나 천주교 또한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쌓아온 역사가 있어 지역적 토대가 없는 것이 아니다.주2) 또 강화학술행사에 강화군청의 문화담당 공무원이 발제 한것에 대해 강화문화원측에서는 “공무원이 나갈자리로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에 문화전문가들이 다 있는데 과연 공신력 있는 발제가 될 수 있겠느냐”라고 말한다. 단군주의를 얘기하는 것에 대해서도 강화도 개신교에서는 극력반대하는 입장이다. 단군을 종교적 우상숭배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어떤 지역, 어떤 상황이건 일을 계획할 때부터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예를들어 전국적 차원의 조직끼리 갈등이 있다 하더라도 지역에서는 서로 협조할 수 있는 관계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법정스님과 김수환 전추기경의 경우처럼 말이다. 오히려 지역내에 지역발전과 관련된 이해관계를 뚜렷이 하는 집단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지역이 활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역은 계급적 범주와는 달라 계속 얼굴보고 살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역공동체의 발전이란 공익을 쉽게 저버릴 수 없게 되어 있다. 오히려 지역에 대해 무관심한 것보다는 훨씬 가능성 있는 상황인 것이다. 지역조직 운영의 묘를 얼마나 살리느냐하는 것이 관건이다. 특히 역사적 ‘정통성’을 주장하는 집단들이 서로 갈등한다 하더라도 지역권력은 ‘정당성’의 차원에서 이들을 아우를수 있다.주3) 이때 중요한 것이 절차의 정당성이다. 참여가 공평하게 보장되고 의견이 개진될 수 있으며 합의된 결과에 승복하는 지역 운영체계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이번 강화 고인돌 축제의 경우는 지역의 전부문의 인사들이 고루 참여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형식적이다. 이에 대해 강화시민단체 여론주도층의 한사람인 남궁호삼씨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예를들어 고인돌 축제든 작년에 했던 강동문화축제든 마찬가지다. 각분야의 유지들이 참여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내년에 가서 고인돌 축제가 더 성공적으로 될려면 행사 끝나고 평가회를 보거나 듣는것은 의미가 없다. 이 행사와 관련된 각부문의 지역인사들이 직접 참여해서 경험하고 그들이 직접평가 해야 한다. 그래야 내년 행사도 더 발전될 수 있다.” 만일 행사과정에서 전원참석, 전원발언, 전원실천 원칙이 적용된다면 각자 정통성을 주장하는 각 단체들의 입장도 충분히 통일될 수 있다.주4) 왜냐하면 정당성은 정통성보다 더 포괄적 합의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지역운영의 묘는 단순히 운영기법의 문제가 아니다. 만일 이를 지속시켜 나갈 더 큰 개념. 즉 전략 전술이 없다면 절차의 정당성은 특정집단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는 교묘한 구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5)
올바른 지역전략, 전술은 갈등을 활력으로 만들것이며 잘못된 전략전술은 갈등을 분열로 치닫게 할것이다.

강화의 지역전략, 전술
인천의제 21 시민대토론회때 문화분과의 의제를 발표한 안태환 정책실장은 “우리나라 역사의 긴흐름의 맥을 느낄 수 있는 강화도의 문화관광적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전문적인 연구와, 기획 추진력이 부족합니다. 앞으로 2000년까지 강화지역을 경주와 마찬가지로 역사보존지구로 지정하고 이에 따른 강화문화 관광계획을 수립해야 합니다.” 그는 역사와 문화 환경을 강화의 전략개념으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관련 얼마전까지 논의되다가 IMF와 함께 유보된 화북프로젝트는 강화도 갯벌을 몇 만평씩 매설하고 혈구산등 강화의 중심에 있는 산등을 개발해서 골프장등 대규모 관광단지를 조성하는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로서 환경단체와 지역단체들의 거센 반발에 부딫쳤다. 세계 5대 갯벌중 하나인 강화갯벌은 세계적 환경의 보고로서 개발에 의한 이익과 바꿀수 없다는 생각이 깊이 확산되었으며 또한 시민단체의 조사에 의해 골프장 건설시 이익보다 오히려 손해가 발생함을 증명하면서 화북프로젝트는 어려운 처지에 몰렸다가 IMF까지 겹쳐 거의 무산위기에 있다.
