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변호사를 위한 변론2008/03/10

이정희변호사를 위한 변론

사진가 이시우

2007년은 내게 개인사가 사라진 한해였다. 당도하기 힘들 것 같은 긴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내곁엔 이정희변호사님이 계셨다. 완전무죄라는 국가보안법 초유의 판결을 이끌어낸 1등공신으로 이정희 변호사를 꼽는데 나의 아내 김은옥은 이의를 달지 않는다.
이정희변호사님과의 인연을 만들어 주신 것은 최병모변호사님이었다. 전염병자를 안타까워하면서도 피하듯 사람들로부터 묘한 거리가 생기고 있을 때 내 손을 잡아주시고 이제 막 수배가 시작된 나에게 집으로 초대하여 따뜻한 차를 대접해 주신 최변호사님의 호의를 나는 잊지 못한다. 그러나 최변호사님은 왠일인지 주심변호사로 이정희 변호사님을 소개해주셨다. 나로선 초면인 이정희변호사가 경찰청뿐아니라 국방부 그리고 용산의 미군사령부와 미대사관까지 연관된 이 사건을 과연 감당하실수가 있을지 사실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뒤에 이정희 변호사가 강금실전장관을 지지하는 여성계 인물로 거론된 사실도 알게 되면서 투박한 셈법으로 ‘민중’보다는 ‘시민’쪽에 가까운 분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정희 변호사의 남편인 심재환변호사님은 오히려 구면이었으나 무료변론을 해주시는 변호사님께 아쉬운소리를 다 할 수는 없는 처지여서 그냥 그렇게 갈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어쨌든 이정희변호사님과의 시작은 그랬다. 구속보다 고달픈 수배생활 동안 나는 변호사님과 실무적인 일로 몇 번의 전화통화를 했다. 어린애처럼 하소연하고 싶은 것이 많다는 수배생활 동안 마음을 열고 소상한 이야기를 다할 수 없었고, 실무적인 사항을 벗어나지 않는 통화였지만 자상하고 당당한 말투는 왠지 항상 따뜻한 위로가 되었다.
수배생활은 길지 않았다. 나는 서너달만에 옥인동 대공분실에서 이정희 변호사님을 대면해야했다. 항상 잔잔히 웃으며 상대방을 마술처럼 편하게 하는 모습은 나에게 만이 아니라 공안경찰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구속적부심재판에 나온 이정희변호사님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한 경찰은 이변호사님이 차도 없이 무거운 자료를 들고 걸어다니며 온화한표정을 잃지 않는 것에 대해 존경을 표하기까지 했다. 균형감을 잃지 않는 일관됨은 변호인들이라면 또 법정에 들어선 방청객이라면 갖춰야 할 예의 중의 하나로 학습되어 있지만, 검사는 그런 태도를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직업상의 태도라 할지라도 검사는 몸에 베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부드럽지만 나의 법적권리를 옹호하는 데 있어서 변호사님은 물러섬이 없었다. 적대감을 표하지 않으면서도 경찰과 검찰을 궁지로 몰아세우는 그 능력이 참으로 신기하기까지 했다. 나는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역설을 보았다.

