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운동론2 -평화거리굿 . 내용2001/10/26

평화거리굿 1 – 거리굿의 개념과 내용
글 이시우

1) 거리굿이란 이름
이를테면 서울평화거리굿은 문화행사다.
문화행사가 흔히 비판받듯 이벤트로 끝나고 마는 것은 거리와 관련된 전략과 전술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새로 구상한 거리굿의 형식을 고민하기전에 형식과 따로 일 수 없는 거리의 전략과 전술을 세우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전통적 개념의 예술이란 틀과 거리가 가지고 있는 틀의 차이를 확인하고 어떻게 조화시킬것인가를 고민해 보자.
우선 거리굿이란 말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는 비슷한 개념으로 퍼포먼스,거리축제,가장행렬등을 떠올린다. 퍼포먼스란 말의 역사와 거리축제란 말의 역사에 담긴 내용과 형식은 분명히 우리가 하고자 하는 행사와는 다른 것이다. 서울거리의 역사와 구조와 기능은 우리의 시대적 과제만큼이나 미완으로 남아있어서 퍼포먼스나 축제나 가장행렬 같은 개념과는 무척 낮설어 보인다는 것이다. 거리굿은 거리에 관한 우리의 독특한 문화전통이다. 거리굿의 원형으로 삼아도 될 진도 도깨비굿은 동네에 병이돌거나 불길한 일이 겹치면 남정네들을 집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게 하고 아녀자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피묻은 속옷이며 고쟁이며 부엌살림들을 장대에 매달아 들고 한판 시위를 하던 굿이다. 여기서 거리는 놀이나 축제의 장이 아니라 지역공동체에서 발생한 문제를 문화적으로 푸는 장이었다. 이 풀이가 잘되면 신명도 나고 놀이가 되기도 하고 기원이나 신앙이 되기도 하였다. 굿은 예술적 관점에서 보면 미분화된 전통 종합쟝르이다. 굿이 현대에 의미있는 소통구조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분화와 종합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기서는 이 굿개념을 우리식의 문화행사의 원형으로 보고 이것을 현대적 소통구조에 맞게 내용과 형식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다시 종합하는 과정을 거쳐 현재에 맞는 거리굿으로 고민해보고자 한다.

2) 인사동-한강 거리굿의 내용
인사동한강 거리굿의 내용의 핵심을 차지하는 것은 거리의 정체성이다. 정체성이란 고정되어 있는 화석도 아니고, 공허한 구조도 아니기 때문에 이 정체성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체계적 관점에서 이 거리의 역사와 구조, 기능을 총체적으로 봐야한다.
역사란 서울의 거리가 발생하고 발전한 과정이며, 구조란 거리의 살아있는 유기적 관계이며, 기능이란 거리가 다른 요소들에 대해 갖는 영향력이다.

