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사해체걷기명상 통일뉴스 인터뷰 이시우 2004/08/30 370

유엔사해체걷기명상 통일뉴스 인터뷰

http://www.tongilnews.com/article.asp?mainflag=Y&menuid=101000&articleid=46460

“키티호크 항모 8월 초 동해배치 확인”
<인터뷰> ‘유엔사 해체 걷기명상’ 마친 이시우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2004-08-17 오후 5:04:05

평범한 한 인간이 사회적 문제에 대해 얼마만큼의 발언력을 가질 수 있을까? 아니 보통시민이 거대한 사회구조적 체제에 대해 발언하기 위해서는 얼만큼의 자기 헌신이 필요할까?

▶대장정을 마치고 일본에서 귀국한 이시우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지난 6월 20일 자신의 집이자 반도 허리의 최 서단인 강화도에서 출발해 동쪽 허리끝 고성으로, 다시 동해와 나란히 부산까지 한달간 1,000km의 ‘걷기명상’을 강행하고 다시 7월 23일부터 일본에서의 걷기 명상을 추진했다가 지난 8월 13일 귀국한 사람이 있다. 사진작가이자 평화운동가인 이시우.

그가 내건 것은 ‘유엔사 해체’. 한국전쟁 당시 급조된 유엔사가 지금도 한반도의 평화에 최대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매일 수십킬로를 걸으면서도 텐트에서 잠을 자고 인터뷰도 마다하는 고집스런 원칙을 견지해온 그. 폭풍우에 텐트째 나뒹굴기도 했고, 삼복더위에 아스팔트 지열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기도 했다.

예정대로 일본에서의 걷기명상을 진행하진 못했지만 일본 평화운동을 집중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특히 이번 방일을 통해 “히로시마현 소재 미 해병대 캠프이와꾸니에서 화학무기가 있음을 증명하는 증거를 발견했다”며 “이와꾸니해병대가 한국 독수리훈련에 참가하는 부대라는 점에서 한국과 분리할 수 없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하고 “자세한 내용은 구체적 물증과 함께 이후 기자회견을 통해 밝힐 예정”이라고 말했다.

또한 일본인 평화활동가에 의해 “요코스카가 모항인 키티호크 항모가 8월 초에 동해에 배치된 사실이 확인”됐고 “사세보기지에서 8월 6일, 유조선 한 척과 보급지원함 한 척이 동해로 이동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다음은 ‘미완의 대장정’을 마치고 돌아온 이시우 씨와 16일 오후 7시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진행한 인터뷰 내용이다.

▶16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이시우 작가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태풍에 쉽쓸려 텐트째 뒹근 적도

□ 통일뉴스 : 걷기명상을 마치고 도착한 소감은?

■ 이시우 : 일본측의 요청에 의해 원래 일정이 변경되어 10월에 다시 2차 걷기 일정이 계획됐고, 앞으로 2달여의 느슨한 시간을 갖게 되는데 그 시간을 어떻게 긴장감을 가질지가 고심이다.

미완일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잘된 것일 수도 있는데 장시간 여백이 긴장했던 리듬을 계속유지하는 데는 큰 걱정거리가 된 것 같다.

□ ‘유엔사 해체’를 내걸고 걷기명상을 했는데 평가는?

■ 처음 걷기명상을 시작할 때 고민하고 실행하려 했던 가장 큰 목표는 캠페인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고 제가 개인이기 때문에 유엔사 문제에 대해서, 예를들면 잠수함에 독가스를 확인 할 때 집어넣는 토끼처럼 시대의 감각기관으로서의 역할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유엔사해체 ‘걷기명상’ 중인 이시우 작가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조직적으로 확산되거나 여론에 투시되는 것까지는 제 역할이 아니고 제가 할 수 있는 바는 최대한 유엔사 문제를 명싱하는 것이었고, 관심 즉 마음을 보는 것이 제겐 우선이었고 저의 사색이 울림이 되어 다른 사람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면 예술가인 저로서는 최선을 성취한 셈이다.

어느 정도 진전됐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고 일본에서는 연설이나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일본 운동가들은 유엔사 문제를 매우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 국내에서 한 달간의 걷기명상은 조용히 끝난 것 같았다.

■ 국내에서는 처음 목적했던 바만큼 된 것 같다. 너무 거창하지 않고 소박하게, 다음에 이 문제를 가지고 조직적으로 나서게 될 분들의 자리를 너무 차지하지 않는 것이 목적이었고, 적당하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 혼자서 멀고도 험한 길을 걸었는데.

