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운동론3-거리굿의 형식2001/10/26

평화거리굿 2 – 거리굿 형식의 요소
이시우

1. 거리굿 형식의 요소 – 카오스와 코스모스
거리를 예술적으로 계획하려던 여러 시도들은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발전과 함께 자본주의의 제도로 된다. 현재의 거리는 궁극적으로 상품과 교환이란 가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예를들면 광고물은 자본의 욕구와 예술의 욕구를 통일한다. 바우하우스의 기존 예술에 대한 해체의 정신과 새로운 예술개념의 확립은 자본주의 상업디자인체계로 흡수되었다. 한국의 법률상 옥외광고물은 16가지로 규정되어 있다.

기본적 알림의 1차적 수단인 옥외광고물(간판)은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행정자치부의 옥외광고물 관리법과 그 시행령으로 운영규제되고 있으며, 그 정의는 다음과 같다.

‘옥외광고물(간판)은 상시 또는 일정기간 계속하여 공중에서 표시되어 공중이 자유로이 통행항 수 있는 장소에서 볼수 있는것으로 가로형 간판등의 16가지 간판(광고물)과 기타 이와 유사한 것을 말함
※ 공중:불특정 다수인을 지칭

그러면 그 16가지의 간판의 종류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1. 가로형간판: 문자나 도형 등을 목재, 아크릴, 금속재 등의 판에 표시 또는 입체적으로 건물의 벽면에 가로로 길게 부착하거나 벽면 등에 직접 도료로 표시(주유소의 상호표시, 현수식 간판 포함)
2. 세로형간판: 문자나 도형 등을 아크릴, 금속재 등의 판에 표시하고 건물 벽면 또는 기둥에 세로로 부착하거나 벽면 등에 직접 도료로 표시
3. 돌출간판: 문자나 도형 등을 목재, 아크릴, 금속재 등의 판에 표시, 벽면에 돌출되게 부착
4. 공연간판: 공연을 알리기 위해 문자, 그림 등을 목재, 아크릴, 금속재 판에 표시하거나 실물의 모형 등을 당해 건물 벽면에 설치
5. 옥상간판: 문자나 도형 등을 입체적으로 건물 옥상에 설치
6. 지주이용간판: 문자나 도형 등을 직접 지주에 설치하거나 원기둥, 각기둥 등에 게시시설을 따로 설치하여 문자나 도형등을 기둥의 면에 직접 표시
7. 현수막: 천, 종이, 비닐 등에 문자나 도형을 표시하여 건물 등의 벽면, 지주 또는 게시시설에 매달아 표시
8. 애드벌룬: 비닐 등을 사용한 기구에 문자, 도형을 건물의 옥상이나 지면에 설치하여 띄움
9. 벽보: 종이, 비닐 등에 문자나 도형 등을 지정게시판 또는 지정 벽보판에 부착
10. 전단: 종이, 비닐 등에 문자나 도형 등을 표시, 옥외에서 배부
11. 공공시설 이용광고물: 공공의 목적을 위하여 설치하는 공작물 또는 편익시설물
12. 교통시설광고물: 교통시설에 문자나 도형을 설치하여 표시
13. 교통수단 이용광고물: 교통수단의 외부에 문자나 도형을 설치하여 표시
14. 선전탑: 도로 등 일정한 장소에 광고탑을 설치하여 탑면에 문자나 도형을 표시
15. 아취광고물: 도로 등 일정한 장소에 문틀형, 반원형 등의 게시시설에 문자나 도형을 설치하여 표시
16. 창문이용광고물(썬팅): 천, 종이, 비닐 등에 문자나 도형을 표시하여 창문에 부착

그러나 국가의 법적규제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틀을 깨려는 기업의 치열한 광고 투쟁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대우를 들어보자

