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정전체제와 유엔사위상 이시우 2004/11/26 218
한반도정전체제와 유엔사위상-송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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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정전체제와 UNC 위상
이 상 철*
목 차
Ⅰ. 서 언
Ⅱ. 한국전쟁과 UNC 창설
Ⅲ. 정전협정 체결과정
Ⅳ. 정전협정체제의 변화
Ⅴ. UNC의 기능과 위상
Ⅵ. 결 론
Ⅰ. 서 언
세계적 차원에서의 냉전질서가 종식된 지 10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아직도 냉전의 고도로 남아 있다. 지난 「국민의 정부」에서는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대북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현 「참여정부」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제1의 국정과제로 설정하여 추진하고 있다.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의미는 한반도에서 적대․대결관계를 종식하고 실질적인 평화상태를 정착시켜 현존하는 정전협정체제를 평화협정체제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한국전쟁이라는 냉전의 산물로서 출현한 한반도 정전체제는 지난 반세기 동안 전쟁 재발을 억제하기도 하였으나 빈번한 북한의 대남 무력도발을 억제하지는 못한, 즉 전쟁상태도 아니고 진정한 평화상태도 아닌 불안정하고 이중적인 안보상황을 지속시켜 왔다. 이렇게 한반도의 역사적 특수성에서 출현하고 지속해온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문제는 매우 복잡하고 난해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즉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장기간 동안 비정상적으로 존재해온 한반도 정전체제는 남북관계를 규율해왔을 뿐만 아니라 UNC의 존재, 한국군 작전통제권, 한미동맹관계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 논고에서는 한반도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모색하기 위한 선행작업으로서 한국정전협정의 체결과정과 변화과정을 고찰하고 정전협정을 유지․관리하고 있는 UNC의 존재와 그 위상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Ⅱ. 한국전쟁과 UNC 창설
UNC는 한국전쟁 중에는 북한의 남침을 격퇴하였으며, 정전협정 체결 이후부터는 정전체제의 유지․관리에 있어서 제도적․실질적 차원에서 정치․군사적 역할과 기능을 수행해왔다. 즉, 1950년 7월 7일 UN안보리 결의(S/1588)에 의거 창설된 UNC는 UN안보리가 위임한 권한에 따라 한국전쟁을 수행하면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하였고, 정전 이후 1978년까지는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행사하는 동시에 정전협정체제를 유지하고 관리해왔다. 1978년 한미연합사(CFC) 창설 이후는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CFC사령관에게 이양하고 UNC사령관은 정전협정체제 유지․관리의 주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한반도 전쟁 억제를 보장해왔던 것이다.
국제법적 측면에서 볼 때 타국의 영토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거나 통과하려면 원칙적으로 그 군대의 소속국과 피주둔국 또는 피통과국과 체결한 조약상의 근거가 있거나, 피주둔국이나 피통과국의 승낙이나 요청이 있어야 한다. UN군이 한국에 주둔하게 된 근거는 조약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한국 정부의 요청과 이에 대한 UN안보리의 결의에 의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당시 한국은 어느 국가와도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거나 집단안전보장조약에 가입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국회의 이름으로 UN 총회에 “북한 공산군대의 불법적인 무력침략에 대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평화 애호국민을 위한 평화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제 조치를 호소”하면서 원조를 요청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불법적인 북한의 기습남침에 대해 UN안보리는 “한국 정부는 실효적 통제와 관할을 갖는 합법적으로 성립된 정부라는 1948년 12월 12일 총회의 결의를 환기하면서 …… 이 행위는 평화의 파괴를 이룬다는 것을 결정하고, (1)북한당국에게 앞으로 적대행위를 중단할 것과 38선으로 병력을 철수할 것”을 요구하면서, (2)“UN한국위원단에게 38선으로의 북한군 철수를 감시할 것과 이 결의의 집행을 안보리에 보고할 것, 그리고 (3)모든 가맹국은 이 결의의 집행에 있어서 UN에 조력하고 북한당국에 조력을 주는 것을 삼갈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S/1501)을 채택하였다.
이와 같은 UN안보리 결의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은 적대행위를 중단하지 않았으며 또 38선까지 철수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현지 UN한국위원단의 안보리 보고사항과 6월 26일 한국의 국회가 UN총회에 원조를 요청한 사실에 의해 밝혀졌다. 이에 따라 6월 27일 회합한 UN안보리에서 미국대표 오스틴(W. R. Austin) 대사는 “미국 대통령은 6월 25일 결의안 제3항의 실행을 위해 해․공군에게 남한군대를 지원할 것을 명령했고, 제7함대에게 대만에 대한 어떤 공격도 방지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린 바 있다”고 보고하고, “국제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엄격한 제재를 환기시키는 것은 안보리의 평범한 의무”라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의안(S/1511)을 제의하고 채택하였다.
UN안보리는 “한국에 대한 북한군의 무력적 공격은 평화의 파괴를 이룬다고 결정하고 즉각적인 적대행위의 중지와 북한군의 38선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한편, “UN한국위원단의 보고에 의거하여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긴급한 군사적 조치가 요구된다는 것에 주목하고, UN 가맹국이 한국 영역에서 무력적 공격을 격퇴하고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권고한다”는 결의안(S/1511)을 채택한 것이다. 이에 따라 6월 29일 UN 회원국들에게 보낸 사무총장의 원조제공 형식에 관한 요구서한에 대해 51개 회원국이 지지 의사를 보내왔다. 처칠 영국 수상은 한국 파병을 위해 해․공군의 출동을 6월 30일 통고하였고, 미군은 트루먼 대통령의 미 지상군 한국 출동 명령하에 7월 1일 부산에 입항하였다. 이어 캐나다 함대, 뉴질랜드 함대, 호주 공군, 프랑스 함대 등이 출동함으로써 16개국으로 구성된 UN군이 한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회원국의 군사적 원조를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전략적 방향과 전술적 지휘를 위한 각종 규정이 필요했다. 이에 7월 7일 제476차 UN안보리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 주도하의 한국작전에 대한 통합사령부(Unified Command)를 설치하는 공동결의안을 제출하여 결의안(S/1588)을 채택하였다. UN안보리 결의안(S/1588)은 6월 25일 S/1501호 및 6월 27일 S/1511호 결의내용을 재확인하면서, “안보리의 권고에 의거하여 군대와 기타 원조를 제공하는 모든 가맹국은 이러한 군사력 및 원조를 미국하의 통합사령부(Unified Command)하에 가용하도록 하는 것을 권고하고, 이러한 군대의 사령관을 미국이 임명하도록 요청하며, 통합사령부에 그의 재량에 따라 북한군에 대한 작전과정에서 제각기 참가국의 국기와 UN기를 사용할 권한이 부여되고, 미국에게 통합사령부에 의해 취해진 조치의 과정을 안보리에 적당한 보고를 제공할 것을 요청” 하였다.
즉 한국전쟁 기간 동안 UN 회원국들의 군사적 지원을 통합하는 기구로서 UNC를 창설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UN안보리 결의에 따라 유엔군사령부(UNC; United Nations Command)가 7월 24일 동경에서 창설되었다. 이 같은 UNC 설치에 대한 UN안보리 결의안(S/1588)은 UN안보리 결의안(S/1501) 및 결의안(S/1511)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또한 UNC는 UN의 주요기관인 안보리의 보조기관이므로 동 결의는 UN헌장 제7조 제2항 “필요하다고 인정된 보조기관은 이 헌장에 따라 설치할 수 있다”는 조항과 제29조 “안보리는 임무의 수행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보조기관을 설치할 수 있다”는 규정에 의거한 것이다.
7월 7일 UN안보리 결의에 따라 UN 사무총장은 당일 UN 주재 미 대사에게 팔레스타인에서 사용된 UN기를 수여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합참을 자신의 대행기구로 지정하였고, 이에 따라 합참의 대표로서 콜린스(Lawton J. Collins) 육군참모총장이 한국에서의 작전임무에 관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따라서 미 합참은 UN을 대신하여 한국에서의 군사작전을 계획하고 방향을 제시해 주는 핵심체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으며, UN회원국으로부터의 전투 및 지원부대의 파견 제의는 국무성, 국방성을 거쳐 합참으로 조회되었으며, 합참은 이의 적부를 심사하여 수락여부를 건의하는 절차를 거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16개국으로 구성된 UN군의 병력은 가장 많았을 때 한국군 30여만 명을 포함한 74만여 명에 달하였다.
