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전략 이시우 2004/06/23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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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국문요약 ⅳ

제Ⅰ장 서 론 1
제1절 연구목적 1
제2절 연구방법 및 이론적 틀 4
제3절 연구범위 및 구성 9

제Ⅱ장 북한의 대미 외교정책의 역사적 배경 11
제1절 적대정책의 형성 11
제2절 대남 평화협정 체결 공세 19
제3절 ‘인민외교’로의 선회 24

제Ⅲ장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제의의 대두와 변화 32
제1절 북‧미 평화협정 체결제의 배경 및 개념 32
제2절 북‧미 평화협정 체결제의 내용 36
제3절 북‧미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 불가침선언의 분리 44
제4절 평화협정 체결제의와 북한의 대미정책 변화 50

제Ⅳ장 북‧미관계의 변화와 평화협정 체결제의의 변화 62
제1절 북‧미 핵협상과 평화협정 체결문제 62
제2절 제네바합의와 평화협정 체결제의의 변화 79

제3절 4자회담과 평화협정 체결문제 84
제4절 북‧미 관계개선과 평화협정 체결문제 89
제Ⅴ장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제의의 평가와 전망 97
제1절 북‧미 평화협정 체결제의와 북한의 의도 97
제2절 향후 전망 및 우리의 대응방향 105

제Ⅵ장 결 론 110

참고문헌 114
부 록 127
ABSTRACT 157

표 목 차

<표 1-1> 로즈나우의 예비이론에 의한 대외정책 결정변수 7
<표 2-1> 북한의 대외정책 결정요인과 3대혁명역량 28
<표 2-2> 3대혁명역량과 북한의 대미 외교정책 29
<표 2-3> 북한의 대미인식 변화와 평화협정 체결문제(1) 30
<표 3-1> 남북한간의 ‘평화’ 개념의 차이 36
<표 3-2> 비동맹회의 관련 북한의 동향(1975~1983) 41
<표 3-3> 북한의 대미인식 변화와 평화협정 체결제의(2) 58
<표 4-1> 3단계 북‧미 고위급회담의 주요내용 73
<표 4-2> 북한의 대미인식 변화와 평화협정 체결제의(3) 84
<표 4-3> 4자회담 진행일지 87
<표 4-4> 제네바합의 이후 북‧미접촉 일지 90
<표 4-5>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제의 102

그 림 목 차

<그림 1-1> 북한의 대외정책 결정과정 분석틀 8
<그림 4-1> 북한의 핵정책 및 핵협상 전개과정 70
<그림 4-2>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의 의도: 이중전략 104

제Ⅰ장 서 론

제1절 연구목적

탈냉전기 이후 소련의 해체와 중국의 개방으로 급격한 재편을 겪고 있는 국제정치 질서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후 199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 체제의 공식출범에 따른 북한의 대내외 환경의 변화는 북한 외교의 질적인 변화를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 미국 및 일본과의 관계개선은 김정일정권의 시급한 대외정책의 목표가 되고 있는 바, 그 성공 여하에 따라 북한체제의 존속 가능여부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탈냉전 이후 체제의 안전을 도모하고, 1980년대 말 이후 심화되고 있는 경제난을 타개하여 체제의 질적인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북한과의 핵문제 해결과정에서 북한에 대한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을 포기하고, 한반도에서의 긴장완화를 위한 대북한 참여정책(engagement policy)을 실시하고 있다.
북한은 핵협상 타결 이후 한반도의 중요한 문제들을 남한을 배제한 가운데 대미 접촉을 통해 논의해 왔으며, 남한 정부는 미국을 통해 북한을 상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타개해 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남한 내에서는 북‧미 관계개선을 통해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나서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남북관계의 개선을 유도하자는 주장과 함께 남한의 한반도문제에서의 소외와 통일의 지연에 대한 우려와 경계의 목소리가 상존하고 있다.
그러나, 올해 들어 대북 햇볕정책에 기초한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선언’과 그에 뒤이은 남북한의 ‘남북정상회담’ 합의는 국내외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3월 10일 김대중 대통령이 베를린에서 발표한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와 남북 화해‧협력에 관한 선언’과 그에 뒤이은 4월 8일 베이징에서의 전격적인 남북한간의 ‘남북정상회담’ 합의는 북‧미 및 북‧일관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북한의 ‘코페르니쿠스적’ 입장변화는 첫째, 국제관계 개선을 위한 선차적인 남북관계 개선의 필요성, 둘째, 남한의 일관된 햇볕정책에 대한 국제적인 지지와 믿음, 셋째, 국내 경제난 극복을 위한 지속적인 남한과의 경제협력의 필요성 등 대남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199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 체제 출범 이후 북한 최초의 국가 원수간 접촉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이러한 갑작스런 변화를 두고 남한 내에서는 여러 견해가 난무하고 있으나, 북한의 숨은 의도에 상관없이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한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갖는 의미는 실로 크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의 진전과 북‧미관계의 변화가 갖는 북한의 이중적 대외정책의 상호연관성은 아직 불투명한 상태이다.
북한의 미국과의 관계개선, 나아가 남한과의 관계개선은 탈냉전 이후 동아시아의 질서개편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남북관계는 물론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4강의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또한, 북‧미 관계개선은 경제뿐만 아니라 주한미군 문제, 평화체제 전환 문제, 군비통제 문제 등 군사‧안보적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평화적 통일을 이루어야 할 우리로서는 북‧미관계의 현황과 향후 전개방향 등을 전망하고, 이것이 남북관계 및 한‧미관계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여 포괄적인 대응방안을 수립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1974년 3월 이후 북한의 대미 외교정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북한과 미국간 평화협정(peace agreement)을 체결하자는 것이었다. 북한이 남한을 배제하고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리적 근거는 첫째, 한국전쟁 당사자는 북한과 미국이라는 것, 둘째, 정전협정 체결의 일방은 북한과 중국이고 다른 일방은 미국이라는 것, 셋째, 주한미군이 한국군의 전시 작전지휘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넷째, 남북한간에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되었기 때문에 별도의 평화협정 체결이 불필요하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남한과 미국정부는 남한이 한국전쟁의 실질적인 교전당사국이고 현 정전체제의 실질적인 이행당사자이기 때문에,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평화협정 체결문제는 남북한간에 논의되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북한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고 있다. 류길재, “남북한 관계와 한반도 평화체제: 이론적 검토와 현실적 대응,”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발표논문 (1996. 11. 28), 6~10쪽; 서진영, “4자회담과 한반도 평화체제 전망,” 1996년 대학통일문제연구소협의회 주최 워크샵 발표논문 (1996. 11. 15~16), 5쪽. 고유환,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북한의 전략: 북‧미협정,” 곽태환 외 저, ꡔ한반도 평화체제의 모색ꡕ (서울: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1997), 61쪽 재인용.

한편, 최근 들어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의 강도는 상당히 완화되고 있으며, 오히려 북한은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보다는 관계개선을 통한 외교관계 수립에 더욱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태도변화를 두고 대미 평화협정 체결주장과 국교정상화와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 또한 북한의 대미 외교정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북한 대미 외교정책의 핵심이 되고 있는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시기별로 나누어 평화협정의 내용, 의제의 구성, 주장 강도의 변화요인 및 변화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제의의 의도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현 대미 외교정책의 목표를 살펴보고자 한다.
즉, 본 연구의 목적은 다음의 세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의 변화를 고찰하고, 둘째,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제의의 변화요인을 분석하는 것이며, 셋째, 이를 통해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의 의도를 분석하여 북한의 대미 외교정책의 실질적인 목표를 살펴보는 것이다.

제2절 연구방법 및 이론적 틀

본 연구는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제의를 시기별로 나누어 그 변화과정과 요인을 살펴보고자 북‧미 평화협정 체결 논의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북‧미관계를 시기 구분하는 것은 여러 시각에서 논의 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북한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평화협정 체결방식 및 북‧미관계의 발전정도에 따라 편의상 간략히 구분하였다.

첫 번째 시기는 북한의 정권수립 이후부터 1974년 북한이 평화협정 체결 당사자를 남한에서 미국으로 바꾸기 이전까지의 기간이다. 이 시기 북‧미관계는 ‘적대적인’(antagonistic) 관계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시기는 1974년 3월 북한이 처음으로 미국에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한 이후부터 1992년 미국과의 핵문제가 대두되기 이전까지의 기간이다. 이 시기 북‧미관계는 외형적으로만 행해지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gestural) 관계에 불과한 시기였으며, 주한미군 철수가 북한 대미 외교정책의 가장 큰 목표였던 시기이다. 세 번째 시기는 본격적인 북‧미관계가 시작되는 1993년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부터 북‧미관계는 ‘실용적이고 실질적인’(realistic) 관계로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주한미군 철수보다는 이를 확고히 보장할 수 있는 북‧미 관계개선이 북한 대미 외교정책의 가장 큰 목표였던 시기이다.
북한은 탈냉전 이후 구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동구사회주의권과의 진영외교에서 벗어나 미국, 일본을 비롯한 대서방 외교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점진적인 변화는 급변하는 국제질서에 대한 나름대로의 인식변화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북한이 갖고 있는 국제관계에 대한 시각을 이해하는 것은 북한의 대외정책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북한의 대외정책을 결정하는 요인은 크게 국제환경의 변화와 같은 국제적 요인과 경제난, 권력승계 등과 같은 국내적 요인으로 나눌 수 있다. 박재규, ꡔ북한의 신외교와 생존전략ꡕ (서울: 나남, 1997), 33~40쪽.
이와 더불어 한반도에서의 남북분단이라는 특수 상황에 입각한 남북한 요인을 중요 요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선행된 북한의 대외정책에 관한 연구의 대부분에서 북한 대외정책의 결정요인을 크게 국제적 요인, 국내적 요인, 남북한 요인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물론 더 세밀하게는 국제체제, 국내 정치구조, 주체사상과 같은 국가이념, 사회와 같은 비정부적 요소 등의 구조적 요인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대외정책을 분석하는 방법은 그 분석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 즉 분석수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논의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북한의 대외정책을 연구하기 위한 이론적 틀 또한 다양하다. 대외정책 결정과정 및 결정요인에 대한 분석 및 연구는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정종욱‧김태현, “외교정책 이론,” 이상우‧하영선 공편, ꡔ현대국제정치학ꡕ (서울: 나남, 1992), 411~443쪽. 그러나, 아직 보편적인 분석틀에 대한 지지는 없으며, 특히 북한과 같이 독특한 체제와 구조를 가진 국가에 대한 분석 기준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북한과 같이 유일지배체제가 확고하고 폐쇄적인 나라에서는 위에서 언급된 결정요인들의 직접적인 영향보다는 이러한 요인들을 최고지도자가 어떻게 분석하고 인식하느냐에 따라 북한의 대외정책이 결정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로즈나우(James N. Rosenau)의 ‘예비이론’(pre-theory)에 따르면, 한 국가의 대외정책은 다섯 가지 수준(level)으로 나뉘어 설명할 수 있으며, 이들 다섯 가지 수준은 각기 다른 종류의 변수(variables)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James N. Rosenau, “Pre-theories and Theories of Foreign Policy,” The Foreign Policy (New York: Nichols Publishing Company, 1980), pp. 128~129.

첫째, 개인변수(individual variables)는 한 국가의 대외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하는 정책결정자들이 갖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성격(idiosyncratic nature of the decision-maker), 심리적 경향, 재능, 과거의 경험, 가치관, 국제정치를 바라보는 관점 등에 기인하는 것이다.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보면 트루먼 독트린, 닉슨 독트린, 카터 독트린, 레이건 독트린 등 대통령의 이름 다음에 독트린(doctrine)이란 단어가 많이 붙어 있다. 미국의 정치는 상당한 제도화가 이루어졌고, 또한 개인이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대통령들은 그들의 독특한 대외정책을 실행하였으며, 실제로 이들 정책간에는 많은 차이가 내재되어 있다. 이는 대통령 개인들이 갖고 있는 특수한 신념, 경험, 가치 등이 상호작용을 일으켜 정책결정에 있어서 개인적인 차이를 초래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유승익, “외교 정책 결정 과정과 구조,” 구본학 외 공저, ꡔ세계외교정책론ꡕ (서울: 을유문화사, 1995), 127쪽.
둘째, 역할변수(role variables)는 개인변수와는 대치되는 개념으로서 한 국가의 대외정책에 있어서의 지속성을 설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정책결정자들은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에 부여된 역할, 또는 그 지위와 관련되어 법적으로 인정되거나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진 행동영역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는 것이다. 역할변수의 영향력이 클 경우, 정책결정자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성향, 가치관, 성격 등의 요소는 정책 결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이 역할변수는 후에 개인변수에 포함된다.
셋째, 정부변수(governmental variables)는 정책결정자의 대외정책 선택을 제한 또는 강화시키는 한 국가의 정부형태나 구조의 모든 양상을 의미한다. 넷째, 사회변수(societal variables)는 국가의 대외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비정부적‧비정치적 요소로서,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가치성향, 여론, 사회통합 정도, 산업화의 정도 등이 여기에 속한다. 다섯째, 체제변수(system variables) 또는 외부환경 변수로서 대외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한 국가의 밖에서 일어나는 행위 및 외부환경의 비인간적인 측면을 말하며, 지리적 현실, 전략적 위치, 잠재적 적국으로부터의 이데올로기적 도전 등을 말한다.
그러나, 이들 변수들은 예비이론의 중요 요소일 뿐, 한 대외정책이 어떤 요소에 의해 얼마만큼의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로즈나우는 이들 변수들의 상대적 중요성(relative potency)을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국가의 영토크기와 천연자원의 보유량(geography and physical resources), 국가 경제의 발전 정도(state of the economy), 정치 체제의 개방 여부(state of policy) 등 세 가지를 기준으로 8개의 국가 유형을 정하고, 이들 각 국가 유형의 대외정책 결정에 있어서 예비이론 5개 변수들의 영향력을 순위로 매겨 설명하였다. 즉, 국가의 형태에 따라 예비이론의 5개 변수들이 그 국가의 대외정책 형성에 미치는 영향력이 달라짐을 설명하였다.
<표 1-1>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북한처럼 영토가 작고 경제적으로 후진국이며 정치적으로 폐쇄적인 나라에서는, 대외정책 결정과정에서 개인변수가 가장 영향력을 미치고, 그 다음에 체제, 역할, 정부, 사회변수 순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표 1-1> 로즈나우의 예비이론에 의한 대외정책 결정변수
영토 및 천연자원
대 국
소 국
경제의 발전 정도
선진국
후진국
선진국
후진국
체제 개방성 여부
개방
폐쇄
개방
폐쇄
개방
폐쇄
개방
폐쇄

대외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의 순서

역할
사회
정부
체제
개인
역할
개인
정부
체제
사회
개인
역할
사회
체제
정부
개인
역할
정부
체제
사회
역할
체제
사회
정부
개인
역할
체제
개인
정부
사회
개인
체제
역할
사회
정부
개인
체제
역할
정부
사회
국가의 예
미국
소련
인도
중국
화란
체코
케냐
가나
출처: James N. Rosenau, “Pre-theories and Theories of Foreign Policy,” The Foreign Policy (New York: Nochols Publishing Company, 1980), p. 133.

또한, 이스라엘의 외교정책을 분석한 브레쳐(Michael Brecher)는 대외정책의 결정요인으로 내적 배경요인 및 외적 배경요인을 포함하는 조작적 환경(또는 정책집행적 환경, operational environment)과 심리적 환경(psychological environment)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그는 조작적 환경이 정책결정의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그것은 정책결정자들의 이미지, 즉 인식을 통해 여과된 심리적 환경으로 전환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서, 대외정책 결정자의 정세인식이 대외정책 결정과정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였다. Michael Brecher, The Foreign Policy System of Israel: Setting Image, Process (London: Oxford Univ. Press, 1972), pp. 2~14. 차성덕, “북한 외교정책의 결정요인에 관한 연구: 탈냉전기 대미핵정책변화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8), 27쪽 재인용.
이로 미루어 보아 북한의 대외정책은 국내정치적 환경, 또는 한반도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상황과 같은 조작적 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으나, 결정적으로는 최고지도자인 김일성 주석 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인식을 통해 나타나는 심리적 환경에 따라 대외정책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선행연구 이론에 따르면, <그림 1-1>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북한의 대외정책은 여러 결정요인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최고지도자의 정세인식에 따라 크게 좌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1-1> 북한의 대외정책 결정과정 분석틀

대외정책 결정요인
(국제적‧국내적‧남북한 요인, 구조적 요인 등)
최고지도자의
인식
대외정책
산출

따라서, 본 연구는 선행연구 이론을 바탕으로, 북한이 대미관계에 있어서 국내외적 문제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또는 전술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대외정책의 방향과 강도, 그리고 태도 등을 결정하였으며, 이는 국제적 환경변화와 밀접히 연관된 최고지도자의 대미 인식변화에 기인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본 논문을 통해 이를 검증하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기본전제를 바탕으로 북한의 대미 외교정책의 변화와 연계된 평화협정 체결주장의 변화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의 의도 및 대미 외교정책의 목표를 파악하고자 한다.
다만, 본 연구는 북한이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하기 시작하는 1974년 이후를 중심으로 논의될 것이므로, 1974년 이전 북한의 대미정책은 1960년대 초 김일성이 주창한 ‘3대혁명력량강화노선’을 원용하여 분석하였다. 정권수립 이후부터 1970년대 초까지 북한은 대부분 사회주의 진영과의 고립된 외교를 추구하였기 때문에 앞에서 서술한 이론적 틀로는 대미 외교정책을 분석하는데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이 시기는 북한의 ‘3대혁명력량강화노선’을 중심으로 각 시기의 대미 외교정책을 분석하였다. 3대혁명역량을 원용하여 그들의 조합을 통해 북한의 대남정책 및 대외정책을 분석한 연구로는 백종천, “북한의 군사력,” 박재규 편, ꡔ북한의 대외정책ꡕ (서울: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1986), 22~25쪽; 허문녕, ꡔ북한의 대미국정책 변화 연구ꡕ (서울: 민족통일연구원, 1995) 등이 있다.

제3절 연구범위 및 구성

본 연구는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제의의 변화를 분석하기 위하여, 남북한간의 평화협정을 주장하던 북한이 1974년 3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3차회의를 기점으로 평화협정 체결 당사자를 미국으로 전환한 시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기간을 시간적 범위로 제한하였다. 이와 함께 북한의 정권수립 이후 1974년까지의 북‧미관계도 간략하게 고찰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위에서 제시된 범위 내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해답을 구함으로써 북한 대미 평화협정 체결제의의 변화요인을 분석하고자 한다. 첫째,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제의에 있어서 지속성 및 변화는 무엇이며, 그 요인은 무엇인가? 둘째, 북한이 대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즉, 북한이 진실로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원하고 있는가, 아니면 평화협정 체결주장을 통해 얻고자 하는 실질적인 의도가 따로 있는가? 셋째, 현 김정일정권의 대미 외교정책 결정요인은 무엇이며, 어떠한 정책을 추진할 것인가? 즉, 거시적인 측면에서 북한의 현 정권이 대미 외교협상에서 얻고자 하는 전략적 목표는 무엇인가?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제Ⅱ장에서는 정권수립 이후부터 1974년 이전까지 북한의 부문별 대미인식 변화와 그 특징을 간략히 살펴봄으로써, 북‧미관계의 역사적 배경(historical background)을 조망하였다.
제Ⅲ장에서는 1974년 이후부터 1992년 핵문제 이전까지의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제의의 내용 및 대미 접촉의 전개양상을 2단계로 나누어 고찰하여, 이 시기 북한 대미 외교정책의 변화와 그 특징을 분석하였다.
제Ⅳ장에서는 북‧미 핵협상과 이후 현재까지 이르는 본격적인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제의 및 미국의 대응을 검토하여, 북한 대미 외교정책의 변화와 그 특징을 분석하였다. 여기서는 북‧미 관계개선을 위한 핵협상과 ‘제네바합의’ 이후 북한이 제의한 ‘새로운 평화보장체계’에 대해 고찰하고 그 특징에 대해 살펴보았다.
제Ⅴ장에서는 앞에서 분석된 결과를 중심으로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제의를 평가하여, 북한이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는 숨은 의도를 파악하고 향후 우리의 대응방향을 설정해 보았다.
제Ⅵ장은 본 연구의 결론 부분으로서, 이상에서 논의된 내용을 요약하고, 북한의 대미 외교정책의 변화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과 함축적 의미를 갖는가를 논의하면서, 본 연구의 문제점과 이를 보완하는 의미에서의 향후 연구방향을 설정해 보았다.

제Ⅱ장 북한의 대미 외교정책의 역사적 배경

정권수립 이후 1974년 최초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제의 이전까지 북한은 미국과 이렇다할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다. 이 시기 북한은 미국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남한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형식적으로 제의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 장에서는 본격적인 북‧미관계 논의에 앞서 1974년 이전까지 북한의 대남 평화협정 체결제의와 대미 외교정책을 간략히 고찰하고, 그 변화와 특징을 분석하고자 한다.

제1절 적대정책의 형성

북한은 1945년 분단 이후부터 미국을 ‘제국주의국가’ 김일성, “민족통일전선문제에 대하여,” ꡔ김일성저작집ꡕ, 제1권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9), 500쪽.
로,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을 ‘침략책동’ 김일성, “우리는 이해에 무엇을 하며 어떻게 일할것인가?,” ꡔ김일성저작집ꡕ, 제4권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9), 29쪽.
으로 규정하고, “미제국주의자들은 자기의 팽창정책을 실현하며 약소민족의 자주권을 침범하기 위하여 «원자탄외교정책», «딸라외교정책», «트루맨주의», «마샬계획» 등 각종 술책을 다 쓰고있으며, 세계를 지배하려는 전면적인 반동공세” 김일성, “북조선로동당 제2차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사업총화보고,” 위의 책, 196~197쪽.
를 획책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또한, 북한은 한국전쟁 이전의 한반도문제를 국내문제와 국제문제의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문제로 간주하여 “만일 미국의 반동적인 간섭만 없었더라면 아주 쉽게, 아무런 복잡성없이 조선인민의 요구대로” 위의 글, 204쪽.
한반도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임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북한은 통일정부 수립의 선결조건으로서 ‘외국군대의 철거’를 주장하였다. 위의 글, 211쪽.

1948년 9월 2일~10일 정권수립과 동시에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제1기 1차회의에서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정부정강을 발표하여, 한반도 분단지속의 원인으로서 ‘미국군대의 장기주둔’을 거론하고 미‧소양군의 동시철수를 주장하였다.

이 요청서를 보내면서 조선 최고인민회의는 이를 기하여 전조선인민의 명의로 위대한 소련정부에 그가 벌써 1947년 9월 26일에 조선에서 소‧미 양군동시철거에 대하여 제의하였고 또 그후에 미국정부가 조선에서 자기군대를 동시에 철거한다면 소련정부는 자기군대를 즉시 철거할데 대한 준비를 하고있다는것을 여러번 표명한데 대하여 충심의 감사를 드려마지 않는바입니다. 조선 최고인민회의는 미국정부도 조선인민의 민족적리익을 존중히 여기며 제인민간 안전과 평화와 친선의 강화를 염원하여 조선인민의 이 요청에 순응하여주며 소련군이 조선에서 철거함과 동시에 자기군대를 조선에서 즉시 철거할데 동의할것을 바라는바입니다. 국토통일원, ꡔ북한최고인민회의자료집ꡕ, 제1집 (서울: 국토통일원, 1988), 97~101쪽.

이와 같이 북한은 해방 이후 대미 ‘비난’ 및 ‘선전‧선동’ 그리고, 주한미군의 철수주장 등을 통해 대미 적대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추진했던 가장 큰 이유는 체제 정비와 안정이 무엇보다 시급했던 당시의 북한 내 사정에 있었다. 북한은 당시 ‘새조선건설’을 위해 ‘혁명적 민주기지노선’을 제시하고, 이 당시 북한은 ‘민주기지노선’이라는 용어 대신 ‘민주주의적기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김일성, “우리 나라에서의 맑스-레닌주의당건설과 당의 당면과업에 대하여,” ꡔ김일성저작집ꡕ, 제1권, 327쪽.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위원회 결성, 동년 8월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를 거쳐 1948년 2월에는 조선인민군을 창설하고, 이어 9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여 국내정치적 체제정비를 완료함으로써 민주기지노선을 단계적으로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북한 최고결정자의 국제관 및 국제정세 판단 또한 대미 적대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일성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으로 규정하고, 이와 같은 국제정세를 ‘민주세력과 반동세력간의 투쟁’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김일성은 국제무대의 이러한 흐름이 소련 주도의 국제민주진영이 강화되고 미제국주의의 반동진영이 미약해지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김일성, “북조선로동당 제2차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사업총화보고,” 앞의 책, 192~203쪽.

즉, 해방 이후 북한은 냉전체제가 고착화됨에 따라 민주기지노선을 제창하고, 미국의 대북한 위협을 강조하여 국내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는 한편, 남한 내 미군의 철수 분위기 조성을 위한 대미 비난 및 적대정책을 구사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북한은 한국전쟁을 ‘미제국주의자가 이승만 정권을 사주하여 일으킨 전쟁’으로 강변하면서, 이 전쟁의 성격을 ‘반제국주의적민족해방혁명’인 동시에 ‘전인민적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였다. 북한은 ‘조선인민의 적’으로서 ‘미제국주의 침략자들’과 그의 앞잡이인 친미‧친일파, 민족반역자, 지주, 예속자본가들을 설정하여, 이들을 타도하지 않고서는 ‘민족해방’과 ‘인민해방’의 임무를 달성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은 정전협정 체결을 그들의 커다란 승리로 평가하고, “미제국주의자들의 간섭이 없었고 조선문제가 우리의 로선과 주장대로 해결되였더라면 벌써 통일이 되였을것” 김일성, “모든 것을 전후인민경제 복구발전을 위하여,” ꡔ김일성저작선집ꡕ, 제1권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67), 396~399쪽.
이라고 주장하면서 남한 내 미군의 주둔과 주한미군에 대한 적대감을 강화시켰다. 그 후에도 북한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한미군의 철수를 반복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1955년 8월 15일 8.15해방 10주년 경축대회 연설을 통해 김일성은 남북당국의 대표자회의를 제의하면서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또한, 이 연설에서 북한은 통일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남북한 군대의 축소를 제의하였다.

우리는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우선 정전을 공고한 평화에로 전환시키며 북남조선이 호상 접근할수 있는 조건을 조성하여야 하겠습니다…우리 나라의 평화적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서는 조선에서 공고한 평화가 보장되여야 합니다.…외국무력이 조선에 계속 주둔하고 있는것은 조선의 평화적통일에 장애로 되는것만큼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국가들은 자기군대를 조선에서 철수할 조치를 빨리 취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북남조선 당국이 북남간에 현존하는 불신임과 긴장상태를 제거하기 위하여 호상 상대방을 반대하는 어떠한 무력행사도 하지 않고 조선의 통일문제를 오직 평화적방법으로 해결할 의무를 질데 대하여 조선인민과 전세계인민들앞에 선포하며 인민들의 군사비 부담을 줄이고 비생산노력을 평화적건설에 돌리기 위하여 북남조선 군대를 최소한도로 축소할것을 제의합니다. 노중선 편, ꡔ남북한 통일정책과 통일운동 50년ꡕ (서울: 사계절, 1996), 49~50쪽.

김일성의 이 연설은 불가침문제와 평화체제로의 전환 및 군축문제를 남북한 당국간에 포괄적으로 협의하자는 북한 최초의 공식적인 제안으로, 상호 불가침문제와 평화협정 체결문제가 미분화된 상태에 있었다. 고유환, 앞의 글, 63쪽.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성과를 얻지 못하자 북한은 1955년 2월 25일 북한은 대일관계에 관한 외무상 남일의 성명을 통해 대외정책에서의 다변화논리를 최초로 표명하였다. 이 성명에서 북한은 “각이한 사회제도를 자진 모든 국가들이 평화적으로 공존할수 있다는 원칙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 나라와 우호적관계를 가지려고 하는 일체 국가들과 정상적관계를 수립할 용의가 있으며 우선 호상리익에 부합되는 무역관계와 문화련계를 설정할것을 희망” ꡔ조선중앙년감 1956ꡕ (평양: 조선중앙통신사, 1956), 16쪽.
한다고 밝히고 일본과의 관계정상화 의사를 공식적으로 표명하였다. 이러한 다변화의 논리는 1956년 4월 제3차 당대회,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1차회의, 1961년 9월 제4차 당대회, 1962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제3기 1차회의 등에서 김일성이 행한 연설을 통해 지속적으로 표명되었다.
또한, 반미감정을 내부적으로 고취시키는 한편, 반미투쟁의 차원에서 제3세계와의 연대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이 대외정책의 다변화를 추진하는데 영향을 준 요인의 하나가 제3세계 국가의 등장이었다는 것은 다음의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회주의나라들과의 친선협조관계를 계속 강화하며 반제반미투쟁을 힘있게 벌리면서 아세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새로 독립한 나라들과의 친선관계를 새로운 단계에로 확대발전시켜나가는것은 1960년대 전반기 우리 나라의 대외관계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켜나가기위한 유일하게 정당한 방침이었다.”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ꡔ조선전사ꡕ, 제30권 (평양: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 430쪽.

반면, 대남 평화협정 체결 및 군축 제의를 통해 ‘평화노선’을 명시적으로 주장하면서 대미 협상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각 나라 및 유엔에 보내는 편지나 여러 번의 미국의 침략행위 규탄대회, 정부의 성명서 발표를 통해 주한미군 철수문제와 통일문제를 연관시켜 강조하면서 대미협상의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미제야말로 조선인민의 불구대천의 원쑤이며 극악한 원쑤이다…오늘 조선인민이 겪고있는 모든 불행과 고통의 화근은 바로 미제의 남조선 강점에 있다. 모든 사실은 남조선에 미군이 계속 머물러 있는한 남조선인민들이 오늘의 참담한 불행과 고통에서 벗어날수도 없으며 조선이 평화적으로 통일될수도, 극동에서 전쟁의 화근이 제거될수도 없는것이다…남조선에서 미군을 철거시키는것-이것은 오늘 조선인민의 가장 절박한 요구이다. “조선에 대한 미국의 침략행위에 대하여, 외무성비망록(1962.6.25),” 동아일보사 안보통일문제연구소 편, ꡔ북한대외정책기본자료집ꡕ, 제2집 (서울: 동아일보사, 1986), 100~101쪽.

이처럼 북한이 한국전쟁 이후 반미감정을 고양시키면서 위장평화공세를 통한 대미 협상정책을 추진한데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소련의 흐루시초프(Nikita Khrushchev)가 스탈린(Joseph V. Stalin) 격하운동과 함께 ‘평화공존론’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 및 이로 인한 중소분쟁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정진위, ꡔ북방3각관계: 북한의 대중‧소관계를 중심으로ꡕ (서울: 법문사, 1985); 유세희, “중‧소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 경쟁에 관한 연구,” ꡔ중소연구ꡕ, 제38호 (서울: 한양대학교 중소연구소, 1988); “The Sino-Soviet Split,”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14: The People’s Republic, Pt.1: The Emergence of Revolutionary China, 1949-1965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pp. 478~538; A. G. Yakovlev, “Russian-Chinese Relations: Impact on the DPRK,” ꡔ중소연구ꡕ, 제18권 1호 (서울: 한양대학교 중소연구소, 1994) 참조.
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화해분위기가 고조되었고, 소련과 중국의 경쟁적인 대북 유인정책으로 북한으로서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군사‧경제적 원조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김일성은 소련의 평화공존정책을 체제유지 및 반제‧반미투쟁의 걸림돌로 생각하고, 소련의 의존정책에서 벗어나 소련과 중국을 오가는 등거리외교를 추진하게 되었다. 즉, 북한은 1960년대 초반에 소련과 소원하게 되자 중국과 밀착하였고,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중국과 소원하게 되자 다시 소련 접근정책을 추구하였다. 특히, 소련으로부터 대대적인 군사‧경제적 원조를 확보함으로써 1960년대 후반 들어 반미 무력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둘째, 북한은 전후복구 경제계획 추진과 김일성의 유일지배체제 구축을 위해 위장평화공세를 취하며 반미감정을 이용하였다. 북한은 전후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5개년 경제계획을 수립하고 인민경제 복구사업에 매진하면서, 대외적으로는 경제협력을 위한 평화공존정책과 아울러 상이한 사회제도를 가진 다른 진영 국가들과도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하였다. 남일, “최고인민회의 제1기 9차 전체회의에서 한 토론,” 국토통일원, ꡔ북한최고인민회의자료집ꡕ, 제1집, 720쪽.
대미 외교정책 또한 이에 부응하여 대내적으로는 반미‧반제의식을 고취시켜 체체강화와 일인 독재체제를 구축하는데 이용하고, 대외적으로는 경제회복을 위한 위장평화공세를 추구하면서 단기적으로 무력에 의한 통일을 포기한 채, 주한미군 철수를 통한 대남 공산화통일을 추구하는 장기적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셋째, 김일성의 국제정세 인식의 변화이다. 중소분쟁의 심화로 사회주의 진영의 분열이 고착화되고, 신생독립국들을 중심으로 한 제3세계의 국제적 지위가 강화되는 다원화 과정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소련과 중국 중심의 국제정세에 대한 기본인식을 전환시켰다. 즉, 김일성은 한국전쟁 이후 새로운 국제정세의 변화에 처하여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현실적 한계성과 ‘자주노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새로운 탈진영적 정책노선의 가능성을 찾게 된 것이다.
즉,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은 대중‧소 밀착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국내적인 안정을 꾀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한 정치‧경제적 어려움으로 체제가 약화되었다. 따라서 북한은 약화된 체제의 복구를 위해 주한미군의 철수를 의제로 하는 대미 협상정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격화되기 시작한 반미 적대감정은 1960년대 후반에 대미 무력행사로 노골화되었다. 1968년 1월 23일에는 푸에블로(Pueblo)호를 납치하였고, 거의 같은 시기에 31명으로 구성된 북한의 특공대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서울의 청와대 부근까지 침투하기도 하였다. 1968년 말에는 반정부게릴라활동을 선동하기 위해 남한의 동북해안지역에 120여 명의 특공대를 침투시키고, 1969년 4월 16일에는 일본 영해 상공에서 미국의 EC-121 정찰기를 추락시킴으로써 정전협정 체결이래 최대의 직접적인 반미 적대행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도 북한은 계속해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해체를 주장하는 등 주한미군 철수를 위해 남한이나 유엔과 협의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미제침략군이 남조선에서 철거한 다음 북남조선간에 평화협정을 맺으며 북남조선의 군대를 10만 또는 그 아래로 줄이는 조치를 취할수 있을것이다…조선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필요하다면 유관국가들과의 국제회의를 소집할수도 있다고 여전히 인정하고있다. 노중선 편, 앞의 책, 138쪽.

1960년대 초반까지 대미 위장평화공세와 협상정책을 추진하던 북한이 1960년대 후반 들어 강경한 대미 외교정책으로 돌변하면서 무력도발을 감행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첫째, 북한과 소련의 군사적 관계의 강화이다. 1965년 소련 흐루시초프의 실각 이후 등장한 코시긴(A. Kosygin)이 월맹을 방문한 후 방북하여 월맹과의 대미 통일전선 형성을 요구하자 북한은 소련에 적극적인 군사원조를 요청하게 되었다. 쿠바 미사일위기와 베트남전쟁에 대한 남한과 미국의 대대적인 참전으로 체제유지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된 상황에서, 소련의 이와 같은 대대적인 군사원조는 북한으로 하여금 불안감을 해소하고 대미외교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할 수 있게 하였다. 유석렬, ꡔ북한정책론ꡕ (서울: 법문사, 1988), 184쪽.

둘째, 김일성 유일지배체제의 확립이다. 북한은 당시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여 일인독재체제를 확립하였으며, 중소분쟁에 휘말리지 않고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대북 경제‧군사적 지원을 경쟁적으로 확보하였다. 또한, 북한은 베트남전쟁을 혁명력량과 반혁명력량 사이의 투쟁으로 인식하고, 김일성의 권력강화를 기반으로 하여 제국주의 역량을 약화시키기 위한 차원에서 대미 무력도발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현정세와 우리당의 과업,” ꡔ자주성을 옹호하는 세계인민들의 단결을 위하여ꡕ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2), 152~168쪽.

