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운동론5- 조화와 예술2003/04/08

조화와 예술

이시우
(1) 조 화
평화에서 화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화’가 여럿이 함께의 의미라면, ‘해’는 어울림의 의미가 강하다.
조화는 사이좋음을 조직한다는 의미가 있어 다소 규율적인 반면, 화해는 여러사람이 모여 대화하여 어울린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그 뜻이 더 나으리라는 충고를 누가 해주었다.
그 말에 공감하면서도 우리 귀에 익숙한 조화를 그냥 사용하기로 하겠다.

탈현대 철학에서 불화와 부조리의 원인으로 이성중심주의를 든다. 서구의 이성은 발전을 추구하며, 현실에서는 강대국, 선진국으로 외화 되었지만 그 정점에서 히틀러를 발견해야 했던 서구의 충격은 다른 대안을 찾아 나섰다. 송두율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아름다움’이다.

“도덕군자 같은 소리만 하고 있네”라는 냉소적인 말이 담고 있는 뜻이나,”배운 도둑이 더 무섭다”는 일반적 이야기처럼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도덕이론이나 진리의 문제를 다룬 지식 이론을 막론하고 오늘날의 복잡한 현실을 바로 잡울 수 없다는 비관과 체념이 묘하게 교차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힘의 도구가 되어버린 지식이나 위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도덕과 윤리만으로는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기대할 수 없다는 회의는 또 다른 출구를 나설 수밖에 없게끔 우리를 내몬다.
칸트도 미적인 판단력이 이론적인 이성과 실천적인 이성을 매개하고 ‘자연의 왕국’과 ‘자유의 왕국’을 통일하는 연결체라고 보았다.(…)
원인과 결과로 맺어지는 인과론의 지루한 논리의 궤적으로부터 이탈해서, 폭발적인 순간에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제시하는 아름다움을 통해서 단순한 앎과 행함을 넘어서는 심미적인 체험은 우리의 삶을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21세기와의 대화. 255쪽. 송두율.[한겨레신문사])

그러나 서구는 비서구에 대해 미를 진 선과는 분리하여 미를 통한 지배를 해왔다. 무력에 의한 지배가 아닌, 미를 통한 지배는 서구의 지배전략이 세련되게 발전되어 왔음을 증명한다. 동양에서 가장 먼저 서구화된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국의 미를 누구보다도 사랑한 일본인이다. 그는 일본의 한국동화정책에 반대했다. 1920년 한국에선 행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도대체 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을 동화시킬 수 있는가 아닌가는, 오늘날 20세기 생활의 의문점에 속하는 일입니다. 병합이라고 하는 위압적인 일은 논할 필요도 없고, 평화적 정책에 의해 동화가 가능하다는 말에도, 세계의 역사가 어떤 것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오늘이라고 하는 배경 아래 생활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긍정적인 대답을 제시하는 일은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일본처럼 내부에 모순도 있고 불완전의 극한 속에 있는 나라가 다른 민족을 개화시킨다고 한다면, 그 누가 그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한국은 위대한 미를 낳은 나라이며, 위대한 미를 가진 민중이 생활하고 있다고 하는 점입니다.

한국의 문화적, 미적 자긍심을 한없이 칭송한 점에서 우리가 그를 좋아하고 고마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야나기가 칭송한 것은 미일 뿐 한국인의 생활 전체는 아니었다. 그는 한국인이 폭력투쟁에 의해 독립을 쟁취하려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그것은 일본인의 방식을 흉내내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이에 대해 가라타니 고진은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한다.

물론 그는 그렇게 말하는 일로써 식민지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화적인 아이덴티티와 긍지를 부여하려 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를 위해서, 또는 ‘미’에 의거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야나기는 민예품을 상품생산으로 간주했고, 그 질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는 일본의 산업자본주의에 지배당한 한국에서 유일한 생산품으로서 민예품에 의거해서 한국인이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미와 지배 16쪽 고진 민족문학작가회의주최 제1회 세계작가와의 대화 자료집)

야나기의 미와 진 선의 분리하는 방법론은 일본의 것이 아니다. 멀리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미의 본질로 규정한 ‘무관심성’ 이론으로부터 유래한 서구 부르조아의 전통적인 미학사상이다. 따라서 서구의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에서 칸트의 ‘무관심성’에 의해 은폐된 정치 경제 또는 권력의 은밀한 기획을 놓쳐서는 안된다. 우리와 같은 사회는 강대국, 선진국 건설과 같은 목표 외에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과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 두가지의 긴장을 어떻게 해결하는가가 우리에게 주어진 짐이다. 아름다운 나라만으로 안되며, 강성대국만으로도 안 되는 한반도와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평화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도 우리에게 부여되는 짐이다.
조화는 아름다움이자 힘이어야 한다. 진정한 아름다움과 진정한 힘이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가장 힘있는 것은 돈도 총도 아니다. 서구 사상은 힘이란 개념과 가장 멀리 떨어져 보이는 ‘문화’에서 그 힘을 발견한다. 문화의 동력을 발견하는데 역사상 미학만큼 기여가 큰 학문도 없었다. 따라서 나는 조화라는 주제를 접근하는데서 미학의 방법론으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미학의 편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체계적 접근방법이 필요하다고 보기에 이 둘을 적용하여 조화라는 개념의 역사와, 구조, 기능을 종합적으로 고민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서 총체적인 파악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화란 아름다움의 표현이며, 힘의 또 다른 표현이다.
나라마다 평화와 혼융된 개념으로서, 또는 연관된 개념으로서 조화를 생각하는 방식은 각각 달랐다. 우선은 그 조화의 역사를 살펴보자.

(2) 조화의 역사
고대 문명권의 중심이었던 중국과 그리스, 주변문명권이었던 한국과 베트남에서 각각 조화의 관념이 어떻게 형성 발전하였는지 알아보자. 더 풍부한 사례연구를 통해 일반적인 특성을 찾아야겠으나 필자의 공부가 부족하여 부득이 이후의 과제로 미루며 한계에도 불구하고 작은 결론은 찾고자 한다.