7월 8일 트루먼 대통령은 합참의 건의에 따라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을 UN군사령관으로 공표하였고, 7월 9일 미 제8군 전방지휘소가 대구에 개설되었다. 7월 10일 정식으로 UN군사령관에 임명된 맥아더 장군은 우선 극동군사령부를 통해 UN군의 작전통제권을 행사하다가 7월 24일 정식으로 UNC를 일본 동경에 설치하였으며, 이로써 「통합사령부」 명칭을 「유엔군사령부」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인력의 제한으로 UNC의 참모는 극동군사령부 참모진이 거의 그대로 임명되었고, UN군사령관은 미 극동군사령부의 각 구성군인 제8군사령부(지상군), 극동해군사령부, 극동공군사령부를 통해 UN 지상군․해군․공군의 작전을 통제하였다. 7월 12일 워커(W. H. Walker) 제8군사령관은 “13일부로 주한 미 지상군의 작전지휘권을 행사하라”는 맥아더 UN군사령관의 구두명령을 받고, 7월 13일 동경에서 대구로 제8군사령부를 이동시켰다. 이로써 제8군사령관은 주한 미 육군사령관으로서 예하의 미 지상군 부대와 UN 지상군을 통합․지휘하였다.
전쟁 초기의 위급한 전황 속에서 UNC가 한국군을 지원하는 모든 UN군을 통합 지휘하게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7월 14일 맥아더 UN군사령관에게 “현 적대행위의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대한민국 전 육․해․공군의 지휘권(command authority)을 이양한다”는 서한을 발송하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이양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서한을 접수한 UN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7월 17일 먼저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에게 한국 지상군의 지휘권을 재이양하였으며, 해․공군도 미 극동해․공군사령관에게 이양하였다. 이때부터 한국군의 작전은 미 8군사령관이 맥아더 장군의 권위를 빌어 한국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낸 요청에 따라 수행되었다.
이로써 한국전쟁 기간중 한국군은 실질적으로 미군 지휘체계에 통합되게 되었는데, UN안보리 결의안(S/1588)에 의거 UNC사령관은 모든 지시를 UN이 아닌 미 합참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한국전쟁은 미국의 전쟁지도와 정책목표 내에서 조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1951년 7월 이후 UNC는 한편으로 전투를 치르면서 정전협상을 주도하였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UN군사령관은 군사령관 자격으로 정전협정을 체결하여 그 이후 군사분계선 이남의 정전 업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또한 한국전쟁이 정전상태에 들어가자 한․미 양국은 1954년 11월 17일 체결한 「한․미 합의의사록」에서 “UNC가 한국방위를 책임지는 동안 한국군을 UN군사령관의 작전통제 하에 둔다”고 합의함으로써 UNC는 정전 및 전쟁 억제를 통괄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Ⅲ. 정전협정 체결과정
한국전쟁에서 적대행위를 중지하기 위해 1953년 7월 27일 UN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미 육군대장, 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 팽덕회와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김일성 등 UN군 및 공산군측 사령관간에 「한국군사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국제법적으로 정전협정(휴전협정)은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군사령관 사이에 일시적인 전투행위나 적대행위를 중지하는 협정을 말한다. 즉 정전협정은 정치적 차원에서 국가간에 맺는 평화협정(평화조약,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최종적으로 전쟁을 종결시키기 이전에 한시적으로 무력행동을 중지하기 위한 순수한 군사적 조치로서 전쟁이 완전히 종결되지 않은 준전시상태의 잠정협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한시적이고 잠정적 성격의 「한국정전협정」은 50년이나 지속되어 오면서 한반도에서 전쟁 재발을 예방하고 남북한군간 군사적 충돌 등 우발상황 발생시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통해 위기를 관리해 온 유일한 국제법적 차원의 제도적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한반도 정전체제는 정전협정에 입각한 하나의 체제(regime)로서 정전에 관한 원칙과 규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로 이루어지는 지리적 규정과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로 이루어지는 운영체제가 포함된다.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 등 정전기구들은 정전협정의 이행․준수를 감시․감독함으로써 전쟁재발을 예방하며, 남북한간의 우발적 무력충돌 등 위기상황 발생시 사태의 악화나 확전으로 발전되는 것을 방지하고 사태를 대화로써 해결토록 하는 쌍방간의 의사소통채널을 마련해주는 등 위기관리 기능을 수행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정전협정은 교전 쌍방으로서 UN군측과 중국․북한의 공산군측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국제법상의 협정이자, 남북간의 군사관계를 규율하고 있는 법적․제도적 체제로서 한반도 문제가 국제문제화되는 근원이 되고 있다. 또한, 정전체제는 한미동맹관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즉 법적인 측면에서 볼 때 미국은 1950년 7월 7일 「UN안보리 결의 84(Ⅴ)」에 따라 “통합사령부”(UNC)를 창설하고 전쟁중 한국군을 비롯한 UN군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였고, 미국 자신의 판단에 따라 공산군측과 정전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지난 50년 동안 미국은 UNC를 통해 한반도에서 정전협정체제의 유지와 관련된 정치․군사적 역할을 주도해 왔던 것이다.
1950년 9월 1일 미국의 국가안보회의(NSC)는 38도선 이북 북한지역 내에서의 군사행동 및 점령방침, 소련과 중국의 개입시 대응 등을 검토한 새로운 대한정책 초안으로 「NSC 81」을 검토하였고, 이는 「NSC 81/1」로 보완되어 9월 11일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실행에 옮겨졌다. 「NSC 81/1」에서는 “UN군이 38선에 도달하기 전에 소련 및 중국 공산세력이 북한을 재점령하거나 UN군의 북한 진입을 막으려는 의도를 드러낼 정치적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하고, 이러한 소련과 중국의 불개입을 전제로 UN군은 북한으로 진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즉 북한군의 격퇴후 중국과 소련의 개입이 없을 경우에만 북진하고 군사적 승리 이후 UN 주도하에 한국문제를 해결하되, 중․소의 개입 여부에 대한 정보가 확인될 때까지 최종 결정을 유보할 것을 골자로 하는, 다시 말해 소련과 중국의 불개입을 전제로 UN군이 북한으로 진격하는 ‘조건부 북진론’을 담고 있었다.
미국은 38선을 돌파함으로써 전쟁 이전 상태의 파괴가 북한의 동맹국인 중국과 소련을 자극하여 확전으로 비화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9월 하순까지 38선에서 중지하는 북진정책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미국의 한국전 수행에 있어서 전쟁목표와 추진전략은 6월 개전부터 9월 초까지는 적을 격퇴할 충분한 공격력을 갖출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전략적 방어를 수행한다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9월 중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미국은 공산주의 침략을 격퇴하고 북한을 해방시킨다는 개념의 전략적 공세로 전환하게 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이 지휘하는 미 제10군단을 주축으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9월 28일 수도 서울이 탈환됨으로써 UN군은 38선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38선 이북에서의 작전은 북한의 무력적 공격을 격퇴한다는 6월 27일 UN결의안(S/1511)을 벗어나는 것으로, UN군이 38선 이북에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법적 근거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9월 29일 영국, 호주 등 8개국은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이 지역에서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지원을 한국에 제공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UN에 상정하였고, 필리핀 대표 로물로(C. P. Romulo)는 UN군의 38선 돌파권한은 이미 6월 27일 UN안보리 결의로 인정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튿날인 9월 30일 오스틴(W. Austin) 미 UN대사는 연설을 통해 “남북한의 분단장벽은 법적, 논리적으로 존재근거가 없는 것이다. 더욱이 북한은 무력 남침을 감행함으로써 스스로 이 선의 존재를 부인하였다. 더 이상 이러한 선을 존재시키지 말자”고 주장하였다.
