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적 문예관을 통해서 본 : 사진론2001/10/01

자주적 문예관을 통해서 본 : 사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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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기를 통해 본다는 것

어렸을적 우리집엔 작은 반자동 사진기 하나가 있었다. 사진기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신기하고 좋아서 장롱속에 있던 사진기를 몰래 꺼내 가지고 놀곤 하였다. 나중엔 찍지만 말고 보기만 하라고 내주셨다. 셔터를 눌러보진 못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사진기는 신기했다. 사진기 창을 통해 들여다 보는 순간 약간 어두어 지면서 방금전 눈으로 보던 세상보다 더 차분해지고 뭔가 무게도 있어지는 것 같은 묘한 흥분, 또 이 작은 창 구멍을 통해 보면 세상은 전혀 다른 공간이 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 그 차이가 무엇일까 궁금하여 사진기 창에서 눈을 떼어 실제 장면을 바라보고 다시 사진기 창에 눈을 대보고, 같은 공간인데 사진기 창틀을 통해 보는 공간은 뭔가 낯설고 신기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사진기의 창은 현실을 돌출 시킨다. 사진기 창을 통해 바라보기는 현실의 새로운 결을 발견하게 한다. 분명 구체적이고 생생한 현실이지만 현실과 꼭 같지만은 않은 현실, 선택된 현실이다. 사람의 선택은 무한하다. 왜냐하면 사람의 욕구가 무한하기 때문이다. 세계의 결(이치)도 무한하다. 왜냐하면 세계는 무한히 다양하게 연관되어 있고 무한히 다양한 연관에 따라 무한히 다양한 법칙(이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기는 현실세계를 무한하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무한한 선택권은 본다는 것의 조건이지 내용은 아니다. 무엇을 바라보는가, 바라본다는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본다는 것은 그 감각의 절대적 우위 때문에 사고 활동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가치관, 관점, 세계관등. 사람은 사진기를 통해서 과연 무엇을 보는가? 결론부터 얘기하면 사람은 사진기를 통해 {사람}을 본다.

1) 사람과 사진
사람이 찍히지 않은 사진은 그럼 뭔가라고 묻고 싶은 사람을 위해 그것을 먼저 해명해야할 것 같다. 여기 진달래 사진을 보자? 진달래 꽃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나는 유일한 꽃이다. 꽃이 처음부터 미적 감상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인간이 수렵에서 농경으로 생활양식이 바뀌면서 생긴 변화중의 하나가 동물에서 식물로의 관심 이동이다. 식물의 유용성과 미감은 동시에 발생되어 갈수록 더 풍부화 되고 구체화 되었다. 같은 연분홍이라도 철쭉은 못먹지만 진달래는 혀가 잉크빛이 되도록 먹을수 있다. 보리고개를 넘기는데 진달래는 귀중한 구호식량역할을 했고 봄날의 화전놀이의 꽃전으로, 더욱 고도의 가공품인 두견주로 다양한 실용성을 주었다. 또한 진달래를 먹으면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이런 주술적인 발상은 신부의 연지곤지를 찍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진달래는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고 발아와 생육에 있어서 음지와 저온조건이 필요하기에 특히 산의 경사진 북쪽면에서 잘자란다.이런 특성 때문에 진달래는 강인한 생명력의 표상이 되었고, 무서운 겨울을 이기고 봄을 제일 먼저 알리는 꽃이라하여 거듭살이의 힘을 상징하기도 한다.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서 이같은 원형상징이 더욱 증폭 되었다고 본다. 더구나 빨치산 이후 우리의 역사에서는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수없이 죽어간 젊은 영혼들의 비장한 숭고미의 상징이 되엇다. 그래서 이영도는 이렇게 읊는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묏등마다
그날 쓰러져간 젊음같은 꽃 사태
열렬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진달래가 사진가에게 아름다운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수천년간 사람의 역사속에서 사람의 본성이 실현되는 과정의 표상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꽃에도 자연에도 사람의 본성적 능력이 전제되어 있기에 진달래를 찍는 것이다. 결국 사진가는 진달래라는 객관세계의 형상을 빌어 사람이 성취한 본성을 찍는 것이다. 본성이나 속성은 눈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사람은 은유나 표상을 통해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본성은 무엇인가?

2) 사람
그럼 사람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성은 역사적으로 획득된 것이다. 그것은 낡은 인간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간관으로 진출해 온 발달사 이기도 하다.

중세의 인간관

중세에 사람은 신을 자기와 동일시하였다. 예수나 석가는 분명 사람이었지만 중세에 와서 민중을 지배하는 신으로 만들어졌으며, 지배자의 정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신에 의해 사람이 지배되고 억압 받는데서 중세 사람들의 근원적 불행이 있었다.

근대의 인간관

근대는 중세를 극복한다. 합리주의와 혁명에 의해 봉건적 신을 극복한 사람들은 주체적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된 국민들은 개인들의 필요에 의해 국가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국가가 국민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국가의 질서와 법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국민이 아니었다. 그리고 개인을 국민으로 만들기 위해 봉건적 신분질서 대신에 교육이 강화 되었다. 학생들의 유니폼은 군인들의 유니폼처럼 국가적 질서체계의 상징이었다. 봉건적 신 대신에 근대는 국가를 지배이데올로기로 삼게 된 것이다. 국민은 스스로 만들었다고 생각한 국가에 의해 억압받고 소외되는 일이 일어났다.

