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론노트 이시우 2004/08/18 263
폭력론 노트 ―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무엇인가
무까이 꼬오(向井 孝)
한국어판을 내면서
한국어판을 내면서 일본판에서 빠뜨렸던 것을 한가지 첨가하겠다.
그것은, 지금 일본에서는 완전히 방치되어 논의조차 없는 일이지만, 생각하건대 이웃나라 한국이나 기타 여러나라에서 병역 해당연령의 젊은이들의 절실한, 쉽게 기피할 수도 없어 구체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병역문제가 현실적인 삶의 문제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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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벌써 2년쯤 전의 일이었던 듯 한데 나는 한국청년 붕어의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붕어군은 자기의 징병검사를 앞두고 징병거부를 선언하고 싸우고 있다고 했다. 나는 큰 충격을 받었다. 며칠동안 멍하니, 아무일도 손에 잡지 못한 채, 사고정지상태에 빠졌었다. 결코 허풍을 떠는 게 아니다. 그 후부터 나는 어쩌다가 ‘한국’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선 반사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징병제도’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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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군의 일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일본의 평화헌법’에 도취해서 징병이니 병역이니 군대니 하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고 있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일본사람이 그런 것처럼(국가는 이렇게 모든 일에서 우리들을 국민으로 만들었다!).
나도 사실 베트남 반전운동이 들끓었을 때 ― 1960년대 ― 에는 ‘JATEC(탈주병 원조조직)’에 조금 관계했었는데 도망 나온 미국군인[그 중에는 망명을 요구한 김동희(金東希)?라는 이름을 가진 군인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을 도와 주거나 했는데 매년 12월 1일로 정한 WRI의 Prisoner’s Day 때는 우리에게 온 세계각국의 CO(Conscience Objection, 양심적 병역거부자) 명단에 있는 수감자 수백명에게 격려카드를 차입해주기도 했다(이스라엘 형무소에 50여명이 갇혀 있었다. 너무 많아서 지금도 기억한다). 또 휴일에 외출한 자위대원들에게 반전삐라를 살포하는 일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베트남 전쟁이 끝나자 어느덧 뚝 끊어졌는데, 생각하니 그게 벌써 30년이라는 망각의 세월이 흘러갔으며 이제는 그러한 공백조차 자각하지 않는 일상생활에 떠밀려오다가, 그게 그러니까 붕어군의 얘기를 듣고 이제 새삼스레 깜짝 놀라게 되었으니 내가 불감증에 걸렸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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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이쯤해서 단박에 결론으로 비약한다. ‘폭력론 노트’를 들출 것도 없이 우리들의 일상은 항상 ‘의사비폭력 체제하’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일본에서는) 평화헌법 에 도취되어 지금은 징병제가 면제된다는 것을 전혀 자각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징병제도가 마치 당연한 것처럼 존재한다. 붕어군은 이런 상황에(한국과 일본) 돌멩이를 던졌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오히려 특별하고 이상한 일이 되고 말았는데, 이것은 일상에서 비일상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평화헌법 도취나 징병제 불감증이나 모두 똑같이 의사비폭력 체제하에서 무의식, 무자각으로 우리들의 의식의 토대를 이루는 사회적 구조이다. 그것을 밝히는 게 바로 『폭력론 노트 ―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하려는 핵심이라고 해도 된다. 붕어군의 행동은 그래서 의미가 크다.
(부기)
근자에 건강이 좋지 않은 탓에 짧은 글인데도 뜻을 담아내지 못했다.
2003. 2. 26 무까이 꼬오(向井 孝)
2002년의 유언
- 간행의 변 -
20세기를 ‘전쟁과 혁명의 세기’라는 이가 있다. 그렇다면 나는 1920년에 태어났으니까 내 생애는 완전히 20세기 안에서 살아온 것에다가 덤으로 21세기를 맞이하는 격이다. 다시 말해서 거의 전부, 일생이 20세기로 끝났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런데 9.11 이후에 나온 게 ‘테러에도 전쟁에도 반대’라는 그럴듯한, 일단은 누구든지 반대할 수 없는 슬로건이다.
이것 때문에 세계의 양상은 일변했다. 그때까지 의사적 비폭력 자세를 취하고 있던 여러 국가는 그들이 가지는 위압적이고 압도적인 군사력을 드러내 놓고 반테러 전쟁을 정의라고 하면서 테러사냥이란 명목으로 복종을 거부하는 전세계 인민에게 선전을 포고한 것이다. 새로운 21세기는 진실로 그러한 미국의 1국 지배를 선두로 한 ‘반테러 전쟁국가와 인민과의 싸움’의 세기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좋다.
반테러 전쟁을 정의라는 명목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미국과, 이를 추종하는 국가들. 그러한 입장에 서서 오늘의 세계 상황을 재정립한다면 반테러 국가군에 대한 인민의 비폭력 직접행동의 움직임이 바야흐로 세계로 확대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그보다도 이제 비폭력 직접행동밖에 없다는 것을 차츰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다시 한 번 말한다. 20세기의 ‘전쟁과 혁명’은 21세기에는 반테러 전쟁국가들과 인민과의 대치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오직 비폭력만을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새삼스레 내세우는 것이 비폭력 직접행동이라는 것을, 지금처럼 강력하고 명확하게 얘기해야 할 때는 없었다. 이것이 『현대 폭력론 노트』 개정판을 간행하게 된 이유이다.
2002. 12. 13 무까이 꼬오(向井 孝)
Ⅰ. 생명력
비폭력과 아나키즘
인민의 저항은 반드시 지배자의 폭력적 억압에 부딪친다. 그래서 지배권력에 대한 항쟁은 결국 폭력적 대결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논리의 귀결은 자위를 위해서 ― 독립을 위해서 ― 해방을 위해서 ― 혁명을 위해서 ― 폭동․봉기․게릴라․내란으로 나타나는 인민의 대항폭력 〓 군사무장을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당면한 21세기, 특히 9․11 이후의 세계가 명백하게 보여준 시대상황과 질(質)은 과거와 명확하게 다르다. ‘테러’에 대해서 압도적 장비를 구사해서 반테러 전쟁을 일으키는 큰 정부와 전쟁국가군(戰爭國家群)의 출현과, 전쟁이라는 재앙을 만들어 내는 폭력기구로서의 국가에 어떻게 대항하는가, 이 모든 문제를 집약한 것이 우리들의 전면에 무겁게 내걸어졌다. 따라서 비전(非戰)을 주장하고 테러의 의미를 묻는 것은, 국가권력에 대응할 때 피아(彼我)의 폭력,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고찰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먼저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1989년 이후 동유럽국가나 소비에트 러시아가 허망하게 붕괴함으로써 남겨놓은 20세기의 교훈 ― 사회주의나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더구나 폭력이 이끌어간 국가나 조직은 그 스스로 공포 그 자체인 권력으로 변한다. 그러한 폭력적 강권은 반드시 반혁명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 을 역사로 마음에 새기면서 새삼 새로운 우리들의 투쟁 ― 비폭력 직접행동 ― 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아나키스트가 비폭력을 주장하는 것은 특별히 새로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흔히 일부의 입장에 그치고 때로는 경시되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아나키스트가 폭탄의 전설에 둘러싸여져 있는 것은 ‘직접행동’을 개인의 생명 그 자체로 구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시대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그것은 아나키즘 안에 있는 비폭력 직접행동에의 본질지향이 오히려 고립된 개인을 부추겨서 대극적(對極的) 폭력 ― 폭력에 대항하는 정반대의 폭력 ― 즉 반폭력(反暴力)을 향해서 돌진하게 하는 역설적 전화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화의 의미를 밝혀내지 못하고 또 논리의 맥락을 스스로도 잃게 됨으로써 아나키즘은 한때 보통사람들과 연대하지 못하면서 수십년의 침체를 면치 못했던 것이다.
