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근리식 고인돌의 미학

(2001년 10월8일 강화역사문화연구소에서 발표한 이야기입니다.
부근리 고인돌의 기울기에 관한 역학과 미학에 대한이야기입니다. 창비사에서 출판될 이시우의 통일기행에도 그 내용이 실릴 예정입니다. )

부근리식 고인돌의 미학

사진가 이시우

이야기 순서
1) 고인돌 연구방법론에 대하여
1. 문제
인류학적 범주의 한계
서비스의 통합론
프리드의 갈등론
사람-사회관계-문명 3일체론

2. 대안
미학적 범주의 도입
과학-고고학-사회학-신화학의 통일 -> 미학

모델이론의 적용
원대상-주체-모델 (유비)

2) 부근리식 고인돌의 역학분석

3) 부근리식 고인돌의 미적특징
부조화의 조화

4) 민족문화의 다른 미적형태들과의 비교.
1. 음악에서의 떠는청,꺽는목.

2. 음식에서의 삭힌맛

3. 체육(택견)에서의 균형깨기

5) 고인돌사회의 시대정신과 미적이상
철학적 수단으로서의 신화분석
켈트족신화
이집트신화
바빌론신화
단군신화

6) 유라시아의 문화정체성으로서의 고인돌
카프카즈 지역의 고인돌과 강화도 고인돌의 지정학

이야기자료
부근리식 고인돌의 미학

사진가 이시우
시간과 공간이 사회적 창안이듯, 삶과 죽음도 사회적 창안이다. 그리고 문화란 그것의 공고한 구축이다. 우리의 통일방식이 전례가 없는 것이 될 가능성이 많은 만큼 그 원리를 우리식의 개념과 창안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뿌리 없는 낯선 문화가 낡은 문화를 흔들어 놓을 때 문화는 진보적이지만, 그것이 수면 위의 파동으로 그치고 말 때 문화는 다시 보수적이다. 사회의 변화는 문화로부터 시작되어서 정치와 경제의 격변을 거쳐 문화에서 완성된다. 고인돌은 민족문화유산의 거대한 창고에 최초로 등장한 가장 독창적인 재산이다. 통일미학의 목표이자 추동력인 민족미학의 보고에 고인돌을 재평가하여 올려놓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부터 질문을 던져 보는 게 좋다. 왜 나무나 흙이 아니고 큰돌인가? 삼국지 위지 공손도전 에는 ‘요동 양평 연리사에 큰 돌이 불쑥 솟았는데, 길이는 한길을 넘으며 아래에는 작은 돌 세 개가 다리로 되어 있다.’고 하고 이것은 그가 왕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상서로운 징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고인돌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1세기까지도 고인돌은 정치권력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그 정체를 땅에서 솟은 것으로 보아 신비화하고 있다. 그것은 고인돌이 땅속의 돌널무덤에서 땅위로 올라오게 된 과정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작은 돌을 모아 쌓은 돌무지 무덤문화와 큰돌을 이용한 고인돌문화 사이에는 새로운 능력을 가진 사회적 단계가 필요하다. 돌도끼는 발견한 결에 대해 인간이 직접적으로 작용해야 하지만 큰돌은 결에 대한 인식과 그 결을 이용할 수 있는 다른 결을 조합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 큰돌을 얻을 수 있었으며, 돌을 얻는 과정만을 보면 직접 돌을 깨는 것보다 덜 위험하고 덜 힘이 들게 되었다. 이 부근리고인돌은 북방식으로 분류되는데 북방식과 남방식의 형식적 차이는 고임돌을 쓰느냐, 바둑판처럼 작은 돌을 네 귀퉁이에 받치느냐로 구분되지만 사실 더 본질적인 차이는 시신을 땅에 묻는가 땅위에 놓는 가이다. 땅에 묻고 안 묻고는 다시한번 결정적인 문화의 차이를 나타내는데 매장문화는 농경문화이고, 비매장문화는 기마문화이기 때문이다. 농경문화는 이전에 없던 공간개념을 만들어 냈다. 땅을 죽은자의 사후 세상으로 본 것이다. 이 공간 개념은 더 발전하여 죽은자가 거처할 최소한의 공간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돌널을 사방으로 막고 덮개돌을 덮는 방식이다. 물질적 신체가 없어진 죽은 자가 이 공간에 머물며 살아있는 자들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사진167 고인돌의 문부분]*nega
부근리고인돌의 측면에 서서 보면 뒤쪽은 덮개돌과 고임돌의 끝이 일치하는데 앞쪽은 고임돌에 비해 덮개돌이 튀어 나와 있다. 즉 덮개돌 아래에 여유공간이 형성된 것이다. 이 공간은 무엇일까? 북에서 발견된 고인돌과 비교해볼 때 이 공간은 문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죽은자를 산자와 같이 거처하게 할 뿐 아니라 산자가 그와 만나기 위한 통로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무덤안에 산자와 죽은자 간의 소통체계가 완벽하게 만들어지게 되고, 죽은자에 의한 통치가 가능해 진다. 새로운 공간개념의 창안은 결국 과거를 통해서도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으니 시간개념도 같이 창안된 것이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은 정치권력과 사회체제의 창조물이다. 시신에 대한 식인 풍습은 그의 영혼과 지위를 공동체가 나누어 먹음으로서 공유하거나 전이된다는 관념에 기초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물질적 한계에 부닥치고 공동체를 통합시키기 보다 심각한 분열로 몰아갔다. 사회의 존립에 식인 풍습의 유용성이 감소하게 되자 폐기되기에 이르고 시신과 영혼의 개념을 분리하게 되고, 무덤공간의 창조를 통해 시간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무덤의 공간은 사회를 지배하는 구심이 되었고, 여기서 창안된 시간개념은 역사를 지배하는 뿌리가 되었다.