셋째, 남한의 반공정권의 등장과 한‧미‧일 안보체계의 강화이다. 당시 남한은 4.19혁명과 5.16 군사혁명을 거쳐 ‘반공’을 국시로 한 군사정권이 집권하고 있었으며, 1965년 한‧일 관계정상화 이후 한‧미‧일의 삼각구도가 강화되고 있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북한은 1966년 10월 제2차 당대표자회의에서 국내혁명역량 강화 및 군사력 확대를 위한 ‘4대군사노선’을 채택하였으며, 1968년 정권수립 20주년 기념대회에서는 제3세계와의 통일전선 형성에 기초한 ‘미제의 각뜨기’ 전략 “미제국주의자들이 강한것같이 보이지만 여러 나라 인민들이 사면에서 공격을 들이대고 모두 달라붙어 각을 뜨면 그들은 맥을 추지 못할것이며, 결국 멸망하고 말것이다.” ꡔ로동신문ꡕ, 1968년 9월 8일자.
을 대미 외교정책의 기본원칙으로 정립하였다.
즉, 1960년대 후반 북한은 중소분쟁의 심화와 한‧미‧일 안보체계의 형성, 그리고 남한에서의 반공정권 등장으로 대외적 환경이 불안하였으나, 1965년 이후 소련의 군사지원으로 인해 국내의 정치‧군사적 역량이 강화되자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대미 공세적 무력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정권수립 후 1960년대까지 북한의 대미인식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제2절 대남 평화협정 체결 공세

북한은 미국에 대한 적대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동시에 남한에 대해서는 통일의 전제조건 조성 차원에서 현 정전상태를 평화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한 평화협정 체결을 한국전쟁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제의해왔다. 또한, 북한은 남한을 ‘미제국주의에 의해 강점된 괴뢰정권’으로 규정하고 민족적 통일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주한미군의 철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전협정 체결 직후 남북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개최된 제네바회담(1954. 4. 26~6. 15)에서 북한은 제2항 “6개월 기한내에 조선지역으로부터 일체 외국무력이 철거하여야 할것”을 포함하는 ‘조선문제의 평화적 방안’을 제안하였다. 노중선 편, 앞의 책, 39~40쪽.
그러나, 북한은 평화협정 체결을 실현시키기 위한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으며, 단지 소극적으로 제안하는 수준에 그쳤다. 북한은 1955년 3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제1기 9차회의 선언문을 통해 남북한 군대의 감축을 주장하고, 이어 8월 11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는 한편, 동년 8월 15일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였다. 위의 책, 48~50쪽.

1957년 9월 18일~20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2기 1차회의에서 김일성은 연설을 통해 “정전협정의 모든 조항들은 엄격히 준수되어야하며 정전을 공고한 평화에로 전환시켜야”한다고 주장하고, ‘조선에서 모든 외국군대를 철퇴’시켜야 함을 강조하면서 “북남조선의 병력을 각각 10만명으로 혹은 그 이하로 축소”할 것을 제의하였다. 위의 책, 59쪽.
그러나 북한은 이 연설에서 평화적 통일을 위한 ‘민주기지’의 강화를 강조함으로써, 북한이 명시적으로 주장하는 ‘평화노선’은 한반도 공산화통일의 완수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북한의 한반도 평화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주장이 시작된 것은, 1962년 10월 22일~23일 최고인민회의 제3기 1차회의에서 한 연설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전제로 하는 남북 평화협정 체결제의 때부터이다.

조선문제는 뉴욕이나 워싱턴에서 외국사람들이 논의할것이 아니라 평양이나 서울에서 조선사람끼리 토의하여야 합니다. 조선의 통일문제는 조선인민의 내정문제이며 오직 조선사람 자신에 의해서만 해결될수 있습니다…우리 나라의 자주적평화통일은 남조선으로부터 외국군대를 철거시키는 조건하에서 일련의 중간걸음들을 거쳐 점차적으로 실현되어야 합니다…북남조선간의 평화협정 체결과 군대의 축소는 무엇보다도 먼저 남조선 인민들의 무거운 군사비 부담을 덜어주게 될것이며 북남간에 인위적으로 조성된 긴장상태를 제거하고 호상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할것입니다…우리 나라의 통일은 누가 먹고 누가 먹히는 문제인 것이 아니라 본래 통일되고 단일한 민족이 제국주의 기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민족적통일을 회복하는 문제입니다. 위의 책, 113~114쪽.

여기서 북한은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미국이 조성한 긴장상태를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위한 평화협정을 체결하자고 제의하였다. 이후 북한은 1963년 12월 10일 최고인민회의와 조국전선, 조평통 연석회의에서 남북협상을 제의하면서 “우리는 미국군대를 철거시키는 조건하에서 북남이 서로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을데 대한 평화협정을 체결하며 북남조선의 군대를 각각 10만 혹은 그 이하로 축소” 위의 책, 119쪽.
할 것을 재차 제의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북한은 ‘남조선혁명론’ 북한의 ‘남조선혁명론’은 1964년 2월 25일~27일 개최된 당중앙위원회 제4기 8차전원회의에서 ‘조국통일의 위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혁명력량을 백방으로 강화하자’라는 김일성의 연설에서 체계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지역혁명론에 입각한 ‘남조선혁명론’은 1965년 4월 14일 인도네시아 알리아르함 사회과학원 초청 김일성의 연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사회주의건설과 남조선혁명에 대하여’에서 ‘3대혁명력량강화노선’으로 구체화되어 논리적으로 완성되었다. ꡔ김일성저작선집ꡕ, 제4권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68), 94쪽, 239쪽.
에 입각하여 통일혁명당 사건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정봉화, “북한의 대남정책 연구, 1948~1998: 지속성과 변화” (경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9), 133~136쪽 참조.
등 대남혁명통일전략을 추진함으로써 남북관계는 경색되었고, 남북한간의 평화협정 체결제의나 협상은 거의 없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북한은 ‘3대혁명력량강화노선’에 의해 추진했던 대남공작 및 무장게릴라 침투, 대미 무장도발 등의 군사강경노선이 실패하자 다시 남북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1971년 4월 12일~14일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4기 5차회의에서 허담은 ‘현국제정세와 조국의 자주적통일을 촉진시킬데 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 8개항의 평화통일 방안을 제의하면서, 남북한간의 접촉과 연계를 강화하고 통일문제를 풀기 위한 ‘남북정치협상’을 진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첫째, 남조선에서 미제침략군을 철거시키는것입니다…둘째, 미제침략군이 물러간 다음 남조선의 군대를 각각 10만 또는 그 아래로 줄이는것입니다…셋째,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일조약’을 비롯하여 남조선 괴뢰정권이 민족의 리익에 배치되게 외국과 체결한 모든 매국적이며 예속적인 조약들과 협정들을 폐기하며 무효로 선포하는것입니다…넷째, 자주적으로 민주주의적기초우에서 자유로운 북남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적인 중앙정부를 세우는것입니다…다섯째, 자유로운 북남 총선거를 위하여 남조선 전지역에서 각 정당‧사회단체 및 개별적인사들이 정치활동을 벌릴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며 조국통일위업을 위하여 투쟁하였다는 이유로 남조선에서 체포, 투옥된 모든 정치범들과 애국자들을 무조건 석방하는것입니다…여섯째, 완전한 통일에 앞서 필요하다면 현재와 같은 북남의 각이한 사회제도를 그냥 두고서 과도적조치로서 북남조선연방제를 실시하는것입니다…일곱째, 북남간에 통상과 경제적협조, 과학‧문화‧예술‧체육 등 여러 분야에 걸친 호상 교류와 협조를 실현하며 북남간에 편지거래와 인사내왕을 실현하는것입니다…여덟째, 이상의 문제를 실현하기 위하여 각 정당‧사회단체들과 전체 인민적성격을 가진 사람들로 북남조선정치협상회의를 진행하는것입니다. 노중선 편, 앞의 책, 145~146쪽.

이는 10년 가량 쌓인 먼지를 털어낸 해묵은 연방제 통일방안으로서, 1970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이 제시한 평화통일방안에 대응하기 위한 형식적이고 표면적인 제의였다.
1972년 1월 10일 요미우리신문기자와의 회견에서 주한미군 철수시기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72년 요미우리신문기자와의 회견에서 김일성은 남북한간 평화협정 체결→주한미군 철수→무력 감축 등 남북사이의 평화협정 체결을 3단계로 나누어 제의하였다.
에 다소 융통성을 보인 북한은, 1972년 2월 28일 닉슨과 조우언라이(周恩來)의 정상회담으로 ‘상하이 선언’(Shanghai communique)이 성사되면서 미‧중관계가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함에 따라 전술적인 변화를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선언은 “미국은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를 유지하고 한반도에서 긴장완화를 추구하고 교류증진을 모색하는데 노력을 지지”하며, “중국은 북한의 평화통일 8개항 방안(1971.4.12)과 언커크 해체를 요구하는 입장을 확고히 지지한다”고 명시하였다. 위의 책, 150쪽.
따라서, 남북한 당국은 한반도문제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할 능력이 있음을 과시해야 할 동기를 가지게 되었고, 이어진 남북한간 고위급 비밀회담 결과 역사적인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척 다운스 저, 송승종 역, ꡔ북한의 협상전략ꡕ (서울: 한울아카데미, 1999), 261~267쪽.

이후 북한은 1973년 4월 5일~10일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5기 2차회의에서 남북 평화협정 체결을 거듭 제의하고, 최고인민회의 명의로 ‘미국 국회에 보내는 편지’를 채택하여 주한미군 철수 등을 포함한 5개 항목을 제안하였다.

북남사이의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군사적대치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대책으로서 첫째, 무력증강과 군비경쟁을 그만두며, 둘째, 우리 나라에서 미군을 포함한 일체 외국군대를 철거시키며, 셋째, 북과 남의 군대를 각각 10만 또는 그 아래로 줄이고 군비를 대폭 축소하며, 넷째, 외국으로부터의 일체 무기와 작전장비 및 군수물자의 반입을 중지하며, 다섯째, 이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며 북과 남사이에 서로 무력행사를 하지않을데 대하여 담보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할것을 제기한 우리의 5개항목 제안에 합의하고 하루빨리 해당한 조치를 강구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남조선에서 미군이 나가면 우리의 군대를 자진해서 20만 이하로 줄이겠다는것을 이 자리에서 새로이 천명합니다. 노중선 편, 앞의 책, 165쪽.

이 제의에서 북한은 1972년 제의하였던 주한미군의 철수시기에 대한 입장을 바꿔 평화협정 체결 이전에 주한미군을 철수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즉, 북한은 1960년대 초에 밝힌 ‘선 미군철수 후 남북 평화협정 체결’ 주장은 1970년대 초에 들어와 ‘선 남북 평화협정 체결 후 미군철수’로 바뀌었으며, 1973년에 들어서는 다시 이전의 주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통한 한반도의 공산화통일이라는 목표가 좌절된 상태에서 민주기지노선의 연장선에서 제시된 북한의 이러한 제의들은 ‘선 건설 후 통일’이라는 구호아래 경제건설에 주력하고 있던 남한 정부의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고유환, 앞의 글, 65쪽.

제3절 ‘인민외교’로의 선회

남한과의 평화협정 체결과 대미 적대정책을 계속해서 견지해 오던 북한은, 1969년 닉슨(Richard Nixon) 독트린과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으로 시작된 미‧소 긴장완화(detente), 미‧중 화해의 데탕트 미국의 대중‧소 화해정책의 추진에 대해서는 김계동, “미국의 대외안보 정책기조: 봉쇄정책과 동맹외교,” 서정갑 외, ꡔ미국정치의 과정과 정책ꡕ (서울: 나남, 1994), 444~448쪽 참조.
에 고무되어, 대미 접근과 협력의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하기 시작하면서 대미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대미 인식변화에 따라 북한은 ‘인민외교’를 통한 대미 접근정책을 펴면서 주한미군 철수문제를 국제화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대미 조건부 유화정책을 제시하였다. 즉, 북한은 북‧미관계가 전적으로 미국정부의 태도에 달려있음을 강조하고 미국이 대북정책을 수정한다면 북한도 대미 외교정책을 전환할 것임을 밝혔다. 북한은 미국 대북정책의 변화조건으로서 주한미군의 철수와 통일문제에 대한 내정불간섭, 일본군국주의의 재생 중지 등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이 북한은 1970년대 초 국제적인 화해무드에 편승하여 정부와 인민을 분리하여 적극적인 대미 인민외교를 전개하기 시작하였고, 그 일환으로 1971년 2월에는 조‧미 친선공보센터를, 1973년 9월에는 북한 유엔대표부를 개설하면서 인민외교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뉴욕타임즈 솔즈베리기자, 워싱턴포스트의 셀릭 해리슨(Salic Harrison)기자, 하버드대학의 제롬 코헨교수 등을 초청하는 등 언론인과 학자를 대상으로 하는 인민외교를 적극 추진하였다. 이러한 북한의 대미 인민외교의 추진은 화해와 긴장완화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대미관계를 개선하고 한반도 내에서의 미군 주둔의 부당함을 선전하여 미국 내 여론을 선동함으로써, 주한미군의 철수라는 대외정책의 목표를 달성하려는데 그 숨은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인민외교의 추진이라는 정책적 선택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의 시기에 있어 다소 융통성 있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김일성은 1972년 1월 10일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 기자들과의 회견을 통해 다시 한번 남북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제기하고, 남북정치협상을 진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조선에서 긴장상태를 가시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조선정전협정을 북남사이의 협정으로 바꾸는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북남이 평화협정을 맺고 남조선에서 미제침략군을 철거시킨 조건에서 북남조선의 무력을 대폭 줄일것을 주장합니다…우리는 북남사이에 접촉과 연계를 강화하고 조국통일문제를 풀기위하여 북남정치협상을 진행할것을 주장합니다. 노중선 편, 앞의 책, 149쪽.

이 회견에서 김일성은 주한미군의 철수시기에 있어 지금까지 주장해오던 ‘선 미군철수 후 평화협정 체결’ 입장을 바꾸어 ‘선 남북 평화협정 체결 후 미군철수’로 다소 융통성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북한은 1973년 들어 주한미군의 철수를 평화협정 체결의 전제조건에 포함시키고, 북한은 1973년 3월 15일 남북조절위원회 제2차회의에서 기존의 주한미군 철수시기 입장을 바꿔 1. 무력증강과 군비경쟁의 중지, 2. 남북한 군대의 축소, 3. 외국으로부터의 무기와 작전장비 및 군수물자의 반입 중지, 4. 미군을 포함한 일체의 외국군대 철거, 5. 남북사이 무력행사를 하지 않을 것을 담보하는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였다. 위의 책, 164쪽.
주체사상에 근거한 원칙들, 예를 들어 주한미군 철수, 군대와 군비축소 등과 반제‧반미노선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하면서, 시기적으로 적절한 대미 외교정책의 유형변화만 있을 뿐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이렇듯 북한이 인민외교를 통한 대미 접근정책을 적극 추진하게 된 요인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들 수 있다.
첫째, 미국의 축소 개입정책 선택에 따른 국제정세의 긴장완화이다. 미국이 닉슨 독트린을 통해 아시아에서의 동맹국 전쟁에 대한 군사적 개입의 자제를 천명한 것을 시작으로 미‧소 화해, 미‧중 관계개선, 중‧일 국교정상화가 연속되었으며, 이러한 국제사회의 변화에 대해 북한은 대서방국가와의 관계개선 전략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주한미군의 감축과 남한의 경제성장 및 남북한의 체제경쟁적 통일외교정책의 추진이다. 1971년 미국은 주한미군 중 제7사단을 철수시켰고 남한은 미국의 경제원조에 힘입어 고도성장을 달성하였다. 1970년 초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2만 명의 주한미군 철수와 한국군 근대화 5개년계획의 자금으로 15억 달러를 지원해 주기로 결정하여, 1971년 3월 주한미군은 6만 명에서 4만 명 수준으로 감축되었다. 또한, 당시 남한은 미국의 경제원조로 제1‧2차 경제개발계획을 통하여 고도성장을 이룩하였다. 랄프 클라프, “북한과 미국,” 박재규 편, 앞의 책, 320쪽.
또한, 1970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관계를 적대적 대결구도가 아닌 평화적 경쟁구도로 전환할 것을 골자로 한 ‘평화통일구상’을 선언하였다. 국토통일원, ꡔ남북관계자료, 1970~1973ꡕ (서울: 국토통일원, 1979), 43~51쪽.
이에 북한도 남한과 체제경쟁을 지양하는 한편, 주한미군 철수 여론을 확산시키기 위한 대미 접근정책의 일환으로 인민외교를 강화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셋째, 북한의 유일지배체제 구축과 새로운 경제정책의 추진이다. 전후 대대적인 숙청작업으로 일인독재체제를 확립해 온 북한은 1968년 들어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고 빨치산 출신 군장성의 숙청을 계기로 김일성 중심의 유일지배체제를 철저하게 구축하였다. 또한, 1960년대 추진한 국방‧경제 병진정책과 군사력 강화에 따른 부담으로 경제발전계획이 부진하자 대일‧대미 관계개선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즉, 북한은 진영외교에 의존한 경제발전의 한계를 절감하고 서방의 자본‧설비 및 기술 도입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넷째, 북한 지도부의 현실타협적 정세인식이다. 김일성은 1969년 닉슨 독트린에 대해 ‘미제국주의의 양면술책’의 일환으로 평가하고, 아시아인끼리 전쟁을 하게 하여 미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조치로서 인식하였다. 허담, “현 국제정세와 조국의 자주적통일을 촉진시킬데 대하여,” 국토통일원, ꡔ북한최고인민회의자료집ꡕ, 제3집 (서울: 국토통일원, 1988), 335~362쪽.
또한, 미국의 닉슨 독트린에 동조하여 미‧소 화해분위기를 조성하는 소련의 대외정책에 대하여 ‘수정주의’(revisionism)라고 비난하였다. 김일성, “조선로동당 제5차대회 사업총화보고,” ꡔ조선중앙년감 1971ꡕ (평양: 조선중앙통신사, 1971), 9~10쪽.
이후 북한은 1971년 미‧중 관계개선에 대해서는 ‘닉슨의 패배자 행각’으로 선전하였으나, 김일성, “미제를 반대하는 아세아 혁명적인민들의 공동투쟁은 반드시 승리할것이다,” ꡔ조선중앙년감 1972ꡕ (평양: 조선중앙통신사, 1972), 9~10쪽.
충격과 더불어 현실타협적인 입장에서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김일성, “«세계»지 편집국장과의 담화,” ꡔ조선중앙년감 1973ꡕ (평양: 조선중앙통신사, 1973), 87쪽.
또한, 1972년 일‧중 국교정상화에 이르러서는 ‘아세아의 평화를 위하여 커다란 기여’가 될 것이라고 언급함으로써 현실정세에 순응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러한 북한 지도부의 현실적응적 대외정책 노선은 북한이 동아시아 질서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대미 접근 및 유화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는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즉, 1960년대 후반 국제적 긴장완화 추세에 따라 소련과 중국의 대미 적대적 태도가 이완됨으로써 북한의 대미 적대정책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반면, 김일성 유일지배체제의 구축과 국방‧경제 병진정책에 따라 국내의 정치‧경제‧군사적 역량은 강화되었다. 따라서 북한은 국제적인 흐름과 현실타협적인 정세인식에 기초하여 남한 내의 미군 철수를 목표로 유화적인 대미 인민외교를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토대로 3대혁명역량과 북한의 대미 외교정책과의 상관관계를 시기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의 <표 2-2>와 같다. 북한의 3대혁명역량과 대외정책 결정요인을 다음의 <표 2-1>와 같이 연관시켜 살펴보는 것에 대해서는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표 2-1> 북한의 대외정책 결정요인과 3대혁명역량
3대혁명역량
국제혁명역량
국내혁명역량
남한혁명역량
대외정책 결정요인
국제적 요인
국내적 요인
남북한 요인*
*남북분단이라는 특수상황을 고려한 북한의 대외정책 결정요인.

<표 2-2>에서 보는 바와 같이 3대혁명역량 중 북한의 대미 외교정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북한의 국내혁명역량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은 국내혁명역량이 강할 때 대미 공세적인 적대정책을 선택하였으며, 반면 국내혁명역량이 약할 때는 대체로 현상유지 전략을 추진하였다. 1969~1973년에 이르는 시기에 북한은 국내혁명역량이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화정책을 선택하였으나, 이 경우 중국의 대미 관계개선이라는 국제환경의 변화에 따른 전술상의 변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경우에도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라는 대미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미국에 대해 공세적 자세를 취했다.

<표 2-2> 3대혁명역량과 북한의 대미 외교정책
시기구분
내용
북‧미관계의 형성기
인민외교
1945~1949
1950~1953
1954~1965
1966~1969
1970~1973
대미 외교정책
적대정책
적대정책
협상정책
무력정책
유화정책
국제혁명역량





국내혁명역량





남한혁명역량





자료: 허문녕, ꡔ북한의 대미국정책 변화 연구ꡕ (서울: 민족통일연구원, 1995), 61~67쪽 종합.

정권수립 이후 1970년대 초까지 북한은 3대혁명역량의 상황에 부응하는 한편, ‘조선혁명의 완성’이라는 그들의 논리에 기초하여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대외정책을 전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 시기 북한의 대미 외교정책은 3대혁명역량의 상황과 북한지도부의 국가이익에 부합되는 이데올로기적 정세인식 및 목표달성 의지에 의해 대체로 결정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표 2-3>은 정권수립 이후 1973년까지의 북한 대미인식의 변화와 대남 평화협정 체결주장을 정리한 것이다. 1973년까지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제의의 특징은 첫째, 남북한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자는 것이고, 둘째, 평화협정 체결을 한반도통일을 위한 중간단계로 파악하고 있으며, 셋째, 평화협정을 제안할 때 주한미군의 철수와 남북한 군축을 함께 포괄적으로 제안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북한은 1970년대에 들어와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대미접근의 필요성에 의해 대미 적대적인 인식은 변하지 않으면서도 주한미군의 철수시기에 대해 다소 융통성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최종목표로 하는 북한에게 있어, 단지 대미 유화정책을 추진하여 실리를 얻고자 하는 북한 대미 외교정책의 전술상의 변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표 2-3> 북한의 대미인식 변화와 평화협정 체결문제(1)
시기구분
내용
1945~1969
1970~1973
대미인식
미국을 제국주의의 우두머리로서 남한과 함께 북한에 대해 침략과 전쟁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인식
대미
정책
태도
적대적
유화적
목표
주한미군 철수
평화
협정
체결
쌍방
남한과 북한
접근
방법
1962년: 주한미군 철수→평화협정 체결→군대 축소
1972년: 평화협정 체결→상호불가침 선언→주한미군 철수→군대 축소
1973년: 무력증강‧군비경쟁 중지→주한미군 철수→군대‧군비 축소→평화협정 체결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전쟁 이후 북한이 주한미군의 철수를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주한미군의 철수가 곧 한반도의 통일과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조선로동당 규약 전문에서 “조선로동당은 남조선에서 미제국주의 침략군대를 몰아내고 식민지통치를 청산하며 그리고 일본 군국주의의 재침기도를 좌절시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고…나라와 민족의 통일적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투쟁한다” 국토통일원, ꡔ조선로동당대회자료집ꡕ, 제4집 (서울: 국토통일원, 1988), 134쪽. 북한은 1956년 4월 23일~29일 열린 제3차 당대회에서 당규약에 처음으로 주한미군의 철수를 추가하였다. “조선로동당은…우리 나라 남반부를 미제국주의 침략 세력과 국내 반동 통치로부터 해방하고…조국의 완전한 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투쟁한다.” 국토통일원, ꡔ조선로동당대회자료집ꡕ, 제1집 (서울: 국토통일원, 1988), 525쪽.
고 공식적으로 밝힘으로써 주한미군 철수주장의 최종적인 목표가 한반도의 공산화통일에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북한의 이데올로기적 설명방식에 의하면, 미국은 ‘전 세계의 반동적 세력’의 중심지이며, 남한은 미국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ꡔ로동신문ꡕ, 1981년 3월 10일자.
만약 미군이 철수한다면 북한의 안보에 대한 위협요인이 제거될 뿐만 아니라 남한 정부는 즉시 붕괴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안병준, “북한외교정책: 지속성과 변화,” 박재규 편, 앞의 책, 41쪽.

주한미군 철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북한은 남한 스스로가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도록 유도하는 방안으로 남한과의 모든 대화나 접촉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주한미군의 철수를 내세웠다. 이후에도 북한은 남북회담 재개의 전제조건으로, 그리고 대미 평화협정 체결의 전제조건으로 주한미군의 철수를 계속해서 주장하였다.

제Ⅲ장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제의의 대두와 변화

북한은 1960년대 말부터 정부와 분리된 인민외교를 추진하였지만 주한미군 철수 등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자, 이를 재평가하고 정부간 외교를 새로이 선택하고 대미 단독회담을 추진하면서 소극적이지만 본격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정전협정 체결 이후 대남 평화협정 체결을 간헐적으로 제의하였으나, 1974년을 기점으로 평화협정 체결 쌍방을 북한과 미국으로 확정하고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꾸준히 제의하기 시작하였다.
이 장에서는 1974년 대미 평화협정 체결제의 이후부터 핵문제가 국제문제로 대두되기 이전까지의 북한 대미 외교정책을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제의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제1절 북‧미 평화협정 체결제의 배경 및 개념

Ⅱ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북한은 1970년대 이전까지는 한반도문제의 해결을 위한 협상파트너로서 남한과의 회담을 우선시 하였으며, 따라서 평화협정의 남북한 체결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북한이 소련과 중국이라는 든든한 안보의 후원자를 갖고 있었고, 또한 남한에 비해 우세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한미군만 철수하면 남한과의 관계설정을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의 남북한간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군 철수주장은 오히려 북한이 국내정치적 통치의 결속 수단으로 이용한 측면이 강했다.
1970년대 들어와 북한은 한국전쟁 및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북한과 미국이므로 북한과 미국간의 평화협정이 체결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들어 처음으로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하였다. 즉, 과거의 평화협정 체결제의가 주한미군의 철수라는 전제조건 하에서 남북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이었다면, 1974년 이후로는 선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 후 남한과의 통일문제 논의라는 북한 나름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이렇듯 북한이 1970년대 이전까지의 대미 적대정책에서 벗어나 평화협정 체결과 같은 유화적 대미 접근정책을 추진하게 된 요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의 대한반도정책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정세 판단을 들 수 있다. 당시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는 닉슨 독트린에 의해 미군이 감소하고 있었고, 또한 1970년대 데탕트의 물결로 시작된 국제사회의 화해분위기는 북한으로 하여금 그들이 제안한 평화협정 제의를 미국이 수용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한 것으로 보인다. 랄프 클라프, 앞의 글, 322쪽.
또한, 북한은 1977년 2월 미국 카터 행정부의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안과 대사회주의 진영 관계개선 용의 표명, 3월의 대북 여행제한조치 철회 등 일련의 조치를 미국의 대한반도정책 변화의 일환으로 판단하면서 유리한 상황조성을 위해 대미 접근정책을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베트남의 대미 협상과정 모델의 한반도 적용 가능성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기대를 들 수 있다. 베트남사태에 고무된 김일성은 1975년 4월 18일~26일 14년만에 중국을 방문하여 마오쩌둥(毛澤東)과의 담화를 통해 한반도문제 해결에 베트남모델을 적용할 것을 암시하면서, 제3국의 지도자로 하여금 대미 단독협상을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70년대 후반 들어 베트남의 공산화 가능성이 높아지자 북한은 미국 내의 주한미군 철수 여론을 선동하여 남조선혁명과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적극적이고 유화적인 대미 접근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보다는 한반도 통일을 위한 주한미군 철수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북한의 북‧미 평화협정 체결제의에서 특이할 만한 사항의 하나는 북한이 주장하는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개념이 남한이나 미국이 생각하는 평화의 개념과는 너무나 상이하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평화란 “평화롭고 화목한 상태” 혹은 “전쟁 없이 세상이 잘 다스려지는 상태”라고 정의된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평화에 대한 적극적인 개념은 “단순히 전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발발케 하는 중요한 요소들을 제거한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송대성,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장애요소 및 극복방안,” ꡔ21세기 한반도 평화공존과 평화체제 구축ꡕ, 한국세계지역연구협의회 주최 협의회 창립 20주년 기념 학술회의 (1999. 5. 26), 3~4쪽.

북한에서의 ‘평화주의’는 “무원칙한 평화를 설교하는 부르죠아사상조류”로서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세계인민들의 공동의 원쑤이며 침략과 전쟁의 주되는 세력인 미제국주의에 공격을 집중하여 투쟁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ꡔ정치용어사전ꡕ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70), 624~625쪽.
특히, 냉전시대에 북한은 아주 부정적인 대미관을 가지면서 “제국주의는 평화의 주되는 교란자이며 평화의 가장 흉악한 원쑤”라고 표현하고, “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을 떠나서는 세계평화를 수호할수 없으며 민족적 해방과 독립도,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승리도 이룩할수 없다” ꡔ정치사전ꡕ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73), 1163쪽.
고 하여 평화의 본질을 반제‧반미투쟁에서 찾고 있다. 탈냉전시대에 들어와 북한의 평화에 대한 개념은 “전쟁이나 무장충돌 같은것이 없는 상태”라고 규정하여 냉전시대와는 달리 반제‧반미투쟁을 평화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시키지 않고 있다. ꡔ조선말대사전ꡕ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92), 802쪽.

1980년대 이전 북한은 ‘평화협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서로 상대방을 무력으로 공격하지 않고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데 대하여 나라들사이에 맺는 협정을 말한다. 다시말하여 평화를 유지하고 담보할데 대하여 나라들이 서로 맺는 협정이다. 오늘 우리 나라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전쟁위험을 제거하는데서 나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조선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것이다. 미제는 조선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꿀데 대한 우리 당의 거듭되는 정당한 제의를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로 지체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ꡔ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로작 용어사전ꡕ (평양: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2), 470~471쪽.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74년 이후 북한은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하면서 주한미군의 철수를 평화협정 체결의 전제로 주장하였다. 또한, 북한의 주한미군 철수주장은 한반도 공산화통일에 그 최종적인 목표가 있음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협정 체결은 명시적으로는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한 전제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위장평화공세를 통해서 미군을 철수시키고 한반도의 공산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전략인 것이다. 이러한 북한의 주장에 대해 남한 및 미국정부는 한반도에서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주한미군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북한의 제의를 거부하고 있다.
즉, 적극적인 의미에서 남한과 미국측이 주장하고 있는 한반도의 평화란 “한반도에서 전쟁이나 무력충돌 없이 국내외적으로 사회가 평온하고, 북한이 한반도 공산화통일 전략‧전술을 포기한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반면 북한은 반제 및 자주의 논리에 따라 “조선반도에서 무력충돌 없이 군사적인 행동이 중지된 가운데 평화상태를 회복하고, 주한미군이 철수되어 남조선이 해방된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
<표 3-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반도에서의 평화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남북한 모두 무력충돌이나 군사적인 행동이 없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나, 남한은 북한이 대남 공산화통일 전략을 포기함을 전제로 하고 있고, 북한은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이하다.

<표 3-1> 남북한간의 ‘평화’ 개념의 차이

남한의 평화개념

전 제
무력충돌이나 군사적인 행동없이 평온한 상태
(conflict + agitation)
전 제
북한이 한반도 공산화 통일을 포기한 상태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 상태

북한의 평화개념

제2절 북‧미 평화협정 체결제의 내용

1970년대 들어 북한은 여러 차례 남한에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1974년 3월 20일~25일에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5기 3차회의에서 허담 정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이 한 보고 ‘조선에서 긴장상태를 가시며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한 전제를 마련한데 대하여’에서 남한이 아닌 미국과의 직접 평화협정 체결을 제기하고, ‘미합중국 국회에 보내는 편지’를 채택함으로써 최초로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는 미합중국과의 사이에 체결될 평화협정이 다음과 같은 조치를 예견할수 있을것이라고 인정한다. 첫째, 쌍방은 서로 상대방을 침범하지 않을것을 서약하고 직접적무력충돌의 모든 위험성을 제거할것이다. 미국은 남조선당국자들의 전쟁도발책동과 남조선인민들에 대한 파쇼적탄압행위를 사촉하지 않고 비호하지 않으며 조선의 북과 남이 북남공동성명에 따라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나라를 통일하는것을 방해하지 않으며 조선의 내정에 일체 간섭하지 않을데 대한 의무를 질것이다. 둘째, 쌍방은 무력증강과 군비경쟁을 그만두며 조선경외로부터의 무기와 작전장비, 군수물자의 반입을 중지할것이다. 셋째, 남조선에 있는 외국군대는 유엔군의 모자를 벗어야하며 가장 빠른 기간내에 일체 무기를 가지고 모두 철거하도록 할것이다. 넷째, 남조선에서 모든 외국군대가 철거한후, 조선은 그 어떤 외국의 군사기지나 작전기지로도 되지 않을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는 이와같은 조치들을 전제로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회담을 진행할것을 정식으로 제기한다. 국토통일원, ꡔ북한최고인민회의자료집ꡕ, 제3집, 857~859쪽.

이 편지에서 북한은 “조선에서 긴장상태를 가시고 조선의 자주적통일에 장애로되는 외부적요인들을 제거하여 조선사람끼리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할수 있는 전제를 마련하려면 남조선에서 자기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모든 군사통치권을 틀어쥐고있는 미국과 직접 평화협정 체결에 관한 문제를 해결” 위의 책, 857쪽.
하여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북한은 상호 불가침과 직접적 무력충돌의 위험을 제거한 후 주한미군의 철수를 전제로 한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함으로써, 이전 남한과의 평화협정 체결주장과 다르지 않은 제안을 하였다. 다만, 평화협정 당사자를 남한에서 미국으로 바꿈으로써 남한의 배제한 채 대미 직접접촉을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미국과의 단독협상을 통하여 미국으로 하여금 북함을 인정하게 하여 북한의 국제적 지위를 격상시킴과 통시에, 주한미군 철수를 유도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북한이 이렇듯 남북 평화협정 체결주장을 북‧미 평화협정 체결제의로 바꾼 것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서 밝힌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 1972년 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 북한은, 자주원칙이란 주한미군 철수와 외세의 간섭 배제이고, 평화통일원칙은 군사시설 보강, 장비의 현대화, 군사연습 등의 중지이며, 민족대단결은 남한의 반공법, 국가보안법의 철폐를 의미한다고 밝힘으로써 통일을 위한 3대원칙을 둘러싸고 남한과 해석상의 이견 충돌이 계속되었다. ꡔ김일성저작선집ꡕ, 제6권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4), 287~289쪽.
과 북한이 주장하는 소위 ‘실제적 당사자’론 북한은 첫째, 한국전쟁의 교전당사국은 북한과 미국이며, 둘째, 미국이 정전협정의 실질적 서명당사자이고, 셋째, 주한미군이 한국군에 대한 전시 작전지휘권을 보유하며 무력의 실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하여 ‘실제적인’ 당사자인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에 의한 것이다. 또한, 국제적인 데탕트 분위기와 1973년 1월 미국과 북베트남간의 ‘파리협정’ 체결을 따르려는 북한의 의도 등도 북한의 이러한 입장변화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미국과 북베트남간의 ‘베트남에서의 전쟁종료 및 평화회복에 관한 협정’ 체결에 따라 주월미군이 철수함으로써 남베트남의 공산화가 더욱 앞당겨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북한은 이에 고무되어 1974년 1월 18일 남한 박정희 대통령의 남북상호 불가침협정 체결제의를 거부하고, 남한에서의 미군주둔 및 군통수권 문제를 제기하면서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하였다. 박건영, ꡔ한반도의 국제정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새로운 접근ꡕ (서울: 오름, 1999), 70~71쪽; 제성호, “북한의 대미평화협정 체결 전략: 내용, 의도 및 문제점,” ꡔ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방안 모색ꡕ, 민족통일연구원 제16회 국내학술회의 발표논문집 (1995. 6. 21), 10~11쪽.