■ 몇 번 건강상의 고비가 있었는데 고도로 긴장한 탓인지 넘겼고 글쓰기가 더 어려웠다. 걷기와 글쓰기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를 하기가 어려웠는데 걷고 끊임없이 생각했기 때문에 그나마 글이 가능했던 것 같다. 걷기명상이 저에게는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 특히 여름철 삼복더위와 폭우로 어려움이 많았을텐데.

■ 태풍에 쉽쓸려 텐트째 뒹근 적도 있었다. 더위가 지나쳐서 목에 피부염의 일종인 곰팡이가 생길 정도로 혹독했는데 그런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익숙해지고 버틸만 했지만 무엇보다 사고의 긴장을 버티는 것이 힘들었다. 걷기가 일상 관성을 깨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걷기도 계속하니 일상화가 되더라. 긴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글을 쓰면서 사고의 긴장감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지난 21일 국내 걷기명상의 종점인 부산 하얄리아 부대 앞에 도착한 이시우 작가.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기자]

□ 국내 걷기명상을 마치고 일본으로 갈 때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안다.

■ 국내에서는 특별하게 문제없이 잘 진행된 셈이었다. 의외로 일본에 대한 준비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제 의지대로 실행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지금 일본은 후텐마기지 이설 반대투쟁 한창

□ 일본행의 문제점은 무엇이었나?

■ 세 가지인데 한국보다 훨씬 심각한 더위였고, 또 하나는 안전문제로 청소년 범죄, 우익단체에 의한 안전문제 이런 것들이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심각하게 일본에서 느끼셨던 것 같고 해결책이 당시로서는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 단체들에 이 사실을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한 준비가 거의 전무했다는 점이다. 저는 조직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는데 일본에서는 그 점을 크게 생각했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깊이 있게 연대하려고 보니까 굉장히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이번 기회를 통해 알게 됐다.

▶헤노코마을의 미군기지 이설반대 농성 100일째 기념 집회 모습. [사진 - 이시우]

□ 결국 중간에 일본에서의 계획이 수정됐는데.

■ 10월 정도까지 일본의 단체들을 조직해서 함께 진행하는 것으로 조정됐고, 그 기간동안 다행인 것은 그냥 중지된 것이 아니라 일본에 있는 단체와 여러 관계자들을 굉장히 폭넓게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일본에서 유엔사 해체문제에 대한 홍보도 상당히 많이 이뤄졌다.

개인적으로 무척 중요했던 것은 일본의 오끼나와에서부터 본토까지의 여행을 통해서 일본에서의 유엔사 문제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시야가 생긴 것이 가장 큰 성과였다.

예를들면 오끼나와 헤노코마을 농성은 후텐마기지를 이설하는 것을 반대하는 투쟁이었는데 이 투쟁이 일본에서는 가장 중요한 평화투쟁으로 부각돼있다. 유엔사 후방기지인 후텐마기지의 철수문제는 유엔사 후방기지가 철수될 때 유엔사 체계가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기회가 됐다.

□ 일본에서의 일정은 어떠했나?

■ 7월 23일 오사카에 도착했고, 오사카에서 향후 일정을 협의해 오끼나와에서 걷기를 진행하는 것으로 합의해서 25일 오끼나와로 가서 8월 3일까지 걷기명상을 진행했다. 특히 헤노코마을 농성장에서 25,26일을 지냈다.

다시 오사카로 돌아와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열린 국제원수폭금지대회에 참석했다. 중간중간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의 학살지를 둘러볼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개인적으로 의미가 깊었고 유엔사 후방기지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와 연관된 기지 몇 군데를 돌아봤던 것이 큰 성과였다.

오끼나와 미군감시, “망원경에서 1분 1초도 눈 안떼”

▶일본에서 많은 평화운동가들을 만나 유엔사 문제를 알렸다는 이시우 작가.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직접 만나본 일본 평화운동가들과 평화운동은 어떠했나?

■ 이미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평화운동을 한 분들이 많았고, 어떤 분들은 조선(한국)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활동해온 분들이 있었다. 평화운동 각 주제들에 대해 대단한 식견과 전문성이 있었다. 그러나 교수진영과 단체가 뚜렷하게 분리되어 있는 것이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다. 교수들이 참여하려 하지 않은 점이 특기할 점이다.