1. 서울거리의 역사
서울이 도시로서 즉 거리를 통한 사람들간의 소통이 집중된 공간으로서 형성된 것은 백제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서울정도 600년’이란 표현에서 처럼 현재를 규정하는 서울의 역사는 조선에서 시작된다. 북한이 개성을 고려의 수도로, 평양을 고조선의 수도로 삼는 것과 비슷한 이유이다. 또 북한이 신라와 이조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는것과 남한이 평양의 단군릉을 인정하지 않고 고려연구에 인색한것과도 연관이 있다. 즉 서울 정도 600년이란 발상은 분단이 낳은 체제대결 논리의 부산물이라는 의혹을 살 여지가 많다.
서울이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면모를 갖춘 것은 영정조시대를 전후하여 경화사족이란 신흥집단이 형성되던 때이다.(경화사족이란 그전까지 산림에 은거하며 학파를 형성하던 선비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서울화 되어 이룬 집단이다.) 지방의 토지를 기반으로한 산림시대가 가고 경화사족의 형성이 가능했던 것은 선비들의 당쟁을 부추겨 서로 싸우게 하고 그 사이 대동법등으로 경제를 살리고 왕권강화를 위한 정책을 편 숙종이래 영정조 까지의 왕권의 승리를 상징하기도 했다. 따라서 서울정도 600년 론은 노론중심의 사대부사관 이라기 보다는 왕실중심 사관의 반영인 셈이다. 서울은 만일 외세와의 역사적 관계가 없었다면 영국이나 일본등 대부분의 나라들과 같이 입헌군주제에 의한 통치공간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강점은 서울을 식민지적 통치공간으로 만들었으며 경복궁터에 조선총독부가 용산에 일본군기지가 들어섰고 해방후 친일파 청산의 실패와 미군정지배는 다시 경복궁 바로앞에 미대사관을 용산 일본군기지에 미군기지를 두는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한 서구화, 그중에서도 미국화를 의미했던 근대화 시기에 건설되는 모든 재벌구조는 생산기지는 경상도를 중심으로 두면서 본사는 서울에 집중시키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는 굳이 외국회사들이 지방까지 가지 않고 서울 재벌본사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가기 위한 효율성이 배려된 배치로 해석되기도 한다. 서울의 중심거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물과 공간은 분단과 외국에의 종속적인 구조가 고스란히 투영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민주화운동시기 시위대의 흐름이 주변부 거리로부터 시작하여 중심부의 거리로 진출하면서 반독재의 구호가 터져나온것도 이미 형성되어 있던 거리공간에 대한 저항성을 반영 한다. 그러나 민주화운동시기의 거리시위는 동대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청와대를 향해 광화문으로의 동선은 있었으나 미군기지로의 동선은 거의 형성되지 않았다. 이것은 민주화운동에서의 거리에 대한 전략이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모아져 있었지 분단과 외국 종속이란 과제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현실을 반영한다.
80년대 말에 학생들에 의해 통일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을때의 거리전략은 어땠을까?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라는 구호가 그대로 반영되어 학생들은 구파발과 통일로를 택했다. 민주화 운동시기 주변에서 중심으로 향하던 거리동선은 다시 중심에서 주변으로 향하면서, 시민들의 참여를 오히려 따돌리고 말았다. 더구나 판문점으로 가는 길은 한번 막히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민주화운동에서 종로가 막히면 시민들의 힘으로 그 저지선을 뚫고 광화문으로 광화문으로 향하면서 경험했던 승리감과 신명의 구조가 학생들의 통일운동 거리전략에서는 앙상한 정치논리의 구조로만 맴돌게 되었다.만약 나에게 구호를 하나 만들어 보라고 하면 다음과 같이 하겠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중립지대에서’

서울시는 어떤가?
서울시는 90년대초반 서울을 한강을 중심으로 재개발 하기위한 거대한 계획에 돌입했다. 이 계획의 골자는 강북의 북악산으로부터 남산을 거쳐 강남의 관악산으로 연결되는 녹지축을 한강과 교차하게하는 구도이다. 그리고 영종도와 서울을 연결시키기 위해 행주대교아래 군사지역부터 경인운하를 건설하자는 계획이다. 환경과 자치 세계화라는 구도속에 설정된 이 계획에 따라 여의도광장은 공원으로 뒤집혀 개조되었고 광화문앞에는 양쪽으로 녹지공원이 생기는등 꾸준히 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근본적 모순에 부딪치고 말았다. 용산 미군기지 이전을 위한 얘기가 나왔다가 결국은 좌초되었고, 한강이남과 강화북부를 거쳐 서해로 이어지는 민족생활동선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장벽으로 생각하여 포기하고 고비용,저효율의 무리한 계획인 경기운하를 파는 계획을 세웠다.
한강을 통해 서해로 나갈수 있다는 당연한 상식을 정전상태는 상상할 수 있는 자유까지 가로막고 있을 뿐아니라 현실에선 고비용,저효율의 재정지출로 가지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엄청난 분단비용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의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도 지금 선행되어야 할 것은 평화를 중심으로 한 전략계획을 수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도시계획을 유보하고 서울을 평화연습공간, 한강을 평화체험지대로 한강이남 중립지대를 평화지대로 만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하고 싶다. 모든 것을 정치군사논리로 환원시켜 그것이 해결되기 전엔 어떤것도 무의미 하다는 생각이나, 어차피 민간의 힘으로는 안될것이라는 자포자기의 자세 모두 분단의식이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력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의 강요를 벗어던져야 하며 이로 인한 비효율의 분단비용에 대해서도 문제제기 해야하는 것이다. 서울시의 한강을 중심으로한 개발계획은 도시에 대한 뛰어난 통찰과 이성의 승리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근대의 개막이 그랬듯이 양심에 기초한 저항이 없는 이성의 계획은 관성화되고 결국 타율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는 사실을 서울시는 고민할 필요가 있다.