96년 10월 회사 전체가 라노스 신차 런칭준비에 여념이 없을 때 대우 광고팀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당시 대우자판 광고팀의 노승구 대리는 라노스라는 브랜드명을 최단 시일내에 대중의 기억속에 자리잡게 할 수 있게하기위해 4대 매체와 병행하여 옥외광고를 기획적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현장조사과정에서 저는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대우센터가 훌륭한 광고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도 대우센터의 외벽은 타일부분과 유리창 부분이 폭 1미터로동일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옥외광고물등관리법상의 건물 전면 광고 부착 금지 및 유리창 광고 부착 금지조항에 걸려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노과장은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설치만 하면 국내 최대, 최고의 광고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라며 결국 설치를 강행했다.
가로 1백2미터, 세로 80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벽면에 90㎝폭의 컬러시트 2천6백미터와 야간에도 광고 효과를 유지하기 위해 유사네온 3천8백48미터를 사용했다. 예상했던대로 이 벽면광고는 대히트로 연일 전 일간지와 잡지에 사진이 실렸고, 부정적인 내용이긴 했지만 TV 뉴스에까지 보도될 정도였다. 그러나, ‘라노스’벽면광고의 유명세에 자극받은 서울시와 관할 구청측의 철거명령에 따라 목표했던 한달을 넘기지 못하고 철거해야만 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는 1억여원의 광고 제작비를 들여 그 몇배의 홍보 효과를 본 셈이었다.
이후 대우센터의 벽면광고는 97년 2월 누비라 출시에도 설치되었다가 결국 고발당하여 철거와 함께 벌금형을 부과받기도 했다. 계속된 97년 4월의 레간자 런칭을 앞두고 광고팀은 또 한 번 고민에 빠졌다. “시트에 실사를 이용하여 길이 1백미터 크기의 레간자 사진을 설치하려고 했습니다. 실사비용 때문에 예상비용도 엄청났습니다. 그러나, 관할구청측의 작업저지 움직임과 대우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우려되어 결국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벽면광고를 단념하지 않고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법과 비난여론을 피해 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 노과장은 “밤새 고민하던 끝에 실내조명을 이용한 모자이크식 광고를 생각해냈습니다. 야간에만 가능한 방법으로서 문자부분을 제외한 모든 창문을 검은색 시트로 가려 실내 조명의 외부 유출을 차단함으로서 광고를 표현하는 식이었습니다” 주간에는 불가능한 대신 라노스 광고 제작비의 13%수준인 1천5백만원의 비용으로 수많은 언론매체보도를 통해 이번에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막대한 광고 효과를 본셈이다. 그러나, 레간자 역시 철거명령과 함께 고발조치 되었다. 이유는 유리창에 시트를 부착하여 광고를 표현했다는 것이었다.
노과장은 관할 구청에 “우리는 유리창에 시트를 이용하여 문자나 도형을 표현한 것이 아니고 단지 일부를 제외한 모든 창문에 시트를 부착하여 실내 조명의 유출을 차단한 것 뿐”이라며 항변했지만, 관할구청측에선 어쨌든 유리창에 시트를 붙였기 때문에 불법 광고물로 단정지었다. 이에 만약 시트가 아닌 검은색 커튼을 부착했다면 어찌되느냐고 묻자 그것은 괜찮다는 답변을 얻었다.

이처럼 자본은 국가의 요구와도 부분적으로 대치하며 상업적 거리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러나 자본의 불법광고를 법적 코스모스에 대항하는 저항운동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광고는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인 불평등 교환관계를 만들어내는 경제제도의 문화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도에 환원되지 않는 저항만이 코스모스에 상대하는 카오스로서의 거리굿 형식이 될 수 있다.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보편적 자유의 문화라는 개념을 고안해 귀족 정치를 폐지 시켰지만, 새체제는 자신이 고안한 불간섭주의, 방임주의 경쟁을 내세워 사람들이 노동을 사고 파는 새로운 예속관계를 만들어 냈다.
권위주의적인 국가와 자유방임적인 자본의 문화에 대항하여 평등과 조화를 실현하고자 하는 거리굿의 형식은 그 내용에서 국가주의와 자본에 대한 새로운 대안의 질서이자 구조이어야 한다.
기업과 민간의 다양한 시도는 국가가 규정한 거리질서를 이미 해체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국가의 불평등한 권위의 근본을 바꾸진 못했다. 우리에게 국가의 근본을 바꾸어 놓은 것은 6월항쟁과 같이 거리로 진출한 대중의 거대한 흐름에 의해서 였다. 이때의 현수막과 포스터와 거리공연은 새로운 거리의 문화요소로 등장했고 기존의 거리문화 요소들과 상호 병존하고 있다. 이는 모더니즘 예술에 의해 황폐화 되고 고립된 거리와 도시환경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참여 예술, 사회통합적 형태로서의 거리굿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도시 디자이너인 이안 벤틀리는 “자기표현을 통해 독창성을 강화해온 미술의 낭만적 전통은 후기자본주의전개과정-이는 작가들이 도시 공공영역을 파괴 하도록 선동했다-에서 완전하게 파산했다.”
그리고 디터 마그누스는 “환경친화적인 미술은 마을을 설계하는 상황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관련된 문제이지, 고립된 형태를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미술,공간,도시 325쪽 학고재)

우리는 교묘하게 얽혀 있는 문화전략들간의 차이를 인식하고 그 요소에 포함되어 있는 권력과 제도에 대응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기존의 거리문화 형식들에 포섭되어 있지 않거나 밀려난 새로운 내용과 질서를 발견하고 그것을 재창조 해야 한다. 어차피 형식은 내용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평화의 본성을 내용으로 하여 거리의 형식이 가진 이미지들을 분석해 보기로 하자.