10월 1일 맥아더 UN군사령관은 패퇴하는 북한군에게 항복을 요구했으나 북한이 이를 거부하자 맥아더는 미 8군사령관에게 38선 돌파준비를 명령하는 하는 한편, 동부전선의 한국군에게 38선을 넘어 북한군을 추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처럼 북한군의 패퇴 상황에 직면한 공산측은 10월 2일 UN군의 북진을 저지․지연시켜 북한군의 재편성을 도모하기 위해 소련 외상 비진스키를 통해 “한반도에서의 즉각적인 휴전과 외국군의 철수” 결의안을 UN총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10월 7일 UN정치위원회는 이를 부결시킨 대신, UN총회에서 8개국이 제안한 결의안을 「UN총회 결의 제376호(Ⅴ)」로 채택하여 UN군이 38선을 넘어 진격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UN총회가 채택한 결의안의 요지는, (1)UN은 전체 한국의 안전보장을 위한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 (2)한국에 통일되고 독립된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UN 감시하의 총선거를 실시한다. (3)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UN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을 설치하여 기존의 UN한국위원단(UNCOK)의 한국통일에 관한 업무를 승계하고 한국에 대한 구제와 부흥에 관련된 일을 담당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전 한국의 통일․독립․민주 정부의 수립이 UN의 임무”라는 결의안을 채택함으로써 UN군이 38선을 북진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이 결의에 의거 10월 7일부터 UN군은 본격적으로 38선을 넘어 북한군을 추격하기 시작하였으며, 10월 26일에는 한․중 국경선까지 진출하였다.
그런데 38선이 돌파되고 점령된 북한지역에 대한 통치문제로 한국과 미국간에 입장 차이가 발생하였다. 한국 정부는 전쟁발발 이전부터 북한지역의 도지사를 선정해 놓았으며, 국회에 북한의 선거구를 위해 100석을 공석으로 남겨 놓는 등 북한을 ‘미수복지구’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견해는 달랐다. 1950년 9월 16일 매튜즈 국무부 부차관보는 “휴전조건 확정시까지 북한 민정당국이 북한지역에서의 법과 치안유지에 책임을 진다”는 비망록을 작성한 바 있으며, 9월 20일 에머슨 국무부 한국담당관은 “북한지역의 점령은 UN군사령관이 한국정부와 협의하여 시행하되, 방침 결정시까지는 UN의 감독하에 북한의 법과 치안을 유지한다”는 종전계획을 작성한 바 있었다. 10월 2일 에머슨이 작성한 미국의 북한점령 정책은 “UN한국위원단(UNCOK) 도착시까지는 UN군사령관이 전적으로 통치권을 가지며 총선 실시 이후 한국 정부에 관할권을 인계하고 UN군은 철수한다”고 구체화하였다. 이 점령계획은 이후 육군성의 계획에 반영되고 10월 28일 대통령․국무부․국방부의 합의 의견으로 추인되어 맥아더 사령관에게 하달되었다.
10월 12일 UN임시위원회(Interim Committee)는 “대한민국 정부는 UNCOK가 감시하고 협의할 수 있었던 그러한 한국지역에 대해 실질적인 지배력을 보유하는 합법정부로서 UN이 이를 승인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한국의 행정권을 남한지역에만 해당한다고 결의하였다. 결국, 미국의 입장은 북한지역을 국가간 전쟁으로 인해 점령한 지역으로 인식하고 점령지역의 통치를 곧바로 한국 정부에 인계하지 않고 우선 UN군사령관이 군정을 수행한 다음 자유선거를 통해 한국 정부에 관할권을 넘겨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한국 정부는 북한지역을 실지회복지역으로 인식하고 한국의 통치권이 행사되어야 할 곳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의 강경한 태도에 밀려 10월 30일 UN결의를 존중하면서 선거의 자유가 보장되는 한 UN군의 군정에 협력하겠다고 공표함으로써 기존 북한에 대한 통치권 및 주권 주장의 입장에서 후퇴하였다. 결국, UN을 앞세운 미국의 북한점령 정책에 따라 북한지역에 대한 한국의 주권 주장은 제한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0월 이후 중공군이 대규모로 개입하기 시작하자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11월 5일 UN군사령부가 ‘새로운 적’을 만나기 시작했다고 발표한 바처럼,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로 전세가 역전되는 상황에 직면하자 미국은 한국전쟁에 관한 기본방침을 재검토하면서 정전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북한에서 강요된 철수를 단행하였고, 중부전선에서 쌍방간 대치상황이 전개되자 전략적 방어를 유지하면서 군사적 수단이 아닌 휴전회담 및 외교 협상을 통해 전쟁의 종결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종전정책은 공산주의 팽창을 봉쇄하여 전쟁의 확산을 막고 소련과의 핵 충돌을 방지한다는 차원에서 고려된 것이었다.
한국전쟁의 정전에 관한 미국의 입장은 11월 11일 대통령이 승인한 「NSC 실행문서 No. 390」에서 “우리는 정전을 고려하지만 UN군이 군사적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정치적인 양보를 포함하지 않는 정전을 주장해야 한다. 합참은 정전을 수락할 만한 군사적 조건을 조속히 준비할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 문서에 대해 합참은 12월 12일 국방부로 보낸 비망록에서 군사적 견지에서 합참이 열거한 조건과 맞지 않는 어떠한 정전에도 반대하며, 정전에 합의하기 이전에 북한과 중국 등 관련국들이 동의해야 한다는 견해와 함께 “UN 정전결의안의 수행은 자유․통일 한국 건설이라는 UN의 목적을 방해할 것”이란 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으로 한국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가능성을 우려한 미국과 영국은 12월 4일 정상회담을 통해 “한국전쟁의 지도정책”으로서 협상을 통해 한국전쟁의 해결을 모색하고, 한반도 통일은 평화적 수단에 의해 달성하며, 중공군의 진출은 38도선 상에서 차단한다는 것 등을 합의하였다.
한편, 1950년 12월 11일 아시아․아랍 13개국은 UN정치위원회에 한국전 종전을 위한 「정전 3인단」(Three Men Group on Cease-Fire) 설치안을 제출하였다. UN총회는 UN군의 북진과 중공군의 참전으로 확전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결의안을 준비하였고, 12월 14일 「정전 3인단」을 조직하여 한국에 있어 만족할만한 정전의 기초를 결정하고 이를 총회에 권고하도록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미 국무부는 「정전협상에 필수적인 조건에 관한 성명서」를 준비하여, 12월 15일 UN총회 의장인 이란의 엔테잠(Nasrollah. Entezam), 캐나다의 피어슨(Lester Pearson) 외무장관, 인도의 라우(Benegal N. Rau) 수석대표로 구성된 「정전 3인단」에 “UN군사령부 자격으로서 미국의 의견”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중국에 대해 한국전역에서의 군사행동 중지와 38도선을 중심으로 비무장지대를 설치하는 휴전협정을 체결하자는 「정전 3인단」의 제의에 대해 중국은 거부하였다.
이에 「정전 3인단」은 1951년 1월 13일 다음과 같은 새로운 정전 5개항을 UN총회 정치위원회에 제출하였다. (1)생명과 재산의 불필요한 파괴를 막기 위하여 즉각적인 휴전을 해야 한다. (2)휴전이 되면 공식협정이나 적대행위의 소강상황을 이용하여 평화회복 조치를 모색해야 한다. (3)통일․독립․민주국가 건설을 위한 UN총회 결의가 이행되도록 외국군의 철수와 함께 한국민이 자신들의 장래 정부와 관련하여 자유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적절한 조치를 마련한다. (4)위 항에서 언급한 조치가 완결될 때까지 행정과 평화 및 안전보장의 유지를 위해 UN의 원칙 하에 잠정협정을 체결한다. (5)휴전합의와 동시에 대만문제, 중국의 UN 대표권과 같은 극동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영국․소련․중국대표를 포함한 적절한 기구를 설치한다. 그러나 소련은 이에 반대하였고, 1월 17일 중국도 방송을 통해 반대 입장을 공표함으로써 정전 3인단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나아가 1951년 1월 중공군과 북한군은 대규모 공세를 개시함으로써 UN총회의 휴전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명백히 밝혔다. 이에 2월 1일 UN총회 60개국 정치위원회는 미국의 제안에 따라 「평화를 위한 단결」 결의에 의거 중공을 한국의 침략자로 낙인을 찍었다. 또한 동 결의 제6항에 의거한 UN총회의 요구에 따라 부과된 「집단적 조치위원회」(Collective Measures Committee)의 보고서를 토대로 5월 18일 UN총회는 중공과 북한에 대한 전쟁물자의 공급중지를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그런데 1951년 1월부터 6월 초순까지 공산군의 총공세에 대한 UN군의 반격작전으로 전황이 중부전선에서 지구전 양상을 띠는 가운데 6월까지 UN군은 대부분의 전선을 38선 이북으로 형성된 「캔사스-와이오밍선」까지 확보하게 되자 중국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하였다. 전쟁 이전의 원상회복의 조건으로 휴전을 모색하였던 중국은 1951년 4월 이후 UN이 한국전쟁의 평화적 해결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도 5월 17일 트루먼 대통령이 재가하여 확정된 「NSC 48/5」를 통해 적절한 휴전조항 아래 38선 이남에서 한국정부를 수립하는 종전정책을 수립하였는데, 이는 정치적 목표로 전 한반도에 통일․독립․민주정부를 수립하는 하는 것과 군사적 목표로 침략을 격퇴한 후 휴전협상을 통해 적대행위를 종결시킨다는 것이었다.