2. 서울거리의 구조
서울은 청와대가, 중심부가 아닌 북악산 밑에 위치함으로서 수평적 구조가 아닌 수직적 구조로 짜여져 있다. 즉 청와대를 공간서열 체계의 정점으로하여 그 앞에 정부종합청사 미대사관 그 옆으로 사간동까지의 길에서 제일 중요한 지점에 미대사관저 광화문 네거리 이하는 언론사, 시청, 구 대법원, 구 남산 안기부, 각종 재벌 본사, 서울역, 미군기지, 국방부, 강을 건너서야 입법부인 의회가 위치해 있다. 그나마 국민과의 직선적 소통체계인 국회가 다른 행정, 언론, 재벌, 군사서열체계보다 훨씬 바깥에 버려져 있다 시피한 공간 서열 구조를 갖고 있는 셈이다. 청와대와 미대사관은 공간서열 구조의 정점에서 감시, 지휘하는 모양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인사동
이러한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평화거리의 시작점으로 우선 인사동을 고려해 보자. 우선 인사동은 광화문이란 철옹성 같은 거리권력의 가까이에 위치한 시민적 공간이다. 종로는 흘러가는 강이라면 인사동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냇가이고 여기엔 동네가 형성되어 있다. 즉 근거지가 될 수 있다. 민주화운동은 광화문 네거리를 넘지 못했다. 청소년축제나 지구의 날행사, 밀레니엄축제 때는 광화문 거리가 개방되었지만 이것은 광화문거리 권력에 대한 저항성의 성취가 아니라 서울시의 합리적 계획에의 포섭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광화문거리를 정면돌파하려는 전술은 무리가 있다. 우선 그 주변을 서서히 포위하며 치고 빠지는 유연한 전술이 필요하다. 이것은 이지역에서 생활하는 주민들이 주체가 되고 동조자가 되어야 가능하다. 이런 지역민에 대한 배려가 없을 때 어떤일이 일어나는가? 대표적인 전술의 실패가 청소년 축제일 것 같다. 이때 설치한 대형 스피커의 음향이 인사동으로 집중되면서 이 축제이후로 광화문의 대규모 축제는 거의 불가능해 졌다. 서울시가 보장해 줘도 지역민의 호응을 받지 못해서 실패한 경우이다.

왜 인사동에서 민원이 터져나왔는가 그곳만이 지역민이 실세화된 동네이기 때문이다. 광화문의 고층 건물들은 왜 침묵했는가? 생활공간이 아닌 권력공간이기 때문에 그것은 주체없는 구조물일수도 있고 주인없는 권력일수도 있다. 강하지만 약하고 가득차있는 것 같지만 비어있을 수 있는 공간이란 뜻이다. 어떤때는 독재와 독선의 악마가 되지만, 어떤때는 그런 사실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공간인 것이다. 광화문거리에서 하루 행사했다는 것도 그처럼 공허한 것일수 있다. 왜 ? 그 공간에서의 체험을 사상으로 내면화시키고 생활의 변화로 발전시킬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거리행사에서의 평등과 조화는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는것에 그 목표가 있다. 정신적으로 또는 물질적으로 이롭게 될 수 있을 때 사람은 진정한 평등과 조화의 주인이 될 수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사동의 거리 개방은 지역민과 시민, 외국인들의 소통구조로서 작용하며 이것이 양적으로 확대되고 질적으로 발전되면 인사동 거리는 평화의 강으로 나가는 발원지가 될 것이다.
인사동은 단순히 행사의 시작점이 아니라 거리전략의 근거지, 발원지가 되어야 한다. 프랑스 혁명 당시 베르사이유궁으로 향하게 하던 시민을 준비시킨 파리의 거리처럼…