문명은 사람관계의 기록이기 때문에 거꾸로 문명의 책장을 더듬다 보면 그 문명을 대할 때의 사람관계를 발견해 내는 행운을 잡을 때가 있다.
이렇게 해보자. 고인돌 정면에서 한 점에 시선을 고정하고 뒤로 서서히 물러나다 보면 고인돌이 눈에 가득 들어오는 한 지점에 서게 된다.
[사진168 뒤에서 본 고인돌]
그 지점에서 몸을 서서히 낮추면 고인돌을 우러러보게 되는 또 하나의 위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 위치는 거의 땅에 닿았을 때 발견되는데 고인돌을 실제 대하던 사람들의 자리를 우리는 그렇게 어림잡아 볼 수 있다. 물체를 바라볼 때 가장 알맞은 거리는 물체의 최대높이나 길이의 3배인데 이 거리는 물체의 양끝을 바라보는 화각이 20도가 된다. 관광객의 입장이 아니라 당시 이 무덤 관계자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고인돌을 정확히 감상할 수 있는 지점은 몸을 땅에 대고 우러러 봐야 하는 지점이다. 사진모임 사람들과 함께 가서 사진을 찍어 보시라 하고 나중에 보면 거의가 고인돌의 뒷쪽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에는 이유가 있다. 뒷쪽의 지면이 밭을 만드느라고 사람 키만큼 내려가 있기 때문이다. 즉 시선을 땅에 가까운 지점에서 올려봐야 그 웅장한 자태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개의 고임돌이 60도 정도 기울어져 있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직각으로 고임돌을 세워 놓았을 때 보다 기울어져 있을 때 웅장한 느낌이 더해진다. 고임돌에 기울기를 준 것은 비단 이 고인돌 뿐 아니라, 다른 고인돌에서도 발견되는 양식이다. 기울기.
내가 고인돌에 빠져든 것은 바로 이 기울기 때문이었다. 모델이론이란 것이 있다. 연구하고자 하는 사물의 모델을 실제와 가장 유사하게 만들어가면서 사물의 법칙을 밝혀내는 방법론이다. 가설과 논리의 매마른 정의가 아니라 유비(유사한 것)를 통해 생동한 실제를 재현하는 것이다. 과학과 미학을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나는 이 방법에 호감을 갖는다. 고인돌도 모델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비슷한 돌을 뒤뜰에 날라다 쌓을 때까지도 고인돌 같이 단순한 건축물을 이렇게까지 해 볼 필요가 있나 하는 자문이 있었지만, 고인돌을 쌓아도 쌓아도 쓰러지는 것을 보고서야 나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기울어진 고인돌을 쌓는 것은 이렇게 저렇게 해보다가 우연히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억지로 버팀돌을 대서 고인돌을 세워놓고 어떻게 기울어진 채로 고인돌이 서있는지 내가 아는 모든 과학으로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기울어진 지석이 땅과 직각삼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직각삼각형에 생각이 미치자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연상됐다. 그런데 기원전 1000년경, 고조선시대에 피타고라스정리 같은 것이 있었을까? 우리나라엔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었고 중국에는 있었다. 천문학서인 주비산경(周 算經)과 진서(晉書)에 나오는 구고현(句股弦)의 정리가 그것이다. 고란 허벅지를 뜻하는데 무릎을 구부렸을 때 삼각형이 만들어지는 원리에서 추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구는 밑변이고 현은 삼각형의 빗변이다. 구와 고로 현을 구하는 방법(句股求弦之法)이다. 그러나 진서는 당태종때 만들어진 책이니 고조선보다는 시대가 한참 지난다.
(그림1 주비산경에 실린 피타고라스 정리의 증명 이 현도(弦圖)는 아마 조군경趙君卿(기원후3세기) 注에서 비롯된 것 같다.-김용운,김용국[동양의과학과사상487쪽])
(상자글1 주비산경의 정리)