전략,전술은 절차의 정당성도 중요하나 정확하고 뚜렷한 전망이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지역전략수립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3가지 주제가 있다. 세계, 통일, 지역이다. 강화 또한 예외일 수 없다. 강화군은 인천광역시의 전략과 연동되어 있다. 최기선 시장이 추진하던 대 중국전략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또한 인천발전연구소에서 선거전부터 내놓은 영종도, 송도신도시, 연안부두를 잇는 ‘트라이포트’도 살아있다. 그러나 인하대 김민배교수의 지적처럼 ‘인천은 항구와 바다라는 조건과 서울의 위성도시라는 특성 때문에 동서축의 도시발전은 빠르게 진행되었으나 남북간의 도시 발전축은 매우 미약하다. 인천국제공항의 개항, 강화와 옹진의 편입, 통일을 대비할 때 다양한 교통망과 함께 도시거점을 새롭게 수립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영종도는 대통력직 인수위 시절에 자유무역지대로 설정되었다. 자유무역지대로 된다는 것은 아직 그 상이 나오고 있진 않지만 홍콩과 같이 일국양제체제로 됨을 기본적으로 전제한다고 생각한다. 그 목표는 중국과 나아가서는 정세의 발전에 따라 북한을 목표로 동북아의 거점을 만드는 것이다. 전략은 10년이상의 지속적 개념이다. 지역전략은 인접지역과 중심지역의 10년내의 목표를 통합하는 개념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동북아의 공통된 지역전략 개념은 무엇일까? 남북은 통일을 궁극적 목표로 하지만 중국은 남북의 통일을 원치 않는다. 그렇다고 전쟁을 원하지도 않는다. 통일이 되면 경계대상이 되며, 전쟁이 나면 참여여부를 놓고 여러 나라와 긴장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안정적 경제발전에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은 원치 않는 것이다. 결국 중국이 원하는 것은 이 지역의 평화이다. 남과 북도 당장의 급한 통일을 원치 않는다. 당분간 서로에게 필요한 것은 남북기본 합의서 수준으로 이를 심화시키고 적응하는 기간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 지역의 공통의 이해관계는 평화라는 주제로 집약된다.
평화를 핵심개념으로 하여 전략을 수립할 때 이것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전제가 필요하다. 3국이 평화를 합의할순 있지만 이것을 적극적으로 추동할수 있는 힘이 저절로 당장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네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평화의 이념이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는 견고한 지역이 있어야 한다. 이점에서 강화도가 중요하다. 현재 인천의 ‘트라이포트’ 계획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기능적 도시의 계획으로서는 유효할지 모르나 평화주의로 동북아를 아우를 수 있는 도시계획으로서는 부족하다. 세계적 도시의 면모를 갖출 수 있을진 몰라도 사람들이 와서 보고가는 것은 자기들 나라에서 항상 보아오던 것과 다름없거나 IMF의 생존 경쟁으로 치닫는 비정한 도시의 모습일 것이다. 이런 곳에 과연 북한과 중국이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겠는가? 또 중국이나 북한이 걸어 나오지 않는데 일본이나 미국이 이곳에 관심을 갖겠는가? 따라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 제 나라를 끌어 낼수있기 위해서는 수단으로서의 평화가 아니라 목적으로서의 평화를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지역이 이념의 중심을 잡아줘야 한다.
둘째는, 21세기를 향한 미래지향적 개념이 꽃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21세기의 가장 큰 화두는 IMF의 극복과 그 이후의 건설 대안이다. 그것이 외자유치를 통해서 될지 세계적 반(反)IMF연대를 통해서 될지는 쟁점이지만 외자유치정책이 국제투기자본의 투기대상으로 전락해선 안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새로운 가치, 즉 자본을 위주로 하는 것이 아닌 지역주민과 세계의 비정부민간기구들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가치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환경이나 문화의 가치를 강조할 수 있는 강화지역의 의미는 중요하다.