노동운동의 인간관

국가와 자본에 의한 소외에 저항하여 자기의 주체성을 선언하고 나선 대표적인 사람들이 노동자다. 그리고 자신들의 결사체로 노동조합을 건설하게 되었다. 노조는 자본주와 저항하고 국가의 공권력에도 저항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노조운동은 계급투쟁과는 달리 경제투쟁으로 머물면서 주체의 형성에 실패한다. 격렬한 총파업 투쟁을하고 나서 인상된 임금은 자동차를 사고, 쥬라기공원을 보러가는데 소비된다. 결국 자본주의의 합리적 질서에 적응하고 관성화 된다. 노동운동이 진정한 주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투쟁뿐아니라 자신들의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제시해야 한다. 경제투쟁의 성과가 새로운 문화체계의 건설을 위한 자립의 토대가 될 때 노동운동은 저항의 주체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집단주의의 인간관

‘조직이 시키면 우리는 한다’는 담론은 경우에 따라서는 조직이 시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못하거나 안하는 무력한 개인들의 집단으로 표현될 수 있다. 개인이 죽은 조직과 집단은 전체주의이다. 나는 조직에게 무엇인가를 물어야할 뿐아니라, 나는 나에게 무엇인가에 대해서 물어야하며, 주체 간의 합리적 대화를 통해 집단의 힘이 발현되어야 한다.

탈현대적 인간관

큰 이야기에서 작은 이야기로, 역사와 집단에서, 문화와 개인으로의 이동은 권위주의적 자본질서에 대한 투쟁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문화적 대안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문화적 헤게모니의 포기를 위한 투쟁이란 점에서 주체를 형성하기 보다 주체를 해체시킨다.

자주적 인간관

국가나 사회, 질서나 조직에 일방적으로 편입되지 않으면서도 역사적으로 자기를 자각한 사람. 그에 기초하여 시대의 가장 그늘진 곳에서 사랑과 헌신을 실천하는 사람. 거리낌 없이 저항하면서도 합리적인 사람. 작지만 큰 개인. 우리는 그런 모습에서 인간성의 가능성을 본다.

2. 사진

선택은 반드시 뚜렸한 이유를 가지고 있을때도 있고 뭔지 모르지만 “그냥” 바라보는 경우도 있다. 앞의 경우는 논리적 태도를 뒤의 경우는 정서적 태도를 반영한다.
사진기로 바라보는 현실은 무대가 된다. 삼각대에 고정된 사진기는 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계속 관찰하고 있다. 보여주는 배우는 없지만 보는 관객(사진가)은 있다. 사진기에 의해 보여진다고 하는 사실은 그 장소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특별한 공간에 들어선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때는 예고 없는 이 폭력적 행위에 손으로 사진기를 가리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기도 하고, 잘 나오도록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사람마다 그 변화는 순간적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정서적 긴장이 발생한다.
이는 보고, 보여지는 사람간의 관계에서 생기는 긴장이다. 누구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은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은 이것을 합리화 시켜준다. 작품을 위해서, 아니면 신문 보도를 위해서, 시민 홍보 이전의 초상사진이 사진관에 스스로 찾아가서 공식적으로 미소짖고 모양새를 취하던 것에 비해, 구르마에 배경그림을 그려 끌고다니던 사진사는 공식적 사진관의 질서를 깨고 거리에 무대를 설치했다는 점에서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거리의 아무나를 상대로하는 이런 사진은 사진가가 임의로 스튜디오를 만드는 가설무대, 연습무대와도 같다. 자신이 현실이 아닌 무대에 들어왔다는 것을 문득 느끼는 순간의 쾌와 불쾌의 감정은 예를 들면 몰래 카메라에 당할때의 기분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러한 쾌와 불쾌는 그 무대가 공식화된 세련된 무대인가? 아니면 공식화 되지 않은 조잡한 무대인가?등에 의해 달라진다. 쾌와 불쾌는 얼핏보면 사회적 구조와 질서에 부합되는가 안되는가가 기준인 것처럼 보인다. 사진기가 제도가 된 것이다. 영화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사진처럼 사는것에 길들여져 있거나 길들여져 간다. 아니 보는 관객(사진가)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뭔가 보여주고 싶은 갈등에 순간 휩싸이는 지도 모른다. 여기서 찍는 사람의 입장에만 서 있으면 관음증과 다름없다. 찍는사람과 찍히는 사람이 어떻게 만나는가가 중요하다. 아무리 사진기를 통한 보기가 제도화 되어 있다 하더라도 사람간의 긴장감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사진기를 통한 보기가 보는 것의 내용은 아니다. 보는 것의 조건일 뿐이다. 보는 것의 내용은 사진기에 가려져 있는 사람간의 관계속에서 파악된다. 관계는 태도를 통해 표현된다. 우리는 사람과 관계 맺을 때 크게 4가지 태도를 갖는다. 추종하기, 배려하기, 눈치보기, 무시하기가 그것이다.
추종하기는 내가 나를 버리고 상대방과 동일시할 때 생긴다. 눈치보기는 나를 버리지도 상대의 주체를 인정하지도 못하는 긴장속에서 생긴다. 배려하기는 나의 주체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주체도 인정하며 연대를 통해 주체를 실현하려 할 때 생긴다. 무시하기는 나의 주체만 인정하고 상대방의 주체는 인정하지 않을때 생긴다. 그러나 이중에서 추종과 무시는 결국 비주체화란 점에서 뿌리를 같이한다. 추종은 동일시하려는 자아의식이 너무 강해 주체를 포기한 일방적 의존이란 점에서 그렇고, 무시는 자신의 주체를 실현할 대상과의 관계가 단절된 자아 의식이란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는 추종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어떤 대상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주체를 포기한 추종은 과거에는 신 때문에 사람을 버리게 했고, 근대에는 돈 때문에 사람을 버리게 했다. 이런 자리에 사람 사랑이 존재할 리 만무하다. 눈치는 주체화를 실현할 수 있는 상태라는 긍정성과 언제든지 비주체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기회주의라는 부정성이 혼돈되어 있는 상태이다. 하루는 배가 나온 상사한테 ‘그것도 인격’이라고 말해서 ‘그래도 자네 밖에 없어’하고 칭찬을 들었는데, 다음날엔 ‘아니 자네 날 놀리는 건가?’ 하고 꾸중을 듣는다. 눈치가 없어서 나의 주체가 무시 당하든 눈치껏 해서 나의 주체를 인정 받든 그 차이는 크지만 눈치 보는 상태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눈치보기는 나의 주체에 대한 확신과 대상 주체에 대한 믿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체에 대한 확신과 대상에 대한 믿음이 충만한 상태는 오직 배려하기 밖에 없다. 배려하기는 대상과의 연관속에서 나의 주체를 발견하고, 확대 실현 하기 위해 대상과 연대하게 한다. 나의 발전이 곧 대상의 발전인 상태. 이것이 바로 배려이며, 사랑과 평화이다. 사랑은 그래서 주체의 발견과 성장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사랑이 전제 되었을 때 눈치와 무시는 배려가 되고 추종은 존경이 된다. 사랑은 그래서 나를 개조하고 세상을 개조 할 뿐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개조하는 유일한 혁명이다. 평화는 평등과 조화이다. 배려하기에서만 평화는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최후의 목표로서 평화가 된다. 사람관계의 발전은 시대의 차원에서는 시대정신의 발전으로 나타난다. 사진의 본성도 이로부터 시대정신에서 찾아진다.

