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룬동론4-평등과예술2003/03/03

평등과 예술
(1) 평등
1) 차이에 대하여
2) 동등에 대하여
3) 사람의 태도에 대하여
4) 질적비약에 대하여
5) 평등사상의 역사
6) 평등에 대하여
7) 평등과 예술

(1) 평등
평등은 자연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개념이며 역사적 개념이다. 비록 루소의 자연법 사상이 평등주의에 기여한 몫은 크지만 평등은 주어진 것도 이미 존재하는 관념적 권리도 아니다. 평등의 실현은 사회의 구조변혁이 전제되어 있다.
평등은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이해의 문제와, 관용의 문제등 태도의 문제가 나선다. 그러나 이해는 차이 극복의 결과이다. 관용은 평화만들기의 중요요소이긴 하지만 관용이라는 이성적 계획이 역사적으로 실패한 사실에 대해서도 주목해야한다.
우리는 평등의 철학적 원리를 발견하기 위해 차이와 동등, 사람의 태도문제, 동등으로의 질적비약, 동일로서의 평등등의 개념들과, 평등사상의 역사, 그리고 평등사상의 기능적 측면으로서 평등예술에 대해 총체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1) 차이에 대하여
평등은 동등함을 내포하지만 획일적 동등은 아니기에 차이를 전제로 한다.
차이란 이질이다. 이질이란 타자이다. 타자와 주체는 동등하지 않다. 우리가 타자와 대화할 때는 항상 어딘가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즉 동등한 상태가 아니거나 불평등하다.
공상적 사회주의의 꿈을 가졌던 프루동이 실패한 것은 이 불평등한 전제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루동은 단순상품생산자들이 노동생산물을 직접적으로 교환하는 장면에서 존재하는 듯이 보이는 ‘평등’과 ‘정의’ 에서 개인과 사회를 이어주는 관념적인 매개물을 찾아냈다.
(철학대사전 1370쪽 동녘)

그러나 원시시대의 물물교환에서조차도 교환은 평등한 상태나 정의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도, 이를 통해 지양되지도 않았다.
마르크스는 이 교환(소통)관계의 불평등성, 비대칭성에서 출발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이 교환관계를 가치형태로 논하고 있다…속된 말로 하자면 그것은 바로 파는 입장과 사는 입장의 비 대칭성이다. 이 비대칭성은 결코 지양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화폐와 상품이라는 관계의 비대칭성 또는 자본과 임노동이라는 관계의 비대칭성으로 변형될 뿐이다. 마르크스의 업적은 본인의 말대로 교환의 기저에서 그러한 비대칭성을 발견한데 있다.
(탐구1 19쪽 가라타니코진 [새물결])

‘사회적’이란 집단의 합의와 그를 통한 안정과 조화와 질서의 개념이 아니라 정반대로 인간의 주관적 의지와는 관계없는 자연사적 개념임을 발견한 것이다. 여기서 말한 자연은 루소의 개념과 정반대로 카오스의 개념이다. 즉 사회 또는 사회관계는 영원한 타자인 것이다. 인간의 주관적 의지가 사회에 목적의식적으로 관철될 수 있는 것은 당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목숨을 건 도약’을 통해서다.
정의라고 해서 반드시 승리하지 않으며, 평등을 희망한다고 해서 평등이 성취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프루동의 관념적 ‘평등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상품생산을 영구화하는 동시에 <화폐와 상품간의 대립>을 제거하려고 하는, 다시말하면 화폐 그 자체를 제거하 려고 하는 -왜냐하면 화폐는 오직 이 대립에서만 존재하는 까닭에- 소부르조아적 사회주의의 술책을 상술한 바 에 의하여 평가해보라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법왕을 폐지하고 천주교를 존속시킬수도 있을 것이다.
(자본론1권 108쪽 마르크스 [백의])

사회관계의 차이, 비대칭성, 불평등성으로부터 어떻게 평등의 실현이 가능할까?

2) 동등
평등은 차이와 함께 동등성을 자기요소로 포함한다. 차이에 대한 전제가 가려지고 동등성만이 평등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따라서 차이에서 동등에 이르는 과정은 신비화되거나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차이에서 동등으로의 변화의 비밀을 풀기 위해 소통관계를 중심으로 동등성의 문제를 고찰해보자. 이를 위해 타자라는 개념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타자는 ‘낯선 것’이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이지만 아직 인식과 실천의 대상이 되지 못한 낯선 존재인 것이다. 타자와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동등한 것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화는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타자와 주체의 관계는 말하고- 듣기(대화) 이전에, 가르치고- 배우기의 불평등한 관계이다.
가르치고 배우기의 어느 정점에서 동질성이 양적으로 증가되며 질적으로 비약하는 지점에서소통은 가능해진다.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은, 또는 대화가 된다는 것은 타자의 세계가 아니라 서로가 같은 세계에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안에 해결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다.
달리말하면 조건이 성숙하기 전까지 대화를 피하고, 조건이 성숙했을 때 대화하는 것도 해결을 위한 방법인 것이다.
물론 조건을 만들어가기 위한 과정에서 대화를 수단으로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가르치거나 배우기이지 대화는 아니다.
즉 대화란 평등한 상태에서 가능하며, 대화를 위한 노력은 다름 아닌 가르치고 배우기를 통해 불평등을 해소해 가는 과정이다. 평등한 상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것은 하나의 질적 비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지난 시간 강의의 화두중 하나였던 ‘목숨을 건 비약’도 마찬가지이다.
대화를 할때 마음을 터놓고 진실하게 대화를 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있다. 이럴 때 대부분은 질적비약이 일어난다. 그러나 반드시 모든 경우에 질적비약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적인 주체간의 사회적 대화가 가능한 것은 서로의 동등성에 있다. 이러한 동등성은 오직 소규모의 사적 관계에서만 특수하게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적 관계에만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이러한 특성이 조직관계나 국가관계등 모든 사회관계에 절대적 타당성을 가지는 듯이 생각하고, 사적 관계의 갈등 해소방법을 국가간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시키려는 모양으로 나타난다. 또한 소모임을 꾸리는데서 성공한 경험만으로 대규모의 조직과 기관을 경영하려다가 실패하는 것은 관계의 질적비약이 갖는 신비성, 물신성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평등주의자들이 국가적 대안을 마련하는 것을 포기하고 종종 공동체적 대안을 마련하는 것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적차원의 문화형식을 절대화하여 구조개혁조차 사적인 문화형식으로 해결하려고도 한다. 이러한 시도는 부분적 대안이 될 수 밖에 없다.