북한은 남한이 3대원칙에 동의하고 남북정치회담에 응한 것이니 만큼 자주적 원칙에 따라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기를 기대하였으나, 2년이 지나도록 주한미군의 철수가 이루어지지 않자 ‘실제적 당사자’론을 거론하면서 북‧미간의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한 것이다. 허담은 이날 보고를 통해 남한 당국자들과는 군사적 대치상태 해소와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논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지금의 조건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이를 확실히 담보할 수 있는 당사자들끼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주장하면서, 북한과 미국이 정전협정의 체약쌍방이고 실제적인 당사자들이라고 주장하였다.
북한은 남한이 제국주의국가인 미국의 식민지이며, 미국의 식민통치를 실질적으로 담보해주는 막강한 물리적 요소가 남한에 존재하는데, 이것이 바로 주한미군이라고 보고 있었다. 또한, 북한은 유엔군이 사실상 미군이며 따라서 유엔군 사령부도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북한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S/1588)가 유엔군 사령부를 창설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유엔 회원국들이 제공하는 원조를 ‘미국의 통솔하에 있는 통합사령부’가 사용하도록 권고한데 불과하며, 안전보장이사회 산하기구로 유엔군 사령부를 창설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유인택, ꡔ한반도 군사문제의 이해ꡕ (서울: 법문사, 1996), 46쪽.
북한은 유엔군이란 이름이 미군의 한반도 주둔을 미화시키고 미국의 남한에 대한 식민지배를 위장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1975년 8월 7일 소련, 알제리 등 35개 북한지지 국가들과 함께 ‘조선에서 정전을 공고한 평화에로 전환시키며 조선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촉진시키는데 유리한 조건을 조성할데 대하여’라는 조선문제 결의안 이 결의안의 주요 내용은 “1. 유엔군사령부를 해체하며 유엔의 기발밑에 남조선에 있는 모든 외국군대를 철거시키는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2. 유엔군사령부가 해체되고 유엔의 기발밑에 남조선에 있는 모든 외국군대가 철거하는것과 관련하여 조선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평화를 유지공고히 하기 위한 대책으로서 조선군사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꿀것을 정전협정의 실제적당사자들에게 호소한다. 3. 조선의 북과 남이 북남공동성명의 원칙을 준수하며 무력증강을 중지하고 쌍방의 군대를 대등한 수준으로 대폭 축소하며 무장충돌을 방지하고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를 하지 않을것을 담보하는 실제적조치를 취함으로써 조선에서 군사적대치상태를 해소하고 공고한 평화를 유지하며 나라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촉진시켜 나가기를 요망한다”는 것 등이다. 동아일보사 안보통일문제연구소 편, 앞의 책, 758~759쪽.
을 제30차 유엔총회에서 토의할 것을 제기함으로써,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유엔총회의 안건으로 제기하고, 같은 해 11월 18일 이를 통과시켰다. 제30차 유엔총회에서 북측 결의안 3390(B)은 총 142개 회원국 중 찬성 54, 반대 43, 기권 42로 통과되었다. 또한, 이 당시 남한측의 ‘유엔군 사령부의 해체를 받아들이되 정전협정 유지를 위한 적절한 조치의 선행’을 조건으로 하는 결의안 3390(A)도 채택되어 유엔군 사령부의 해체문제는 유엔의 손을 떠나 남북한 및 미국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넘겨지게 되었다. 노중선 편, 앞의 책, 191쪽.
유엔군 사령부의 무조건 해체, 주한외국군의 철수,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 남북한 군비축소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북측 결의안이 유엔총회에서 통과됨으로써, 북한은 이 결의안을 근거로 주한미군 철수와 대미 평화협정 공세를 가속화하였다.
또한, 이를 계기로 남북한간의 대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소모적인 외교경쟁은 보다 가열되었다. 북한이 제3세계 국가들과의 관계강화에 주력한 것은 이들 국가의 대부분이 비동맹회의의 구성국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북한의 제3세계 외교는 ‘반제‧반미 공동전선’의 형성과 북한의 통일방안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는데 목표를 두고, 1. 평화공존노선 표방, 2. 반제‧반식민주의 및 민족해방투쟁지원 선전, 3. 국제공산주의 선전기구 가입, 4. 인민외교, 5. 문화 및 경제교류 등과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였다. 통일부, ꡔ북한개요 2000ꡕ (서울: 통일부, 1999), 47쪽.
즉, 북한은 한반도문제의 유엔문제화와 관련하여 비동맹회의 국가들과의 국제통일전선을 형성함으로써 대유엔정책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1976년 8월에 개최된 제5차 비동맹국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한반도 통일문제에 관한 3개항에는 “쁠럭불가담 나라들은 조선에서 새 전쟁을 일으키려는 제국주의자들의 책동을 반대하고 그 어떤 나라도 조선의 분렬을 조장하거나 통일을 방해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하며 조선의 자주적평화통일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국제기구, 국제회의에서 공동행동을 취할것이다”라는 항목을 포함시켜 비동맹회의 국가들간의 국제통일전선의 강화를 통한 국제활동을 주장하였다. 노중선 편, 앞의 책, 197쪽.
<표 3-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실제로 북한은 1975년 8월 페루 리마에서 열린 비동맹회의에서 회원에 가입한 이후 비동맹회의에서 지속적으로 한반도문제를 상정, 북한의 입장에 대한 지지를 확산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표 3-2> 비동맹회의 관련 북한의 동향(1975~1983)
회의 일시 및 장소
한반도문제 결의안 관련 내용
비동맹외상회의
1975.8.25~30
페루 리마
‧주한미군 철수 및 외군기지 철폐
‧7‧4공동성명에 규정된 평화통일 3대원칙 준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
*비동맹회원국 가입
*한국 가입 거부
제5차 정상회의
1976.8.16~19
스리랑카 콜롬보

*박성철 총리 참석
‧7‧4공동성명에 의한 남북 주민의 통일투쟁 지원
‧주한미군 철수 및 외군기지 철폐
‧핵무기 및 모든 전쟁수단 제거
‧유엔군 사령부(UNC) 해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
비동맹외상회의
1978.7.25~30
유고 베오그라드

*허담 외교부장 참석
‧주한미군 철수 및 외군기지 철폐
‧UNC 해체
‧7‧4공동성명에 규정된 평화통일 3대원칙 준수 및 한국민의 통일염원 환영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
제6차 정상회의
1979.9.3~9
쿠바 아바나

*리종옥 총리 참석
‧주한미군 철수 및 외군기지 철폐
‧UNC 해체
‧7‧4공동성명에 규정된 평화통일 3대원칙 준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
*비동맹조정위원국에 피선
비동맹외상회의
1981.2.9~13
인도 뉴델리
*한반도문제 결의안 채택시도 좌절
*식량 및 농업분야 심포지엄 평양개최 유치
(1981. 8. 26~31)
제7차 정상회의
1983.3.7~12
인도 뉴델리
*박성철 부주석 참석
*한반도문제 조항
-7‧4공동성명의 원칙에 의한 통일달성지지 확인
-한반도에서의 외군철수 촉진 희망
*비동맹조정위원국에 재선
자료: 통일원, ꡔ95 북한개요ꡕ (서울: 통일원, 1995), 431~434쪽 종합.

한편, 미 국무장관 키신저(Henry Kissinger)는 1975년 9월 22일 제30차 유엔총회에서 행한 정책연설에서 최초로 정전체제를 ‘새로운 협정’(a new arrangement)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그는 1976년 7월 22일에는 정전이 보다 항구적인 협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근본적이고 항구적인 협정을 협의하기 위한 확대회의의 가능성을 검토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여기서 확대회의의 당사자들에 대해서 명확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미국과 중국, 소련과 일본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그의 생각이 실행되려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기 위해 남과 북, 미국과 중국, 일본과 소련의 다국간 회의가 개최되어야 했다. 박건영, 앞의 책, 245~261쪽; Hideya Kurata, “The International Context of North Korea’s Proposal for a ‘New Peace Arrangement’: Issues after the US-DPRK Nuclear Accord,” The Korean Journal of Defense Analysis, vol. Ⅶ, no. 1 (Summer 1995), p. 252.
키신저의 이러한 생각은 1976년 9월에 열린 제31차 유엔총회 연설에서 ‘4자회담’ 제안으로 형상화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이 새로 제시한 방안에 반대하면서, 1975년 10월 9일 당창건 30주년 기념대회에서 행한 김일성의 보고와 1977년 1월 1일 신년사를 통해 대미 단독회담 및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의 추진을 한반도 긴장완화의 전제조건으로 주장하였다.
특히, 북한은 1979년 7월 1일 한국과 미국이 공동성명을 통해 발표한 ‘3당국회의’에 대해 7월 16일 외교부 성명을 발표하고, “극히 비현실적이며 사리에 맞지 않으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혼탕한 제의” ꡔ로동신문ꡕ, 1979년 7월 10일자.
라고 공식 거부하면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시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국과 협상할 것을 제의하였다.

조선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와 남조선사이에 풀어야할 문제가 따로 있고 우리와 미국사이에 풀어야할 문제가 따로 있다. 조선의 통일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제기되는 북과 남의 정치, 경제, 문화의 전반적인 문제는 외세의 간섭이 없이 조선사람 자신이 대화를 통하여 해결하여야할 민족내부문제이다. 한편 남조선에서 미군을 철거시키며 조선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문제는 정전협정의 실제적당사자들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국사이에 해결하여야할 문제이다…우리는 미국측이 정 요청한다면 우리와 미국사이에 남조선으로부터의 미군철거 문제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문제를 가지고 진행하는 회의에 남조선 당국자들을 업저버로 참가시키는것을 허용할것이다. 이렇게 하자고 하여도 먼저 우리와 미국사이에 회담이 이루어져야한다. 노중선 편, 앞의 책, 212쪽.

여기서 북한은 1970년대 북‧미 평화협정 체결제의 이후 처음으로 한반도의 평화문제와 통일문제를 분리하여 주장함으로써,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이 남북한간 평화통일을 위한 전제조건임을 시사하였다. 또한, 남한과 미국의 ‘3당국회의’ 제의에 대해 ‘가능할 수도 있다’는 북한의 입장은 1984년 ‘3자회담’의 제의로 이어졌다.
이후에도 북한은 1980년 10월 10일 제6차 당대회에서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이룩하자’라는 사업총화보고를 통해, 남한에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안’을 제의하면서 미국에게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할 협상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북한은 첫째,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남북한간에 자주적인 평화통일을 논의하기 위한 전제로서 간주하였고, 둘째, 미국은 남한에 군을 주둔시키고 통수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인 당사자라고 주장하였으며, 셋째, 미국에 대해 불가침, 군비경쟁 중단, 주한미군 철수 등을 평화협정 체결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였다.
이와 같이 1970년대 북한의 대미 외교정책의 목적은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철수시키는 것이었으며, 주한미군의 철수 그 자체가 북‧미 평화협정 체결의 주요 의제였다. 따라서, 이 시기는 북한이 평화협정 당사자를 남한에서 미국으로 변경하면서, 주한미군의 철수를 위해 미국에 대해 적극적으로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하는 시기로서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적극적 주장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3절 북‧미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 불가침선언의 분리

1980년 10월 개최한 제6차 당대회에서 한 사업총화보고에서 김일성은, 이전의 제국주의와 사회주의간의 대립외교에서 탈피하여 북한에 대해 우호적인 자본주의 국가와 친선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또한 미국과도 주한미군 철수라는 조건부 관계개선의 의사를 밝히는 등 대미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사업총화보고,” 국토통일원, ꡔ조선로동당대회자료집ꡕ, 제4집, 73~75쪽.
또한, 당시 정무원 총리였던 리종옥은 남한의 국무총리 앞으로 보낸 서한에서 남북대화 재개를 촉구하면서 북한정권 수립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공식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평화협정 체결과 관련해서는 “우리 나라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전쟁위험을 제거하는 문제는 오직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꿈으로써만 해결될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1983년 10월 9일 버마(현 미얀마) 랭군 폭발사건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된 가운데 북한은 1984년 1월 10일 중앙인민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연합회의에서 남한과 미국에 각각 ‘서울 당국에 보내는 연합회의 편지’와 ‘미국 정부와 국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북한과 미국, 그리고 남한이 참가하는 ‘3자회담’을 제의하였다. 북한은 3자회담을 통해 북‧미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남북 불가침선언 채택문제를 협의할 것을 제의하였다.

3자회담에서는 북과 남사이의 군사적대치상태를 해소하고 공고한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대책으로서 조선정전협정의 체약 쌍방인 우리와 미국사이에 정전협정을 대신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문제를 토의할수 있을것이며 또한 북과 남사이에 불가침선언을 채택하는 문제를 토의할수 있을것이다. 우리와 미국사이의 평화협정에는 주로 미군과 핵무기를 비롯한 군사장비들을 철수시키고 공고한 평화를 보장하는 조건에 관한 문제들이 포함될수 있을것이며 북과 남사이의 불가침선언에는 북남이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여 무력행사를 하지 말며 군비를 축소할데 대한 문제들이 포함될수 있을것이라고 본다. 노중선 편, 앞의 책, 237~238쪽.

북한은 1983년 북한의 국제테러로 인해 경색된 남북관계와 국제적 규탄과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3자회담을 제의함으로써 남한을 협상테이블로 불러내었다. 북한은 한 차원 높은 새로운 의욕으로 통일협상에 임하고 있음을 대내외에 과시하였지만, 사실 이것은 국제사회의 관심을 주한미군 주둔에 대한 북한측의 불만으로 돌리려는 술책에 불과한 것이었다. 척 다운스 저, 앞의 책, 291~292쪽.
당시 주한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핵무기와 남한의 독자적인 군사력의 우위, “남조선에서 이미 핵폭탄, 핵포탄 등 1,000여개의 핵무기와 «랜스»미싸일, «에프16»전투폭격기를 비롯한 핵운반수단들이 배비되어 있으며 «조선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은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는 공공연한 핵공갈이 거듭되고있다…오늘 미‧일‧남조선사이에 적극 추진되고 있는 3각군사동맹은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아세아판인 새로운 군사쁠럭으로서 그것은 일본«자위대»의 조선반도진출을 비롯한 해외파병의 길을 열어놓을뿐 아니라 남조선«국군»무력까지도 아세아태평양지역에 출동시킬수 있는 «합법적»조건을 마련하자는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연합회의에 관한 보도: 3자회담 제의,” 국토통일원, ꡔ조선로동당대회자료집ꡕ, 제4집, 688쪽.
그리고 미국의 ‘동시다발개입전략’ 1983년 팀스피리트 훈련부터 유럽, 중동, 한반도 등 미국의 사활적 이해가 걸린 세계 각지에서 핵공격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전쟁하겠다는 미 국방장관 와인버거(Casper Weinberger)가 제시한 개념이 본격적으로 실험되었다. 박건영, 앞의 책, 72쪽.
추진에 대한 위기의식 또한 북한이 3자회담을 제의하게끔 만든 요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3자회담 제의는 평화협정 체결문제와 불가침선언 채택문제를 분리하여 ‘선 북‧미 미군철수와 평화협정 체결 후 남북 불가침선언과 군비축소’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한이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참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북한측의 주장과는 달리, 남한은 단지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업저버(observer)에 불과하다는 점과 북한이 3자회담이라는 형식을 빌어 북‧미 직접협상의 길을 열어 보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남한의 거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북한은 그 동안 남한의 불가침조약 체결제의를 한반도 영구분단을 위한 책동이라고 비난해 왔으나, 1974년 1월 18일 연두기자회견에서 남한의 박정희 대통령이 제의한 ‘남북한간 상호불가침협정’ 체결제의에 대해 북한은 “우리의 평화협정 체결을 기피하며 두 개 조선 조작을 합법화하려는 분렬주의자들의 매국‧반역적 구호”라고 비난하면서 거부하였다. 노중선 편, 앞의 책, 177쪽.
반대로 북한이 제의하게 된 타당성의 논리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북과 남의 방대한 무력이 대치되여 있는…비정상적인 사태는 북과 남사이에 오해와 불신을 낳게하고 막대한 인적물적자원을 헛되이 탕진하게할뿐 누구에게도 리로울수 없다. 조선에서 긴장완화조치가 그 어느때보다도 절실한 오늘 북남사이에서는 무엇보다도 이 문제부터 해결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서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을데 대하여 확약하며 군대와 군비를 대폭 축소하고 군사적대치상태를 해소할것을 예견하는 불가침선언을 채택하여야 할것이라고 주장한다.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북과 남사이에 불가침선언이 채택되어 자주적평화통일에 유리한 전제가 마련된 다음 북과 남은 통일대화를 하게 될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연합회의에 관한 보도: 3자회담 제의,” 국토통일원, ꡔ조선로동당대회자료집ꡕ, 제4집, 690~691쪽.

북한은 한반도문제 해결에 있어 북‧미간 우선 협상의 필요성에 대해 미국이 정전협정의 당사자이며 주한미군이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북한은 북‧미간 직접협상 채널을 확보하여, 북‧미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군을 철수하는 것이 조선문제 해결, 즉 한반도 공산화통일의 기본 전제라고 보고 미군철수에 주력하였다.
3자회담 제의 이후 북한은 1984년 1월 25일~27일 최고인민회의 제7기 3차회의를 통해 미군철수에 대한 남한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남북한간 불가침선언을 체결하자고 다시 제의하였다.

조미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남조선에서 미군이 철거하게 되면 우리 나라의 평화를 위협하고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가로막는 근원이 없어질것이며 조선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수 있는 담보가 마련되게 될것입니다…이러한 불가침선언이 채택되면 우리 나라의 평화는 공고한것으로 되고 이른바 «미군 철수후 문제»는 믿음직하게 담보되게 될것입니다. 허담, “조선에서 평화의 담보를 마련하여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촉진할데 대하여,” 국토통일원, ꡔ북한최고인민회의자료집ꡕ, 제4집 (서울: 국토통일원, 1988), 581쪽.

북한의 3자회담의 제안은 그 숨은 의도가 주한미군 철수에 있는 것은 변하지 않았지만, 주한미군 철수 그 자체가 평화협정 체결의 조건은 아니었다. 즉,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북‧미간의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군은 필연적으로 철수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1988년에 들어와 남한의 노태우 대통령이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7.7 특별선언’(이하 ‘7.7선언’)을 발표하고, 노태우 대통령은 ‘7.7선언’을 통해 북한의 대미‧일 관계개선을 희망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노중선 편, 앞의 책, 312~313쪽.
동년 10월 19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남북정상회담의 실현, 동북아평화협의회 구성, 주변 4강에 의한 한반도 교차승인 등의 구상을 발표하자, 이를 ‘두 개의 조선 조작 강화책동’ ꡔ로동신문ꡕ, 1988년 11월 1일자. 북한은 노태우 대통령이 유엔 연설에서 제의한 남북한 및 미‧일‧중‧소의 6자협의안을 거부하고 남북한문제에 대한 일본의 간섭에 대해 강도 높게 비난하였다.
이라고 비난하였다. 이어 북한은 동년 11월 7일~8일 평양에서 중앙인민회의,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와 정무원 등의 연합회의를 개최하여, ‘평화보장 4원칙’과 함께 이를 기초로 한 ‘조선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촉진하기 위한 포괄적인 평화방안’(이하 ‘포괄적 평화방안’)을 제시하였다.

우선 조선반도의 평화보장을 위한 공동의 기초로서 다음과 같은 평화보장 4원칙을 새롭게 제기하였다. 첫째로, 조선반도의 평화는 나라의 통일을 지향하는것으로 되어야 한다…둘째로, 조선반도의 평화는 외국무력의 철수에 의하여 담보되여야 한다…셋째로, 조선반도의 평화는 북과 남의 군축에 의하여 보장되여야 한다…넷째로, 조선반도의 평화는 긴장격화에 책임이 있는 당사자들의 대화를 통하여 실현되여야 한다. 긴장격화의 요인은 조선반도 밖에 있는것이 아니라 안에 있으며 그에 책임이 있는 당사자는 다른 나라들이 아니라 남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있는 미국과 조선의 북과 남이다. 위의 책, 338~340쪽.

또한, 평화보장 4원칙에 기초했다는 ‘포괄적 평화방안’은 첫째, ‘조선반도의 공고한 평화를 실현시키기 위한 단계적인 미군 무력의 철수와 북남사이의 군축 방안’으로, 여기서는 미군 무력의 단계적인 철수, 남북 무력의 단계적인 감축, 미군 무력의 철수와 남북무력의 감축에 대한 통보와 검증, 북한과 미국 및 남한사이의 3자회담을 제시하고 있다. 둘째, ‘북과 남사이에 당면한 정치군사적 대결상태를 완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정치적 대결상태의 완화, 군사적 대결상태의 완화, 남북사이의 고위급 정치군사회담을 제시하고 있다. 이 방안에서 북한은 주한미군의 빠른 기간 내 철수 입장에서 한 걸음 더 물러난 주한미군의 3단계 철수 및 핵무기의 2단계 철수를 제안하였다. 위의 책, 340~343쪽.

이는 북한이 1980년대 말 동구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등 불리한 국제정세가 전개됨에 따라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좀 더 전향적인 자세로 포괄적인 군축제안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은 이후 ‘포괄적 평화방안’을 “현실적 조건에 맞게 더욱 구체화하여” 1990년 5월 31일 ‘조선반도의 평화를 위한 군축제안’을 발표하였다. 이 제안에서 북한은 남북 신뢰조성(군사훈련과 군사연습 제한, 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전환,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한 안전조치)→남북 무력감축(단계적인 무력감축, 군사기술과 군사장비의 도입 및 개발 중지, 무력감축에 대한 검증)→주한미군 철수(한반도의 비핵화, 미군무력 철거)→불가침선언 채택(평화보장을 위한 조치, 불가침선언 채택과 군축 합의)을 주장하였다. 위의 책, 418~420쪽.
이후 북한의 남북고위급 정치군사회담 제의는 결과적으로 남북고위급회담 성사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이후에도 북한은 1990년 5월 24일~26일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회의에서 미국이 한반도문제에 직접 책임이 있는 당사자이므로 통일을 실현하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대미 관계개선 의사를 다시 천명하였다.
이렇듯 당시 북한의 주장은 먼저 북‧미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후에 남북한간 불가침선언을 채택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북한은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목격하면서, 그 동안 생존전략의 차원에서 줄곧 반대해왔던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체제수호 차원에서 실현하고, 1991년 남북한간에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이하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였다. 따라서 1984년 3자회담 제의 당시 북한이 의도한 한반도문제 해결방식으로서의 ‘선 북‧미 평화협정 체결 후 남북 불가침선언 채택’이라는 구도는 ‘선 남북 불가침선언 채택 후 북‧미 평화협정 체결’로 수정되었다.
이와 같이 1980년대 북한의 대미 외교정책의 목적은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철수시키는 것이었으나, 주한미군의 철수 그 자체가 북‧미 평화협정 체결의 조건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핵무기를 배치함에 따라 북한이 표면상 평화주의노선을 표방하며 3자회담을 제의하는 시기로서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소극적 주장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4절 평화협정 체결제의와 북한의 대미정책 변화

1974년 들어 북한은 그 동안의 인민외교를 기반으로 미국 정부와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전개하려는 의지를 보이기 시작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북한은 1974년 3월 한반도에서의 긴장 해소와 평화 증진을 위한 미국과의 직접협상을 결의하고 한반도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자고 제안하였다. 북한의 이 제의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주한미군 철수시기에 대해 종전 남북 평화협정 체결제의시 주장하던 ‘즉각적인 철수’ 원칙에서 벗어나 ‘가장 빠른 기간내’로 변했다는 것과 미국에 대한 호칭을 종전의 ‘미제,’ ‘미제침략군’에서 ‘미국,’ ‘미합중국,’ ‘미군’ 등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의 미국에 대한 태도가 상당히 유화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강성학‧양성철 공저, ꡔ북한의 외교정책ꡕ (서울: 서울프레스, 1995), 183쪽.
그러나, 이러한 북한의 유화적인 대미 접근정책에 대해 미국은 남한의 6.23선언 지지와 미 국무장관 키신저의 ‘새로운 협정’ 체결제의로 대응하며, 북한의 대미 직접협상 및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대미 유화정책을 무력화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1976년 주한미군 철수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민주당의 카터(James E. Carter) 대통령 후보가 당선되자 보다 부드러운 정책기조로 대미 접근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카터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1977년 2월, 북한을 비롯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쿠바 및 이라크 등과 화해를 모색하고 우호관계를 수립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함과 동시에 이들 국가에 대한 여행제한을 해제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북한은 1977년 3월 외교부장 허담의 명의로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하여 양국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서신을 밴스(Cyrus Vance) 미 국무장관에게 보냈다.
이와 함께, 1977년 5월에 북한을 방문한 가봉의 봉고 대통령, 동년 8월에 방문한 유고슬라비아의 티토(Marshal Tito) 대통령, 1978년 5월에 방북한 루마니아의 차우세스크(Ceauṣescu) 대통령 등을 통해 한반도문제에 대한 협상 의사를 미국에 전달해 주도록 요청하는 등 대미 접근정책을 지속적으로 강화하였다. 유광진, “북한의 대미외교정책,” ꡔ북한의 대외관계ꡕ (서울: 대왕사, 1987), 172쪽 재인용.
북한은 미국에 대해 적대관계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한국에 대한 침략 의사도 없기 때문에 미국과의 협상은 남한이 배제된 상태 하에서 진행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북한의 태도는 미국이 자신의 요구를 수용한다면 북‧미간의 비정상적인 관계가 청산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발언과 관련하여 “만일 카터 대통령이 선거공약대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우리에 대한 비우호적인 태도를 버리며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바꾼다면, 우리는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밝혔다. Pyongyang Times, July 23, 1977. 척 다운스 저, 앞의 책, 283~284쪽 재인용.

한편, 북한은 대미 인민외교를 병행함으로써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노력하였다. 북한은 1979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제35회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 미국선수 및 기자단을 최초로 공식 초청함으로써 종래의 입장을 바꾸어 대미 문화교류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또한, 체육과 문화 중심의 비정치적 교류를 제의하고, 미국의 일부 진보파 의원들의 방북 초청 등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78년 4월에 주한미군의 철수계획이 수정되고 1979년 7월 카터의 한국 방문시 주한미군 철수 동결조치가 발표되자,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북한의 군사력이 미국이 감지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 강력한 수준이라는 수 차례의 정보 보고를 받고 남한으로부터의 주한미군 철수를 중지시켰다. 김용호, ꡔ현대북한외교론ꡕ (서울: 오름, 1996), 166쪽.
북한은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미국을 강도 높게 비난하였다. 특히, 주한미군 철수계획이 유보되고 한‧미 양국이 동맹관계를 강화시키기 위해 한‧미연합사령부를 창설하자, 북한은 11월 9일 한‧미연합사령부 창설 비난 성명을 발표하고 카터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강도 높게 비난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의 미국에 대한 비난의 강도는 더욱 심해지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미국의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에 대해 ‘전쟁광,’ ‘광대,’ ‘모리배’ 등 원색적인 단어를 사용하며 비난하였으며, 대통령 취임 후 첫 공식방문객으로 남한의 전두환 대통령을 초청한 것에 대해 맹렬히 비난하였다. 북한은 ꡔ로동신문ꡕ을 통해 “상전과 주구의 추악한 결탁”이라고 표현하면서, “지금 세계는 호전광인 레간이 전두환역도와 같은 «정권»강도, 파쑈교형리에게 맨 선착으로 백악관의 출입문을 열어주고 동족의 피로 물든 인간백정과 공모하여 새로운 침략과 전쟁문건을 조작하여낸데 대하여 격분을 금치 못하고 있다”고 격렬히 비난하였다. ꡔ로동신문ꡕ, 1981년 2월 5일자.
이러한 비난은 남한과 미국간의 군사협력 수준이 더욱 심화될 것에 대한 우려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즉, 북한의 미국 대통령에 대한 격렬한 비난은 미국과 한국간의 군사협력에 대한 비난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김용호, 앞의 책, 199쪽.

그러나, 한편으로 북한은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를 통해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대미 친선정책 추진 용의를 표명하였다. 김일성은 “우리 나라를 우호적으로 대하는 자본주의나라들과도 친선관계를 맺고 경제문화교류를 발전시킬것입니다. 우리는 남조선에서 미군을 철거하고 우리 나라의 통일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미국과도 좋게 지낼 용의를 가지고있습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사업총화보고,” 앞의 책, 73쪽. 물론 김일성은 이 보고에서 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이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에 대한 근본적인 규정이 바뀐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라고 밝혀 미국과의 조건부 관계개선 의사를 밝혔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국의 대한반도정책 변화 가능성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정세 판단 및 베트남의 대미 협상과정 모델의 한반도 적용 가능성에 대한 기대 등으로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지속적으로 제의하였다. 이렇듯 1980년대 북한의 대미 외교정책은 유화적 접근전략이 그 기저를 이루고 있었으나, 신냉전에 따른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과 북한의 대남 테러정책의 추진에 의해 1980년대 중반 들어 파행적인 모습을 보였다.
1980년대 초의 국제정세는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과 미국의 보수파 레이건 행정부의 등장으로 데탕트의 화해무드가 와해되고 신냉전체제로 탈바꿈하였다. 레이건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미군철수 계획의 전면 중단, 대남한 안보공약 강화, 한‧미 합동군사훈련 실시 등으로 치닫자 북한의 대미 비난강도는 드세졌다. 이에 미국은 대북 규제완화 조치 등 대북 유화정책으로 선회하였으나, 북한의 국제테러로 인해 그 조치를 다시 유보하게 되었다. 이에 북한은 중국을 통해 1979년 한‧미가 공동으로 제의한 바 있는 ‘3당국회의’와 유사한 ‘3자회담’을 제의하였고, 북한의 ‘3자회담’ 제의는 북한과 미국이 주요 당사자가 되고 한국은 부차적 당사자가 된다는 점에서, 남북한 당국이 주역이 되고 미국은 협력자 또는 보증자로 참여하는 ‘3당국회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또한 미국의 민간인을 초청하는 등 인민외교를 강화함으로써 미국과의 관계악화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북한은 계속해서 미국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였다. 1987년 북한을 방문한 일본 사회당 위원장을 통하여 미국이 좀 더 유화적인 대북정책을 취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에 미 국무부는 1987년 3월 6일 미국 외교관의 공식적 대북 접촉을 5년만에 허용하였다. 또한, 미국은 이 때부터 North Korea 대신 DPRK(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공식 천명하였다. 그러나, 1988년 서울올림픽을 지원하기 위한 미국의 대북 유화정책에 대해 북한은 1987년 12월에 KAL기를 폭파함으로써, 국제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으며 대미관계는 물론 한반도에 긴장을 고조시켰다. 이에 미국은 그 동안의 유화정책을 철회하고, 북한을 국제사회에서 테러국가로 지목하여 규제조치를 강화하는 등 북‧미관계는 다시 냉각기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들어 북한은 노태우 정권의 등장으로 인한 남한의 사회‧경제적 혼란을 적절히 활용하여 대미 직접접근을 꾸준히 시도하였으며, 특히 1988년 남한의 ‘7.7선언’으로 북한의 대미 접근정책은 가속화되었다. 1988년 10월 31일 미국은 ‘대북제재 완화방안’ 당시 미국의 대북제재 완화는 1. 비자발급 완화, 2. 미국민의 북한 방문 제한 완화, 3. 인도적 차원에서의 미국의 대북교역 허용, 4. 미국 외교관의 북한 외교관 접촉 완화 등이다. 노중선 편, 앞의 책, 338쪽.
을 발표하였고, 이에 북한 외교부장 허담은 미 국무장관에게 평화를 제의하는 서신을 전달함으로써 1988년 12월 6일 북경에서 북한과의 참사관급 접촉을 공식적으로 시작하였다.
하지만 북한은 4차례의 접촉을 통해 주한미군의 즉각적이고 단계적인 철수, 팀스피리트 훈련의 중단, 한국전쟁 당시 실종된 미군유해 송환을 위한 정부간의 직접협상 요구 등 정치적인 문제를 제기하면서 회담을 방해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미국도 미군유해의 즉각 송환과 국제테러의 포기 보장 등을 요구하면서 북한의 공세를 차단하였다. 1990년 1월 5일에 열린 제6차 북‧미회담부터는 북한도 주장의 한계를 인식하고 신축성 있는 협상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이에 상응하여 1990년 2월 1일 미 국무장관 베이커는 상원 외교위원회 증언을 통해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시사하면서 북한의 긍정적인 협상태도를 촉구하였다.
이후 팀스피리트문제로 중단된 북‧미회담은 동구사회주의 진영의 대변혁, 남한의 가시적인 북방정책의 성과에 대한 부담, 이로 인한 북한의 대미 관계개선에 대한 필요성 인식 등으로 1990년 4월 26일 재개되었다. 따라서, 당시 북한의 대미 접근정책의 성격은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론’ 제안과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한 미국의 긍정적 역할의 촉구 등으로 변화양상을 보이며 점차 탈이념적, 현실순응적인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북한은 1990년 5월 28일 판문점을 통해 미군유해 5구를 미국측에 인도하는 것을 시작으로, 1991년 5월 27일에는 분단고착화 정책이라고 비난하던 유엔가입 의사를 표명하고, 동년 9월 17일에 전격적으로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을 결정하였다. 또한, 동년 6월 7일에는 ‘핵안전조치협정’ (safeguard agreement)에 서명할 의사가 있음을 국제원자력기구(IAEA: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에 전달하고 1992년 1월 30일 정식으로 서명하였다. 이어 1991년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고 1992년 2월 5일에는 ‘한(조선)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이하 ‘비핵화 공동선언’)을 승인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단행함으로써 미국의 신뢰를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미 관계개선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렇듯 북한이 탈이념적이고 현실순응적인 대미 접근정책을 추구하게 된 요인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남한의 7.7선언 발표에 따른 미국의 대북 유화정책 추진을 들 수 있다. 남한은 7.7선언을 통해 “비군사적 물자에 대해 우리 우방들이 북한과 교역을 하는데 반대하지 않는다”는 점과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킬 여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북한이 미국‧일본 등 우리 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협조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함으로써 미국의 대북 유화정책 추진 기회를 열어주었다. 위의 책, 312~313쪽.

즉, 7.7선언은 한반도 및 국제질서의 안정을 바라는 미국이 아무런 부담 없이 대북 유화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그 결과 북‧미 접근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미국은 대북 유화정책을 통해 북한을 국제사회로 유인하려고 하였고, 북한은 냉전의 해소와 사회주의 진영의 갑작스런 붕괴로 인한 체제 유지와 생존의 위협을 제거하고, 경제난 극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대미 접근을 시도하게 되었다.
둘째, 탈냉전의 도래와 신국제질서의 형성에 따른 북한의 전략적 목표 비중의 변화를 들 수 있다. 1989년 12월 지중해의 몰타에서 미국의 부시(George Bush) 대통령과 소련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서기장은 화해와 평화공존에 기초한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어 가는데 합의하였다. 1990년대 들어 소련의 정치‧군사적 통제와 경제적 지원이 감소하자 동구사회주의 진영은 동요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동독이 붕괴되어 서독에 흡수통일 되었고 소련의 사회주의체제도 해체되었다.
즉, 북한은 소련의 붕괴로 그 동안의 절대적 지원국을 상실하였고 중국의 실용주의 개방정책의 추구로 지원이 격감되었으며, 반면 미국의 유일초강국(unique superpower) 등장이라는 국제정세의 변화로 인해 정권의 유지와 주권국가로서의 생존을 심각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북한의 외교정책은 냉전시대의 이념적 대결노선보다는 현실순응적‧실용주의적 화해노선에 보다 비중을 두게 되었다.
또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한미군의 핵무기 보유는 북한에게는 상당한 위협이었다. 북한은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수호하는것은 인류를 핵참화로부터 구원하고 자주적인 새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필수적조건”이며, “침략과 전쟁의 원흉인 미제와 직접 맞서고있는 항시적으로 핵전쟁의 위협을 받고있는 우리 인민들에게 있어서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수호하는것은 더욱 절실한 문제로 나서고있다” “주체의 혁명적기치를 높이 들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위업을 끝까지 완성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40돐 기념경축보고대회에서 한 보고: 1988년 9월 8일,” ꡔ조선중앙년감 1989ꡕ (평양: 조선중앙통신사, 1989), 33쪽.
고 주장하면서 반핵 평화주의 노선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게 되었다. 1986년 6월 23일 북한은 정부 성명을 통해 한반도의 비핵‧평화지대 창설을 위한 협상을 제의한 바 있으며, 또한 동년 9월 8일에는 평양에서 개최된 ‘조선반도의 비핵‧평화를 위한 국제대회’에서 평화선언 7개항을 발표하는 등 주한미군의 핵무기 보유에 대해 상당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노중선 편, 앞의 책, 261, 264~265쪽.