일본에서 비폭력 사상은 ‘무저항’, ‘불복종주의’라고 번역되면서 종교적 신조(信條)쯤으로 받아들여져 오랫동안 그 적극적 의미가 묻혀 있었다. 그러나 WRI(War Resisters’ International ― 전쟁저항자 인터내셔널)가 “비폭력 직접행동이야말로 인민고유의 원리이고 방법이다”라고 표명했고, 영국의 100인위원회가 “비폭력 직접행동을 투쟁의 기조로 한다”고 선언한 바와 같이, 1960년대에 들어와 비폭력 사상은 각 지역 인민의 투쟁에 새로운 시야를 열어젖히면서 마침내 이 나라에서도 그 적극적 의미를 논하게 되었다.
이 노트는 최근 조금씩 안이하게 논의되는 비폭력과 비폭력 직접행동의 내용에 대한 오해, 유행(流行)에 대해서 아나키즘의 입장에서, 특히 비폭력과 직접행동을 나눌 수 없는 일체로 결합시켜 파악하고자 한다. 이것은 또 우리들 인민만이 갖는 힘으로서, 나아가 저항의 원리이자 방법으로서 비폭력 직접행동에 새로운 관점을 시사하는 것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들은 현재, 이미 어떠한 체제와 기구를 파괴해야 하는지를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무엇을 그것에 대체해야 하는지를 잘 모른 채, 여전히 구태의연한 투쟁방법을 쫒아가고 있다.
비폭력 직접행동은 과연 권력의 거대한 폭력에 대항하는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실증은 아직까지도 알 수 없는 미래에 존재한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투쟁의 차원과 질을 그 뿌리에서부터 바꾸는 것과 같은 ― 예를 들면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행동하는 ‘인간방패’와 같이 ― 힘든 모색과 시험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새로운 활동의 질과 형태를 창조할 수 있는지가 문제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어떤 때의 패배, 어떤 때의 무력(無力) ― 그렇다고 인민의 폭력적 대항이 항상 유효하고 승리했다는 것은 아니다! ― 때문에 또 다시 과거의 폭력신앙으로 회귀해서는 결단코 안될 것이다. 최근 더욱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는 ‘반(反)테러전쟁’은 실로 그러한 위기이다.
생명력으로서의 폭력과 비폭력
본래 폭력도, 비폭력도 모두 개인의 생명력, 힘이다. 이것을 무엇보다도 먼저, 명확하게 말해두고 싶다.
생물은 태어난다는 의식 없이 어버이로부터 생을 이어받아, 생명력을 발휘해 죽을 때까지 삶을 계속하는 힘을 갖는다. 그리고 생명력은 폭력과 비폭력이라는 양극에 걸쳐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유아(幼兒)시에 나타나는 모친독점욕, 학급이나 그룹 보스의 존재, 크고 강한 육체를 향한 동경이나 단련, 자기를 권위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 권세욕……. 이런 것들은 욕망의 전자(폭력적) 지향이고 성실성이나 근면, 우애, 그리고 생산, 노동, 유희, 창작 등으로 나타나는 일상성의 상황이 후자(비폭력)이다.
우리들의 삶은 그것이 힘으로 존재하는 한, 아이가 어른이 되듯 자연스럽게 이 두 측면을 왔다갔다하면서 개인을 만들고 사회를 만들어간다. 이 점에서는 이 두 가지 지향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노력이나 격려, 지속적 추구를 위한 에너지로서, 결단, 용기, 인내력으로, 또 헌신이나 자기희생, 기쁨의 향수(享受)나 창조력의 발현에 모두 불가결한 것으로 있다.
폭력, 비폭력은 양자 모두 그러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힘의 발현이다. 그것이 육체적인 능력으로 나타날 때 스포츠나 각종 경기가 되고 옛날의 무사도나 기사도 정신이 되고 또는 아이들 싸움 등에 나타나는 더 본능적이고 단순명쾌한 분쟁해결의 방법도 된다. 그리고 이 때 육체적 폭력에 따른 승패는 때로 정의(正義)로서 자기주장을 처리하는 방법이자 해결방법이기도 했다.
Ⅱ.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의 정의
우리들은 폭력을 논할 때 아무래도 감성적으로 말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에는 논리적 모순과 혼란에 빠져 버린다. 우선 극히 단순하게 폭력에 대해서 정의해 두겠다.
폭력이란, 첫째로, 물리적 압력의 행사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요건만으로 폭력이라고 규정되고 통용된다. 이것이 폭력론을 혼란에 빠뜨리는 애당초의 이유라고 하겠다.
둘째로, 가해의지의 발동이다. 이를테면 길모퉁이에서 갑자기 사람과 부딪쳐서 상대를 다치게 했다고 하자. 그 때 가해원인이 된 물리적 압력은 고의성이 없기 때문에 폭력이 아니다. 가해의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경찰관이나 군인 개개인의 적에 대한 가해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지 자기 의지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때의 물리적 압력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셋째는, 자기 입장의 강제나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 대화의 거부이다. 가령, 죽어 가는 환자의 부탁으로 실행하는 안락사는, 가해의 뜻을 갖고 있지만 폭력일 수는 없다. 거기에 상대방의 뜻에 반해서 또는 뜻의 여하를 무시한 강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해의 뜻이 없는 것을 폭력이라 할 수 있을까? 폭력이란 소극적으로는 자기방어, 적극적으로는 자기주장이 타자의 존재까지 규정하고 최종적으로는 타자의 부정이나 거부로 나타나는 것이다(그러면 경관이나 군인은 명령, 즉 자기 의사가 아닌 폭력을 행사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이상 세 가지 요건을 갖추었을 때, 대소강약과 관계없이, 그것은 폭력이다. 세 가지 중에 하나가 빠져도 그것이 폭력적이라는 말은 들어도, 결코 폭력이 아니다. 둘째와 셋째 요건만으로는 적어도 물리력을 띠지 않는 한 폭력은 아니며 오히려 비폭력적인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물리적 압력의 행사, 가해의지의 발동, 자기입장의 강제 또는 타자의 부정 ― 대화의 거부, 이 세 가지를 완전히 구비하는 것은, 잘 생각해보면, 오직 개인폭력뿐이다.
폭력을 논할 때 반드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논의가 혼란에 빠지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개인폭력과 사회폭력의 질적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고 단순히 폭력이라는 말로 뭉뚱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력의 결과는 그 행사(行使)와 피행사(被行使)의 구분을 따지지 않고 모두 개인에게 수렴되고 환원된다는 중요한 특질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동대라는 조직적 폭력장치의 발동결과는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의 폭력의 집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의 육체와 정신은 개별적으로 자기의 폭력행사에서 그 어떤 반응을 받는다. 한편 데모대가 입는 피해는 한 사람의 항의자 피살이거나 다른 참가자의 두부열상, 또는 시민의 안저출혈이다. 그리고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것은 반드시 개인이고 형벌을 받는 것도 그 개인이다. 폭력장치인 집단적 사회조직은 폭력의 결과로 직접적 타격을 받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은 생명력과 폭력, 폭력과 폭력적, 개인폭력과 사회(조직)폭력, 이런 것들을 흔히 뒤섞어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폭력의 정의를 엄격하게 바로잡지 않으면 안된다.