1. 고대 중국에서의 [조화]
중국의 상서 요전(堯典)에 의하면

황제께서 말씀하시길, “기(夔)야, 너에게 명하노니 음악을 법전으로 후손들을 가르치되, 곧으면서도 온화하고, 관대하면서도 위엄이 있어야 하느니라. 강직하되 포악하지 말고, 대범하되 거만하지 말라.(…)여덟가지 소리가 화해의 극을 이루어 윤리에서 벗어남이 없으면, 귀신과 사람이 이로써 화합할 것이다”.기가 말하길.’예 제가 경쇠를 치니 뭇 짐승도 따라서 춤을 추더이다.’
(帝曰 夔 命汝典樂, 敎 子, 直而溫, 寬而栗, 剛而無虐, 簡而不傲,(…) 八音克諧, 無相奪倫, 神人以和, 夔曰, 於 予擊石 石, 百獸率舞)

여기서는 신과 인간의 조화를 이루는데 있어서 조화로운 인격의 수양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를 위한 의식 중에서도 음악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상고시대 중국에서 음악은 우주와 만물 전체의 조화와 연결되어 있다.
[국어.주어(하)]에서 영주구( 州鳩)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정치는 음악과 비슷하니, 좋은 음악은 조화로움에서 나오고, 조화로움은 각 악기가 침범하지 않는 안정됨(平)에서 나온다.(…) 잘 맞는 것이 모인 것을 소리라 하고, 소리가 조응하여 서로 돕는 것을 조화(和)라고 하며, 높고 낮은 소리가 제 소리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은 것을 안정됨(平)이라 한다.(…)이에 만물이 잘 자라고, 인민은 화해롭고 이롭게 된다.(…)이런 고로 음악은 올바르다.
(夫政象樂, 樂從和, 和從平, 聲以和樂, 律以平聲,(…)極之所集曰聲, 聲應相保曰和, 細大不踰曰 平,(…) 嘉生繁祉, 人民和利(…) 故曰樂正)

평과 화의 개념을 음악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 목표가 인민을 이롭게 하는데 있음을 밝히고 있어 주목된다.
고대 중국인의 음악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중심음이다. 중국에선 삼황오제(三皇五帝)때, 황제가 12율 중에서 황종(黃鐘)이라는 양율을 중심음으로 정한다. 이는 하늘을 가르키는 건(乾)이기도 하다. 중심음인 황종(黃鐘)을 기준으로 천지 팔방의 음을 정하고, 팔풍과 통하여 우주의 기를 열고자 했다는 것이다. 좀 어려워 졌지만, 말인즉, 중심음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조화, 인간과 사회와의 조화, 인간과 우주전체와의 조화를 목표로 하였던 것이다.
위진시대 완적(阮籍)은 악론(樂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날의 성인들이 음악을 지은 것은, 장차 천지의 본성을 따르고, 만물의 생명을 체현하고자 함이었다. 고로 천지팔방의 음을 정하여, 음양팔풍의 소리를 맞이하고, 황종과 중화의 음률을 균등히 하여, 살아있는 무리와 만물의 정기를 열고자 함이었다.
(昔聖人之作樂也, 將順天地之性, 體萬物之生, 故定天地八方之聲, 均黃鐘中和之律,
開群生萬物之情氣)

중국에서 조화의 관념은 음악에서 기원하며, 음악의 조화로 정치가 조화되도록 기능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정치적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생각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서전(書傳) 무일편無逸篇에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어린 조카 성왕에게 신하 주공이 안일함을 경계하도록 하는 대목에서 채침의 주석에 아름다움과 조화로운 정치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嘉, 美. 靖, 安也. 嘉靖者, 禮樂敎化, 蔚然於安居樂業之中也, 漢文帝, 與民休息, 謂之靖則可,謂之嘉則不可. 小大無時或怨者, 萬民咸和也. 乃雍者, 和之發於身, 嘉靖者, 和之發於政, 無怨者和之著於民也, 餘見說命.
가는 아름다움이요. 정은 편안함이니. 가정이란 예악으로 교화되어 거처가 편안하고, 일하는 중에 즐거움이 우거져 있음이라. 한나라 문제는 백성과 함께 휴식하니, 이를 일러 편안하다고 하는 것은 가능하거니와 이를 일러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소인이나 대인이나 혹여라도 원망함이 없다는 것은 만민이 화해를 머금은 것이니라. 옹이란 것은 몸에서 조화로움이 발하는 것이며, 가정이란 것은 정치에서 조화로움이 발하는 것이며, 원망이 없음은 백성이 조화를 짓는 것이요, 나머지 것은 열명편을 보라.

정치에서의 조화로움은 곧 아름답고 편안함으로 된다. 일신의 안락과 조화로움은 편안할 지언정 아름답지는 않다 하였다. 정치의 조화는 사회생활인 생업에 종사하는 중에서도 즐거움이 넘치게 한다. 그것은 또한 음악적인 삶이다. 따라서 음악의 조화가 정치의 조화를 이루도록 하고, 정치의 조화가 음악(美)의 조화를 이루도록 상호작용 해야 하는 것으로 보고 있어, 그 실체와 기능을 따로 분리하고 있지 않다.
중국에서는 이런과정을 통해 조화 -미 -미적정치(예악사상)라는 관념이 만들어진다. 여기에 덧붙여 전체를 요소로서의 음악과 정치의 연관이 아니라, 부분과 전체가 혼융되어 있는 상태, 그대로가 조화라는 개념으로서 존재한다. 서양의 그것이 분화되었다가 다시 종합되는 과정을 거쳤던 반면 중국에서는 분화의 과정을 따로 거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발전해간 점이 주목된다.