이러한 국제정세의 흐름에 따라 1990년대 초 북한은 대미 관계개선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ꡔ로동신문ꡕ을 통해 “조미관계를 개선하는것은 조선반도에서 공고한 평화를 보장하는데서 매우 중요하다” 리석윤, “아세아와 세계 평화를 위한 관건적고리,” ꡔ로동신문ꡕ, 1992년 8월 25일자.
는 점을 공식적으로 주장하였다. 또한, 당시 연형묵 정무원 총리는 “만약 미국이 부당한 전제조건을 내세우지 않고 자주성을 지향하는 길로 나온다면 우리도 과거를 돌아다보지 않고 앞을 내다보며 나갈것이며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조미관계의 개선을 위하여 노력할것” 연형묵, “주체의 혁명적기치를 높이 들고 사회주의건설의 총로선을 끝까지 관철하자: 중앙보고대회에서 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위원이며 정무원총리인 연형묵동지의 보고,” ꡔ로동신문ꡕ, 1992년 9월 9일자.
이라고 북‧미 관계개선에 대한 희망을 피력하였다.
북한은 점차적으로 대미접근을 모색하기 시작하여 1988년 12월 북경에서 북‧미간 최초의 정무 참사관급 외교관 접촉을 시작한 이래 1992년 12월까지 모두 28차례의 회합을 가졌으며, 1992년 1월 21일에는 당비서 김용순과 미 국무부 정무차관 켄터(Arnold Kanter)간 최초의 차관급 회담이 개최되었다. 이후 북한은 대미 외교정책에서 평화협정 체결보다는 관계개선에 역점을 두기 시작하였다.

<표 3-3>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북한은 1974년 이후 1984년 평화협정 체결제의까지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한 후 무력을 감축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88년 11월 ‘포괄적 평화방안’ 및 1990년 5월 ‘조선반도의 평화를 위한 군축제안’에서 북한은 무력감축 이후에 평화보장을 위해 정전상태를 평화상태로 전환하고,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북‧미간의 회담이나 3자회담을 제의함으로써 입장의 변화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명시적인 차원에서의 개념 변화는 소련의 붕괴와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 재편에 따른 북한 체제의 생존차원에서의 전술상 변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오히려 평화협정 체결과 무력감축의 순서에는 별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1984년 이후 북한은 북‧미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 불가침선언을 분리하여 주장해 왔으며, 1988년 ‘포괄적 평화방안’ 및 1990년 ‘조선반도의 평화를 위한 군축제안’은 북‧미간 평화협정 체결의 문제가 아니라 남한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문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여전히 주한미군의 철수를 전제로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고 있으며, 아무리 주한미군의 철수 없이 북‧미 평화협정이 체결된다 할지라도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할 수 있는 논리를 상실하였다는 주장을 펴면서 주한미군의 철수를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계속 할 것이다.

<표 3-3> 북한의 대미인식 변화와 평화협정 체결제의(2)
시기구분
내용
1974~1983
1984~1992*
대미인식
미국을 제국주의의 우두머리로서 남한과 함께 북한에 대해 침략과 전쟁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인식
선언적으로는 적대적 태도를 보이면서도 미국이 북한의 위기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
대미
정책
태도
소극적
적극적‧공세적
목표
주한미군 철수
평화
협정
체결
쌍방
북한과 미국
접근
방법
1974년: 상호 불가침선언→무력증강‧군비경쟁 중지→주한미군 철수→평화협정 체결→무력감축
1984년: 주한미군 철수→3자회담(평화협정 체결 및 불가침선언)→무력감축
1988년: 신뢰구축→주한미군 철수→무력감축→3자회담
1990년: 신뢰조성→무력감축→주한미군 철수→3자회담
*당시 북한은 북‧미 평화협정과 남북 불가침선언 분리하여 ‘선 북‧미 평화협정 체결 후 남북 불가침선언’을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북한이 1974년 이후 계속해서 주한미군 철수를 전제로 하는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이는 다음의 두 측면으로 간단히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1970~1980년대 대남전략의 측면이다. 북한의 대남전략의 목표는 한반도 공산화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시 북한의 통일을 가장 저해하는 요인은 바로 주한미군이었다. 북한으로서는 어떻게든 주한미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키고자 하였고, 이를 실현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즉, 평화협정 체결의 전제조건으로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는 이유는 평화협정으로 북한과 미국간에 적대관계가 해소되면 미군이 더 이상 한반도에 주둔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즉, 북한은 한반도의 평화문제를 공산화통일의 전제조건 차원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의 평화문제는 통일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북한은 한반도에서의 통일문제가 생기게 된 주 요인을 ‘미제의 남조선 강점’에 있다고 단정하면서 외세의 지배 및 간접의 종식, 전국적 범위에서의 민족의 자주권 확립, 남북한간의 민족적 단합 도모 등을 통일의 본질적 문제로 보고 있다. 고유환, 앞의 글, 60쪽.
따라서 주한미군의 철수는 곧 남북한의 통일을 의미하며 북한에게는 한반도 공산화통일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기적인 목표 외에도, 북한이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남한을 배제한 채 직접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해결할 경우 대남전략 상 여러 가지 면에서 그들에게 효용이 있다. 즉,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통해 북한은 그들의 정통성을 부각시키면서 한반도의 정치‧군사적 문제에 대한 주도권을 잡을 수 있고, 또한 이를 통해 한‧미관계를 이간시킴으로써 점진적으로 한‧미 동맹관계를 약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여 평화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한편, 이 문제에 대한 대응과 관련하여 우리 정부와 민간을 분열‧이간시킴으로써 통일전선전술을 추진하는데 유리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둘째,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생존전략의 측면이다. 1980년대 말 이후 북한은 심한 외교적 고립, 사회주의 진영의 분열로 인한 이데올로기 상의 위협, 점차 심화되는 경제난 등 총체적인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러한 대내외적 위기 상황에 처한 북한으로서는 체제유지를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이 찾아낸 방법이 바로 미국과의 적대관계 해소 및 관계개선이었다. 특히, 소련의 붕괴 이후 유일초강국이라는 미국과의 관계개선은 북한체제의 안정 및 존립을 보장해주는 효과적인 방법이면서, 동시에 이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최대의 실리를 얻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였다.
여기서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촉진하는 방법은 북‧미 직접협상을 통해 북‧미간의 적대관계를 조속한 시일 내에 해소하고, 1991년 이라크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으로부터 대북한 무력불사용 및 불위협을 약속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북한은 북‧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을 통한 대미 직접협상이 북한의 체제유지를 보장해 주는 담보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의 의도변화는 무엇보다도 냉전에서 탈냉전으로 넘어가는 국제정세 및 미국의 대북정책의 변화와 이에 따른 북한의 대미 인식 변화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냉전 종식을 전후하여 안보환경이 변화하게 되자 대소 봉쇄(containment)와 억지(deterrence)에 바탕을 둔 기존의 세계전략을 수정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전략의 중심 개념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개입’(engagement)과 ‘확대’(enlargement)로 요약되는 전략이다. 여기서 ‘개입’전략이란 전세계적인 평화와 국제적인 안정을 달성하기 위하여 미국이 전 세계적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참여하고 주도하는 세계질서를 만들어 간다는 것을 의미하며, ‘확대’전략이란 미국인들의 삶의 방식인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전 세계적으로 확산시켜 미국화를 달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덕규, “북-미 관계의 변화 전망과 대응방안,” ꡔ고황정치학회보ꡕ, 제2권 (1999), 141쪽.
이것은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이 세계 유일초강국으로 부상하였다는 자체적인 분석 결과에 따라 세계적 수준의 패권(hegemony)을 유지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표출된 것이다.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서도 미국의 이러한 전략은 그대로 투영되었으며, 미국의 대한반도정책도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테두리 내에서 추진되었다. 따라서 미국의 대북정책은 한반도문제를 매개로 하여 일본과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고 미국의 개입과 확대전략을 투입하기 위한 전략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냉전의 결과 미국이 세계 유일초강국으로 부상하고,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남한이 눈부신 경제발전을 기반으로 하여 북방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등 미국 중심의 서방세력이 확장되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소련과 동구사회주의 진영이 붕괴하고 중국이 시장경제를 도입하게 되자 국제무대에서 북한은 외교적으로 고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국제적 차원에서 체제의 안보를 보장받기 위해 노력해야 할 정도로 수세적인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를 탈피하기 위한 대미 관계개선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북한의 노력은 이후 핵문제로 노골화되어 북한과 미국의 대화가 시도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제Ⅳ장 북‧미 관계의 변화와 평화협정 체결제의의 변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북한은, 1974년 이전까지 남한과의 평화협정 체결제의를 지속하다가 그 이후부터는 소위 ‘실제적 당사자’론에 의거하여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였다. 또한, 남한의 불가침조약 체결제의에 반대하던 북한이 198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3자회담을 제의하면서 미국과는 평화협정을, 남한과는 불가침선언을 체결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던 중 1991년 9월 17일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고, 1991년 12월 13일에는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어 남북한간의 불가침선언이 이미 해결되었다고 판단한 북한은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일만 남았다고 주장해 오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핵문제가 국제문제로 불거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북한은 대미 외교정책에서 평화협정의 체결보다는 대미 관계개선에 역점을 두기 시작하였다.
이 장에서는 1990년대 초 국제문제로 떠오른 북한의 핵문제와 북‧미 핵협상 및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간단히 고찰하고, 이후 북한의 대미 외교정책을 북‧미 관계개선을 위한 북한의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수립 제의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제1절 북‧미 핵협상과 평화협정 체결문제

북한은 1990년대 초 핵협상이 시작되면서 북‧미간 합의사항에 관계개선 조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주력하였다. 그러나 관계개선은 평화협정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평화협정 체결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핵협상과 북‧미 고위급회담이 이루어지는 이 시기는 북한이 대미 관계개선을 관철하기 위해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는 ‘북‧미 관계개선을 위한 소극적 주장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북‧미 핵협상

북한의 핵문제가 국제문제로 대두된 것은 1985년 12월 12일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에 가입한 후 180일간의 교섭기간을 거쳐 18개월 이내에 체결해야 하는 IAEA와의 핵안전조치협정 체결 의무이행을 지연시키자 각종 의혹이 제기되면서 비롯되었다. 북한이 핵개발에 착수한 것은 1950년대 후반부터이나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을 서두르게 되었다. 북한이 전략적으로 핵무기 개발을 재촉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앞장에서도 지적했듯이 북한에게 불리하게 변하는 안보환경 상의 이유 때문이었다. 냉전의 종식과 미국중심의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 소련으로부터의 안보지원 중단, 그리고 1990년 9월 30일 한반도에서의 한‧소수교는 북한으로 하여금 전략적 고립을 인지하게 한 것이며 이는 곧 북한 핵정책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한용섭,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협상전략: 본질과 대응책을 중심으로,” 곽태환 외 저, ꡔ북한의 협상전략과 남북한 관계ꡕ (서울: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1997), 222~223쪽.

1990년 초반 북한 핵문제가 새로운 국제문제로 등장하자 국제사회는 IAEA가 결의한 핵안전조치협정의 조속한 서명과 철저한 이행에 대해 북한에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반발한 북한은 남한에 미국의 핵무기가 배치된 상황에서는 결코 핵사찰에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국제사회의 요구에 대해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북한은 IAEA의 결의안 채택과 이행 촉구에 대해 이는 북한의 주권 침해이며 내정간섭이라고 비난하였다. 이에 미국은 참사관급 접촉시 핵안전조치협정 체결을 북한에 거듭 강조하였으나, 북한은 남한 내 전술 핵무기 철수와 연계시키는 입장만 되풀이하였다. 북한 외교부는 1990년 11월 16일 미국이 핵위협을 가하지 않겠다고 보장할 때 핵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할 것이라고 발표함으로써 1986년 6월 23일 발표한 ‘조선반도 비핵화 창설에 관한 성명’에서의 주장을 거듭 천명하였다. 이는 핵안전조치협정의 서명과 사찰수용의 조건으로 남한에서의 핵무기 철수와 핵무기 불사용 및 불위협에 대한 법적 보장을 전제하고 있다. 노중선 편, 앞의 책, 448쪽.

이후 북한은 한반도의 비핵지대화를 계속해서 주장하면서 남한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정책을 무력화시키고자 유도하였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핵감축이 가속화되고 이어 1991년 9월 27일에는 미국 부시 대통령이 남한 내에서의 전술 핵무기 폐기를 선언하면서, 미국은 북한 핵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을 시사하였다. 또한, 남한이 1991년 11월 18일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구축을 위한 선언’과 12월 18일 ‘남한 내 핵부재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발표하면서 북한의 핵정책은 변화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핵무기 철수선언과 남한의 재처리시설 포기선언은 북한으로 하여금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이유를 빼앗아 가버리는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협조 유도조치였기 때문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남한 내 핵부재에 대한 공식 입장’을 통해 남한 내에 어느 곳에도 핵이 없다고 표명하는 등 북한이 버티기 힘든 외교적 압력이 가중되자, 북한은 미국의 태도를 관망하면서 협상에 임할 의사를 밝히게 되었다. 북한은 1991년 9월 28일 미국 부시 대통령의 전술핵무기 폐기선언에 대해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이 남한에서 실질적으로 핵무기를 철수할 경우 우리가 핵안전협정에 서명할수 있는 길이 열릴것”이라고 언급했다. 위의책, 472쪽.
북한은 1991년 12월 22일 외교부 성명을 통해 핵안전조치협정 서명과 핵사찰 수용을 공식 천명하면서 남북한 동시 핵사찰을 위한 미국과의 협상 및 남한과의 한반도 비핵지대화 선언을 촉구하였다. 이에 동년 12월 31일 북한은 남한의 팀스피리트 훈련의 취소를 조건으로 북한의 핵안전조치협정 서명과 IAEA의 사찰 수용, 핵 재처리시설의 포기를 약속하는 ‘비핵화 공동선언’에 서명하게 되었다. ‘비핵화 공동선언’은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의 합의에 따라 1991년 12월 26일 한반도 핵문제 협의를 위한 1차 남북대표 접촉과 동년 12월 27일 2차 접촉에 이어 3차 접촉에서 완전 합의하게 된 것이다.

1992년 1월 7일 남한의 국방부 발표로 팀스피리트 훈련의 중지를 발표하자, 이에 북한도 외교부 성명을 통해 핵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할 것을 공식 발표함으로써 IAEA의 핵사찰 수용 의사를 밝혔다. 1992년 1월 21일 미국은 켄터 미 국무부 정무차관과 김용순 당 국제부장의 뉴욕회담을 통해 북한의 주장을 부분 수용하였으며, 뒤이어 북한은 1월 30일 북한 내 모든 핵시설에 대한 전면사찰을 수용하는 IAEA 핵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였다. 이후 북한은 1992년 4월 8일~10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9기 3차회의에서 이 협정을 비준‧승인하고, 동년 5월 25일부터 1993년 2월까지 총 6차례에 걸쳐 IAEA의 임시사찰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임시사찰의 결과 북한의 최초 보고서와 사찰결과에 중대한 차이가 발견되고, 북한이 IAEA에 제출한 최초 보고서는 1986년 5Mw 원자로에 핵연료를 장착한 이래 한번도 연료를 교체한 적이 없으며, 다만 1990년 3월에 손상된 연료봉으로부터 한 차례의 재처리를 실시해 약 90g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임시사찰 결과 IAEA는 1989년~1991년에 최고한 3차례 이상의 재처리를 실시하여, 최고 g단위에서 최대 ㎏단위에 이르는 플루토늄을 추출한 것을 확인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돈 오버도퍼 저, 뉴스위크 한국판 뉴스팀 역, ꡔ북한국과 남조선, 두개의 코리아ꡕ (서울: 중앙일보, 1998), 252~254쪽.
미국의 군사위성에 영변의 미신고 핵시설이 포착되자, 1993년 1월 14일 리스카시 한미연합 사령관은 팀스피리트 훈련의 재개를 발표하였으며, IAEA 이사회는 1993년 2월 25일 북한 핵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IAEA 이사회는 향후 1개월 내에 IAEA의 특별사찰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는 7개항의 대북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당시 북한대표 김계관 순회대사는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두 개의 군사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하는 이 결의안을 절대 수용하지 않을것이며 국가 지상 이익과 주권 수호를 위해 자위적조치를 취하지 않을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노중선 편, 앞의 책, 514쪽. 또한, 이라크를 제외하고는 과거 IAEA가 특별사찰을 요구한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북한에게 특별사찰은 국가의 신뢰성 및 체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다. 위의 책, 259~260쪽.
이에 북한은 미신고시설이 군사시설이므로 IAEA의 사찰대상이 아니며, 또한 제3국인 미국의 정보를 사찰에 이용하는 IAEA의 행위가 불공정하다고 주장하였다. 1993년 3월 9일 팀스피리트 훈련이 재개되자, 북한은 3월 12일 회원국의 중대한 국가이익 보호를 위해 탈퇴를 허용하는 NPT의 제10조 1항을 언급하면서 NPT 탈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하였다. 북한은 NPT의 관계조항에 따라 3개월간의 유예기간이 경과하기 전에는 탈퇴가 유효하지 않음을 인정했다. 따라서 6월 12일 탈퇴가 효력을 발생할 경우 북한은 NPT에서 탈퇴하는 최초의 국가가 되는 것이었다. 이후 북한은 남한과 미국, 그리고 IAEA를 상대로 협상과 단절, 사찰 수용과 지연, 그리고 NPT 탈퇴 및 유보 등의 전술을 구사하면서 체제유지를 위한 총력외교를 전개하였다.
NPT 탈퇴선언 이후 북한은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협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으며, “우리의 핵문제는 UN에서가 아니라 우리와 미국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ꡔ로동신문ꡕ, 1993년 4월 13일자.
이때부터 남북한간의 핵문제와 북한과 IAEA의 핵문제를 모두 북‧미간의 문제로 바꾸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북한의 이러한 전략 구사에 대해 미국은 유엔을 통해 대북제재 결의안을 상정하고, 군사적 제재 가능성을 시사하는 등 강경 대응정책을 구사하는 한편, 참사관 접촉 및 고위급회담을 지속하는 협상을 통한 온건정책을 병행 추진하였다. 그리나, 북한은 핵문제는 사찰문제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의 전반적인 신뢰회복과 관계개선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하면서, 핵문제와 북‧미 관계개선을 연계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표 4-1>에서 보는 것처럼 미국과 북한은 1993년 5월 5일과 10일 두 차례의 참사관 접촉을 통해 핵문제 해결을 위한 고위급회담을 갖기로 합의하고, 그해 6월부터 1994년 9월까지 3단계에 결쳐 고위급회담을 가졌다. 1993년 6월 북한 강석주 외교부 제1부부장과 갈루치(Robert Gallucci) 미 국무부 정치군사담당 차관보는 제1단계 고위급회담을 열고 북한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기간 동안 NPT 탈퇴 효력을 정시시키는데 합의했다. 그 후, 핵문제와 북‧미 관계개선의 연계가 시도된 것은 1993년 7월 제2단계 고위급회담에서부터였다. 북한은 회담에서 핵무기를 만드는데 쓰이는 흑연감속로를 경수로로 전환하는 문제를 미국측에 제기하였으며, 미국을 이를 받아들였고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한다는데 합의하였다.

미국은 특히 핵무기를 포함한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이러한 무력으로 위협도 하지 않는다는것을 담보하는 원칙에 대한 자기의 공약을 재확인하였다. 쌍방은 조선이 현존 흑연감속원자로와 그와 련관된 핵시설들을 경수로로 교체하는것이 바람직하다는데 대하여 인정한다…조선과 미국은 조선반도 비핵화와 관한 북남공동선언 이행의 중요성을 재확인하였다. 조선은 핵문제를 포함하여 쌍방사이의 문제들에 대한 북남회담을 가능한 한 빠른 시일내 시작할 용의를 의연히 가지고 있다는것을 재확인하였다. 조선과 미국은 경수로 도입과 관련한 기술적문제들을 포함하여 핵문제 해결과 관련된 현안들을 토의하며 조선과 미국사이의 전반적관계개선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하여 2개월안으로 다음 회담을 진행하기로 합의하였다. 노중선 편, 앞의 책, 528~529쪽.

북한은 1993년 10월 9일~12일 방북한 미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 위원장 에커만(Gary Ackerman)을 통해 핵문제의 일괄타결 방안에 대한 비공식문건을 미국정부에 전달했다. 그 내용은 앞으로 개최될 북‧미 3단계 고위급회담에서 미국이 핵무기 불사용 보장을 포함하는 북‧미간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경수로 제공에 대한 책임을 수락하며 북‧미간 외교관계의 정상화를 약속한다면, 북한도 NPT에 영구 잔류하며 IAEA와 완전한 협력을 수락하고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행해 나갈 것이라는 것이었다. 민족통일연구원, ꡔ북한 핵문제와 남북관계ꡕ (서울: 민족통일연구원, 1994), 59~60쪽. 북한은 1993년 11월 11일 강석주 핵협상 대표단장을 통해 ‘일괄타결안’으로 공식 제의하였다.

당시 북한은 핵문제에 대한 투명성을 보장하는 대신 북‧미관계에서 현안이 되고 있는 모든 문제를 일괄적으로 해결해 나간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강석주, “조선반도의 핵문제는 결코 압력으로 해결할수 없으며 오직 대화와 협상의 방법으로만 해결할수 있다,” ꡔ로동신문ꡕ, 1993년 11월 2일자.
즉, 북한은 IAEA의 임시 및 정기사찰을 수용하여 핵투명성을 보장하고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행하면서, 미국측에는 핵 선제불사용 보장,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 북‧미수교, 평화협정 체결, 경수로 지원 등을 요구하였다. 북한의 일괄타결안은 한‧미 양국의 입장차이를 노정시켰다. 남한측은 북한의 과거 핵개발 행적이 먼저 밝혀져야만 하며 북한이 미국과 단독으로 대화하려는 것에 대해 남북대화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미국은 북한의 일괄타결안을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1993년 11월 23일 양국의 워싱턴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과거 핵개발 행적도 고려한 ‘철저하고 광범위한 접근’을 하기로 합의하면서 일단락되었다. 한용섭, 앞의 글, 227쪽.
그러면서 1993년 11월 11일 뉴욕합의와 북한의 핵사찰 불이행, 1994년 3월 21일 IAEA 특별이사회의 결의한 채택, 5월 13일 북한의 일방적인 연료봉 제거, 6월 13일 북한의 IAEA 탈퇴 등으로 이어지는 양측의 공방은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양측의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1994년 6월 미 국무성 내에서는 온건파를 중심으로 한 대북 유화정책 분위기가 확산되었고, 동년 6월 16일과 17일 양일간의 카터 전대통령의 방북, 그리고 김일성 주석과의 면담 이후 북한은 핵개발 전면중단을 선언하였다. 이후 북‧미관계는 과거 핵규명시기의 지연, 북‧미대화와 남북대화의 조화 유지라는 선에서 타협을 짓고,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에서 역사적인 ‘북‧미 기본합의서’(Agreed Framework, 이하 ‘제네바합의’)에 양측이 서명함으로써 관계개선을 위한 기본틀을 마련하였다. “1. 양측은 북한의 흑연감속 원자로 및 관련 시설을 경수로 원자로 발전소로 대체하기 위해 협력한다…2. 양측은 정치적, 경제적관계의 완전 정상화를 추구한다…3. 양측은 핵이 없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함께 노력한다…4. 양국은 국제적핵비확산체제 강화를 위해 함께 노력한다….” 노중선 편, 앞의 책, 563~564쪽.

이후 양국은 1995년 5월 쿠알라룸푸르에서 경수로 공급의 이행계획을 마련하였고, 같은 해 12월 뉴욕에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Korean Peninsula Energy Development Organization)와 북한간 경수로 공급협정에 서명함으로써 경수로사업의 현실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북한 핵협상의 전개과정을 간단히 도식하면 <그림 4-1>과 같다.
<그림 4-1>에서 보는 것처럼 북한은 NPT 탈퇴, 핵연료봉 인출, IAEA 탈퇴라는 극단적인 행태를 반복적으로 보여주고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핵개발 실체에 대한 완강한 부인으로부터 그 실체의 인정과 일괄타결 방식에 의한 핵협상 타결에 이르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즉, 1990년대 북한의 핵협상은 결국 대미 외교정책에 있어서의 점진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핵협상을 통해 북한 핵의 동결 및 폐기를 추구한 미국의 대북정책은,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일본의 핵무장 가능성과 그것이 가져올 핵 파급효과를 사전에 차단하고, 남한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요인을 제거함으로써 동아시아의 현상유지에 필수적인 한반도의 안정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박건영, 앞의 책, 81~82쪽.
한편, 북한은 미국과의 핵협상을 통해 미국 대북정책의 기조를 역이용함으로써, 북한의 핵문제는 대미 관계개선을 달성하기 위한 체제 생존전략의 일환으로 발전되었다. 북한은 안보위협, 경제난 및 외교적 고립 등으로부터 탈피하는데 필수적인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직접적이고 단독적인 접촉수단으로 핵문제를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림 4-1> 북한의 핵정책 및 핵협상 전개과정 북‧미간의 핵협상 과정 및 협상전략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돈 오버도퍼, 앞의 책, 237~335쪽 및 척 다운스 저, 앞의 책, 307~361쪽 참조.

‘비핵화 공동선언’에 합의(1991.12.31)


핵개발 실체에 대한 완강한 부인


IAEA 핵안전조치협정 서명(1992.1.30)


남북 상호 핵사찰 논의(핵통제공동위원회, 1992.2~1993.1)


IAEA 임시 및 일반사찰 수용(1992.5~ 1993.2)


NPT 탈퇴(1993.3.12)


NPT 탈퇴 유보(1단계 고위급회담, 1993.6.2~11)


정치경제안보적 보상 요구(2단계 고위급회담, 1993.7.14~19)


일괄타결 방식에 의한 해결 요구(1993.11.11)


선행사찰 확대 수용(1994.3~5)


핵연료봉 인출 강행(1994.5)


IAEA 탈퇴(1994.6.13)


조건부 핵동결 용의 표명(김일성-카터 면담, 1994.6.15~18)


일괄타결 원칙에 의한 합의(3단계 1차 고위급회담, 1994.8.5~12)


핵협상 타결(3단계 2차 고위급회담, 1994.9.23~10.17)

한편, 북‧미간 제네바합의에서 북한은 IAEA 핵안전조치협정의 의무를 이행하며, NPT에 계속 잔류하여 핵시설을 동결하며, 2003년까지 경수로 전환사업을 이행해 나가기로 약속하고, 미국은 핵불사용 및 불위협 보장, 경수로 제공을 위한 컨소시엄 구성 및 주 접촉선 역할의 수행, 북‧미간 정치‧경제 관계정상화를 약속했다. 결국 북한은 일괄타결방식으로 달성하려고 했던 목표 중 미국의 핵불사용 및 불위협 보장, 팀스피리트 훈련의 중단, 대체에너지 보장, 경수로 제공 보장, 북‧미 관계개선 등은 달성하였지만 북‧미간 평화협정 체결만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북‧미 핵협상 타결을 김정일 비서의 위대한 업적으로 내세우며 제네바 합의문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북한은 1995년 1월 1일 ꡔ로동신문ꡕ‧ꡔ조선인민군신문ꡕ‧ꡔ로동청년ꡕ 공동사설을 통해 제네바합의에 대해 “1994년은 북한의 대외적권위가 크게 높아진 해이고 역사적인 기본합의문이 채택되어 커다란 성과를 거둔 해이다. 이것으로써 한반도의 평화와 평화적통일을 촉진하고 아세아와 세계의 평화 및 안전을 보장하는데에 중대한 의의를 지니는 획기적인 거사”라고 밝혀 제네바합의가 북한의 안보‧외교 역량을 강화하며 김정일체제의 안정에 기여할 것으로 평가하였다. 강석주는 제네바합의를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매우 중요한 기념비적 문서”라고 평하했다. 강석주를 비롯한 북측 대표단은 평양공항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김정일 비서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연회에 주빈으로 참석하는 영광도 누렸다. 돈 오버도퍼, 앞의 책, 326~327쪽.

2. 북‧미 고위급회담시 평화협정 체결제의

북한은 핵문제와 관련하여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조치를 취함으로써 IAEA와 남한을 배재하고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미국은 개입과 확대전략에 의해 핵확산의 방지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북한과의 협상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또한, 중국의 북한 지지 입장 때문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한 제재나 이라크의 예처럼 무력을 통해 해결할 수는 없었다. 중국은 IAEA 이사회에서 북한을 핵안전조치협정 불이행 국가로 규정하는 문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하는 결의안 채택 문제에서도 반대입장을 표명하였으며, 5월 11일에는 리자오싱 유엔주재 대사를 통해 북한 핵문제에 대해 “북한 핵문제는 북한과 국제원자력기구, 북한과 미국, 북한과 남한 사이의 문제이고 이들 사이의 직접 대화를 통해서만 사태가 해결될 수 있으며 따라서 중국은 압력을 가하는 어떤 조치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노중선 편, 앞의 책, 517쪽, 523쪽.
이러한 상황적 배경이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과의 협상을 가능하게 하였다.
북‧미 핵협상 과정에서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주장이 갖는 수단으로서의 장점은 회담을 지연시키거나 회담을 결렬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이 체결되기 위해서는 우선 평화협정 체결의 실질적인 당사자의 문제가 선결되어야 하므로, 이는 남한과 미국간에 사전 조정되어야 할 문제이자 정전협정 서명자들도 개입되어야 하는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은 이를 이용하여, 조속한 시일 내에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려는 미국에게 협상을 지연 또는 결렬시킬 수 있는 명분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제네바합의 이후 북한은 이를 십분 활용하여 북‧미 관계개선을 위한 대미 직접접촉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1993년 5월 27일 북한은 허종 유엔주재 대표부 부대사를 통해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다루어야 할 현안으로 첫째, 북한에 대한 미국의 핵무기 불사용, 둘째, 팀스피리트 훈련 중지, 셋째, 한국 내 미군기지 공개, 넷째, 미국의 핵우산 제공 중단, 다섯째, 주한미군 철수, 여섯째, 북한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존중 등 6개항을 주장하였다. 위의 책, 524쪽.

<표 4-1> 3단계 북‧미 고위급회담의 주요내용

북한측의 주장
미국측의 주장
합의내용
1단계 고위급회담

1993.6.2~11
뉴욕
‧핵무기불사용 보장
‧TS훈련 중지
‧주한미군기지 공개
‧남한에 대한 핵우산 제공 중지
‧IAEA 공정성 보장
‧북한체제 인정
‧NPT 복귀
‧특별사찰을 포함한 IAEA 핵안전조치협정 이행
‧비핵화 공동선언의 이행
‧미국의 핵무기를 포함한 무력 사용 및 위협 중지 보장
‧IAEA 공정성 보장
‧북한의 주권존중 및 내정불간섭
‧비핵화된 한반도의 평화 보장 및 평등‧공정한 대화 지속
2단계 고위급회담

1993.7.14~19
제네바
‧핵무기불사용 보장
‧TS훈련 중지
‧한반도내 핵무기 불배치 선언
‧평화협정 체결
‧고려연방제 통일 방안 지지
*경수로 문제
‧북한의 NPT 잔류
‧IAEA 사찰 수용 및 비핵화 공동선언의 이행
‧미국의 핵무기를 포함한 무력 사용 및 위협 중지 재확인
‧IAEA 공정성 보장
‧비핵화 공동선언의 중요성 확인 및 남북대화 재개
‧흑연감속로의 경수로 대체
‧경수로 문제 및 북‧미 관계개선을 위한 회담 진행
일괄타결안
1993.11.11
‧핵무기불사용 보장
‧TS훈련 중지
‧북한체제 인정
‧평화협정 체결
‧북‧미수교
‧경수로 지원
‧북한의 NPT 잔류
‧IAEA 핵안전조치협정의 이행
‧비핵화 공동선언의 이행
‧TS훈련 중지
‧IAEA 핵안전조치협정에 따른 사찰
‧특사교환
‧3단계회담개최(3.21)
3단계 고위급회담

1994.8.5~12
1994.9.23~ 10.17
제네바
‧핵무기불사용 보장
‧대북 경제제재 완화와 경협 제공
‧관계개선
‧경수로 지원
‧NPT 복귀
‧특별사찰을 포함한 IAEA 핵안전조치협정 이행
‧핵동결
‧미국측의 경수로‧대체에너지 제공 용의 확인 및 북한의 원자로 건설 중지
‧관계개선을 위한 연락사무소 설치와 무역장벽 제거
‧미국의 핵무기 선제불사용 보장 및 북한의 비핵화 공동선언 이행 준비
‧북한의 NPT 복귀 및 IAEA 핵안전조치협정 이행 준비
‧남북대화 재개
자료: http://dialogue.unikorea.go.kr/uw/dispatcher/SKID. 통일부 남북회담사무국 인터넷사이트 자료 종합.

또한, <표 4-1>에서 보는 바와 같이 1단계 북‧미 고위급회담에서도 북한은 1974년 이후 지속적으로 주장해 온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주장하지 않고 주한미군기지를 공개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 미국의 최고 목표는 1993년 6월 12일부터 효력을 발생하는 북한의 NPT 탈퇴 선언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북한은 해결절차가 복잡하고 남한과 연계되어 있어 단기간 내 실현가능성이 없는 평화협정 체결문제보다는 보다 현실성 있는 주한미군 기지 공개를 요구사항으로 들고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한은 2단계 고위급회담에서부터 대미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요구사항에 정식으로 포함시키기 시작하였다. 1단계 고위급회담 이후 미국 내에서는 회담의 성과가 미흡하다는 지적과 함께, 7월 12일 방한한 미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한다면 미국은 신속하고도 압도적으로 보복할 것이며, 이는 북한의 멸망을 의미한다” 또한, 남한의 한완상 통일원장관은 북한 핵개발의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한 3가지 조건을 언급하여 북한의 핵문제 타결을 촉구하였다. 이 3가지 조건은 1. 북한의 NPT 완전 복귀, 2. IAEA의 사찰 수용, 3. 비핵화 공동선언에 의거한 남북한간 상호사찰 이행 등이다. ꡔ중앙일보ꡕ, 1993년 7월 12일자.
고 강조하는 등 당시의 상황이 북한측에 다소 불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운데 개최된 2단계 고위급회담에서 미국은 남한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남북대화의 재개를 북한측에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은 대미 핵협상에 시종일관 남한 배제전략을 구사해 왔으므로 남북대화 재개되면 핵협상에 남한을 개입시킬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남북대화 재개를 요구하는 미국측의 요구는 수용하기 어려운 사안이었다.
하지만, 2단계 고위급회담에서 북한이 처음 제기한 경수로 지원 요구에 대해 미국측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북한도 결국 남북대화 재개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2단계 고위급회담에서의 합의사항과는 달리 남북대화 재개에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 핵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1993년 7월 합의 이후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사망 이전까지 남북 접촉은 ‘남북특사교환을 위한 실무대표 접촉’(1993.10.5~25와 1994.3.3~19)과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준비접촉’(1994.6.28 부총리급 예비접촉, 1994.7.1~2 실무절차 협의를 위한 대표접촉, 1994.7.7~8 통신 및 경호 실무자접촉)에 불과했다.