「NSC 48/5」에 따라 5월 31일 미 합참은 UN군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이 휴전회담에 대한 일반지침을 하달하였다. (1) 휴전에서의 주된 군사적 관심은 한국에서 적대행위의 중지, 전투의 재발방지 보장, UN군의 안전 확보에 있고, (2) 소련과 중국의 의도를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휴전을 고려함에 있어서 시간을 연장해서라도 우리가 수락할 수 있는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3) 적군 사령관과의 협상은 군사적 문제에 엄격히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51년 5월 이후 중공군의 공세는 약화되고 전세가 UN군에게 유리하게 역전되자, 6월 3일 UN 소련대표 말리크(J Malik)는 상호 38선으로의 철수를 조건으로 하는 정전협정의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평화의 가치」(the Price of Peace)라는 제목의 UN 방송을 통해 “소련인민은 한국전쟁이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으며, 그를 위한 첫 단계로 교전국은 사격을 중지하고 양측이 38도선에서 철수하기 위한 토의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휴전을 제의하였다.
이러한 한국전쟁의 정전 움직임에 대해 한국 국회는 6월 5일 “침략자 중공군의 침략행위 중지와 한반도에서의 철수, 한국의 완전 자주통일, 그리고 어떠한 정전에도 반대한다”는 정전반대 결의안을 채택하였으며, 6월 11일에는 “38도선 정전반대 국민총궐기대회를 개최하고 3천만의 총의로써 공산침략자들에게 시간과 기회를 다시 주게 되는 정전에 결사 반대한다”는 결의문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6월 25일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의 제의에 대해 동의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6월 29일 UN군사령관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에게 휴전교섭을 추진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6월 30일 UN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공산군측 사령관 앞으로 “한국에 있어서 적대행위와 모든 무력행사를 중지할 휴전을 토의하기 위한 회담을 원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그러한 회담은 UN군사령관의 신임대표로 준비하기를 원한다”는 방송을 하였다. 7월 28일자 UN군사령관의 UN총회에 대한 보고에 의하면 “1951년 6월 30일 UNC는 공산군측이 정전협상을 위한 회합을 희망한다는 통지를 한다면 통지를 받는 대로 즉시 UN군측은 대표를 파견하고 회의일자를 제안할 것이며, 회담장소로는 원산항에 정박 중인 덴마크 병원선(Justlandia)에서 회담할 것을 반복 방송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공산군측은 7월 1일 「북경방송」을 통해 북한군최고사령관 김일성과 중국지원군사령원 팽덕회 공동명의로 군사행동 중지와 평화수립회담을 수락하며, ‘38선에 있는 개성’에서 7월 7일부터 15일 사이에 그들의 대표가 UN군 대표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응답하였다. 결국, UN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공산군측의 제안에 동의함으로써 양측간 정전협상이 7월 10일 시작되었다.
그런데 공산군측에 대해 정전회담을 제의한 것은 미국이 결정한 것으로, 이는 사후에 참전국들과 협의했으나 총회의 지침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정전에 관한 미국의 권한 범위에 관해 UN의 법률고문 펠러(Abraham H. Feller)는 “미국은 UN의 새로운 결의 없이 휴전을 할 권리가 있다”고 사무총장에게 보고한 바 있다. 리(Trygve Lie) UN 사무총장은 이 문제를 검토하고, “(1) 미국은 UN총회나 안보리의 추가적인 허가나 지침 없이 정전이나 휴전협정을 체결할 권리를 갖는다. (2) 그 권리는 군사적 사항에 국한되며 정치적 분야의 협상은 안보리나 총회에 의한 절차의 결정이 요구된다. (3) 어떤 정회나 휴전도 미국의 통합사령부에 대한 권한을 부여한 안보리에 보고해야 한다. (4) 한국 내에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과 15개국으로 구성되는 워싱턴의 「16개국위원회」(Committee of 16)는 미국과 동등한 협의적 지위를 가지며 UN기관의 지위를 갖지 않는다”고 입장을 정리하였다. 이처럼 미국은 UN총회나 안보리의 특별수권 없이 휴전협정을 체결할 권한이 있다는 점을 UN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이에 따라 1951년 7월 8일 예비회담에 이어 7월 10일부터 UN군측 대표와 북한과 중국 등 공산군측 대표간에 휴전회담이 개성에서 개시되었으며, 1953년 7월 27일까지 2년간에 걸쳐 본회담 159회를 비롯하여 총 765회에 이르는 각종 회담이 개최되었다. 이로써 한국전쟁은 한편에서는 전투를 하고 또 한편에서는 회담을 진행하는 치열한 이중 전선이 형성되었다. 최초 휴전회담은 UN군측에서 조이(C. Turner Joy) 해군중장을 수석대표로 크레이그(Laurence C. Craig) 공군소장, 호지(Henry I. Hodges) 육군소장, 버크(Arleigh A. Burke) 해군소장 등 미군 대표와 한국군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이 참여하였다.
미 합참의장의 지시를 받은 리지웨이 UNC 사령관으로부터 지침을 받았던 UN군측 회담대표는 여타 15개 참전국이나 UN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았으며, 휴전회담을 반대하는 한국 정부나 한국민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UN군측 대표단에 한국군 장성을 참여시킨 한국 정부가 어떤 지침이나 결정에 있어서 실질적인 역할을 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었던 것이다. 6월 30일 한국 정부는 휴전회담에 대해, (1) 중공군의 전면철수, (2) 북한군의 무장해제, (3) 북한에 대한 모든 원조 방지, (4) 한국문제를 토의하는 국제회담에 한국대표 참가, (5) 한국의 주권 및 영토보존에 분쟁을 야기할 결정 반대 등 5개항의 입장을 발표하였다.
한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7월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이 진행되어 오던 중 11월 공산측이 일방적으로 회담을 중단하면서 군사력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데에 대한 대응방침을 강구하기 위해 미국은 「NSC 118」을 검토하였다. 휴전회담을 두고 국무부와 국방부 간의 의견대립 속에서 1951년 11월 19일 작성된 「NSC 118」은 12월 20일 「NSC 118/2」로 수정되어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는데, 휴전회담의 지연 또는 결렬시 취할 행동방책을 제시하고 있다.
쌍방간의 공방 속에서 1952년 5월까지 진행된 휴전회담에서는 군사분계선 설정, 휴전감시기구 구성, 관련국가들에 대한 권고사항 등 3가지 쟁점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전쟁포로 송환문제에 대한 쌍방간 입장차이로 그 해 10월 회담이 또 다시 결렬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휴전회담의 교착상태 속에서 1953년 1월 한국전쟁의 조기 종전을 선거공약으로 제시한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대통령이 취임하였으며, 3월 5일 스탈린(J. Stalin)이 사망하는 상황이 전개되자 조기 종전의 분위기가 다시 무르익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4월 11일 쌍방간에 쟁점사항이던 전쟁포로 송환문제와 관련하여 우선 부상포로의 교환문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 4월 20일부터 5월 3일까지 11차에 걸쳐 UN군 부상포로 684명과 공산군 부상포로 6,670명이 송환되었다.
