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채기고글2005/02/01

사랑채 갈대밭을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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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 가을 인가 지복이 형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사랑채에 들른적이 있었다. 홍보물에 들어갈 사진도 찍어줄 겸 꼭 한번 쉬러 내려오라는 형님 말씀에 벼르고 벼르다 내려갔던 것이다. 처음 뵙는 기환형님, 경수형님 모두 도사같은 이미지를 하고 있을 것 같았는데 촌냄새 물씬한 서글서글함이 우선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형님들과 같이하는 술자리에서 이곳이 얼마나 소중하게 마련됐는가 또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수 있엇다. 그것은 단지 건강회복을 위한 휴양소 뿐 아니라 더 큰 이상을 실현할 근거지라는 얘기를 듣고나서였다. 사람 사랑 이 얼마나 숭고한 과업인가? 더구나 이것이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인생을 건 뿌리 내림이란 것을 확신케 된 것은 이상의 넓음 못지 않은 그 방법의 듬직함에 있었다.
뭘 하나 할려면 서울로, 그것도 시내 중심가로만 들어 앉을려던 나의 방법에 참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미 방법의 선택에서부터 그 이상의 충실성과 구체성이 몸으로 다가왔다.지복이 형님이 손수 닦아 놓았다고 하면서 꼭 걸어보라고 한 갈대밭 사이의 오솔길을 걸으며 사랑채에 대하여 또 사람사랑에 대하여 몇가지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머리로 만 살아왔다. 머리로만 사는 것을 극복하려 할 때도 머리로만 고민하고 연구해온 것은 아닐까? 섬진강에서 바람이 불어 왔다. 온 몸에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이것저것 복잡했던 생각이 모두 사라지고 그저 기분이 상쾌할 뿐이다. 내몸을 바람에 맡기고 바람도 내몸을 받아 주었다. 그 짧은 순간의 경험이 사람 사랑이란 화두에 실마리가 되어 주었다. 우리는 사람과 관계 맺을 때 4가지 태도를 갖는다. 추종하기,배려하기,눈치보기,무시하기가 그것이다.추종하기는 내가 나를 버리고 상대방과 동일시할 때 생긴다. 눈치보기는 나를 버리지도 상대의 주체를 인정하지도 못하는 긴장속에서 생긴다. 배려하기는 나의 주체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주체도 인정하며 연대를 통해 주체를 실현하려 할 때 생긴다. 무시하기는 나의 주체만 인정하고 상대방의 주체는 인정하지 않을때 생긴다. 그러나 이중에서 추종과 무시는 결국 비주체화란 점에서 뿌리를 같이한다. 추종은 동일시하려는 자아의식이 너무 강해 주체를 포기한 일방적 의존이란 점에서 그렇고, 무시는 자신의 주체를 실현할 대상과의 관계가 단절된 자아의식이란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는 추종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어떤 대상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주체를 포기한 추종은 과거에는 신 때문에 사람을 버리게 했고,근대에는 돈 때문에 사람을 버리게 했으며 현대에는 환경 때문에 사람을 버리게 한다.(각주) 이런 자리에 사람 사랑이 존재할 리 만무하다. 눈치는 주체화를 실현할 수 있는 상태라는 긍정성과 언제든지 비주체화의 길로 들어설수 있는 기회주의라는 부정성이 혼돈되어 있는 상태이다. 하루는 배가 나온 상사한테 ‘그것도 인격’이라고말해서 ‘그래도 자네 밖에 없어’하고 칭찬을 들었는데, 다음날엔 ‘아니 자네 날 놀리는 건가?’ 하고 꾸중을 듣는다. 눈치가 없어서 나의 주체가 무시 당하든 눈치껏 해서 나의 주체를 인정 받든 그 차이는 크지만 눈치 보는 상태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눈치보기는 나의 주체에 대한 확신과 대상 주체에 대한 믿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체에 대한 확신과 대상에 대한 믿음이 충만한 상태는 오직 배려하기 밖에 없다. 배려하기는 대상과의 연관속에서 나의 주체를 발견하고, 확대 실현 하기 위해 대상과 연대하게 한다. 나의 발전이 곧 대상의 발전인 상태. 이것이 바로 사랑과 평화이다. 사랑은그래서 주체의 발견과 성장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사랑이 전제 되었을 때 눈치와 무시는 배려가 되고 추종은 존경이 된다. 사랑은 그래서 나를 개조하고 세상을 개조 할 뿐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개조하는 유일한 혁명이다. @평화는 평등과 조화이다. 배려하기에서만 평화는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최후의 목표로서 평화가 된다.(정보와 지식도 이런 관계에서만 가장 제 가치를 발휘한다.)

어느새 발이 젖어 몸을 낮춰보니 물안개가 풀잎마다 이슬로 맺혀져 있다. 이슬 마다에는 갈대와 멀리 산과 푸른하늘이 다 머금어져 있다. 이슬은 스스로 이면서 세계였다. 물안개가 보여주는 혼돈과 가능성도 아름답지만 그것이 이슬의 아름다움과 비교 될 수 없는 이유는 그래서 분명히 있는 것이다.
임실 사랑채에 내려가거든 아침마다 거대하게 일어나는 물안개의 경이로움을 보라! 그리고 지복이형이 닦아놓은 갈대 숲을 걸어 보라 ! 그리고 어느때 쯤 몸을 낮춰 풀잎마다 맺힌 이슬을 보라! 이슬에서 뭔가 보이거든 그 마음 소중히 담아만 두어라. 형님들 하는 얘기 굳이 들으려 할것도 없다. 토종닭 한 마리 잡아 달라고 해서 푸짐하게 먹고 올라 오라!
그런 뒤로 기분이 밝아 졌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모쪼록 사랑채가 사람사랑의 답사지가 되길 바란다.

환경운동 전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유엔 희귀동물 보호 협회던가 하는 데서 세계적으로 멸종위기에 있는 곰을 보호 하기 위한 기동대가 있다. 이들의 보호 활동 중에는 이스탄불 짚시들의 생계 수단인 재주 곰을 해방(?)시키는 활동도 있다. 짚시들은 곰에게 재주를 익혀 거리등에서 재주를 부리게 하고 받은 돈으로 그날 그날 살아간다. 유일한 생계수단인 셈이다. 그런데 밤에 천막촌 근처에 매어 놓은 곰을 기동대원들이 와서 동물원에다 갖다 놓으면 짚시들은 하루 아침에 쪽박을 차게 되는 것이다. 사람과 함께 환경을 구성하는 주체로 자연 생태계를 보는 것은 옳지만 사람을 주체로 하지 않는 환경운동은 결국 사람을 버리는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이다. 사람이 환경을 무시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사람을 무시하고 환경을 추종하는 운동은 더 잘 못 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