한편, 북한은 북‧미 고위급회담과는 별도로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지속적으로 주장하였다. 3단계 북‧미 고위급회담이 결렬된 상태에서 북한은 1994년 4월 28일 외교부 성명을 통해 “조선정전협정은 조선반도에서 평화를 보장할수 없는 빈종이장으로 되고 군사정전위원회는 사실상 주인이 없는 기구로서 유명무실하게 되였다” ꡔ로동신문ꡕ, 1994년 4월 28일자.
고 하면서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1993년 10월 5일 송원호 북한 외교부 부부장은 제48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현시기 조선반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평화를 보장하는것은 더는 지체할수 없는 긴박한 문제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유엔은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평화보장체계를 수립하는 문제에서 자기의 응당한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함으로써 ‘새로운 평화보장체계’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ꡔ로동신문ꡕ, 1993년 10월 8일자.
수립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자고 미국측에 제의하였다. 이 제안에서 북한은 ‘새로운 평화보장체계’를 수립하기 위한 어떠한 구체적인 사안들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오늘 조선반도에서 핵문제를 비롯한 일련의 복잡하고 첨예한 문제들이 제기되고있는것은 정전협정의 실제적당사자들인 우리와 미국을 적대쌍방으로 규정하고있는 정전체계가 그대로 지속되고있는것과 관련된다. 조선반도에 조성되고있는 제반 사태는 조미사이의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화해를 이룩하며 조선반도의 진정한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자면 반드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현 정전기구를 대신하는 평화보장체계를 수립할것을 요구하고있다. ꡔ로동신문ꡕ, 1994년 4월 28일자.

그러나,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개최된 3단계 고위급회담 1차회담에서 북한은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요구사항에서 삭제하였다. 당시 카터 전미국 대통령의 방북과 남북정상회담 개최합의 등 북한의 변화에 크게 고무된 미국은, 회담 이전부터 북한측의 요구사항에 대해 북한의 핵투명성 실천정도에 따라 단계적으로 제공할 것이라는 전향적인 의사를 밝혔다. 이에 북한측은 이 정도의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 짓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평화협정을 사안에서 제외시켰으며, 이후 역사적인 제네바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북한은 2단계 고위급회담에서 이루어진 관계정상화 합의가 평화협정을 담보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북‧미 핵협상에서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 관계개선 문제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언제든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철회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북한은 관계개선 문제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평화협정 체결주장을 되풀이하였다. 즉, 북한에게 북‧미 관계개선은 최대의 목표였으며 평화협정 체결주장은 이를 관철하기 위한 전술적 수단이었던 것이다.

3. 북한 대미 외교정책의 변화 및 특징

핵협상 당시 북한의 대미 외교정책은 한마디로 체제유지를 위한 적극적인 대미 공세외교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북한은 체제유지를 보장받기 위하여 냉전종식 이후 유일초강국인 미국과의 직접교섭을 추진하는 정책을 추구하였다.
김일성은 1994년 1월 1일 신년사를 통해 북한과 미국의 직접회담을 통해 핵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국과 그 추종자들이 떠드는 우리의 핵문제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미국이 집요하게 추구하는 반사회주의‧반공화국 책동의 산물입니다. 있지도 않은 북의 핵개발 의혹을 들고나온것도 미국이며 조선반도에 실지로 핵무기를 끌여들여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것도 미국입니다. 그러므로 조선반도에서 핵문제는 어디까지나 조미회담을 통하여 해결되여야 합니다. 압력이나 위협은 우리에게 통할수 없으며 그런 방법에 매달려서는 문제를 해결할수 없을뿐아니라 사태를 파국으로 몰아갈수 있습니다. ꡔ로동신문ꡕ, 1994년 1월 1일자.

물론, 냉전종식 초기에 북한은 소련의 해체와 러시아의 공산주의 포기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중국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나 경제적 실리주의를 추구하고 있는 중국은 북한에게 있어 더 이상 구소련의 대안이 될 수 없었다. 1991년 남한과 관계정상화를 추진하던 중국은 북한에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에 찬성하라는 압력을 가했으며, 10월 방중한 김일성 주석에게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중국식 경제개방을 하고 남한과도 신속히 관계개선을 하라고 충고하였다. 또한, 중국은 남한 내에 배치된 핵무기를 철수하겠다는 부시의 발표를 믿고 핵개발 계획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가급적 빨리 해소하라고 북한에 촉구했다. 돈 오버도퍼 저, 앞의 책, 246쪽.
이에 북한은 대서방 관계개선에 적극 나서게 되었으며, 특히 보상금을 받아낼 수 있는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를 서둘렀다. 그러나 8차례의 회담에도 불구하고 진전이 없자, 북한과 일본은 1991년 1월 30일~31일에 제1차 북‧일 수교회담을 개최한 이래 8차에 걸쳐 수교협상을 진행하였다. 협상은 난항을 거듭한 끝에 1992년 11월 5일~6일 제8차 수교회담에서 일본측이 또다시 이은혜와 북한의 핵문제를 제기하여 협상에 나서자 북한은 다음 회담 일정도 정하지 않고 수교회담을 중단하게 되었다.
북한은 일본과의 회담을 중단하고 미국과의 직접교섭에 적극 나서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냉전종식 후 등장한 미국의 개입과 확대전략은 오히려 북한의 대미 접근전략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북한에 의한 핵개발과 그에 따른 동아시아 지역 국가들로의 핵확산 가능성은 탈냉전시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미국에게 있어서 직접적인 위협요인으로 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영향력 확대라는 하나의 기회로도 작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북한은 핵협상을 통해 미국과의 직접협상을 이끌어냈다.
또한, 북한은 체제유지에 장애요인인 안보 및 외교난을 타결하기 위해 핵문제를 활용하면서 대미 관계개선을 위한 정책을 추구하였다. 국제체제의 변화에 따른 북한의 안보위기감 심화와 한‧소, 한‧중수교로 인한 외교적 고립은, 북한으로 하여금 체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도록 하였으며, 핵문제가 국제문제로 대두되자 이를 협상카드로 활용하여 적극적인 대미 접근정책을 추구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리고, 경제난에 따른 체제위기감도 대미협상을 추진하게 만든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침체국면을 벗어나지 못하던 북한 경제는 1990년대 들어와 사회주의 무역질서의 붕괴에 따라 경제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북한은 ‘나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 북한은 1991년 12월 28일 ‘정무원결정 74호’를 통해 함경북도 나진‧선봉지역 621㎢를 ‘자유경제무역지대’로 설정하고 나진항, 선봉항, 청진항을 자유무역항으로 지정하였으며 1998년 상반기 중에는 지대개발에 따른 부정적인 요소의 확산을 경계하여 ‘자유’를 삭제 ‘나진‧선봉 경제무역지대’로 변경하였다. 이는 선진과학과 기술을 도입하고 부분적인 경제개방화를 통해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중국의 ‘경제특구’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를 설정하는 한편, 대외무역 관련법규들을 제정하는 등 제한적 대외 개방정책을 선택하였으나, ‘적성국 교역법’(Trading with the Enemy Act) 미국의 ‘적성국 교역법’과 ‘수출관리법’(Export Administration Act)은 북한과의 모든 상업계약 체결에 대한 허가를 의무화하고 있다. 이 외에도 ‘교역협정연장법,’ ‘무기국제거래규제법,’ ‘해외원조통제법’ 등 수많은 국제법들은 북한과의 교역에 제재를 가하고 있다. 박건영, 앞의 책, 106~107쪽.
등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에 묶여 대서방 무역 및 서방세계로의 진출이 용이치 않았다. 따라서 북한은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대미협상에 치중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애초부터 핵협상에 임하는 그들의 기본의도가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남한과 IAEA를 부차적 상대로 취급하였다.
즉, 탈냉전기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미국 대북정책의 변화와 북한의 대미인식 변화는 핵문제와 경제난, 외교적 고립을 타결하기 위한 북한의 대미 접근정책에 변화를 가져오게 한 가장 큰 요인이었다.

제2절 제네바합의와 평화협정 체결제의의 변화

탈냉전 이후 북한의 외교목표 중의 하나는 미국과 직접교섭을 하는 것이었으며, 오랜 기간동안 추구해왔던 대미 직접협상은 북한의 핵문제에 의해 실현되었다. 제네바합의 이후 1995년 1월 20일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완화조치가 이루어졌으며, 1995년과 1996년에 걸쳐 경수로 공급협상, 연락사무소 개설 전문가회담, 미군유해 송환협상, 미사일협상 등이 진행됨으로써 북한의 북‧미 관계개선은 어느 정도 결실을 보게 되었다. 핵카드를 이용해 북‧미 직접협상을 이루어낸 북한은 남한을 배제하면서, 체제유지 및 안전보장 문제까지 북‧미 직접협상을 통해 해결하고자 노력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는 북한이 대미 관계개선을 관철하고, 북‧미 직접협상을 유지하기 위해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는 ‘북‧미 관계개선을 위한 적극적 주장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간단히 살펴본 바와 같이 북한은 1994년 제네바합의 이전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수립을 제의한 바 있으나, 이는 미국과의 핵협상과 관련하여 소극적이고 형식적인 형태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 사후 ‘새로운 평화보장체계’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다가 1995년 이후 이를 위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안을 제의하기 시작하였다.
1994년 4월 외교부 성명을 통해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수립의 제의할 당시 송호경 부부장은 “조선반도에서 평화를 실제적으로 보장할수 있는 새로운 장치가 마련될때까지 정전협정을 계속 준수” ꡔ로동신문ꡕ, 1994년 4월 28일자.
할 것이라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북한은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수립 제의 이전부터 정전협정의 무력화 조치를 단계적으로 취하기 시작하였다. 정전협정 무력화 조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난경, “북한의 대미 ‘신평화보장체계’ 수립제의에 관한 일고찰”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5), 7~15쪽.

북한이 취한 정전협정 무력화 조치는 첫째, 군사정전위원회(Military Armistice Commission)의 무력화 조치이다. 북한은 1991년 3월 25일 유엔군 사령부측이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를 한국군 황원탁 소장으로 임명하자, 3월 37일 한국군 장성은 정전협정의 체결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유엔군측의 수석대표로 인정할 수 없다고 비난하고,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의 참석을 거부하면서 정전협정을 무력화하는 조치를 본격적으로 취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1994년 4월 28일 북한측 군사정전위원회 대표를 일방적으로 철수하고, 동년 5월 24일 군사정전위원회를 대신할 새로운 협상기구로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를 설치하였으며, 12월 15일에는 군사정전위원회로부터 중국군 대표단을 철수시켰다.
둘째, 중립국감독위원회(Neutral Nation Supervisory Commission)의 무력화 조치이다. 북한은 1993년 4월 3일 중립국감독위원회로부터 체코 대표단을 철수시키고, 1995년 2월 28일에는 폴란드 대표단을 철수시켰다. 이어 1995년 5월 3일에는 중립국감독위원회 북측 사무실을 폐쇄하고, 유엔군측의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 요원들의 공동경비구역 출입금지 조치를 발표하였다.
셋째,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유지 및 관리임무의 포기선언이다. 1996년 3월 29일 북한은 김광진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의 담화를 통해 미국의 평화보장 체결제의 거부에 대한 대응책으로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지위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된 상황에 따른 조치들이 행해질 것이라는 경고를 하고, 동년 4월 4일 ‘조선인민군대표부’를 통해 ‘비무장지대 불인정선언’을 전격 발표하였다. 이어서 북한군은 4월 5일부터 7일까지 판문점공동관리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에서 무력시위를 하였다.
넷째, 미국에 대한 정전체제 와해 위협이다. 북한은 1995년 10월 18일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평화보장체계 협상 거부시 정전체제를 완전히 청산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하였으며, 1996년 3월 8일에는 미국이 ‘잠정협정’ 체결제의에 호응하지 않을 경우 정전체제를 새로운 체제로 바꾸기 위한 최종적이고 주동적인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하였다.
이와 같이 북한은 정전체제를 무력화시키면서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수립을 미국에 제안하였으나 미국이 이에 응하지 않자, 1995년 들어서면서 평화협정 체결을 다시 요구하면서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1995년 2월 24일에는 외교부 대변인 담화를 통해 평화보장체계 수립문제에 대한 미국의 직접협상을 요구하였다. 이어 3월 2일에는 중앙방송을 통해 “지금 정전기구는 미국측의 정전협정을 체계적으로 유린, 파괴했기때문에 완전히 마비상태”에 있으며 “사실상 오늘 조선반도에서 새로운 평화보장체계를 수립하는것은 더는 미룰수 없는 초미의 문제로서 제기되고있다”고 주장하고, 미국측이 성실한 자세로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수립을 위한 협상에 임할 것을 촉구했다. 이기동,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주장 변천과정,” ꡔ건국대민족통일연구ꡕ, 제9호 (1995), 118쪽.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북한은 1995년 몇 차례에 걸쳐 미국과 접촉하면서 정전체제를 대체할 평화보장체계, 새로운 평화체계 등을 내세우면서 미국과의 직접협상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북한은 1995년 9월 18일~26일 미국 카네기 재단의 샐릭 해리슨을 평양으로 초청하여 ‘새로운 평화보장체계’의 내용을 대외에 알리는데 효과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ꡔ중앙일보ꡕ, 1995년 9월 28일자.

이후 북한은 1996년 2월 22일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새로운 평화보장체계’를 수립하기 위한 구체적인 제도적 장치로서 북‧미간 잠정협정 체결, 잠정협정의 이행을 감시할 북‧미 공동군사기구의 설치 및 운영 등을 제의하고, 이를 토의하기 위한 북‧미 협상의 진행을 요구하였다. 북한은 이 성명을 통해 평화협정이 체결되기 이전까지 정전협정을 대신할 과도적 조치로서의 잠정협정을 체결할 것을 요구하였다.

첫째, 완전한 평화협정이 체결될때까지 잠정협정을 체결하며 이 잠정협정에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관리, 무장충돌과 돌발사건 발생시 해결방도, 군사공동기구의 구성과 임무 및 권한, 잠정협정의 수정보충 등 안전질서 유지와 관련되는 문제들이 포함된다…둘째, 잠정협정을 이행, 감독하기 위하여 판문점에 군사정전위원회를 대신하는 조미 공동군사기구가 조직, 운영되여야 한다…셋째, 잠정협정을 채택하며 조미 공동군사기구를 내오는 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해당쪽에서 협상이 진행되여야 한다. ꡔ로동신문ꡕ, 1996년 2월 23일자.

북한이 지속적으로 주장해오던 대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을 미루고 과도적 조치로서 잠정협정의 체결을 요구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조선반도에서 무장충돌과 전쟁을 막기위한 최소한의 제도적장치를 마련” ꡔ로동신문ꡕ, 1996년 6월 25일자.
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북‧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이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하나의 돌파구로서 잠정협정 체결을 주장함으로써, 미국의 선택의 폭을 넓히고 일단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이끌어내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북한의 잠정협정 체결제의는 대북 연착륙(soft landing)정책을 펴고 있는 미국의 입지를 강화시켜 협상테이블로 유인하여, 이후 북‧미 평화협정 체결 또는 관계개선을 위한 협상에 접근한다는 전략이 깔려 있는 것이다. 북한이 잠정협정 체결을 제의하면서도 그 전제조건으로서 주한미군 철수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즉, 북한은 대미 평화협정 체결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태에서 과도적 조치로서의 잠정협정 체결제의를 통해 북‧미간 군사채널을 확보하고, 나아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기 위한 적대관계의 해소에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군사정전위원회의 기능을 무시하고 그 기능을 대신할 공동군사기구의 설치를 주장하는 것은 이미 제의한 평화협정의 내용과 별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북한의 잠정협정 체결주장은 비무장지대의 공동관리라는 명분을 내세워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불러내 미국과의 직접접촉 채널을 확보‧확대함으로써, 기존의 정전협정을 무력화시키고 남한을 완전히 배제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잠정협정 체결주장에 대해 미국은 평화협정 체결문제는 남북 당사자가 해결할 문제이고, 또한 평화협정 체결 이전까지는 현 정전협정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일관하였다. 미 국무부의 번스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한반도 안정은 수십년 동안 정전협정체제로 유지되어 왔으며, 우리는 한국을 배제한 채 북한과 다른 협상을 벌일 생각이 전혀 없다”고 밝히면서 단호한 거부입장을 표명하였다. 전난경, 앞의 논문, 13쪽.

1993년 말부터 북한이 기존처럼 주한미군 철수를 포함하는 북‧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을 주한미군 철수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고 ‘새로운 평화보장체계’의 수립 및 정전협정의 체결주장으로 바꾼 것은, 핵의혹과 관련한 미국의 대북 군사‧경제제재를 피하고, 새로운 협상기구를 통해 북‧미 직접접촉 및 적대관계 해소, 그리고 북‧미 관계개선을 통한 경제난 해결과 체제유지라는 일종의 생존전략 차원에서 나온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고유환, 앞의 글, 74쪽.
즉, 북한이 핵협상 이후 남한을 배제하면서 안전보장문제까지 미국과의 직접협상을 통해 해결하고자 나온 제안이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수립과 잠정협정 체결제의인 것이다.

<표 4-2>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90년을 전후한 탈냉전기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미국 대북정책의 변화와 북한의 대미인식 변화는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주장의 최종 목표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대미 외교정책의 목표는 핵협상 타결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 따라서 미국에 대해 북한은 보다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표 4-2> 북한의 대미인식 변화와 평화협정 체결제의(3)
시기구분
내용
1993~1994
1995~
대미인식
선언적으로는 적대적 태도를 보이면서도 미국이 북한의 위기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
미국이 북한의 체제유지와 생존을 위한 돌파구라고 인식
대미
정책
태도
공세적‧적극적
목표
관계개선
평화
협정
체결
쌍방
북한과 미국
접근
방법
1994년: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수립 제의*
1996년: 평화협정 체결 이전까지 ‘잠정협정’ 체결주장*
*당시 북한은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구체적인 사안을 제시하지 않았음.

탈냉전기 이전 한반도 공산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주한미군의 철수를 최종 목표로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던 북한은, 탈냉전기 체제유지와 생존차원에서 대미 직접협상의 채널 확보를 통한 관계개선을 목적으로 평화협정 체결을 우선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3절 4자회담과 평화협정 체결문제

1996년 4월 16일 한‧미 정상은 제주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 확보를 위해 남과 북이 당사자가 되고 미국과 중국이 중재자 겸 보증인으로 참여하는 4자회담을 아무런 조건 없이 개최하자고 북한에 제의하면서, 북한의 정전체제 무력화와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수립 및 잠정협정 체결제의에 반격을 가했다. 남한 정부는 4자회담 제안 이전까지 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정책을 통한 북‧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에 대해서 수동적으로 대응해 왔다. 따라서, 남한은 남북당국간 대화가 단절되고 북한의 정전협정 무력화 조치가 빈번한 상황 하에서 한반도에 공고한 평화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4자회담을 제안한 것이다. http://www.mofat.go.kr/web/koreauni.ns. 외교통상부의 인터넷사이트.

4자회담의 가장 큰 특징은 내용과 의제가 매우 포괄적이라는 것이다. 회담에 참여하는 모든 관련국들이 제시하는 어떠한 형태의 의제라도 논의가 가능하다는 개방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이나 중국이 의제나 내용에 제한 없이 일단 회담의 틀 안에 들어와서 회담의 형식과 의제까지도 논의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놓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기본적인 형식은 한반도문제의 실질적인 당사자인 남북한이 먼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국과 중국이 이를 보장한다는 ‘2+2’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4자회담은 1975년 9월 당시 미 국무장관 키신저가 유엔총회 연설에서 거론한 바 있으나 이를 진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은 하지 않았다.
즉, 4자회담의 협의과정에서 남북한 당사자가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골격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한‧미 양국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4자회담과 북한이 주장하는 회담간의 주요 차이점은 북한이 미국과의 쌍무협상만 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항구적인 평화는 주로 남북한 국민들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미 국무부 발표, 척 다운스, 앞의 책, 382쪽.

그러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북한의 입장은 여전히 평화협정은 북한과 미국 양자간에 체결되어야 하며, 남북한간에는 불가침선언을 이행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북한은 4자회담 제의에 대해 유보적인 반응을 보였다. 북한은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1996년 4월 18일 현실성 여부를 검토해야 한다면서 5월 7일에는 미국측의 설명을 요구하고, 이어 8월 23일에는 4자회담에 관심을 가질 근거가 없다는 등 4자회담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북한은 1996년 9월 2일에도 4자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문제를 우선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11월 11일에는 4자회담의 설명을 들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등 계속해서 4자회담에 대해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북한은 대미 관계개선을 고려하여 4자회담을 수용하는 입장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남한과 미국이 제안한 4자회담을 거부함으로써 대미관계에 경색을 초래하기보다는, 이를 수용함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식량지원, 경제제재 완화조치 등의 대가를 얻는 협상카드로 활용하게 된 것이다. 북한은 1997년 3월 5일 뉴욕에서 열린 4자회담 공동설명회에서 참가조건으로 식량지원을 요구하였으며, ꡔ한겨레신문ꡕ, 1996년 11월 4일자. 미국은 북한이 4자회담과 식량지원을 연계하는데 반대하고 어떠한 약속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1996년 9월 18일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에 대해 남한과 미국이 확고한 태도를 보이자 동년 12월 29일 이에 대한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4자회담 공동설명회에 참가할 것임을 밝혔다. 이후 1997년 2월 15일 미국은 인도적 차원에서 1천 5백만 달러어치의 식량을 추가로 제공하기로 결정했음을 발표하였다.
4자회담 본회담의 참가조건으로 150만 톤의 식량지원과 함께 대북 경제제재 완화를 요구했다. ꡔ한겨레신문ꡕ, 1997년 3월 28일자.

북한에게 4자회담은 남북한간에 한반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화의 창구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미국과의 접촉을 확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대미 협상창구였다. 실제로 북한은 4자회담이 개최되자 4자회담 자체보다는 북‧미 고위급회담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북한은 1999년 1월 19일~22일 열린 제4차 본회담을 전후하여 미국과의 회담에서 금창리 지하시설문제에 대해 협상했으며, 동년 8월 5일~9일 열린 제6차 본회담에서는 미국과 미사일문제에 대해 직접협상을 벌였다. 또한, 북한은 4자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와 북‧미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의제로 삼고 논의할 것을 공식적으로 주장하면서 한‧미 공조관계를 약화시키려는 기회로 삼았다.

<표 4-3> 4자회담 진행일지
일 정
주 요 내 용
제1차 본회담
1997.12.9~10 제네바
*이시영, 김계관, 로스(Stanley O. Roth), 唐家璇
‧남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5개항 제시
‧북한: 북‧미 평화협정 체결 및 주한미군 철수문제 논의 요구
‧미국: 정전협정 준수,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 촉구
‧중국: 남북관계 및 북‧미관계의 개선 지지 표명
‧2차회담 준비를 위한 특별소위원회 구성 합의
제2차 본회담
1998.3.16~21 제네바
*송영식, 김계관, 로스, 陳健
‧남한: 분과위원회 구성 제의
‧북한: 주한미군 철수 및 북‧미 평화협정 체결문제 논의 요구
‧중국: 분과위원회 설치 및 운영 촉구
‧‘4자회담 의장성명’ 채택
제3차 본회담
1998.10.21~24 제네바
*박건우, 김계관, 카트먼, 錢永年
‧남한: 분과위원회 구성, 군사적 신뢰구축에 관한 합의, 4자회담 정례화 요구
‧북한: 주한미군 철수 및 북‧미 평화협정 체결문제 외에 군사장비 반입문제와 한‧미 합동군사훈련 중지문제를 추가의제로 제시
‧2개 분과위원회 구성에 합의하고 ‘분과위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각서’ 채택
제4차 본회담
1999.1.19~22 제네바
‧남한: 3가지 군사적 신뢰구축조치 제의(1.남북한 군사당국자간 직통전화 설치, 2.군사훈련의 통보 및 제한된 범위의 참관, 3.군인사 상호 교류)
‧북한: 주한미군 철수 및 북‧미 평화협정 체결문제 논의 요구, 민족 내부문제인 남북사이의 문제들은 논의될 수 없음을 주장
‧긴장완화 분과위원회 및 평화체제 분과위원회 회의
제5차 본회담
1999.4.24~27 제네바
‧남한: 3가지 군사적 신뢰구축조치 재주장
‧북한: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의 철회 및 주한미군 철수문제 논의 요구
제6차 본회담
1999.8.5~9 제네바
‧남한: 군사적 신뢰구축조치의 협의 및 이행 촉구, 판문점 장성급회담 활성화와 남북군사공동위원회의 가동 제의, ‘남북평화합의서’와 추가의정서 채택 주장
‧북한: 주한미군 철수 및 북‧미 평화협정 체결문제 논의 요구
‧중국: 조속한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 필요성 강조, ‘한(조선)반도 평화협정 초안’-전쟁상태의 종식선언, 불가침‧내정불간섭
자료: http://dialogue.unikorea.go.kr/uw/dispatcher/SKID. 통일부 남북회담사무국 인터넷사이트 자료 종합.

이와 같이 북한은 4자회담을 수용하기는 했지만, 4자회담에는 형식적으로 임하면서 미국과의 직접협상을 통해 대미관계를 개선하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1997년 11월 21일 제3차 예비회담에서 의제설정에 합의한 것이나, 북한은 제1차 예비회담에서부터 ‘조선반도와 그 주변지역의 미군철수’와 ‘조‧미 평화협정 체결’을 의제로 할 것을 주장하다가 제2차 예비회담에서는 여기에 ‘북과 남이 조선반도 외부로부터 군사장비 도입 금지’를 의제로 추가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제3차 예비회담에서 남한측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긴장완화를 위한 제반문제’(Establishment of a peace regime on the Korean Peninsula, and issues concerning tension reduction there)를 의제로 선택하였다. http://dialogue.unikorea.go.kr/uw/ dispatcher/SKID. 통일부 남북회담사무국 인터넷사이트.
1998년 10월 21일~24일 제3차 본회담에서 분과위원회 구성에 합의한 것처럼 북한은 회담의 형식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수용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제6차 본회담에서 북측 김계관 대표가 4자회담 철수 가능성을 시사한 바와 같이 4자회담의 무산을 위협하는 극단적인 전술을 사용하거나, 주한미군 철수문제와 북‧미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논의하자고 요구하는 등 의제의 쟁점화를 통해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조치 해제, 추가 경제지원 등을 도모하고자 4자회담을 이용하였다.
또한, 북한은 1998년 3월 16일~21일 제2차 본회담에서 남북한간의 만남이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 문제에서 북‧미간 문제 및 남북한간 문제가 따로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4자회담을 북‧미 주도의 ‘4-2’회담으로 변질시키고자 하였다. 북한의 이러한 입장은 4자회담의 의제가 이미 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 철수와 북‧미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의제에 포함시킬 것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데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표 4-3>에서 보는 것처럼 북한은 4자회담 일정 내내 주한미군의 철수와 북‧미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의제로 논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문제가 남북화해를 위한 가장 초보적인 조치이며 미국의 대북 신뢰조성 의지의 척도라고 하면서, 이 문제가 해결되면 한반도의 모든 문제는 남북한간에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따라 4자회담은 제6차 본회담을 마지막으로 4국간의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가시적인 성과 없이, 차기회담 일정도 정하지 못한 채 종료되었다.

제4절 북‧미 관계개선과 평화협정 체결문제

<표 4-4>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북한은 제네바합의 이후 4자회담에 참석한 이래 민간차원의 교류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이는 동시에, 제네바합의 이행을 둘러싸고 경수로문제, 연락사무소 설치문제, 미군유해 송환문제, 핵투명성 보장문제, 미사일문제 등 여러 현안을 대미 직접접촉 및 협상을 통해 논의해왔다.
북한은 대미협상에서 미국의 개입정책을 북한체제의 유지 및 안정뿐만 아니라 체제인정으로까지 발전시키기 위해 위기상황을 조성하여 협상력을 제고하는 정책을 계속 구사하였다. 즉, 북한은 실제적인 위협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위기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내고자 하는 정책을 쓰고 있는 것이다. 특히,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위협을 북‧미협상으로 해결하겠다는 접근방법은 1994년의 제네바합의에서 이미 드러난 바 있다. 제네바합의는 북한의 핵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틀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북‧미수교에까지 이를 수 있는 관계개선의 구도를 상정하였다. 그러나, 제네바합의 이후 대북 경수로 지원사업 이외의 북‧미 관계개선과 관련한 조치는 별 진전이 없었으며, 이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위협이 핵개발뿐만 아니라 장거리 미사일 및 생화학무기로까지 그 위협이 점증되고 있다는 평가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기 때문이었다.

<표 4-4> 제네바합의 이후 북‧미접촉 일지
일 시
주 요 내 용
1994.10.21
강석주, 갈루치 / 북‧미 기본합의문 채택(제네바)
1994.11. 1
북한 5Mw원자로 핵연료 장전 취소 및 50Mw‧200Mw원자로 건설중단 발표
1994.11.30~12. 2
제1차 북‧미 경수로 전문가 협상(베이징)
1994.12. 6~10
박석균, 갈루치 / 연락사무소 개설 전문가 회담(워싱턴)
1994.12.11~12
미의회대표단(머코스키‧사이먼 상원의원) 평양방문
1994.12.17~22
빌 리차드슨 하원의원 방북: 미군헬기 월경사건(12.17) 논의
1994.12.28
토마스 허바드 미국무부 동아‧태담당 부차관보 방북: 미군헬기조종사 송환문제 논의
1995. 1.14
미국, 북한에 중유 5만 톤 제공
1995. 1.20
미국, 대북 경제제재 완화 발표
1995. 1.28~ 2. 1
제2차 북‧미 경수로 전문가 협상(베를린)
1995. 1.31~ 2. 4
미 연락사무소 부지조사단 방북
1995. 3. 9
KEDO 발족
1995. 3.25~28
제3차 북‧미 경수로 전문가 협상 제1차회담(베를린)
1995. 4.12
제3차 북‧미 경수로 전문가 협상 제2차회담(베를린)
1995. 4.18~20
제3차 북‧미 경수로 전문가 협상 제3차회담(베를린)
1995. 5.20
김계관, 허바드 / 북‧미 준고위급회담(쿠알라룸푸르): 경수로 공급이행계획
1995. 6.13
북‧미 준고위급회담 타결: 북한, 한국표준형 경수로 및 KEDO와의 협상 수용
1995. 6.14
KEDO 3차 집행이사회에서 한국표준형 경수로 및 한국전력을 주계약자로 채택
1996. 9.18~26
카네기재단 샐릭 해리슨 방북
1995.12.
경수로 공급협정 체결
1996. 1.11~13
미군유해 송환관련 전문가 협상(하와이)
1996. 4. 7
미 상무부, 인도적 차원의 대북 지원규제 해제 결정
1996. 4.16
한‧미 정상회담: 4자회담 제의
1996. 4.20~21
이형철, 아인혼 / 제1차 북‧미 미사일회담(베를린)
1996. 5.26
빌 리차드슨 상원의원 방북: 클린턴 대통령의 대리인 자격으로 4자회담 친서 전달

일 시
주 요 내 용
1996. 5.
넬슨 그레이엄 목사 방북, 유해송환 협상 실무대표단 방북
1996. 6. 4~11
카터재단 농업지원단 방북
1996. 6.10~15
미군유해 송환관련 실무협상(평양)
1996. 8.21~24
토니 홀 하원의원 방북: 수해지역 시찰
1996.11.25~27
빌 리차드슨 상원의원 방북: 헌치크 월경(8.21) 석방 논의
1997. 3. 5
4자회담 공동설명회(뉴욕)
1997. 3.28~29
스티븐스 상원의원 방북: 대북 식량지원문제 논의
1997. 4. 4~ 7
토니 홀 하원의원 방북: 수해지역 시찰 및 대북 식량문제 논의
1997. 4.16~21
4자회담 공동설명회 후속회의(뉴욕)
1997. 5. 4~13
미군유해 공동발굴 협상(뉴욕)
1997. 6.11~13
이형철, 아인혼 / 제2차 북‧미 미사일회담(뉴욕)
1997. 6.30
4자회담 차관보급 3자협의(뉴욕)
1997. 8. 5~ 7
4자회담 제1차 예비회담(뉴욕)
1997. 9.18
4자회담 제2차 예비회담(뉴욕)
1997.11.21
4자회담 제3차 예비회담(뉴욕)
1997.11.26
북‧미 준고위급 접촉(미 국무부)
1997.12. 9~10
4자회담 제1차 본회담(제네바)
1998. 3.16~21
4자회담 제2차 본회담(제네바)
1998. 8.17
미국 뉴욕타임즈, 북한의 핵의혹시설 제기
1998. 8.31
북한 대포동미사일(광명성 1호) 시험발사
1998.10. 1~ 2
한창언, 아인혼 / 제3차 북‧미 미사일회담(뉴욕)
1998.10.21
미의회, 북한 미사일‧금창리 의혹시설 해결조건 중유공급 예산 승인 결의
1998.10.21~24
4자회담 제3차 본회담(제네바)
1998.11.14
북한 외무성 대변인, “보상없는 사찰 불가” 입장 표명
1998.11.16~18
김계관, 카트먼 / 북한 지하의혹시설관련 제1차 북‧미협상(평양)
1998.12. 4~11
김계관, 카트먼 / 북한 지하의혹시설관련 제2차 북‧미협상(뉴욕, 워싱턴)
1998.12. 9~12
미군유해 공동발굴관련 회담(뉴욕)
1999. 1.16~25
김계관, 카트먼 / 북한 지하의혹시설관련 제3차 북‧미협상(제네바)
1999. 1.19~22
4자회담 제4차 본회담(제네바)

일 시
주 요 내 용
1999. 2.26
페리 대북정책조정관, ‘대북정책보고서’ 중간보고
1999. 2.27~ 3.16
김계관, 카트먼 / 북한 지하의혹시설관련 제4차 북‧미협상(뉴욕): 지하시설 방문 허용과 식량지원을 내용으로 한 ‘언론공동발표문’ 발표
1999. 3. 4~10
페리 조정관, 한‧중‧일 3국 방문
1999. 3.29~30
장창천, 아인혼 / 제4차 북‧미 미사일회담(평양)
1999. 4.17~24
북한 에너지전문가 농촌에너지시찰단 노틸러스연구소 방문
1999. 4.24~27
4자회담 제5차 본회담(제네바)
1999. 5.14~15
카트먼 방북: 김계관과 3차례 회담
1999. 5.20~24
미국 금창리시설 방문단 방북
1999. 5.25~28
페리 조정관 방북: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과 회담
1999. 6.23~24
김계관‧카트먼 회담(베이징): 금창리 지하의혹시설 방문결과 설명 및 미사일문제 협의
1999. 7. 2
한‧미 정상회담, 북한 미사일 추가발사 중지 촉구(워싱턴)
1999. 7.10~11
로버트 토리첼리 미 상원의원 방북
1999. 7.27
한‧미‧일 외무장관, 북한 미사일 추가발사 중지 촉구(싱가포르)
1999. 8. 3~10
김계관‧카트먼 회담(제네바): 미사일문제 협의
1999. 8. 5~ 9
4자회담 제6차 본회담(제네바)
1999. 8.26~29
토니 홀 미 하원의원 방북
1999. 9. 7~12
김계관‧카트먼 회담(베를린):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완화 및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유보 합의
1999. 9.15
페리보고서, 미 의회 제출
1999. 9.18
미국, 대북 경제제재 완화 발표
1999. 9.24
북한 외무성 대변인, “고위급회담기간 미사일발사 않을 것”
1999. 9.25
북한 백남순 외무상, 유엔총회에서 대미 관계개선의지 표명
1999.10.25
북한, 실종된 4구 미군유해 미국측에 전달(평양)
1999.11.15~19
김계관‧카트먼 회담(베를린): 북‧미 고위급회담 관련 협의
1999.12.15~17
미군유해 공동발굴관련 협의(베를린)
2000. 1.22~28
김계관‧카트먼 회담(베를린): 북‧미 고위급회담 개최 및 북한 고위급 인사의 워싱턴 방문 합의
2000. 3. 7~15
김계관‧카트먼 회담(베를린): 북한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
자료: 뉴스‧신문자료 종합.