이에비해 주비산경은 기원전 1000년경 전국시대 이전인 주나라 때로 올라간다.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기원전 500년경이니 그보다 500년 정도 앞선다고 하겠다. 당시 고조선은 중국과 인접하여 있었고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가 서던 초기의 역사를 기록한 서경에는 훗날 기자조선의 주인공이 된 기자의 고사가 전한다. 기자는 청동기문명의 고대국가인 은나라의 엘리트로 주나라 무왕에 의해 고조선의 제후로 책봉되는데 무왕이 기자를 찾아가 우왕이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국가경영의 9가지 근간인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대하여 설명 듣는 대목이 있다. 그중 4번째 항목이 천문역법에 관한 이야기이니 이미 이때 주비산경과 같은 천문역법에 관한 세련된 체계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역사에서 기자조선시기의 설정은 그 같은 문명의 도입과정을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주비산경의 기하학만으로는 기울어진 고인돌을 설명할 수 없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석사이에 채울 흙의 양과 인력의 동원수를 계산해내는 정도이다.
기하학이 아닌 역학의 개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수소문 끝에 건축공학자인 김인성씨의 도움을 받아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기울기가 아니라 기울어지게 하려는 힘이 문제였다. 이를 모멘트라 한다. 예를들면 손으로 막대기의 중간을 잡으면 균형을 잡기가 쉽다. 그런데 막대기의 끝을 잡으면 똑같은 힘을 주었어도 막대기는 한쪽으로 기울어지려 한다. 모든 힘은 모멘트와 함께 존재한다. 그런데 막대기의 중간을 잡았을 때는 모멘트가 0이 되기 때문에 힘만 작용하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막대기의 끝을 잡으면 모멘트가 극대화되기 때문에 한쪽으로 기울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지석의 기울어지려는 힘을 상쇄시켜서 0이 되게 해야만 고인돌은 기울어진 채로 서 있을 수 있게 된다. 지석의 기울어지는 힘을 상쇄시켜주는 것은 상석의 기울기이다. 상석이 기울어져 있어야만 지석의 모멘트를 상쇄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림2 모멘트에 의한 부근리 고인돌의 건축원리)
(상자글2 모멘트에 의한 부근리 고인돌 축성공식)
어쨌든 기울어진 고인돌이 서있을 수 있는 조건은 세가지이다.
상석이 무거울수록, 상석이 기울수록, 지석의 낮을수록.
다시 공식에 따라 고인돌을 쌓았다. 성공! 고인돌은 너무나 아름답게 기울어진 채 서있다.
고조선의 기록 어디에도 이런 고도의 역학공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고인돌을 이렇게 세울려면 직관적으로든 논리적으로든 이러한 내용을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주비산경의 기하학만으로는 고인돌을 세울 수 없지만 이 고인돌역학에는 주비산경의 구고현의 정리가 응용된다. 즉 기울어진 물체의 힘 작용점은 2/3 지점이다. 이지점으로부터 바닥의 핀까지 빗변의 길이가 되고 기울어진 각도에 따라 핀에서 힘 작용점까지의 거리가 결정된다. 중력에 의해 힘은 직각으로 작용한다. 직각삼각형의 원리이다. 단 직각삼각형의 원리가 기하학이 아니라 역학에 적용된 것이다.
당시 고조선의 과학수준이 최소한 이 부분에서 만큼은 탁월했다는 증거이다.
나는 고인돌을 틈만나면 보고 또 보았다. 그러다가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왜 이렇게까지 힘들게 기울기에 집착했던 것일까? 하다보니 우연히… 아니다. 부근리에는 상석도 없이 서있는 하나의 지석(15번)이 있다. 지석의 높이나 기울어진 각도가 137호 고인돌과 비슷하다. 상석과 지석은 어디에 있을까? 나의 추정으로는 이 지석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실험용이었던 것이다. 고인돌이 오래되어 붕괴된 경우라면 이 정도 규모의 고인돌은 반드시 그 자리나 멀지 않은 곳에서 그 잔해가 발견되어야 한다. 아니면 누군가가 포크레인으로 번쩍 들고 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본 것처럼 상석이 없이 지석이 기울어진 채로 서있을 순 없다. 즉 상석을 들어내는 순간 이 지석도 쓰러졌어야 한다. 고인돌은 세 개의 돌로 구성되지만(두개의 막음돌은 역학적 구조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므로) 기울어진 채 건축되는 순간 하나의 물체가 되기 때문에 어느 하나만 이상이 생겨도 무너지게 되어 있다. 때문에 부근리식 고인돌은 지석을 기울여놓고 그 위에 상석을 올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며 수직으로 세운 지석 위에 상석을 올리고 한쪽을 밀거나 잡아당겨 기울어지게 하는 수 밖에 없다. 즉 따로따로 건축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137호 고인돌의 상석 남쪽모서리 부분에는 4개의 정교한 4각형 홈이 파여져 있다. 이 홈은 성혈과는 다르고 채석흔적으로 보기에도 부적합하다. 남쪽에서 기울이기 위해 무엇인가를 걸어서 잡아당긴 흔적으로 나는 보았다. 이와 더불어 북쪽의 지석 뒤쪽이 깨어져있다. 이는 직각으로 세워져 있다가 상석을 남쪽으로 기울이는 과정에서 힘의 과부하로 깨어진 흔적으로 추정된다.