타자와의 대화가 가능해지는 질적 비약은 어떤 상태를 말함인가?
동질이 이질을 압도한 상태이다. 각각의 차이가 여전히 존재함에도 동질 또는 등가가 차이를 압도하는 상태이다. 몇 퍼센트가 되어야 압도한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단 1퍼센트로도 압도 될 수 있으며, 99퍼센트로도 압도되지 않을 수 있다. 압도란 양적축적을 요구하지만 양적 개념이나 산술적 개념자체는 아닌 것이다.
대화는 가치의 개념이다.
평등한 관계를 위한 타자와의 질적 비약에 숨겨진 가치적 요소는 결국 당사자인 사람에게서 찾아져야 한다. 당사자인 주체의 그 어떤 요소가 타자와의 질적 비약을 가능하게 하는가?
질적비약이 가치관계에서 가능하므로 그 관계를 이루는 요소 또한 가치개념과 동형적이어야 한다. 관점과 태도와 같은 가치적 요소가 바로 동력이다. 강의 4 통일기행연구의 철학적 기초에서 공부했던 주체의 관계를 다시 기억하기 바란다. 주체가 맺는 4가지 태도에 의해 상대와의 소통은 서로 다른 결과에 이른다. 배려하기의 관계에 있을 때와 추종하기의 관계에 있을 때 양적축적의 기준은 전혀 다를 수 있다. 또한 논리적 견해나 이성은 질적비약의 과학적 근거를 이루긴 하지만 동력이 되진 못한다.
(2003.3.3수정)

3) 사람의 태도
사람(주체)의 태도는 다른 주체와의 관계에서 4가지가 있다.
추종하기는 자신의 주체를 버리고 상대의 주체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태도이다.
무시하기는 상대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주체만을 고수하는 태도이다.
눈치보기는 상대의 주체나 자신의 주체를 상황에 따라 인정하는 태도이다.
배려하기는 자신의 주체와 상대의 주체를 모두 인정하는 태도이다.
추종하기와 무시하기에서 다른 주체라고는 하지만 그것을 타자라고 볼 수는 없다. 추종하거나 무시하기는 전혀 반대의 현상으로 보이지만 관계의 본질에서는 동일하다. 추종하거나 무시하기 위해서는 대상주체든 자기주체든 주체만이 있다. 타자의 존재 자체가 없다. 추종하기는 자신의 주체를 포기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상대주체를 추종함으로써 자기 주체를 확장하거나 고착화시킨다. 무시하기는 자기 주체만을 옹호한다. 추종과 무시는 타자와의 경계가 없다. 경계 없음은 자기 반성과 성찰의 불필요로 연결된다. 자기반성 없는 자아, 자신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아에겐 확고부동한 자기의 세계만이 존재한다. 독선과 독재의 강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토록 강해 보이는 자기의 세계는 역설적이게도 주체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반영물일뿐이다. 가장 자기 세계가 강해 보이지만 핵심은 주인 없는 구조인 것이다. 이런 태도가 자기파괴인 자살과 허무 염세주의와 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눈치보기는 때론 자기세계만을, 때론 타자와 선택적으로 관계 맺는다. 때론 타자에로 비약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태도는 가능성의 편에 서있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을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이 약함으로 해서 끝없이 동요한다. 동요하는 주체의 태도는 기회포착과 절충에 민감하며 이를 자기 세계관으로까지 갖는다. 눈치보기가 종종 역사적으로 타자와의 조우에 성공하는 것은 가치문제가 필연법칙이 아닌 우연과 구체적 상황의 요소를 중요한 계기로 포함하기 때문이다.
배려하기는 주체, 즉 자기에 대한 인정을 기반으로 한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반성적 자아와 실천적 자아를 포함한다. 주체는 이를 통해 자기의 한계를 깨닫고 타자를 지향하게 된다.
타자를 인정하고 타자에 다가서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배려하기의 본질이다. 자기를 버리므로서 타자를 향해 목숨을 건 도약을 시도할 수 있는 상태, 그것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사랑 또는 배려의 자세만이 진정으로 타자를 인정하고 타자에 다가서려는 태도이다.
주체가 타자를 향해 배려하기의 태도를 가질 때만이 둘 사이의 질적 비약이 가능할 수 있다.
태도란 가치 판단등 가치적 관계에서 개방성과 폐쇄성을 결정하고 조절하는 요인이다.
타자와의 대화를 나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나 대화는 나만으로 되지않는다. 타자와의 질적 비약을 요구한다.

