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정신요약2004/11/14 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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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정신”

그의 초기저작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과 자본주의 정신]에서 베버는 근대자본주의가 도덕과는 무관한 개인적 이득추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무로서의 일에 대한 엄격한 책임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논문의 문제제기는 자본주의 정신의 기원을 캘빈교에서 거의 정확하게 발전되어진 종교윤리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곧 자본주의 정신을 비롯해 천직이라는 관념의 토대인 합리적 생활방식은 기독교 금욕주의 정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저서는 엥겔스가 프로테스탄티즘을 자본주의 초기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경제적 변동의 이데올로기적 반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것과는 다른 방식에서 접근한 것으로 그는 이러한 사실을 분석하기 위해 역사성에 기초한 이념형을 사용하였다(예: 캘빈주의, 자본주의 정신 등).
다음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과 자본주의 정신] 중에서 서두에 해당되는 “문제”의 종파와 계층, 자본주의정신 부분을 요약 발췌한 것이다.

막스 베버. “문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박성수 옮김. 1988.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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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파와 계층

지방의 직업 통계를 보면 특히 한 가지 현상이 빈번하게 나타나는데, 그 현상은 자본 소유자와 높은 기술적, 또는 상인적 훈련을 받은 구성원들이 매우 현저한 프로테스탄트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곧 다음과 같은 역사적 질문이 발생한다. 경제적으로 발전된 지역이 특별히 종교개혁을 받아들일 소지를 가졌던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리고 이에 대한 답변은 우선 생각하듯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볼 때 우리는 일관된 이유를 찾지 못한다. 따라서 행동상의 차이를 낳는 원인은 대체적으로 종파가 그 때 그 때 처하는 외적인 역사적-정치적 상황에서가 아니라 지속적인 내적 특성에서 찾아져야만 한다.

피상적인 관찰과 몇 가지 근대적 인상에 입각해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즉 카톨릭의 강한 비세속성, 카톨릭의 최고 이상인 금욕적 성격이 신자들로 하여금 현세의 재물에 대해 보다 강한 무관심을 보이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 설명은 오늘날 두 종파가 상대방을 평가하는 데 대중적으로 사용하는 도식과 일치한다.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는 이러한 견해를 카톨릭적 삶의 영위가 갖는 금욕적 이상에 대한 비판에 이용하며 카톨릭 측은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한 모든 삶의 내용의 세속화 결과로 주장되는 물질주의에 대한 비난으로 말한다.

그러나 과거에는 상황이 달랐다. 즉 영국, 네덜란드, 미국의 청교도들에게는 주지하다시피 현세적 쾌락과는 정반대 되는 것이 특징적이었으며 나중에 다시 보게 되겠지만 이는 우리가 매우 중요시해야 할 그들의 특징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러한 평행관계가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소위!) 카톨릭의 비세속성이나 프로테스탄티즘의 유물론적인 세속성 따위처럼 애매한 표상으로는 이 문제 해결에 아무런 출발점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몇 가지 매우 외적인 측면에서 시작한다면 실제로 기독교 신앙의 가장 내면적인 형태의 대표자들 중 상당수가 상인권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이 두드러진다. 특히 경건파 중 가장 진지한 신자들의 대다수가 이 상인권 출신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사실이 상인직업에 맞지 않는 내면적 본성에 배금주의가 역작용한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분명히 아시지(Assisi)의 성 프란체스코의 경우처럼 여러 경건주의자들이 스스로 개종의 과정을 그렇게 설명해 왔다. 마찬가지로 세실 로즈까지 이르는 대단한 자본주의 기업가들이 목사집안 출신이라는 독특한 현상도 청소년기의 금욕적 교육에 대한 일종의 반동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방식은 뛰어난 자본주의적 영리감각이, 전체 삶을 관통하면서 지배하는 가장 강렬한 형태의 경건성과 함께 한 사람 내부에 그리고 한 집단 내부에 병존하고 있는 경우에는 부적절하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는 드문 것이 아니고 역사상 중요한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분파의 모든 집단에 특징적인 것이다. 특히 캘빈주의는 그것이 등장하는 모든 곳에서 이러한 결합을 나타낸다.

이미 스페인 사람들은 이단, 즉 네덜란드의 캘빈주의가 상업적 정신을 고취시켰음을 알고 있었고 이미 페티 경이 네덜란드의 자본주의적 비약의 이유에 대해 논의하면서 제시했던 견해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고타인(Gothein)은 캘빈주의자들의 산재된 거주지역이 자본주의 경제의 묘판이었음을 정당하게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경건파 신도들도 강렬한 신앙과 마찬가지로 강력히 발달된 영리감각과 성공을 결합시켰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예비적인 논의인 이 글에서는 더 이상의 사례를 제시하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말한 몇 가지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사실이 충분히 지적되기 때문이다. 즉 노동의 정신 또는 진보의 정신, 아니면 그 무엇이라 부르든 간에 프로테스탄티즘이 환기시켰다고 하는 그 정신은 세속성이나 아니면 계몽주의적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루터, 캘빈, 녹스, 보에 등의 초기 프로테스탄티즘은 오늘날 진보라 부르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오늘날 가장 극단적인 종교가들도 없어서는 안될 것으로 인정하는 근대적 삶의 모든 측면에 대해 초기의 프로테스탄티즘 정신의 일정한 특징과 근대의 자본주의적 문화 사이에 어떤 내적인 친화성을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좋건 나쁘건 간에 그러한 친화성을 소위 그것의 다소간 유물론적인 혹은 반금욕론적인 세속성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순수한 종교적 성격에서 찾아야만 한다.