[사진169 쪼개진 돌]*nega
(그림3 부근리식 고인돌 축성도)
다시 하나의 지석(15번)으로 돌아와 보자. 이 지석이 상석없이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땅의 묻힌 부분에 돌을 쌓아 바쳤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고인돌을 세울 때 썼던 방식이다. 흙이 유실되고 돌이 치워지면 이 돌은 쓰러진다. 그러나 기울기의 역학을 이용하면 땅에 깊이 묻거나 돌을 쌓아 받치지 않아도, 어떤 힘의 보조도 필요 없이 설 수 있게 된다. 인근에 있는 대산리1호나 점골 24호 등 대부분의 고인돌이 쓰러진 이유는 돌과 지반의 유실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기울기 역학대신 돌과 흙 같은 보조적 힘에 의존했다가 그것들이 유실되면서 쓰러졌을 가능성이다. 때문에 하나의 지석(15번)은 사적 137호 고인돌의 축성을 위한 실험용이라는 생각이다.
[사진170 실험용이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하나의 지석]*nega
대부분의 관광객이 고인돌 앞에 서있는 시간은 5분도 안되지만 나는 고인돌을 보면 볼수록 낯설었다. 뒤늦게 깨닫게 된 사실은 이 고인돌이 건축과 공간학의 측면에서 봤을 때 어떤 계보하고도 연결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동양의 건축은 물론이고, 서양건축사에 큰 획을 그었던 기둥과 아치, 판테온식 돔형지붕, 고딕성당의 천정등은 그 획기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정형과 조화를 추구하는데서 벗어난 적이 없다. 근대소설에서 사회의 부조화를 폭로할 때도 건축만큼은 조화를 추구했다. 그리고 이것은 시대의 음악이자 초상으로서 건축의 고유한 장르특성으로 까지 인식되었다. 그러나 부근리고인돌은 기울기를 통해 부조화와 비정형의 미학을 추구하고 있다. 죽은자의 입장에서 이 공간은 기울어진 방과도 같다. 어떤민족의 건축에서도 일부러 기울어진 방을 창조하진 않았다. 더군다나 죽은자로서 최고의 권력이 행사되는 무덤공간을 이렇게 일부러 기울인 경우는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다. 때문에 부근리고인돌은 그냥 쉽게 지나치든지, 볼수록 난해해져 탈현대적인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부조화속에 감춰진 조화, 비정형의 정형 이것이 부근리고인돌에 고도의 과학적 능력을 투여한 사람들의 미학적 이상임에 분명하다.
한편 껴묻거리로 출토된 청동칼, 청동거울, 청동방울등은 실용적 목적이 아닌 주술의례적 목적의 무속용구로 제사의 기능까지도 죽은 자에게 부여됐음을 알 수 있다. 죽은자의 통치가 고인돌이라는 거점에서 상징적으로만이 아니라 현실화되어 있는 것이다. 권력의 상속과 계승을 위한 치밀한 장치가 고인돌 무덤의 건축적 의미이다. 단군신화의 천부인 세 개는 무속의 기본 도구인 명두(청동거울), 칼, 방울이란 점으로 미루어 고조선의 사상적 기반은 무속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무속에서의 인격신은 주로 당시의 인간생활에 큰 영향을 준 신들이다. 단군이 그렇고 김유신, 최영, 임경업등이 그렇다. 무속신은 살았을 때 성공했든 실패했든 그 나름대로 못 푼 한이 있기 때문에 한을 품은 존재라고 본다. ‘한’이야 말로 무덤을 통해 공간과 시간을 지배하는 사상이다. 무속의 신들이 풀지 못한 ‘한’ 때문에 된 것이란 ‘한풀이’설과, 반대로 그들의 영웅적인 활동력을 숭배하기 위한 것이라는 ‘영웅숭배’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영웅숭배의 숭고미가 지극한 이상적 ‘상태’에 대한 미감이라면, 한풀이의 비극미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감이다. 비극도 숭고한 이상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인데, 숭고가 완성을 향해 실천되는 과정에서 유린될 때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의 미감은 장구한 시간개념을 전제로 숭고미와 비극미를 통합한다. 때문에 죽었어도 살아 있고, 미래를 보기 위해 과거를 보고, 하늘족이 곰족과 결합할 수 있고, 온갖 잡종문화의 교차속에서도 접화군생 接化群生 할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고조선의 이러한 사상미학은 사회제도로 어떻게 구체화되었을까? 거사국연맹체인 고조선은 거사국과 중앙국가의 관계를 잘 나타내 주는 조세와 법률체계에서 이런 정신을 구체화했다.