4) 질적 비약
질적 비약이란 무엇인가?
앞서 질적비약은 타자와의 동질이 이질을 압도한 상태라고 말하였다.
질적비약이라는 사실 자체에만 주목하면 모든 요소는 총합이상의 세분화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각각의 요소가 서로 다른 구조와 관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요소의 어떤 측면들이 동질성을 유지하는가, 이질적 요소로 변하는가를 관찰해야 한다.
우선 각자에게 있어서 질적 비약은 타자가 가지고 있는 이질적 요소의 증대라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주동적 요소가 되면 전체구조는 이질적 요소를 중심으로 이질화된다. 나라고 믿고 있던 세계가 흔들리고 타자의 차이와 이질성이 내 안에 충만하게 된다. 이 과정은 둘 사이에서 동질성이 증가하는 과정으로 된다. 그러나 이 과정까지는 요소가 증가하고 있을 뿐 질적 비약이 일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주동적인 측면의 변화가 전체의 변화는 아니므로 새로운 주동의 요구에 의하여 동질과 이질간의 투쟁이 일어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주동은 피동으로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질이란 구조적 측면에서 보면 공고한 구조, 유기적 구조이다.
이는 혼합적 구조나 기계적 구조와 상대된다.
결국 질적 비약이란 새로운 요소에 의해 새로운 구조, 유기적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질적비약이 아닌 적응, 교류 과정에서 동질과 이질이 기계적, 혼합적 구조를 만드는 것과 상대된다.
예를들면 아무리 상대에게 들인 시간과 공이 많아도 연인이 되지 못하고 친구로만 남는 경우는 기계적 관계로만 남고, 새로운 유기적 관계를 만드는데는 실패한 때문이다.
사회주의 베트남을 예로 들어보자
베트남 사람들에게서 혁명과정을 통해 이룩된 역사의식과 관용의 정신은 유기적으로 결합된 것인 반면, 개방정책이후 서양문명을 배우는 적응과정에서는 베트남적인 동질과 서구적인 이질이 기계적으로 혼합되어 있다.
사회주의 혁명과정에서 베트남적인 것들이 혁명의 내용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데 성공하여 베트남식 사회주의 구조를 만들었듯이 개방정책과정에서도 사회주의 베트남적인 것들과 자본주의적인 것의 유기적 구조를 만들어내고자 할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경쟁의 요소를 도입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경쟁의 구조와 자본주의적 경쟁의 구조가 만나는 접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베트남은 자연과 역사와 문명에서 그 동질요소를 찾아내고 질적비약을 통해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질적비약에서 동질과 이질은 역사적 측면에서는 ‘계승과 혁신’으로 표현된다.
계승과 혁신의 개념 속에는 동질성의 유지와 이질성으로의 전환이 내포되어 있다.

5) 평등사상의 역사
평등의 문제는 결국 질적 비약을 통한 새로운 구조의 문제이다.
지역, 계급, 계층, 민족의 영역에서 진정한 타자를 발견하고 질적 비약을 통해 새로운 구조가 만들어질 때만이 평등은 달성된다.
평등과 관련된 사상의 발전을 돌아보자!
루소의 평등주의는 자연법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자연법이론에 따르면 신이 의도했던 자연적 위계질서는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인간은 공통적인 본성을 갖기 때문에 기본적인 신체적, 정신적 욕구에 있어서 동등하며 따라서 권리와 의무에서도 평등해야 한다.
고드윈(1756~1836)은 자신의 저서인 <정치적 정의에 관한 탐구>에서 국가에 대한 적대감과 평등주의를 결합시켰다. 이 같은 반국가 의식 때문에 그는 무정부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직업의 전문화를 계속 유지시키고자 하면서도, 상품교환은 중지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기부해야 한다고 하는 공상적인 면을 보였다. 그는 평등의 불완전한 구조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개인간의 인격적 조화로 풀고자 한 것이다.
피히테(1762~1814)는 <폐쇄상업국가>에서 평등한 이상사회를 제시하였다. 그는 루소가 자급자족적 가족 경제로 되돌아가려고 시도했던 것과 달리 사회적 분업이 진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국가가 노동력 계획을 수립하고 직업을 관리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부의 유출과 계획의 혼란을 막기 위해, 무역전쟁의 끊임없는 위협으로부터 이 계획을 보호하기 위해 즉각적인 무역의 독점이 필요하며 외국과의 무역을 점진적으로 종결시켜나가기 위한 폐쇄상업국가를 제안한다. 칸트가 상업상의 이해관련이 객관적으로는 전쟁억제기능을 수행한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피히테는 그 반대로 상업상의 이해관계가 군사적 대결로 나아가는 필연성을 간파했다. 그러나 독일의 낙후한 상황하에서 현존하는 절대주의적, 반봉건적 신분국가를 부정하지는 못했다.
그의 수많은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각은 나치즘에 의해 악용되었다.
평등 공산주의 사상가인 부오나로티는 1828년 <평등을 위한 음모>에서 자연법 이론에 프롤레타리아적 내용을 적용하여 인간의 사회적 성격도 하나의 자연적 속성이라고 파악했다.인간의 자연적 권리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연적 상태에서 생겨난다고 보고, 모든 혼란은 돈과 권력을 불평등하게 분배하는데서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라도 기술과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상태에서만이 비로소 개인의 능력을 자유롭게 전면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이해가 미치지 못했다. 평등과 함께 조화의 문제에 대해 답을 갖지 못했던 평등공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충동을 표현해주는 것으로서만 정당했을뿐,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의 주장을 가지고 자본가들에 대항해 싸우도록 고무하는 선동수단으로서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평등사상은 사회주의 혁명, 민족해방혁명의 과정을 거치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새로운 유기적 구조를 만들어 내는데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동구 사회주의실패이후 국가적 차원에서의 혁명을 무색케 할만큼의 국제적 자본주의 체계의 공세는 평등의 문제를 세계적 구조에서 다시 고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경제적 차원에서는 세계적 불평등의 시원지인 IMF관리체계에 대한 문제제기로 나타나고 있다.
“현재의 빈곤은 인적 물적 자원의’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실업과 전세계적인 노동비용 최소화를 기반으로 한 범세계적 과잉생산체제의 결과다. 앞으로 여러 해 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 세계금융위기는 쉽고 간단한 ‘해결책’이 없다. 각국정부와 워싱턴의 국제기구들에 대한 단순한 비판이 곧장 사회적 행동의 기초가 될 수는 없다. 은행과 다국적 기업들을 포함해서 금융세력이 정확한 타깃이 되어야한다. 사회운동과 민중조직은 국내외 연대를 강화하여 이 같은 파괴적인 경제모델을 통해서 이득을 취하고 있는 다양한 금융 이해관계자들을 목표로 설정해야 한다.”
(빈곤의 세계화 28~29쪽 미셸초스토프스키 [당대])