하지만, 1999년 9월 12일 북‧미회담이 타결되어 역사적인 ‘베를린합의’ 대포동미사일의 시험발사는 미국에게 대북 직접담판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보유는 일본의 안보 및 주일미군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는 것이었으며,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중동 등 분쟁지역으로 수출할 경우 미국의 안보부담이 증대되는 것은 물론, 미국의 범세계적 안보이익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북‧미 미사일회담과 ‘베를린합의’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구본학, “북‧미 미사일회담 및 ‘페리보고서’의 안보적 의미,” ꡔ주간국방논단ꡕ, 제785호 (1999); 백학순, “북미관계 변화와 남북관계 전망,” http://www. sejong.org/psj/jungse/9911-a.html 참조.
가 이루어짐으로써 미국은 대북 경제제재조치를 일부 해제 미국의 대북경제제재 완화조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http://www.kotra.co. kr/nk/research/neconomy/990927.htm. 대한무역진흥공사 인터넷사이트 참조.
하는 한편, 북한은 대포동미사일의 시험발사를 유예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어서 페리(William Perry) 대북정책조정관은 대북정책보고서를 미 의회에 제출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대북정책 권고안을 제시하였다. 이로써 1998년 8월 대포동미사일 광명성1호 시험발사 이후 계속되어 온 북‧미 미사일협상이 일단락 되고 양국은 관계개선을 위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북한은 1999년 9월 25일 백남순 외무상의 제54차 유엔 총회에서 행한 기조연설을 통해 “조선반도에 항구적인 평화와 안정을 보장 하기 위한 방도는 조미사이의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민족의 통일을 실현하는것”이라고 밝히면서 북한과 미국간의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였다. 또한, “우리는 5년간에 걸치는 조미기본합의문의 성실한 리행을 통하여 우리의 신뢰도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하면서, 앞으로 계속될 북‧미회담에서 “미국이 우리에 대한 적대시정책을 버리고 관계개선에로 나온다면 우리도 그에 신뢰있게 호응할것”이라고 하여, 향후 북‧미관계가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시사하였다. “유엔총회 제54차회의에서 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단 단장의 연설문” (주체88(1999)년 9월 25일), 비공식문건.

2000년 1월 1일 ꡔ로동신문ꡕ‧ꡔ조선인민군ꡕ‧ꡔ청년전위ꡕ 공동사설에서도 과거에 비해 미국에 대한 명시적 비난이 약화되었다. 미국 및 일본과의 현안문제에 대한 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임을 고려하여 대미‧일협상 관계를 언급하지 않았으며 비난을 자제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미인식에 있어서도 종전 자신을 ‘강압적으로 봉쇄’한다는 일면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힘의 정책’과 ‘유화전략’이라는 이중정책을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변화를 보이고 있다. “당창건 55돌을 맞는 올해를 천리마대고조의 불길속에 자랑찬 승리의 해로 빛내이자,” ꡔ로동신문ꡕ, 2000년 1월 1일자.

한편, 미국은 페리보고서 페리보고서의 내용은 William J. Perry, “Review of United States Policy Toward North Korea: Findings and Recommendations,” http://www.state. gov/www/regions/eap/991012_northkorea_rpt.html 참조.
에서 대북한 ‘2개의 접근전략’(two-path strategy) 첫 번째 접근전략은 북한이 핵 및 미사일 활동을 완전히 중단하고 미국의 요구에 응할 경우에 관계정상화를 위한 협상을 가지는 것이며, 두 번째 접근전략은 반대로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거부할 경우 한‧미 안보공조 등 북한의 위협을 저지할 대응수단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Ibid., pp. 7~9.
과 5개의 정책권고안을 제시하였다.

첫 번째 접근방식은 북한과의 협상에 있어서 새롭고, 포괄적이며 통합된 접근방식을 지향하는 것이다. 우리는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 않다는 완전하고 검증할 수 있는 보장을 추구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MTCR의 기준을 넘어서는 북한 미사일의 시험, 생산, 배치와 그러한 미사일 및 관련기술과 장비 수출의 전면 중단을 추구할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 및 장거리 미사일 계획의 완전한 중단을 위한 협상을 통하여, 우리는 한반도의 안정적인 안보상황을 확보하면서, 장기적으로 동아시아에 있어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평화를 확보하고 냉전을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만약 북한이 핵 및 장거리 미사일 위협을 제거한다면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대북 무역제재를 완화하며, 북한에 개최를 부여하는 여타 긍정적인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다. Ibid., pp. 7~8. 밑줄 친 부분은 필자 강조.

위에서 보듯이 ‘2개의 접근전략’ 중 첫 번째 접근전략에 따르면, ‘베를린합의’에 의해 북한과 미국은 관계정상화를 위한 대북협상의 1단계에 진입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최성, “2000년도 북‧미관계 전망과 남북관계 개선방안,” ꡔ대북포용정책과 새로운 남북관계의 모색ꡕ, 북한연구학회 1999년 동계학술회의 발표논문집 제4권 (1999. 12. 11), 6~8쪽. 저자는 여기서 페리보고서의 첫 번째 접근전략을 북 미사일 발사 억제 및 대북 경제제재 완화, 북 핵‧미사일 개발포기 보장 및 북‧미 관계정상화, 북‧미수교를 통한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 등 ‘3단계 접근방안’으로 나누어 해석하고 있다.

탈냉전 이후 미국 대북정책의 기본목표는 변화하는 국제질서의 흐름 속에서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 나아가 동아시아의 안정을 도모하고, 냉전 이후 확보된 유일초강국으로서의 지위를 바탕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 균형자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지역 내에서 영향력을 계속 견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개입과 확대전략에 입각하여 대북한 관계개선을 위한 대북접촉을 계속할 것이며, 이와 함께 제네바합의의 이행 및 남북대화 재개를 통해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유도하기 위한 ‘포괄적’(comprehensive)이고 ‘통합적인’(integrated) 접근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책적 목표 하에 미국은 모든 대북협상을 한‧미‧일의 긴밀한 공조 하에 협의‧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남북관계의 개선 없이 북‧미관계의 진전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번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선언’과 ‘남북정상회담’ 개최합의는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고, 동시에 북한이 이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북한과 미국 양국은 2000년 3월 7일~15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북‧미회담에서 북한 고위급 대표단의 워싱턴 방문준비, 테러지원국 해제문제, 1999년 9월 18일 대북제재 완화조치 발표에 따라 북한은 미국의 가장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제재를 받고 있는 ‘불량국가’(rogue state)에서 벗어났으나, 테러지원국가, 핵과 미사일 기술확산 활동국가, 인권침해국가로 받는 제재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 중 북한을 포함한 리비아, 시리아, 이라크 등 테러지원 7개국은 무기수출 금지, 대외원조 금지, 이중용도 수출품목 통제, 무역제재 조치 등의 각종 제재를 받고 있다. 따라서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될 경우 북한은 국제사회로부터 정상적인 국가로서 인정을 받고 엄청난 실익을 얻을 수 있다. 특히,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국제개발협회(IAD) 등 국제금융기관들의 대북 차관공여문제도 한결 쉬워질 것이며, 국제사회의 대규모 식량지원을 받는 길도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재 수교협상을 타진하고 있는 일본을 비롯한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개선 여지를 넓힘으로써 부대이익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테러지원국에 대한 경제제재는 미국 의회의 동의 없이 행정부 임의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는 향후 전개될 북‧미관계의 변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최성, 앞의 글, 9쪽.
제네바합의 이행문제 등의 현안에 대해 논의한 이래 공식적인 접촉을 갖지 않고 있다. 이는 북한이 남북정상회담 합의 이후 앞으로 재개될 미사일회담 및 제네바합의 이행을 위한 북‧미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는 전략으로 분석된다. ꡔ중앙일보ꡕ, 2000년 4월 6일자.

따라서, 남한 정부는 북한이 대남관계 및 북‧미관계에 더욱 적극성을 띨 수 있도록 미국을 비롯한 일본, 중국 등의 주변국가와 긴밀한 공조관계를 유지‧활용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긴장완화와 평화체제 구축 등 한반도의 전반적인 현안문제를 주로 다루는 4자회담 역시 적극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제Ⅴ장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제의의 평가와 전망

제1절 북‧미 평화협정 체결제의와 북한의 의도

1974년 이후 북한은 지속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전제로 하는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였으나, 남한과 미국은 동아시아에서의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제의를 거부하고 있다. 현재 북한은 1996년 2월 22일 잠정협정 체결제의 이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방안에 대한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1994년과 1996년의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수립 제의와 잠정협정 체결주장에서 평화협정 체결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실제적으로 북한은 1990년 5월 군축제안 이후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이 대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는 앞에서 분석된 결과를 중심으로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을 당사자, 추진방식, 전제조건, 접근방법 등으로 나누어 평가하고 그 변화요인을 분석하여, 북한이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는 의도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북한이 진실로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평화협정 체결주장을 통해 다른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평화협정 체결 당사자에 대한 북한의 주장이다. 북한은 1974년 ‘실제적 당사자’론을 이유로 평화협정 체결 당사자를 남한에서 미국으로 전환한 후 지금까지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고집하고 있다. 이후 북한은 1984년 3자회담을 제의하고 남한과는 불가침선언을, 미국과는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주장하여 왔으며, 이에 남한과 미국은 평화협정 체결문제는 남북한 당사자의 문제라고 대응해 왔다. 북한은 ‘실제적 당사자’론을 들어 정전협정의 서명당사자를 기준으로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고 있으나, 당시 클라크(Mark Clark) 유엔군 사령관은 작전통제권을 가진 유엔군의 대표로서 협정에 서명한 것이지 미국의 대표자격은 아니었다.
또한, 북한은 정전협정의 적용대상에서 “한국에서의 교전쌍방” 중 일방을 미국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미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한국전쟁에 참가한 것이지, 미국을 대표하여 북한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참전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남한이 한국전쟁의 교전 당사자이면서 정전협정 서명당사자임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평화협정 체결의 당사자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제성호, 앞의 글, 45~57쪽; 제성호,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방안,” ꡔ국가전략ꡕ, 제2권 1호 (1996), 62~71쪽; 고병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및 군사적 긴장완화,” ꡔ통일연구ꡕ, 창간호 (1997), 28~38쪽 참조.

이러한 ‘실제적 당사자’론과 함께 북한은 1994년 4월 외교부 성명을 통해 핵문제를 비롯한 한반도 관련문제들이 북한과 미국을 적대관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ꡔ로동신문ꡕ, 1994년 4월 28일자.
이렇듯 북한이 한국전쟁과 정전협정의 쌍방을 자신과 미국으로 정의하고, 미국과의 적대관계 해소를 명분으로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는 것은, 한반도에서 그들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대외적으로는 평화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둘째로, 북한이 정전협정에 대해 보이는 태도와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하는 방식과 관련된 북한의 태도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북한은 정전협정 무력화 조치를 통해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북한은 1994년 4월 28일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수립을 제의하면서, 판문점에서 북한측 군사정전위원회 관계자들을 철수시키겠다고 선언하고, 미국에 평화보장체계 수립을 위한 협상에 응할 것을 주장하였다.

미국은 지난 40여년동안 정전협정의 실제적인 당사자로서 지닌 의무에 배치되게 협정의 합의사항들을 체계적으로 유린말살하였을뿐아니라 정전감시기구마저 마비시키었다. 미국의 이러한 부당한 처사로하여 오늘 조선정전협정은 조선반도에서 평화를 보장할수 없는 빈종이장으로 되고 군사정전위원회는 사실상 주인이 없는 기구로서 유명무실하게 되였다. ꡔ로동신문ꡕ, 1994년 4월 28일자.

그러나, 북한은 정전협정 체결 이후 빈번하게 협정을 위반하는 행동을 취해왔으며, 1996년 9월 16일과 1998년 6월 22일에는 잠수함을 침투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정전협정을 위반하였다. 한 통계에 의하면 정전협정 체결 이후 1986년까지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사례는 무려 122,422회인 것으로 나타났다. Chung-in Moon, Arms Control on the Korean Peninsula: International Penetrations, Regional Dynamics, and Domestic Structure (Seoul: Yonsei University Press, 1996), p. 54.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기 전까지 정전협정을 준수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수립의 선결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정전협정의 무력충돌 금지기능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이의 관철을 위한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정전협정을 무력화시키는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정전협정의 무력화 조치를 통해 북한은 남한을 배제하고 미국과의 직접협상을 이끌어내고 있으며, 4자회담에서도 남한을 배제하고 대미 직접협상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의지를 표출하였다.
셋째로,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협정 체결의 전제조건과 대미인식 변화이다. 북한은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유엔군 사령부의 해체와 주한미군의 철수를 내세우고 있다. 이는 북한이 주한미군을 한반도에서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절대적인 요인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상투적으로 남한과 미국의 합동군사훈련과 한‧미‧일의 관계를 ‘3각군사동맹체제’로 비난하면서 미국의 군사적 위협을 강조하는 한편, 미국이 북한의 위협을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이 주한미군이나 미국을 체제 위협요인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북한이 미국의 위협을 정말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이 주민들에게 위기의식을 고취시켜 체제의 단결을 도모하려고 하는 국내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해석을 따르더라도 주한미군의 철수가 대미 평화협정 체결의 전제조건이 될 수 없음은 확실하다. 이석수,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체결 주장과 평가,” ꡔ21세기 한반도 평화공존과 평화체제 구축ꡕ, 한국세계지역연구협의회 주최 협의회 창립 20주년 기념 학술회의 (1999. 5. 26), 9쪽.

오히려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전제조건은 정전협정의 준수 및 남북한의 신뢰회복과 축소지향적인 군사력의 균형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은 남북한간의 신뢰를 회복하고 남북한간 과도한 군사력의 대치가 축소균형을 이룰 때 가능한 것이다. 주한미군의 철수는 오히려 북한에게 유리한 군사력의 비대칭을 유발시킴으로써, 남북한간 군비경쟁을 유도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무력충돌의 가능성을 증대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주한미군의 철수가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를 위한 중대한 관건이라는 북한의 주장은 일리가 없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그 동안 북한은 미국을 제국주의의 우두머리로서 남한과 함께 북한에 대해 침략과 전쟁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적대시하였다. 또한, 남북협상이나 북‧미 직접협상, 각종 대남제의 및 군축방안 발표, 각종 선전매체 등을 통하여 북한은 주한미군의 존재를 ‘미제국주의의 남조선 강점’으로 왜곡‧선전함으로써, 이른바 ‘반외세 남조선 해방’이라는 논리로 이용하여 왔다.
그러나, 탈냉전 이후 북한은 미국이 북한의 체제위기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하고, 선언적으로는 적대적 태도를 보이면서도 핵과 미사일 같은 무리한 협상카드를 동원하여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북한의 주한미군 철수 및 대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이 미국으로부터의 관계개선과 경제제재 완화 및 대북지원을 유도하기 위한 협상전략의 일환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북한의 이중적 태도 때문이다.
핵협상 이후 북한은 평화협정 체결주장 및 대미 관계개선 노력이 궁극적으로는 주한미군 철수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인식하고, 직접적인 주한미군 철수주장을 어느 정도 후퇴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넷째로, 북한의 평화협정 접근방법이다. 평화협정의 접근방법이란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협을 제거하고 남북한이 평화공존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평화협정의 위치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즉, 한반도에서의 냉전종식과 평화체제 구축과정에서 군사적 신뢰구축과 군축 및 군비통제가 먼저냐, 아니면 평화협정 체결이 먼저냐의 입장차이를 말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협정 체결 시기와 관련된 입장은 두 가지로 대별된다. 첫 번째 입장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여 정치적 신뢰를 공고히 한 후 남북한의 무력을 대폭 줄이자는 것이다. 북한은 1974년에는 북‧미 평화협정을, 1984년에는 북‧미 평화협정과 남북 불가침선언을 먼저 체결한 후 남북한 신뢰구축과 군비통제 및 무력감축 등을 추진하자고 제의하였다. 두 번째 입장은 군사력의 감축이나 군비통제 없이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아무런 구속력이 없고, 또한 평화협정 체결 이후 일시적인 위기가 고조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남북한의 군사적 신뢰구축과 군비통제가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 자연스럽게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북한은 1988년 ‘포괄적 평화방안’ 제의부터 기존의 입장을 바꿔 먼저 무력을 감축한 다음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1994년 4월 28일 외교부 성명을 통해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 체결을 미국측에 제기한 다음, 판문점에 상주하는 북한측 군사정전위원회 관계자들을 철수시키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였다. 이는 북한이 3자회담을 제의한 이후 기존의 ‘선 무력감축 후 평화협정 체결’ 입장을 바꾸고 먼저 평화협정을 체결하자고 주장한 것으로써, 이후 북한은 4자회담에서도 남북한의 무력감축에 의한 긴장완화보다는 북‧미간의 평화협정을 우선적으로 체결하자고 주장하였다.

<표 4-5>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제의
시기구분
내용
1974~1983
1984~1992
1993~1994
1995~
당 사 자
북한과 미국
추진방식
북미 직접협상
전제조건
주한미군 철수(최근 약화됨)
접근방법
상호불가침선언→무력증강‧군비경쟁 중지→주한미군 철수→평화협정 체결→무력감축(1974년)
주한미군 철수→3자회담*→무력감축(1984년)
평화협정 체결 이전까지 ‘잠정협정’ 체결주장: 주한미군 철수를 잠정협정 체결의 전제조건으로 요구하지 않았음(1996년)
신뢰구축→주한미군 철수→무력감축→3자회담(1988년)
신뢰조성→무력감축→주한미군 철수→3자회담(1990년)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수립제의(1994년)
대미인식
북한에 대해 침략과 전쟁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인식
선언적으로는 적대적 태도를 보이면서도 북한의 위기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존재로 인식
북한의 체제유지와 생존을 위한 돌파구로 인식
*북한의 3자회담은 북‧미 평화협정과 남북 불가침선언을 분리하여 ‘선 북‧미 평화협정 체결 후 남북 불가침선언’을 주장

지금까지 살펴 본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을 간략히 요약하면 <표 4-5>와 같다. <표 4-5>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북한의 대미인식은 시기에 따라 변하고 있다. 1980년대 초까지 미국이 남한과 함께 북한에 대해 침략과 전쟁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인식하던 북한은, 이후 국제적인 화해무드에 영향을 받아 선언적으로는 미국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북한의 위기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핵문제 이후에는 체제유지와 생존을 위한 돌파구로 미국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유화적인 대미인식은 지금까지도 북한 대미정책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국제적인 환경변화와 밀접히 연관된 북한의 대미 인식변화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이 대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냉전시대 북한 대미외교의 최종목표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통한 한반도 공산화통일에 있었다. 따라서 북한은 대미 평화협정 체결의 전제조건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강조하며 미국과의 직접협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북한은 ‘평화협정’의 정의를 쌍방간 군사행동의 중지와 함께 “선린관계와 친선협조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맺는 협정” ꡔ조선말대사전ꡕ, 802쪽.
이라고 정의하고, 대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에서 선린관계와 친선 및 협조관계의 의미를 강조하여, 미국과의 적대관계 청산과 대미 관계개선을 목표로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북‧미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된다면 북한을 잠재적인 침략국으로 설정하고 있는 주한미군의 존재 의의는 상실하게 되며, 따라서 북한의 주한미군 철수주장은 더욱 명분을 가지게 될 것이다.
또한, 북한은 체제유지 전략차원에서 북‧미간 평화협정 체결주장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북한이 처하고 있는 경제적‧외교적 어려움은 더 이상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북한의 이러한 어려움으로 인해 대내적으로는 사상적인 동요와 사회적 일탈현상이 증대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북한주민의 탈북현상은 북한체제의 위기상황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북한 지도부는 이러한 위기를 미국으로부터의 체제유지 보장을 통해 벗어나려 하고 있으며, 대미 평화협정 체결주장 공세는 이를 위한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유도하기 위한 협상전략의 일환으로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은, 지난 핵협상뿐만 아니라 1994년과 1996년 북한이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수립 및 잠정협정 체결을 주장한 것과도 연관된다. 주한미군 철수를 전제하지 않는 잠정협정 체결주장은 주한미군 철수를 전제로 하는 평화협정 체결보다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문제이기 때문에, 북한은 평화협정 체결의 접근방법을 달리하여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이끌어내고자 한 것이다.

<그림 4-2>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의 의도: 이중전략

평화협정 미체결
관계개선 및
체제안전 보장

유도
대미 평화협정 체결 주장
북‧미
직접협상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결국 북한은 <그림 4-2>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90년대 이후 대미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대미 직접교섭을 통해 대미 관계개선을 이룩하고 체제의 안정을 보장할 수 있는 핵심적인 사안으로 인식하면서, 반면 대남관계 차원에서는 주한미군 철수를 통한 한반도 공산화통일이라는 기존의 전략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기회로 이용하고자 하는 이중전략 수행의 도구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국제적인 냉전이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아직도 주한미군의 철수를 통한 한반도 공산화통일을 추구하고 있다. “김정일장군의 조국통일관에서 또한 핵심적내용으로 되는것은 조국통일 3대헌장에 기초하여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김정일장군께서는 7.4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원칙과 그리고 김일성 주석께서 천명하신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과 고려련방제통일방안을 3대헌장, 3대기둥으로 규정하시였다…김정일장군께서 천명하신 조국통일을 위한 3대헌장, 3대기둥에 관한 사상에는 민족의 자주권을 유린하는 외세인 미군의 철수와 미국의 식민지적지배의 포기를 핵심적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조성박, ꡔ김정일민족관ꡕ (평양: 평양출판사, 1999), 278쪽.

그러나, 북한과 미국간의 평화협정 체결이 현 시점에서 사실상 어렵다는 점을 감안할 때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를 계속해서 주장하는 것은, 지난 고위급회담과 4자회담에서 보여주듯이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냄으로써 대미 관계개선을 통해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기 위한 포석인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외적으로는 한반도 문제를 국제문제화하여 그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명분용으로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의 근본적인 목적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한 체제보장 및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제2절 향후 전망 및 우리의 대응방향

현 미국의 대북정책은 남한정부와는 약간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남한정부의 대북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남북한의 평화적인 통일에 있다. 그러나, 페리보고서에서 보듯이 이전까지 미국의 대북정책의 목표는 한반도의 현상유지(status quo)에 있었다. 페리보고서에서는 ‘검토되었으나 폐기된 대안들’에서 많은 정책전문가들이 미국이 지난 10년간 북한에 대해 취해왔던 현상유지 접근방법을 계속 유지할 것을 권고했으나, 검토팀은 이를 채택하지 않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William J. Perry, op. cit., p. 6.
또한, 미국 대북정책의 일차적 목표는 핵협상과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보여주듯이 북한의 핵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 등 대량살상무기의 개발과 수출을 막아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한정부의 대북정책의 일차적 목표는 신뢰회복을 통한 남북관계의 개선에 있다. 따라서, 남한정부의 남북 관계개선을 위한 대북정책은 미국 및 일본의 정책적 목표에 의해 사실상 제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남한정부는 한반도 문제를 둘러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 특히 미국과의 이와 같은 이해관계의 차이를 신중하게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남북한간의 관계개선을 위한 노력이 제대로 전개되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북한의 대미관계 우선정책 때문이었다. 북한은 평화협정 체결문제나 경제제재 완화문제 등의 주요 협상을 미국과의 직접협상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였으므로 남북한 당국자간 관계개선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이에 따라 북한은 대미 관계개선에 주력하면서 남북관계를 단지 대미협상을 위한 카드나 경제적 지원을 획득하기 위한 차원에서 활용해 왔다.
그러나, 페리보고서에 나타나듯이 북한에게 있어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란 미국이 북한에 대해 “대북 무역제재를 완하하며, 북한에 기회를 부여하는 등 여타 긍정적인 조치를 취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the United States would normalize relations with the DPRK, relax sanctions that have long constrained trade with the DPRK and take other positive steps that would provide opportunities for the DPRK.” Ibid, p. 8.
또한, 제네바합의와 그 이후의 북‧미 고위급회담을 통해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경제적 실리를 얻어내었다. 따라서 향후에도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개선 및 관계정상화를 위한 정책을 계속해서 추진할 것이다. 그러나, 페리보고서에서도 보여지듯이 미국은 모든 대북협상을 한‧미‧일의 긴밀한 공조 하에 협의‧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남북관계의 개선 없이 북‧미관계의 진전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북한은 남한과의 관계개선에 대해 더 이상 등한시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며, 이번 ‘남북정상회담’ 개최합의는 북한이 대미 우선정책과 현상유지적 대남정책의 한계를 실감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와 같이, 남북한의 ‘남북정상회담’ 개최합의는 북한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으며, 국제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남북한간의 관계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북한은 정치‧외교적 차원에서 제네바합의의 이행을 이유로 대미 관계정상화를 위한 공세를 더욱 본격화할 것이며, 경제적 차원에서는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의 완전 해제 및 대북지원 확대를 지속적으로 요구할 것이다. 또한, 남북한 교류‧협력 및 경제적 지원을 위한 남북한 당국간의 대화에 응하면서 북‧미관계 등을 고려한 포괄적 남북 관계개선의 시기를 저울질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남한정부는 북한의 이러한 대남인식 변화 및 북한의 새로운 대미‧대남정책을 고려해 우선적으로 남북한 당국자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새로운 회담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4자회담과 같은 국제적인 접근과 남북 당사자 관계의 병행 추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한반도 평화체제 전환문제는 4자회담, 북한의 핵 및 미사일과 같은 대량 살상무기의 투명성 확보는 북‧미간의 대화를 통해 논의되어 왔다. 특히, 남한은 4자회담을 한반도 안정화 정책이나 평화통일정책과 연계된 것으로 보는 반면, 북한은 대미접촉을 위한 하나의 채널로 간주하면서 당면한 체제위기를 탈피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따라서, 북한이 4자회담을 단지 경제원조나 대미접촉의 수단으로만 활용할 가능성이 있음을 감안할 때, 4자회담의 본질이 왜곡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남북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인식한 만큼, 남한은 4자회담을 통하여 국제적으로 접근할 사안과 남북관계에서 해결해야 할 분야를 분리, 병행 추진하면서 당사자간의 대화 접점을 충분히 이끌어 내야 할 것이다.
둘째, 군사적인 긴장완화와 경제협력의 병행 발전이 필요하다. 북한은 김정일체제 출범 이후 계속해서 ‘강성대국’의 논리를 강조하여 왔으며, 올해 신년 공동사설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었다. 대남‧통일 면에서 대북 포용정책 및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문제, 남북대화 등에 대한 언급이 없는 반면, “총대중시사상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신념이며 모든 부문에서 최우선시해야할 국사중의 제일 국사”라고 주장하면서 향후에도 군 중시정책이 지속될 것임을 시사하였다. “당창건 55돌을 맞는 올해를 천리마대고조의 불길속에 자랑찬 승리의 해로 빛내이자,” ꡔ로동신문ꡕ, 2000년 1월 1일자.
따라서, 남한정부는 북한의 강성대국의 논리 중 ‘군사강국’을 최대한 억제시키고, 남북한 교류‧협력에 있어서의 군사적 투명성을 제고하면서 경제협력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다. 또한, 북한의 민‧관 분리정책의 한계를 부각시키면서 경제협력 과정에서 마련되는 남북 당국자간 회담의 기회를 충분히 활용해야 할 것이다.
셋째, 경제대화와 정치대화의 분리 추진이 필요하다. 북한은 정치‧군사적 현안문제에 대해 미국과의 직접 협상방식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남한이 북한과의 정치적 대화에 주력한다면 남북한간의 대화 접점을 찾기 어렵다. 따라서, 남한이 지금까지 북한의 경제적 지원을 통해 북한과의 정치적 대화의 전기를 마련하고자 하던 방식을 버리고, 경제대화와 정치대화를 분리 대응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남한의 대북 경제협력 활성화 정책을 통해 북한의 대남 경제협력 의존도를 상승시키고, 이 과정에서 북한은 자연스럽게 남북한 관계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물론, 남북한의 정치적 대화는 시간을 두고 남북기본합의서 이행 등 제도적 문제를 중심으로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남북기본합의서와 3개 부속합의서의 이행은 한반도 평화체제 전환문제와도 밀접히 연관된 남북한의 평화적 공존의 구체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남북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 중에서 실행 가능한 부분부터 단계적으로 실현해 나가기 위한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또한, 중‧장기적으로 남한정부는 남북관계 진전에 따라 한반도에 실질적인 평화체제를 정착시킨다는 목표아래 남북한간의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차원에서 북한에 대한 설득 및 국제적 지원을 유도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평화협정 체결문제와 관련하여 볼 때, 전시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는 미국도 당사자라는 북한의 주장을 바탕으로 남북한과 미국이 3자회담을 통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일본, 중국, 러시아가 이를 보장하는 ‘3+3방식’을 통한 한반도 평화체제 확립을 고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유환, 앞의 글, 85쪽.
또는, 4자회담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포괄적인 합의문’을 통해 남북한과 미국, 중국 등 4자간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곽태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4자회담,” 위의 책, 318쪽.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남한정부가 자주적인 입장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보다 주도적이고 실질적인 노력을 경주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제Ⅵ장 결 론

정전협정 체결 이후 남한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던 북한은 1974년 들어 ‘실제적 당사자’론을 주장하면서 평화협정 체결 당사자를 미국으로 바꾸고 지속적으로 평화협정 체결을 제안하였다. 이후 1980년대 들어와서 북한은 남북한과 미국이 참여하는 3자회담을 통해, 먼저 북‧미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이후 남북한간에 불가침선언을 체결할 것을 주장하면서, 불가침문제와 평화문제를 이원화하기 시작하였다. 냉전시대 북한은 ‘반제’와 ‘자주’의 원칙을 체제 및 정권의 정당성을 구축하기 위한 근거로 삼고, 한반도 공산화통일의 전제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그에 따른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됨에 따라, 남북한간의 불가침선언은 이미 해결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특히, 핵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된 1993년부터 북한은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및 ‘잠정협정’ 체결을 제안하면서, 이와 동시에 정전협정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은 소극적인 제안형식에서 벗어나 적극적이고 공세적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남한은 미국과 공동으로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여하는 4자회담을 제안하였으며, 이를 통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문제와 긴장완화문제 등 한반도 현안을 논의할 수 있는 제도적인 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통미봉남’을 통한 대미 직접협상과 형식적이나마 4자회담을 동시에 추진하면서, 주한미군 철수문제 및 대미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우선 의제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기존의 입장을 고집하였다. 1980년대 말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이로 인한 국제적인 고립 및 정치‧경제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돌파구로서 핵문제를 이용한 북한은, 체제 유지와 생존전략의 차원에서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미국으로부터 정권 및 체제를 보장받고자 대미접근을 가속화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에서 보듯이 북한의 대미 외교정책은 냉전시대 대남정책의 측면에서 주한미군의 철수와 한반도 공산화통일을 위한 여건조성을 목표로 추구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면서 총체적인 경제문제의 해결을 위한 북‧미 관계개선과 체제의 안정적 존립을 위한 생존전략의 측면으로 그 목표가 변화하였다. 즉, 북한 대미정책의 목표는 주한미군 철수를 통한 한반도 공산화통일 중심에서 ‘우리 식 사회주의’의 고수라는 체제 및 정권유지 중심으로 점차 수세적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북한은 주한미군의 철수시기에 있어서 조금씩 그 제한의 폭을 줄이며 유연한 입장을 보이고는 있으나, 지난 4자회담이나 북‧미회담에서 평화협정 체결의 전제조건으로서 여전히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결국, 탈냉전 이후 북한은 대미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대미 직접협상을 통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이룩하고 나아가 체제의 안정을 담보할 수 있는 사안으로 인식하면서, 다른 한편 대남관계 차원에서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통해 기존 한반도 공산화통일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전략을 수행하기 위해 북한은 미국과의 직접협상을 유도하기 위한 평화협정 체결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북한 대미 외교정책의 변화는 무엇보다도 한반도와 미국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북한 국내외의 정세 변화 및 대미 인식 변화에 기인한 것이다. 냉전시대 미국을 ‘제국주의의 우두머리’로서 남한과 함께 북한에 대해 침략과 전쟁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인식하던 북한은, 탈냉전시대 들어와 선언적으로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그들의 위기를 해결하여 체제 유지와 생존을 담보해 줄 수 있는 돌파구로서 미국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북한은 미국과의 직접협상 및 평화공세를 통해 대미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하면서 체제의 생존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즉, 북한과 미국과의 관계는 1980년대 말까지는 기본적으로 냉전상태를 유지하면서 적대관계에 있었으나, 국제적인 탈냉전을 통한 화해 무드의 확산과 미국의 동아시아 및 한반도 전략의 일환으로 대북관계 개선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북한 또한 정치‧경제‧외교적 고립으로부터 탈피하여 체제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최근 북한의 평양방송은 지난 1994년 10월 제네바합의, 1999년 5월 금창리 지하시설의 공개와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의 방북 등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당시 북한이 “자그마한 양보나 타협도 허용하지 않고 언제나 그랬듯이 맞받아 나가는 전술로 주동을 틀어쥐고 외교공세를 펼쳤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의 외교방식을 ‘맞받아치지 전술’이라고 소개하였다. ꡔ중앙일보ꡕ, 2000년 3월 14일자. 북한은 금창리 지하시설의 사찰을 “커다란 굴간에 식량을 가득 채워준것뿐”이라고 조롱하고, 페리의 방북을 “패배자의 애걸행각”으로 치부하면서, ‘김정일식 외교’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핵협상 및 북‧미회담에서 보여준 북한의 독특한 외교방식을 흔히 ‘벼랑끝 전술’(brinkmanship)이라고 일컬어 왔다. 따라서, 이번에 북한이 소개한 ‘맞받아치기 전술’은 앞으로의 남북관계나 북‧미 및 북‧일관계에서 북한의 대응방식을 전망하는데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와 같이 북한은 모든 협상에서 그들의 불리한 조건과 입장을 역이용하면서 정치‧경제적인 실리를 얻어내고자 그들 나름의 외교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따라서, 남한 및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아무리 북한이 불리한 입장에 있다 할지라도 북한을 일방적으로 ‘해결해야’(solved) 하는 문제라고 인식하기보다는 ‘관리해야’(managed) 하는 문제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Arnold Kanter, “Strengthening Security and Stability: Prospects, Problems, and Opportunities,” http://www.nautilus.org.
또한, 남한정부는 자주적인 입장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보다 주도적이고 실질적인 노력을 경주해 나가야 할 것이다.
북한의 외교정책에 관한 연구는 북한이라는 체제의 독특성과 예측불허성, 폐쇄성 등으로 말미암아 일반적인 사회과학 이론과 개념을 가지고 분석하고 예측하기에는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다. 또한, 자료와 연구여건의 제약 하에서 북한의 외교정책, 특히 대미 외교정책이라는 특정 분야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수행은 사실상 여러 가지 한계가 있다. 물론 여기에 연구자의 미흡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안전보장과 평화유지,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의 발전과 평화적 통일, 동아시아의 안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분야의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문제 및 한반도 현안을 둘러싼 북한의 대외정책과 그 접근방법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한반도 주변국의 대북한 정책, 북‧미 관계개선 진전에 대한 남한의 대응, 실질적인 평화협정 체결방안 등 여러 분야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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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록

◆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

서 언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 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하기(下記)의 서명자들은 쌍방(雙方)에 막대한 고통과 유혈을 초래한 한국충돌을 정지시키기 위하여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와 일체 무력행동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는 정전을 확립할 목적으로 하기 조항에 기재된 정전조건과 규정을 접수하며 또 그 제약과 통제를 받는데 각자 공동 상호 동의한다. 이 조건과 규정들의 의도는 순전히 군사적 성질에 속하는 것이며, 이는 오직 한국에서의 교전(交戰) 쌍방에만 적용한다.