2. 고대 그리스에서의 조화
고대 그리스에서 조화에 관한 이론적 흔적은 피타고라스 학파에게서 발견된다.
피타고라스의 ‘조화’ 또한 음악과 연관이 있다.
피타고라스는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사실 오르페우스(Orpheus)교라는 밀교의 지도자였으며 그는 플라톤의 시대에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천체가 운행할 때 다른 물체와 마찬가지로 소리를 내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그 소리가 영속적으로 울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천체들은 일정한 비율로 관계를 맺기 때문에 이 천체의 소리는 특수한 화음을 이루고 있다고 여겼다. 이 특수한 화음이란 훗날 케플러를 천문학에 광적으로 몰입하게 한 저 유명한 화두 “천구의 화음”이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일정한 음의 높이가 현악기의 일정한 현의 길이에 상응한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자신의 오르페우스 종교의식에 사용하는 음악의 비밀을 알아내게 되었고, 이는 더욱 확고한 신념을 부여해 주었다. 이 위대한 발견의 중심에 수(數)가 있었다. 수는 단순한 과학이 아니었으며 세계관이었고 수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는 음악이야말로 조화의 본체로 생각되었다.
이로부터 근대까지 서양의 사상사를 규정한 개념이 성립된다. 질서(Cosmos)이다.

피타고라스학파들의 또 다른 이론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에는 대지구(對地球;Gegenerde)에 은폐된 중심불(Zentralfeure)이 있다. 그들은 모든 경우에 천체들간의 거리를 확고한 수적인 관계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우주를 변함없는 질서로 보고 이 질서에 대해 치장, 장식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Kosmos 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철학대사전 1358쪽 [동녘출판사])

질서가 조화라는 확신은 정치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악법에 의한 죽음에서 윤리적 가치로 정립된다. 그러나 플라톤의 저서 [파이돈]에는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에 한말이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파이돈(전쟁포로로 아테네에 끌려와 노예로 팔리게 되었을 때 소크라테스가 몸값을 치러주어 자유인이 됨)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에케크라테스에게 그날의 일을 소상히 말한다. 마지막으로 사형집행인으로부터 사약을 받아 마시고 독이 서서히 퍼져 하반신이 거의 다 차가워지자 소크라테스는 얼굴에 덮었던 것을 스스로 벗기고 이렇게 말한다.

소크라테스 : 오오, 크리톤, 내가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마리를 빚진 것이 있네. 기억해두었다가 갚아주겠는가?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크리톤이 대답하기를 “제가 갚아드리겠습니다. 그밖에 말씀하실 것은 없으신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대답이 없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파이돈 237쪽 플라톤[홍신문화사])

소크라테스의 유언에서 조화의 개념을 찾고자 한다면 국가질서에 대한 영웅적 수호자의 모습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담담하게 이웃을 배려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플라톤에게서 조화는 이데아 – 우주 – 국가로 이어지는 코스모스에 대한 확신으로 발전해 갔다.

피타고라스에서 영향을 받은 플라톤은 인간의 가청범위내의 여러 가지 조화음을 넘어서는데 까지 조화의 학을 확장시킨다. 인간의 감각적 억견에 나타난 것은 인간만물 척도설에서 주장하듯이 부조화의 상태이지만 단계적으로 상승하여 조화에 이르게 된다. 각자의 일들은 그들의 이데아의 독립적 존재와 같이 독립하여 존재하고, 이 일들의 이데아는 다시 결합하여, 조화에 이르고 급기야 조화가 실체가 된 생명체에 다다른다. 조화롭게 일하는 실체이다. 특히 넓은 의미의 음악은 조화의 본체이다. 플라톤이 “음악을 짓고 일을 하라”는 것은 조화로운 일을 말한다. 우주적으로 그렇다 ; “음성과 청각에 적합한 음악은 조화를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뮤즈에게 봉사하는 지혜로운 이는, … 결코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음악의 목적을 불합리한 쾌락에 두지 않고….. 장차 일어날 부조화를 시정하여 영혼을 자기자신에게 조화시킬 수 있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티마이우스편47).
(평화의 철학 46쪽 [철학과현실사])

철학으로부터 미와 윤리에까지 일관된 코스모스의 체계를 세우려는 플라톤의 시도는 ‘조화음’의 문제에서 더 구체화된다.
그의 국가론 중 위정자의 생활, 수양과 관련된 장의 한구절 이다.

소크라테스 : 슬픔을 표현하기에 알맞는 손쉬운 하모니는 어떤 것이겠나? 음악가인 자네가 설명해주게.
글라우콘 : 그런 하모니는 혼성 리디아조(調), 차중음(次中音)리디아조 및 전조(全調)나 저성(低聲)리디아조 같은 것들입니다.
소크라테스 : 그렇다면 그런 하모니는 버려야 할걸세. 그런 것은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무익한 것이네.
글라우콘 :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 더구나 수호자들에게는 주정뱅이, 문약한 것, 게으른 것만큼 부당한 것은 없네.
글라우콘 :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 그런데 하모니 중에서 문약한 것이나 주석(酒席)에 맞는 따위의 것은 어떤 것인가?
글라우콘 : 이오니아조가 그렇습니다. 거기다 다시 느린 곡조로 되어 있는 리디아조를 들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 그렇다면 그런 것이 군인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글라우콘 :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도리아조와 프리기아조 뿐입니다.
소크라테스 : 난 하모니에 대해 아는 것이 없네. 다만 내가 요구하는 음악이란 용감한 병사가 위기에 직면하여 혹은 결단을 내릴 순간에 힘이 되는 것일세.
(플라톤의 국가론 126~127쪽 [집문당])