3. 사진의 본성

한 사물의 본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체계적 관점을 잃지 말아야 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세가지 방향에서 총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와 구조 기능의 측면이 그것이다. 역사란 사진이란 체계가 발생발전하는 과정을 말하며, 구조란 사진을 둘러싼 요소들의 연관관계이다. 기능이란 사진이란 체계가 외부체계에 대해서 수행하는 역할과 능력이다.

< 사진의 역사 >
1) 사진의 발생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처음부터 독립적인 예술형태로 분리 발전되는 경우란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 예술은 다른 예술형태와 혼돈된 미분화 상태를 거쳐, 분화되면서 형태적 독립성을 획득하게 되고 다시 다른 예술 형태와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종합화 되어가는 법칙성을 가지고 있다. 사진은 필름에 상을 정착시키는 기술의 성공을 기준으로 사진술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하나 이것은 처음 프랑스에서 사진술의 발명일을 국가적으로 발표, 공인하므로서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지금까지 사진의 발생을 이때로 통용되게 하는데서 역시 제도의 위력을 실감케 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필름 발명 이전에 그것 만큼이나 중요한 렌즈의 발명은 쉽게 묻어 버리는 오류를 낳는다. 이것은 사진 기술적 측면에서도 불완전한 규정임을 알 수 있다. 정보체계에 따르면 사진 기술은 가치 중립적이지 않으며 사진가와 감상자를 매개하는 채널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사진기술은 창작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정신과 밀접한 연관관계에 있게 된다. 일부에서 생각하듯이 사진기술로부터 사진적 세계관과 시대정신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정신적 요구와 창조능력의 발전으로부터 사진형태는 발전된다. 사진형태는 단순히 기술적 형식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생활로부터 창작과정과 내용과 형식, 작품이 존재하는 상황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렌즈의 낮은 심도에 의한 표현효과의 발견은 사진기술의 발전과정만으로는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사진기술의 발전으로치면 조리개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 입체사진술이다. 입체사진술이 사진발전의 주류를 차지하는데 성공했다면 사진의 역사는 몇군데 수정됐어야 했을 것이다. 기술상으로는 더 힘들고 어려운 기술임에도 왜 사진의 일반적인 표현방법으로 승인되는데는 실패했을까? 결론만 얘기하면 시대정신을 담을 수 있는 정도까지의 내용성을 갖는데 실패 했기 때문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기술적으로 별 것 아니었던 조리개나 가까운 거리의 피사체가 갖는 낮은 심도효과는 사진의 예술적 표현방법으로 자리 잡는다. 카메룬 이전에도 낮은 심도로 찍힌 사진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것이 본격적으로 사진의 표현방법으로 된 것은 카메룬의 전시회 이후이다. 렘브란트 자화상에 나타난 보는 방법의 변화는 곧장 카메룬을 비롯한 예술로서의 사진을 애타게 시도하던 작가들에게 깊은 공감을 일으켰고 자기 표현의 기준으로 되었다. 카메룬과 그의 동료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렘브란트가 표현하고자 했던 시대정신이었으며 형식이었다.
그럼 시대정신이 어떻게 사진을 미술이나 다른 예술 형태들로 부터 분화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을까 ?

