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문예운동론2001/10/26

노동자 문예운동론

1. 노동, 아름다운노동
1) 책으로 노동운동을 배운 사람들
노동자 학습 때 노동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먼저 할지, 노동법을 먼저할지 토론이 붙은 적이 있었다. 나중에 지나고 보니 노동법을 먼저 한 사람은 자기 권리찾기에는 민감하여 자꾸 간부가 되고 투쟁에는 앞장서는데 현장으로 돌아가서 일하며 동료들과 어울리는 것에는 잘 적응을 못하는 것이다. 물론 학습만의 차이로 돌리기엔 무리한 해석일 수 있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든 지식은 무엇을 위한 지식인가? 누구를 위한 지식인가? 하는 가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고의적으로 악용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무의식적으로도 악용될 수 있다. 노동운동 초반에, 책으로 노동운동을 배웠던 사람들이 있다. 노동자의 역사적 지위와 역할에 대한 선언적인 단어로 머리가 가득차 있던 사람은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에 대한 추상적 이해로, 타락한 현실에 노출되어 있는 노동자의 구체적 생활상에 금방 실망하고는 자신의 추상수준의 혼란을 걷잡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야학하다 그런 경우는 덜했고 노조하다가 그런 경우는 더했으며 무슨 정치활동을 하다 그런 사람은 더욱 심했다. 치열한 현실에 맞부딫칠수록 당위는 더 심하게 파산되는법, 이런 경우에 노동운동은 살아있는 사람의 운동이 아니라, 관념의 운동이었던 것이다. 노동운동에 대한 사회과학적 지식이 주는 전망은 새로운 가치에 대한 기준이 없을 때 이미 낡은 것이다. 왜냐하면 전망은 지식의 문제만도 신념의 문제만도 아니며 신념과 과학이 통일된 주제이기 때문이다.

2) 투쟁으로 노동운동을 배웠던 사람들
노총산하 노조 교육을 갔다가 들은얘기다. 어떤 사장이 이런 말을 했다. 노조간부를 해고시키고, 구속시키고 별수를 다 써봤는데도 안되드라 그런데 한번은 미친척 하고 핵심간부 4명을 한사람씩 불러서 책상위에 5천만원씩 올려놓고 이걸 가져가든지 싸움을 다시 해보든지 알아서 하라고 하니까 4명 다 조금 고민을 하더니 돈을 챙겨들고 소리 없이 나가 더란다. 그래서 이사장 왈 “2억 쓰는 게 파업해서 손해 보는 것보다 이문이야”
자연 발생적인 노동자의 투쟁은 추상화된 계급이 아니라 개인을 찾고자 한다. 이점에서 개인의 권리를 찾으려는 부르조아적 시민운동과 같은 지향을 갖는다. 경제주의적인 노조운동은 나의 필요 때문에 단결한다. 나의 자생적 요구로부터 일어난 단결투쟁은 나의 요구인 소비와 복지가 1차적으로 해결되면 즉시 해체되어 버리고 만다. 소비문화가 단결투쟁보다 상위의 개념이 되어 있는 것이다. 열심히 임금인상투쟁을 해도 기분좋게 술을 마신다든지, 차한대 뽑아서 유지비 대다보면 게눈 감추듯 사라진다. 남들처럼 살아보자는 문화적 가치에 구속되어 있는한 노동운동은 합리주의적 질서와 권력에 봉사하는 운동이 되고 만다. 노동운동이 주체적인 삶의 운동이 되려면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과 투쟁 뿐 아니라 새로운 문화적 가치에 대한 답을 줘야한다. 투쟁은 노동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이다. 실천은 주체의 행위일뿐 주체 자체는 아니다. 역사적 자각이 있는 실천만이 주체의 실천으로 된다.