그러나 이러한 음악을 중심으로 한 조화의 관념은 과학으로 대체된다. 고대 그리스가 혼융되어 있던 조화관을 수학을 중심으로 분화 발전시키게 된 데에는 해상무역과 군사력을 중심으로 절대적 단일권력을 건설하던 국가건설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피타고라스 때까지 종교와 예술과 철학과 과학이 미분화 된 채로 한 몸이었던 조화관이 과학을 중심으로 분화, 발전되는 사회적 배경을 플라톤은 이상국가 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소크라테스 : 우리가 지금까지 위에서 언급된 것(감각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의 구별-필자주)으로부터 미루어 생각해 보게. 만일 개체가 시각 또는 다른 감각에 의해 충분히 식별될 수 있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실재(實在)로 인도하는 힘은 없네. 그러나 거기에 언제나 대립되는 것이 있어 하나라고도 생각할 수 있고 하나가 아니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 안에서는 지성이 움직이기 시작하네 의혹에 싸인 영혼이 결정을 요구하며 무엇이 절대적인 단일인가를 추구하기 때문이네. 이리하여 하나의 지식은 실재를 관조하게 되네.
글라우콘 : 그것은 단일의 경우에 명백해집니다. 우리는 같은 것을 하나로 보는 동시에 무한히 많다고도 볼 수 있으니까요.
소크라테스 : 결국 1의 경우에 진실이라면 모든 수에 대해서도 진실이겠지.
(……)
소크라테스 :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구하고 있던 지식의 하나이네. 왜냐하면 이것을 배우지 않으면 군사는 군대의 편제와 조직등에 대해서 서툴 수밖에 없으며 철학 하는 자는 생성계(현상-필자주)에서 벗어나 실재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네.
소크라테스 : 우리의 통치자는 군인인 동시에 철학자여야 했지?
(….)
소크라테스 : 그러면 수학은 이 정도로 하고 다음에 어떤 학문이 유용할까?
글라우콘 : 무엇 말입니까? 기하학 이야기군요?
소크라테스 : 그렇네.
글라우콘 : 그것이 전쟁기술에 관계되는 한, 가령 진지의 구축 또는 점령, 군대의 집합, 전개 그 밖의 전투나 행군할 때의 진형(陣形)등을 결정할 경우에 지휘관이 기하학을 알고 모르는데 따라 큰 차이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플라톤의 국가론 305쪽 [집문당])

노예제 국가의 체계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군사, 상업적 요구야말로 고대 그리스의의 과학적 조화관이 분화 발전되게 한 현실적 요구였던 것이다.

3. 고대 베트남에서의 조화
14세기에 편찬된 영남척괴<嶺南 怪>와 그 뒤 백년 뒤의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에 수록된 베트남의 건국신화에는 타민족간의 조화를 명백히 선언하고 있다.
북쪽의 중국과 남쪽의 베트남 양쪽의 혈통을 가진 혼혈인을 자기 민족의 시조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베트남이 중국의 집요한 침략에 맞서 역사상 독립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저력으로 작용하였다. 주변부에 있으므로서 중심부의 간섭으로부터 독립될 수 있고, 문명으로부터 고립되는 것도 피할 수 있기에 주체적으로 중심문명을 취사 선택하여 자신의 문명과 혼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세계사를 보면 조화의 사상이 곧 힘을 만들어낸 사례를 중심문명권의 주변부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락롱꿘 신화와 더불어 동손시대의 청동북 즉, 동고(銅鼓)문화가 고고학적으로 증명해준다.
우선 우리나라의 삼국유사와 같이 유교적 중화사상이 적게 반영된 <영남척괴>의 원문을 보자.

炎帝神農氏三世孫帝明, 生帝宜, 南巡至五嶺, 得 仙之女, 納而歸, 生綠續, 容貌端正, 聰敏夙成,
.帝明奇之, 使嗣位, 綠續固辭, 讓其兄, 及立宜爲嗣, 而治此(北)地, 封綠續爲徑陽王, 而治南方, 號其國爲鬼赤國, 徑陽王能行水府(一作入水), 聚洞庭龍王女, 生崇纜, 號爲 龍君, 代治其國, 徑陽王不知所之(一作 終)  龍君敎民耕稼農桑, 始有君臣尊卑之等, 父子夫婦之倫, 或時歸水府, 而百姓晏然無事, 不知所而然者, 民有事則揚聲呼龍君曰, 逋乎何在(越俗呼父曰逋), 不來以活我些, 龍君則來, 其顯靈感應, 人莫能則.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3세손 제명帝明이 제의帝宜를 낳은 다음에 남쪽을 순회하다가 오령에 이르러 부띠엔( 仙)의 딸을 아내(후처)로 맞이해 데민綠續을 낳았다. 용모가 단정하고, 총명하고 민첩하며, 숙성했다. 제명이 기특하게 여겨 자리를 물려주려고 하니, 데민은 굳이 사양하고 형 데이綠宜에게 양보했다. 그래서 데이에게 북쪽을 다스리게 하고, 데민은 경양왕 徑陽王으로 봉해 남쪽을 다스리게 했다. 그 나라를 씩뀌(Xichqui-鬼赤國)라 했다. 경양왕은 수부에 갈 수 있어(물에 들어간다고도 했다), 동딘권의 딸(洞庭龍王女) 띤롱을 아내로 삼아 숭람을 낳아 락롱꿘( 龍君)이라고 일컬었다.
자기 대신에 아들이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경양왕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락롱꿘은 백성들에게 곡식을 가꾸고 거두어 농사짓고 길쌈하는 일을 가르쳤다. 군신존비의 차등과 부자와 부부의 윤리가 비로소 생겼다. 그는 때때로 물 속에 갔다. 백성들은 편안하게 별일 없이 지내면서, 그 까닭을 몰랐다. 그러다가 백성들은 일이 생기면 롱꿘을 불러 “아버지 어디 계십니까? 와서 우리를 살려주지 않으시렵니까?” 라고 했다. 그러면 롱꿘이 나타났다. 그 신령스러운 감응을 사람이 헤아릴 수 없었다.

하노이 호치민 박물관의 첫 장면이 락롱꿘 신화로부터 출발하는 점을 봐도 사회주의 베트남에서 락롱꿘 신화는 공식화되어 있다. 락롱꿘 신화의 특징이라면 다른 민족의 신화와는 달리 타민족(중국)의 도래로 자기 민족의 시조신이 태어남을 당당히 선포하고 있는 점이다. 북경원인에 필적하는 슬기인간의 유물, 유적을 갖고 있음에도 말이다. 이것은 베트남 역사에서 참으로 중요하다. 모든 민족의식의 경계는 혼혈인에 대한 의식에서 나타난다. 베트남에서는 중국과의 혼혈인을 자기민족으로 거리낌없이 받아들임으로서 중심권 문명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민족의 재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런 결과 북으로는 중국의 끊임없는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문화적 저력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남으로는 훨씬 오랜 문명적 전통을 갖고 있던 중부지방의 참파왕국이 결국 중국문명을 자기문명으로 소화해 내는데 성공한 베트남에 의해 복속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사이공 역사박물관에서 본 참파 문명은 서양의 중세에 묻혀 있던 희랍문명 만큼이나 정교하고 찬란한 것이었다. 만일 베트남이 참파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면 지금과는 완전히 색다른 문명을 창조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참파문명은 베트남 문명에 패배하였는가? 참파는 인도문명의 거대한 성과를 바탕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인도로부터 문명적 독립을 충분히 이룰 정도로 성장한 문명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베트남에게 패배하게 된 원인이 된다. 참파는 중심문명권이었던 인도로부터 독립을 이루었으나, 단절되면서 중심문명권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내부적으로는 성숙되어 갔지만 전쟁은 국가와 국가, 문명권과 문명권의 충돌로 나타난다. 때문에 내부적으로만 완결된 조화의 체계는, 다른 중심문명권까지 흡수하여 조화시키는데 성공한 문명의 체계를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 참파는 중국문명을 토착 문명과 훌륭하게 조화시킨 베트남에 의해 멸망한 것이다.
우리는 베트남의 경우에서 낯선 것과의 조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힘이 된 경우를 볼 수 있다.