그런 전문성과 사상적 일관성, 예를들면 맑스사상이라든가를 일관되게 사상적 지침으로 가져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맑스주의가 아니어도 나름의 사상적 지침을 갖고 수 십년동안 흔들림없이 맑스주의자는 맑스주의자로, 비맑스주의자는 비맑스주의자로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는 점이 우리와 크게 다른 점이다.

진보적인 성향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맑스주의 혁명가로 자신을 소개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상대적으로 북한에 대한 인식은 일반적인 일본인들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호감 같은 것은 있는데 사상적으로는 주체사상을 변형, 변종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느껴졌고 맑스주의에 비해 우선 잘 몰랐다.

□ 일본 평화활동에서 배울 바는?

■ 전문성과 치열성인데, 한동안 평화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축적된 자료가 개인이든 단체든 상당히 많았다.

특히 오끼나와 같은 경우는 기지에 대한 감시활동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진행되고 있었고 사람이 찾아가도 말은 하면서도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고 단 1분, 1초도 놓치지 않고 감시하는 치열성을 보이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제가 가서 전문적인 정보도 많이 드렸는데 치열성은 있는데 전반적인 맥락에 있어서 전문성, 탄약고 문제라든가 무기 재배치 문제라든가 전문적인 영역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치열성과 전문성이 결합되면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는 데 저도, 그쪽 단체활동가도 공감했다.

일본 활동가들은 일차 자료에 대한 중요성을 중시하고 있고, 또 하나는 우리와 조금 달리 느껴진 것은 수동적인 전략이 아닌 적극적인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이다. 현재 일본 평화운동의 최대쟁점은 헌법 9조 사수였는데, 이라크파병과 한반도 전쟁에의 자위대 개입문제 등에 대해서 개별적 사안을 방어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종합적 주제, 즉 헌법을 사수한다는 점에서 접근하는 주동적인 전략이 배울만한 점이었다.

□ 유엔사 문제에 대한 일본 활동가들의 입장은?

■ 일본 평화운동가는 역사나 주제에 대해 전문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엔사 문제에 대해 전무할 정도로 지식이 없다. 특히 주일미군과 유엔사의 문제에 대해 제가 이야기하면 놀라워 했고, 자위대가 유엔사의 작전통제에 의해서 동원될 수 있는 교환문서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 무척 충격을 받고 있다.

▶거대한 구조에 맞선 연약한 홀몸의 그에게 가끔 동반자들이 함께해 뜻을 나눴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51년 9월 요시다-애치슨 사이에 유엔사 지원에 대한 교환공문이 있다. 이 교환문서에 의거해 한국전쟁 당시에 원산상륙작전시 기뢰(수뢰)를 제거하기 위해서 일본인 기뢰를 제거하는 소해기술자들을 모아서 소해부대를 구성해서 참전시켰다.

지금도 그와 똑같이 자위대가 한국전쟁에 유엔사의 작전통제 아래 자동으로 참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사법제를 통하지 않고서도 이미 가능하게 돼 있다.

군사적으로는 한미일 사이에 통신코드가 이미 일치돼 있다고 하는 것이 요도호 사건 때 이미 증명됐다. 요도호가 납치돼 평양쪽으로 가고 있는데 한미일 군사통신망이 일시에 가동돼 이미 한미일 삼각 군사구조는 완성돼 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지금 현재 일본에서의 최대의 평화운동 주제는 헌법 9조 사수인데, 한국헌법 5조와 마찬가지로 유엔사라는 존재가 있는 한 평화헌법은 이미 무효라고 하는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일정한 반향이 있었다.

캠프이와꾸니 화학무기 증거 발견

□ 이번 일본에서의 걷기명상과 연대활동중 새롭게 포착된 사실이 있나?

■ 히로시마현 소재 미 해병대 캠프이와꾸니에서 화학무기가 있음을 증명하는 증거를 발견했다. 이와꾸니해병대가 한국 독수리훈련에 참가하는 부대라는 점에서 한국과 분리할 수 없는 의미가 있다.

1972년에 ‘레드햇(붉은모자)작전’ 시행을 통해서 오끼나와에 있었던 독가스, 샤린가스, 머스터드, 수포제 등 극치사상 독가스를 하와이에 있는 존스톤환초에 이동시킨 사실이 있었는데 그때 이전시킨 목록에서 빠진 화학무기가 현재 일본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구체적 물증과 함께 이후 기자회견을 통해 밝힐 예정이다.