용산
다음은 용산역 주변이다. 용산은 몽고 침공때 군사기지 였다가 일제 강점기 역시 일본군 기지였다가 현재 미군기지로쓰이고 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용산역주변의 구조를 보면 철길 건너에 첨단 전자상가가 있고 용산로 건너로 미군부대 국방부와 더 들어가서 이태원이 있다. 용산역은 그가운데 끼어 역사의 정지된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용산역사들의 담벼락에는 전쟁때의 총탄 자국이 여기저기 선명히 남아 있다. 50년전 그대로이다. 이처럼 전자상가의 상권이 철길을 넘어오지 못하는 것은 용산로 건너의 미군권력 때문이다. 서울시가 어찌할 수 없는 청와대에서도 어찌할 수 없는 무소 불위의 용산로 권력 앞에서 전자상권은 진출을 넘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구조가 만들어낸 가장 대표적인 분단의 상징이 바로 용산역 담벼락을 따라 난 용산역 뒷길이다. 최근 몇 년새 이곳의 저항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용철도노조에 대항해서 싸우는 철도노조원들이다. 두 번의 철도파업은 국가 전체를 뒤흔들었지만 그 저항성 역시 철길을 따라 달려버리고 역 밖으로 건너오질 못했다. 이것은 민중적 과제가 시민적 공간인 거리와 연대하지 못한 경우이다. 민중 저항성과 거리의 소통구조를 만들어 내는 일. 이것이 이 지역에서의 거리전략이 고민해봐야 할 과제가 아닐까?

한강
마지막으로 한강이다. 한강은 도시의 강으로서는 나일강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강이다.
쎄느강이나 템즈강의 규모는 우리나라의 중량천이나 청계천정도의 규모인데 한강은 이에비해 도시적 기능의 강으로는 너무 크다는 평도 있다. 그러나 역으로 이것이 한강의 가능성이 될 수도 있다. 커질래야 더 이상 커질수 없고, 개발할래야 더 이상 개발할게 없는 도시의 한계상황에서 한강은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전상태에 의해 정치적 호수가 되어있는 한강이 다시 역사위에 흐르게 하기위해서는 정전체제의 해결이 선행되어야 한다. 한강의 운명은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민족의 운명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한강의 둔치는 서울시의 개발계획에 따라 시민들이 모이는 공간으로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모여서 단순 여가를 즐길뿐 강을 통한 다양한 소통기능은 살아나지 않고 있다. 한강의 다리 또한 마찬가지다. 건너 다니는 도강의 기능만 있을뿐 이태리의 베키오다리처럼 문화적 기능은 전혀 없다. 한강의 기능한계가 다리기능의 한계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한강과 둔치 다리등 한강의 공간은 앞으로 새로운 시민생활의 흐름선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인위적이고 정치군사적인 서울중심거리보다 훨씬 시민적 소통구조가 원할한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 바로 한강인 것이다. 이 한강의 공간을 어떤 전략으로 향하게 하느냐는 서울시 거리전략의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할 것이다.

