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창욱목사님의 ‘유엔군사령부’ 읽기

소성리 주일예배(25. 8. 17) 성령강림절 후 열 번째 주일
누가 12:49-56 “불을 지르러 왔다”

지난주에 이시우의 < 유엔군사령부>를 읽었다. 840쪽 벽돌 책이다. 그전부터 유엔사를 꼭 들여다보고 싶었다. 유엔과 상관없으면서도 버젓이 유엔 간판을 달고 있는 조직. 1975년 유엔총회 결의에 따라 유엔사 해체 결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에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단체. 남북관계 교류 협력사업에 결정적으로 훼방을 놓아 일을 그르치게 만드는 존재. 한반도 평화에 암적인 존재. 이 말 많고 논란투성이인 조직에 대해 알고 싶었다.

저자 이시우는 사진작가다. 사진작가가 이런 학술책을 썼다는 게 놀랍다. 책 뒤에 참고문헌이 실려 있는데, 이 방대한 자료들을 다 소화해서 책을 쓴 것이다. 저자는 비무장지대와 민통선을 소재로 사진작업을 해 왔다. 그러면서 그 마을들이 겪는 고통들, 예를 들면, 대인지뢰로 다리를 잃은 피해자들,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로 신음하는 주민들을 보면서 근본문제가 무엇일까 고민이 깊어갔다고 한다. 결론은 유엔군사령부라는 답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나서 유엔사의 정체를 근본부터 파헤치는 작업으로 이 책을 쓴 것이다.

이 책은 총 이부로 구성했는데 1부는 유엔체계에 대하여 2부는 유엔군사령부 창설이다. 유엔체계는 유엔군사령부를 서술하기 위한 빌드업이다. 이 책의 특징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부터 7월 7일 통합군사령부(뒤에 유엔군사령부로 둔갑) 창설 결의안을 내기까지 12일간 유엔에서 일어난 일들을 실시간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12일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에 유엔의 당사자들, 특히 미국이 무슨 말, 글, 작업을 했는지에 대해 그야말로 샅샅이 소개한다.

유엔사 정체에 관한 핵심적인 서술은 이렇다. 7월 7일 유엔안보리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미국 주도하의 통합군사령부 설치를 권고하는 결의안을 제출한다. 그 뒤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7월 25일 미 육군성이 최초 보고서를 제출한다. 보고서 제목에서 1950년 7월 7일 안보리 결의에 따른 (미국정부) 통합군사령부임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8월 17일 2차 보고서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1차 보고서에서 정확히 명기되었던 통합군사령부란 명칭이 20일 만에 2차 보고에서는 유엔군사령부로 슬쩍 바꿔치기 된 것이다. 또한 통합군사령부 앞에 미국 정부 소속을 의미하는 단어(USG)도 사라졌다. 누가 봐도 미국이 아닌 유엔의 사령부라는 느낌이 드는 이 보고서가 공식문서로 지정되면서 미국은 ‘통합군사령부’를 ‘유엔군사령부’로 교묘히 명칭 변경하는 데 성공했다. 2차 보고서 이래로 지금까지 미국은 유엔군사령부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미국은 1차 보고서를 통해 위법적인 군사개입을 합리화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2차 보고서를 통해서는 역시 안보리 결의에 존재하지 않는 유엔군사령부를 탄생시켰다. 이 두 보고서에 담긴 미국의 숨은 의도를 주의 깊게 살핀 나라가 없었으므로 이들 보고서가 공식문서로 채택되는 데에는 어떤 반대 또한 없었다.(책 642-652쪽)

내가 이 책에서 절통하게 느낀 대목은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작전지휘권을 이양하는 내용이다. 한 나라의 주권과 운명을 좌우하는 작전지휘권이 이양된 과정을 보노라면 절망의 탄식을 금할 수가 없다. 요약한 과정을 보자.

6월 26일. 맥아더, 미 합참으로부터 주한미군 작전통제권을 부여받음. 곧이어 맥아더는 ‘전방지휘소 겸 주한연락단’의 처치준장에게 작전통제권 위임함.(실질적으로 미 육군준장이 한국의 군사주권을 좌우함.)
처치준장,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만나 합동사령부 구성을 제안하고 즉석에서 채병덕의 동의를 받음. 문서 한 장 없이 미군의 일개 전선사령관과 한국군 총참모총장이 구두합의함. 합동사령부라고 하지만 지휘권이 동등하지 않았음.

6월 28일. 무초대사, 대전에 있는 이승만 찾아가 한국군 지휘권을 요구함.(대전협정) 이미 이승만은 알리지도 않고 서울에서 도망쳐서 무초에게 약점 잡힘.

6월 29일. 맥아더, 전쟁현황 파악하기 위해 한국에 옴. 이승만이 통역.
맥아더는 채병덕총참모장을 경질하고 정일권을 임명토록 함.(이미 국군통수권을 발휘하기 시작함.) 아울러 미군투입 전제조건으로 작전지휘권 이양을 요구함.

7월 1일. 이승만, 육해공군 총사령관인 정일권에게 맥아더의 작전지휘를 받도록 지시함. 채병덕의 결정에 이어 이승만 역시 개인적 결정으로 작전지휘권을 맥아더에게 이양함. 헌법상의 절차는 전혀 지켜지지 않음.
그리고 당일 이승만은 대전에서 부산으로 도망쳤다가 대구로 옮김.
지휘권 이양기에 필수적인 권한조정절차는 이승만이 도망감으로 인해 아무런 마찰없이 미국의 의도 아래 일방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7월 1일부터 처치 준장은 정일권 소장과 협의하면서 한국군을 본격 지휘한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타국 군대가 주권국의 군대를 통수권자와의 법적 합의 없이 지휘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7월 12일 주한미대사가 외무부 앞으로 < 주한미군의 관할권에 대한 한미협정> 각서를 보낸다.