서양은 인생을 무대로, 사람을 배우로 비유하는데, 이것은 아테네와 로마의 극장으로부터 세익스피어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전통적 상징이다. 이에비해 동양에선 인생을 길로 사람을 나그네로 비유한다.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세월은 백대의 과객이라’(이백,춘야연도리원서) 유불선교 모두 길을 자연의 섭리와 이치로 보는데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길이란 의미의 道에는 우울한 역사적 상징이 포함되어 있다. 道는 行+又+首로 行은 길을 본뜬것이고 首는 머리의 상형으로, 이민족의 목을 묻어 정화된 길이란 뜻을 나타내고 파생하여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가 된다.
그러니 소통을 의미하는 길이 자기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정복과 차별을 전제 해야 한다는 생각이 道도의 이미지엔 내재되어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에서의 길의 형상은 무속과 민속을 나눠볼 때 다음과 같다.
무속을 먼저 보자. 김태곤의 한국 무가집에 “밝은 길은 시왕길이요, 어두운 길은 칼산 지옥이요, 좁고도 밝은 길을 찾아 가면, 개똥밭이 유리되고 황모란 백모란에…”라고 쓰고 있다. 좁고도 험난한 저승길을 통과해 저승으로 들어가려면, 저승의 시왕에게 빌어 길을 닦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때의 길은 이승과 저승, 현세와 초월계 사이에 놓여 험난하고 쉽게 통과 할 수 없는 통로를 상징한다. 경기도당굿에서 무당이 길베를 가슴으로 가르고 지나가는 것은 저승길이 막힌데 없이 훤히 뚫림을 상징한다. 즉 저승길굿은 이승과 저승의 소통을 위한 것이다. 道의 개념에 타자인 이민족의 정복을 통해 자기세계임을 확인해야 소통이 가능하다는 심리가 있다면, 무속의 ‘길’ 개념엔 타자를 상정하고 그 초월적인 타자를 향해 내가 ‘목숨을 건 비약’을 함으로서 소통할 수 있음을 상징한다. 만약 우연히 잘못되면, 즉 부정을 타면 소통에 실패 할 수 있다. 그러나 道는 그런 우연적이고 비합리적인 요소가 개입할 수 없는 ‘정해진 길’이다. 왜냐하면 타자 없는 자기세계의 길이기 때문이다.
민속에서의 길놀이, 길굿을 보자. 길놀이는 보통 마을굿을 시작하는 행사로 제관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마을을 도는 길놀이를 한 후 그 마을의 주산을 찾아가거나 당산나무에서 당산굿을 한다. 그리고 다시 마을로 내려와 지신밟기를 한다. 이때의 길은 특별한 상징없이 자연적으로 형성된 ‘마을’이란 공간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원래 골(谷)과 굴(穴居)과 길(路)은 모두 같은 어원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주거처인 ‘골’짜기에 있는 ‘굴’에서 식수원인 ‘개울’과의 사이를 잇는 통로가 곧 ‘길’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어의 어원으로 볼 때 ‘길’은 주관적 관념이 개입되지 않은, 자연 그 자체 즉, 객관적 실재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을 자연 자체로 인식하는 물질적 태도에는 사람의 의지와는 독립되어 존재하는 타자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이처럼 우리에게 있어 길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타자와의 소통구조로서의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거리는 마을의 중심으로 가기 위한 통로가 아니라 지역의 중심자체가 되었다. 거리가 곧 당산이고, 거리가 곧 주산이다. 거리의 물신성은 곧 권력이다. 거리는 전통적 도道의 의미를 해체하고, 자유롭게 교환되는 수평경쟁체계를 이룬 것 처럼 보이지만, 거리엔 언뜻 봐서는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해 불평등경쟁을 체계화 시키고 있다. 이는 항상 타자를 전제한 우리의 전통적 길의 의미와 상충된다.
길은 평등한 소통과 조화의 공간이여야 한다.