[맹자]의 곡자편에는,
‘백규가 맹자에게 물었다.”저는 전세를 20분의 1만 받고자 하는데 어떻습니까?”
맹자가 말했다.”그대의 방법은 맥족의 방법이요, 1만가구가 사는 나라에서 단 한사람만이 질그릇을 만든다면 되겠는가?”
백규가 말했다.” 안됩니다. 사람들이 쓸 그릇이 부족합니다.”
맹자가 말했다. “무릇 맥국에서는 오곡이 나지 않고 기장만 난다. 그러므로 20분의1의 조세로도 넉넉하다.”

여기서 맥국은 예족, 고구려족과 마찬가지로 고조선의 거사국이다. 당시 고조선의 조세제도가 20분의1 밖에 받지 않는 제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각 거사국들의 경제 생활을 최대한 자립적으로 꾸리게 하고 최소한의 조세만을 징수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은 느슨한 형태의 원시적 연방국가였던 셈이다. 또한 법률의 측면에서 보면,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소도안으로 피신하면 죄가 면제되었다. 물론 소도 안에서 다시 노예의 신세로 전락하는 구조가 되었으나 법 적용에 있어서 융통성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바빌론신화의 길가메시도 신과 인간의 결합으로 탄생했다는 점에서 단군신화와 유사성이 있다. 길가메시는 신과의 영웅적 투쟁과 모험을 통해 숭고한 이상을 추구한다. 그러나 죽음은커녕 졸음도 이기지 못하는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노래한다. 길가메시 서사시 역시 숭고와 비극을 통합한다. 그러나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신의 세계가 전제되어 있다. 조화를 전제로 한 부조화인 것이다. 그러나 단군신화에선 창조신이 없다. 고조선의 무속신은 신적 조화를 전제하지 않는다. 때문에 부조화의 조화라는 한의 미학이 나온다.
이러한 한의 미학으로부터 다시 과학과 철학이 나온다. 고조선 시대부터 형성된 ‘한’의 미학 사상은 숭고한 이상을 갖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며 현실적 공간에서 이를 유린하는 상황을 만났을 때 슬픔과 함께 희망을 동시에 갖는 사상이다. 탈춤에서의 풍자와 해학, 판소리의 시김새가 그렇고, 이북의 ‘유훈통치’와 ‘가는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와 같은 구호가 그렇다. ‘한’속에는 그 한을 움직이는 ‘신명’이 있어서 그것이 일정한 절정에 이르러 한의 비극적 상황을 깨고 나오게 되니 이것이 곧 ‘신명풀이’요 ‘한풀이’다.
통일의 미학이란 고인돌로부터 시작된 한의 미학을 전국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니, 그것은 곧 통일신명 풀이다.
부근리 고인돌은 어느새 세계문화유산이 되어 있었다.
최첨단 세계화의 구호가 명멸하는 시대에 고대의 고인돌이 세계성을 획득한 역설 앞에 나는 서있다. 관계의 풍향에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수천년 세월을 견뎌온 존재의 힘. 그러나 그 존재의 힘도 알고 보면 고조선이 도달한 관계의 높이로 인해 가능한 것이었다. 다양성을 조화시킬 수 있었던 힘이 바로 고조선의 힘이었다. 고인돌은 단군이 폐쇄적인 민족신화의 틀을 벗어나 세계를 계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