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통선평화기행서평-이희재2006/02/01 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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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을 향하여

늦가을, 밀물과 썰물이 뒤엉키듯 지난 여름의 열기와 아직 속셈을 알 수 없는 한기가 이제 막 첫인사를 나누는 우수의 계절. 하릴없는 다섯 사람이 만났다. 하릴없다지만 모두들 지난 여름의 광염과 무언가에 지쳐 있었으며 잠시라도 그 무언가를 잊기 위해 자리를 함께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새 차를 구입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름하여 시승식. 그러나 시승식치곤 낯설고 우울했다. 모두가 이즈음 한가롭게 시승식이나 할 처지가 아니었으며 나아가 서로 두 사람씩은 친분이 있었으나 다섯 사람 모두는 초면이었다. 직업도 다양했다. 다도茶道 강사에서 지방 신문사 편집기자, 변변치 못한 작가, 트럼펫 연주자 등 전문 직종이면서도 전문직이라고 할 수 없는 뭔가 어설프고 수줍은 이들의 집합체였다. 단지 그들을 무겁게 확정짓는 한 가지 요건이 있었으니 나이였다. 모두들 세상을 잘못 살거나 어설프게 살아온 듯 했지만 이미 나이는 중년에 들어서 원하든 원치 않든 또 그 무언가에 대한 책임을 지거나 지기 위해 끌려 다녀야 할 나이였다.
한동안 우리는 동행이 무색하리만큼 침묵 속에 자유로를 달렸다. 자유로는 인간이 자유롭게 달려 나갈 수 있는 도로인가 아니면 자유에 대하여 묵상하는 도로인가. 우리는 전자를 택했다. 겉으로는 거침없이 달려 나갔다. 도심을 빠져나오며 느끼는 상쾌함도 상승효과를 냈다. 강물이 폭을 넓히며 바다로 향하듯이 우리도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조금은 맛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우수의 계절, 그렇게 자유와 안식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짧지 않은 삶을 살아온 우리는 이미 마음껏 달릴 수 있는 자유와 마음껏 소리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해 버린 지 오래였다. 한동안 창밖 풍경을 즐기며 어색한 침묵을 감내하던 한 사람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 번 세게 밟아 보지요.”
말의 의미와 다르게 목소리는 낮게 깔리고 있었다.
“감시카메라 있어요.”
단 5초의 간격도 유지하지 않은 채 누군가 목소리를 높였다. 말의 의미는 우울했지만 목소리는 단호하고 기운찼다. 그만큼 우리는 긍정보다는 부정에 능숙하고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두 마디의 대화가 다시 우리를 깊은 침묵 속으로 몰아넣었다.
멀리 한강 하구를 돌아 비행기가 날고 있었다. 푸른 하늘과 뭉개구름을 배경으로 한 비행기의 동선은 부드럽고도 안정감이 있어 보였다. 비행기를 보자 얼마 전 외국 여행을 다녀올 때가 기억났다. 나는 자료 수집 차 일 주일 간 몽고를 방문했었다. 10여 년 만에 떠나보는 해외여행이었다. 그 탓에 아이들에게도 비행기란 실감이 나지 않는 텔레비전 속의 물건에 불과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집으로 전화를 거니 막내가 전화를 받았다. 철없는 아이는 하루의 이별도 아쉬운지 전화기에 매달리듯 나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 잘 갔어? ”
“응, 그래. 그런데 오는 도중에 문제가 좀 생겨서..”
“무슨 문제가 생겼어?”
“비행기가 날다가 하늘에서 멈추어 버렸단다. ”
이별의 기간이 그리 길지 않기에 농담부터 흘러나왔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그게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나 보다. 내 얘기를 듣자마자 돌아서 제 에미에게 소리쳤다.
“엄마 아빠가 타고 가던 비행기가 하늘에서 멈추었대!”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됐대?”
설것이를 하던 아내도 한 수 거들었다.
“아빠 그래서 어떻게 했어?”
아이가 중간에서 중계방송을 했다.
“응, 아빠가 손으로 휘저어서 겨우겨우 날아왔어.”
“엄마! 아빠가 날개짓으로 겨우겨우 날아갔대”
“응, 그거 참 힘드셨겠구나.”
“…..”
아이는 잠시 중간에서 혼돈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게 날개짓을 하며 훨훨 하늘을 날순 없을까. 우리는 한두 번 그런 생각에 빠진다. 그러나 감시카메라처럼 이런 생각은 곧 꼬리를 감추고 만다. 그렇게 날아서 어디를 갈 것인가. 과연 내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면 나는 어디로 날아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런 대책 없는 좌절감과 이미 머릿속 깊이, 뼛속 깊이 주입된 우리의 관례가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한다. 우리는 무작정 달려나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아마 그래서도 안 될 존재일 것이다. 우리라는 말 속에는 이미 우리가 함께 지켜나가야 할 규칙이 존재하니까. 규칙 중에는 철조망도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우리를 위한 답시고 만들어 놓은 규율에는 포함되지 않는 재료가 없다.
민통선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거기가 끝이었다. 그곳이 우리가 다다를 수 있는 세상의 전부였다. 세상의 끝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의 한 날개는 북녘을 적시고 강의 한 날개는 남녘을 적시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강이 걸치고 있는 땅을 하나라고 말하지 못했다. 강 건너는 갈 수 없는 세계의 처음이자 갈 수 있는 세계가 바라보는 마지막 산야였다.