오해를 무릅쓰고 단정하다면, 개인폭력은 사회적으로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를테면, 우리들이 폭력범죄에 마주치게 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고 우연한 재앙과 같다. 그리고 그러한 폭력은 명백히 반사회적이기 때문에 고립되어 지지자나 동조자를 얻을 수 없으며 결국에는 소외되어 사회생활자로서의 일상을 지속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개인폭력은, 결국에는 자기파멸 직전까지 이르고마는 일시적인 현상밖에 되지 않는다. 또, 현실사회에서 개인의 자의적 폭력이 횡행하는 것은 지배자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나아가 그 존재기반을 위태롭게 하기 때문에, 즉시 경찰력이 발동된다. 그렇게 개인폭력은 위법으로 단속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이 일상적인 화제가 되고 신변의 문제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폭력의 결과가 모두 개인에게 수렴환원되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한 개인의 피해나 가해일지라도, 자신의 생사에 관한 직접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폭력은 사회적 대응으로써 결국 극복된다는 귀결에도 불구하고 흔히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아직도 폭력을 두려워하는 것은 첫째로, 폭력에 대한 대항수단을 우리들 자신이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둘째로, 우리들이 스스로 폭력에 대항하는 용기를 완전히 잃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들 대신에 국가가 폭력을 단속함으로써 우리에게서 일체의 대항수단을 금지하고 한편에서 우리들은 가축처럼 겁이 많고 유순해져서 태고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들짐승에게 맨손으로 덤벼들던 용기를 이제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좀더 얘기한다면, 이미 우리들 앞에는 “폭력은 안된다”는 일종의 윤리감이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무조건 폭력을 옹호하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누구든 “언제 어느 때나 폭력은 반드시 악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에 대한 긍정은 거의 모두 자신을 잃는다. 폭력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심정을 비폭력주의자조차도 말살할 수 없을 것이다.
폭력지배의 의사비폭력(擬似非暴力) 체제화
폭력이라고 할 때 우리들은 극히 물리적인 것, 예를 들면 매스컴이 대서특필하는 범죄에다 일상생활에서 드물게 맞닥뜨리는 싸움질이나 금품갈취의 상해 등을 보태서 우선 생각하고 나에게 미칠지도 모르는 감각적인 공포로 그것을 상기한다(테러도 그러한 의미에서 신변 가까이 느끼는 공포에 대한 상상력이다). 또 예를 들면, 가정내 폭력, 유아학대 등 당사자에게도 대단히 심각하고 게다가 쉽지 않은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사회 병리적인 갈등문제에 원인이 있기 때문에 폭력과 비폭력의 문제로 다루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폭력의 문제로 다루게 되면 도리어 쉽다. 상대한 사람에 대해서 세 사람, 다섯 사람 꿇어앉히고 응징하여 단순한 약자로 만들 수 있다.
개인폭력의 범주는 쉽게 그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다 해도 지금 우리들의 눈앞에 존재하는 사회폭력 = 권력의 폭력장치의 내실(內實)을 구체적으로 찌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뿐인가 잘못하다가는 개인폭력과 같은 차원에서 엉뚱하게 논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지금 여기서 우리들이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개인폭력과는 전혀 질이 다른, 개인폭력의 시점에서는 간단하게 파악할 수 없는 의사비폭력 체제로서 존재하는 사회폭력장치에 대해서다.
사회폭력은 우리들의 주변, 일상에서 폭력으로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역으로 질서유지 장치로서 드러나고 있다. 게다가 사회질서로서 일견(一見) 우리들의 일상을 지키는, 폭력에 대한 압제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경찰․군대와 같은 국가의 폭력장치는 일반시민에게 합법인 것, 질서를 지키는 조직으로 비친다. 현대의 폭력의 의미와 내용을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 이렇게 의사화한 사이비 비폭력 체제로서의 사회폭력, 즉 의사비폭력 체제를 문제시하는 데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서 비폭력의 문제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Ⅲ. 간디의 비폭력, 그 의미
직접행동 ― 비폭력의 가시화(可視化)
상대방이 덤벼들어 때리면 반격의 자세를 취한다. 상대가 사과하지 않으면 되받아친다. 이것이 상대의 폭력에 대한 일반적이고 아주 흔한 응수이다. 이러한 행위는 본능적으로 누구든 피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폭력에 대해서는 폭력적 대응이 자연스러운 자세이다. 여기에 선도, 악도 없다.
그런데 대응행위는 이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마하트마 간디는 폭력적 식민지 지배에 대한 항의로서 폭력에 대해 완전히 반대의 입장, 즉 비폭력의 입장에서 “불복종”, “무저항”이라는 대응행위를 제창하고 이것을 실천했다. 그것은 상대의 폭력을 방어하지도 않고 달아나지도 않으므로 강한 신념과 적극적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무저항의 저항이라고 해야 할 간디의 행위는, 그때까지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을 가시화(可視化)함으로써 비폭력에 힘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무저항에는 직접 상대에 대응하는, 눈에 보이는 행위는 없다. 있는 것은 폭력에 대한 폭력적 대응을 극복하려고 하는 자기에 대한 제지에서 비롯된 갈등과, 그러한 갈등에 대한 심리적인 자기대응이다. 그것이 보고 있던 증언자에게 전해졌을 때 비로소 가시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폭력에 대치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 강제력이 아니다. 그것과는 다른 힘이다. 정신적 또는 윤리적인,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비폭력이 불복종이라는 구체적 행위를 매개로 해서 나타남으로써 “폭(暴)이 아닌(非)” 힘(力)이 가시화할 때 ― 그러한 가시화도 또 새로운 힘으로 보태지는 비폭력 직접행동의 출현을 의미한다. 그래서 가시화는, 의식화를 가져온다.
20세기초 간디가 활동을 시작하기 전 비폭력의 의미는 폭력의 부정, 혹은 폭력행사가 없는 상황을 말하고 비폭력을 바라는 개인의 신조, 윤리, 종교 등 이를테면 정신주의의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을 간디나 그 후의 마틴 루터 킹 등이 구체적인 직접행동의 선두에 섬으로써 비폭력의 의미가 지닌 소극성이 바뀌게 되었다. 폭력에 대항하는 힘으로서의 비폭력의 발견 ― 무저항과 불복종이라는 직접행동의 창조이다!
이렇게 간디의 제창에 의해서 비폭력은 비로소 사람들이 의식하는 힘으로서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하기는 그때까지 아니, 그 이후까지도 비폭력은 정신주의, 심정적이고 엄격한 윤리주의를 더 강하게 의미하면서 ‘직접행동’이 반드시 비폭력과 일체화, 또는 절대적으로 따라붙지 않으면 안된다는 중요한 지점을 거의 논의하지 않았다. 그보다도 무시하는 경우가 그대로 이어져서 운동의 확대를 일부러 한정하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일부에서 남아있는 비폭력의 실천은 보통사람이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종류의 정신적 경지라는 오해의 주요한 이유일 것이다. 물론, 이제는 비폭력의 전술로 연좌시위, 데모, 피켓팅 등이 상식적으로 금방 상정된다. 그러나 이를테면 무언(無言) 전화라든가 일찍이 수상이 손을 들어 버린 칭찬전술이라든가 스토커 등 물리력의 행사를 수반하지 않는 행동도 비폭력이다.
확실히 비폭력의 일면은 윤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폭력도 또 하나의 힘이라는 점에서 본래 윤리적인 선악의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법이며 수단인 것이다. 그가 목적하고 의도하는 바에 따라 폭력, 비폭력이라는 서로 다른 형태의 힘이 지닌 의미가 결정되는 것이다.