구속기간내내 나의 단식과 묵비는 경찰이나 검찰뿐아니라 가족과 지인들에게도 긴장의 축이었다. 경찰서에서 구치소로 이감을 가고 나서도 나는 단식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특별면회로 찾아오시는 국회의원과 인사들이 있었다. 단식으로 하루하루 여위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나의 마음 또한 편치 않았다. 단식보다 힘든 것이 단식에 대한 거센 반대에 직면하는 것이었다. 그럴때에도 이정희 변호사님은 나의 사상과 양심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확인하면서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동정과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았다. 잔잔한 조언은 있어도 강요된 충고는 없었다. 끝없이 심신이 약해져가고 있는 내게, 그러나 물러설수도 없는 내게 그것은 가장 필요한 배려였다. 하루하루 고난과 위기에 직면한 나에게 힘든 숙제를 내주며 재판을 이끌어가야 했던 변호사님의 처지는 지금와서 생각하면 가혹한 것이었다. 그러나 변호사님의 준비는 항상 치밀했고 재판전체를 연출하는 기획력은 탁월한 상상력과 열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특히 이번 재판에서 가장 많은 기억에 남는 사진재판이 그랬다. 재판정에서 사진을 영사기로 보여주며 이 재판을 예술창작에 대한 재판으로 끌어가자는 제안은 기발하고 멋진 발상이었지만 현실화 시키기엔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감옥에서 오직 나의 기억에만 의존하여 밖에 흩어져 있는 사진자료를 수집하고 편집하여야 하는 일이었다. 나의 흐릿한 기억에 변호사님이 얼마나 손발이 되어 움직여주실까가 의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불구속재판을 받는 상태라해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옥담안의 기억과 옥담 밖의 증거사진과 자료들을 연결할 유일한 신경망은 변호사님뿐이었다. 방대한 자료를 반입하고 그중에서 사진을 고르고 설명을 육필로 쓰고, 지워가며, 시안을 내보내면 변호사님은 밤을 세워가며 사진을 찾고, 사진재판의 시안을 준비해오셨다. 그렇게 문구와 사진수정 작업 거치기를 몇차례. 재판전에 내손에는 사진재판의 시안이 주어졌고, 재판당일 재판정에는 빔프로젝트가 설치되어 나는 이변호사님과 호흡을 맞춰가며 긴시간이 소요된 미학강의를 진행했다. 나로서도 방청객으로서도 가장 감동적인 재판이었다. 출소 후 이 재판에 대한 인상이 매우 강렬했음을 여러분의 방청객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그날 구치소 독방으로 돌아와서 나는 탈진하여 쓰러졌지만 이같은 상황에서 사진재판을 기획하고 기어이 성사시키고만 이변호사님이 참으로 대단하게 생각되었다. 부드러움속에 숨어있는 담대한 용기와 투철함을 나는 보기 시작했다.
한번은 경찰수사자료가 감옥안으로 들어온 날이 있었다. 경찰수사자료를 당사자인 내가 봐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것을 감옥으로 반입하는 것은 변호사님의 의무이다. 그러나 그 양이 문제였다. 각 천쪽내외의 총20여권에 달하는 수사자료는 내 키를 넘는 분량이었다. 구치소측으로서도 사람이 운반하는 것은 불가능하여 밀것에 실어 2번을 오가야 했다. 복사비만해도 어림잡아 100만원이 넘을 터였다. 분량이 너무 많으니 필요한 일부만 들여보내고자 하는 유혹이 들 법도 했을텐데 변호사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묵묵히 복사해온 수사자료를 차로 실어와서 반입해 주셨다. 좁은 독방을 더욱 비좁게 만든 수사자료더미가 짐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자부심을 갖게 한 것은 아마도 그런 성의에 공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재판은 검사가 재판때마다 엄살을 부렸듯 방대했다. 국가보안법사례의 백화점이라 할정도로 거의 모든 조항이 걸려 있었다. 열아홉분의 민변변호사님들이 하나씩 분야를 나누어 공부하는데만도 엄청난 시간을 들여야 했다. 미학으로부터 유엔사와 미군의 무기체계에 이르기까지 주심변호사는 이 모든 것을 꿰고 있어야 했으며 전체 변호사님들을 진두지휘해야 했다. 민변미군문제위원회소속 변호사님들도 어디하나 빠지지 않는 전문가들이었지만 내 사건은 그동안 다루었던 주제가 아니어서 모두 새로이 학습이 필요한 분야였다. 변호사님들과의 구치소 접견이 학습토론과 때론 강의로 이루어진 것도 이런이유에서 였다. 이 변호사님은 이 모두에 대해 정확한 내용과 변론의 쟁점을 독파하고 있었으며 검사가 심혈을 기울여 입증하려했던 미군기지 기밀탐지여부에 대해 허무하게 무너뜨렸다. 놀라운 지적능력과 집중력이 아닐 수 없었다. 포기할 줄 모르는 집중력은 보석신청에서도 드러났다. 첫 번째 보석신청이 기각되었다. 그러나 이변호사님은 포기하지 않고 바뀐 재판부에 다시 보석신청을 냈다. 검찰의 기세로 보아서 그것은 기대를 걸만한 일이 아니었다. 안해보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정도가 최선의 기대치였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단하나라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치열함으로 두 번째 보석신청에 도전했고 결국은 보석허가가 받아들여졌다. 나는 석방되었다. 밖에서 수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결국 이것을 마무리 지은 것은 법적절차였고 사회운동과 법의 톱니바퀴 같은 연관성을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포기될 뻔 한 일이었다. 검사는 보석에 대해서까지 항고를 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법원에 재항고까지 하였다. 그 정도로 검사가 받은 충격은 큰 것이었다.