3. 서울거리의 기능
서울거리는 분단상황하에서 남한정부의 정치이데올로기가 관철되는 공간이다. 또한 미군기지와 미대사관의 거리권력의 서열체계에서 보여지듯 미국 종속성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또한 재벌과 언론들의 거리권력 서열체계에서 보여지듯 일방적 소통관계에 따른 소외와 저항 분노를 표현한다. 서울거리가 이런 한계를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시청앞 광장을 보면 조선의 덕수궁과, 일제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는 시청과, 성공회 성당과 조선호텔의 원구단등 다양한 문화의 층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공간은 6월항쟁당시 이한열열사의 노제에 의해 시민의 힘으로 개방적 공간이 되었던 이후로 다양한 문화가 왕성히 교차할 수 있는 거리의 매듭점으로 기능하지 못했다. 일방적 소통구조에 의해 차단된 것이다. 미문화원과 광화문의 거리권력등에 의해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일방적 소통과 기능만을 강요하는 거리 권력의 해체와 전복이 시민의 힘에 의해 이루어질때 끊임없이 타자를 향해 열려있는 평등과 조화의 거리가 될 수있을것이다.

4. 서울거리의 새로운 전략에 대한 제안
서울거리의 정신이 먼저 규명되어야 한다. 그정신을 기초로 장기적인 전망과 전략이 수립될수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기적 전술이 현실가능하게 설정되어야 한다. 결국 이런 목표는 거리의 권력체계와 지역민들의 변화를 목표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적이고 다양한 문화적 연습이 필요하다.
우선 서울거리의 정신은 평화를 중심으로 해야겠다는 것이다. 평화는 그동안 전쟁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정치적 구호나 이념적 차원의 추상적인 개념으로 인식되어 왔다. 물론 평화가 이러한 개념들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개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한걸음 더 진전시켜 생활속에서 구체적으로 이해되는 평화의 개념으로까지 나아가야 겠다. 큰이야기 뿐아니라 작은 이야기도 통일되어야 겠다는 것이다. 정치군사적 긴장과 생활의 풍요함이 함께 존재하는 개념이어야 겠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평화의 우리식 표현으로 홍익평화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평화의 목적이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것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나는 특히 세가지 차원에서 평화주의를 얘기하고 싶다.

평화적 지역주의
지역패권에 대해 반대하고 지역평등을 실현하는데 그 핵심이 있다. 지역패권에 의한 폐해를 완화시키는데 서울의 역할은 영정조 시대 만큼이나 크다. 그러나 서울의 역할은 지역평등을 실현하는데 그쳐서는 안된다. 지역평화는 궁극적으로 홍익의 정신이 관철될 때 완성된다. 즉 지역패권과의 싸움에서 지역평등을 실현한 경험을 가지고 차별과 소외가 여전히 남아 있는 지역에 평등과 조화의 정신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남한에서 가장 극심한 소외지역은 강원도 경기북부 인천시일부이다. 이지역들의 공통점은 비무장지대 접경지역이란 점이다. 서울에서의 평화연습은 결국 비무장지대 접경지역민들의 지역적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지원과 연대를 실현하는 일이며, 지역패권에 반대하는 평화적 지역주의를 완성시키는 길이 될것이다.

