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몽항쟁의 유라시아적 성격과 삼별초2005/11/23

대몽항쟁의 유라시아적 성격과 삼별초

이시우

삼별초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대몽항쟁의 유라시아적 성격을 간파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승천포 역사순례를 통해 본 바와 같다.

삼별초 항쟁은 지정학적 전략과 항쟁의 주체가 결합될 때 만이 민족의 자존을 지킬 수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이 셋을 합해서 삼별초라 했다. 고려가 강화도로 서울을 옮기고 몽골과 맞서 싸울 때, 삼별초는 강화도 수비와 대몽항쟁의 주력이었다.

30년 세월을 한결같이 몽골에 맞섰던 고려 조정이 항복을 결정한 것은 1259년이다. 그래도 개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십여 년을 더 견딘다. 1270년, 고려 원종은 개경 환도를 결정하고 삼별초의 해산을 명한다. 완전한 항복인 것이다. 원종은 몽골을 둘러싼 유라시아 정세를 고려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였지만 그의 관심은 민족의 자존보다도 정권의 안정에 있었고 결국 이는 항쟁의 포기로 결과 되었다. 정권이 백성의 항쟁의지를 버릴 때 백성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삼별초는 정권의 최측근이고 정권이 자신의 기반이었지만 정권의 의지를 부정하고 백성의 편에 홀연히 서게된다. 이 과정의 복잡한 사회심리학을 삼별초 지도부의 새로운 권력욕으로, 그로인한 권력투쟁으로 성격 지을수도 있고, 궁지에 몰린 친위세력이 처벌의 위기에서 일으킨 반란이자 몸부림으로 해석할 수 도 있었다.

그러나 그 복잡한 내면의 사회학이야 어떻든 정권의 친위대였던 삼별초는 항쟁의 중심에 선 백성의 새로운 권력기관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이것은 해석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들은 몽골에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한다. 항복해 버린 조정의 나약함을 비판하며 본격적인 항쟁의 깃발을 곧추 세운다. 그들의 항전은 진도에서 그리고 제주도에서 계속된다.

쉼없는 대몽항쟁 선포를 통해 그들이 더 많이 싸워야 했던 것은 공교롭게도 몽골군만이 아닌 고려조정의 관군들이었다. 몽골을 중심으로 한 유라시아의 지정전략을 통찰 할 지정전략가가 삼별초에는 없었다. 주체의 항쟁력 뿐 아니라 남송과 일본, 나아가서는 유럽의 국가들과 연대세력을 형성하고 전선을 칠 수 있는 능력까지 겸비하진 못했던 것이다. 제국을 건설하는 지배자들에게 가장 좋은 조건은 제국에 저항할 나라들이 제각각 흩어져 있어 대제국에 항거한들 쉽게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관리 하는 것이다.

피제국들이 단결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정보를 막고 교류를 막는 것이다. 삼별초도 결국 그러한 제국의 통치틀을 극복하지 못했다. 삼별초의 결의만으로 무너뜨리기에 몽골은 너무나 큰 제국이었다. 원종의 지정학적 지식과 삼별초의 항쟁이 결합되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오늘의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거울로 삼아야 겠다.

지정전략과 항쟁의 주체가 결합된다고 해서 무조건 승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몽골이 대제국을 건설하기까지의 문화적 저력을 능가할 수 있는 새로운 저력이 만들어 질 때 최종적으로 몽골은 극복될 것 이었다. 그러나 지정전략도 새로운 문화적 대안과 질서도 항쟁하지 않으면서 만들어지진 않는다. 목숨을 건 비약을 통해서만이 항쟁도 지정전략도 문화도 새롭게 창조되기 때문이다. 비록 역사적 한계 앞에서 실패 했다 해도 삼별초가 우리에게 빛나는 것은 바로 그 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