2년여의 휴전협상 과정에서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중공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는 정전협정에 반대하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제기하였다. 1953년 5월 25일 휴전회담에서 UN군측은 송환을 거부하는 북한포로는 휴전 즉시 석방한다는 5월 13일자 제안을 철회하고, 송환을 거부하는 48,500명의 중공군 및 북한군 포로는 한국내 5개국 중립국송환위원회에 인도하고 이의 관리기간을 휴전 성립 이후 90일로 한다는 제안을 내놓았으며, 6월 8일 공산군측이 주장하는 포로교환 협정에 합의하였다.
이는 한국 정부의 반공포로의 휴전 즉시 석방원칙과 상치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한국군 대표의 휴전회담 참석을 거부하면서 중공군의 한국 영토에서 축출, 한․미 방위동맹의 체결 및 군사․경제적 원조, 한국 통일의 방해 금지 등 정전문제에 관한 입장을 재차 발표하였다. 5월 27일 한국군 수석대표 최덕신 소장은 포로교환 문제에 있어서 UN군의 제안을 철회 또는 수정되지 않는 한 휴전회담에 참석하지 않을 것임을 UN군 수석대표 해리슨(William K. Harrison) 육군중장에게 통보하였다. 특히, 6월 18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제네바협정과 인권정신에 입각하여 반공포로를 석방하니 각 경찰 관리들은 이들을 지도 보호하라”는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27,388명의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함으로써 쌍방간에 6월 8일 최종합의를 보았던 마지막 정전협정의 서명이 늦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치자 미국은 6월 25일부터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 국무부 차관보를 보내 한국 정부와 협상토록 하는 한편, 7월 11일 정치․경제․군사적 지지를 확약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각서를 한국 정부에 전달하였다. 결국 한국 정부와 로버트슨 차관보간의 협의 끝에 7월 12일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7월 14일 워싱턴에서 미국․영국․프랑스 외무장관회의를 개최하여 한국전쟁 이후 중공이 다시 침략행위를 자행한다면 평화회복을 위한 공동조치를 강구할 것이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한국 정부도 휴전을 방해하지 않을 것에 동의하였고,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한국정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국 정부는 당일 UN사무총장에게 보고하였다.
「한국정전협정」은 제1조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설치, 제2조 정화 및 정전의 구체적 조치(군비증강 금지,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시위원회의 구성․운영), 제3조 전쟁포로의 송환에 관한 조치, 제4조 쌍방 관계정부들에의 정치회담 개최에 대한 건의, 제5조 협정의 수정 등에 대한 부칙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정전협정은 정치회담을 통한 전쟁을 완전 종결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정착 이전까지의 잠정적이고 임시적인 조치로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정전협정 제60항에서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3개월 내에 각기 대표들을 파견하여 쌍방의 한급 높은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문제들을 협의할 것”이라고 규정한대로 정치적 후속회담이 추진되었다.
1953년 8월 28일 UN 총회에서는 동 협정의 이행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됨에 따라 10월 26일 UN측과 공산측 간의 판문점 예비회담을 거쳐 1954년 2월 18일 미국․영국․프랑스․소련 외상간의 베를린회담에서 한반도 평화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제네바 정치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결국 1954년 4월 26일부터 6월 15일까지 남북한 대표를 비롯한 한국전 참전 15개국 및 중국․소련 등이 참가한 「제네바 정치회담」이 개최되어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제반 문제들을 토의하였다. 그러나 「제네바 정치회담」에서는 UN의 한국에 대한 권능과 권위를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한국의 통일․독립․민주정부의 수립시까지 UN군의 주둔을 주장한 UN측 입장과 한국에서의 UN의 권능과 권위를 기본적으로 부정한 공산측이 선거전 6개월 이내 모든 외국군의 철수를 주장함으로써 회담은 결렬되었으며, 이후 후속 정치회담 없이 한반도문제는 미해결 상태로 지속되어 왔다.
Ⅳ. 정전협정체제의 변화
정전협정 체결 직후 미국은 한반도에서 휴전선을 기정사실화한 현상유지 정책을 기조로 북한의 전력증강 등 정전협정 위반사항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태도에 대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7월 31일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워싱턴회담에서 한국의 휴전은 공문화되었다고 천명하면서, 미국에게 본연의 감시임무보다는 간첩행위를 자행하고 있던 중립국감독위원회의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를 축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처럼 북한과 공산측의 공공연한 정전협정 위반사실에 대해 한국 정부의 항의가 강경해지자 UNC측은 1956년 5월 31일 군사정전위원회 제70차 본회의에서 중립국감독위원회의 한반도 외부로부터 증원되는 군사인원, 작전장비 및 무기, 탄약의 교환 및 반입을 감시․감독․조사활동을 하는 20개 중립국감독소조에 대한 기능을 중지한다는 것과 1957년 6월 21일 군사정전위원회 제75차 본회의에서 한국으로의 무기반입을 금지한 정전협정 제2조 13항 (ㄹ)목을 폐기한다는 것을 공산측에 통보하였다.
1970년대 이후 미국은 정전체제에 의한 한반도 안정을 정착시키기 위해 남북한의 긴장완화와 협상을 통한 정치적 해결에도 노력하였다. 1970년대 초 동서간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미국은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해 남북대화에 관심을 갖고 이를 한국측에 타진하면서 압력도 행사하였다. 예컨대, 포터 주한 미 대사의 남북대화에 관한 1971년 2월 18일자 워싱턴에 보낸 전문에서 “처음부터 우리의 관점을 한국 정부가 고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조용한 설득보다는 좀더 적극적인 방식이 자주 필요하며, 직접 접촉을 통한 긴장완화의 사고방식이 전달될 수 있도록 좀더 강력한 수단도 요구될 것”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또한, 남북한을 독립국가로 인정하고 평화공존 관계를 정착시켜 한반도 안정을 유지한다는 미 정부의 정책에 따라 군정위 UN군측 수석대표 로저스(Telix M. Rogers) 소장은 1971년 7월 3일 군정위 제317차 본회의에서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방안을 제기하였으며, 남북간 접촉을 유도하기 위하여 군정위 수석대표를 한국군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인끼리의 대화는 본질적으로 정치회담으로 발전하여 남북한간 접촉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정전협정이 불가침협정이나 평화협정으로 대체될 경우를 대비하여 이에 대응하는 체제를 강구해 나갔다.
UN에서 UNC 해체문제가 공식적으로 거론된 것은 1972년 7월 17일 공산측 국가들이 UN 사무총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UNC의 존재에 관해 재검토”하기 위한 토의를 요청한 것부터 시작되었다. 공산측은 1973년 9월 21일에도 “주한 외국군이 UN 깃발을 사용할 권한을 박탈하고 UNC를 해체할 것을 고려”한 UN총회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이와 같이 공산측에 의한 UNC의 법적 지위에 대한 논란에 직면하여 1973년 10월 3일 포터 미 국무부 차관은 한국정전기구의 보완을 언급함으로써 UNC 해체문제를 고려하고 있음을 시사하였고, 12월 6일 키신저 국무부장관은 “정전협정을 대신할 대안에 대해 토의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3년 10월 제28차 UN총회에서는 대한민국과 UN을 연결시켜 주는 유일한 기구인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의 해체를 결정하였다. 또한 장차 UNC의 해체에 대비하여 1974년 8월 주한 UNC․주한미군사령부․미8군사령부를 통합하여 사실상 단일기능의 체제로 정비하였다. 그리고 1975년 6월 27일 미국은 제30차 UN총회를 앞두고 정전협정이 계속 유효하다고 관계당사국들이 동의한다면 1976년 1월 1일자로 UNC를 해체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한국 정부와 협의하는 과정에서 1975년 11월 1일자로 앞당겨 UNC를 해체할 수 있다고 제의하였고, 8월 16일부터 9월 9일까지 주한미군 시설내에서 UN기 게양을 일시 중지하였다. 그러나 1978년 7월 27일 제11차 SCM 공동성명을 통해 한국전 관계당사국들로 하여금 정전체제를 유지하도록 하는 효과적인 대안이 없는 한 UNC를 평화유지기구로서 계속 유지한다고 합의하였다.