극한(極限) 상황에서의 문제
비폭력에 대해서 얘기할 때 반드시 제기되는 반문이 있다. 만일에 연인이 습격을 받았을 때 어떻게 하는가. 예를 들어 목전에서 핵버튼을 누르려는 사람을 발견하고서 너는 구경만 하고 있을 것인가 ― 등등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처럼 이미 제 삼자의 개입을 용납하지 않는 초를 다투는 극한 상황에서 누가 어떻게 절대 확실하고 유효한 대응수단을 실천할 수 있을까. 폭력은 자기능력이 상대를 능가할 때만 유효하고 자기가 상대보다 약할 때는 폭력도 똑같이 힘이 못된다. 이럴 때 그 장소의 당사자만이 어떻게 대응할지를 결정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승패는 거기서 중요하지 않다. 이에 대한 시비나 선악도 논외의 문제이다. 즉, 이 때 제 삼자의 입장에서 당사자의 입장을 상정하고 거취를 허둥대며 폭력이냐 비폭력이냐 하고 시비선악을 논하는 것은 아무런 뜻이 없다.
도대체 이러한 문제설정은 첫째 그러한 상황을 전후와의 관계에서 분리해서 제기함으로써, 둘째로 그런 일은 여간해서 있을 수 없다는 희박한 경우를 일반적인 예로 했다는 데서 옳지 않다. 만약 이러한 경우에도 우리가 비폭력적 대응을 주장한다면, 여간해서 없으며 또 있어서는 안될 상황 때문에 미리 어떤 방법을 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항상 그런 문제에 대한 대응이 정해져있고 모든 수단이 강구된 상황이 마련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한 전제에서 그래도 또 예외의 예외로, 즉시적 대처밖에 별 방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비폭력이 만능의 부적일 수는 없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 미국에서 1859년 존 브라운이 소수의 동지와 함께 무장봉기 했다가 처형당했을 때 숲의 철인이자 비폭력주의자 소로우가 말한 ― 말을 소개하겠다.
“노예를 살리기 위해서 힘을 가지고 노예소유자에게 간섭할 권리가 인간에게 있다”라고 말한 존 브라운의 가르침에 나는 찬성한다. 따라서 노예해방을 위해서 브라운과 같은 방법을 쓰는 사람이 나와도 나는 결코 그의 방법이 틀렸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자유냐 죽음이냐의 선택을 요구하지 않는 박애주의자보다 노예의 입장을 대변한 캡틴 브라운의 박애주의 편을 들겠다.
Ⅳ. 국가와 전쟁
오늘날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은 국민이라는 개념으로 분류되고, 등록되고, 지배되고 있다. 우리들은 이러한 표딱지 없이, 국가의 영역 밖으로 한 발자욱도 나갈 수 없고 국내에서도 갖가지 장애에 부딪친다. 게다가 우리들 자신은 이러한 개념을 거의 선천적,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도 그렇게 부르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국민이라는 개념을 성립시키고 있는 근거는 그러한 집단 안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놀라 마땅한 일이다.
예를 들면, 똑같은 인류의 구분 개념인 인종은 그러한 분류근거로 생물학이 있다. 또, 민족이라는 개념은 문화인류학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국민’은 국가를 근거로 성립되는데도 불구하고 국가는 그 구성자인 국민의 내실성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완전히 지배자와의 관계에서 외재적 명칭으로 성립할 뿐이다.
국가가 국가일 수 있는 것은 우선 타국과의 관계 ― 기타국가로부터의 승인 ― 에서다. 그 기본요건은,
1) 일정한 영토를 갖는다
2) 영토내에서 생활하고 있는 인간에 대해서 타권력의 간섭을 불허한다
3) 그리고 지배하는 정치권력이 존재한다
는 데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국가는 단순히 하나의 정치사회적 결합형태에 불과하거나 또는 거대한 정치단체일뿐이다.
고대, 중세에서 국가라고 부르던 것에서부터 근대법치국가에 이르기까지 국가는 항상 지배계급의 권력기구 그 자체로 존재했다. 국가의 주권을 장악한 권력자의 지배와 이익을 위해서 우선 존재했다. 평상시, 국민의 보호자로 자처하고 있다가 최후에는 지배자들은 자기들 보신을 위해서 국가조차 팔아먹고 국민을 배신해서 도주해버린 많은 역사는 무엇보다도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권력의 본질로서의 폭력과 그 가면
‘부르조아국가의 지양’이라는 논리를 단순히 뒤집은 것에 불과한 ‘프롤레타리아국가’라는 개념이 있었다. 국가의 지배권력이 부르조아에서 프롤레타리아로 이행한다. 그것은 노예제국가에서 봉건국가로, 그리고 다시 자본주의국가로 옮겨가는 마지막 단계에 나타난다고 했다.
그러나 20세기 사회주의국가의 행방이 현실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거기서는 권력의 최대강화가 실현되었고 더구나 인민의 국가, 인민의 권력이라는 명분 아래 반역자를 가차없이 처단했다. 실로 그것은 국가체제로서 완벽한 침묵과 죽음의 체제를 만들어냄으로써 스스로 붕괴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국가에 조금이라도 맞서려고 할 때 금방 나타나는 것은 거대한 폭력장치를 뒤에 둔 모든 권력적 규제이며 억압이다. 이것은 아무리 자유나 인권을 내걸고 민주주의를 외쳐도, 그것이 국가일 때는, 그 어느 국가도 다르지 않다. 내면적 강제, 이른바 사회질서로서의 심리적․정신적 지배하에 더욱 완벽한 민주주의라는 의사비폭력 체제를 성립시키면서 법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이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국가는 항상 권익을 주장하면서 권익의 유지와 확대를 위해서 크고 작은 분쟁을 가져온다. 그래서 그것을 해결하는 배경으로 반드시 군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비상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상시에 필요하다는 게 특징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분쟁’은 대(對)러시아 북방 4개섬 쿠나시리에토로프, 대(對)한국의 독도, 대(對)중국․대만의 첨각열도이고 이른바 영유권이나 영해문제이다. 그리고 대(對)북조선 문제가 있다. 이것들은 오히려 타국과의 외교적 교섭문제인데도 국내여론을 부추겨 내셔널리즘을 빚어내면서 전쟁을 위한 군비증강이라는 국내정치문제가 된다.
오직 비전(非戰)밖에 없다!
여기서 전쟁에 대해서 아무래도 언급해야겠다.
내 일생동안 가장 간절한 문제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으면 주저하지 않고 바로 ‘전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10살에서 25살까지, 이른바 15년 전쟁, 특히 마지막 시기인 패전까지의 수년간은 일상성의 상실을 당연지사로 하는, 더할 수 없이 엉망진창에다 비인간적인 나날이었다. 오직 파멸과 죽음만이 있는 내일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생을 살았다.
전쟁은 절대로 안한다!! 이것은 지금 70이 넘은 사람은 그 누구나 일생 잊을 수 없는 경험에서 우러나는 결심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천황가족이거나 그들과 멀든 가깝든 관련된 입장에 있는 자들뿐이리라. 그러한 전쟁을 어느 날 갑자기 시작하더니, 똑같이 어느 날 갑자기 자기보신을 위해 휴전을 선언한 게 천황이었고 국가였다. 전쟁, 천황제, 국가는 이때부터 언제․어느 때나 최대의 적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신헌법이 발표되고 제 9조가 명시되었을 때도 나는 이와 무관하게 나의 신조로, 나의 맹세로 전쟁포기 ― 비전(非戰)이라고 마음 속에 다짐했던 것이다. 이것을 구체화한 것이 1953년 WRI(War Resisters’ International) JAPAN에 가맹할 때부터이다. 나는 WRI에 가입할 때 다음을 서명했다.