제1조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1. 한 개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 선으로부터 각기 2km씩 후퇴함으로써 적대 군대간에 한 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한다. 한 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여 이를 완충지대로 함으로써 적대행위의 재발을 초래할 수 있는 사건의 발생을 방지한다.
2. 군사분계선의 위치는 첨부한 지도(지도1)에 표시한 바와 같다.
3. 비무장지대는 첨부한 지도(지도1)에 표시한 북방 경계선 및 남방 경계선으로써 이를 확정한다.
4. 군사분계선은 하기와 같이 설정한 군사정전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이를 명백히 표시한다. 적대 쌍방 사령관들은 비무장지대와 각자의 지역간의 경계선에 따라 적당한 표식물(標識物)을 세운다. 군사정전위원회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양 경계선에 따라 설치한 일체 표식물의 건립을 감독한다.
5. 한강 하구의 수역으로서 그 한쪽 강안(江岸)이 일방의 통제 하에 있고 그 다른 한쪽 강안이 다른 일방의 통제 하에 있는 곳은 쌍방의 민용 선박의 항행(航行)에 이를 개방한다. 첨부한 지도(지도2)에 표시한 부분의 한강 하구의 항행 규칙은 군사정전위원회가 이를 규정한다. 각기 일방 민용 선박이 항행함에 있어서 자기 측의 군사통제 하에 있는 육지에 배를 대는 것은 제한 받지 않는다.
6. 쌍방은 모두 비무장지대 내에서 또는 비무장지대로부터 비무장지대에 향하여 어떠한 적대행위도 감행하지 못한다.
7.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 없이는 어떠한 군인이나 민간인도 군사분계선을 통과함을 허가하지 않는다.
8. 비무장지대 내의 어떠한 군인이나 민간인도 그가 들어가려고 요구하는 지역 사령관의 특정한 허가 없이는 어느 일방의 군사통제 하에 있는 지역에도 들어감을 허가하지 않는다.
9.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의 집행에 관계되는 인원과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를 얻고 들어가는 인원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군인이나 민간인도 비무장지대에 들어감을 허가하지 않는다.
10. 비무장지대 내의 군사분계선 이남의 부분에 있어서의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책임진다. 비무장지대 내의 군사분계선 이북의 부분에 있어서의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이 공동으로 책임진다.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을 집행하기 위하여 비무장지대에 들어갈 것을 허가 받는 군인 또는 민간인의 인원수는 각기 일방 사령관이 각각 이를 결정한다. 단, 어느 일방이 허가한 인원의 총수는 언제나 1천명을 초과하지 못한다. 민사행정, 경찰의 인원수 및 그가 휴대하는 무기는 군사정전위원회가 이를 규정한다. 기타 인원은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 없이는 무기를 휴대하지 못한다.
11. 본 조의 어떠한 규정이든지 모든 군사정전위원회, 그의 보조인원, 그의 공동감시소조 및 소조의 보조인원, 그리고 하기와 같이 설립한 중립국감독위원회, 그의 보조인원, 그의 중립국시찰소조 및 소조의 보조인원과 군사정전위원회로부터 비무장지대 출입과 비무장지대 내에서의 두 지점이 비무장지대 내에 전부 들어있는 도로로써 연락되지 않는 경우에, 이 두 지점간에 반드시 경과하여야 할 통로를 왕래하기 위하여 어느 일방의 군사통제 하에 있는 지역을 통과하는 이동의 편리를 허여(許與)한다.

제2조 정화(停火) 및 정전(停戰)의 구체적 조치

가. 총 칙

12. 적대 쌍방 사령관들은 육해공군의 모든 부대와 인원을 포함한 그들의 통제 하에 있는 모든 무장역량이 한국에 있어서의 일체 적대행위를 완전히 정지할 것을 명령하고 또 이를 보장한다. 본 항의 적대행위의 완전 정지는 본 정전협정이 조인된 지 12시간 후부터 효력을 발생한다.(본 정전협정의 기타 각 항의 규정이 효력을 발생하는 일자와 시간에 대하여서는 본 정전협정 제63항 참조)
13. 군사정전의 확고성을 보장함으로써 쌍방의 한급 높은 정치회담을 진행하여 평화적 해결을 달성하는 것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적대 쌍방 사령관들은
ㄱ. 본 정전협정 중에 따로 규정한 것을 제외하고 본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한 후 72시간 내에 그들의 일체 군사역량, 보급 및 장비를 비무장지대로부터 철거한 후 비무장지대 내에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는 모든 폭발물, 지뢰원, 철조망 및 기타 군사정전위원회, 또는 그의 공동감시소조인원의 통행안전에 위험이 미치는 위험물들은 이러한 위험물이 없다고 알려져 있는 모든 통로와 함께 이러한 위험물을 설치한 군대의 사령관이 반드시 군사정전위원회에 이를 보고한다. 그 다음에 더 많은 통로를 청소하여 안전하게 만들며, 결국에 가서는 72시간의 기간이 끝난 후 45일 내에 모든 이러한 위험물은 반드시 군사정전위원회 지시에 따라, 또 그 감독 하에 비무장지대 내로부터 이를 제거한다. 72시간의 기간이 끝난 후 군사정전위원회의 감독 하에서 45일의 기간 내에 제거작업을 완수할 권한을 가진 비무장부대와 군사정전위원회가 특히 요청하였거나, 또 적대 쌍방 사령관들이 동의한 경찰의 성질을 가진 부대 및 본 정전협정 제10항과 제11항에서 허가한 인원 이외에는 쌍방의 어떠한 인원이든지 비무장지대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ㄴ. 본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한 후 10일 이내에 상대방은 한국에 있어서의 후방과 연해도서(沿海島嶼) 및 해면(海面)으로부터 그들의 모든 군사역량, 보급물자 및 장비를 철거한다. 만일 철거를 연기할 쌍방이 동의한 이유 없이, 또 철거를 연기할 유효한 이유 없이 기한이 넘어도 이러한 군사역량을 철거하지 않을 때는 상대방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어떠한 행동이라도 취할 권리를 가진다. 상기한 연해도서라는 용어는 본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할 때에 비록 일방이 점령하고 있더라도 1950년 6월 24일에 상대방이 통제하고 있던 도서 중에서 백령도(북위 37도 58분, 동경 124도 40분), 대청도(북위 37도 50분, 동경 124도 42분), 소청도(북위 37도 46분, 동경 124도 46분), 연평도(북위 37도 38분, 동경 125도 40분) 및 우도(북위 37도 36분, 동경 125도 58분)의 도서군(島嶼群)들을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 하에 남겨두는 것을 제외한 기타 모든 도서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의 군사통제 하에 둔다. 한국 서해안에 있어서 상기 경계선 이남에 있는 모든 도서는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 하에 남겨 둔다.(지도3 참조)
ㄷ. 한국 경외(境外)로부터 증원하는 군사인원을 들여오는 것을 중지한다. 단, 아래에 규정한 범위 내의 부대와 인원의 윤환(輪環)임시임무를 담당한 인원의 한국 도착 및 한국 경외에서 단기휴가를 하였거나, 혹은 임시임무를 담당하였던 인원의 한국에의 귀환은 이를 허가한다. 윤환이란 부대 혹은 인원이 한국에서 복무를 개시하는 다른 부대 혹은 인원과 교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윤환 인원은 오직 본 정전협정 제43항에 열거한 출입항을 경유하여서만 한국으로 들어 오며, 또 한국으로부터 내어갈 수 있다. 윤환은 1인 대 1인의 교환 기초 위에서 진행한다. 단, 어느 일방이든지 1개월 내에 윤환정책 하에서 한국 경외로부터 3만5천명 이상의 군사인원을 들여오지 못한다. 만일 일방의 군사인원을 들여오는 것이 해당측이 본 정전협정 효력 발생일로부터 한국으로 들여온 군사인원의 총수가 같은 날짜로부터 한국을 떠난 해당측 군사인원의 누계 총수를 초과하게 될 때는 해당측의 어떠한 군사인원도 한국으로 들여올 수 없다. 군사인원의 한국 도착 및 한국으로부터의 이거(移去)에 관하여 매일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시위원회에 보고한다. 이 보고는 입경(入境)과 출경(出境)의 지점 및 매개(每個) 지점에서 입경하는 인원과 출경하는 인원의 숫자를 포함한다. 중립국감시위원회는 그의 중립국시찰소조를 통하여 본 정전협정 제43항에 열거한 출입항에서 상기의 허가된 부대 및 인원의 윤환을 감독하며 정찰한다.
ㄹ. 한국 경외로부터 증원하는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을 들여오는 것을 정지한다. 단, 정전기간에 파괴, 파손, 손모(損耗) 또는 소모된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은 같은 성능과 같은 유형의 물건을 1대1로 교환하는 기초 위에서 교체할 수 있다. 이러한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은 오직 본 정전협정 제43항에 열거한 출입항을 경유하여서만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다. 교체의 목적으로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을 한국으로 반입할 필요를 확인하기 위하여 이러한 물건의 매차(每次) 반입에 관하여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에 보고한다. 이 보고 중에서 교체되는 처리정황을 설명한다. 교체되어 한국으로부터 내어가는 물건은 오직 본 정전협정 제43항에 열거한 출입항을 경유하여서만 내어갈 수 있다. 중립국감독위원회는 그의 중립국시찰소조를 통하여 본 정전협정 제43항에 열거한 출입항에서 상기의 허가된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의 교체를 감독하며 감시한다.
ㅁ. 본 정전협정 중의 어떠한 규정이든지 위반하는 각자의 지휘 하에 있는 인원을 적당히 처벌할 것을 보장한다.
ㅂ. 매장지점이 기록에 있고 분묘가 확실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판명 된 경우에는 본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한 후, 일정한 기한 내에 그의 군사통제 하에 있는 한국지역에 상대방의 분묘등록인원이 들어오는 것을 허가하여 이러한 분묘소재지에 가서 해당측의 이미 죽은 전쟁포로를 포함한 죽은 군사인원의 시체를 발굴하고 또 반출하여 가도록 한다. 상기 사업을 진행하는 구체적 방법과 기한은 군사정전위원회가 결정한다. 적대 쌍방 사령관들은 상대방의 죽은 군사인원의 매장지점에 관계되는 얻을 수 있는 일체 자료를 상대방에 제공한다.
ㅅ. 군사정전위원회와 그의 공동감시소조가 하기와 같이 지정한 그들의 직책과 임무를 집행할 때에 충분한 보호 및 일체의 가능한 방조와 협력을 한다. 중립국감독위원회 및 그의 중립국시찰소조의 쌍방이 합의한 주요 교통선을 경유하여 중립국감독위원회 본부와 본 정전협정 제43항에 열거한 출입항간을 왕래할 때와(지도4 참조) 또, 중립국감독위원회 본부와 본 정전협정 위반사건이 발생하였다고 보고된 지점간을 왕래할 때에 충분한 통행상의 편리를 준다. 불필요한 지연을 방지하기 위하여 주요 교통선이 막히든지 통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다른 통로와 수송기재를 사용할 것을 허가한다.
ㅇ. 군사정전위원회 및 중립국감독위원회와 그 각자에 속하는 소조에 요구되는 통신 및 운수상 편리를 포함한 보급상의 원조를 제공한다.
ㅈ. 군사정전위원회 본부 부근 비무장지대 내의 자기측 지역에 각각 한 개의 적당한 비행장을 건설, 관리, 유지한다. 그 용도는 군사정전위원회가 결정한다.
ㅊ. 중립국감독위원회와 중립국송환위원회의 전체위원 및 기타 인원이 모두 자기의 직책을 적당히 집행함에 필요한 자유와 편리를 가지도록 보장한다. 이에는 인가된 외교인원이 국제관례에 따라 통상적으로 향유하는 바와 동등한 특권, 대우 및 면제권을 포함한다.
14. 본 정전협정은 쌍방의 군사통제 하에 있는 적대 중의 일체 지상군사역량에 적용되며, 이러한 지상군사역량은 비무장지대와 상대방의 군사통제 하에 있는 한국지역을 존중한다.
15. 본 정전협정은 적대 중의 일체 해상군사역량은 비무장지대와 상대방의 군사통제 하에 있는 한국 육지에 인접한 해면(海面)을 존중하며 한국에 대하여 어떠한 종류의 봉쇄도 하지 못한다.
16. 본 정전협정은 적대 중의 일체 공중군사역량은 비무장지대와 상대방의 군사통제 하에 있는 한국지역 및 이 지역에 인접한 해면의 상공(上空)을 존중한다.
17. 본 정전협정의 조항과 규정을 준수하며, 집행하는 책임은 본 정전협정에 조인한 자와 그의 후임 사령관에게 속한다. 적대 쌍방 사령관들은 각각 그들의 지휘 하에 있는 군대 내에서 일체의 필요한 조치와 방법을 취함으로써 그 모든 소속부대 및 인원이 본 정전협정의 전체 규정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을 보장한다. 적대 쌍방 사령관들은 상호 적극 협력하며 군사정전위원회 및 중립국감독위원회와 적극 협력함으로써 본 정전협정 전체 규정의 문구(文句)와 정신을 준수하도록 한다.
18.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 및 그 각자에 속하는 소조의 사업비용은 적대 쌍방이 균등하게 부담한다.

나. 군사정전위원회

1. 구 성

19. 군사정전위원회를 설립한다.
20. 군사정전위원회는 10명의 고급장교로 구성하되 그 중의 5명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이를 임명하며, 그 중의 5명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이 공동으로 이를 임명한다. 위원 10명 중에서 각기 일방의 3명은 장급(將級)에 속하여야 하며, 각기 일방의 나머지 2명은 소장, 준장, 대령 혹은 그와 동급인 자로 할 수 있다.
21. 군사정전위원회 위원은 그 필요에 따라 참모 보조인원을 사용할 수 있다.
22. 군사정전위원회는 필요한 행정인원을 배치하여 비서처를 설치하되, 그 임무는 동 위원회의 기록, 서기, 통역 및 동 위원회가 지정하는 기타 직책의 집행을 협조하는 것이다. 쌍방은 각기 비서처에 비서장 1명, 보조 비서장 1명 및 비서처에 필요한 서기, 전문 기술인원을 임명한다. 기록은 영문, 한국문 및 중국문으로 작성하되 세 가지 글은 동등한 효력을 가진다.
23. ㄱ. 군사정전위원회는 처음 10개의 공동감시소조를 두어 그 협조를 받는다. 소조의 수는 군사정전위원회의 쌍방 수석위원회 합의를 거쳐 감소할 수 있다.
ㄴ. 매개(每個)의 공동감시소조는 4명 내지 6명의 영관급 장교로 구성하되 그 중의 반수는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이를 임명하며, 그 중의 반수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이 공동으로 이를 임명한다. 공동감시소조의 사업상 필요한 운전수, 서기, 통역 등의 부속인원은 쌍방이 이를 제공한다.

2. 책임과 권한

24. 군사정전위원회의 전반적 임무는 본 정전협정의 실시를 감독하며 본 정전협정의 어떠한 위반사건이든지 협의하여 처리하는 것이다.
25. 군사정전위원회는
ㄱ. 본부를 판문점(북위 37도 57분 29초, 동경 126도 0분 00초) 부근에 설치한다. 군사정전위원회는 동 위원회의 쌍방 수석위원의 합의를 거쳐 그 본부를 비무장지대 내의 다른 한 지점에 이설할 수 있다.
ㄴ. 공동기구로서 사업을 진행하며 의장을 두지 않는다.
ㄷ. 그가 수시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절차규정을 채택한다.
ㄹ. 본 정전협정 중 비무장지대와 한강 하구에 관한 규정의 집행을 감독한다.
ㅁ. 공동감시소조의 사업을 지도한다.
ㅂ. 본 정전협정의 어떠한 위반사건이든지 협의하여 처리한다.
ㅅ. 중립국감독위원회로부터 받은 본 정전협정 위반사건에 관한 일체 조사보고 및 일체 기타 보고와 회의기록은 즉시로 적대 쌍방 사령관들에게 이를 전달한다.
ㅇ. 하기한 바와 같이 설립한 전쟁포로송환위원회와 실향사민귀향협조위원회의 사업을 전반적으로 감독하며 지휘한다.
ㅈ. 적대 쌍방 사령관간에 통신을 전달하는 중개역할을 담당한다. 단, 상기의 규정은 쌍방 사령관들이 사용하고자 하는 어떠한 다른 방법을 사용하여 상호 통신을 전달하는 것을 배제하는 것으로 해석 할 수 없다.
ㅊ. 그의 공작인원과 그의 공동감시소조의 증명, 문건 및 휘장 또 그 임무 집행시에 사용하는 일체의 차량, 비행기 및 선박의 식별표지를 발급한다.
26. 공동감시소조의 임무는 군사정전위원회가 본 정전협정 중의 비무장지대 및 한강 하구에 관한 각 규정의 집행을 감독함을 협조하는 것이다.
27. 군사정전위원회 또는 그 중 어느 일방의 수석위원은 공동감시소조를 파견하여 비무장지대나 한강 하구에서 발생하였다고 보고된 본 정전협정 위반사건을 조사할 권한을 가진다. 단, 동 위원회 중의 어느 일방의 수석위원이든지 언제나 군사정전위원회가 파견하지 않은 공동감시소조의 반수 이상을 파견할 수 없다.
28. 군사정전위원회 또는 동 위원회의 어느 일방의 수석위원은 중립국감독위원회에 요청하여 본 정전협정 위반사건이 발생하였다고 보고된 비무장지대 이외의 지점에 가서 특별한 감시와 시찰을 행할 권한을 가진다.
29. 군사정전위원회가 본 정전협정 위반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확정한 때에는 즉시로 그 위반사건을 적대 쌍방 사령관들에게 보고한다.
30. 군사정전위원회가 본 정전협정의 어떠한 위반사건이 만족하게 시정되었다고 확정한 때에는 이를 적대 쌍방 사령관들에게 보고한다.

3. 총 칙

31. 군사정전위원회는 매일 회의를 연다. 쌍방의 수석위원은 합의하여 7일을 넘지 않는 휴회를 할 수 있다. 단, 어느 일방의 수석위원이든지 24시간 전의 통고로써 이 휴회를 끝낼 수 있다.
32. 군사정전위원회의 일체 회의기록의 복사본은 매번 회의 후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적대 쌍방 사령관들에게 송부한다.
33. 공동감시소조는 군사정전위원회에 동 위원회가 요구하는 정기보고를 제출하며 또 이 소조들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거나 또는 동 위원회가 요구하는 특별보고를 제출한다.
34. 군사정전위원회는 본 정전협정에 규정한 보고 및 회의기록의 문건철 두 벌을 보관한다. 동 위원회는 그 사업진행에 필요한 기타의 보고, 기록 등의 문건철 두 벌을 보관할 권한을 가진다. 동 위원회의 최후 해산시에는 상기 문건철을 쌍방에 각 한 벌씩 나누어준다.
35. 군사정전위원회는 적대 쌍방 사령관들에게 본 정전협정의 수정 또는 증보(增補)에 대한 건의를 제출할 수 있다. 이러한 개정 건의는 일반적으로 더 유효한 정전을 보장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 중립국감독위원회

1. 구 성

36. 중립국감독위원회를 설정한다.
37. 중립국감독위원회는 4명의 고급장교로 구성하되, 그 중의 2명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지명한 중립국, 즉 스웨덴 및 스위스가 이를 임명하며, 그 중의 2명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이 공동으로 지명한 중립국, 즉 폴란드 및 체코슬로바키아가 이를 임명한다. 본 정전협정에서 쓴 중립국이라는 용어의 정의는 그 전투부대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에 참가하지 않은 국가를 말하는 것이다. 동 위원회에 임명되는 위원은 임명하는 국가의 무장부대로부터 파견될 수 있다. 매개(每個) 위원은 후보위원 1명을 지정하여 그 정위원이 어떠한 이유로 출석할 수 없게 되는 회의에 출석하게 한다. 이러한 후보위원은 그 정위원과 동일한 국적에 속한다. 일방이 지명한 중립국 위원의 출석자 수와 다른 일방이 지명한 중립국 위원의 출석자 수가 같을 때에는 중립국감독위원회는 곧 행동을 취할 수 있다.
38. 중립국감독위원회의 위원은 그 필요에 따라 각기 해당 중립국이 제공한 참모 보조인원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참모 보조인원은 본 위원회의 후보위원으로 임명될 수 있다.
39. 중립국감독위원회에 필요한 행정위원을 제공하도록 중립국에 요청하여 비서처를 설치하되 그 임무는 동 위원회에 필요한 기록, 서기, 통역 및 동 위원회가 지정하는 기타 직책의 집행을 협조하는 것이다.
40. ㄱ. 중립국감독위원회는 처음에 20개의 중립국감독소조를 두어 그 협조를 받는다. 소조의 수는 군사정전위원회의 쌍방 수석위원의 합의를 거쳐 감소할 수 있다. 중립국감독소조는 오직 중립국감독위원회에 대하여서만 책임을 지며 그에 보고하며 또 지도를 받는다.
ㄴ. 매개(每個) 중립국감독소조는 최소 4명의 장교로 구성하되 이 장교는 영 관급으로 하는 것이 적당하며, 이 중의 반수는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지명한 중립국에서 내고, 또 그 중의 반수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이 공동으로 지명한 중립국에서 낸다. 중립국시찰소조에 임명되는 조원은 임명하는 국가의 무장부대에서 이를 낼 수 있다. 각 소조의 직책집행을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정황(情況)의 요구에 따라 최소 2명의 조원으로 구성되는 분조를 설치할 수 있다. 그 두 조원 중의 1명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지명한 중립국에서 내며 1명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이 공동으로 지명한 중립국에서 낸다. 운전수, 서기, 통역, 통신원과 같은 부속인원 및 각 소조의 임무집행에 필요한 비품은 각기 일방 사령관이 비무장지대 내 및 자기측 군사통제지역 내에서 수요에 따라 이를 공급한다. 중립국감독위원회는 동 위원회 자체와 중립국시찰소조들에 그가 요망하는 상기의 인원 및 비품을 제공할 수 있다. 단, 이러한 인원은 중립국감독위원회를 구성한 그 중립국의 인원이어야 한다.

2. 책임과 권한

41. 중립국감독위원회의 임무는 본 정전협정 제13항 ㄷ목, 제13항 ㄹ목 및 제28항에 규정한 감독, 감시, 시찰 및 조사의 직책을 집행하며, 이러한 감독, 감시, 시찰 및 조사의 결과를 군사정전위원회에 보고하는 것이다.
42. 중립국감독위원회는
ㄱ. 본부를 군사정전위원회의 본부 부근에 설치한다.
ㄴ. 그가 수시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절차규정을 채택한다.
ㄷ. 그 위원 및 그 중립국감시소조를 통하여 본 정전협정 제13항 ㄷ목, 제13항 ㄹ목에 규정한 감독과 시찰을 진행하며, 또 본 정전협정 위반사건이 발생하였다고 보고된 지점에서 본 정전협정 제28항에 규정한 특별감시와 시찰을 진행한다.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에 대한 중립국시찰소조의 시찰은 소조로 하여금 증원하는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을 한국으로 들여옴이 없도록 확실히 보장할 수 있게 한다. 단, 이 규정은 어떠한 작전 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또는 탄약의 어떠한 비밀설계 또는 특점(特點)을 시찰 또는 검사할 권한을 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없다.
ㄹ. 중립국시찰소조의 사업을 지도하며 감독한다.
ㅁ.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지역 내에 있는 본 정전협정 제43항에 열거한 출입항에 5개의 중립국시찰소조를 주재(駐在)시키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의 군사통제지역 내에 있는 본 정전협정 제43항에 열거한 출입항에 5개의 중립국시찰소조를 주재시킨다. 처음에는 따로 10개의 중립국이동 시찰소조를 후비(後備)로 설치하되 중립국감독위원회 본부 부근에 주재시킨다. 그 수는 군사정전위원회 쌍방 수석위원의 합의를 거쳐 감소할 수 있다. 중립국이동 시찰소조 중 군사정전위원회의 어느 일방 수석위원의 요청에 응하여 파견하는 소조는 언제나 그 반수를 초과할 수 없다.
ㅂ. 보고된 본 정전협정 위반사건을 전목(前目) 규정의 범위 내에서 지체없이 조사한다. 이에는 군사정전위원회 또는 동 위원회 중의 어느 일방 수석위원이 요청하는 보고된 본 정전협정 위반사건에 대한 조사를 포함한다.
ㅅ. 그의 공작인원과 그의 중립국감시소조의 증명문건 및 휘장, 또 그 임무 집행시에 사용하는 일체 차량, 비행기 및 선박의 식별표지를 발급한다.
43. 중립국감시소조는 하기한 각 출입항에 주재한다.
국제연합군의 군사통제지역
인천(북위 37도 28분, 동경 126도 38분)
대구(북위 35도 52분, 동경 128도 36분)
부산(북위 35도 06분, 동경 129동 02분)
강릉(북위 37도 45분, 동경 128도 54분)
군산(북위 35도 59분, 동경 126도 43분)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군사통제지역
신의주(북위 40도 06분, 동경 124도 24분)
청진(북위 41도 46분, 동경 129도49분)
홍남(북위 39도 50분, 동경 127도 37분)
만포(북위 41도 09분, 동경 126도 18분)
신안주(북위 39도 36분, 동경 125도 36분)
중립국시찰소조들은 첨부한 지도(지도 5)에 표시한 지역 내와 교통선에서 통행상 충분한 편리를 받는다.

3. 총 칙

44. 중립국감독위원회는 매일 회의를 연다. 중립국감독위원회는 합의하여 7일을 넘지 않는 휴회를 할 수 있다. 단, 어느 위원이든지 24시간 전의 통고로써 이 휴회를 끝낼 수 있다.
45. 중립국감독위원회의 일체 회의기록 복사본은 매번 회의 후 가급적 속히 군사정전위원회에 송부한다. 기록은 영문, 한국문 및 중국문으로 작성한다.
46. 중립국시찰소조는 그의 감독, 감시, 시찰 및 조사의 결과에 관하여 중립국감독위원회가 요구하는 정기보고를 동 위원회에 제출하며, 또 이 소조들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거나 동 위원회가 요구하는 특별보고를 제출한다. 보고는 소조 총체(總體)가 이를 제출한다. 단, 그 소조의 개별적 조원 1명 또는 수명이 이를 제출할 수 있다. 개별적 조원 1명 또는 수명이 제출한 보고는 다만 참고적 보고로 간주한다.
47. 중립국감독위원회는 중립국시찰소조가 제출한 보고의 복사본을 그가 접수한 보고에 사용된 글로써 지체없이 군사정전위원회에 송부한다. 이러한 보고는 번역 또는 심의, 결정, 수속 때문에 지체시킬 수 없다. 중립국감독위원회는 가능한 한 속히 이러한 보고를 심의 결정하며 그의 판정서를 우선 군사정전위원회에 송부한다. 중립국감독위원회의 해당 결정을 접수하기 전에는 군사정전위원회는 이러한 어떠한 보고에 대하여서도 최종적 행동을 취하지 못한다. 군사정전위원회의 어느 일방 수석위원의 요청이 있을 때에는 중립국감독위원회의 위원과 그 소조의 조원은 곧 군사정전위원회에 참석하여 제출된 어떠한 보고에 대하여서든지 설명한다.
48. 중립국감독위원회는 본 정전협정이 규정한 보고 및 회의기록의 문건철 두 벌을 보관한다. 동 위원회는 그 사건진행에 필요한 기타의 보고, 기록 등의 문건철 두 벌을 보관할 권한을 가진다. 동 위원회의 최후 해산시에는 상기 문건철을 쌍방에 각 한 벌씩 나누어준다.
49. 중립국감독위원회는 군사정전위원회에 본 정전협정의 수정 또는 증보에 대한 건의를 제출할 수 있다. 이러한 개정 건의는 일반적으로 더 유효한 정전을 보장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50. 중립국감독위원회 또는 동 위원회의 매개(每個) 위원은 군사정전위원회의 임의의 위원과 통신연락을 취할 권한을 가진다.

제3조 전쟁포로에 관한 조치

51. 본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하는 당시에 각기 일방이 수용하고 있는 전체 전쟁포로의 석방과 송환은 본 정전협정 조인 전에 쌍방이 합의한 하기 규정에 따라 집행한다.
ㄱ. 본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한 후 60일 이내에 각기 일방은 그 수용 하에 있는 송환을 견지하는 전체 전쟁포로를 포로된 당시에 그들이 속한 일방에 집단적으로 나누어 직접 송환 인도하며 어떠한 저해(沮害)도 가하지 못한다. 송환은 본 조의 각 항 관계규정에 의하여 완수한다. 이러한 인원의 송환수속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각기 일방은 정전협정 조인 전에 직접 송환될 인원을 국적별로 분류한 총수를 교환한다. 상대방에 인도되는 전쟁포로 각 집단은 국적별로 작성한 명부를 휴대하되 이에는 성명, 계급(계급이 있으면) 및 수용번호 또는 군번호를 포함한다.
ㄴ. 각기 일방은 직접 송환하지 않은 나머지 전쟁포로를 그 군사통제와 수용으로부터 석방하여 모두 중립국송환위원회에 넘겨 본 정전협정 부록 ‘중립국송환위원회 직권의 범위’의 각 조 규정에 의하여 처리하게 한다.
ㄷ. 세 가지 글을 병용하므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본 정전협정의 용어로서 일방이 전쟁포로를 상대방에 인도하는 행동을 그 전쟁포로의 국적과 거주지의 여하를 불문하고 영문 중에서는 ‘repatriation,’ 한국문 중에서는 ‘송환,’ 중국문 중에서 ‘遣返’이라고 규정한다.
52. 각기 일방은 본 정전협정의 효력발생에 의하여 석방되며 송환되는 어떠한 전쟁포로든지 한국충돌 중의 전쟁행동에 사용하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
53. 송환을 견지하는 전체 병상전쟁포로는 우선적으로 송환한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포로된 의무인원을 병상전쟁포로와 동시에 송환하여 도중에서 의료와 간호를 제공하도록 한다.
54. 본 정전협정 제51항 ㄱ목에 규정한 전체 전쟁포로의 송환은 본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한 후 60일의 기한 내에 완료한다. 이 기한 내에 각기 일방은 책임지고 그가 수용하고 있는 상기 전쟁포로의 송환을 가능한 한 속히 완료한다.
55. 판문점을 쌍방의 전쟁포로 인도인수지점으로 정한다. 필요한 때에는 전쟁포로송환위원회는 기타의 전쟁포로 인도인수지점을 비무장지대 내에 증설할 수 있다.
56. ㄱ. 전쟁포로송환위원회를 설립한다. 동 위원회는 영관급 장교 6명으로 구성하되 그 중 3명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이를 임명하며, 그 중 3명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이 공동으로 이를 임명한다. 동 위원회는 군사정전위원회의 전반적 감독과 지도 하에서 책임지고 쌍방의 전쟁포로 송환에 관계되는 구체적 계획을 조절하며, 쌍방이 본 정전협정 중의 전쟁포로 송환에 관계되는 일체 규정을 실시하는 것을 감독한다. 동 위원회의 임무는 전쟁포로들이 쌍방 전쟁포로수용소로부터 전쟁포로 인도인수지점에 도달하는 시간을 조절하며, 필요할 때에는 병상전쟁포로의 수송 및 복리에 요구되는 특별한 조치를 취하며, 본 정전협정 제57항에서 설립된 공동적십자소조의 전쟁포로송환 협조사업을 조절하며, 본 정전협정 제53항과 제54항에 규정한 전쟁포로 실제 송환조치의 실시를 감독하며, 필요할 때에는 추가로 전쟁포로 인도인수지점을 선정하여 전쟁포로 인도인수지점의 안전조치를 취하며, 전쟁포로송환에 필요한 기타 관계임무를 집행하는 것이다.
ㄴ. 전쟁포로송환위원회는 그 임무에 관계되는 어떠한 사항에 대하여 합의에 도달하지 못할 때는 이러한 사항을 즉시 군사정전위원회에 제기하여 결정하도록 한다. 전쟁포로송환위원회는 군사정전위원회 본부 부근에 그 본부를 설치한다.
ㄷ. 전쟁포로송환위원회가 전쟁포로 송환계획을 완수한 때에는 군사정전위원회가 즉시로 이를 해산시킨다.
57. ㄱ. 본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한 후 즉시로 국제연합군에 군대를 제공하고 있는 각국의 적십자 대표를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적십자 대표와 중화인민공화국 적십자 대표를 다른 일방으로 하여 조직되는 공동적십자소조를 설립한다. 공동적십자소조는 전쟁포로의 복리에 요망되는 인도주의적 복무(服務)로서 쌍방이 본 정전협정 제51항 ㄱ목에 규정한 송환을 견지하는 전체 전쟁포로의 송환에 관계되는 규정을 집행하는 것을 협조한다. 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공동적십자소조는 전쟁포로 인도인수지점에서 쌍방의 전쟁포로 인도인수사업을 협조하며, 쌍방의 전쟁포로수용소를 방문하여 위문하며, 전쟁포로의 위문과 전쟁포로의 복리를 위한 선물을 가지고 가서 분배한다. 공동적십자소조는 전쟁포로수용소에서 전쟁포로 인도인수지점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전쟁포로에게 복무를 제공할 수 있다.
ㄴ. 공동적십자소조는 다음과 같은 규정에 의하여 조직한다.
(1) 한 소조는 각기 일방의 본국 적십자사로부터 각기 대표 10명씩을 내어 쌍방 합하여 20명으로 구성하며 전쟁포로 인도인수지점에서 쌍방 전쟁포로의 인도인수를 협조한다. 동 소조의 의장은 쌍방 적십자사 대표가 매일 윤번으로 담당한다. 동 소조의 사업과 복무를 전쟁포로송환위원회가 이를 조절한다.
(2) 한 소조는 각기 일방의 본국 적십자사로부터 각기 대표 30명씩을 내어 쌍방 합하여 60명으로 구성하며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관리 하의 전쟁포로수용소를 방문하며, 또 전쟁포로수용소에서 전쟁포로 인도인수지점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전쟁포로에게 복무를 제공할 수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적십자사 또는 중화인민공화국 적십자사의 대표가 동 소조의 의장을 담당한다.
(3) 한 소조는 각기 일방의 본국 적십자사로부터 각기 대표 30명씩을 내어 쌍방 합하여 60명으로 구성하며 국제연합군 관리 하의 전쟁포로수용소를 방문하며, 또 전쟁포로수용소에서 전쟁포로 인도인수지점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전쟁포로에게 복무를 제공할 수 있다. 국제연합군에 군대를 제공하고 있는 한나라의 적십자 대표가 동 소조의 의장을 담당한다.
(4) 각 공동적십자소조의 임무집행의 편의를 위하여 정황이 필요로 할 때에는 최소 2명의 소조원으로 구성하는 분조를 설립할 수 있다. 분조 내에서 각기 일방은 동등한 수의 대표를 가진다.
(5) 각기 일방 사령관은 그의 군사통제지역 내에서 사업하는 공동적십자 소조에 운전수, 서기 및 통역과 같은 부속인원 및 각 소조가 그 임무 집행상 필요로 하는 장비를 공급한다.
(6) 어떠한 공동적십자소조든지 동 소조의 쌍방 대표가 동의하는 때에는 그 인원수를 증감할 수 있다. 단, 이는 전쟁포로송환위원의 인가를 거쳐야 한다.
ㄷ. 각기 일방 사령관은 공동적십자소조가 그의 임무를 집행하는데 충분한 협조를 주며, 또 그의 군사통제지역 내에서 책임지고 공동적십자소조 인원들의 안전을 보장한다. 각기 일방 사령관은 그의 군사통제지역 내에서 사업하는 이러한 소조에 요구되는 보급, 행정 및 통신상의 편의를 준다.
ㄹ. 공동적십자소조는 본 정전협정 제51항 ㄱ목에 규정한 송환을 견지하는 전체 전쟁포로의 송환계획이 완수되었을 때에는 즉시로 해산한다.
58. ㄱ. 각기 일방 사령관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속히, 그러나 본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한 후 10일 이내에 상대방 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은 전쟁 포로에 관한 자료를 제공한다.
(1) 제일 마지막 번에 교환한 자료의 마감한 일자 이후에 도망한 전쟁포로에 관한 완전한 자료
(2)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수용기간 중에 사망한 전쟁 포로의 성명, 국적, 계급별 및 기타의 식별자료, 또한 사망일자, 사망원인 및 매장지점에 관한 자료
ㄴ. 만일 위에 규정한 보충자료의 마감일자 이후에 도망하였거나 또는 사망한 어떠한 전쟁포로가 있으면 그를 수용한 일방은 본 조 제58항 ㄱ목의 규정에 의하여 관계자료를 전쟁포로송환위원회를 거쳐 상대방에 제공한다. 이러한 자료는 전쟁포로 인도인수계획을 완수할 때까지 10일에 1차씩 제공한다.
ㄷ. 전쟁포로 인도인수계획을 완수한 후에 본래 수용하고 있던 일방에 다시 돌아온 어떠한 도망 전쟁포로도 이를 군사정전위원회에 넘기어 처리한다.
59. ㄱ. 본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하는 당시에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지역에 있는 자로서 1950년 6월 24일에 본 정전협정에 확정된 군사분계선 이북에 거주한 전체 사민에 대하여서는 그들이 귀향하기를 원한다면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은 그들이 군사분계선 이북지역에 돌아가는 것을 허용하며 협조한다.
본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하는 당시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의 군사통제지역에 있는 자로서 1950년 6월 24일에 본 정전협정에 확정된 군사분계선 이남에 거주한 전체 사민에 대하여서는 그들이 귀향하기를 원한다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은 그들이 군사분계선 이남지역에 돌아가는 것을 허용하며 협조한다. 각기 일방 사령관은 책임지고 본 규정의 내용을 그의 군사통제지역에 광범히 선포하며, 또 적당한 민정당국을 시켜 귀향하기를 원하는 이러한 전체 사민에게 필요한 지도와 협조를 주도록 한다.
ㄴ. 본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하는 당시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은 군사통제지역에 있는 전체 외국적의 사민 중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지역으로 가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그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지역으로 가는 것을 허용하며 협조한다. 본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하는 당시에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지역에 있는 전체 외국적의 사민 중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의 군사통제지역으로 가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그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의 군사통제지역으로 가는 것을 허용하며 협조한다. 각기 일방 사령관은 책임지고 본 규정의 내용을 그의 군사통제지역에 광범히 선포하며, 또 적당한 민정당국을 시켜 상대방 사령관의 군사통제지역으로 가기를 원하는 이러한 전체 외국적의 사민에게 필요한 지도와 협조를 주도록 한다.
ㄷ. 쌍방의 본 조 제59항 ㄱ목에 규정한 사민의 귀향과 본 조 59항 ㄴ목에 규정한 사민의 이동을 협조하는 조치는 본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한 후 될 수 있는 한 속히 개시한다.
ㄹ. (1) 실향사민귀향협조위원회를 설립한다. 동 위원회는 영관급 장교 4명으로 구성하되 그 중 2명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이를 임명하며, 그 중 2명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이 공동으로 이를 임명한다. 동 위원회는 군사정전위원회의 전반적 감독과 지도 밑에 책임지고 상기 사민의 귀향을 협조하는데 관계되는 쌍방의 구체적 계획을 조절하며, 또 상기 사민의 귀향에 관계되는 본 정전협정 중의 일체 규정을 쌍방이 집행하는 것을 감독한다. 동 위원회의 임무는 운수조치를 포함한 필요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상기 사민의 이동 을 촉진 및 조절하며, 상기 사민이 군사분계선을 통과하는 월경지점을 선정하며, 월경지점의 안전조치를 취하며, 또 상기 사민의 귀향을 완료하기 위하여 필요한 기타 임무를 집행하는 것이다.
(2) 실향사민귀향협조위원회는 그의 임무에 관계되는 어떠한 사항이든지 합의에 도달할 수 없을 때에는 이를 곧 군사정전위원회에 제출하여 결정하게 한다. 실향사민귀향협조위원회는 본부를 군사정전위원회의 본부 부근에 설치한다.
(3) 실향사민귀향협조위원회가 그의 임무를 완수할 때에는 군사정전위원회가 즉시로 이를 해산시킨다.

