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회조작사건 논란에 대한 생각2008/02/12

일심회조작사건 논란에 대한 생각

1월21일 임진각에서

이시우
땅을 껴안으며 ‘국가보안법’에 대한 새로운 결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의도를 출발한지 긴 시간이 지나서야 임진각에 닿았다. 임진각까지 닿아도 새로운 결이 찾아지지 않으면 다시 고성을 향해가고, 고성에 닿아도 깨달음이 없으면 부산까지 간다는 생각이었다. 임진각에 도착한 월요일 새로운 결은커녕 갈수록 무거워지는 마음의 짐만 얹어져 있음을 확인해야 했다. 찬바람부는 벌판위에 선지 2달이 넘었다. 칼바람과 눈보라는 내가 가는 앞길에서만 불어오는게 아니라 등뒤에서도 비수처럼 날아와 꽂히고 있었다.

눈 내린 임진각, 머리위로 날아가는 쇠기러기의 귀에 댄 듯 생생한 날개짓 소리를 들으며 문득 내머리에 스쳐간 것은 아기장수전설이었다. 콩쥐팥쥐 못지않게 많은 마을에 전승되는 설화중에 아기장수설화가 있다. 마을마다 줄거리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등에 날개가 달린 비범한 아이가 태어난다. 이 아이는 장수가 되어 나라를 구한다는 운명도 동반한다. 부모나 친척들은 아기가 역적으로 자라나 가족이나 마을에 해를 끼칠까 두려워하여 돌로 아기를 눌러 죽이려한다. 나라에서는 날개달린 아이를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관군들이 이 아이를 찾아 나선다. 쉽게 죽지 않아서 낙심해 있는 부모에게 아기가 자기 겨드랑이에 붙은 날개를 떼도록 알려주어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인다. 자기를 죽일 수 밖에 없는 부모의 심정까지 이해하는 아이는 부모를 원망하는 대신 죽음으로서 그들의 마음을 끌어안은 것이다. 그리고 죽기전에 소원이 있으니 자기를 땅에 묻을 때 콩 한말과 팥 한말을 같이 묻어 달라고 한다. 부모는 그 소원까지 마다할 수 없었다. 관군들이 들이닥치고 아기의 무덤을 파헤쳐 죽음을 확인하려 할 때 땅속에 묻혀있던 아기는 장수가 되어 나타나고 팥은 군졸이 되고 콩은 군마가 되어 관군들을 단번에 물리친다. 그러나 2차로 몰려온 관군들에 의해 아기장수는 죽음을 맞이한다.

관에 의한 탄압과 구속에 대해서는 민감한 우리들도 우리 스스로에 의한 소외와 관성에 대해선 둔감하다. 기성제도에서의 성공과 생존이란 현실 앞에 제도에서 버림받은 아기장수를 죽여야만 내가 산다는 반복되는 역사의 상황에 비극이 있다.
그러나 비극의 주인공인 아기장수는 아무나 되지 않는다. 세가지의 요소를 갖추어야 비로소 아기장수가 된다. 첫째는 자신이 가장 위기에 처한 존재이면서 그렇게 만든 나약한 민중을 원망하지 않고 끌어안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상상을 초월한 덕성과 사랑만이 아닌 영활한 지혜를 발휘하여 상황을 역전시키는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셋째는 드러나지 않지만 이 모든 것의 바탕에 민중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신뢰, 원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덕과 지혜와 이상을 가지고 있기에 아기장수의 좌절과 실패는 숭고한 비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기장수는 민중을 위해 혁명을 도모할 운명을 갖고 태어나지만 민중은 그런 아기장수를 죽인다. 자신의 목표와 지향인 존재로부터 환영받기는커녕 배신과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아기장수는 항상 비극의 인물이다. 박혁거세나 고주몽과 같은 성공신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설정인 것이다. 궁예가 충신이었던 왕건에 의해, 임꺽정이 심복이었던 서림에 의해, 신돌석이 외척이었던 김상렬형제들에 의해, 김구가 한독당당원인 안두희에 의해 배신당한 것과 같다.
너를 죽여야 우리가 산다는 부모의 마음은 먼 곳을 내다보고 전망을 추스릴 여유가 없는 나약하고 조급한 민중의 전형이다. 아기장수는 자신의 목표이자 자신을 배신하고 죽이는 민중에게 구걸하지고 반격하지도 않고 오히려 끌어안는다. 신돌석은 자신을 도끼로 내리치는 외가동생들에게 “나를 죽이려는 자는 누구냐?”고 죽어가며 묻는다. 네가 어찌 나를 죽일 수 있느냐고 원망하지 않고 너의 뒤에 있는 진정한 적이 누구인가를 돌아보도록 한 것이다. 자기를 죽이는 민중을 눈앞에 보면서도 그를 끌어안은 것이다. 벼랑끝에서 밀기 전에 고민하는 민중을 위해 오히려 먼저 뛰어내린다. 노골적으로 배신하는 사람과 마음이 나약해서 배신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차이는 큰 것이지만 그 결과는 같다는 점에서 기회주의는 정치적문제이다. 역사의 아기장수들은 그 기회주의를 폭로하고 공격하기보다 끌어안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아기장수는 전설이 되지 않는다.
역사의 아기장수는 반드시 나약한 민중 뒤에 숨은 상대를 물리치고 민중을 자신의 편으로 더 단단히 결집시킬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 지혜를 실현시키는 중심인물은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든 바로 그 민중이다. 나뭇꾼과 선녀의 마지막장면에서 하늘나라로 데려다줄 백마에서 내려올 수도 없고, 땅위의 민중인 어머니를 외면할 수도 없는 나약하고 동요하는 민중인 나뭇꾼에게 어머니가 건네준 ‘뜨거운 팥죽’이 그러하고, 아기장수가 함께 묻어달라고 한 ‘콩한말과 팥한말’이 그러하다.
언제나 혁명가를 제 손으로 죽여야 하는 민중의 마음은 나약하고 여리며 조급하다. 그 조급한 와중에도 아기장수와 어머니의 청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어 콩과 팥을 묻어주고 뜨거운팥죽을 받아든다. 그 하찮아 보였던 소박한 청이 결국 민중도 살리고 아기장수도 살린다. 그러나 그 지혜가 책에 나와 있겠는가? 누가 가르쳐주었겠는가? 무엇인가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꼼수라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민중이 아니다. 오로지 아기장수 스스로가 가장 위태로운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결단을 내림으로서 비로소 민중을 움직일 수 있고 소통되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목숨을 건 비약이다.