한편, 1970년대 중반부터 북한은 UNC 해체를 노골적으로 기도해 왔다. 월남의 공산화에 고무된 북한은 미․북간의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1975년 11월 18일 제30차 UN총회에서 “UNC를 해체하고 UN 기치 하의 모든 주한 외국군이 철수하는 것이 필요”하며, 철수후 “정전협정 당사자들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북한이 주장한 논리는 “UNC는 단지 UN의 모자를 쓴 미군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를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UNC측도 “직접적 당사국들이 조속한 시일내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에 관한 협상에 들어 갈 것을 희망”하고 “정전협정을 유지하기 위한 적절한 체제가 마련되는 대로 UNC가 해체될 수 있도록 최단 시일 내에 협의를 가질 것을 촉구”하면서 “정전협정의 유지를 담당할 대체적 조절이 이루어진다면 1976년 1월 1일부로 UNC가 해체될 수 있다”는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이리하여 당시 UN총회는 공산측 및 UNC측 결의안을 동시에 통과시킨 진기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UN총회에서 채택된 공산측과 UNC측 결의안은 모두가 사실상 UNC 해체를 상정한 것이었지만 지금까지 대안적 제도가 마련되지 못한 채 존속되고 있다. UN안보리의 권고에 의해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의 목적으로 창설된 UNC는 UN안보리의 보조기관으로서 UN안보리의 해체 결의에 의해서만 해체될 수 있다. 북한은 UNC를 해체해야 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국제사회에 선전하기 위한 전술적 차원에서 2-3년 주기로 「UNC 해체주장 관련 서한」을 UN에 발송하여 왔지만, UN안보리는 지금까지 이 서한에 대해 불검토 방침하에 무시하여 왔다.
한반도 정전체제는 1990년대 세계적 차원의 냉전종식과 더불어 본질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직접적인 출발점은 미국의 소위 ‘한국방위의 한국화’ 추진과 이에 대응한 북한의 정전협정체제의 체계적인 무력화 기도에서 비롯되었다. 1989년 5월 미 국방부는 한국의 방위에 있어 미국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국의 주도적인 역할로 전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주한미군의 군사태세를 검토하였으며, 동년 9월 미 의회에서는 FY 90년도 국방예산에 대한 ‘넌-워너(Nunn-Warner) 수정안’을 통해 한국과 동아시아에서의 미 군사력의 임무와 전력구조를 재평가하여 3단계로 전환하도록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미 합참은 ‘동아시아전략구상’(East Asia Strategy Initiative)에서, (1) 주한미군 지상군 5,000명 및 공군 2,000명 감축, (2) UNC 군정위 수석대표의 한국군 장성으로의 대체, (3)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 근무하는 한국군의 증가, (4) 한국군 장성이 지휘하는 지상구성군사령부의 창설, (5) 그리고 한국군에 대한 평시 작전통제권의 이양 등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은 ‘판문점의 한국화’를 추진하였다. 동 계획의 제1단계는 1990년말까지 군정위 수석대표의 한측 장성의 임명, 제2단계는 1992년말까지 군정위 비서처 미측 요원 32명의 1/2을 한측 요원으로 교체 및 경비대 373명중에서 153명인 한국군을 253명 수준으로 증가, 제3단계는 1993년 이후 군정위 비서처 및 경비대를 한측이 단독으로 운영하고 판문점에서의 소요비용을 전담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의 첫 단계로 UNC는 1991년 3월 25일 한국군 장성(황원탁 소장)을 UNC 군정위 수석대표로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북한은 한국이 정전협정의 서명국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군 장성은 군정위 수석대표를 맡을 권한도 정당성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신임장 접수 및 군정위 본회담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1991년 9월 17일 남북한의 UN 동시가입을 계기로 북한은 UN과 북한간의 비정상적인 관계의 청산을 구실로 UNC 해체문제를 다시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북한은 공산측 군정위와 중감위 등 정전협정체제를 본격적으로 무력화시켜 왔다.
북한은 1994년 4월 28일 군정위에서 북한측 대표를 일방적으로 철수시킨 후 5월 24일 군정위를 대체할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를 설치하였으며, 12월 15일 군정위 중국군대표를 철수시키는 등 군정위체제를 무력화시켰다. 한편, 1993년 4월 3일 체코슬로바키아의 분리 독립에 따른 체코대표의 중감위 자격승계 문제를 구실로 체코대표단을 강제 철수시켰으며, 1995년 2월 28일 중감위 폴란드대표를 강제 축출한 후 5월 3일 중감위 북측사무실을 폐쇄하고 UN군측 군정위와 중감위 요원의 공동경비구역 출입금지 등 중감위체제를 무력화시켰다. 이러한 북한의 정전협정체제의 무력화로 인해 현재 정전협정에서 규정하고 있는 적대행위와 무장행동의 완전한 정지의 달성에는 한계를 안고 있다.
이처럼 북한은 정전협정 이행․준수의 양대 기구인 군정위와 중감위를 무실화시키는 과정에서 1994년 4월 28일 「미․북 평화보장체계」 수립을 제의하고 미국과 UN에 대해 UNC 해체를 강력히 주장하고 나왔다. 10월 18일 외교부 성명을 통해 미국과의 평화보장체제에 대한 협상을 거부할 경우 정전체제의 완전 청산조치를 취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또한 1996년 2월 22일 외교부 성명을 통해 미․북간 평화협정 체결이 어렵다면 그 중간조치로서 소위 「잠정협정」을 체결하여 평화보장체계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고, 3월 8일 미국이 잠정협정 제의에 호응하지 않을 경우 정전체제를 새로운 장치로 바꾸기 위한 “최종적이고도 주동적인 조치를 취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급기야 3월 29일 인민무력부 부부장 담화와 4월 4일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 성명을 통해 “군사분계선 및 비무장지대의 유지․관리 임무 포기, 공동경비구역에 출입하는 북측 차량 및 인원의 식별표지 부착중지” 등의 선언을 하면서 무장병력을 공동경비구역에 투입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정전협정을 위반하는 행위를 자행하였다.
이와 같은 정전협정체제의 무실화 과정에서 북한은 1995년 3월 돌연 미․북간 장성급회담을 요구하였다. 북한은 그동안 주한미군이 UN군 모자를 쓰고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는 논리에 입각하여 UNC 해체를 주장하여 왔던 점을 고려할 때, 이는 UNC와 상대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1998년 2월 11일 UNC와 한국 국방부는 정전체제의 틀 내에서 위기관리를 위한 책임있는 대화창구의 유지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UNC와 북한군간의 장성급회담을 제의하였다. UNC의 존재를 사실상 부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북한은 이에 동의하였고, 6월 18일 UNC와 북한군 간 「판문점 장성급회담 절차」에 합의하게 되었다. 양측이 합의한 장성급회담 절차는 정전협정을 의제로 하고, 쌍방은 최대 4명의 대표를 선정하며, 대표자 전원이 동등한 발언권을 갖도록 규정하였다. 「판문점 장성급회담」은 1998년 6월 이후 2002년 9월까지 14차례에 걸쳐 개최된 바 있으며, 군정위를 대신하여 정전협정 유지 준수 및 위기관리의 역할과 기능을 해오고 있다.
「판문점 장성급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북한은 1999년 2월 4차 회담에서 “유엔사라는 것은 법적으로 성립이 안되며, 남한에 주둔하는 군대는 미군일 뿐, 유엔군은 아니다”라고 주장하였으며, 특히 1999년 6월 연평해전과 2002년 6월 서해 교전사태와 관련해서 북한은 “서해 해상군사분계선 문제는 정전협정과 관련된 사안이기 때문에 정전협정의 실질 당사자인 미국과 북한간의 실무협의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는 남북간 해상군사분계선 문제는 정전협정 문제라고 하면서도 정전협정 이행의 일방인 UNC를 무시하는 모순을 드러낸 것이다.