길바닥
지금도 몇몇 대학교엔 아스팔트 길 위에 통일이나 반미를 상징하는 대형그림이 그려져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80년대에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대중성의 획득은 바닥그림이 내용을 선전하는 데서 나아가 그림을 이용한 놀이 (통일의 천리길 같은)나 모의 실천(성조기 밟기)으로 까지 그 기능이 확장되었다. 길바닥은 거리굿의 요소로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남미의 벽화운동만큼이나 역사적 가치를 가질 만한 성과이다. 상업광고에서는 바닥광고가 새로운 틈새시장으로 등장했다. 이것이 상품으로 가능했던 것은 바닥그림의 기본 개념과 훼손되지 않는 재료의 개발 덕분이다. 매장의 바닥광고가 매끄러운 바닥과 세련된 재료를 요구하는데 비해 바닥굿은 그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훨씬 풍부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복사열의 용광로 같은 아스팔트바닥 밑에는 죽은 땅과 전화전기 선로와 맨홀과 복개된 하천이 있다. 길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바닥을 그림판, 선전판으로만 보는 한계로 될 수도 있다. 바닥은 그 자체가 거대한 숨겨진 권력 구조이며 구획에 따라 땅값이 달라지는 자본의 현상태이기도 하다.
한편 아스팔트와 재료가 다른 보도블럭은 또다른 의미와 상징을 갖는다. 도시미관 정비에 의해 새로이 깔린 보도블럭은 훌륭한 디자인이며 바닥예술이지만 그것이 권력의 허위와 기만으로 인식될 때는 투석전의 재료가 되었다. 우아함의 정감의 재료이면서 투쟁과 저항의 재료이기도한 이중상징이 바로 보도블럭 이었다.
이에 비해 서울의 거리에서 흔치 않지만 흙이 있다. 도시에 부분적으로 노출되는 흙바닥은 반문명의 상징이다. 더럽고 귀챦은 길이다. 그러나 달동네의 흙바닥 어디엔가는 배추도 심고 진달래도 심으며 남아있는 흙의 생명력을 키워가는 손길도 있다. 함석헌은 [아이레노포이오이]에서 다음과 같이 흙을 그리고 있다.
“흙은 바위가 부서진 것입니다. 바위를 부순 것이 누구입니까? 비와 바람입니다. 비와 바람은 폭력으로 바위를 부순 것이 아닙니다. 부드러운 손으로 쓸어서, 따뜻한 입김으로 불고 불어서 그것을 했습니다. 흙이야말로 평화의 산물입니다.”
이에 비해 신동엽은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향그런 흙 가슴만 남고,/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라고 노래하며 흙을 민족혼으로 비유하고 있다.
길바닥은 재료에 따라 서로 상이한 상징과 이미지를 갖는다. 그것은 재료자체가 그 길바닥의 역사이자 현재의 사회적 구조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길바닥에, 길에 얽힌 불평등을 전제한 개발의 역사를 반성하고 평등과 조화로 나아가는 이미지가 그려진다면, 획일적이 아닌 다양한 재료를 체험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길바닥이란 형식에 변화를 가져오는 굿이 될 것이다.

골목
우리는 골목이 사라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 서울의 도시화는 골목을 몰아내고 있다. 한반도에 사람들이 정착한 이래 줄곧 이어져 온 유구한 역사의 공간양식이 골목이다. 골목은 자동차 시대가 열리기 전의 도시취락에서 혈관 노릇을 했다. 골목은 그 자체가 삶의 공간이다. 그러나 거리권력체계는 중심부에로 사람을 집중시킨다. 아이들이 뛰어 놀던 좁은 골목에도 마을버스가 생겨 열심히 중심부의 거리로 사람을 실어 나르게 된다. 골목의 생활공간은 차도에 밀려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골목의 소외는 거리권력체계에 의한 집중화, 획일화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골목이 살아 날려면 중심부에 모든 것을 집중시키지 않아도 되는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 굿을 통한 시도는 골목의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만들고 노래하게 하고 그것이 일상적인 생활이 되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 노조나 학생회의 문화패처럼 골목 문화패가 만들어져야 한다. 여기엔 역시 계 조직 만한 게 없다. 골목 문화패에서 다양한 굿거리들이 준비되게 하고 거리로 나와서는 거리굿의 알맹이를 채울 수 있게 발전시켜야 한다.
평소엔 골목 살리기굿을 하다가 일요일에 차량통행이 금지되면 갯벌에 숨었던 참게 기어 나오듯 다시 거리로 나오는 골목전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차없는 거리를 큰 골목화 한다.
서울의 특성과 역사를 알고 싶어하는 외국인들은 거리의 중심인 광화문에 가지 않는다. 인사동으로 간다. 인사동은 중심부로 볼때는 골목적 특성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세계 어디에도 가장 그 지역의 특성이 살아있는 곳은 골목이다.
거리에서 보는 골목은 보잘 것 없지만 골목에서 보는 거리는 새로운 공간을 체험케 한다. 골목에서 보는 거리는 커피숍의 통유리 창보다도 훨씬 안전한 지켜보기가 가능하다. 푸코가 말하는 익명의 감시가 아니라 인간적 거리유지하기이다. 나란 주체를 준비할 수 있는 공간이다. 번잡한 거리와는 바로 몇 걸음 차이밖에 안되지만 골목은 전혀 다른 세계이다.

