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학파2007/12/22

강화학파

이시우

조선조중기 사상사의 흐름을 세가지로 갈래를 잡으라면 송시열의 노론을 중심으로 굳어진 조선성리학, 정제두의 양명학, 임성주의 녹문학이라 하겠다. 노론의 조선성리학은 애초 이이의 철학이 지향했던 개혁적 성격이 완전히 탈색되고 보수적이고 때론 역사적 반동의 양상으로까지 발전해 갔다. 서양철학의 분류개념으로 본다면 객관관념철학을 대표한다. 정제두의 양명학은 안산에서 강화로 이어지며 가학으로서 자리잡게 되는데 기존의 주자학과 조선성리학으로부터 양공을 받는 재야의 입장에 설 수 밖에 없었으나 성리학을 대신할 진보적인 철학은 분명 아니었다. 그럼에도 200년 가학을 이어갈 정도의 진정성이 있었으며 그것은 여러방면에서 꽃피워진다. 주관관념철학으로 크게 분류될 수 있다. 녹문학은 학파나 세력으로 치면 가장 작고 그 영향력 또한 논할바가 못 되지만 암흑의 중세에 피어오른 불꽃처럼 진보철학의 맥을 확인시켜준다. 충남 공주와 예산의 중간지점인 신양 녹문리에서 임성주, 임정주, 임윤지당 3남매가 이룬 가학으로서 그치고 말았지만 유물론철학으로 분류될 독특한 경지와 투철함이 있다.
정제두의 강화양명학은 원래의 양명학과 같이 인간의 ‘양지’에 호소한다. 명분이 아닌 인간의 양심에 기초한 울림과 그에따른 실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루터의 양심법이론과 비교된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기초에 더해 조선의 강화도란 상황에서 가해진 변형은 주자학과의 묘한 절충을 발견케 한다. 어쨌거나 강화학파가 몰두한 성찰과제는 대략 다섯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우리 민족의 주체사관 확립이다. 이광사의 아들인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을 저술하여 양명학에 바탕을 둔 객관적 사관을 수립했으며 역시 이광사의 아들인 이충익의 ‘군자지화’는 당화의 역사적 배경을 고찰하여 그 원인을 천착하여 이에 대한 반성을 촉구했던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이면백의 ‘감서’로 계승되었고 감서의 ‘무론’을 통해 조선이 문약화한 원인을 밝혔고 ‘학론’에서 당화의 원인을 규명하였으며 ‘예론‘에서 송리학의 허위의식을 공박하여 이에대한 반성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계속 그의 아들 이시원의 국조문헌 백여권을 남기게 하였고 그의 손자 이건창에 의해 ’당의통략‘ 2권으로 집약되어 소론계의 입장에서 당화의 원인을 밝힌 정치사의 일단으로 엿볼 수 있도록 했다. 정인보는 ’조선사연구‘에서 ’얼‘을 ’양지‘와 같은 뜻으로 파악하고 양명학을 민족의식과 연결시켜려 했다.
둘째는, 정음(우리말) 연구의 새장을 열었다는 것이다. 이광사의 ‘오음정서’를 비롯하여 이긍익, 이충익이 연 구로 이어졌고 특히 유희는 ‘언문지’를 통해 사성의 불필요성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이 방면의 획기적인 연구성과로 주목된다.
셋째로 서화분야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윤순의 서예는 이광사에게 계승되어 원교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창조하였다. 이긍익, 이충익등도 서화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또한 정문승은 산수화로 이름을 날렸다.
넷째로 문학을 통한 민족의식의 각성을 강조한 점이다. 신탁의 시, 이건창의 기사문, 이충익,이건승, 이건방의 문장은 뛰어난 업적과 성취를 이루었다.
다섯째로 학문연구의 새로운 기풍을 조성한 점이다. 17~18세기 정부의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분위기를 극복하고 역사, 언어, 농학, 실학등의 자기 발견에 노력을 기울여 새로운 학풍을 발전시켰다. 정후일의 수학연구, 정문승의 농서, 이상학의 정약용연구등과 같이 성리학과는 다른 연구주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학문적 정신은 실학으로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