7월 13일. 미 8군 사령부, 대구에서 군사령부 기능 수행. 작전지휘권 이양문제 검토. 육군본부도 대구 이전, 미 8군 사령부 인접에 위치, 합동회의.
7월 14일. 이승만, 구두로 정일권 총참모장에게 유엔군사령부 지휘를 받으라는 명령 하달. 주한 미대사 통하여 맥아더 원수에게 정식으로 국군 지휘권 이양한다는 서한 전달.
7월 16일. 맥아더, 무초대사 통한 답신으로 수락의 뜻을 전함.
7월 17일. 맥아더, 미 8군 사령관에게 한국 지상군의 작전지휘권 재이양.

미국은 미군이 아닌 유엔군이 북한군과 싸운다는 외피를 쓰기 위해 유엔기가 도착한 다음 날인 7월 15일, 유엔군 병력의 총사령관 명의로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공식적으로 이양받는 형식을 취함.

여기서 쟁점은 이승만이 넘긴 지휘권이 정확히 무엇이냐 하는 문제다.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보낸 한국군 통수권 이양 공한에는 ‘국군통수권’을 이양한다고 돼 있다. 그러나 무초대사가 이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는 ‘이 대통령이 부여한 작전지휘권’이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이를 미국 정부 입장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그러나 맥아더의 입장은 달랐다. 무초가 이승만에게 전달한 맥아더 답신에는 7월 15일자 공한에 의하여 이 대통령이 편지에서 취한 조치는 ‘일체의 국군통수권 이양’이다. 이처럼 무초와 맥아더의 입장은 조율되지 않았는데, 7월 25일 유엔안보리에 보고할 때, 무초의 편지는 삭제되었고 맥아더의 편지만 실렸다. 즉 유엔에 보고된 내용은 맥아더가 국군통수권을 이양받았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미국 정부의 최종입장이 됐다.

실제 전쟁 과정에서 맥아더와 후임 사령관들은 군정권과 군령권을 모두 행사했다. 군정은 군을 조직, 유지, 관리하는 양병작용(군사관리작용)이며, 군령이란 군을 현실적으로 지휘, 명령하고 통솔하는 용병작용(군사작전작용)이다. 대통령 통수권의 절반인 군령권이 넘어간 상황에서 군정권마저 맥아더에게 장악된 것이다.

이런 정황들로 볼 때 미국이 남한을 지원한 것은 순수한 동맹 우의로만 보기 힘든 것이다. 장면 대사가 트루먼에게 요청했던 것이 긴급무기지원이었던 것을 염두에 둔다면, 미국의 전면 개입은 분명 과도한 것이었다.(미군이 한국에 진입한 것도 한국정부가 정식요청한 것이 아니다.) 미군 투입의 전제조건으로 주권사항인 국군통수권까지 요구한 것 역시 미국의 의도에 의한 과도한 것일 수 있다. 또한 국군통수권 이양 서한 전까지 이승만 명령은 합의문서도 없이 구두로 이루어졌다. 7월 14일 국군통수권 이양 서한을 조약으로 간주한다면 이는 사후입법 혹은 소급입법에 해당한다. 맥아더 사령관 하에 들어간 한국군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은 결코 문서로 공식화되어 있지도 않았다.

한국은 지상군, 해군, 공군의 작전지휘권을 모조리 이양해 버렸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작전지휘권이 이양된 부대의 범위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위임이 아닌 이양이란 점에 또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떤 나라도 자국군의 지휘권을 전적으로 다른 나라에 이양해준 나라는 찾아볼 수 없다.

이상이 내가 < 유엔군사령부>를 읽고 통절히 느낀 주제들이다. 하나는 유엔사의 정체가 교묘한 문서장난의 결과라는 것, 또 하나는 국군통수권 이양이라는 한국의 절대 주권을 완전 졸속으로 넘긴 것이다. 미국은 유엔을 간판으로 앞세워서 한국에서 자기들의 패권을 마음껏 구사했다. 그리고 현재도 구사하고 있다. 오늘 성서 표현대로 말하자면 이렇게 불의하고 기울어진 체제, 또는 체계를 80년 지속하는 현실은 속히 불살라서 없애 버려야 한다.

오늘 성서에서 예수는 매우 충격적인 말씀을 한다.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나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리고 분열의 양상으로 한 가족의 파탄을 말씀한다. 도대체 이 극단적인 말씀은 무슨 뜻인가?
오늘 유엔군사령부가 한국을 지배하게 된 처음 때 일을 자세히 이야기했는데, 바로 이런 상황에 대한 말씀으로 본다. 1세기 로마제국이 지배하는 현실의 불의, 모순, 민중학대에 대한 예수의 통렬한 외침이다.

이토록 굽어지고 왜곡된 질서를 그대로 둔 채, 우리가 어떻게 해방을 살 수 있겠는가. 1세기에 예수가 외쳤고, 그의 후예들이 외친 것처럼, 오늘 우리도 외쳐야 한다. 분단을 악용하는 미국의 과도한 강점을 불 지르자고. 이 왜곡된 체제를 분열시키고 참된 평화를 이루자고.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