3) 예술로 노동운동을 배운 사람들
문화패 출신 노조 위원장을 우리는 간혹 만난다(지하철 석치순 전위원장. 민노총 김영대 한때 문화패의 조직적 고민 중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문화패간부가 노조위원장 되는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였다. 고민의 속도 보다 위원장을 요구하는 현실의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대부분은 좋게 보내주는 것으로 끝나고, 문화패 핵심간부를 노조에 내준 문화패는 정체상태를 벗어날줄 몰랐다. 사람 키워 놓으면 다 여기저기로 빼앗긴다는 푸념만 남긴 채… 나는 빼앗기는(?) 아쉬움보다 키워내는 자부심에서부터 전망을 찾고자 한다. 왜냐하면 위원장이 되고나서 문예적 감각을 잃어 가면서 조합원들한테 팍팍해져간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팍팍해 지는 지도자와 관료화되는 조직은 유럽에서처럼 노동당, 공산당, 사회당등이 노동운동에 자신의 논리를 부과하고 노동운동을 정당에 의해 지도 받는 ‘대중운동’으로 기능적 분리를 한다. 그리고 노동운동가를 조직의 질서와 권위의 감옥에 가둔다. 그래서 이 문제는 문화패만의 문제가 아닌 노동운동전반의 문제이다. 노동운동은 정치적 노동운동 이전에, 아름다운 노동과 신명나는 노동운동에 대해 얘기해야한다.

2. 사람의 활동인 노동, 노동중의 노동인 예술노동
노동은 세상을 개조하는데 그 본성이 있다. 예술활동도 노동의 측면에서 보면 예술을 통한 개조다. 노동에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있다. 정신노동은 반영형태에 따라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개조해야할 세계의 본성과 변화의 이치를 밝히는 노동이 있다. 학문의 형태로 나타난다. 둘째, 일정한 가치관에 따라 사람들을 동원하고 관리하는 노동이 있다. 정치, 종교등 가치활동 형태를 통해 나타난다. 셋째, 일하는 사람간의 소통과 교제를 원할하게 하는 노동이 있다. 주로 언어활동을 통해 나타난다. 육체노동은 정신노동의 요구에 따라 직접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킨다. 예술은 이 네가지 측면을 모두 포함한다는 점에서 다른 노동과 다르다. 에술은 첫째, 표현대상에 대한 지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예술이 개념적인 지식의 나열이 될 때는 물론 형상으로서의 예술적 본성을 깨는 것이 되지만 개념적 지식은 예술 표현의 인식적 전제가 된다. 그래서 아는 만큼 느낄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둘째, 예술은 객관적인 인식과 더불어 주관적인 가치 판단을 자체에 필수적으로 포함한다. 예술은 아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좋아한다는 것은 단순히 가치판단이 아니다. 대상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좋아하게 되면 더 자세히 알고 싶어지고 더 깊이 느끼게 된다는 점에서 가치판단의 적극적인 역할이 있다. 셋째, 예술은 소통적 계기를 갖는다. 어떤 경우에도 예술은 소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낯설게 해서 새로운 충격을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가장 평이한 소재나 주제, 민족적인 색깔이 짙은 기호를 찾으려한다. 어쨌든 소통방법은 예술적 숙련도를 측정하는 중요 부분이다. 넷째, 최종적으로 예술활동은 현실대상을 개조함으로써 자신의 활동을 모든 사람의 재부로 생산한다. 그것은 작품이다. 작품이 공업적 생산품과 다른점은 오로지 하나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데 있다. 공산품은 순수한 의미의 사회적 생산이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설계도가 있으면 누가 만들어도 똑같은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피타고라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중국의 주비산경(피타고라스의 정리와 같은 내용의 달력계산표)으로도 창조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예술은 누가 만들어도, 하다 못해 모방한 작품일 때 조차도 같은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예술작품이 하나하나로 완성된 노동의 산물임을 의미한다. 파편화 될 수 없는 완성된 노동으로서의 예술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별이 없어지는 노동의 궁극적 이상으로 비유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3. 자주적 노동과 예술적 노동