재판 후반부에 이르자 변호인단내에서는 무죄를 자신하는 분위기가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 즈음에 나는 다시 ‘국가보안법에 대한 삼보일배명상’에 들어가 있었다. 이정희 변호사는 긴장을 놓지 않았다. 삼보일배명상을 하고 있는 나에게 또다시 숙제를 주문하셨다. 미처 생각지 못한, 그리고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사로운 증거자료까지 만들 것을 요구하셨다. 그 요청은 언제나 부드럽고 온화하며 사려 깊었지만 단호했다. 그리고 이 기간동안 많은 변호사님들이 내심 포기하고 있었던 이적표현물소지죄를 뒤집을 수 있는 사례가 발견되었다. 치열함과 지구력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성과였다.

검사가 10년을 구형하자 많은 사람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선고에서 집행유예만 나와도 다행일 것이라는 분위기로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우리는 그만큼 정세를 수동적으로 보고 있었고 그러한 수동성은 패배주의에 감염되기 십상이었다. 진인사하고서야 대천명할 수 있는 법. 최선을 다하지 않고 천명을 기다리는 자에겐 패배주의가 깃들기 마련이다. 재판이 다 끝났고 이젠 기다리는 일만 남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이변호사님은 끝없이 검찰에 대한 반박증거를 준비했고 구형이 있던 날에도 방대한 증거자료를 재판부에 제출하며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이에 놀란 검사는 선고공판 전에 허겁지겁 새로운 증거자료를 제출했지만 검사가 제출한 증거는 채택되지 않았다. 이미 시간이 늦었기 때문이다. 주동이 우리에게 있었고, 검사는 우리의 틀에 끌려오고 있었다. 재판부는 ‘군사기밀누출등 국가보안법사건’에서 ‘민통선평화기행의 저자 이시우 사건’으로 사건의 제목을 바꾸어 판결문을 발표했다. 결과는 모든 공소사실에 대해 완전무죄였다. 변호사님께 이 기쁜소식을 알리자 이변호사님은 반가워하면서도 예의 차분한 목소리로 축하의 인사를 전했다. 이 사건의 시작부터 보았던 균형감과 사려깊음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변치 않고 유지되고 있었다. 놀라운 훈련의 결과이거나 천성이 아니면 설명하기 힘든 조화의 이미지는 이정희변호사에게서만 보이는 독특함이다.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서의 대중성은 우선은 친근감이며, 친할뿐 아니라 어머니 같은 사려깊음이며, 깊은 배려를 험한 세상에서 실현할 높은 지적능력이며, 지성을 유지할 몸에 배인 성실함이며, 어떤 순간에도 포기 하지 않는 투철함이며, 외로움과 소외를 능히 견디어낼 인내심이며, 이 모든 것을 갖추고도 결여해선 안될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만이 감동을 이끌어내고 행동을 전염시키기 때문이다. 이정희변호사님은 그 모두를 갖추고 있는 보기드문 인격의 소유자이다. 나는 이제 ‘국가보안법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낙관의 근거에는 이정희변호사님의 역할이 자리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나는 선거홍보용사진이 필요하다는 급한 부탁을 받고 사진을 찍기 위해 이정희 변호사를 만났다. 마침 나의 사진기가 고장나 있었기에 보좌진이 사진기를 빌려와야 했고, 촬영장소도 기자회견 후에 다음 일정까지 머무를 수 밖에 없는 국회만이 유일하게 가능했다. 준비에 필요한 시간을 빼면 주어진 시간은 1시간이 채 안되었다. 그러나 사진은 나의 재판에서 그렇게 다투었듯이 사실이 아닌 모형이다. 국민들이 사랑하고 싶은 모형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열악한 조건이었지만 나는 너무나 이정희변호사를 잘 알기에 사진작업은 어렵기는커녕 즐거웠다. 그리고 이 사진들은 내가 대중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이정희변호사의 형상이다. 100가지 중에 99가지를 채우고도 1가지를 놓치면 생명력을 잃고 마는 것이 사진이다. 100중에 99을 채우고도 1가지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 사람. 1년여 동안 내가 본 이정희 변호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