Ⅴ. UNC의 기능과 위상
국제적 군사기구로서의 UNC가 수행해야 하는 임무는 UN안보리 결의 및 총회 결의, 정전협정 등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UN안보리가 UN의 대행기관으로 지정한 미국의 국가통수기구를 대리하는 미 합참이 지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UNC에 주어진 임무는, 첫째 1950년 6월 25일과 27일 UN안보리 결의 제1511호 및 제1588호에 의한 북한의 무력공격 격퇴 및 국제평화와 안전 회복, 둘째 1950년 10월 7일 UN총회 결의 제376호 및 1954년 11월 11일 UNC의 제네바회담 보고서 9-10항에 의한 한국에서 통일되고 독립된 민주정부 수립, 셋째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에 의한 정전체제의 유지 등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에 따라 UNC는 다음과 같은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첫째, 이상에서 보듯이 UNC의 기본임무는 ‘북한에 의한 무력공격의 격퇴’와 ‘한국에서 통일․독립․민주정부 수립’에 있는 바, 북한의 공격에 대한 격퇴와 관련해서 UNC는 한국방위에 관한 계획, 즉 각 구성군사 계획을 발전시키고 유사시 대비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기능은 1978년 창설된 CFC에 이관되었다. 한편 1950년 10월 7일 UN총회 결의 제376호는 UN군이 38선 이북으로 북진하여 작전을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되고 있다. 이에 따라 만일 북한이 무력공격을 해올 경우 UNC는 이에 대해 반격을 가해 북진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는 것이다.
둘째, 정전협정의 체결 당사자로서 UNC사령관은 정전협정 유지․관리 임무를 수행한다. 정전협정 제17항은 동 협정의 조항과 규정을 준수하며 집행하는 책임은 동 협정을 서명한 자와 그 후임사령관에 속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기능과 역할에는 정전협정 조항의 수정, 보완, 추가 등 협정의 관리와 정전협정 준수를 위한 전투부대의 작전통제, 그리고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한 북한과의 대화, 접촉유지 기능을 수행한다. UNC사령관은 정전업무에 관하여 CFC사령관에게 지시할 수 있는 권한과 필요시 CFC에 전투부대를 요청할 수 있으며, CFC사령관은 이에 응하여야 한다.
셋째, UNC는 한반도 전쟁 재발시 파견되는 제3의 UN회원국 군대에 대한 통제 및 지원 수용태세의 유지 기능도 수행한다. 정전협정 결정에 관하여 참전 16개국은 1953년 7월 27일 「워싱턴 선언문」을 통해 “UN의 제 원칙에 반한 무력공격이 재발할 경우 우리는 세계평화를 위하여 다시 단결하여 즉각적으로 이에 대항할 것”을 확인하는 공동정책을 발표하였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할 경우 참전 16개국을 포함한 UN회원국들이 전투부대를 파견시 이 부대들은 UNC사령관의 작전통제를 받게 된다.
넷째, 주일 UN군 기지의 유지 및 활용 기능도 수행한다. 이는 한반도 유사시 후방지원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UNC와 일본정부는 1954년 2월 19일 「UNC 주둔지위협정」을 체결하였다. 본 협정에서 일본정부는 UN회원국들의 군대가 극동지역에서 UN에 의한 제반 조치들을 취할 경우 이를 승인․지원할 것이며, UN안보리 결의에 따라 한국에서 UN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군대에 대한 중요시설 및 근무지원을 UN군이 일본 영토에서 철수할 때까지 지원할 것을 규정하였다. 미국은 1957년 UNC가 서울로 이동했을 때 UNC 후방지휘소를 일본에 잔류시켰으며, 현재까지도 참전 16개국중 영국 등 6개국의 연락장교단을 구성하여 협조하고 있으며, 정기적으로 일본정부와 UNC 주둔지위협정에 관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다섯째, 상기 임무수행과 관련하여 UN에 보고 및 건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UNC는 UN에 정기보고, 필요시 수시 보고, 그리고 건의를 하고 있다.
이처럼, 세계평화 유지를 목적으로 설립된 UN의 군사기구로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UNC는 특히 1990년대 북한의 노골적이고도 집요한 정전협정 무실화 기도 및 각종 도발 처리과정에서 적절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북한은 UNC사령관이 UN측의 군정위 수석대표를 한국군 장성으로 임명한 것을 구실로 공산측 군정위와 중감위를 차례로 무력화시켜 나갔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정전협정 위반사태와 같은 위기상황 발생시 적절한 대화․접촉채널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1998년 6월 UNC의 제의에 따라 UNC와 북한군간 「판문점 장성급회담」 창구를 개설하였다. UNC측 회담대표에는 한국, 미국, 영국군과 나머지 참전국 대표들이 교대하여 참여하고 있다. 판문점 장성급회담은 1998년 6월 22일 북한의 잠수함 침투사건을 비롯하여 1999년 6월 서해교전의 확전 방지, 그리고 1999년 9월 2일 북한의 소위 「조선서해해상군사분계선」의 일방적 선포에 대해 북방한계선(NLL)의 확고한 유지에 대한 의지 천명 등 정전협정의 준수 및 무력충돌의 확전 방지 과정에서 의미있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림 1> UNC 기구도
UN군사령관
부 사 령 관
참 모 장
한국전 참전국 UNC 연락장교단
(한,미,영,카,호,뉴,프,필,태,콜,네,벨)
UN군사령관
특별고문
부 참 모 장
UNC 참모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한국군 소장
군 정 위 한국군연락단
군정위 고문단
군정위 비서처
판문점 경비부대
주일 UNC 후방사령부
한편, UNC의 존재 자체가 북한을 침략국가로 규정한 UN안보리 결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북한은 창설 당시부터 그 합법성을 거부하고 존재 자체를 부정하면서 UNC 해체를 끊임없이 주장해왔다. 또한, 정전협정에 대한 기본입장으로 정전협정의 ‘실질적 당사자’는 미국과 북한이며, 정전협정이 현재 한반도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의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으며, 정전협정이 미․북관계를 적대관계로 규정하는 법적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고 강변해왔다. 그러나 북한에게 있어서 정전협정체제는 냉전체제 하에서 미국과 접촉할 수 있었던 유일한 창구였으며 체제선전의 도구로 활용하였다.
이와 같이 북한이 UNC의 위상을 약화하고 나아가 UNC의 해체를 기도하는 근본적인 저의는 북한의 대남적화전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주한미군 문제를 비롯하여 군사문제를 미․북간 직접 협상을 원하는 북한의 입장에서 UNC가 걸림돌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정전협정의 일방인 UNC의 위상이 약화될 때 비로소 정전협정체제가 완전 무력화되고, 나아가 미․북간의 평화협정 체결 여건이 조성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린 것이다. 셋째는 UNC의 위상 약화 및 해체, 미․북간 평화협정이 체결된다면 주한미군의 주둔명분이 상실되고 결국 주한미군의 철수로 유도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은 기본적으로 정전협정의 당사자는 법적․현실적 측면에서 미국과 북한이 아닌 남북한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정전협정 유지 및 UNC 위상과 관련된 한국 정부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전협정과 「남북기본합의서」에 의거 한반도에서 공고한 평화상태가 구축될 때까지는 현 정전협정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측에게 정전협정체제인 군정위와 중감위는 물론 UNC와 북한군간 장성급회담의 정상적인 가동문제를 지속적으로 촉구해왔다.
둘째, 북한이 주장하는 미․북간의 평화협정 체결은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것은 한국전쟁의 교전 당사자이자 정전협정의 이행주체이며 한반도 평화의 실질적인 당사자인 남북한간의 일이다. 그러나 북한의 정전협정체제 무실화 책동과정에서의 한반도 긴장이 초래되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등 제반 상황을 감안하여 한국 정부는 정전협정 체결의 관련 당사국인 미국과 중국이 참여하는 4자회담을 통해 남북한이 당사자가 되고 미국과 중국이 이를 지원하는 형태의 평화협정 체제 구축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물론 한국 정부는 북한과 미국간의 평화협정 체결에는 반대하지만, 관계개선을 통해 정상화하는 것을 수용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셋째, 한반도에 공고한 평화상태가 구축될 때까지는 정전협정과 함께 UNC의 위상과 역할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전협정과 이를 유지․관리해온 UNC는 한반도에서 전쟁재발을 억제하고 무력충돌의 확전을 방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 온 법적, 제도적 장치이다. 그리고 UN안보리 결의에서도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보장 임무를 UNC에 부여하고 있다.