(3) 조화 개념의 구조
조화는 역사적으로 자기가 속한 세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서양을 중심으로 한 조화관과 동양을 중심으로 한 조화관은 각각 다르게 발전되어 왔다. 그리고 탈현대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조화관이 세계의 법칙이나 질서가 아니라 자기가 속한 세계의 기획임을 간파하고 조화를 추구하기보다, 조화관 자체가 속해 있는 사회의 구조를 밝히는 데 열중하게 되었다.
물질세계 자체는 카오스이다. 물질세계의 법칙, 즉 코스모스는 인간에 의해 재구성된 세계이다. 인간이 관념적으로 구성한 세계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특수한 연관에 의해, 특수한 속성을 드러낸 객관 세계인 것이다. 근대철학에서 세계의 법칙성보다도 중요한 것은 세계의 독립성이다.
물질 세계 안에서의 특수한 연관과 법칙을 밝히는 것 보다, 물질세계 자체의 구조와 체계를 밝히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되었다. 물질-의식의 관계를 전제로 하여 물질세계를 체계적 관점에 의해 본다면, 세계는 최고로 발전된 물질인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구조이다. 물질-의식의 문제는 세계의 존재와 인식가능성 문제가 그 주요한 관심사이다. 그러나 세계를 구조적 관점에서 파악하면, 세계는 구조의 전제인 관계의 문제가 주요 관심사가 된다. 조화의 문제는 객관세계와 주관세계의 관계로 파악되기도 하였고, 세계와 인간의 관계문제로 파악되기도 했다. 그러나 주관-객관은 이미 사람의 의식세계인 주관적 관념을 중심으로 그와 연관된 세계의 속성만을 다룬다. 따라서 객관은 세계와 등치 될 수 없고, 주관과 연관된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사람-세계의 문제가 진정으로 객관적 실재로서의 세계와, 의식을 가진 최고의 물질적 존재인 사람의 관계를 반영한다.
물질-의식의 관계에도 가치의 문제는 포함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상품분석에서 개인의 가치판단이 어떻게 사회적인 것으로 전화하는가를 명쾌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가치관계가 소멸되고 논리와 법칙만 부각된다면 그것은 이성주의적 기획으로 환원되고 만다. 조화의 문제는 사람과 집단마다 그 관계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이해되어 왔다. 왜냐하면 조화는 사회와 사람간의 문제일 뿐 아니라 자연과 사람과의 문제도 연관되기 때문이다. 조화의 문제는 사회학적 범주가 아니라, 세계관적 범주의 문제이다.
따라서 조화의 개념은 존재론적 법칙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람과, 집단마다 다양하게 나타나는 관계론적 가치로서도 나타난다.
조화의 개념은 가치의 문제에서 뚜렷이 부각된다.
사람-세계의 관계에서 가치의 문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우선 가치의 주체는 사람이다. 그리고 가치는 사람의 욕구의 다양성을 전제로 한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상품분석에서 유용성에 대한 요구로 설명했다.
상품이란 체계에서 사람의 가치추구는 교환과정을 통해 경제적인 일반법칙으로 전화된다. 그래서 상품에 얼마나 개인적인 정성과 가치가 부여되었는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비슷한 상품의 사회적 노동시간에 의해 가격이 결정됨을 보여준다.
이러한 논리틀은 상품이 전세계적인 생활양식이 된 시기의 특징을 잘 말해준다. 이시기까지 사람의 미적활동은 분산적이며 부분적인 의미만을 가질 뿐이었다.
그러나 상품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율의 증가하고, 아예 상품은 없고, 이미지와 브랜드에 의해 자본축적이 이루어지는 시대에서는 상품미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문화이론이 증명하듯 문화자체가 상품을 넘어선 거대한 권력의 기획임을 보여준다. 세계화는 이러한 기획이 각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공격적으로 진행되게 하고 있다.
여기서 상품관계와 미적 관계의 차이를 살펴보자.
상품관계와 관련하여 마르크스는, 우연적이었던 상품의 교환관계가 필연적인 관계로 전화해간 과정을 교환의 기준, 즉 등가물이 된 귀금속의 등장에서 발견한다.

(상품과 상품의 교환을 매개하는-필자주) 이와 같은 제3의 상품은 각이한 다른 상품을 위한 등가물이 됨으로써 비록 협애한 한계내에서 일지라도 직접 일반적 또는 사회적 등가형태를 가진다. 이 일반적 등가형태는 그것을 발생시킨 일시적인 사회적 접촉과 함께 발생하고 또 소멸한다. 그것은 번갈아 또 일시적으로 때로는 이 상품에 때로는 저 상품에 속한다. 그러나 상품교환의 발전과 더불어 그것은 전적으로 특종 상품에 고착된다. 즉 화폐형태로 결정(結晶)된다. 그것이 바로 어떤 종류의 상품과 유착하는가는 처음에는 우연적이다.(….)
상품교환이 그 협애한 지방적 한계를 돌파하고 따라서 상품가치가 인간 노동 일반의 체화물로 발전함에 따라 화폐형태는 일반적 등가물이라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데 천연적으로 적합한 상품에로, 즉 다름 아닌 귀금속에로 옮아간다.
<금가 은은 천연적으로 화폐는 아니지만 화폐는 천연적으로 금과 은이다.>
라는 것은 금과 은의 자연적 속성이 화폐의 사회적 기능에 적합하다는 것으로써 증명된다.
(자본론 1권 1. 110~111쪽. 칼 마르크스. [백의])