거리의 밤
빛은 작고 어둥은 크다. 우주의 본질적 요소는 빛을 내는 별이 아니라 별과 별사이의 어둠에 있다. 우주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 하고 있는 어둠은 그래서 빛보다 크다. 사람이 이런 우주의 본질에 접근하는 시간이 밤이다. 그러나 서양의 지성사는 밤에 어둠을 본 것이 아니라 빛을 보았다. 서양 지성사가 빛에 대한 인식론의 역사로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서구화되었다고 하는 서울의 밤거리엔 어둠이 없다. 그래서 밤도 낮이다. 그러나 바로 그 서구는 서울처럼 밝은 밤이 없다. 조선일보에서는 정상회담 준비가 한창인 때에 인공위성 사진으로 찍은 한반도의 야경사진을 내보냈다. 불꺼진 북한과 불켜진 남한이었다. 불켜진 남한의 밤은 북한에 대한 남한의 우월의식을 심는 상징 그 자체였다. 남과 북 사이의 차이가 아닌 차별 의식이 밤을 보는 해석에서도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한의 잣대인 서구유럽 도시의 밤에 익숙한 사람이 보면 비정상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이다. 낮에 일하고 밤에 잠잔다는 사람의 생활리듬이 존중되는 것이 결국 사람의 장기적인 발전에 이롭다. 외향적인 낮도 중요하지만 내성적인 밤도 중요하다.
안과 밖의 균형있는 발전, 그것이 보장되는 사회문화가 오히려 더 정상적이며 지속가능한 발전의 개념에 맞는 것이다. 서울의 밤은 어둠 속에서 발견되는 카오스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런 카오스조차 정복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낯의 아름다움이다.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없는 것은 오염된 공기보다도 낯처럼 환한 가로등과 전구의 불빛 때문이다.
밤거리를 비추는 가로등은 그릇된 서구화와 차별의식과 오만에 대한 거리의 전략을 이루는 요소이다. 서울의 거리에서 어둠 자체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하는 것. 우리안에 숨어 있는 오만한 빛의 전략을 극복하게 하는 것, 그래야 야경의 아름다움을 바로 볼 수 있다.

가로등
거리의 가로등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강둔치에 앉아 날마다 어스름과 함께 순서대로 점등되는 가로등을 보는 어느 소설의 주인공에게 가로등은 인간이 이룩한 마술이자 신비이다. 자연의 마법조차도 교체할 수 있을 것 같은 경이로운 인간능력에의 확신을 가로등은 선사한다.
가로등은 길 가운데 서있는 법이 없다. 길을 밝히기 위해 목을 길게 빼고 항상 길 한켠의 구석에서 거리를 밝혀준다. 가로등이 있어 길은 밤에도 길이다. 길과 빛의 친족관계, 가로등은 길 아닌 곳에 서지 않는다. 어둠이란 근원적 카오스에 대항하여 길을 길이게 하는 코스모스의 전사가 가로등이다. 밤비 내리는 영동교가 추억의 장소가 될 수 있는 것은 나의 존재를 안전하게 확인시켜줄 수 있는 가로등의 존재 때문이다. 무섭도록 캄캄한 산길에서 비를 맞으며 과연 이런 추억에 빠져들 수 있을까?
그러나 가로등은 도시계획이란 정치권력의 표현을, 정서적으로 승인하게 하는 근대화 전략의 문화적 장치이다.
전봇대는 일본이 길에 대해서 취한 제국주의 정책이었던 신작로와 함께 등장한다. 길의 근대성, 서구화, 식민지성이란 의미로 전화되는데는 전봇대, 전신주와 짝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엄청난 전력의 소모를 통해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은 그래서 거리에 대한 거대한 전략이다. 봉건시대 자연적 세계관을 전복한 가로등의 어둠을 거부하는 빛의 전략. 평화보다는 발전을 이념으로 하는 전략. 느린 정지에서 찾아지는 개인의 정체성 보다는 공백을 감수하더라도 빠른 속도를 추구하는 전략. 이것이 가로등의 근대화 전략이다. 가로등의 밝기는 그 거리에 집중된 전략의 양에 대한 이미지를 준다. 가로등의 색은 그 거리에 집중된 전략의 질에 대한 이미지를 준다. 수은등은 푸른색의 차갑고 긴장된 이미지를, 나트륨등은 황색의 따뜻하고 이완된 분위기를 각각 나타내는 식이다. 가로등 자체에 포함된 다양한 상징에 대해 우리가 평화라는 주제를 정확히 세울 때, 무엇을 반성하고, 무엇을 개입할수 있는지 선택할 수 있다.