평화적 민족주의
민족주의는 민족자주정권을 창출하는 것으로서 다른 민족과의 정치적 평등을 실현하게 된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레닌의 민족해방주의는 결국 많은 식민지 나라들을 정치적 독립을 완성시키는 이념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분단으로 민족전체 차원의 독립을 실현하는데 실패했다. 그사이 미군은 친구로서가 아니라 안방에 들어앉아 감내놔라 대추내놔라 하는 관계로 되어 있고, 일본은 군국주의를 부활시키며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긴장을 촉발시키고 있다. 서울에서 미군기지를 이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미군은 이전비용을 터무니없이 부르거나 억지를 써서 유야무야시키고 말았다. 이런지경이라면 차라리 미군기지 이전이 아니라 철수를 요구하는것도 고민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무척 신중하고 사려깊게 제기되어야 한다. 사람들의 공감과 합의를 이끌어 내는 풍부한 과정이 생략되면 재미도 없고 실패하기 때문이다. 재미와 정치의 통일이 필요하다. 어쨋든 미군과의 불평등한 관계를 정리하지 않고 서울에서의 조화로운 발전은 근본적 한계상황을 만나고 만다. 대부분 실패하는 것이다.
통일이 민족전체의 독립성을 실현시킬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통일은 ‘통이가 아니라 통일이다’라는 말이 오해되면 자칫 국수적 민족주의가 될 수 있다. 하나됨만이 강조되고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에 대한 고찰이 없으면 획일적 통일이 될 수 있다. 흡수통일 논리나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도 할 수 있다는 방어전쟁논리가 나올수도 있다. 평화를 위해서는 평화를준비해야하며 전쟁력이 아니라 평화력을 길러야 한다. 폐쇄적 민족주의, 최강민족주의의 신화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민족의 평등을 쟁취하는것과 우월민족이 되는것과는 인연이 없다. 우리가 평등을 쟁취했듯이 다른민족에 대해서도 평등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민족우월주의나, 민족제일주의가 아니라 타민족과의 연대와 조화를 통해 평화력을 발전시키고 정치적 독립을 넘어 경제적으로도 잘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 문제나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의 학살에 대해 침묵하는 태도에서 이러한 민족주의의 함정을 발견한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정신적 대안은 평화적 민족주의라고 생각한다.

평화적 세계주의
현재의 세계화는 IMF등을 통한 세계지배체제의 강화를 의미한다. 경제적 정치적 불평등을 역사상 최고로 단계로 심화시킨 세계화 논리에 대해서는 오히려 반대해야한다. 이러한 세계체제에 대한 저항을 통해 세계평화의 주체가 형성되고 있다. 99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서의 합의와 연대, 뒤이은 시애틀 시위와 다보스포럼 반대등은 .그 실체가 형성되는 것을 보여준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세계적 차원의 평등을 위한 영역이 존재함을 증명한 것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안보체계에 대해 감시하고 문제제기해야하며, 무기거래박람회나 작은 무기(폭력조직에서 사용이 증가되고 있는 권총등 무기류) 의 소통을 막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 국방부의 전쟁50주년 사업에는 평화를 얘기하면서도 결국 전쟁을 준비하자는 논리와 국제적인 방위산업체들을 초빙한 무기박람회를 계획하고 있다. 또한 전쟁시뮬레이션 게임개발 대회등을 기획하고 있다. 우리는 큰 문제에 가려있는 작지만 집요한 전쟁분위기 조성에 대해 반대해야 한다. 국가안보와 더불어 민간차원의 인간안보개념을 확산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대부분의 무기수출국인 선진국의 국민들에게 이러한 무기생산을 막고 평화를 준비하는일이 결국 학교총기난사 같은 불행한 사고를 막는일임을 설득하고 궁극적으로 무기생산자체를 근절하는 일에 동참하도록 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패권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평화적 세계주의를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정신은 결국 사회적인 구조의 변화로 서울시 정책의 변화로 나타날 때 생명력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평화거리굿은 어떤 위치 가지며 어떤 역할을 할수있는가?
하루행사로 우리가 얻을수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러나 예술은 행정조치나 물질적인 지원과는 달리 사람에게 독특한 역할을 한다. 논리가 아닌 형상으로 직관으로 이래와 전망을 예감하게 한다. 문화는 전략 수립의 하위 체계가 아니라 역할이 다를뿐 전략, 전술이나 사회체계가 갖는 중요성과 마찬가지로 평등한 요소이다. 문제는 이들 요소가 정신을 중심으로 얼마나 유기적으로 조화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의 거리굿은 준비되는 단계에서부터 돈으로 떼워지는 이벤트와는 뭔가 다른 과정으로 되고 굿에 참여하고 즐기고 추억으로 남는 과정까지 평화를 예감하고 그 풍부함에 안내되도록 끌어주는 역할을 해야한다.
여기서 우리는 내용의 질서이자 체계인 형식의 문제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