상품교환이 우연적이고, 일시적이며, 지방적 한계를 돌파하고 세계적인 것이 된 근거는 상품교환의 기준인 금의 발견이다. 즉 등가일 수 없는 가치관계의 등가물이 등장함으로서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미적 관계에는 이러한 기준, 미적 등가물이 있는가?
아직 인류는 그런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미의 기준은 나라마다 지역마다 상대적 일 뿐이다.
중세로부터 미적규범을 만들려는 여하한 어떠한 노력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까간은 미의 기준이나 미적 관계의 등가를 발견할 수 없는 이유를 미적 관계의 정서적 성질로서 설명한다.

이성이나 논리적 분석이나 권위에의 복종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감정의 정조(Stimme)만이 나에게 ‘아름답다’든가, ‘추하다’든가, ‘비극적’이라든가, 혹은’희극적’이라는 가치평가를 내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누군가 이러한 판단을 논박하려고 할 경우, 나는 단호하게 그것을 옹호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판단속에는 대상의 특질뿐 아니라 내자신의 고유한 체험까지도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직접적인 정서적 지각이 올바르지 않다고, 누가 그리고 어떠한 방법으로 증명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거부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논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미에 대한 논쟁은, 논쟁자 중 한사람이 대상을 지각하고 체험할 때 상대방을 자신의 입장으로 끌어들인다던가, 혹은 상대방을 도와 그가 자신이 느끼는 것과 똑같이 대상을 감지하도록 만들기 전까지는, 아무런 성과없이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적 지각의 특수한 난점들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미학강의1 117쪽 까간 [새길])

미는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 공감되는 것이다. 일치가 아니라 어울림이다. 상품과 함께 가치관계인 것은 맞지만 가치의 형태가 다른 것이다. 상품관계에서는 가치의 크기가, 즉 양적 구별이 중요하다. 따라서 화폐상품은 순전히 양적인 물건이여야 한다. 즉 그것을 마음대로 작은 부분으로 분할할 수도 있으며, 또 이 작은 부분들을 합칠 수도 있는 그런 물건이여야 한다. 그런데 금과 은은 이런 속성을 천연적으로 갖고 있다.
그러나 미적 가치는 가치의 크기나 양이 문제가 아니라 질이 문제이며 이 질은 또한 감성적으로 판단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내용을 내포한 형식만이 감성적으로 판단 가능하다. 우선 사람의 의식형태 중에서 감성적인 형태는 어떤 것이 있는가?
상상, 소망, 표상, 희망, 이상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이러한 형태는 논리적이 아닌 감성적 형태이다. 그러나 조화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내용을 포함한다. 내용은 복잡하고 심오한 구조를 갖는다. 형식은 내용의 구조와 질서이기 때문에 형식의 인식이나 가치판단을 위해서는 내용과 형식을 관통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앞서의 다양한 형태 중에 어떤 것이 이러한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형태일까? 그것은 이상이다. 이상은 심오한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전망적인 요구의 형태이며, 본질적인 요구의 형태이다. 그러면서도 생생한 형상을 내포하기 때문에 이상은 사람을 추동하는 힘이 있다.
고대 중국의 맹자는 이루(離婁)편에서 이러한 추동력을 예악(禮樂)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孟子曰 仁之實事親是也, 義之實從兄是也, 智之實知斯二者弗去是也, 禮之實節文斯二者是也, 樂之實樂斯二者, 樂則生矣, 生則惡可已也, 惡可已則不知足之蹈之, 手之舞之.
맹자 왈, 인의 실제는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고, 의의 실제는 형을 따르는 것이고, 지의 실제는 이 두 가지를 알고서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고, 예의 실제는 조절하고 꾸미는 것이다. 악의 실제는 그 두 가지를 즐거워하는 것이니, 즐거워하면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르는 마음이 생긴다. 그런 마음이 생기면 어찌 악 할 수 있겠는가? 어찌 악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이 생기면 곧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발을 구르며 춤을 추게 된다.
(맹자. 이루 장구 상 孟子. 離婁章句上 27번째 글)

인과 의와 예가 도덕적 가치라면 악은 미적 가치이다. 도덕적 이상이 따로 놀지 않고, 즐거움 속에 통일되는 경지에 이르면, 그것은 사람의 실천을 절로 이끌어 내는 추동력으로 작용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세계의 관계에서 이상을 중심으로 한 형태가 미적 조화의 기준이 된다. 조화, 즉 미적 조화의 기본구조는 사람-이상-세계가 관계의 축이 되는 구조이다.
그렇다면 조화의 현실적인 모양은 무엇일까? 이것은 조화를 둘러싼 주위체계를 사람을 중심으로 파악할 필요를 제기한다.
사람을 중심으로, 더 구체적으로 좁히자면, 사람의 생활을 중심으로 해서 봤을 때 자연은 생활의 조건이며, 역사는 생활의 과정이며, 문명은 생활의 결과이다.
조화는 자연과 역사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평등이 사회역사적 개념인 것과 구별된다. 자연과 역사는 사람의 생활속에서 조화되며 그 결과물로서 문명을 낳는다. 문명은 사람이 자연과 역사와의 조화를 통해 도달한 현상태이다. 따라서 조화는 곧 문명이다. 조화의 사회적 형식은 문명이며, 이를 규정하는 동력은 사람의 이상이다.

(4) 조화의 기능
조화는 즉, 문명은 자연과 사회역사에 어떤 기능을 하는가? 그 영향력이 곧, 조화의 기능이다. 평화운동의 영역을 정치적 평화운동, 경제적 평화운동, 문화적 평화운동으로 구분할 때, 평등의 문제가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면, 조화는 문화적 평화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다. 이는 조화의 사회적 현실태가 문명이란 사실과 연관된다.
조화와 그 현실태로서의 문명은 다른 인접한 체계에 어떻게 기능 하는가.
광범하고 추상화될 위험을 피해서 몇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도록 한다.