군사적 측면에서는 핵확산금지조약, NMD(국가미사일방어체계), TMD(전역미사일방어체계)등 여러 군사적 협약들이 미국의 일방적인 군사적 우위만을 보장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로 나타나고 있다. 20세기 평화운동의 괄목할만한 성과를 기록한 국제대인지뢰금지켐페인의 활동은 이러한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 불평등주의에 대해 국제시민운동이 미국과 대항하여 첫 번째 승리를 거둔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
2차 대전후 60~70년대의 남북문제를 겪으면서 도출된 요한 갈퉁, 베티 리어든등 현대 평화연구자들은 평화개념의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의 변화로 평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 이에 반해 전쟁이 없는 상태뿐만 아니라 사회정의와 인권이 보장되는 상태를 평화로 보는 적극적 개념도 있다. 이를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라고 한다. 이것은 단순히 폭력이 없는 상태만이 아니라 평등한 기회, 권력과 자원의 공정한 분배, 공평한 법적 보호와 집행을 통해 사회정의가 보장되는 상태를 평화로 정의하는 것이다.(Galtung) 나이로비 세계여성대회문서도 평화를 ‘전쟁, 무력갈등, 군사적 점령, 외세개입과 같은 폭력을 방지하고 강제력의 역할과 위협을 감소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사회,경제적 정의, 평등, 완전한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향유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의하고 있다(The Nairobi Froward-Looking Strategies for the Advancement of Women(FLS) 1985, para. 13). 그러므로 평화연구자 베티 리어든(Betty Reardon)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폭력을 봉쇄하며 지구를 보전하는 인간답고 공평한 지구적 사회 조건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가로막는 빈곤과 인권 침해를 야기하는 불의와 불평등이 종종 국제긴장과 불신과 무력적 위협과 무력갈등의 뿌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Betty Reardon, p. 5).
(여성평화운동지도자 자료집 이현숙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이러한 현상은 사회주의 평화론에서도 비슷하게 발견되는 현상이다.

평화는 전쟁의 결여상태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그에 따른 사회적 관계의 필연적 귀결이고(…)”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전쟁을 그 뿌리에서부터 완전히 제거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며 오직 노동계급만이 ‘경제적으로 빈곤하고 정치적으로 불합리한 낡은 사회와 대립하여’ 하나의 새로운 사회질서를 창조할 수 있다.’이 새로운 사회질서 속에서만 평화라는 국제적 원칙이 가능한데 왜냐하면 모든 나라에는 노동이라는 동일한 원칙이 지배하기 때문이다.(Marx/Engels 17/7)
(철학대사전 1333쪽 [동녁])