벽은 인류가 움집시대를 지나 건(세우기)과 축(쌓기)의 시대로 접어들며 생긴 요소이다. 벽은 공간사용의 구별을 두는 기능과 함께 신분등의 차별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역할로서 기능한다. 이러한 기능은 재료의 개발과 함께 더욱 공고해진다. 자연울타리에서 흙담, 벽돌담, 돌담으로 발전해온 과정이 그것을 보여준다.
벽화를 통해 벽이 공공예술의 영역인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그러나 벽화는 벽 자체가 가진 사회적 내용을 은폐하는 경우도 있다. 이미지 전달판으로서의 벽 이전에, 벽 자체를 볼 줄 아는 눈도 필요하다. 미술적 작업의 시각이 아닌, 사진적 시각으로 발견되는 요소이다. 근대식 건물벽의 시멘트 질감과, 시멘트를 흩뿌려 만든 질감, 벽돌담벽의 무한격자 이미지, 돌담벽의 견고한 질감은 그 자체로 시대적 초상을 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우린 그저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자리와 시점만을 준비해도 된다. 벽을 캔버스 대신 이용한다는 개념에서 벽 자체의 질감을 존중하는 방식이기 위해서 한지와 같은 재료는 탁월하며, 벽 자체에 가하는 부조 또한 시각적 공간을 촉각적 공간으로 만드는데 유효하다. 자본주의의 벽면광고가 정돈되고 권력화된 벽면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소외된 벽면을 새로운 굿적 공간으로 만들어 내는 게 중요하다. 공공미술로 추구되어온 벽화 작업은 오히려 낡은 벽면(소외된 벽면이 아닌)을 저항의 매체로 삼기보다는 합리적 제도로 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의도와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은 벽화가 표현되는 사회적 전제 (독선적이고 불평등한 권력등)를 놓치고 있었던 결과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낙서벽화운동이 공공성보다는 저항성을 강조한 결과 탄압받는 것과 대조적이다.
벽을 재료로 하는 시도가 관성화 하지 않게 하고, 또 저항을 위한 저항으로만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벽 에 대한 평등과 조화의 관점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한다.

카페
카페는 프랑스에서 혁명을 준비한 장소였다. 귀족 상층이 살롱을 중심으로 한 미소가 흐르는 고상한 담소의 문화였다면, 카페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열변과 독설을 퍼붓던 정치적 논쟁의 소통 공간이었다. 카페에서 성숙한 언어는 거리로 쏟아져나와 혁명의 구호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후 카페는 예술가들이 혁명의 성과를 문화와 사상으로 정착시키는 근거지가 되었다. 입센과 고리끼가 바로 전후 카페 세대다.
대화를 위한 공간의 창출,
계몽주의자들이 꿈꾸던 부르조아 혁명의 문화적 토대는 타자와의 소통공간이였다. 부르조아적 세계는 이런 소통공간의 확대를 통해 자기 세계를 총화하고 백과전서를 만들어 냈으며 왕당파를 지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현재의 인사동의 카페와 술집들은 식민지지식인의 좌절과 허무를 달래던 공간에서, 독재정권 시절에는 여당의 당사가 있었던 인연등으로 인사동 정치판이 형성되었다. 현재는 외국인 관광지로서의 면모와 다양한 문화가 충돌 조화 하면서 독특한 개성을 가진 카페가 형성되어 있다.
소통의 양은 확대되었으나 소통의 질은 향상되지 않았다. 예를들면 인사동에서 한반도와 세계의 본질적 문제가 소통되는 문화가 정착되어가는 것이다.
카페에서의 굿은 단순히 전시공간, 연행공간으로서만 독립해서 파악되면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전시장의 단일기능과는 다른 수많은 연관과 만나야 하고 그 연관의 흐름을 타고 넘어가는 방법이 나와야 한다. 카페의 주인하고만 합의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실제 현장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만나는 아르바이트생들과 깊은이해와 공감이 이루어져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빈벽이나 빈장소에 전시나 공연할 생각만해선 안되며 만남과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소라는 점을 감안하여 기획되어야 한다.
창과 문은 또한 카페와 거리를 연결하는 경계이다. 전시장처럼 보고나오는 통로가 아니라 보고, 토론하고,결의하고,푸는 경계이다.