아기장수에게 이런 요소가 있을 때만이 민중들에게 기적을 보여줄 수 있다. 민중은 말로 설득되지 않는다. 변화된 현실을 보고 자각한다. 교리로 단결을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은 소모임뿐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누가 아기장수이고 누가 그를 죽이는 부모인지는 당사자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내 마음을 언 바윗돌처럼 짓누르는 것은 일심회조작사건 관계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이다. 일심회사건이란 이름부터 잘못된 것이다. 일심회는 존재하지 않는 조직임이 증명되어 무죄판결이 났음에도 우리는 아직도 일심회‘조작’사건을 일심회사건으로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을 철폐시키지 못한 결과 일심회조작사건이 일어났고 우리는 다시 그 결과만을 가지고 그들을 탓하며 두 번, 세 번 죽이려하고 있다. 나 역시 이 조작사건이 떠들썩하게 시작되었을 때 그들에게 무관심했었다. 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무엇인가 문제될만한 일을 했겠지라고 생각했다. 얼마뒤에 최화섭김맹규선생님이 구속되었을 때 대선을 앞두고 어설픈 공안정국이 시작되나보다 했다. 그리고 뜻밖에도 다음은 내 차례였다. 생면부지의 그들과 서울구치소운동장에서 처음 만났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나의 사건과 일심회조작사건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감옥에 있어야한다면 나 역시 감옥에 있어야 하고, 내가 자유의 몸이라면 그들 역시 자유의 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복잡한 사정이 그간에 있었는지를 모르는 내가 이렇다 저렇다 할 여지는 없다. 그러나 현재의 급하고 절박한 상황 때문에 아기장수를 죽여야 하는 부모의 처지가 되어서는 안될 일이다. 감옥안에 있는 이들이 몸으로 만들어야 할 상황역전의 지혜를 만들어낼 아기장수가 될 형편도 아닐 터이다.

내가 마침 임진각에 도착한 날은 김신조부대의 청와대기습사건이 일어난지 40주년되는 날인 1월21일이었다. 정전체제와 원한체제가 최고절정에 다다랐던 1968년으로부터 40년이 흘렀다. 다음날 우연히 알았는데 이날 재향군인회는 직원전체연대서명으로 ‘간첩이시우’에게 법정최고형의 엄벌에 처해 달라는 탄원서를 재판부에 제출하였다. 검찰에선 단 한번도 나에 대해 간첩죄로 기소한적 조차 없지만 그들에게 국가보안법사범은 곧 간첩이었다. 국가보안법을 사수하겠다는 사람들에겐 장민호나 이시우나 자주파나 평등파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런 이들을 향해 우리는 장민호와 다르다, 우리는 이정훈과 다르다, 우리는 최기영과 다르다, 그들을 이렇게 내손으로 두 번 세 번이고 죽일테니 믿어달라고 하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고 슬픈 일인가? 이 어려운 상황에서 감옥안에 있는 사람이나 밖에 있는 사람이나 더 이상 아기장수의 부모가 되지 말아야겠다. 상대가 죽이려하기 전에 그를 믿고 벼랑끝에서 몸을 던지며, 콩한말과 팥한말의 지혜를 발휘할 아기장수가 되어야겠다. 목숨을 건 비약을 통해서만 얻어질 지혜이다. 그리하여 비장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활기차고 즐거운 분위기로 전변시킬 돈오와 원려를 보여주길 바란다.
눈을 몰고온 먹구름이 걷히고 문득 고개드니 쾌청한 하늘에 햇볕이 따스하다. 적멸의 공간에 들어선 듯 고요해진 의자에 앉아 철책을 끌어안고 흐르는 임진강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