예술적 노동이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확산되고 있는 현상은 이러한 사실을 잘 반영한다. 예룰들면 노동조합 임투문화 교실에 예술이 아니면서도 현실적 필요에 의해 많이 등장했던 선전, 선동 훈련같은 과목을 보자. 선동술, 또는 웅변술은 이미 희랍시대부터 예술의 중요 형태로 여겨질 만큼 그 뿌리가 깊다. 선동술은 단순히 정치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단계에서 표현하는 단계로 발전되어 있다. 레닌식의 논리적 선동의 시대는 가고 킹 목사나 백기완선생 같은 감성적이며 예술적인 선동의 시대가 오고 있다. 이런 선동의 구조를 잘 보면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내용이 구체적이고 생생한 현실묘사와 결합되어 있다. 내용으로서의 이념과 형식으로서의 형상의 결합이란 점에서 선동술은, 응용예술, 실용예술의 형태로 예술문화의 구조속으로 들어온다. 또한 조합문화에 대한 많은 기획의 필요로부터 자생적으로 제기되는 기획 교실의 경우를 보자. 처음엔 일을 추진하기 위해 구색 갖추기용으로만 여기던 기획술은 잘 뜯어보면 예술노동으로서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정보의 수집, 분석, 종합에서 요구되는 인식능력, 좋은 정보와 나쁜정보를 파악하는데서 요구되는 가치판단 능력, 정보를 가공하여 기획의 씨앗을 잡아내고 구체적 계획을 수립하는데서 요구되는 상상력 (의식개조능력), 일을 추진하는데서 요구되는 숙련도(노동능력), 기획안을 설득력있게 해설하는데서 요구되는 소통능력과 표현력이 바로 그것이다. 기획자는 단순히 실무집행 공무원이 아니라 응용예술가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직 사업가들의 대화술 또한 주체간의 진정한 존중과 소통을 기반으로 형상적 계기를 통하여 설득과 교양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응용예술로 된다.(대화술에 대해서는 신바람 소식지 14,15호 “국민이 주인으로 나서는 새로운 시대의 예술형태 대화술” 참고)
이처럼 시대와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영역의 노동활동에서 노동의 예술화가 진행되는 것은 자주적 노동의 합법칙성과 예술적 노동의 합법칙성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4. 노동의 이상과 예술
노동자가 예술을 자기 손에 거머쥔다는 것은 노동의 이상을 획득하게 됨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념적 노동운동에 대해 익숙해져 있다. 어떤 때는 그 꼬리표를 떼고 싶어하고 어떤 때는 확실하게 달고 싶어했다. 이념은 전망적 요구라는 점에서 사람을 높고 멀리 바라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념은 밤 하늘의 별을 보다가 시궁창에 빠질 우려와, 당위만을 위한 당위가 되어 관성에 빠질 염려가 있다. 이념이 주는 과격한 이미지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관성화에 있다. 관성이란 운동의 정지요, 운동의 정지란 생명의 상실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념은 애초의 목적을 상실하고 변질, 퇴색되어 한순간에 고무신 바꿔신 듯 바꿔신는 일이 왕왕 생긴다. 그에 비해 이상이란 이념과 같이 전망적인 요구이면서 구체적이고 생생하여 사람을 추동하는 계기를 갖는다는 점에서 이념과 다르다. 또한 이상은 감정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강한 감염력을 갖고 미적 체험을 불러일으킨다. 일하는 사람들은 이념보다 이상의 형태로 미래를 만난다. 역대 사상가들이 홍길동전이나, 유토피아,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와 같은 소설을 써서 자기의 사상을 이해 시키려고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술의 씨앗이 되는 작품핵에서 이상은 가장 결정적인 기준이자 성분이다. 노동자들의 촌극짜기를 하다가 ‘우물을 깊게 팔려면 넓게 파야한다’는 속담을 바꿔 ‘진짜 노동자는 소모임속에서가 아니라 민중의 바다속에서’라는 작품핵을 내오는 것을 보았다. 이 작품핵에는 한 노동자가 자주성을 쟁취해 나가는 과정에서의 전망적 요구가 생생하게 담긴 씨앗을 가지고 있다. 작품핵의 완성도와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것은 이상이며, 역으로 이상을 가장 살아있는 형태로 성장 발전시키는 것은 예술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말에 공감한다. “위대한 예술가 이면서 위대한 사상가가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5. 노동자 문예운동
예술은 노동자를 노동자 답게 만드는 가장 힘있는 수단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안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안다는 것이 인식적 측면을 얘기 한다면, 좋아한다는 것은 아는 것을 기반으로 가치를 통일시켜가는 과정이며, 즐긴다는 것은 인식과 가치의 통일이 완성되어 세계의 주인이 됨을 뜻하며, 세계를 자기뜻대로 변화시키는데서 구속이 없어진 상태를 말한다. 즐긴다는 것은 저항을 넘어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가진 주체로 섰음을 의미한다. 이것을 인간정신의 반영형태에 따라 구분지어보면. 안다는 것은 과학의 영역이고, 좋아한다는 것은 종교와 정치의 영역이며, 즐긴다는 것은 예술의 영역이다. 시대정신의 발전의 단계로 보면, 안다는 것은 과학적 합리주의의 근대이전을 상징하며, 좋아한다는 것은 합리성과 저항정신의 근대를 상징하며, 즐긴다는 것은 세계의 주인으로서의 현대를 상징한다.
노동자가 노동자 다워진다는 것의 현대적 의미는 자기의 자립적인 이상을 자각하고, 노동자로서의 집단성을 획득함이 전제 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반위에서 지배질서에 대한 적응이 아닌 저항을 통해 자기의 문화적 가치를 건설해야한다. 이상, 조직, 저항, 문화의 4가지 요소가 충족 됐을때, 노동자는 노동자 다워 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속성을 키워가는데 있어서
예술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첫째, 이상은 생생한 형상을 통해 표현된다는 점에서 예술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둘째, 조직은 실제 사람을 꼬시고 설득하고 사업을 통해 무엇인가를 개조해 나가는 계기가 논리 뿐 아니라 정서적이고 감정적 계기를 갖는다는 점에서 예술의 정서적이고 추동적인 속성과 연관된다. 셋째, 저항에 있어서는 사람을 추동하는 계기가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예술은 구체적이고 정서적인 감염력을 갖는 속성으로하여 집단적 저항에로 사람을 불러일으키는데서 큰 역할을 한다. 네째, 문화는 현실에서 분위기나 느낌등으로 접수된다는 점에서 예술의 구체적 형상적 속성이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이처럼 노동자의 본성과 예술의 본성이 서로 일치하는 지점에서 노동자 문예운동은 발생한다.
이처럼 노동자에게 있어서 예술은 자신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가장 힘있는 수단이며, 예술은 노동의 본성과 만남으로서만 자신의 시대적 과제를 완수 할 수 있게 된다. 노동자 문예운동의 이런 본성으로부터 다음의 명언은 타당하다. 예술의 천재가 아니면서 노동자의 자주성을 실현 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는 없다.