1) 병역이나 군무에 일체 종사하지 않는다
2) 군수산업과 그것과 관련된 곳에는 취업하지 않는다
3) 전쟁원인 제거를 위한 활동을 계속한다
전쟁을 싫어하는 것도, 피하는 것도,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비전(非戰)뿐이다.
그런데 지금 미국과 그 밖의 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의 총량은 지구 전체인구를 몇차례나 살해할 수 있을까. 핵무기는 언제든지 투하되며 오직 인민살해병기로서 존재한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에는 홋까이도오에서 큐우슈우까지 50여기의 원자력발전소가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전쟁이 터지면 미사일은 원자력 발전소를 노린다. 미사일 한발이 100킬로미터 사방을 죽음의 도시로 만든다는 것은 체르노빌사고에서 증명되었다. 이제 이만한 이유만으로 우리들의 입장은 이러니 저러니 논의할 것이 없다. 단호하게 비전(非戰)이다. 비전의 입장이외에 있을 수 없다.
베이유의 전쟁론
시몬느 베이유가 1933년에 쓴 자그마한 글 「전쟁에 대한 고찰」을 읽어주기 바란다. 요약해서 소개하면,
마르크스는 현대의 생산양식을 노동수단에 대한 노동자의 종속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또 각 자본가와 그 고용 노동자에 대한 투쟁이 결국은 노동자 전체에 대한 자본가의 투쟁으로 변한다는 것을 논증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쟁은 결국 전투원(병사)의 전투수단(장비)에 대한 종속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전의 진짜 주인공인 무기는 결코 스스로가 직접 전투를 하지 않고 전쟁에 나가지 않는 일부 사람들의 조직(권력)에 의해서 관리된다. 이러한 관리장치는 자국의 병사, ‘국민’을 강제로 죽음을 의미하는 전쟁터로 내보내는 것말고는 전쟁의 수단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나라의 타국가에 대한 전쟁은 곧 자국 군대에 대한 국가적 군사장치의 발동, 다시 말해서 병사(국민)의 군사장치에의 종속을 강요한다. 즉, 어떤 전쟁도 국가와 참모본부의 모든 장치는 무기를 잡는 연령의 자기 국민에게 전쟁의 양상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계는 노동자로부터 그들의 노동력만을 뺏고 자본가는 해고이외의 강제수단을 갖지 못하는데 비해 군인은 강제로 생명을 바칠 것을 요구받는다. 게다가 군법의 협박하에 임무를 강제당한다. 전쟁이 방위인가, 공격인가, 제국주의적인가, 민족적인가 등은 이미 문제가 아니다. 전쟁의 당사국은 모두, 적국도 똑같이 이러한 방법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전쟁론에 있어서, 특히, 사회주의자들이 빠져있는 큰 잘못은 전쟁이 무엇보다도 가장 잔혹한 죽음을 강제하고 있는 국내정치인데도 그것을 대화정치의 하나의 에피소드로 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극히 단순한 것 ― 살육은 억압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 ― 으로, 군인은 살육으로 내몰려서 죽는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억압의 장치는 한번 구성되면 파괴될 때까지 존립을 계속하는 것이다. 모든 전쟁은(비록 혁명가에 의해서 수행된다고 해도) 반동의 요인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국가장치에 의해 일어나는 전쟁은 아무에게도 자유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혁명전쟁은 혁명의 무덤이다. 따라서 군인이라기보다 무장시민에 대해서는 지휘장치, 경찰의 강압, 특별재판, 도망에 대한 형벌 등을 일체 부과하지 않고 자의(恣意)를 인정한다는 조건에서만 전쟁수행을 승인할 수 있을 것이다(근대사에서 한번 파리꼬뮨 때 이러한 전투가 있었다. 그게 어떤 결말을 가져왔는가 잘 안다). 전쟁에 종사하는 혁명은 반혁명의 타격으로 무너지든가 군사적 전투의 메카니즘 그 자체에 의해서 스스로가 반혁명으로 전화할 수밖에 없다. 거기서 혁명의 전망은 극히 한정된다. 혁명은 전쟁을 피할 수 있는가 ― 이러한 곤란한 경우에, 일체의 희망을 걸고 도전하든가 아니면 포기하든가 둘 중 하나이다.
때로 전쟁이 혁명적 요인인 듯 보일 경우, 확실히 전쟁의 결과로 조직의 나쁜 장치는 붕괴하거나 바뀐다. 그러나 그것은 마르크스의 정식이 말하는, 국가장치를 파괴하는 대신에 뒤바꾸는 혁명이 일어나는 데 불과하다. 이것은 이제까지 늘 일어난 사실이다. 역사는 국가권력장치가 시민의 정치행위에 더욱 억압을 가할 때 이 장치를 파괴하기 위해서 권력장치를 직접 상대해서 투쟁할지의 여부를 무조건적으로 선택하게 한다. 그러나 만일, 행동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국가장치에 대해서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만 투쟁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군다나 전쟁의 경우 자기도 톱니바퀴가 되어 있는 전쟁장치의 기능을 방해하든가 또는 그 장치가 인간의 생명을 짓뭉개는 편에 서든가, 어느 편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 이것은 또 비폭력 직접행동의 입장에서 펴는 전쟁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Ⅴ. 비폭력이란 무엇인가
비폭력과 의사비폭력 체제
우리들에게 비폭력이란 일상을 말한다. 일상이란, 가정을 만들고 아이를 기르고 생활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기 위해서 일한다는, 정말로 당연하고 평범한 나날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당연한 반복이기 때문에 그 소중함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지만, 사실은 비폭력적 질서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비로소 그 생활을 일상적으로 영위할 수 있다. 폭력이 일상을 뒤흔들고 나날의 생활에 위기를 가져오는 것은 비폭력적 일상이 깨졌을 때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때 이외에는 의식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지금 팔레스타인 자치구 등 폭력하에서 위기의 연속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은 하루살이 생활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일상성조차 박탈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폭력체제하와 의사비폭력 체제하의 일상은 명백히 다르다. 우선 자신들의 목전에 있는 사회상황을 의사비폭력 체제사회라고 규정하는 게 필요하다.
거듭해서 말하자면 이러한 일상생활은 비폭력을 의식하지 않는 것과 표리(表裏)가 되어 대개는 폭력이 폭력으로 보이지 않는 상황으로서 실재하고 있다. 그러니까 현재 일본에서는 지금 우연히 머리 위를 포탄이 여기저기 날아다니지 않고, 단순히 개인폭력이 횡행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흡사 비폭력 상황으로 여겨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문이 써갈기는 범죄가 일어나도 강건너 불구경이고 그것도 금방 법적으로 단속될 것이라는 전제가 있다. 그러나 단속이라는 명목으로 그 일부분을 보인 국가의 폭력기구는, 바로 우리들의 일상에 존재하는 비폭력과는 질이 다른 의사비폭력의 상황이며, 그것은 의사비폭력의 체제하에 우리 일상이 있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비폭력의 인민성
사회생활에 나타나는 비폭력 상황은 그것이 인민의 자각이나 의식의 확립같은 것을 통해 가까스로 발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만큼 비폭력성이 본능적이고 본질적인 인민의 속성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우리들은 일상적으로 특별한 의도도 없이 질서 있는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것은 본래의 생명력 ― 비폭력성에 입각해서 나타난 속성적 상황의 역사적 결과로서, 국가기구나 법률, 제반제도 때문이 아니다. 단 우리들이 그것을 자각하는 일이 거의 없고 또 아직 드러나지 않은[未然的] 무의식하에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그러니까 인민의 일상생활과 사회의 비폭력 상황은 한 가지로 나타나서 나눌 수 없는 관계로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의식에서는 폭력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비폭력이 적극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우연히 일상생활을 파괴하는 적(敵)인 개인폭력만이 현실적으로 나타나서 그에 대한 대처로 국가의 필요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또 그것이 마침내 국가권력의 법질서라는 이름의 의사비폭력 체제의 맹목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쉽게 신화를 예로 들자.