창은 드나드는 문과 달리 공기나 빛이 드나드는 문이다. 애초부터 실용적인 목적 보다 상징적, 추상적 의미가 더 강하다. 원시 움집은 그 가옥구조가 자연스럽게 축소된 하늘과 땅을 모방하게 되고 창은 하늘을 향한열림이 된다.그래서 ‘집의 작은 하늘’이 되어 창의 원상을 결정한다. 이러한 원형상징은 변함없이 우리문화 속에서 지켜져 왔다. 창은 집에 있어서 눈 또는 입으로서의 상징을 내포한다. 이것이 창의 보기 기능과 깊은 연관을 맺는 이유이다.
거리카페의 전면 유리창은 보는 창 일 뿐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창이기도 하다. 상업적 광고와 소통의 요구가 창의 형태를 변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창은 일방소통에서 쌍방소통의 중간지대가 되었다. 자신은 어떤 모습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 안과 밖을 보고-보여주게 하는 촉매의 기능.이것이 창이 갖는 이중성이다.조지훈은 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외로이 스러지는 생명의
모든 그림자와

등을 마주대고 돌아앉아
말없이 우는곳

지대한 공간을 막고
다시무한과 통하나니

지대한 공간을 막고도 무한과 통하는 소통체가 바로 창이다. 창에 새겨진 광고문구나 썬팅등 창과 공생하는 여러 가지 사물들에 의해 때론 일방적 소통체가 되기도 하고, 보는 방법의 틀이 되기도 한다. 창이 갖는 이미지의 다양성과 그 다양성 간의 조화. 이것이 창자체를 물질적 재료로 할 때의 전제이다.

가로수
나무는 숲을 이루어 생존한다. 숲은 나무의 종다양성과 조화에 의해 생성 발전 유지 된다. 우리나라 단군신화의 신단수로부터 백제의 칠지도, 신라금관의 나무가지 문양에서 나무가 신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상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로수는 이와 달리 기능적 역할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가로수는 중국 주나라의 제도로부터 연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453년 단종이 ” 주나라의 제도를 보면 길가에 나무를 줄로 심는다는 기록이 있고, ….. 서울교외의 도로 양편에 땅의 성질을 감안하여 소나무, 배나무, 밤나무, 회나무, 버드나무 등 알맞은 것을 심도록 하고 그 보호를 철저히 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로부터 수원 장안문, 천안삼거리 능수버들 같은 가로수 문화가 생긴다.
가로수는 나무이되 거리화된 나무이며 계획화된 나무이다. 마을굿에서의 당산나무와는 판연히 다르다. 거기엔 신성도 설화도 없다. 도시의 추억이 있을 뿐이다. 자연스런 식물 군집이 주는 이미지와는 달리 가로수는 인위적인 종 획일성에 대한 이미지를 천년 넘게 강요해 왔다.
현대의 가로수는 보행자들의 답압, 보도의 콘크리트화, 공기오염등으로 거리의 사람을 보호하던 것이 거꾸로 나무 자체를 보호해야 하는 상태에 이르고 있다. 그나마 가로수의 숨통을 틔우기 위한 장치가 호울덮개이다.
주철 덮개와 땅사이는 3~5센티정도 떨어져있고 덮개는 개폐가 가능하여 청소나 비료주기를 할 수 있다. 이 작은 땅에서도 적응력이 강한 풀들은 자라난다.
그나마 가로수가 있는 곳에서는 도시는 땅을 내어준다.
가로수는 숲이라는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콘크리트라는 바다에 떠있는 섬의 나무이다. 호울 덮개가 아니라 나무와 나무사이를 흙 띠로 연결해야한다. 그 흙속에 다양한 잡초와 벌레가 자라고 오갈 수 있게 해야한다. 거리굿에서 가로수를 당산나무로 삼을수 없는 이유는 가로수가 그만한 이미지 생산력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상상력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연이란 타자로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이면서도 인간의 합리적 이성 속에 존재한다는 이중성이 가로수의 이미지가 처한 근본적 모순이다.

포스터
포스터는 전달할 내용을 일정한 지면이나 천등에 한눈에 알아볼수 있게 표현하는 선전광고 매체이다. 포스터란 명칭은 기둥을 뜻하는 [포스트]란에서 유래한 것으로 15세기중엽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일반화 되었으나 1860년대 대형인쇄기의 발명과 함께 포스터의 시대가 도래했다. 셰레, 도미에,드가,로트렉,벤샨등 많은 화가들에 의해 포스터는 회화적 성과를 획득했으며 회화와 같이 수집 대상이 되고 있다. 포스터와 회화는전시또는 게시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갖고 있으며 회화가 미술관을 주무대로 한다면 포스터는 거리전체를 미술관으로 하는 새로운 예술형태로 봐야 할것이다.