2) 근대성과 사진의 분화과정

ㄱ) 합리주의정신과 사진의 분화

유럽 사회는(다빈치식으로 보는 방법으로부터) 렘브란트식 보는 방법으로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 사상적 배경에 근대정신(근대주의는 이데올로기가 된 정치이념이었다)이 있었다. 근대성, 근대정신은 무엇일까?
근대성이란 르네상스 운동으로부터 시작된 근대사회의 근원이 되는 사상적 흐름을 말한다. 다빈치가 르네상스 운동의 정신을 대변한다면 렘브란트는 종교개혁 운동의 정신을 대변한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으로 완성된 근대사회의 실천적 모습은 오히려 근대성이라기 보다는 계몽, 합리주의 등 정치 이데올로기화 한 근대주의 또는 자본주의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근대성의 핵심은 합리화와 주체화이다. 근대는 보편적 이성으로서 인간정신의 해방이라는 합리화와, 주관적 감성의 해방으로서 인간의지의 해방이라는 주체화를 동시에 요구했다. 전자는 르네상스에서 후자는 종교개혁에서 주요 관심사 였다.
17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의 모습을 보자. 렘브란트가 그린 <직물조합간부들>의 집단초상화에 나타나듯이 그들은 집단의 일원이라도 자기 모습을 후세에 전하고 싶어했다. 또한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는 공동의 노력에 참여하는 개인들이기도 했다. 신성이나 주술, 왕권 등에 의존하지 않고 주체의 의지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로부터 집단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집단에 대한 복종이라도, 그것이 자유가 될 수 있는 것은 종교개혁이 일구어낸 근대성의 성과이다. 예수는 그의 아버지에게 복종하지만 법이나 질서를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네덜란드의 집단 초상화의 유행은 그래서 종교개혁 정신의 실현이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들이 ‘나를 돕듯 남을 도울 수 있는’데에는 경제적 여유로 인한 여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여가는 터키에서 수입하고 개종시킨 튜울립을 네덜란드 최대의 시장으로 만들었다. 1637년 튜울립시장이 붕괴되면서 네덜란드의 경제도 흔들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유행한 여가 생활품목은 튜울립 대신 다양한 사치품이었다. 부르조아적 여가는 역사의 승리이면서 한계 였다. 초기에 그들을 주체로 이끌었던 자유는 갈수록 비속화 되어갔다. 자유행위의 반대는 강제된 행위가 아니라 타성적 행위이며 그 대표적인 것이 습관적 행위이다. 부르조아적 습관과 일상 생활은 대부분 습관적 행위를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데서 이뤄진다. 습관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고 자발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든 자발성을 구속하는 힘이다. 습관에 구속된 자아는 소외와 예속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잉여가치의 증대와 여가의 증대는 어느 시점에선가 개인주의화, 이기주의화 되어 갔던 것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근대정신을 정면으로 제기한 천재가 바로 렘브란트 였다. 그는 진실을 찾으며 경험에 호소하는 정신을 표현했다. 그는 성서를 열심히 연구했지만 항상 자기경험을 소재로 삼았다. 판화 <예수의 설교>에는 먹을 것을 주으러 가는 어린아이와 졸음을 억지로 참고있는 사람 등 이상화 되지 않은 현실의 다양한 인물에 대한 관대함과 배려가 표현되어 있다.
획일화된 이성이나 합리화에 편향되지 않고 이미 주어진 진리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의 힘과 판단으로 찾으려는 열렬한 탐구정신 이것이 렘브란트가 발견한 주체성이었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인간적 성실함은 이전 시기 모범이었던 영웅주의나 이상주의와 는 또 다른 정신적 힘 이었다. 렘브란트가 회화에서만이 아니라 당시의 지성사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던 것은 다른 부분과 비교해서 예술활동이 주체화에 기여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다. 렘브란트에 의해 표현된 시대정신은 진정한 근대성으로 하여 200년이 지난 뒤에 초상예술 사진의 부활을 맞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초상화를 대신하기 위한 초상사진의 유행정도로 보아선 안된다. 오히려 근대성이 관성화의 길로 접어드는 시대 상황에서 초기의 주체적 근대정신을 수용하려 한 사진가들의 노력으로 봐야 한다.
카메룬 등 19세기의 초상사진 작가들에게 렘브란트가 미친 영향은 다름아닌 탈권위, 탈절대를 지양하는 주체성, 근대성이었던 것이다.
보는 방법의 측면에서 합리주의 시대는 귀중한 성과 또 하나를 준비하고 있었다. 17세기 사람들에게 경험과 이성을 결합시킬 수 있는 것은 수학이라는 생각이 광범한 공감대를 이루고 있었다. 이때의 모든 철학자들은 또한 수학자들이기도 했다. 수학은 신을 대신한 새로운 신앙이 되었다. 다빈치가 그랬던 것처럼 데카르트도 열렬한 호기심으로 사색하고 또 의심 했다. 수학 신앙에서 우리는 렘브란트가 올라 선 주체의 방향이 이성과 보편적 진리로 환원 됨을 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합리화가 합리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 변형되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리화는 사진술의 전제가 되는 업적을 쌓았다. 그것은 빛이었다. 데카르트는 빛의 굴절을 연구했고, 호이겐스는 빛의 파동성을 입증했다. 유럽지성은 단테에서 괴테까지 빛에 매혹되어 있었다. 여기에 더욱 불을 붙인 것은 네덜란드에서의 렌즈의 발달이었다. 스피노자는 유럽 최고의 렌즈 제작자 였다. 이런 배경으로 부터 렘브란트의 뒤를 잇는 또다른 거장이 나타난다. 바로 페르메르라는 화가이다. 그는 렌즈가 달린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다빈치 이래 우리가 본다는 것은 우리 관념과 이성에 의해 설계된 지각 내용 또는 선입견을 통해 본다는 것이었다. 페르메르는 이러한 시각적 편견을 버리고 놀라운 인내와 탐구정신으로 렌즈의 착란원을 포착했다.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착란원을 필름에 의해 화학적으로 정착 시키기 이전 시대에 이미 새로이 보는 방법을 개척한 것이다. 관습이나 인습에 의문을 제기하고 주체가 경험한 사실에 돌아가려는 자세. 그것은 합리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과학 정신인 것이다. 하루 종일 방안에 틀어 밖혀 사색하고 고민하는 생활문화가 생겨난 것도 이때이다. 고독과 사색, 이는 합리주의의 문화적 토양이자 한계였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주의는 주체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큰 위험을 안고 있었다. 진리에 대한 동의와 가치에 대한 합의를 요구하는 합리주의는 사랑의 감정에서 종교까지 예술에서 전통에 이르기 까지 자신의 눈에 비 합리적이라고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거나 멸시하는 계몽군주나 권위주의로 떨어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자, 공공성과 개별성을 공유하는 유적 존재이며, 이들 두 영역에서 자유를 요구함으로써 주체가 되는 자주성과 창조성을 실현하는 행위자 이다. 그러므로 인간행위를 과학기술적 사고와 도구적 이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민주화와 주체화의 길이 아니다. 수 많은 기념 사진, 초상 사진의 ‘사람은 모름지기 이러저러 해야 한다’는 기준은 바로 이러한 사고의 영향이며 그런 기준으로 찍은 사진은 촌스럽고 유치하며 우스운 사진이 된다. 사진 정보의 흐름에 있어서 작가와 감상자의 관계가 객관적이고 합리성을 기준으로 해서만 맺어질 때 생기는 일이다.