어느 날 난타국의 왕이 국민의 반란에 곤혹해서 석가에게 정치의 요체를 물었다. “우선 무엇보다도 타국하고의 전쟁을 그만둘 것이다. 전화(戰禍)로 오곡이 영글지 않고 질병이 유행하고 도덕과 의리가 문란해진다. 전쟁을 하면서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라고 대답했다던가. 이것은 어떠한 강권국가라도 안정된 통치와 국가의 존재기반으로 비폭력적 통치를 지향하는 것 밖에는 안정이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폭력지배를 드러내고 있는 사회, 앞서 예로 든 팔레스타인, 혹은 전쟁중에는 인민의 생산노동은 완전히 이루어질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국민의 생산물을 수탈함으로써 성립되는 지배권력의 존립기반도 그야말로 근본에서부터 위태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을 바꿔 말하면,
1) 국가는 존재의 근저에 인민의 비폭력적 일상의 영위를 깔고 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일상질서는 권력에 의해서만 유지된다고 바꿔치기 해서 그러한 의사비폭력 체제를 법제화․기구화하여 의사비폭력 상황을 통치의 결과로 과시한다.
3) 그러한 체제를 유지하고 완벽하게 지킨다는 명목으로 자기권력을 지키기 위한 폭력장치를 더욱 증대하고 독점한다.
4) 그것은 인민 본래의 비폭력 일상의 의미에 대한 각성을 방해하고 인민자신의 사회관리능력의 자각과 발현을 저지하는 의회제 민주주의 ― 투표와 선거 ― 로 인민 스스로의 의지를 자승자박하는 기구를 만든다.
요컨대, 국가의 국민지배는 일상에서 비폭력적 가면을 완벽하게 하여 이제 민주주의라고 불리고 ‘반테러’를 주장하는 국가체제군에 의해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Ⅵ. 의사비폭력 체제와 민주주의
민주주의라는 의사비폭력 체제화
권력지배는 폭력을 될 수 있는 한 억제하고 또 합법적인 명목을 고수하는 것으로 폭력국가라는 것을 위장한다. 이렇게 해서 인민의 속성인 일상적 비폭력성은 의사비폭력 체제하의 일상성으로 고쳐져서 부여된다. 그래서 인민의 일상이 권력에 의존함으로써 성립된 것 같은 환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국가와 인민이 상호의존적으로 외쳐대는 슬로건은 “폭력은 악이다!”, “우선 얘기하자”, “민주주의를 지켜라!”이다.
우리들의 모든 일상생활을 지배하고 침해하는 것으로서 폭력이 진짜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지금, 사회폭력, 기구폭력, 장치폭력이 어느 사이엔가 질적 전환을 끝내고 우리들의 일상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된 때이다. 조직화되고, 기구화되어 자체의 생명력을 갖게 되었을 때부터이다. 그것은 단순히 인민이 폭력장치를 의식하지 못하게 하는 데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질적 전환으로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모하여 지배의 배경에 존재함으로써 우리들과 근본적으로 대립하게 된다.
폭력의 사회화 ― 전환은, 국가의 지배기구인 민주주의 안에서 더욱 완벽하게 나타난다. 민주주의는 국가와 유착하는 순간부터 원리적 입장을 상실하고 기만과 환상으로 바뀌어 의사비폭력 체제의 폭력 그 자체의 도구가 된다. 그리고 확실히 국민은, 모든 개인은 헌법 앞에서 자유롭고 평등하므로, 기본적 인권을 보장받는다. 그러나 인권보장, 삼권분립, 국민주권 등 민주주의의 원칙은 어디까지나 법적으로 그런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법치국가로서의 계급적 불평등, 부자유를 고정화하고 자본독재의 본질을 은폐하는 위장에 불과하다.
법치국가의 폭력 ― 군대, 경찰, 재판소, 감옥 등 ― 독점을 합법적으로 만들고 그 일방적인 행사를 법률의 이름으로 휘둘러댄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공공복지의 이름을 빌려 인권제한 등 민주주의의 원칙을 이러저러하게 침해하는 국가의 행위까지도 당위화하는 역할을 다하게 된다. 게다가 선거, 투표, 의회라는 제도가 뜻하는 ― ‘네가 투표로 선택한 의원이 정한 법규로’라는 논리는 우리를 자승자박하는 함정에 빠뜨린다. 그야말로 의사비폭력 체제로서 항상 인민을 대량으로 죽이는 기구를 내부에 숨긴 채 비폭력 사회로서의 허상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의사비폭력과의 싸움
그러나 민주주의가 어떻게든 비폭력 사회로서의 허상을 완벽하게 할지라도 정치부패와 함께 그 가면을, 옷 속에 감춰 입은 투구처럼, 때때로 노출시킨다. 때로는 비폭력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조직된 폭력기구의 물리적 행사로 환원한다. 예를 들면, 팔레스타인에서 감행되는 이스라엘의 자의적 행동이다. 군대조직의 일원인 병사가 주민을 체포하고 능욕하고 고문한다. 그러한 폭력은 특정개인의 개별적 성향에 따라서 더욱 잔혹하게 위법으로 행사되면서 개인폭력으로서의 내용을 갖는다. 그러나 이 경우 개인폭력은 당초 의미의 개인폭력과 똑같아 보이지만 실은 크게 변질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첫째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대등하지 않다. 물론 입장이 역전되는 일도 있을 수 없다. 둘째로, 가해자가 지닌 압도적인 장비의 우위 상황에서 약소자, 무능력자에게 일방적으로 이루어진다. 셋째로, 피해자 ― 주민 ― 는 자기의 가족이나 집단과 강제로 떨어져서 고립된 개인이 될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서 가해자 개인의 배후에는 법적인 조직이 존재하고 있어 언제나 그곳으로 달아날 수 있다. 넷째로, 피해자는 정당방위 수단까지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더군다나 모든 책임을 덮어쓴 악으로 처벌된다. 이것은 당초 단순한 개인폭력이 의사비폭력 체제로 개인에게 환원될 때 그것은 이미 사회폭력으로서의 폭력으로 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반드시 개인에게 수렴한다는 폭력의 특성은 사회화되더라도 그 자체로 나타나지만, 개인폭력의 원래 의미나 내용과는 다르다는 데서 인민의 생명력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것은 다음의 것까지도 명백하게 한다.
1) 권력이 표현상 비폭력 일상을 명목으로 하고 있는 이상 그러한 사회질서가 혼란해지는 것 ― 폭도나 범죄자의 출현은, 어쨌든지 치안을 혼란하게 하고 인심을 불안하게 한다는 데서 그들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것이 된다. 데모의 폭동화나 범죄빈발은 의사비폭력 체제를 혼란시키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것은 그대로 권력에 대한 공격의 의미를 갖는다. 나아가서 권력은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 숨겨 놓았던 권력장치를 백일하에 발동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의 의사적인 비폭력의 정체를 드러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2) 따라서 우리들이 만약 일상생활에서 구현하고 있는 자치관리능력을 진짜 스스로의 것이라고 자각하고 권력의 지배질서가 이제는 불필요한 눈가림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것은 권력의 배후에 있는 폭력장치를 무용지물로 인민의 눈앞에 끌어냄으로써 권력유지의 기반이 되고 있는 인민의 정신구조까지도 바꿔버리는 것이 될 것이다.