셋째는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과 관련된 전제가 필요하다. 왜내하면 어떤 말잔치보다도 현실적으로 팽팽한 긴장으로 존재하는 비무장지대를 옆에 끼고 평화를 얘기할 순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인천의 도시구조를 기형화 시키는 중심요인이기도 하다. 이 문제가 물론 강화나 인천만의 노력으로 풀릴 수 없음은 당연하다. 실제로 한강 이남 성산대교부터 강화를 지나 서부전선까지 쳐있는 철조망을 두고 평화를 논할 수 없다.

따라서 인천의 신도시계획은 동으로는 한강까지 서로는 강화와 서부전선까지의 광역개념을 가질 때 만이 전략수립이 가능하다.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이 과연 정치적으로 가능할 수 있는가?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천은 충분히 이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상호불가침과 평화군축을 중심으로한 민족화해 문서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남북기본합의서 발효이전이라도 이후를 준비할 정부기구가 있다. [비무장지대와 접경지역 특별대책위원회]가 바로 그것이다. 6월선거 직전에 발족되었다. 추미애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이 기구는 비록 선거용으로 만들어 졌다는 오해를 떨치기 어렵지만 적극 활용할 기구이다. 따라서 비무장지대에 대한 지역의 전통적 정신과 행정자치의 문제, 환경생태계 보존의 문제, 비무장지대 안의 문화재 보존 및 관리의 문제, 지뢰피해자 조사와 지뢰제거의 문제등 현실적인 광범위한 문제가 연구되고 기획되어야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사업이 착착 추진될 가능성을 낙관할 수는 없다.
따라서 네번째의 전제는 위에서 전제한 3가지의 조건을 일상적인 문화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연습시키고 준비시킬 문화제가 필요하다. 강화의 고인돌 축제는 그런 의미에서 내용만 바로 선다면 의미심장한 출발일 수 있다. 또한 인천의 국제영상미술제와 서울의 8월15일 광복절을 전후한 통일축제들과 연결될 수 있는 문화띠를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가장 적절한 문화제는 10월 남북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민족문화 대동제 같은 형식이 될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핵이 강화도가 되어야 한다는게 의견이다.
이러한 4가지 전제조건은 강화-영종도-인천을 핵으로해서 한강과 서부전선의 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하기 위한 전략의 전술적 과제로도 된다.
이런 광역적 전략속에서 강화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이런 전략적 이념을 생산하는 핵중의 중핵개념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강화는 평화지대 전략의 심장으로서 역사적 뿌리를 정말 갖고 있는걸까?

강화의 평화주의
우선 강화의 지역정신을 단군주의라고 하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강화가 단군주의의 시원으로 여겨지는데는 마리산의 참성단과 단군의 세 아들이 지었다는 정족산의 삼랑성이 가장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들 유물이 단군시대에 축조된 것인지는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현재로서는 없다. 오히려 역사적 위작이라는 추측이 훨씬 유력하다. 왜냐하면 강화도에서 국사를 지냈고, 역사적 고증이 철저하기로 이름난 일연의 삼국유사에도 단군신화와 함께 당연히 등장해야 할 참성단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강화도에서 [동명왕편]과 [동국이상국집]을 저술한 이규보의 저술 어디에도 참성단 얘기는 빠져있다. 특히 그는 유물론적 관점을 견지하며 신화의 미신적인 부분을 바로 잡는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런 이유로 영남대 김정숙교수는 ‘참성단과 단군은 별개의 일이다’라고 얘기한다. 참성단이 단군이 제사지내던 곳이라는 이름이 붙기 시작한 것은 아마 고려 원종이 원에 2차 친조가던 당시 참성단에 제사지내면서 였을 것이다. 이색(1328~1396)이’이 단이 하늘에서 이룬 것은 아니며, 누가 만든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는 구절에서 100년쯤 앞선 원종의 기록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민들은 오래전부터 이 단을 단군이 제사 지내던 곳이라고 인식해 왔을수도 있다. 즉 북쪽에서 내려오던 고조선 유이민들의 한갈래가 이곳에 정착하며 그 같은 전설을 배태 시켰을 수 있다. 그리고 국민적 공감대가 이뤄진 것은 고려원종 5년 이후 인 것이다. 서한으로부터 고조선의 서부변경으로 망명한 위만은 중국 이주민들을 규합하여 기자의 후손인 준의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건국하였다.