ㄴ) 계몽주의와 사진의 분화

네덜란드의 고독과 사색의 문화를 대신한 정신적 분위기는 1세기가 지난 뒤 프랑스에서 생겨났다. 그것은 살롱으로 상징되는 대화의 문화였다. 그리고 살롱을 주도한 여성의 문화였다. 진지한 인간적 성실함이 주는 감동이 네덜란드적 이라면 그렇게 진지하진 않지만 상대방에 대한 공감과, 기지에 찬 마음씨가 주는 편안함과, 예의는 프랑스적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물론 궁정안에서 생겨날 순 없었고 상류계급이었지만 압도적 부자는 없는 시민사회에서 생겨났다. 살롱의 출입자들은 과학자와 철학자들이었으며 그 유명한 24권에 달하는 백과전서 사업에 함께 하고 있었다. 이런 지적 분위기는 살롱의 회합을 기품있게 했을 뿐 아니라 혁명정치의 선봉이 되었다. 또 과학의 선봉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네덜란드의 지식인들과 비교하면 진정한 과학자들은 아니었다. 이것 저것 관심은 많이 가졌지만 과학적 성과를 열매 맺은 것은 없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애호가들이었다. 과학적 끈기는 사교적이거나 머리 회전이 중요하지 않은 환경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분위기는 정통적인 학문의 분위기이기 보다는 설득적이고 계몽적 이었다. 아주 난처한 문제 앞에서 인상을 구기며 깊고 날카로운 사색에 빠지기 보다는 자존심을 잃지 않으면서 부드러운 미소로 넘어가며 설득과 대화로 공감적 분위기를 만드는데 더 능숙했다. 초상화도 권위적이고 기품이 있기 보다는 비교적 있는 그대로를 보여 주려는 정신적 상태, 이것이 파리의 분위기 였으며 1세기 뒤에 사진술의 연구가 동시간대에 많은 나라에서 연구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름 아닌 사진술의 탄생이 프랑스 것이 되게 된 토대였다. 니엡스와 다게르의 연구를 국가에서 사도록 중개한 아라고와 같은 관료와 시민사회의 주도성에 동의하는 정부, 백과전서를 만든 사회의 지성수준, 혁명이 근대 정치영역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한 점, 프랑스 혁명을 통한 주체의 광범한 진출 등이 바로 그것 이었다. 혁명은 더 많은 주거 이전과 여행을 가능하게 했으며, 국제적 차원의 문화를 형성 시켰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문화가 국가에 대한 찬양과 같은 애국심을 갖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계몽주의자들이 고안해 낸 이런 근대성의 개념은 혁명적인 것이 었지만 그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전통과 권위에 대한 투쟁을 호소할 뿐 새로운 사회의 운영방식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근대성의 이데올로기는 주체성의 실현인 민주주의적 이념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이었고, 보편적 원칙과 이성의 이름으로 교회와 군주의 권력을 비판한 것 뿐 이었다. 결국 계몽적 이성은 신적 권위로부터 주체를 해방 시켰지만, 또다시 주체를 자신의 일반 의지에 구속 시킨 것이다. 사진술 초기 테이나르, 뒤깡 등의 고대 건축사진은 고전주의 화가 다비드의 고대 문명과 도덕에 대한 향수 뿐 아니라 신적 권위로부터 해방된 후 국가적 권위로 향하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느끼게 한다.
사진의 발생과 관련하여 가장 직접적인 사상의 흐름은 계몽주의의 자연에 대한 견해와 관심으로부터 였다. 왜 그리도 상을 정착시키려는 시도가 열정적으로 진행되었을까? 자연주의 화가 코로는 ‘첫인상에 사로잡혀 당신이 진정으로 감응했다면 당신이 가진 감정의 순수함은 곧 다른 사람들도 감동시킬 것이다……그것들의 감상적 암시나 상징적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았던 대상들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 여기에 시간의 검인을 찍기 위해서이다’.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은 종교적 윤리에 대항하여 자연의 법칙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이성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것은 우선 많은 논증들이 일치하기 어렵고 그에 따라 다양한 의견과 법칙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와는 달리 이성은 지배를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물의 자연적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쾌락을 가져다 주며 기호의 규칙에 상응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했다. 