3) 그렇지만 인민이 권력에 대해 궐기할 때 그것은 또 일상생활의 비폭력 상황 ― 의사이기도 해도 폭력 그 자체는 아닌 ― 을 위협한다는 자기모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공공의 복지, 사회 안녕의 명목하에 권력에 의한 혹독한 탄압과 매스컴의 탄핵캠페인이 집중된다. 권력의 폭력적 탄압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심정은 널리 퍼져있다. 다시 말해서, 인민의 반역은 권력의 토대를 뒤흔드는 것이면서 동시에 인민의 비폭력성 그 자체와도 대립하는 모순을 가지고 있는 데서 인민의 일상과 괴리되어 오히려 적대시될 우려가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상 세 가지 여건을 복합적으로 일체화하는 것으로서, 마침내 이제 새삼스럽게 비폭력 직접행동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Ⅶ. 게릴라, 인민성의 문제
게릴라, 그 의미와 행방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인민과 권력자의 다른 점은 우리 인민이 권력자와 대결할 무기를 빼앗겨서 갖고 있지 않은 데 비해 그들은 항상 크고 강력한 폭력장치를 보유 독점하는 데 있다. 그리고 애당초 우리들은 무장할 필요가 없지만 그들은 항시 자기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장을 필요로 하는 데 있다. 그들은 폭력장치를 위협적으로 소유하고 수시로 행사함으로써 그 자신을 유지할 뿐이다. 게다가 인민이 적대하지 않을 때도 그들은 항상 인민을 적대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또 인민과 권력자의 역사는, 그 입장은 거의 고정되어 있으면서 그 관계를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상황으로서 변화시켜왔다. 지배권력의 폭력장치는 조직의 근대화나 과학발달에 의해서 현저하게 강화되어 때때로 그 위력을 국가 내외로 강력하게 과시하고 발휘하였다. 그런데도 인민의 지위와 처우는 최근 수세기 동안 점차적으로 향상되고 개선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권력은 공포정치를 대신해서 더욱 교묘한 회유와 타협, 당근을 낚시밥으로 던져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인민은 집단을 이루고 조직을 만들어 그들의 연합을 도모함으로써 전체의 의지 ― 예를 들면, 탄원, 상소, 진정, 도피에다가 나아가서 폭동, 야습, 스트라이크 등의 인민고유의 방법, 다시 말해서 직접행동을 통해 그때마다 패배하면서도 오랜 세월을 두고 이러한 결과를 이루어 온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서 노동자 계급이 등장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그들의 조직화와 단결은 다가오는 인민의 시대를 예언하며 빛나는 전망을 열어주는 것같이, 인민측이 투쟁주체로서 질적으로 변화하며 새롭게 형성되는 것을 의미했다. 노동자 계급과 더불어 생겨난 노동운동, 사회운동, 혁명운동은 20세기 세계를 뒤흔들고 움직이는 새로운 운동의 힘이 되기도 했다. 또, 그것은 세계대전중의 피점령지구 주민의 저항이나 전후점령지 분할문제, 민족독립운동의 봉기 등의 지하조직, 게릴라, 빨치산, 레지스탕스와도 연계되기도 했다. 이들은 옛날의 농민반란이나 종교반란 등의 유산과 교훈까지 흡수하면서 인민고유의 직접행동과도 연계된 새로운 무장투쟁방법으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점차로 단련되어 인민만이 이룩할 수 있는 인민고유의 투쟁방법을 발전시키고, 게다가 권력측이 택할 수 없는 투쟁형태라는 데서 유효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에 관해서 베트남전쟁 당시의 미국무부 차관 로스토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은 하나의 예외를 빼고 모든 형태의 군사침략을 무력하게 만들어 승리했다. 그 예외라는 것의 하나가 게릴라전이다. …… 그것은 하노이가 중공의 지지하에 라오스, 남베트남에서 펼친 방식이며 타이 동북부에서 준비하고 있는 방식이다. 또, 카스트로가 카리브해 각국에 확대하려는 방식이고 공산주의자가 아프리카에 갖고 들어가려는 방식이다. 그들이 왜 게릴라전을 택하는가 하면 …… 게릴라 한명에 대해서 정부군 15명이 필요하다는 게릴라전의 산술이 있다. 이것은 게릴라측에서는 서방측 군사주력(主力)과의 대결위험이 낮다는 것, 약소국 고유의 약점을 이용한 정치기술을 발휘하기 쉽다는 것 때문이다.”
이러한 미국 고관의 발언을 바꿔 말하면 ―
1) 게릴라에게는 국가의 거대한 군사장치도 충분한 역할을 못한다. 정면대결을 위해 폭력기구를 최대한 발동해서 전투를 시작해도 이겨야 할 전투를 헛다리짚게 만들어 예기치 않을 때 불의의 공격을 받는다.
2) 게릴라전은 전투의 승패에 기초를 두는 게 아니라, 정치기술의 발휘에 기초한다. 다시 말해, 종래의 전쟁개념이나 전투양식의 규격과 그 틀을 완전히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효과적이다. 그리고 게릴라의 본질은 원칙적으로 무장투쟁의 승패에 있지 않다. 열악한 조건에서 더구나 근대병기와 거대물량에 대항해서 지고 또 져도 결코 지지 않는 인민의 원리와 방법을 구현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게릴라가 인민의 비폭력적 본질을 충분히 구현하고 있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비폭력적 본질의 맹아(萌芽)와 방향을 시사적으로 나타냄으로써 그 본질을 제시하고 있었다는 데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게릴라’라고 할 때 그것은 무장한 유격전 소집단을 가리키는 게 보통이다. 그것은 불의의 습격이라도 전투를 주목적으로 하는 한 그 자체의 무장강화를 더욱더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적의 정치사정의 변화나 거듭되는 전략적 착오 등의 기회까지 합쳐서 전투규모의 확대, 부대편성의 대형화와 조직의 근대화를 이루어, 전략 전술적 양식에도 근본적인 질적 전환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게릴라를 병기, 병사의 수와 질의 우열에 기반을 둔 국가적인 군대차원의 지위로 정치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 결과 입수할 수 있는 한 근대살상병기를 구입하여 베이유가 말한 자기의 병사를 사지(死地)에 보내어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인접국가 또는 그러한 세력 등의 원조개입, 대리전쟁까지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게릴라의 역할이 최상의 조건에 있을 때의 결말이다.
그것은 인민고유의, 인민만이 활용할 수 있는 유효한 투쟁방법을 버리는 것이다. 권력탈취의 나라 따먹기 전쟁은 인민군과 군대조직이라는 구분관계에서 오직 군사적 승리를 위한 군사신앙이 되어 모든 것을 국가체제화 하는 것이다. 이렇게 게릴라는 그것의 집단기구로서의 폭력 때문에 애초부터 반드시 권력화의 요소와 지향을 갖게 된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단히 인민투쟁적이던 게릴라가 그들의 무력이 커지면서 어느 시점부터 실로 반인민적, 반혁명적으로 변해버린다.
사파티스타가 시사하는 것
여기서 1994년 멕시코에서 무장봉기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 : Ejercito Zapatista de Liberacion Nacional)의 마르코스 부사령관의 시사적인 발언을 소개하겠다.
▽ 되풀이하지만 우리는 권력도 정당이 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한 것은 필요없다.