6. 노동자 예술문화
노동자 문예운동이 노동과 예술의 본성이 일치함으로서 비롯되는 운동이란 것이 밝혀지므로서 그런 본성이 어떤 구조로부터 발생하는가에 대해 답할 필요가 생긴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노동자 예술문화이다. 여기엔 두가지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는 취미의 문제이며, 또 하나는 예술을 둘러싼 다양한 역할체계의 문제이다.

1) 취미의 문제
예술의 개념이 확장될 때 반드시 궁금해지는 문제가 있다. 취미의 문제이다. 취미는 자발성에 의해 생겨나지만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다. 소련의 심리학자 우스나제와 그의 제자들이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다양한 요인들이 미치는 영향하에서 인간의 심리는 늘 특정한 행위에 대한 준비상태, 즉 그 행위에 대한 선호 상태에 있다는 점과 이런 심리적 경향성이 태도, 행위자체에 본질적인 영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취미에는 첫째, 미적 만족을 얻으려는 데서 드러나듯 일정정도 쾌락적 방향을 가지고 있다. 둘째, 작품을 통해 작가와 접하려는 준비가 되어있는데서 드러나듯이 소통적 방향을 갖는다. 셋째, 새로운 지식을 얻고자 하는 인식적 방향을 갖는다. 넷째, 자신과 유사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데서 가치적 방향을 갖는다. 다섯째, 취미로서 예술을 수용할 뿐 아니라 공동창작, 추창작이라 할 수 있는 창조적 방향을 갖는다. 예술 취미와 여가는 개인적이라는데 가장 큰 특징이 있다. 따라서우리의 관심사는 이러한 취미가 어떻게 개인을 뛰어 넘어 주체적인 삶에 복무할 것인가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취미에서 주체성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확인하는 일과, 주체성이 실현될 수 있는 취미의 여러 방향간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취미에서도 주체적 태도는 개인주의적 태도와 구별된다. 권력기구들과의 갈등속에서 자신을 방어하며 이를 위해 환경을 변화시키려는 강한 행위자의 원칙이 주체적 태도라면, 상황에 적응하여 자기만의 자연상태로 회귀하려는 것이 개인주의적 태도이다. 주체는 개인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지만 특수한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둘째, 취미는 일상적이고 심지어는 습관적인 성격을 갖기에 취미 방향들은 쉽게 타성화 된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주체의 중요한 징표인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기보다는 타성이다. 주체성을 가로막는 최고의 적은 타성이다. 예를들면 전인적인 인격에 조화되지 않은 일시적 충동, 반성없는 정열등에 의해 행위 될 때, 우리는 스스로가 행동으로부터 소외된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자아를 기생적 자아, 표층적 자아라고 했다. 취미의 쾌락적, 가치적 방향은 특히 그럴 위험성이 더욱 많으며 소통과 인식적 방향은 그 전체를 통찰하고 개조하려는 행위로 까지 연결되기에는 현상적이다. 그에 비해 취미의 창조적 방향성은 취미 전체에 대한 합리적 인식과 구체적인 경험과 정서판단 등 주체성의 요소를 그 자체에 포함하고 있다. 취미의 방향은 어디로도 향할 수 있지만 그 구조상 주체성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은 창조적 방향이다. 그러나 취미는 무조건 예술로 집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취미집단의 상황이나 조건 등에 따라 다양한 취미방향으로 발전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미애호가가 관성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중심고리는 취미의 창조적 방향에 집중하는 것이다.