사회주의가 크게 후퇴했지만 역설적으로 자본주의 내에서의 평화운동은 사회주의적 평화론과 비슷한 패러다임을 발견했다. 이것은 이념이전에 세계위기의 현실이 객관적으로 존재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평화의 내용으로서 평등은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평등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질적 비약을 통한 동등함의 발견이며, 그것은 동등함의 산술적인 총합이 아니라 유기적 구조로서 동등함이 존재하는 것임을 확인했다.
개인- 국가-세계적 차원을 관통하는 일관된 철학적 원리로서 평등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제 평등에 대한 마지막 단계의 조심스러운 정의가 남아 있다. 조심스러운 것은 이 단계의 정의가 자칫 이제까지의 전제를 무시하고 평등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6) 평등에 대하여
평등은 동일성을 기초로 한다. 동일성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법칙, 즉 본질적 연관의 일치와 일관성이다. 모든 것이 다 같을 필요가 없고 본질적인 것이 같으면 우리는 그것을 법칙성이라 할 수 있다. 동질과 이질은 다양한 속성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본질은 다양한 속성중에서도 본질적인 속성. 즉, 본성이다. 본성의 일치는 질의 일치이며, 질의 일치야말로 진정한 동일이다. 동일은 앞서 정의한 ‘유기적인 구조’ 의 다른 이름이다. 실험관이나 머리속에서 즉, 모든 가능한 우연성을 배제한 조건에서 동일성은 쉽게 확인될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 연관의 일치에도 불구하고 우연적 연관, 부차적 연관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본질적 연관이 순수하게 관찰되긴 어렵다. 또한 본질적 연관은 우연적 연관에 의해 전복되고 전환될 수 있다. 연관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 사람의 가상과 예측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확인되는 명제이다.
물질세계에서도 그렇지만 사람관계에 의한 사회적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회법칙이란 필연적이고 본질적인 사회관계이지만 사회 관계는 이론이나 가설로서가 아니라 현실로서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 현실은 가설로서도 설명되지만 가장 예측 불가능한 부분이 가치로서 결정된다.
남북정상회담을 예로 들어보자. 어떤 이론가도 남북정상회담을 예측하지 못했다. 국가보안법이 없어지지 않은 한 상식적으로 두정상이 만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만났다. 만나자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다. 정상회담이란 교환행위를 가능하게 한 정치 법칙이 아니라 정치적 결단이다. 결단은 가치판단 즉, 가치행위이다.
동일, 유기적 동등구조를 향한 길은 이처럼 가치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평등은 동일이지 획일이 아니다. 만일 질적비약을 통한 동일을 무시하고 획일화한다면 그것은 이미 타자의 존재를 부정한 꼴이 된다.
따라서 평등의 문제는 어떤 입장에서 어떤 태도를 갖느냐? 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소통의 태도와 방식이 동일성을 만들어 가는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가치 행위를 설명하고 구성하기 위해 우리는 논리와 가설을 끌어와 설명한다. 설명이 가장 잘되는 논리가 있어서 채택되면 가치를 결정짓는 소통에 성공적으로 적용되며 법칙이라는 권위를 소통관계에서 획득한다. 한편 현실을 설명하는데 논리로서 허점이 많으면 많을 수록 가치판단의 장악력, 설득력이 떨어질 것이다.

정리하면
주체의 관점과 태도로부터 출발하여, 타자와의 질적비약을 통해, 동일성을 지향하는 것.
이것이 평화에서 평등이 담고 있는 내용이다.

7) 평등과 예술
1. 고대평등주의와 예술
고대 한반도에서의 평등사상은 고조선에서 나타난다.
고조선 후기가 되면 발달한 농업을 토대로 새로운 노예지배층이 생겨나고 중국과 달리 중앙집권적인 국가의 체계가 아니라 각지역의 토지소유층을 중심으로 한 연방형태인 거수국 체계로 운영된다. 이러한 형태의 노예제체계를 유지하는데 평등에 대한 요구가 조세제도를 통해서 어떻게 관철됐는가를 보여주는 자료가 맹자[孟子]에서 발견된다.

[孟子]중[告子]篇에는
白圭가 孟子에게 물었다.
“저는(田賦를)20분의 1만 받고자 하는데 어떻겠습니까?”
孟子가 말했다.
“그대의 방법은  (貊)의 방법이요.萬戶가 사는 나라에서 단 한사람만이 질그릇을 만든다면 되겠습니까?
白圭가 말했다.
“안됩니다. 사람이 쓸 그릇이 부족할 것입니다.”
孟子가 말했다.
무릇  (貊)에서는 오곡이 나지 않고 기장만 나옵니다…. 그러므로 20분의 1의 조세로도 넉넉합니다.”
라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에 의하면  에서는 조세를 수확의 20분의 1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고대에  은 貊 과 통용되었는데 貊은 濊.高句麗등과 더불어 고조선의 渠帥國이었다. 따라서 위의 稅制는 고조선의 稅制를 말하 고 있는 것이다.
(고조선 연구 [일지사] 윤내현 지음 575쪽)

중국에서의 토지문제를 얘기하던 중 나온 맹자와 백규의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듯 천자와 제후의 토지소유문제는 이 시대 초미의 관심사였고 백규는 고조선의 예를 참고하고자 했던 것이다. 세금을 20분의 1만 거두었다고 하는 것은 중앙으로의 조세집중, 즉 국가에 의한 수탈이 무척 느슨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초기 고조선의 국가이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말해주는 문화적 증거가 단군신화이다.
새로운 노예제 사회의 지배계급인 환웅은 여러 무리를 이끌고 한반도에 와서 곰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믿는 곰족과 호랑이족을, 힘으로 섬멸하는 방법이 아닌 교화하여 선진종족으로 만드는 방법을 통해 통합한다. 살려달라고 찾아온 곰족과 호랑이족의 족장을 동굴에 묶게 하면서 마늘과 쑥을 이용한 선진의료기술로 치료하고 인내하는 법을 통해 인간 즉, 환웅족과 같은 문화수준으로 교화하는 과정을 신화를 통해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단군신화는 창조신화가 아니라 하생신화라는 점에서 고조선의 건국은 이미 여러 종족의 공존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스, 로마신화나 바빌로니아의 신화가 지배종족(하늘신)이 피지배종족(땅신이나 바다신)을 초토화한 위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에 비해서 단군신화에는 역사적 한계를 넘진 못했지만 평등과 조화를 기초로 건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이 후에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이념으로 발전되고 있다. 20분의 1만을 거둬들이는 조세제도는 이러한 평등과 조화의 이념이 제도로 구체화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낸 힘은 무엇일까? 노예제를 끊임없이 평등한 체제로 바꾸고자 한 피지배층의 적극적, 소극적 저항이었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자료가 예술작품으로 남아있다. 이 당시 노예로 전락한 서민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문학작품 공후인이다. 이 서정 가요는 [고금주]라는 옛날 책에 전해오고 있다.