단군조선의 문화를 비교적 잘 계승하고 있던 준왕은 사람들을 이끌고 바닷속으로 들어갔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는 배를 타고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광경을 그렇게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닿았을 곳은 서해안 지역이다. 만일 그들 세력이 서해안 지역에 정착하였다면 단군조선의 문화를 잘 계승하는 전통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할수 있다. 이는 강화도에 여러 양식의 고인돌문화가 공존하는 것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강화도의 고인돌은 북방식, 남방식 , 개석식등 고인돌 문화의 모든 양식이 존재한다. 이 작은 지역에 이처럼 다양한 양식의 고인돌이 발견된다는 것은 문화적 격변을 예측케 한다. 왜냐하면 무덤, 즉 죽음의 문화는 당대의 문화 양식중에서 가장 최후에 바뀌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즉 무덤 양식이 바뀌었다는 것은 시대가 바뀌었다고 봐도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참성단을 단군이 축조했다는 설은 무리가 있으나 고조선의 여러 족들 가운데 하나인 한족이 단군조선의 문화를 나름대로 계승하고 있던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강화정신을 단군주의라고 하는 것엔 무리가 있다. 단군의 유적은 단군릉 발굴에서도 보여지듯이 평양이나 묘향산등 고어의 아사달로 불리던 지역의 것이 객관성이 있다. 때문에 북과의 관계에서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긴장을 유발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긴장관계를 어떻게 풀것인가가 아니라 객관적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객관적 사실과 다른 지역정신을 얘기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다. 오히려 강화는 단군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고조선이란 국가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것이 합당하다. 그래야 단군도 살아날 수 있다.
고조선은 여러 마을국가들이 모여 만들어진 국가였다. 중국과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체계가 아니라 거사국 연맹체였던 것이다. 이를 통일시킨 것이 단군이다. 단군의 출생배경은 고조선의 건국이념과도 일치한다. 환웅과 웅녀가 결혼하여 낳은 단군은 다른 부족의 지배를 통해서가 아니라 화합을 통해 건국하게 되는 추동력을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셈이다. 환웅은 하늘을 믿는 부족이고, 웅녀는 곰을 믿는 부족이다. 그리스를 비롯한 다른나라의 신화에서도 태양족이나 하늘족은 지배부족이 된다. 왜냐하면 가장 추상화된 사유를 할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사회적 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나 바빌론의 신화에서는 지배족이 피지배종족을 무력으로 점령하거나 초토화 시키고 지배권력을 세운다. 그에 비해 환웅과 웅녀의 관계는 피지배부족을 교화하여 화합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 것이다. 신화에 의하면 어느날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찾아와서 소원을 빈다. 원문을 보면 원화위인(願化爲人)이다. 보통 해석하기를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때 당시의 사람이란 명사는 동물과 대비되는 존재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죽음-주검, 삶-사람처럼 살아 있다는 의미에서 의 사람인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는 동물토템의 발전에서 보듯 동물과 사람을 일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랑이족과 곰족이 찾아와서 환웅에게 소원을 빈 것은 [살려달라]는 것이었다. 그 처방으로 동굴 생활과 쑥, 마늘을 준것도 이를 증명한다. 쑥은 여자의 냉에 효과있는 약재이고 동굴은 당시 움집생활 이전의 주거 양식으로서 항상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는 안정된 공간이란 특징을 갖고 있다.
환웅은 곰족의 웅녀를 도와줌으로서 그를 포섭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환웅과 웅녀는 부족의 벽을 뛰어넘는 사랑을 한다.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사랑의 주제가 단군신화 속엔 감추어져 있다. 그 결과 태어난 것이 단군이다. 로미오와 줄이엣이 비극적으로 끝났다면 환웅과 웅녀는 영웅적으로 끝난 것이다. 단군은 탄생부터 부족을 통합하는 정치역량의 전통 속에 있었으며, 그것을 고도의 정치력으로 이끌어 고조선을 건국하게 된 것이다.