동양과 달리 서양에서 산이나 자연물은 극복의 대상이었다. 서양에서 자연이 감상이나 쾌락의 대상이 됐던 적은 그 이전엔 없었다. 자연주의는 이런 이유로 공리주의적, 쾌락주의적 도덕을 요구했다. 그러나 쾌락은 욕망의 대상을 억압하고, 복종시키고, 치욕과 고통을 줄 수도 있다. 때문에 이성을 쾌락의 합리적인 조직자로 정의하는 이런 개념화는 이미 실패를 예고 하는 것이었다. 이성을 쾌락과 연결시키는 것은 주체화가 아니라 권력의 합리화일 뿐이다. 이런 윤리와 미학의 결합은 인간을 신적인 법칙과 영혼의 존재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신과 자연, 영혼과 육체, 이성과 감성 등 모든 이원적 사고를 버리고 인간을 자연으로 보는 일원론적 관점을 부과하는 것이다. 18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나타난 자연에 대한 광적인 신앙과 인상파의 자연에의 몰입과 도취가 이를 증명한다. 자연을 사람의 손, 즉 인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리고 싶은 요구는 사진의 화학적 발명 즉 필름에 의해 성취된다. 카메라 옵스큐라가 아직 소수의 것이었다면 자연감광법은 자연주의 이념의 대중적, 세계적 확산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사진 초기역사에서 지금까지 계속 끊이지 않는 <사진은 세계를 기록할 뿐인가>, <보는 방법의 반영인가>하는 논쟁은 사진 발생에서 자연주의적 사고방식의 영향력이 얼마나 집요하게 남아 있는가를 확인시켜 준다. 이러한 지성의 전통을 필요로 하지 않았거나 거치지 않은 나라에서는 위의 논쟁이 강건너 불구경처럼 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진은 합리주의와 비합리적인 자연주의와 계몽주의의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 등 다양하고 수 많은 사상의 영향과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사진정보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복잡하고, 단순한 듯 하면서도 난해하게 다가온다. 이것은 사진 정보가 창작되는 상황과 조건이 이미 복잡하고 불안정한 상태임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을 비트켄시타인의 말의 인용하면 ‘사진은 용도’일 뿐이다. 문맥에 따라 달라지고,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혼돈되고 불안정한 사진 정보체계의 환경에서 큰 틀과 원칙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지금까지도 빛이 바래지 않는 두 축이 있다. 주체성과 이성이다. 사진이 보여주는 혼돈된 현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근면한 노동자, 합리적인 시장 상인으론 부족하며 자신에 중심을 두고 정서적 존재로써, 운명의 불확실성에 사랑으로 호소하는 주체가 되려는 관점에 서야 한다. 이것이 사진의 역사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교훈이다.

4. 사진의 구조와 기능

사진예술적 체계의 기본구조는 사진가 – 사진 – 감상자 삼요소의 정보체계적 관계이다. 여기서 집중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것은 이 3요소의 체계가 끝없이 다양하고 급속히 변화하는 체계에서 구조의 동력을 밝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보자체는 이렇게 역동적 체계에서는 의미가 약화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웨스턴의 사진과 앗제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웨스턴의 사진정보는 뚜렷하고 정확하여 감상자의 감동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에 비해 앗제의 사진정보는 다양하고 애매하여 감상자는 자기 나름대로 상상하여 주관적으로 감상하지 않으면 밋밋하고 의미 없어 보일 뿐이다. 웨스턴의 사진은 처음 볼 땐 감동이 뚜렷하지만 자꾸 보면 심심해진다. 전달의도가 강한 전쟁 사진등을 반복적으로 보게 되면 처음의 폭로된 참상은 점점 변질되고 무디어진다. 그러나 이것도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슬픔과 죽음을 경험 할수록 무디어지는 문화구조가 있고, 더 예민해지고 승화되는 문화구조가 있다. 이런 복잡성을 감안할 때 창작과정과 감상과정 전체를 규정하는 시대정신과 문화예 대한 통찰을 전제로 다양한 속성의 동력과 원칙을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가. 사진의 구성요소