2) 예술역할체계의 문제
누구는 창작엔 소질이 없지만 조직사업엔 타고난 자질이 있어서 우리 문예패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당사자인 누구는 시간이 흐를수록, 또는 조직을 개편하네 마네하는 소리가 들릴수록 ‘내 있을 곳은 어디?’ 하며 고민이 쌓여간다. 문예패에서 조직가의 몫은 무엇이고, 강습자의 자리는 어디이며, 비평가와 이론연구자는 어떻게 준비 되어야 하는지… 보통 예술하면 창작자가 있어야하고, 창작자의 작품이 있어야하고, 그걸 보아줄 감상자가 있어야 한다. 창작자-작품-감상자, 3요소가 맺어가는 관계가 예술의 구조이다. 그러나 예술운동은 이 3요소의 관계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다. 창작자에게 정치적 내용과 방침을 누가 물어다 줄것이며, 감상자를 조직동원하는 기획은 누가 할것이며, 작품에 대한 가치를 높이고 해설해줄 사람은 누구인가? 이런 여러 가지 역할이 중첩될 때만이 문예는 자기 본성을 옳게 발휘하여 노동자의 자주성 실현에 이바지하는 운동이 된다. 예술의 인식적 측면은 학문을 예술문화구조로 끌고 들어와 문예이론가를 만들어내고, 예술의 가치적 측면은 가치체계를 예술문화구조로 끌고 들어와 평론가를 만들어 낸다. 또한 예술의 개조적 측면은 노동을 예술문화구조로 끌고 들어와 예술적 가치를 창조해내며, 예술의 소통적 측면은 교제를 예술문화구조속에 끌고 들어와 예술적 유통과 소비를 만들어낸다.

조직가 : 조직가는 취미중심의 조직에서 필요한 존재로 알려져 있다. 예술이 좋아서 오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에 대한 자발적 욕구는 개인의 주체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질서에 대한 소극적 저항을 내포 할 때가 많다. 이러한 요구는 적극적 개조변혁을 지향하진 않지만 풍부하고 두터운 교제와 연대를 통해 주체를 확인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다지기 작업이 끝나고 나서야 목적의식적인 요구를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이러한 단계에서 조직가는 조직의 분위기나 정서를 대표한다. 든든한 교제역량을 바탕으로 개조활동,가치활동,사회 인식 활동등을 계기에 맞게 펼친다. 이 단계에서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활동이 있으니 예술창작활동이다. 조직가는 이로하여 문예조직에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렇다면 조직가는 예술활동과는 무관한 사람인가? 아니다. 어설픈 창작행위보다 더 고도의 예술적 사유와 정서를 가지고 있음을 알수 있다.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으로 증명된다. 조직가는 자기 활동의 예술적 측면을 잘 모른다. 조직가는 자기 직무보다 많은 시간을 사람을 만난다. 논리가 아닌 정서와 구체적 형상으로, 그렇다 그들은 사람을 대화로 만나고, 대화로 표현하며, 대화로 표현하는 만큼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대화술은 조직가만이 잘할수 있는 응용예술 장르이다. 녹음을 풀든 대화록을 보든 조직가가 사람들과 놀며 즐기는 가운데 사람을 감동적으로 이끌어낸 대화형상예술이 펼쳐질 것이다. 이것은 다른 형식의 작품창작에 얼마나 큰 재부가 되겠는가?