노예소유주세력인 초기 고조선의 지배세력의 사상은 하늘사상이 된다. 하늘의 이미지는 절대의 이미지이다. 그리고 고인돌에서 발견된 별자리 유적은 하늘을 숭배하는 제왕의 종교이자 학문이었던 사실을 증명한다. 참성단을 볼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 참성단 위의 하늘을 보는 것이 고조선의 이미지를 잡는데 오히려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부족국가의 연합이 이뤄지는 단계에서는 절대 지배사상인 하늘사상의 지배관계는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토대의 변화를 반영한다. 정사로서 취급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지만 고조선 시대의 3대 경전으로 알려진 천부경에는 모든 것이 하나로 시작된다는 ‘하나사상’이 81자의 문자속에 녹아 있다. ‘하나사상’은 비록 소박하지만 물질세계를 하나의 통일체로 보기 시작한 유물론적 견해이다. 이는 신흥 노예소유주세력의 사상으로서 단군의 건국정신으로부터 이어지는 전통과도 접맥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절대공간인 하늘을 향하던 시선은 강화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하게 한다. 갯벌이다. 갯벌은 육지도 아닌, 바다도 아닌 새로운 세계이다. 육지와 바다는 갯벌에서 완전히 새로운 물질적 통일을 이룬다. 하늘이 추상의 장이었다면 갯벌은 새로운 생활과 생산의 장이다. 물질적 통일의 사상은 이런 객관적 삶의 조건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차이를 인정한 통일, 갈등이 아닌 평화를 지향하는 통일의 통치사상은 [홍익인간]으로 이어진다. 거사국과 중앙국가의 관계를 잘 나타내 주는 조세와 법률체계에서 이런 정신의 집중된 표현을 볼 수 있다.
[맹자]의 곡자편에는,
‘백규가 맹자에게 물었다.”저는 전세를 20분의 1만 받고자 하는데 어떻습니까?”
맹자가 말했다.”그대의 방법은 맥족의 방법이요,1만가구가 사는 나라에서 단 한사람만이 질그릇을 만든다면 되겠는가?”
백규가 말했다.” 안됩니다. 사람들이 쓸 그릇이 부족합니다.”
맹자가 말했다. “무릇 맥국에서는 오곡이 나지 않고 기장만 난다. 그러므로 20분의1의 조세로도 넉넉하다.”
여기서 맥국은 예족, 고구려족과 마찬가지로 고조선의 거사국이다. 당시 고조선의 조세제도가 20분의1 밖에 받지 않는 제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각 거사국들의 경제 생활을 최대한 자립적으로 꾸리게 하고 최소한의 조세만을 징수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은 느슨한 형태의 원시적 연방국가였던 셈이다. 또한 법률의 측면에서 보면,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소도안으로 피신하면 죄가 면제 되었다. 물론 소도안에서 다시 노예의 신세로 전락 했겠지만 법적용에 있어서 융통성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홍익인간의 이념은 강화의 지리역사적 전통과 어떻게 접맥되는가?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일조량과 비옥한 토지, 군사적 요충지인 강화는 역사적으로 전쟁터였다. 삼국시기에는 이지역의 확보가 바로 한반도내 패권순서와 일치했다. 처음에 북부에서 내려온 비류의 세력권에 들었다가 온조에게 통합되어 백제 땅에 경영되었으며 4세기말에는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된다. 통일신라에 들어서는 현과진으로 편성되는데 궁예는 혈구진을 정복하면서 태봉국의 서해안 시대를 연다. 왕건은 강화의 혈구진과 대동강의 패강진등 해상권을 장악하고 고려를 개국한다. 1231년 몽고의 1차 침략과 강화 천도, 이어지는 5차까지의 침략동안, 또 조선조에 들어서 정묘호란, 병인양요, 심미양요 동안 강화는 전쟁터 였다. 그러나 수많은 백성이 전쟁의 참화에 시달리는 동안에도 강화는 가장 강력한 자존심과 군사력으로 가장 피해를 적게 받은 곳이다. 전쟁중에도 강화 사람들은 해양성 기후로 항상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을 보았고, 비옥한 토지에서 농사를 지었고, 갯벌을끼고 있는 풍부한 어장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저력이 강화가 끝까지 치열한 항전을 치뤄낼 수 있었던 근거 였다. 그리고 무력전쟁을 문화적 힘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거대한 발상이 생겨난다. 팔만대장경 조판과 외규장각의 설치이다. 전쟁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통치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지만 보통 전쟁때 문명이 파괴되는 것과 달리 강화에서 문명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은 강화가 가진 투쟁과 항전의 역사를 넘어서는 문화적 힘 때문이다.