사진의 구성요소는 사람의 활동을 기준으로 봤을 때 5가지의 요소가 있다.
첫째는 인식적 요소이다. 사진은 객관적 기록이자 정보이다. 이러한 인식적 요소는 경험적이거나 합리적 지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성적 지식 자체는 주체화의 수단이지만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을 때는 주체를 억압, 소외 시킨다. 증거로서 활용되는 이러한 정보는 산업사회, 정보화 사회에서는 감시 통제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둘째는 개조적 요소이다. 사진은 사회적 영향력을 갖는다. 그 결과 사회를 변화시킨다. 1920년대 저널리즘 사진을 언급하지 않아도 이해가는 사실 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 변혁적 행위는 낡은 제도를 변혁하는 데는 성공할 수 있더라도 새로운 제도나 사회를 건설하는 데까지 항상 나가는 것은 아니다. 또 새로운 억압적 질서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것이다. 또 틀에 박힌 관례나 인습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기념사진, 결혼사진 등을 보라. 때문에 자각적이고 정서적이며 사랑에 호소할 때 주체적인 변혁은 일어날 수 있다.
셋째는 가치적 요소이다. 사진은 아무리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기록이라도 주관적으로 해석된다. 이것은 사진자체에 내재된 취향과 가치관을 표현한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사진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사진에 이데올로기로 가득 차 있다고 해서 윤리적, 도덕적 충격을 더 많이 주고 사람들을 올바른 가치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사진이 낯익은 것이 될 수록 윤리적 충격은 감소된다. 더구나 사진 이미지의 양적인 확산은 양심을 마비시키는 결과를 초래 한다. 그래서 사진의 윤리적 내용은 취약한 것으로까지 보인다. 윤리나 도덕으로부터의 자유가 반드시 전통 가치에 대한 거부와 새로운 가치에 대한 긍정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복종하더라도 자유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주체화인 사랑과 배려가 전제된 복종과 추종은 오히려 존경과 흠모가 된다.
넷째는 소통적 요소이다. 사진정보는 지식을 전달할 뿐 아니라 전달체계, 소통체계를 구성한다. 사진정보는 정보의 진리적 가치말고 얼마나 효율적으로 의사 소통되게 하는가도 중요하다. 사진은 새로운 소통방식 즉 이미지를 보는 방법이나 행위를 통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보는 새로운 체계를 형성한다. 어떤 면에서 세계는 사진으로 보여지기 위해 존재하기라도 하는 양 이미지 보기의 윤리와 문법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정보와 이미지가 중심이 된 사회는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문제로서가 아니라 생산의 목적을 결정하는데 참여함으로써 주체를 실현한다.
다섯째는 창작적 요소이다. 창작은 사람 활동의 다른 측면을 모두 종합하므로서 자기 목표를 실현한다. 설계와 시공, 계획과 실천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 바로 창작이다. 사람의 주체적 특질을 가장 잘 닮은 형태가 바로 창작활동 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창작적 요소는 사진예술체계의 동력이다.

나. 사진의 구조 – 사진문화

이런 요소들의 관계로 부터 사진은 사진가(집단일수도 있고)를 중심으로 한 창작과정 – 사진작품 – 감상과정을 기본체계로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창작과정에서 작품을 거쳐 감상과정까지 일관되게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요소들이 무엇인가가 분석 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체계의 동력은 사람이다. 사진체계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개인이 됐건 집단이 됐건 창작자가 있어야만 사진체계는 그 동력을 얻는다. 창작자의 혼이 물질적으로 담겨진 것이 사진 작품이다. 작품도 결국 물질로 외화 되었을 뿐 사람의 요구와 능력이 그 핵심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감상과정 또한 제도나 구조가 아니라 사람이란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사진이 사람의 사회활동을 통해 만들어낸 사회적 재부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사진이라고 하는 예술 정보체계는 결국 사람을 중심으로 한 체계이다. 창작과정을 둘러싼 사람관계, 작품을 둘러싼 사람관계, 감상과정을 둘러싼 사람관계의 체계이다. 이 대상을 규정하는 범주는 사진예술체계보다는 훨씬 넓고 복잡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사진문화체계이다. 앞서 살펴본 사람의 활동과 연관된 사진요소들은 어떻게 연관되며 구조를 이루는가.
첫째, 사진의 인식적 요소는 사진체계에 이론, 학문적 요소로 들어온다.
둘째, 사진의 개조적 요소는 사진모임이나 단체등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개조사업을 담당하는 사진조직단위를 만들어냄으로서 사진구조에 들어온다.
셋째, 사진의 가치적 요소는 주로 이런게 좋은 작품이다라는 가치 판단에 따라 그 작품을 중심으로 동원하는 역할인 비평으로 사진구조에 들어온다.
넷째, 사진의 소통적 요소는 교육과 홍보, 소비의 형태로 사진구조에 들어온다.
다섯째, 사진의 창작적 요소는 말할 것도 없이 작품으로서 사진구조의 핵심에 들어온다.
사진의 다양한 요소가 관계 맺는 방식은 무수히 많은 경우가 존재하며, 그것은 사진문화의 구조 속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 사진이론, 사진비평, 사진조직, 사진교육, 사진창작 등은 역사적으로 공고하게 굳어진 대표적 형태일 뿐이다. 이들 형태는 사람의 사진문화적 활동속에서 생성, 성장, 소멸한다. 예를들면 우리나라나 일본등의 진보적 사진운동 진영에서 시도한 조직창작 방법등은 새로운 사진문화적 형태이다. 또한 여행이라는 취미적 활동과 결합한 창작활동이나, 교육활동등은 사회문화적 양상과 사람들의 자주적 진출 정도등에 따라 새롭게 태어나는 사진문화의 구조들이다. 이러한 새로운 사진문화 구조가 성공하는가 실패하는가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며, 역사적 실험과 투쟁속에서만 증명된다. 사진의 역사가 개척해 온 사진문화의 전통을 어떻게 계승하고 발전시키는가에 따라 당대의 사진문화 구조는 결정된다.