1. 렘브란트의 소묘
첫 번째는 렘브란트의 에칭작품인 <죄의 사함을 설교하는 그리스도>이다. 렘브란트의 저 유명한 자화상이나 직물조합의 간부들은 반드시 암스텔담의 중앙박물관에 있는 원화 앞에서 씨름해야지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는 반면, 그의 에칭 작품들은 인쇄본으로 봐도 되는 편리함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그의 에칭 작품은 그가 주문을 받아 그렸던 공무적인 성격의 작품들 보다 훨씬 훌륭하게 그의 시대와 그의 사상을 탁월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이 일련의 시리즈 작품을 위해 성서를 달달 외울 정도로 성서에 깊이 몰입해 있었고, 유태민족의 초기 역사를 더 잘 해명해 줄만한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시나고그(유태교의 회당)에 빈번하게 다니며 암스텔담의 유태인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그의 방대한 공부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서 해석에 사용한 근거는 자신의 주변에서 목격한 실생활이었다. 그래서 그의 소묘는 여지껏 어떤 화가도 다루지 않은 성서 장면일 뿐 아니라 과연 성서에 이런 장면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여서 이것이 성서 설명화인지, 자기가 관찰한 현실에 성서시대의 복장만 입혀놓은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이다. 어쨌든 그에게서 수천년간 자유로운 해석이 금기시 됐던 성서의 권위에 지식과 경험을 완벽하게 결합할 줄 아는 탁월한 사상으로 도전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예수의 설교>로 들어가 보자. 이 그림은 문예출판사의 [예술과 문명] 146쪽에 실려있다. 중앙에 설교하는 예수가 있다. 그러나 그 배경은 탁트인 언덕이 아니라 음침한 도시의 뒷골목이다. 예수의 표정은 예지에 가득찬 모습이 아니라 웬지 피곤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이어서 머리에 그려진 광배와 섬세한 손짓이 아니면 그가 예수라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표현이다. 사람들은 제 각각이어서 장사꾼으로 보이는 몆 사람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보자는 투로 그저 서 있고, 몇 사람은 졸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고, 하단부에 있는 어린아이는 이런 상황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땅바닥에 엎드려 낙서하는데 열중이다. 성서의 권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림이다. 차라리 사실주의 풍자화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한세기 뒤에 영국의 정치제도에 대해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는 호가드의 저널리즘적 삽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신적 깊이와 품위를 보여준다. 나는 이것을 진정한 조화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케네스 클라크의 평을 인용해보자.

모든 종류의 인간과 그들이 놓여진 온갖 상황에 동정을 품으며 인간의 다양성에 대해 관용하다는 것이, 만약 내가 생각하는 대로 문명생활의 특질이라고 한다면 렘브란트는 문명에 대한 위대한 예언자의 한사람이었습니다.
(예술과 문명. 274쪽 케네스 클라크 [문예출판사])

동정과 배려, 다양성에 대한 이해와 관용. 이것은 올해 세계 평화문화의 해에 많이 들었던 평화문화 건설의 슬로건 그대로이다. 이것이 개인의 심리적 차원에서 가능하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함께 그에 대한 긍정적인 가치평가가로부터 도출된 태도가 필요하다. 사람이 낮선 자와의 관계에서 맺는 4가지 태도, 추종하기, 무시하기, 눈치보기, 배려하기중 배려하기의 관계 속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사회적 차원에서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이를 화해해나갈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렘브란트 개인에겐 탁월한 시대의 천재로서 자질이 있었지만, 시대는 달랐다. 렘브란트는 르네상스의 이성의 역사와 더불어 종교혁명의 실천적 양심의 역사를 체화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정신은 네덜란드 초기에 사람들의 문명을 만드는 시대정신이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여가시간을 만들어준 부르조아 사회 초기의 시대정신은 부르조아들로 하여금 고상한 취미의 하나인 튜울립 가꾸기 열풍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얼마안가서 이런 취미는 금과 귀금속 모으기에 열풍으로 이전되어 가기 시작했다. 상업자본의 규모는 커져가기 시작했고, 대형 함선들이 제국주의 전쟁과 수탈에 나서던 시점이었다. 렘브란트의 예지가 이런 흙 구렁에 있었기에 그 빛을 더 발하는 것이다. 조화와 그 체현으로서의 문명의 기능은 바로 정치와 역사의 암흑기에 예지로서 인간의 고귀한 이상을 확인시켜 준다는데 있다. 비록 시대를 암흑에 떨어뜨린 장본인들조차 그가 보여준 이상에는 공감하고 그의 천재를 인정하게 했다는 점에서 문명의 기능이 정치경제의 부산물로만 취급될 수 없다.