그 힘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투쟁과 항전은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투쟁과 항전으로나서게 하는 힘의 밑바닥에는 평화를 지키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비록 지배권력의 주도로 이루어진 일이지만 다른 지역이 아닌 강화에서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강화민들의 역사적 자질과 정서적 힘에서 연유한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더욱 치열하게 항전할 수 있는 것이다. 항전의 목표인 평화의 이념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강화사람들의 삶의 조건인 자연과, 삶의 과정인 역사와, 그 결과인 문명의 총체로서 생겨난 것이다. 조선 말 강화학파의 영재 이건창, 매천 황헌등의 죽음을 건 외세에 대한 항거함으로서 조선유학의 보수주의를 뛰어 넘는 정신적 경지를 개척한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치 않다. 목적으로서의 평화 강화가 그토록 치열한 항전의 땅일 수 있었던 이유이다.

맺음말
강화는 항전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 만치 평화로운 분위기여서 사진의 이미지를 잡는데 무척 곤란을 겪어야했다. 이것이 강화공부를 시작하게 된 배경이다. 흔히 상식적으로 강화의 지역정신을 단군주의로 인식하는데 대해 나는 문제의식을 갖는다.
강화의 지역정신은 고조선으로부터 이어지는 강화의 자연,역사, 문명을 총체적으로 볼 때 평화주의라고 봐야함을 주장한다. 이런 강화의 평화주의는 역사의 힘을 다시 살려내고 21세기 통일과 동북아의 새로운 질서를 향한 구심으로 자리잡기 위한 목적에도 부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욕심이지만 강화와 인천광역시가 새로운 지역전략과 문화정책을 짜는데 참고가 되길 바란다.
사진이란 것이 껍데기를 찍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과 미래를 향한 이상을 통일함으로써만 형상 가능한 것이기에 이런 연구는 사진가로서 당연한 것이다. 사진은 역사학자나 사회과학자들이 보지 못하는 이미지의 세계까지 파고 들어가서 고뇌하고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단 한장의 사진도 찍을수 없다. 이렇게 글로 쓰긴 쉽지만 사진을 찍기는 어렵다. 마침 시경에 나오는 문구 하나가 내마음과 같다.

觀 海 若 水
바다를 보고나니 물을 말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주1) 강화 성공회성당은 1900년 대한성공회 초대 코프주교에 의해 설립되는데 1896년 6월 강화에서 신자에게 세례를 주고 4년후 이 성당을 건립한다. 성당 겉모양은 마치 사찰과 같은 전통양식의 느낌을 그대로 주고, 안으로 들어가면 서양의 고전적 예배당 양식인 바실리카(장방형 건물에 두줄이나 네줄의 기둥을 양쪽으로 세우는양식) 건축으로 되어 있어 얼마나 동서양의 융합에 신경썼는지 알 수 있다.

주2) 강화 노동청년회 사건은 1967년 JOC즉 카톨릭 노동청년회가 관련된 사건으로 당시 미카엘신부와 회원이던 심도직물공업주식회사(종업원1200명)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구속 고용거부 미카엘 신부의 반공법 적용운운등 회사뿐 아니라 경찰력과도 대치하는 사건으로 발전된 사건이었다.

주3) 정통성과 정당성의 관계는 강정구교수의 분류를 참고한다. 좁은의미의 정통성은 권력뿌리 정당성(권력주체의 실천행위의 정당성)과 권력창출의 정당성(절차의 정당성)을 포함하며 정당성은 여기에 권력행사의 정당성(집단의 핵심과제, 보편적 과제,지도력)을 추가로 포함하는 개념이다.

주4) 분임토의의 3원칙. 전원참석은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참석하는 자주성의 원칙이며 전원발언은 모두가 빠짐없이 자신의 의사를 개진하는 절차와 결정의 민주성이며, 전원실천은 결정된 사항을 각자의 처지를 고려하되 반드시 집행하는 통일집중의 원칙이다.

주5) 구조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중은 없다. 구조가 있을 뿐이다. 대중성의 관철을 절차의 문제로만 풀고자 할 때 여론구조를 장악하고 대중성을 내세우는 지배세력의 계획에 포섭될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