다. 사진문화의 기능

사진문화가 사람활동의 다른영역에 대해 어떤 영향력, 즉 능력을 갖는가?

첫째, 사람의 인식활동에서 사진은 가장 강력한 증거로 채택된다. 사진은 사실만을 찍지 않음에도 사진은 사실로서 인식된다. 사진의 역사와 구조가 만들어낸 제도의 힘이기도 하다. 사진은 진실이나 진리의 인식과 관련해서 의도적으로 조작되기도 하고, 정말 생생한 사실을 보여주기도 했다. 자유주의적 사진 이론가들은 이러한 사진제도의 기능을 비판하고 해체하는데 몰두하지만, 어떤 경우든 인식활동에서 사진의 힘은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공고한 것임엔 분명하다. 사진문화가 만들어온 제도의 해체를 주장하는 것은 무척 새로워 보이나 가치의 측면에서 보면 별다를 것도 없다. 이것 아니면 저것의 판단을 요구하는 판단의 세계에서 가치중립적으로 보이는 것이란 사실은 어느 한쪽으로의 교묘한 편당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해체를 주장하는 담론이 누구에게 이로운 것인가를 따져보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는 사진문화라는 제도의 해체를 말할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말해야 한다. 사람에게 가치있는 사진문화제도가 무엇인가를 말이다.

둘째, 사람의 가치활동에서 사진은 가장 강력한 판단을 제시한다. 광주항쟁의 주검을 찍은 사진들은 우리에게 광주항쟁에서 죽은사람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나 증거만을 주는 것으로 그 역할을 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살해한 사람들의 행동이 선인가, 악인가, 찬양의 대상인가, 분노의 대상인가를 판단케 한다. 왜냐하면 이미 그 사진에는 찍은 사람의 증오와 울분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수잔손탁은 그러한 처참한 사진은 금방 사람의 감성을 무디게 만들어 관성화되게 한다고 했다. 일리 있다. 그러나 그것은 탈근대적인 서구사회에서만 일리 있다. 우리에겐 언제봐도 여전히 악에대한 분노와 경각심이 쉽게 사라지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사회문화가 그런 가치판단에 둔감한 구조일 수도 있고, 더 민감한 구조일 수도 있다. 사진의 가치적 기능도 이러한 사회문화구조의 영향을 받지만 인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치판단에서도 현실적 증거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서 그 판단을 일반적인 대중들의 가치로 받아들이게 하는 힘을 갖게 된다. 이러한 가치판단의 정서적 합의는 사람들의 실천을 추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셋째, 사람의 실천, 개조활동에서 사진은 인식과 가치의 통일정도에 따라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갖는다. 파시즘 정권이 사람을 동원하는데 사진을 사용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사진은 체계완결성으로 하여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운동의 틀이 된다. 이것은 사람관계의 발전에 따라 자연과 사회를 변화, 개조시키는 역할을 하게됨을 의미한다.

넷째, 사람의 소통활동에서 사진은 쌍방향적 시각정보체계로서 기능한다. 사진은 실천을 위해서도 정보소통의 기능을 하지만 또 한편으로 목적의식적이고 일방적인 활동말고도 쌍방향적인 소통의 기능을 갖는다. 사람사이의 소통과 교제활동의 본질은 서로가 서로를 주체로 인정한다는 데 있다. 인식,가치,실천,창조활동 모두 주체가 상대를 대상화 함으로서만 자기활동을 수행하는데 비해서 말이다. 사진은 우연성으로 하여 일방적 전달 뿐아니라 애매한 구석을 남겨 놓는다. 이전엔 미처 보지 못했던 사진의 한부분을 오랜 세월이 흐른뒤에 우연히 꺼내 보다가 발견하게 된다든가 하는 것은 사진만의 특성중 하나이다. 그림도 그런기능이 없지 않지만 유독 사진에서 그런 기능이 강한 것은 의도하지 않은 우연성 때문이다. 다른예술과 달리 우연성의 계기를 운명처럼 달고 있으므로 해서 일방적 정보체계가 아닌 쌍방향적 정보체계가 된다. 그럼으로서 사진은 전달의 매개일 뿐아니라 반성의 거울로, 추억의 유물로, 시간적 조형예술로 된다. 사진은 새로운 소통의 방식으로 기능한다.

다섯째, 사람의 창조활동에서 사진은 생산물로서 기능한다. 사진작품은 단순한 현실의 모방이나 증거가 아니라 창조물이다. 사진은 현실의 변형이자 생산품으로서 사람들과 관계한다. 사진예술 산업이 가능할 수있는 것은 바로 이런 기능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진은 인간학적 본성을 실현하는 측면에서, 주체성을 중심 내용으로 하고, 사진문화적 구조를 통해 발생, 발전하는 예술형태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이같은 체계분석을 통해 사진운동은 결국 사진문화 건설 사업이란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사진문화 건설은 고도의 정치 경제 문화적 인식과판단을 요구하는 행위이며 창작, 교육, 조직, 비평의 통합적 체계를 갖춘 조직의 출현을 예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