그대 강물을 건느지 마시사고
그토록 애태워 당부했건만
그대 마침내 빠져죽었구나
그대는 어디로! 이몸은 어쩔고

이 가요는 계급사회의 현실에서 착취를 당하다가 비극적 운명을 겪은 한가정,개인의 생활 체험을 바탕으로한 고 대서정가요이다.
가혹한 착취와 억압밑에서 모진 생활난에 모대기다가[괴로워 하다가] 마침내 자살하는 노인부부의 비극적 처지 를 묘사한 이 가요에는 비록 소극적이기는 하나 착취와 억압에 대한 반항정신이 깃들어 있다.
(조선통사 상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오월] 74쪽)

노예제를 부정할 정도로까지 발전하지 않았지만 가장 널리 퍼졌던 이 가요의 내용에서 보듯 고조선의 평등주의를 부추긴 것인 아래로부터의 저항이었다.
이 가요를 짓게된 경위는 당시 예술이 노예제의 현실과 어떻게 상호작용 하면서 움직이고 있었나를 추측케 한다. 뱃사공 곽리자고가 새벽에 배를 저어 나루를 건널 때 백발노인이 미친 듯 병을 들고 강물에 뛰여 들고 있었다. 그 노인의 아내는 남편의 뒤를 쫒아 건너지 말라고 말렸으나 노인은 듣지 않고 결국 물에 빠져 죽는다. 남편을 잃은 아내는 기가 막혀 공후를 부등켜 안고 비통한 마음을 노래로 담아 부르다가 자기도 강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이 기가 막힌 광경을 본 곽리자고가 집으로 돌아와 아내 여옥에게 말했더니 여옥은 죽은 노파의 시편을 공후에 옮겼다. 바로 그 노래가 공후인이다.
이 경위에서 공후라는 악기가 서민들에게 까지 널리 보급되어 있었고 이를 이용하여 거의 누구나 노래를 지어 부르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에서는 무천과 영고등의 제천의식, 대동놀이가 국가적으로 시행된 것이나 가무를 잘하는 민족으로 표현한 주변국의 기록에서 특히 음악과 춤 장르가 우세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현대까지 이어지는 평등과 조화의 예술전통에서 골간을 이룬다. 홍익평화의 예술전통인 것이다.
평등과 조화의 예술전통은 서양사에서도 발견되는 보편적 사실이다.
희랍에서 초기 형태의 평등주의는 노예제 사회에서 자유시민들 사이의 사회적 대립이 첨예화되었을 때 출현한다. 이것은 대토지 소유자에게 빚을 져서 노예가 되거나, 토지에서 쫒겨난 농민들이 노예제 자체는 문제삼지 않으면서 다만 이전의 씨족 공동체적 평등을 되찾으려는 시도로서 나타났다. 이는 고대 로마의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시도에서 그 절정에 달했는데, 후대에 [평등]을 부르짖는 사상가들은 이들을 자신들의 선구자로 자주 인용한다.
역사적 한계가 작용했지만 고대의 평등사상은 예술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사회적 조건으로 작용했다.
그리스의 조각에서 로마의 건축으로 장르의 중심이 이동한 바탕에는 평등사상의 확산으로 인한 공공예술의 요구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 미술가들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고 거기에 따라 그들의 방법을 적용시켜야 했었다. 로마인들이 이룩한 업적중 가장 뛰어난 것은 아마도 토목공학일 것이다…. 콜로세움의 새로운 면은 건축에 있어서 아아치의 사용 이다….일단 이 기술에 숙달되자 건축가는 점차 대담한 설계에 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건축중 가 장 뛰어난 것은 판테온, 즉 범신전이다… 거기에는 묵중한 느낌이란 전혀 없다. 거대한 돔은 마치 또 하나의 하늘처럼 당신의 머리 위에 자유스럽게 떠있는 듯이 보인다.”
(곰브리치 서양미술 상권 114~116쪽)

물론 이러한 변화는 건축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평등에 대한 사상은 미술분야에서 사실성에 대한 추구로 나타났다.
사실적인 초상화에 대한 요구, 그것은 당시 장례의식의 관례였던 선조의 밀랍 초상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피지배민족들로 하여금 외경심을 표현하도록 강요한 황제의 흉상조각에서 조금도 이상화시키거나 미화함이 없이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적 표현에 자칫 따를 수 있는 조잡함이나 자질구레함도 없다. 로마의 미술가들은 조잡해지지 않으면서도 실물과 같은 초상을 만들어 내는데 큰 성취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러한 성공은 광대한 제국과 접촉하면서 영향을 미쳤다. 이집트에서 멀리는 인도까지, 그리고 로마의 문화를 그토록 부정했던 중세의 교회에서 까지.
초기의 투쟁적이었던 고대 로마의 평등주의가 달성한 공공예술 지향성은 생활문화와 결합하는 과정에서 그리스의 그것과는 전혀 판이한 사실성의 미학을 새로운 조화의 원리로 채택하게 된 것이다. 로마의 평등주의로부터 탄생한 예술은 중세에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르네상스에 다시 부할할 정도로 광대한 생명력을 획득하였던 것이다.