제4조 쌍방 관계정부들에의 건의

60.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쌍방 군사령관은 쌍방의 관계 각국 정부에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3개월 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급 높은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이에 건의한다.

제5조 부 칙

61. 본 정전협정에 대한 수정과 증보는 반드시 적대 쌍방 사령관들이 상호 합의를 거쳐야 한다.
62. 본 정전협정의 각 조항은 쌍방이 공동으로 접수하는 수정 및 증보 또는 쌍방의 정치적 수준에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적당한 협정 중의 규정에 의하여 명확히 교체될 때까지 계속 효력을 가진다.
63. 제12항을 제외한 본 정전협정의 일체 규정은 1953년 7월 27일 22:00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1953년 7월 27일 10:00시에 한국 판문점에서 영문, 한국문 및 중국문으로써 작성한다. 이 3개 국어에 의한 각 협정의 본문은 동등한 효력을 가진다.

유엔군 총사령관 미 육군대장, 마크 W. 클라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

◆ 페리보고서(Review of United States Policy Toward North Korea: Findings and Recommendations)

윌리암 페리(William J. Perry) 전 국방장관이 이끄는 “북한정책 검토팀”(이하 검토팀)은 웬디 셔먼(Wendy R. Sherman) 국무부 자문대사의 관계부처 그룹과 함께 대통령과 국가안보위원들로부터 1998년 11월 북한에 대한 정책을 광범위하게 검토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검토작업은 약 8개월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미 행정부 고위인사들과 하버드 대학의 애쉬톤 카터(Ashton B. Carter) 박사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또한 검토팀은 국무장관, 국방장관, 안보보좌관 및 고위 정책자문관들로부터 정기적으로 광범위한 지침을 받았다.
검토팀은 미 정부 내외의 전문가들과 계속 협의하여 왔다. 페리조정관은 특히 대의회 정례보고를 시행하였으며 이 가운데 의원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검토팀은 또한 한국, 일본 등 동맹국들을 포함 ,동북아 이해당사국들과 의견을 나누었다. 검토팀은 이외에도 인도적 구호활동 요원들과 만나 여러 가지 자료를 받을 수 있었으며, 개인 및 단체들과도 접촉하였다. 클린턴 대통령의 특사자격으로 페리조정관은 검토팀을 이끌고 지난 5월 방북, 북한정부의 견해를 직접 파악할 수 있었다.
검토팀의 작업결과와 건의를 아래와 같이 요약하였다.

근본적인 정책검토 필요성

검토팀은 1994년 위기이후 한반도 안보상황이 크게 변화하였으며 이에 따라 미국의 대북정책을 근본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대북정책 검토의 핵심사항은 북한의 핵 및 장거리 미사일 개발 활동이다.
1994년 제네바합의가 북한의 플루토늄 생산을 동결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북한은 1994년 이전에 은닉해 놓았을지도 모르는 소량의 핵분열 물질만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제네바합의가 없었다면 상당수의 핵무기를 제조하는데 충분한 플루토늄을 생산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네바합의에 따른 영변 핵시설에서의 플루토늄 생산 동결에도 불구하고, 검토팀은 북한의 핵무기 관련 활동이 계속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갖고 있다. 이러한 우려는 금창리 시설에 대한 접근과 방문으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1994년이래 북한은 미사일 시험, 배치 및 수출을 계속해 왔으며, 이들의 사정거리가 계속 늘어남에 따라 일부는 잠재적으로 미국 영토에 도달할 능력까지 보유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중요한 변화가 많이 있었다. 1994년 여름 제네바합의에 대한 협상이 개시된 이후 김정일 장군이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정식으로 정권을 물려받고 통치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즉, 북한의 현 지도부는 제네바합의 당시의 지도부와는 다르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동 기간 중에 북한의 경제는 산업 및 식량 생산이 1994년 수준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등 심각히 약화되었다. 그 결과 북한주민들이 겪는 비극적인 상황은 미국민들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한편 북한정권의 행태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편, 한국정부도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변화를 맞게 되었다. 즉 김대통령이 대북 포용정책을 추진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지도자로서, 우리의 동맹국이며 또한 미군 37,000명이 주둔하고 있는 국가의 대통령으로서, 김대통령의 의견과 통찰은 한반도에서의 미 안보목표를 달성하는데 중심적인 요소라 하겠다. 어떠한 미국의 정책도 한국정부의 정책과 조율되지 않는다면 성공할 수 없다. 오늘날 한국의 대북 포용정책은 우리에게 1994년 당시와는 크게 다른 상황과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 다른 우리의 동맹인 일본의 북한에 대한 우려가 증대되고 있다. 1998년 8월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일본 영토 위로 발사한 이래 일본의 우려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일본 의회가 제네바합의에 따라 KEDO가 건설 중인 경수로 분담금안을 통과시키고 일 정부 역시 제네바합의 유지를 희망하고 있으나, 북한이 미사일을 재발사할 경우 국내적으로 제네바합의에 대한 정치적 지지 획득과 안보정책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국과 중국은 역내 안보정책과 관련 종종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으나, 클린턴‧장쩌민 정상회담 등 미‧중 양자간의 광범위한 대화를 통해 중국 역시 북한의 핵무기 및 미사일 활동이 역내 및 세계안보를 해친다는 미국측 우려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고 있음을 검토팀은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제반요소들이 결합되어 1994년 당시와는 판이하게 다른 상황을 낳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검토팀은 대북정책을 전면 검토해야 한다는 클린턴 대통령의 판단에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검토팀은 북한을 다루는 분명한 방도가 마련되어야 하며 행정부와 의회간의 보다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는 의원들의 우려를 이해하고 이에 부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한반도 안보상황에 대한 평가

검토팀은 1994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미군과 역내 동맹국들이 강력한 안보태세를 갖추고 있다는데 미군 고위관계자들 및 동맹국들과 의견을 같이하였다. 1994년이래 미국은 미군과 동맹국들과의 연합군 전력을 강화해 오고 있다. 검토팀은 연합군이 한국을 방어할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북한의 군부 지도자들도 이를 잘 알고 있으므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쿠웨이트-이라크에서의 사막의 폭풍작전과는 달리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인구밀집지역에서 벌어진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백만대군이 휴전선 인접지역에 배치되어 있음을 감안할 때 제2의 한국전은 1950~53년 한국전쟁이래 미국이 직면할 최대의 전쟁이 될 것이다. 수십만의 미국, 한국 그리고 북한의 군인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을 것이며 수백만의 난민이 발생할 것이다. 미국과 한국은 전쟁을 일으킬 의도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에는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도 전쟁의 파괴력이 미국과 동맹국들에 대한 강력한 억지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현 상황 하에서 한반도에서의 전쟁억지는 군사적 측면에서 남‧북한 양쪽 공히 안정적이라 하겠다. 비록 고립에 처한 북한정권의 오판 가능성이 있기는 하나 북한도 무력충돌의 결과가 재난 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안정이 흔들림 없이 유지된다면 한국전쟁을 종결하며 궁극적으로 한국민의 평화적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항구적 평화를 모색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이 제공될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항구적인 정책목표이다.
그러나 ,북한이 핵무기 또는 장거리 미사일, 특히 양자를 모두 획득할 경우(핵탄두 탑재 장거리 미사일) 이러한 안정은 위태로워질 것이다. 북한이 핵 및 미사일을 획득할 경우 억지력 약화는 물론 억지 실패시 초래될 피해를 증폭시킬 것이다. 대량파괴무기는 긴장완화, 관계개선, 그리고 항구적 평화수립을 위한 여건들을 손상시킬 것이다. 북한의 대량파괴무기 획득은 역내 군비 경쟁을 촉발할 것이며 국제 비확산 체제에도 심대한 손상을 입힐 것이다. 또한, 북한이 경화획득을 위해 미사일 수출을 계속 할 경우 중동 등 여타지역에서의 불안을 야기할 것이다.
미국의 대북정책의 시급한 초점은 북한의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관련 활동을 종식시키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입장은 한반도 안보문제 등 여타문제를 등한시하고 비확산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대량파괴무기를 통제하는 것이 보다 폭 넓은 형태의 역내 안보 추구에 긴요하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북한의 대량파괴무기 활동을 종식함에 있어 미국의 대북정책은 아래 세 가지 제약요소의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첫째, 여러 문제점에 직면해 있는 북한이 결국은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논리상으로는 가능하겠으나, 그러한 변화가 임박했다는 증거는 없다. 정책 입안자들은 이와 같은 희망적 관측을 버리고 현재의 북한 모습 그대로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둘째, 전쟁발발시 37,000여명의 주한미군과 증강군, 남북한 주민, 역내 동맹국들과 우방국들이 직면할 가공할 위험을 감안할 때, 미국은 목표를 신중하게 그리고 인내심을 갖고 추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셋째, 비록 미국, 한국, 일본, 그리고 북한 내에도 제네바합의에 대한 비판이 존재하나 제네바합의는 영변 핵시설에서의 플루토늄 생산에 대한 동결과 검증을 가능하게 했고 또한 미국이 플루토늄 생산시설로 설계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던 금창리 지하시설 관련 북한과의 논의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북한으로서는 영변 핵시설 동결을 해제하는 것이야말로 핵무기 보유의 가장 확실한 지름길이다. 미국의 안보목표를 감안할 때 우리는 제네바합의를 약화시키거나 대체해서는 안되며 보완해야 할 것이다.

역내 국가들의 관점

검토팀은 미행정부외의 인사들과 심도있는 협의를 하였으며, 그들의 관점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들의 관점을 아래와 같다.
한국. 한국의 이해관계가 미국의 이해관계와 동일한 것은 아니나 상당 부분 일치한다. 한국이 미국과 같은 세계적 국가는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 비확산 노력에 덜 적극적이나, 한국은 북한의 핵무기가 한반도에서의 억지력을 저해할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 또한 한국인들은 오랜동안 북한의 스커드 미사일의 사정거리 내에서 살아왔지만, 북한의 새로운 장거리 미사일이 미국과 일본에 대해 새로운 형태의 위협이 되고 있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에 대해 미국과 동일한 목표를 갖고 있다. 한국은 한국전쟁으로 생겨난 이산가족의 재회와 남북기본합의서(남북공동위원회 재가동 포함) 이행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미국은 이를 강력히 지지하고 있다.
“포용정책”으로 알려진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북한에 대한 근본적인 정책전환을 의미한다. 김대통령의 구상 하에서, 한국은 북한을 약화시키거나 흡수하려는 어떠한 의도도 포기하고, 공식적‧비공식적 남북접촉 증진을 추구하고 있다. 또한, 한국은 제네바합의와 KEDO에서의 한국의 역할을 지지하나, 한국 국회는 우리 의회와 마찬가지로 KEDO에의 자금공여를 검토함에 있어 북한의 행태를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다.
일본. 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이해관계도 미국의 이해관계와 동일하지 않으나 상당히 일치된다. 1998년 8월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는 일본의 북한문제에 관한 우선 순위를 급격히 높여 놓았다. 일본인들은 북한의 미사일 관련 움직임을 직접적인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다. 일본과의 양자협의시 북한 대표들은 금세기 초에 있었던 일본의 한국 점령을 계속해서 언급함으로써 역사적 감정을 악화시켰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KEDO에 대한 일본의 지원문제가 일본 의회에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제네바합의 파기는 북한 미사일에 핵탄두를 탑재하게 하여 위협을 급격히 증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지만, 북한의 추가적인 미사일 발사가 있을 경우 제네바합의 유지를 위한 일 정부의 능력이 확실치 않게 될 것이다. 일본은 또한 북한의 소행으로 의심되는 일본인 실종자들에 대해 깊은 우려를 갖고 있다. 미국은 일본의 입장을 지지한다.
중국. 중국은 한반도에서의 평화와 안정에 커다란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며 한반도 긴장고조가 가져올 여파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 중국은 또한 북한의 미사일이 중국이 원하지 않는 미국의 국가 미사일 방위(NMD)와 전역 미사일 방위(TMD) 계획의 중요한 촉매역할을 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중국은 북한의 핵무기가 역내 군비경쟁을 야기하고, 핵 보유국 입장에서 계속 유지해 나가기를 원하는 비확산 체제를 저해할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인해 중국은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계획에 대한 우려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미국의 우려와 상당부분 일치된다. 중국은 미국, 한국, 일본과 자국의 정책을 조율하지는 않을 것이나, 중국 자신의 이해관계에 의해 북한이 핵 및 미사일 개발계획을 포기토록 그들의 대화채널을 활용할 것이다.
북한. 세계 각지의 정보기관과 전문가들과의 집중적인 협의, 최근 북한의 행태에 관한 검토 그리고 페리조정관의 북한 지도자와의 협의 결과 등에 기초하여, 검토팀은 이 수수께끼 같은 나라에 대한 몇 가지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면에 있어서 아직도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이 남아 있다. 따라서, 검토팀은 어떠한 미국의 정책도 단순히 북한에 대한 인식과 북한의 미래의 행위에 관한 추측에만 근거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많은 취약점을 느끼고 있는 북한정권은 모든 수사(修辭)와 정책의 기조로서 자급자족, 주권, 자주국방 등을 증진시키기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다. 북한은 외부세력이 민주주의와 경제개혁을 고무하는 것을 체제 위협기도로 보고 있다. 북한은 외국의 영향과 접촉을 강력히 통제하고 있으며, 심지어 심각한 경제문제에 대한 구호를 요청하는 경우에도 그러하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증진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미국이 오랜 동안 부과해온 경제제재의 해제를 중시하고 있다.

주요 작업 결과

검토팀은 권고사항의 기본이 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주요한 사항을 발견하였다.
1. 북한의 핵무기 획득, 장거리 미사일의 지속적인 개발, 시험, 배치 그리고 수출은 장기적으로 한반도에서 냉전을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를 수립하기 위한 전제조건인 한반도에서의 억지력의 안정을 저해할 것이다. 이러한 북한의 행위는 미국의 주요한 이해관계에 역행하는 심각한 지역적‧세계적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미국은 이러한 행위의 종식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2. 미국과 동맹국들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재발시 신속하고 확실하게 승리할 것이나, 생명과 재산상의 피해는 최근 미국이 경험한 어떠한 경우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억지력을 약화시키거나 북한의 오판 가능성을 증대시킬 수 있는 조치를 피하면서, 북한의 핵무기 및 미사일과 관련된 목표를 계속 추구해 나가야 한다.
3. 만약 미국이 북한과의 협력을 통해 핵무기와 미사일 관련활동을 종식시킴으로써 안정이 유지될 수 있다면,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정상화를 준비해야 하며, 한국의 대북 포용정책 및 평화공존 정책과 공동보조를 취해야 한다.
4. 영변 핵시설의 동결 해제는 북한이 핵무기를 획득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다. 따라서 제네바합의는 미국과 동맹국들에 의해 유지되어야 하며 이행되어야 한다. 제네바합의가 있음으로써 북한의 영변에서의 플루토늄 생산능력이 동결되고 검증이 가능하게 되었다. 제네바합의가 없었다면, 북한은 매년 상당수의 핵무기를 제조하는데 충분한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네바합의가 모든 핵무기 관련활동을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완전히 동결한 것은 아니며 미사일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나 이러한 제네바합의의 한계에 대하여는 이를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것보다 보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5. 한국과 일본이 적극 지지하고 협력하지 않는 한 미국의 어떠한 대북정책도 성공할 수 없다. 3개국의 이해가 동일하지는 않지만 주요부분에 있어서 일치하기 때문에 3국간 조정이 가능하다.
6. 북한이 처한 상황, 고립, 의구심 그리고 협상스타일에 따른 위험성을 고려할 때, 미국의 정책은 북한의 도발에 직면하더라도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이러한 정책은 현 행정부의 임기 이후에도 앞으로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과 정책의 계속적인 이행을 위해서는 의회의 광범위한 지지와 계속적인 관여가 필수적이다.

검토되었으나 폐기된 대안들

검토과정에서 검토팀은 북한에 의해 야기된 안보문제와 관련하여 여러 전략적 대안 등 가치 있는 많은 조언을 받았다. 검토팀은 아래와 같은 주요 대안들을 검토하였으나 채택하지는 않았다.
현상 유지(Status Quo). 많은 정책전문가들이 지난 10년간 미국이 북한에 대해 취해 왔던 접근방법을 계속 유지할 것을 권고했다. 이는 군사적 준비태세와 공고한 동맹관계를 통해 강력한 억지력을 유지하면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사일 문제, 미군유해 문제와 제네바합의 이행을 위해 북한과 제한된 관계만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들은 영변에서 제네바합의가 준수되고 있는 한 북한이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핵분열 물질을 추가로 획득하는데 앞으로 수년이 걸릴 것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 이들은, 핵무기가 없다면 북한의 미사일 계획은 현재의 미‧북미사일 회담에서 충분히 다뤄질 수 있다고 본다. 이 논지를 따르면, 미국은 북한 위협 수준에 따라 적절히 대응함으로써 핵심적인 안보목표를 추구할 수 있으므로 미국의 정책 변화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이 정책이 미국의 안보 이해에 부합되었다는 점에서 현상유지 접근방법에 장점이 있기는 하나, 검토팀은 현상유지 정책을 채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미국의 안보 이해의 관점에서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정책이 계속 유지될 수 없음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정책은 미국의 우려를 올바르게 해소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현상유지 상태가 위기로 급격히 발전되는 상황도 쉽게 상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는, 이것이 위성을 궤도에 올리기 위한 것이건 아니건 간에 미국,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도 제네바합의에 대한 정치적 지지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북한이 제네바합의 이행을 중단하고, 영변 핵시설 동결을 해제하면 한반도는 1994년 여름과 같은 핵위기로 빠져들게 된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현상유지 전략이 갖고 있는 불안정성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미국은 비록 원한다할지라도 현상유지 정책을 지속할 수 없을지 모른다.
북한 약화(Undermining the DPRK). 일부 인사들은 북한을 약화시켜, 김정일정권의 종말을 촉진하는 정책을 권고한다. 검토팀은 이 대안에 대해서 면밀히 검토하였으나 결국 몇 가지 이유로 채택하지 않았다. 북한정권이 북한사회에 가하고 있는 엄격한 통제와 정권에 대한 내부에서의 조직적 저항이 없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전략은 잘된다 하더라도 실현하는데 오랜 시간을 요하게 된다. 따라서 이 전략이 갖고 있는 시간적 요소는 북한 핵문제와 미사일 문제의 시급성에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 더욱이 이 전략은 파괴적인 전쟁의 위험을 안고 있어 역내 동맹국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압박정책은 북한정권보다는 북한 주민에게 더 피해를 입히게 될 것이다.
북한 개혁(Reforming the DPRK). 많은 분석가들은 미국이 북한으로 하여금 민주주의와 시장개혁의 도래를 앞당김으로써 북한 주민의 복지를 증진시키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국제사회에 통합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토록 국제적인 관행에 따라 개혁을 가속화하도록 촉진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아무리 우리가 그런 결과를 희망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북한 개혁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협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정권이 그러한 개혁에 강력히 저항할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북한은 이러한 개혁전략을 북한 약화전략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북한 개혁정책은 북한 약화정책과 마찬가지로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 계획을 추진하는데 소요되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소요하게 될 것이다.
“매수”에 의한 목표달성(“Buying” Our Objectives). 북한은 현재와 같은 산업 및 농업의 쇠퇴상황 하에서 때때로 미국이 핵무기와 미사일 수출에 대해 갖고 있는 우려를 경화와 “교환”할 용의가 있음을 시사해 왔다. 예컨대, 북한은 미사일 수출 중단시 발생하는 소득의 손실을 미국이 보상해 주면 미사일 수출을 중단할 수 있음을 제의해 왔다. 검토팀은 안보와 물질적 보상을 맞바꾸는 이러한 정책은 북한으로 하여금 계속 공갈협박전술을 구사토록 고무시킬 뿐 아니라, 전세계의 여타 대량살상무기 확산 국가들에 대해서도 그러한 전술을 사용토록 고무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전략은 미국 행정부의 예산권을 가지고 있는 의회의 지지를 받을 수도 없고 또 받아서도 안된다.

포괄적이고 통합된 접근: 이중 접근전략

대북정책 검토 결과 권고하고자 하는 보다 나은 접근방법은 북한의 핵무기 및 미사일과 관련된 우리의 주요 관심사에 초점을 두는 이중 접근전략이다. 우리의 이러한 접근전략은 한국 및 일본측과 긴밀히 협의하였으며 양국의 지지를 받고 있다. 사실, 이러한 접근방법은 관련 3개국이 동일한 목표 추구를 위해 상호 조율 및 상호 보완된 역할을 수행하는 공동전략이다. 이중 접근방법은 모두 우리의 안보이익을 수호하는데 목표가 있다. 첫 번째 접근방식은 미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 그리고 검토팀이 생각하기에는 북한도 선호하는 방식이다.
첫 번째 방식은 북한과의 협상에 있어서 새롭고, 포괄적이며 통합된 접근방식을 지향하는 것이다. 우리는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 않다는 완전하고 검증할 수 있는 보장을 추구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MTCR의 기준을 넘어서는 북한 미사일의 시험, 생산, 배치와 그러한 미사일 및 관련기술과 장비 수출의 전면 중단을 추구할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 및 장거리 미사일 계획의 완전한 중단을 위한 협상을 통하여, 우리는 한반도의 안정적인 안보상황을 확보하면서, 장기적으로 동아시아에 있어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평화를 확보하고 냉전을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접근방법을 취해 나가는 과정에서 미국과 동맹국들은 단계적이고 상호적인 방법으로 북한이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는 대북 압력을 완화하여 나갈 것이다. 북한이 느끼고 있는 위협을 감소시킴으로써 북한은 한‧미‧일과의 평화공존 및 북한의 경제‧사회 발전 추진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만약, 북한이 핵 및 장거리 미사일 위협을 제거한다면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대북 무역제재를 완화하며, 북한에 기회를 부여하는 여타 긍정적인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다.
만약 북한이 이러한 접근방법에 호응한다면 한국과 일본정부도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상호 조율된 개별적 조치를 취할 것임을 시사하였다.
이러한 북한과의 광범위한 협상을 위해서는 각측이 회담의 성공을 위한 긍정적인 환경을 조성하는데 기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이 취할 가장 중요한 조치는 우리가 첫 번째 방안을 추진하는 동안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자제할 것이라는 보장을 주는 것이다. 북한의 미사일 시험 중지를 배경으로, 대북정책 검토팀은 대통령 명령 형식의 대북 무역금수 조치를 필요시 철회할 수 있는 방식으로 완화토록 건의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한국과 일본 또한 긍정적인 조치를 취할 용의를 시사하였다.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이 대통령 특사자격으로 인솔한 검토팀은 지나 5월 방북하여 북한 관리들과 논의를 가졌으며, 북한의 견해를 청취하였다. 우리들은 또한 포괄적이고 통합된 협상을 위한 환경을 조성시킬 초기 조치들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카트만 대사와 북한 김계관 부상의 지난 9월 베를린 회담 결과, 미국은 북한이 미‧북관계 개선을 위한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노동‧대포동 미사일을 포함한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를 중단할 것으로 이해하고 기대하게 되었다. 추후 북한은 양국간 회담이 지속되는 동안 미사일 시험발사를 중단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미 행정부는 제재완화 조치를 취하였다. 금년 가을 북한의 고위관리가 페리 방북에 대한 답방으로서 미‧북관계 개선에 대한 협의를 위해 워싱턴을 방문할 것으로 보인다. 미‧북 양측은 첫 번째 접근방식에 따라 적극적이고 의미 있는 조치들을 취하였다. 이것은 단지 초기단계의 조치이고 미‧북 양측 공히 동 조치를 용이하게 철회할 수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동 조치가 한반도의 위협 감소를 위한 장기적이고 중요한 과정의 시작이 되기를 기대한다.
동 검토에 따라 마련된 첫 번째 접근방식을 미국의 안보와 동북아 안정에 긴요하며 최근 몇 주간 취해진 조치들이 큰 기대를 주고 있지만, 첫 번째 접근방식의 성공여부는 북한의 협력의지 여하에 달려 있다. 검토팀으로서는 북한의 호응을 희망하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논의과정에 비추어 볼 때 아직 확신할 수는 없다. 따라서, 동맹국들과의 협의와 이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두 번째 접근방식을 준비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두 번째 접근방식이란 우리가 협상을 통해 제거할 수 없는 위협을 봉쇄하는 것이다. 상기 두 가지 접근방식을 모두 포괄함으로써 우리의 접근방식의 성공은 북한의 의도와 행동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고 또한 북한 내부 체제의 변화에도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된다.
만약 북한이 첫 번째 접근방식을 거부한다면 미국으로서는 북한과의 새로운 관계를 추구할 수 없게 된다. 이 경우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위협을 봉쇄하기 위한 다른 조치를 취해야 한다. 미국과 동맹국들은 제네바합의를 유지하고 가능한 한 직접적 충돌을 피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미국과 동맹국들은 단호하고 절제된 조치를 취함으로써 북한으로 하여금 첫 번째 접근방식으로 돌아와 역내 안보상황을 위협하지 않도록 설득해야 한다.
우리가 건의하는 전략은 미‧북간 직접협상의 범주를 넘어서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문제들에는 한국의 이산가족 재회, 남북기본합의서 이행(남‧북 공동위원회 재가동 포함) 및 일본인 납치 문제와 또한 마약 밀매와 같은 주요관심사들이 있다. 그러나, 검토팀은 미‧북관계가 개선되어 나감에 따라 이러한 모든 문제들이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하며, 또한 다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마찬가지로 검토팀은 화학‧생물무기문제는 다자적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반도 통일과 관련하여도 많은 제안들이 제기되었으나, 통일 문제는 궁극적으로 한국민들 스스로가 결정해야 할 문제이다. 끝으로 검토팀은 주한미군이 일부라도 철수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력히 권고하였다. 주한미군의 철수는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기보다는 현재의 강력한 억제체제를 손상시킬 것이다.

이중 접근 전략의 장점

이중 접근전략은 아래와 같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
1. 동맹국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동맹국들의 지지 없이는 미국의 어떠한 정책도 성공할 수 없다. 한국의 지도층이 페리조정관과 클린턴 대통령에게 직접 언급한 바와 같이 이중 접근전략은 한국의 대북 포용정책을 기초로 하고 있다. 또한 이 정책은 일본정부가 권고한 대로, 북한의 미사일 개발 중단을 핵개발 중단과 같은 비중을 두고 노력하고 있다.
2. 미국의 협상력을 활용할 수 있다. 이중 접근전략에 따라 미국은 북한이 위협으로 느끼고 있는 정치적‧경제적 압력의 포괄적 완화를 제안할 것이다. 이 전략은 한국과 일본이 취할 용의가 있는 긍정적 조치들을 보완할 것이다. 한편 미국은 북한의 올바른 행동을 물질적으로 “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미국이 소중하게 여기는 원칙을 손상하는 동시에 더 많은 협박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3. 전쟁 억지력을 그대로 유지한다. 우리는 한반도에서의 전쟁 억지력에 대한 어떠한 변화도 권고하지 않으며, 미국은 군사적 태세를 협상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오늘날 한반도에서 억지력은 강력하다. 안정을 위협하는 것은 북한의 핵무기 및 탄도미사일 관련 활동이다. 마찬가지로 이 검토에서 권고된 사항은 미국의 TMD 사업 추진이나 한‧일 양국의 사업 기회를 제한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연계(이중 접근전략과 TMD 사업)가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권고한다.
4. 제네바합의에 기초하고 있다. 이 접근방안은 제네바합의 이상의 것을 모색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권고하는 접근방법은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의 핵 관련 일체의 활동을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전면 중단시키고자 하며 제네바합의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미사일 문제도 해결코자 한다. 이에 더하여 미국은 제네바합의에서 미‧북간 평화적 관계로의 이행을 추구한다.
5.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개발에 관한 미국 및 동맹국들의 단기적 목표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위한 장기적 목표를 같이 추구한다. 이 접근방법은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개발이 역내 안정에 미칠 단기적 위험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미국이 4자회담에서 추구하고 있는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위한 여건 조성도 함께 모색하고 있다.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이 접근방법은 핵 분야의 협력을 넘어 미‧북간 광범위한 관계개선으로 나아가려는 제네바합의의 장기적 목표실현을 모색하고 있다.
6. 특정한 북한의 행위나 의도에 의존하지 않는다. 제안된 전략은 융통성이 있으며, 북한의 행위나 행동이 도발적이거나 유화적이라는 가정을 피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본 전략은 북한의 의도나 북한 내부체제의 변화를 추구하지도 않고 여기에 그 성공여부가 달려 있지도 않다. 권고된 틀에는 적절한 비상대책이 포함되어 있다.

주요 정책 권고사항

상기한 일반적인 권고의 맥락에서, 검토팀은 아래와 같은 5가지의 주요 정책 권고사항을 제시한다.
1. 검토팀이 권고하고 동맹국들이 지지하는 대로 북한의 핵무기 및 미사일 개발에 대하여 포괄적이고 통합된 접근을 채택할 것. 구체적으로, 상호 위협감소에 기초하여 북한과의 협상을 개시할 것.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우리들은 미국과 동맹국들의 안보를 위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을 것임.
2. 북한정책 추진을 위하여 미 정부 내에 보다 강화된 메커니즘을 설치할 것. 정부 내 관계장관회의와 차관급협의회의 지침을 받는 소규모의 북한문제 고위 실무그룹을 설치할 것. 이 그룹은 대사급 고위관리가 주재하고 국무성 내에 설치하여 대북정책을 조정토록 할 것.
3. 지난 3월 구축된 한국 및 일본과의 긴밀한 협의기구를 유지할 것. 정책 검토과정에서 설치된 3자 대북정책 조정그룹(TCOG)은 한‧미‧일 3국의 고위 정부관리로 구성되어 대북정책을 관리하고 있는데, 이 그룹은 앞으로도 정기적으로 회합하여 전반적인 대북정책과 협상전략을 협의하고 이 문제에 대한 3국 정상간의 빈번한 협의를 준비토록 할 것. 미국측 수석대표는 대북정책을 조정하는 고위관리가 맡을 것.
4. 북한문제에 관하여 확고하고 초당적이며 장기적인 전망을 제시할 것. 미국 대통령은 여‧야 지도부와 의논하여 북한문제에 대한 의회와의 초당적인 협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 미국과 동맹국들의 공동 전략이 아니면 어떠한 정책도 성공할 수 없듯이, 의회의 관여와 지지가 없이는 어떠한 정책도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없을 것임.
5.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포함한 단기적 도발에 대응할 수 있는 행동계획을 승인할 것. 북한의 부정적인 행동과 관련하여 이 보고서가 제의한 대응은 한반도와 미국 및 동맹국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임. 이러한 대응은 북한에게 도발적인 행동이 중대한 대가를 수반할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어야 함. 그러나, 북한의 행동이 제네바합의를 위반하지 않는 한 미국과 동맹국들의 행동이 이 합의를 손상시키지 않아야 할 것임. 왜냐하면, 이렇게 될 경우 미국이 제네바합의를 위반한 셈이 되어 북한으로 하여금 영변시설 동결을 해제하여 1994년 여름의 위기로 되돌아가게 할 것이기 때문임.

결 어

검토팀이 권고한 접근방식은 북한에 대한 현실적 시각, 군사적 현실의 냉철한 이해와 미국과 우방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확고한 결의 등에 기초한 것이다.
우리는 포괄적 틀에 관한 우리의 제안에 대한 북한의 반응과 관련하여 북한이 여러 가지 뒤섞인 신호를 보낼 수도 있으며, 협상과정이 개시된다 하더라도 북한이 우리가 비난할 만한 행동을 할 수 있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발적인 상황에 대비하는 동시에 전반적인 틀에 부합하는 신중한 행동으로 정책 기조를 유지하여야 한다. 미국과 그 우방에 직접적 위협이 되는 어떤 형태의 도발적 행동이 있을 경우 우리가 이에 적절히 대응할 것임을 북한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북한의 도발적 행위로 인하여 미국이 현재의 지원수준을 재평가하는 것이 불가피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지난 1년 동안의 상황발전이 미‧북 관계에 있어 유일한 기회의 창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북한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한‧미‧일 3국간에 명확한 공통의 이해가 있다. 중국의 전략적 목표, 특히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발사체계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의 목표와 부합된다. 북한은 제네바합의의 이행 의지를 갖고 있고 미‧북관계 개선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요소들에 어려움은 있다. 저변에 깔린 긴장과 의혹은 간헐적인 무장충돌과 사건을 초래해 왔으며 정치적 환경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수십년 동안의 적대관계를 극복하기 위해 외교적 국면(momentum)을 마련코자 하는 노력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며 진전이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역사적으로 1999년은 한반도에 대한 중요한 미국의 안보문제를 다루는 최상의 기회의 하나로 자리 매김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