기획자 : 기획자는 조직과 정세 전반을 꿰뚫는 정보 장악력과 예지력을 필요로 하며, 정치,조직, 창작등 모든분야에 연관되어 있다. 기획자의 활동에서 직접적으로 예술 창작과 연관되는 부분은 무엇인가? 기획서, 브리핑자료(시각미디어를 동원한)연출, 프리젠테이션등이다. 기획자는 사람들이 무슨 일이든 하기전에 그 일을 힘있게 추진할 수 있는 기획서와 미리보기,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한다. 노동의 구체적 상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특히 미디어 매체의 발전과 더불어 삽화가 걸어왔던 길처럼 기획자료들은 응용예술로 된다. 따라서 우리들의 기획서, 브리핑자료등도 고스란히 응용예술작품의 개념으로 보관되어야하며, 비슷한 기획을 하는 사람들에게 감상되어져야한다.

비평가 : 창작엔 소질이 없지만 감상하고 수다 떠는 것에 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비평가의 자질이 있는 사람들이다. 비평가는 한마디로 우리 창작품을 잘됐다고 칭찬해 주는 사람이다. 그것을 과학적 근거를 들어서 공정하게 해설하고 안내해 주는 것이다. 비평가의 존재는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우리가 여지껏 쌓아온 재부가 결코 만만치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알리고 이해시킬 평론가를 찾지 못했다. 아니 만들지 못했다. 우리의 예술은 아마추어적이기 때문에 평론할 꺼리가 없는것일까? 이것은 예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의 시와 노래가 역사의 중심에서 읊어지고 불리워 지는 이상 그 형태가 수필이 됐건 일기가 됐건, 그것은 노동자와 민중을 감동시키고 교양하는 예술이 된다. 임진록이나 안네의 일기를 작가들은 처음부터 무슨 문학을 염두에 뒀던 것은 아니다. 그의 역사를 관통하는 경험과 진실함의 기록 자체가 예술이 된 것이다. 우리들에겐 그 얼마나 눈물어린 장면들이 많은가? 우리에겐 비평할만한 작품이 없었던게 아니라 우리중심의 예술관이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비평가를 길러내자고 결심하는 순간 쏟아지듯 많은 양의 작품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비평가는 말할것도 없이 평론문학으로 예술창작에 들어온다.

문예이론가 : 문화패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있다. 정서나 분위기 보다 뭔가 논리적으로 꼬치꼬치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이다.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형상사유보다 개념사유가 발달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문예이론가로 키워주는게 좋다. 문예이론이란 다름아니다. 우리가 무수한 실천을 통해 만들어 내는 수다한 창작, 조직, 기획, 교육등의 성과를 과학적으로 정리해주고 당장 보이지 않는 전망에 대해서도 가늠할수 있는 나침반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거기에 좀더 힘이 남는다면 싸움꾼이 되야한다. 미시담론이네, 포스트 모더니즘이네하는, 이론이나 라깡인지 새우깡인지 60년대 세대들을 우상으로 하는 프랑스 사대주의와 싸워야한다. 이런 신이론들은 대부분 신조어를 만들어 내어 마치도 새로운 것을 들고 나온 양하지만 결국 낡은 자기 관점을 교활하게 포장하여 들고 나오는 것일때가 많다. 유행처럼 흘러왔다가 우리의 사색에 흠집만 내놓고 사라지는 이런 문예이론에 우리 노동자문예의 나침반이 흔들리게 해서야 되겠는가?

문예교사 : 나는 문예교사란 말을 확대해서 쓰지 않겠다. 문예교사란 개념이 자부심도 줬지만 오해도 일으켰기 때문이다. 문예교사는 말그대로 예술교육으로 문예운동을 하는 사람이다. 노래패는 유명한 가수 정도 되야지 강습도 많이 한다고 한다. 갈래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일리있다. 창작자가 강습을하고 사람들과 만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면도 있다. 그러나 창작과 교육은 별도의 자질과 능력을 요구한다. 창작은 궁극적으로 작품으로 표현되며, 교육은 사람의 자질과 능력으로 표현된다. 문예교육은 첫째, 사람의 세계관형성에 이바지 해야하며, 둘째, 끼와 째(자질과 재능)를 개발해 주고, 셋째, 표현능력(숙련도)을 개발해 주고, 넷째, 시대의 요구에 맞는 창작방법을 익히는데 이바지 해야한다. 교육은 구체적인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창작활동과는 다른 자질과 전문성을 요구한다.

예술문화구조의 역동적인 체계는 문예가 본성에 따라 운동을 할수 있게 한다. 이러한 예술문화체계를 이루는 각 요소의 독자성과 상호간의 연관에 대한 계획이 섬으로써 문예운동은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펼쳐질 수 있다.

문학예술청년공동체 기관지 사과꽃 게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