2. 근대전후반의 평등주의와 예술
조선의 양대전란 이후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은 중국의 것과는 다른 조선 주체, 조선색을 찾기 시작했다. 이것은 훈구세력으로 분류되는 대토지소유층에 대해 중소지주 출신인 사대부의 권력장악을 의미했다. 훈구파에 대한 100년 동안의 핍박을 뚫고 그들이 원하던 평등의 요구와 권력을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은 토지제도가 생산력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던 사회적 조건과 이러한 자기 처지와 요구를 소통할 수 있는 박학, 정통의 논리체계를 개발하는데 성공한 주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대부였다. 이이의 친구였던 노비출신의 구영 송익필은 그 신분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서인과 노론의 영수그룹에서 막후 실력자의 역할까지 하였다. 이전의 시대에는 불가능 했던 일들이 부분적이지만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힘찬 문장과 정치적 능력은 서인이 조선성리학의 주체를 간혹 민중으로까지 연결짓게 하는데 기여했다.
진경산수로 유명한 겸재로부터 시작된 인물풍속화는 관아재 조영석에 의해 기틀이 잡히고 김홍도에 의해 개화한다. 조선의 미술은 민중의 형상을 역사에 기록하기 시작했고 서포 김만중에 꽃피기 시작한 소설문학은 민중의 심정을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괄목할 만한 사상과 문화의 창조. 그 이면에는 유배문화라고 불릴 정도로 예외 없이 지식인들의 유배생활이 있었다. 유배생활은 지식인이 민중의 평등사상과 만나는 통로였다. 재상으로서 임금을 가르치기 위해 입궐했다가 희빈 장씨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다는 이유로 임금의 노여움을 사 그 자리에서 포승줄에 묶여 유배지로 떠나야 했던 서포 김만중. 그의 예에서 당시 사회를 움직였던 두가지 사실과 한가지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역관으로서 중인출신에 불과 했던 장씨집안에서 왕비가 나오고, 김장생, 김익겸으로 이어지는 서인 최고의 가문인 김만중이 한순간에 숙청되는 현실과, 역설적이지만 그런 그가 유배지에서 중인보다 더 천한 신분의 민중들과 교유하며 민중들의 잡설에 불과했던 소설을 당대 동아시아 최고의 장르로 끌어올린 점이다. 이는 그의 문학적 재량이 아니라 사상문화의 변혁점에서 이룬 성취였다. 서포만필의 저 유명한 예술론이 이를 증명한다.
“문학의 근원은 글이 아니라 말이다
사람의 마음을 입밖으로 내면 말이 되고 말에 절주를 붙이면 시와 글이 된다.”
사상과 문화의 주인이 글을 배운 사대부만이 아니라, 말만 할 줄 안다면 누구나 예술의 주인이라는 생각.
서포가 유배가게 된 이유와 유배이후의 성과가 서로 달리 보이지만 결국은 한가지 사회적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원리였다. 무시할 수 없는 민중의 진출, 평등의 요구를 지배층이 배척하기보다는 포용하는 것이 더 이롭다는 태도의 확산인 것이다.
여기에 동아시아를 두루 여행하고 세계적 견문과 개혁사상을 표출한 박연암, 백과사전적 박식함으로 투철함으로 높은 학예의 경지를 개척한 김정희, 조선후기 변혁조직인 당취의 요구를 실학사상으로 표출한 유형원, 전라도 농민반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사상문화적 자양분으로 삼은 정약용등
가히 계몽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지식인들은 민중의 평등주의와의 접촉을 통해 사상문화적 수혈을 받고 자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평등과 조화를 위해 꼭 필요한 도덕적 덕목이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겸양과 지조’가 그것이다. 의리사상에 입각한 지조의 발전은 조선성리학과 진경문화를 통해 극에 달한다. 그러나 교조화 된 지조는 당쟁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당쟁의 시기를 지나 북학과 실학, 동학의 시기에 이르면 사대부들은 겸양의 미덕을 갖추게 된다. 유교의 적으로 간주되던 불교와 격의 없는 친분을 맺고 그로부터 배운다든가, 통치 대상에 불과하던 민중속에 들어가 그들과 고락을 함께 하는 실천적 지식인의 모습이 그것이다. 겸양은 민중과 지식인을 더욱 친하게 했으며 외세의 침략시 이러한 지식인들을 믿고 의병을 일으키는데 성공함으로서 조국에 대한 더 큰 지조를 실천할 수 있게 된다. 기계적으로 보면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지조와 겸양의 정신을 통일시킬 수 있었던 것은 민중의 평등주의로부터의 정신적 수혈이었다. 만일 조선 후기예술에서 민중의 평등주의로부터의 수혈이 없었다면 그만한 성취가 가능했겠는가? 사설시조와 판소리와 소설과 풍속화,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생명력이 사라지지 않은 선비정신등의 그 풍부한 재부는 후대에까지 이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갑오농민전쟁 이전에는 민중으로부터 싹터, 지식인들에 의해 꽃 피워졌다. 결국에는 그 성과가 지식인들의 역사적 소유가 된 것이다. 그러나 갑오년으로 집중된 농민전쟁의 흐름은 평등을 주장하는 민중 스스로가 자기를 조직한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갑오년에 이르러 지식인과 민중이 합세하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만든다. 토지를 중심으로 한 중세로부터, 혁명을 통한 근대로의 이행이 가장 유력한 가능성으로 표현된 혁명이었다. 민중들은 이때에 이르러 자기 요구를 설명할 사상체계를 발견했고 그것은 평등에 대한 뚜렷한 정치적 요구사항으로 표출되었다. 민중은 광범하게 진출하고 있었으며 이를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혁명은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실패한 혁명은 주류로서의 자기예술을 건설할 능력을 갖는데도 실패한다. 평등에 대한 요구는 확인됐으나 조화에 이르지는 못한 것이다. 평등을 위한 투쟁이 팽팽한 전선에서 이루어진다면, 조화를 위한 투쟁은 느슨한 전선에서 이루어진다. 이 느슨한 투쟁은 승리를 전제로 한다. 승리 없는 조화란 안정이나 질서라는 이름으로 둔갑되어, 주인 없는 구조로 제도화되고 만다. 실천에서 실패한 평등주의는 조화에까지 이르지 못함을 갑오농민전쟁은 보여준 것이다.
성공한 평등주의는 어떠한가?