“그는 민통선 곳곳에서 고달픈 한국현대사와 직면한다. 조기와 꽃게어장으로 유명한 백령도·연평도에서는 임경업 장군에 얽힌 이야기와 심청의 미학, 서해교전, 그리고 NLL, 영해문제와 만난다. 강화도의 단군과 고인돌에서는 민족의 미학을 발견하고, 항몽전쟁에서 내려오는 강화의 저항정신과 강화도 북부의 민통선에 대해서 언급한다. 게다가 향토방위대라는 민간조직이 한국전쟁 당시 저지른 양민학살이란 끔찍하고도 서글픈 역사와 만난다. 자유로를 지나 만나는 파주에서 그는 놀랄 만한 주장 하나를 편다. 정전협정을 근거로 한강 하구가 중립지역도 비무장지대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는 버젓이 ‘중립지역’ ‘비무장지대’란 표지가 붙어 있다. 그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한강의 문명사적 의의와 통일 이후 한강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까지 그의 고민은 폭주기관차처럼 불을 뿜는다. 반구정伴鷗亭과 화석정花石亭에서는 방촌 황희와 율곡 이이에 대해 공과를 가린 후, 자유의 다리, 자유의 마을, 판문점과 공동경비구역으로 향한다. 그곳의 미군기지와 대인지뢰 피해자들을 거쳐 그의 이야기는 최근 연결공사가 한창인 경의선으로 이어진다. 주한미군 문제는 파주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다룬다. 특히 연천-동두천-의정부로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집요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꼼꼼하게 개별 미군기지의 역할과 주한미군의 전략에 대해 언급한다. 최근 미 2사단의 재배치와 관련해 주한미군이 한국사회에 얼마나 깊게 뿌리내렸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비무장지대 남쪽으로만 1백만 개, 후방지역에 7만 개 이상이 매설되어 있는 대인지뢰 문제도 마찬가지로 여러 곳에 걸쳐 다루고 있다. 파주·연천·양구·고성 등 그가 들른 민통선 곳곳에 피해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1997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조디 윌리엄즈(Jody Williams)와 국제대인지뢰금지캠페인(ICBL)과 함께 한국의 대인지뢰 사용을 금지하는 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이밖에도 화천에서 만난 가도가도 끝없는 듯한 강원도의 길에서는 굽이친 우리 현대사를 떠올리며, 양구 평화의 댐에서는 정권의 ‘한판 쇼’에 놀아난 씁쓸한 기억을 곱씹는다. 또 고성의 동해 일출을 보며, 어둠과 빛의 미학을 다시금 되새긴다. 요즘 연결공사가 한창인 동해북부선 현장과 강릉 앞바다에 좌초한 북의 잠수함 승무원들이 사망한 칠성산 억새밭에서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절규하듯 갈망한다. ”

이시우의 <민통선 평화기행>리뷰 중에서

자유롭지 않은 몸으로 자유로를 타고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컴퓨터가 세상을 향한 통로다. 민통선이라고 치니 사진가이자 평화운동가인 이시우의 기행서 [민통선 평화기행](창비)이 다가온다. 백령도에서 고성까지, 10년 발품으로 쓴 진지하고 용기 있는 기행서이다. 돌아오는 길에 기러기떼가 강을 건너고 있었다. [민통선 평화기행]을 따라가며 기러기처럼, 비행기의 동체를 밀어내듯 자유롭게 한번 날아봐야겠다. 내일은 책방으로 가야겠다.

이희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