이런 문제들을 통해서 유엔사의 문제가 비단 후방기지 7개의 문제일뿐 아니라 내용상 긴밀하게 후방기지 이외의 기지와 연결돼 있다는 것을 느꼈다. 캠프이와꾸니는 7개 유엔사 후방기지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한미연합훈련에 참여하는 부대이다.

▶길을 걸으며 매일 쓸 글을 구상했다는 이시우 작가.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최근 주한, 주일미군 재배치 등 미국의 해외주둔미군재배치(GPR) 문제가 현안이 되고 있는데.

■ 발표들은 단순한 구상이란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중요한 것은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추상적인 언론의 추측보도 보다도 실질적인 부대, 물자, 병력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언론에 잘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사실이 있다. 올해 3월 독수리훈련 시기 평택항에 들어왔던 MPS(사전배치선단)이 부산 하얄리야부대 MWR(MoralWelfearRecrearion)의 시설과 물자를 사세보 기지에 하역시키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최근 조선일보가 보도했던 이라크에 차출되는 것처럼 위장됐던 팔라딘 자주포 같은 것들도 현재 한국을 빠져나간 상태인 점, 이런 구체적인 사실, 병력과 물자의 이동을 확인하는 것이 훨씬 가치있는 정보로 존중되어야 한다. 팔라딘 자주포는 이라크로 갈 필요가 없는 물자이다. 게릴라부대를 향해 대포를 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키티호크 미항모, 8월초 동해배치 확인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사세보기지에서 8월 6일, 유조선 한 척과 보급지원함 한 척이 동해로 이동한 사실이 확인됐고, 이미 4,5일 전에 요코스카가 모항인 키티호크 항모가 8월 초에 동해에 배치된 사실이 확인됐다. 항모전단의 일부로 8월 6일 두 함정이 출발한 것이다.

상당히 주목할만한 일인데, 한미연합훈련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전력공백을 메우기 위한 차원도 아닌데 이런 이동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특이한 사례이다.

신문에 보도된 바 있는 알래스카 엘멘도프 공군기지 소속 F15-E 비행대대가 한반도에 비슷한 시기에 배치된 것도 항모전단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일상적이지 않은 배치가 이뤄지고 있고 상당한 병력과 물자이동이 이뤄지고 있는 상태이다.
일부는 보도됐지만 사세보 건은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안이다. 일본에서 사세보기지를 직접 감시하는 시노자키 선생으로부터 직접 확인한 이야기다.

□ 일본으로 출발하기 전 유엔사 체제의 변화가 임박한 조짐을 느꼈다고 했는데.

■ 아직까지 믿고 있다. 구조적으로 이러한 흐름을 놓고 볼때 유엔사 문제는 백악관측과 미군부측 사이에 큰 딜레마로, 갈등요인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판단된다.

국내 평화운동, “전략적 사고 필요하다”

□ 2차 걷기명상에 나설 10월까지 준비할 내용은?

■ 걷는 동안은 공부하고 연구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진행된 상황들을 공부하고 검토할 시간들이 필요하고, 그리고 일본에 가서 겪었던 여러 가지 문제점, 인터넷 사용의 문제, 통역의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는 준비를 10월까지 해야할 일로 생각하고 있다.

▶10월, 그는 다시 일본의 어느 곳을 걷고 있을 것이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건강 상태는?

■ 좋다. 그러나 아직은 잘 모르겠다. 발바닥에 가끔 통증이 오는데 일시적인 것인지 잘 모르겠다.

□ 다녀와서 주변이나 가족들에게서 어떤 말을 들었나?

■ 8.15행사 직전에 도착해 8.15행사에 결합했는데 주위분들이 꽤 많이 안부를 묻고 이 사실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집안식구들의 관심도 정치, 군사문제에 상당히 높아지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 국내 평화단체에 하고 싶은 말은?

■ 제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주제넘는 일이다. 개인적으로 생각드는 바가 있다면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지 않나 많이 생각했다. 현재 수동적으로 미국이나 정부를 통해서 터져나오고 있는 사안에 대해 수동적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 주동적으로 의제를 설정하고 다른 세력을 견인할 수 있는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유엔사 문제는 전략적으로 갈수록 단결이 커질 수 있고 상대는 분열될 수 있는 주제라는 점에서 유엔사 문제에 대해서 특별히 전략적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제안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