서양에서의 근대평등주의는 계몽주의에 의해 준비되고 프랑스 혁명에 의해 절정에 이른다. 혁명 전 계몽주의시대 영국과 프랑스에 공통적이었던 문화는 [미소]였다. 지나치게 호탕한 웃음도, 지나치게 무거운 진지함도 그들의 시대는 어울리지 않았다. 볼테르를 비롯하여 사상가들 뿐 아니라 명망가들의 초상이나 흉상에도 잔잔한 미소가 시대의 특징처럼 새겨졌다. 미소에 담긴 계몽주의의 정신. 그것은 이성과 관용이었다.

1700년이 되면 사람들은 약간 냉정하게 되어 초연한 태도를 취하여도 이상할 것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 했습니다. 이성의 미소는 심층에 숨은 인간 감정에 대해서는 일종의 몰이해를 나타낼지도 모른다고 여겨질지 모 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성의 미소는 몇가지의 확고한 신념-즉 자연법이나 정의나 관용에의 신념-을 방해하지는 않습니다.
(예술과 문명 321~322쪽 케네스 클라크 [문예출판사])

프랑스혁명을 준비한 이 탁월한 정신적 상태는 혁명전야가 임박해 올수록 새로운 것에 의해 대체되고 있었다.

1787년의 “명사들”은 거의 모든 특권층이었다.
그들은 18세기에 프랑스의 귀족을 하나로 뭉치게 했던 반 절대주의적 요구를 실행에 옮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1787년과 1788년에 [자유]의 이름으로, 왕국의 부르주아적 도시들은 혁명의 메카니즘에 시동을 건 이들 특권층을 중심으로 뭉쳤던 것이다. 그러나 [평등]의 이름으로 그들은 곧 이 특권층을 넘어서 버렸다.
(프랑스 혁명사 48~49쪽 퓌레 [일월서각])

이러한 시대를 가장 잘 예견한 화가가 있었으니 다비드다. 혁명이 일어나기 5년 전에 그려진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현대인이 보기에는 연출된 듯한 분위기가 어색해 보일 수 있겠지만 혁명전야의 프랑스인의 감정에는 아주 잘 맞는 그래서 이후 5년 동안 이루어질 많은 사건을 설명하는데 탁월한 그림이 되었다. 삶의 즐거움이나 관용의 신념등은 이제 유럽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게 되었다. 평등을 향한(그 내용을 설명하라면 누구도 자신 있게 설명할 사람이 없었지만) 새로운 도덕은 유럽이외의 땅에서도 고취되고 있었다. 새로운 도덕은 무엇인가?

리앙쿠르로부터 바스티유의 폭풍소식을 전해들은 루이16세에 관한 일화로서 다소 출처가 의심스러운 얘기가 하 나있다. 루이16세는 “폭동인가?”라고 물었다고 전해진다. 곧 들려온 대답은 “아닙니다. 전하 혁명입니다.”였 다(Brunot,1937,617). 여기서… 한가지 지적하고 넘어갈 것은, 세계체제에 끼친 프랑스혁명의 결과가 변화, 새로움, 변혁, 심지어 혁명까지도 ‘정상’이며 정치영역, 적어도 근대의 정치영역에서는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역사상 처음으로 받아들이도록 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이후 월러스틴 106쪽 [당대])

근대는 혁명의 합법화로부터 시작되었다.(박정희 같은 파쇼적 인물조차 자신의 행위로 혁명으로 표현할 정도로) 이성과 관용의 미소에 뒤이은 새로운 도덕은 혁명이었다.
혁명이후엔 어떠하였는가. 루소는 자연법사상에 기초하여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이론을 제공했다. 그는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가 사회적 불평등과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이상은 프랑스 혁명중에 가장 급진적이었던 상퀼로트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그러나 상퀼로트들은 쟈코뱅 독재에 의해 강제 해산 당한다. 어제의 프랑스 혁명의 자유시민이 오늘에는 새황제의 병졸이 되어, 어제 자신들처럼 자유를 부르짖는 군중을 향해 총을 쏘고 있다. 혁명의 완수란 이름으로.. 거짓된 희망에 대한 환멸은 혁명의 열정을 염세주의로 몰고 갔다. 그러나 이에 굴복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저항하는 강렬한 정신의 예술가들이 있었다. 베토벤과, 드라크로와 이들에 의해 이후에도 그 영향이 전혀 감소되지 않는 하나의 정신적 상태가 만들어진다. 바로 낭만이다. 끊임없는 혁명에의 열정, 거짓된 관용과 타성에의 거부. 만일 혁명이 성공했다는 근거를 찾고자 한다면 그 근거의 하나로 나는 단연코 이것을 든다. 낭만.

금욕주의(asceticism)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화해나 사회적 변혁을 추동하는 것은 아니다. 막스베버의 ‘칼뱅주의 연구나 콜린캠벨(ColinCampbel)의 연구[낭만적윤리와 현대소비주의의 정신The Romantic Etics and the Spirit of Modern Consumerism]은 바로 현실 긍정적인, 낭만적인 생활감정이 오히려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사회적 변혁의 토대를 이루었다고 보고 있다. (21세기와의 대화, 258쪽 송두율[한겨레신문사])

근대의 수많은 부정적 결과에도 불구하고 근대의 젊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혁명의 창고에 숨겨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