한편,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첫째, 한반도에서의 UNC 유지문제는 단순히 한반도의 안보문제만이 아닌 동북아지역의 안보전략적 이해의 틀 속에서 인식하고 이에 맞게 대처해왔다. 따라서 미국은 UNC가 1950년 7월 7일 UN안보리의 결의안(S/1588)에 의해 설치된 UN의 보조기관으로서, UNC의 해체문제는 정전협정의 폐기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와는 별개의 사안으로 인식하고 있다. 즉, 정전협정의 폐기만으로 UNC가 자동적으로 해체돼서는 안된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UNC에게 부여된 임무는 한반도 평화의 유지 및 정전협정의 이행을 준수하고 관리하는데 있는 바, UNC의 해체를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실질적인 평화상태가 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UNC의 해체를 위해서는 절차상 UN 안보리의 해체결의와 UNC 예하 참전국들과의 조율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둘째, UNC는 한국군에 대한 전시 작전통제권을 보유하고 있는 법적 근원으로 존재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1978년 7월 27일 한․미 군사위원회에서 하달한 「전략지시 제1호」에 의하면 한국군과 미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은 UNC사령관의 직책을 겸임하는 CFC사령관에게 있다. 따라서 UNC가 해체된다면 CFC사령관이 행사하는 한국군에 대한 전시 작전통제권 문제를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셋째, 한반도의 평화정착 과정이나 통일 과정에서 UNC의 존재는 미국의 입장을 반영시킬 수 있는 좋은 법적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요컨대, 남북간 철도․도로 연결, 개성공단 건설, 금강산 육로관광 등 교류협력사업을 추진할 경우 비무장지대(DMZ)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DMZ에 대한 관할권을 행사하는 UNC사령관은 합법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것이다.
넷째, UNC의 해체시 주일 UN군 후방지휘소와 미군기지 주둔의 법적 근거가 약화되는 측면이 있다. 1954년 2월 19일 체결한 UNC와 일본 정부간 UNC 주둔지위협정(SOFA)에서는 한국내 UN 행동의 지원 군대에 대한 시설 및 역무의 제공은 UN군이 철수한 날로부터 90일 이내에 종료하기로 되어 있다. 다만, 1997년 9월 채택된 미․일협력의 지리적 범위를 확대시키고 유사시 취할 행동방침을 구체화한 「신 미일방위협력지침」에 따라 북한의 무력도발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할 경우, 일본의 미군지원을 통한 후방지원이 가능토록 미군의 증원체계를 강화시킨 바 있다.
그러면 한․미와 북한간에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는 UNC의 위상과 지위의 변화문제를 살펴보겠다. 1953년 「한국정전협정」이 체결되자 UN군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주한미군은 제2사단과 제7사단 등 7만여 명을 제외하고 철수하였다. 나머지 UN 참전국들도 군대를 철수하여 현재 UNC는 사령부 간부, 연락장교단 및 의장병 등 300여 명을 유지하고 있다. 결국 현실적 차원에서 볼 때 현재 UNC는 전투병력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법적 측면에서 볼 때, UN헌장에 근거하여 UN안보리 결의에 의해 창설된 UNC의 법적 지위는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UNC는 UN안보리가 창설한 UN의 보조기관인 동시에 한국전쟁의 수행자이며, UN군사령관은 정전협정의 체결권자이고, 정전협정의 준수 및 집행을 책임지는 UN의 행정기관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법적 지위는 체결당시 부여한 임무가 종료되었다고 판단될 때, 지위를 부여한 기관의 결의에 의해 변경될 수 있을 것이다. 즉, 한반도에 실질적인 평화․안전이 보장되고 현재의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전환된 이후, UN안보리의 결의절차를 거쳐 그 위상과 지위가 변경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한편,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할 경우 UNC의 해체 여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우선 첫 번째 견해는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대체된다면 UNC는 자동적으로 해체․소멸된다는 것이다. 현재 UNC의 임무는 1950년 UN안보리 및 총회의 결의에 따라 “한국 영역에서 북한의 무력적 공격을 격퇴하고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있는데,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대체되게 되면 UN안보리 결의에 규정된 “한국 영역”에서 무력적 공격은 종료되고 또한 “국제평화와 안전”은 회복되므로 UN군은 그 임무를 다하고 더 이상 한국에 주둔할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와는 다른 견해로 남북한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된다고 해서 그에 따른 법적 효과로서 UNC가 당연히 해체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이론상 남북평화협정 체결 이후에도 UNC가 북한의 남침 억제로부터 한반도 내에서 평화유지 활동의 수행이라는 기능전환의 방식을 통해 계속 잔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UNC가 근본적으로 UN안보리 결의에 의거 설치된 것임을 감안할 때 결국 UNC 해체문제는 UN안보리의 해체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법적 차원에서 볼 때 UNC 해체문제는 한국, 미국, 북한 그 어느 국가도 단독적, 임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 문제는 적절한 시기에 UNC사령관의 임명국인 미국과 UNC가 주둔하고 있는 한국의 입장이 충분하게 반영되는 가운데 UN안보리의 긴밀한 협의 하에 추진하되, 최종적으로 UN안보리 결의에 의거 해체될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한․미간의 긴밀한 협의를 전제로 추진할 수 방안으로, 첫 번째 UNC 설치권을 미국에 위임했던 UN안보리가 UNC 해체를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한 후 미국이 UNC를 해체하는 방안, 두 번째 먼저 미국이 UNC를 해체하고 난 이후 UN안보리의 추인절차를 밟는 방안이 고려될 수 있겠다.
Ⅵ. 결 론
결론적으로, 한국전쟁의 잔재인 정전협정체제와 UNC의 존재는 한반도에서의 전쟁 방지와 위기관리라는 순기능과 함께 한국의 자주성을 제약하는 역기능도 동시에 갖고 있다. 즉, 현재 남북관계를 규율하고 있는 법적․제도적 장치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정전협정체제는 지난 50년 동안 남북관계를 기형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북한 주민들의 삶의 존재양식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불안한 평화를 항구적인 평화상태로 전환하기 위한 노력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한국전쟁을 완전히 종결시켜 교전 쌍방 국가들 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정상적인 관계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여야 한다. 현실적으로는 남북관계가 적대․대결의 관계에서 화해․협력의 관계로 전환하고 진정한 평화공존의 관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군사적 긴장완화 및 신뢰구축을 점진적․단계적으로 추진하여 실질적인 평화상태를 구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평화체제와 관련해서 남북한의 입장차이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으며, 섣부른 접근은 오히려 남북한간의 안보구조를 이완시킴으로써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항구적인 평화체제가 정착될 때까지 정전협정 유지․관리의 주체로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UNC의 존재는 CFC사령관의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 보유의 법원으로서의 의미와 함께 한국의 자주성을 제약하는 측면이 남아 있다. 남북간 교류협력 및 군사관계 문제에 대한 UNC의 개입 현상은 한국 정부가 대북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데 있어서 미국의 국가이익과 정책에 따라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남북간 교류협력사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비무장지대이나 군사분계선을 통과하여 이루어질 경우 UNC의 협조는 필수적인 사항이다. 정전체제하에서는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 등 정전협정 규정과 관련하여 UNC사령관이 법적 관할권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법적 문제로 인해 대북협의에 있어서 한국 정부의 정통성 문제가 제기되고 북한의 대미 직접대화 전술 또는 한․미간 이간책에 악용될 소지를 안고 있다. 따라서 정전체제하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이러한 안보 딜레마는 한․미 양국간 상호 이해와 긴밀한 협조를 통해 한국의 자주적인 입지와 역할을 확대시켜 나감으로써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 문제는 남북 내부의 민족문제이자 정전협정 관련국 사이의 국제적 문제라는 이중적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 문제해결은 남북 당사자 해결원칙을 견지하되 주변 관련국들의 지지와 협력을 필요로 한다. 결국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문제는 당사국인 남북간의 주도적인 노력과 함께 정전협정 주요 관련국인 미국, 중국 등의 지지와 보장 하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