2. 베트남의 타일
베트남의 전통 집은 땅바닥에 간단하게 나뭇잎을 엮어 얹은 초막이다. 프랑스의 오랜 지배로 현대식 집은 천편일률적이라 할 정도로 앞에서 보면 좁고 옆에서 보면 긴 유럽식 콘크리트 가옥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이 두 양식의 집에 공통적인 양식이 있다. 문턱(doorsil)이 없는 것이다. 하물며 샤워를 함께 하는 화장실의 경우에도 물이 흘러나올 염려가 있는데도 문턱을 두지 않은 것을 보고 무척 신기하게 느껴졌다. 문 턱없는 문은 이들의 건축양식이 안과 밖, 나와 너, 사람과 자연을 구별하지 않는 개방적이고 조화적인 베트남민족문화의 특징으로 이해되었다. 베트남 현대가옥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는 바닥재로 쓰이는 타일이 무척 발달해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바닥에 장판을 까는 것과는 무척 대조적이다. 기하학적으로 현란할 정도의 타일은 독특한 미감을 안겨준다. 건축재료로서의 타일은 저 유명한 알람브라 궁전에서부터 유럽전역에 퍼졌던 동서양 문화교류의 증거이기도 하다. 이슬람사원의 화려한 타일장식이 보여주는 절제와 영원의 이미지. 네덜란드화가 페르메르의 그림에 등장하는 거실 바닥의 이성적이고 기하학적 이미지. 베트남의 후에 왕궁에서 볼 수 있는 현대적이기까지 한 타일 부조 형상. 타일의 미적 용법은 많다. 베트남의 타일 문화는 실용적으로는 청결과 쾌적함을 주지만 미학적으로는 동서양이 자유롭게 만나는 조화의 상징이다. 타일만을 본다면 국적불명의 문화처럼 보일지 모른다. 문턱 없는 문과 타일 문화의 만남은 베트남의 조화정신이 다른 나라의 그것과 다른 것임을 보여준다.
베트남은 호전적인 민족이 아니다. 그러나 침략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응하여 주체를 만들었다. 베트남은 중국의 침략을 완전히 굴복 시켰지만, 몽고족이나 청나라나 일본처럼 중국을 지배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경우는 다르겠지만 호치민의 시대에도 디엔비엔푸에서 완전한 승리를 했지만, 불만족스러울 정도의 정치회담으로 전쟁을 끝냈다. 이것은 베트남이 역사적으로 중세에는 중국, 근대에는 프랑스의 주변부였지만 열등감에 빠지지 않고 주체를 세워 평화를 지향해온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가열 찬 항전을 할 수 있었던 힘도 사실은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이란 역설이 베트남엔 어울린다. 보구엔지압의 말로 기억되는데 ‘우리 인민은 전쟁을 원치 않는다. 그렇다고 전쟁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는 말에서 조화가 가진 또 다른 기능을 발견하게 한다.
그것은 유럽의 부르조아 사회에선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결론부터 서둘러 말하면 주체가 전제된 조화이다. 다양성과 조화의 교리는 자칫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주체만을 배타적으로 강화하는 불평등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서양에서 서술한 세계철학사를 보면 헤겔 이후 세계철학사는 동양과 주변부의 철학사를 열심히 첨가시켜 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철학사 서술은 동양과 주변부의 철학사를 서양철학사의 하위체계로 편입하는 결과로 끝났다.(이에 대해서는 조동일 교수의 [철학사와 문학사 둘인가 하나인가] 25~60쪽을 참고하시라)
조화를 주장하는 논리에 불평등이 스며들어 오히려 그런 불평등을 은폐하는 구실을 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베트남민족에 스며있는 조화의 문명은 자신의 주체를 당당히 요구하고, 인정받은 전제에서의 조화란 점에서 세계문명사의 새로운 모델이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집필한 세계철학사에는 다른 나라에선 볼 수 없는 ‘베트남철학사’ 항목이 추가되어 있다. 프랑스역사가 유일하게 극복하지 못한, 아니 서양의 역사가 유일하게 극복하지 못한 낯선 자에 대한 주체의 동요가 그 배면에서 읽어진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은 그런 예를 들어 자만하거나 자기의 패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이런 견해가 베트남의 평범한 서민의 보편적 의식이란 점을 말하기 위해 옮긴다.
디엔비엔푸 전적지를 돌아 볼때의 일이다. 베트남의 인민군대가 점령한 프랑스군 사령부에서 얼마안 되는 거리에 프랑스군인 추모비가 서 있었다. 이것은 디엔비엔푸 전투에 참전했던 프랑스 군인이 전쟁이 끝난 후 자기의 사재를 들여 만든 프랑스군 위령비였다. 우리가 이곳을 물어 찾아가는 사이 농사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동네사람들이 구경난 듯 다가오길래 그 중 아무에게나 물었다.
“디엔비엔푸가 어떤 곳인데 이곳에 프랑스군인의 추모비가 서있느냐? 당신들의 이웃이 그들의 손에 수없이 죽어갔는데…. 이것을 보면서 당신들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 ”
그러자 아직도 당시 전투복을 작업복으로 입고 있는 한 장년이 말했다.
“두가지다. 하나는 이 추모비 자체가 자신들의 패전을 시인하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이미 전쟁은 끝났고 이 군인들도 전쟁이 좋아서 참전한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도 알고 보면 우리만큼이나 불쌍하고 억울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찔했다. 평화운동가나 득도한 사람이나 할 것 같은 얘기가 평범한 동네사람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을 공부하러 갔다가 그 전쟁과 항전의 원인이 평화였다는 역설을 배우게 됐다. 그의 말엔 한번 적은 영원한 적이란 형이상학적 관념론 따윈 없었고, 전쟁이 끝나면 적도 없다는 변증법의 탁월한 적용만이 있었으며, 전쟁을 일으킨 진짜 세력과 거기에 동원될 수밖에 없는 선량한 국민을 정확하게 구별해서 볼 줄 아는 뛰어난 과학적 분별력이 있었다. 1946년 평화협상을 하자고 불러놓고 비아리츠 해변에 떨어뜨린 채 시간끌기를 하던 프랑스에 대해 협상을 파기하지 않고 비아리츠의 프랑스 주민들과 친숙해져 나중엔 프랑스언론에서 최고의 인기와 ‘공산주의의 프란체스코 수도사’란 별명을 얻어낸 호치민의 담대함과 포용력이 베트남의 촌사람에게까지 정확히 이해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프랑스가 또 서구가 가져본 적이 없는 조화의 사상이며, 새로운 문명의 덕목이었다. 그 때문에 아마도 프랑스는 또 서구는 베트남에서 배우려고 하는 것이다.
주체를 당당히 요구하고 인정받는다고 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낮선 자로서 진정으로 존중받고 이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 우리만이 아닌 낮선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은 진정한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화가 성립되기 이전에 이러한 차이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무엇이 가르쳐 지고, 무엇이 배워져야 하는 가를 정확히 이해하게 한다. 상대를 낮선 자로, 진정한 주체로 인정할 수 있는 문명과, 이러한 문명에 대한 훈련은 정치군사적 충돌을 막고, 자연과 역사의 체계가 거꾸로 작동하는 것을 막을 수 있도록 기능한다.
진정한 조화의 문명은 자연과 역사를 사람의 아름다운 이상을 중심으로 생활화시키는 힘을 갖게 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이 조화의 기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