현수막
현수막은 법적 규정에 따르면 천, 종이, 비닐 등에 문자나 도형을 표시하여 건물 등의 벽면, 지주 또는 게시시설에 매달아 표시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80년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발전된 현수막 문화는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기둥과 기둥사이에 걸어놓는 수동적인 알림 기능에 머무르지 않고 현수막의 시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기둥을 만드는데까지 나아간다. 보통 한 장의 현수막에 담던 정보를 여러장에 나누어 씀으로서 호흡과 운율을 주고 공간매체였던 현수막을 시공간 매체로 발전시켰다.현수막이 벽면에 달릴때와 기둥사이에 달릴때는 공간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기둥사이에 달리는 현수막은 기둥과 현수막에 의해 카오스적인 공간을 사각으로 구획지음으로서 새로운 공간의 경계를 만들어내게 된다. 현수막의 시적문구들은 그 공간체험의 표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걸어서 이동하며 보는 현수막의 문구와 그 공간이 만들어내는 체험은 기존의 거리질서를 굳이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공간창조의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서 거리굿의 요소로서 새로운 성취를 획득한다.

깃발, 만장
깃발은 신성과 권위 저항등 다양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기旗+발에서 발은 우리말로 벌,베와 같이 옷또는 옷감에서 유래한 말이다. 기는 ‘사각형으로 정연하게 서있다’의 뜻이다. 바람이 펄럭이는 기라는 의미의 의 ,나 여 를 쓰지 않고 기旗를 쓴 것은 깃발이 국가나 권위, 규율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뜻한다.
깃발+바람이 되면 깃발의 의미도 변환된다. 바람과 깃발은 베르누이 효과에 의해 끊임없이 반복불가능한 카오스의 상태를 만들어낸다. 깃발이나 만장이 갖는 무한한 상상력의 가능성은 바로 이 혼동과 우연속에 존재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와 같은 가사는 바람속에 나부끼는 민중저항의 이미지를 상징하고 있다.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은 자유와 저항의 이미지에 더 친숙하다.
깃발은 색이나 상징문양과 더불어 그 이미지를 더욱 증폭시킨다. 색과 상징 문양은 모두 추상적인 매체이다. 좀더 정확히 얘기하면, 정서적으로 구체적인 재료이다. 깃발의 정서적 감영성과 추상적 매체의 속성이 잘 어울린다는 점에서 깃발의 이미지 결합은 성공한다. 그러나 최근 컴퓨터 실사출력의 도입은 제작상의 어려움 때문에 채용되기도 했던 상징문양과 같은 양식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사진 그대로를 깃발천에 출력할 수있게 되었다 해도 깃발을 사진인화지 대용으로 봐서는 안된다. 앞서 보았듯이 깃발 자체의 존재조건과 -접히고,펼쳐지고, 펄럭이는 등- 어울리는 사진 이미지여야 성공할 수 있다.
수평이미지인 현수막에 비해 만장은 수직이미지로 엄숙, 장엄한 느낌을 준다. 깃발이 물결이면 만장은 해일이다.

퍼포먼스
퍼포먼스는 실행을 뜻하는 말로서 개념미술에 의해 태어난 용어이다. 관념을 다른매체가 아닌 자신이나 관객등 사람의 몸을 통해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그것은 형태상으로 봐서 우리의 굿과 유사하다. 그러나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과 조선시대의 조각보가 형태상으로 유사하다고 그 내용과 본질이 같을 수없는이유와 같이 퍼포먼스와 굿은 본질적으로 다른 차이를 갖는다. 퍼포먼스는 근대예술을 해체하고자 하는 요구로부터 발생했고 굿은 근대예술에 해체되어 강제 분화되었지만 다시 근대예술로부터 해방하고자 하는 요구로부터 다시 등장한다. 근대예술이 계몽적이었다면 현대예술은 해체적이고 굿은 해방적이다.
저항을 통한 평등의 쟁취와 종합을 통한 조화의 쟁취를 통해 굿은 해방적 정서를 담을 수 있게 된다. 퍼포먼스는 굿의 큰 틀속에 하나의 요소로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다.
브레히트를 극복한 것으로 평가받는 아우구스트 보알의 피억압자의 시학은 우리의 눈길을 끈다. 보알의 [보이지 않는 연극]은 행위가 얼마나 거리의 법망을 훌륭하게 피할수있으며 삶을 반영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삶 자체를 연출할 수 있음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 연극]은 거리굿과 훌륭히 만날 수 있는 성취를 보여준다.

위에서 거리굿을 이루는 요소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물론 이것은 거리굿요소의 몇 안되는 부분이다. 우리는 더 많은 요소를 찾아내고 창조해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순수하게 독립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거리라고 하는 전체적인 관계속에서 역동적인 연관관계를 이루고 있다. 요소를 발견하는 것은 논리적 분석과정에서나 의미있지 실제 과정에선 무의미 하다. 이 문제를 풀려면 이러한 요소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으면서 구성되는지를 발견하고, 창조해야 한다.

2000.5.13. 이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