자본주의 정신

본 연구의 제목에는 약간 야심적인 듯이 보이는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그 개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러한 역사적 개념은 내용에 있어 자신의 개별적인 특성 때문에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현상에 관련되는 것이므로, 최근차+종차라는 도식에 따라 정의될 수는 없고 오히려 역사적 현실에서 취해질 개별적 구성요소로부터 점차로 합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개념에 대한 확정적인 파악은 탐구의 시초가 아니라 탐구의 마지막에서 얻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 자리에서 자본주의 정신으로 뜻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 가장 잘 정식화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논의가 진행됨에 따라, 그리고 그 논의의 본질적인 결과가 지적하는 바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 추진력에 대한 문제는 우선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화폐재고의 원천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의 발달의 문제였다. 그 정신이 개화하여 작용하는 곳에서는 그 정신이 화폐재고를 자신의 작용수단으로 변형시켰다는 것이며 그 반대가 아니다.

현재의 경제에 고유한 구조와 기업형태를 가진 지금과 같은 정치, 사법, 유통제도 아래서는 흔히 말해지듯 자본주의 정신은 순수한 적의의 산물로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른다. 자본주의적 경제질서는 화폐증식의 직업에 대한 이러한 몰두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몰두는 현 경제구조에 매우 적합하고 경제적 생존경쟁에서의 승리와 밀접히 관련된 재화취급태도이기 때문에, 그러한 화폐증식적 생활방식이 현재 어떤 통일적 세계관과 필연적 관련이 있다고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다. 즉 그러한 생활방식은 더 이상 어떤 종교적 힘에 의해 승인 받을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교회규범에 의한 경제생활의 간섭은 국가 간섭과 마찬가지로 장애라고 여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상업정책적, 사회정책적 이해관계의 상황이 세계관을 결정하는 것이다.

생활방식을 자본주의적인 성공조건에 적응시키지 못한 자는 몰락하거나 아니면 성공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근대 자본주의가 승리를 거두고 이전의 발판에서 해방된 뒤의 현상이다. 한때 자본주의가, 형성중이던 근대적 국가권력과 결탁하여 중세적 경제질서의 옛 형태를 부수고 나왔다면 같은 현상이 종교적 세력에 대한 근대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그러했는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러했는지 바로 이 자리에서 탐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화폐취득을 인간에게 의무적인 자기 목적, 즉 직업(소명)으로 여기는 것은 모든 시대의 윤리감각과 상치되는 것임은 증명을 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껏해야 윤리적으로 관용되는 것에 불과하던 이러한 태도가 하나의 직업(소명)이 된 것일까?

일반적으로 근대 경제의 기본 동기는 경제적 합리주의라고 표현된다. 이 말이 생산과정을 과학적 관점 아래서 분화시킴으로써 자연적으로 주어진 인간의 유기체적인 한계에서 생산과정을 해방시킨 노동생산성의 확대를 뜻한다면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이 합리화 과정은 분명히 근대 시민사회의 생활의 이상 중 중요한 부분을 조건짓는다. 즉 인간의 물질적 재화의 공급을 합리적으로 형성하기 위한 작업을 자본주의 정신의 대표자들은 분명히 자신들의 생애에 주어진 노동에 방향을 제시해 주는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본주의 정신의 발달은 합리주의의 전체적 발전의 부분현상으로 간단히 이해될 수 있고 또 궁극적인 삶의 문제에 대한 합리주의적 원리의 입장에서 도출되어야 하는 듯이 보인다. 그렇게 되면 프로테스탄티즘은 단지 그것이 순수한 합리주의적 인생관의 설익은 결실 따위의 역할을 행한 한에서만 역사적인 고찰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진지한 탐구를 해보면, 즉시 그러한 단순한 문제 설정은 합리주의의 역사가 결코 여러 생활영역에서 평행적으로 진전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부적절한 것임이 드러난다.

순수한 세속적 합리적 철학은 18세기에 단지 자본주의적으로 매우 발달한 나라에서만 발생한 것이 결코 아니며 주로 그런 나라에서 발생한 것도 아니다. 삶은 매우 다양한 궁극적 관점 아래서 그리고 매우 다양한 방향으로 합리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탐구해야 할 것은 우리의 자본주의 문화의 특징적 구성요소 중 하나였고, 지금도 그러한 요소인 그 직업사상과 직업노동에의 헌신을 낳은 구체적인 합리적 사고와 삶의 형식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책에서 우리의 관심 대상은 모든 직업개념에 내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특히 이 직업개념에 내재되어 있는 그 비합리적 요소의 근원을 찾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