▽ 무기에 의해서 권력을 장악한 자는 결코 통치해서는 안된다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다. 무기와 힘으로 통치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정의와 자유를 요구하기 위해서 이제는 지하로 들어가거나 무장하거나 할 필요가 없는 때이다.
▽ 우리는 어느날인가 병사가 더 필요치 않기 위해 병사가 된 전투원이다. (중략) 우리는 이러한 자기 소멸로 가는 길을 가다가 소멸할 운명인 직업을 선택했다. 우리는 무장투쟁을 1960년대 게릴라가 생각했던 것같이 유일한 길, 유일한 수단, 모든 것을 결정하는 유일한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EZLN은 엄밀히 정의된 이데올로기를 갖지 않은 봉기운동이다. 마르크스 레닌주의나 사회적 공산주의나 카스트로주의나 게바라주의 등등 고전적인 정치적 경우 그 어느 것과도 합치하지 않는다. 무장투쟁이 해야 할 것은 문제 ― 자유의 결여, 민주주의의 부족, 부정의(不正義) ― 를 제기하는 일이고 그런 것을 이룩한 뒤에는 소멸하게 된다.
▽ 혁명운동이나 그 지도자는 모두 정치지도자나 정치적 주역이 되려고 하는 경향을 갖기 때문에 ‘혁명적’이라는 용어는 적절치 않다. 이에 대해서 EZLN은 어디까지나 사회반란을 계속하겠다. 혁명가는 항상 위로부터 변혁할 것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사회반란은 밑으로부터 변혁할 것을 바라는 것이다.
(『이미 충분하다! 멕시코 선주민 봉기의 기록』,
『마르코스 여기는 세계의 변방인가』에서)
그러면 위에서 얘기한 게릴라의 현대사적 경위에서 또는 이상과 같은 사파티스타의 새로운 시사로부터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1) 국가체제에 대한 게릴라의 투쟁을 권장하는 것이 다시 국가라는 폭력기구에 사로잡히는 악순환을 어떻게, 어디서 단절할 수 있는가?
2) 무장투쟁으로서의 게릴라에 대체하는 이를테면 비폭력 게릴라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것인가?
3) 역사적 게릴라의 여러가지 요소중에서 게릴라의 인민성과 유효성을 이어받아서 우리들의 미래와 전망을 타개하는 핵심은 무엇인가?
‘폭력단’의 의미
규모와 성격 등을 달리하는 이러저러한 젊은이들의 그룹, 알기 쉽게 말해서 폭주족이나 중소 야쿠자조직, 나아가서 기업화한 거대 조직 등 아직도 어떤 종류의 개인폭력의 조직화, 집단화의 여지를 남기고 있는 현실은, 겉으로 그럴듯한 비폭력 사회를 허무는 것이어서 논리적으로 모순된 것같이 보인다.
권력이 왜 그렇게 깡패들의 조직화하고 집단화된 ‘폭력단’의 존재를 용납하는가? 그 첫째 의미는 그들이 권력에 직접적으로 아무런 공격을 가하지 않는, 오히려 영합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야쿠자조직은 경제연구소와 우익단체로 위장, 총회꾼 등 기업화되어 있지만 권력은 자기의 권위가 크게 실추할 우려가 있을 때만 본보기로 단속할 뿐이고 서로 친숙하게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덧붙여 말하면, 한때 야쿠자조직에 가입하는 거의 모두가 극빈층 출신이고, 아니면 조선인, 피차별부락민이거나 대부분은 사고무친의 떠돌이로 오갈데 없는 사람들이었다. 야쿠자조직은 그들에게 요세바(寄せ場), 이케바(生け場)라는 사회적 존재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1924년 이른바 데끼야(テキヤ)의 젊은 층이 아나키스트들의 ― 야스야 간이치(安谷 寬一), 와따 신기(和田 信義), 타카시마 산지(高島 三次) 조력을 얻어 ‘전국 행상인 선구자 동맹(全國行商人先驅者同盟)’을 만들었다. 금방 남쪽에서는 큐우슈우에서 북쪽 홋까이도오까지 16개 지부에 수천명으로 늘어났지만 그들의 유동성 때문에 곧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또, 관동 대지진 때 많은 조선인을 자경단(自警団)으로부터 보호해 준 쓰꾸다마사 등 많은 조직체가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사회적 존재의 의미를 말살할 수 없는 뿌리 깊은 이유이다.
둘째 의미는, 오뉴월 파리떼처럼 생겨나서 파생하는 무수한 그룹에 대해서 아무리 강대한 국가권력이라 해도 완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수적으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경찰이 완전히 대응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중요한 핵심을 건드리는데, 여기서는 이것을 암시하는 데 그치겠다. 즉, 잡초처럼 돋아나고 파생하는 규모나 성질이 다양한 ‘폭력단’과 같이 무수히 많은 인민의 개인 또는 소수 무명의 갖가지 그룹에 의한 특히 단 한번의 게릴라적 활동에는 국가의 폭력기구는 이에 충분히 대처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테러에 대하여
그러면 여기서, 이제 금세기 최대의 정치과제가 됐다고 할 수 있는 ‘테러’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테러는 게릴라 이전의 단계에서 대개 개인의 절박한 심정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어,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전해지는 상황 ― 이스라엘 병사들이 가하는 무법행위 때문에 일상생활은 궁지에 몰리고 가족이나 친구 등이 이유 없이 살해된다. 그러한 상황 때문에 최후의 최후라고 생각하는 사람, 목숨을 버려서라도 하는, 궁극적 생명력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도리어 테러를 감행하게 한다 ― 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그들이 생명을 걸고 행동한 결과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채 일순간에 끝난다. 자신이 큰 성과를 희구했다 하더라도 결코 그 테러가 피아(彼我)의 입장을 역전시키거나 국면을 번복시키는 승패에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렇게 개별적인 형태로 나타난 테러는 때때로 궁지에 몰린 저항조직의 일개전술로, 저지되기는커녕 오히려 칭찬받는 상황이 일반화되고 있다. 가령, 18세의 소녀가 자폭테러한 보도에 대해서 우리들은 도대체 어떻게 대처하면 되는가.
여기서 나는 나의 입장을 밝혀두고 싶다. 나는 우선 무엇보다도 먼저 소녀의 입장에 선다. 여하튼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걸고 자폭테러를 감행하는 이외에 방법이 없었던 절박한 소녀에 대해서 나에게는 이런저런 시비할 여지가 없다. 그 사실의 절대성에 대해서 그저 머리를 숙일 뿐이다. 그리고 폭탄에 희생된 사람에 대해서도 그들의 불운, 불행을 전적으로 슬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서 그 일과 직간접으로 연계된 조직이 문제가 된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것은 옛날 전쟁말기에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몸으로 부딪치는 돌격법, ‘가미가제 특공대(神風特攻隊)’를 전술로 택한 일본군 참모본부와 같다는 점에서 그 어떠한 이유가 있다 해도 긍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말할 것도 없이 그러한 전술로 승리를 쟁취할 수 없고 만일 그러한 투쟁이 힘을 갖게 되더라도 그것은 반인민적인 강권적 전쟁국가에의 지향을 더더욱 강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만 말해두겠다.
테러는 명백하게 폭력이다. 그것이 최후의 생명력으로 나타날 때 어쩌면 그것은 진실한 폭력 그 자체이다. 그러한 폭력은 단 한번이라고 하는 한정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는 그렇지만도 않은데 그것은 왜 그럴까? 팔레스타인의 테러는 아메리카나 이스라엘에 관련해서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나타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공포 ― 두려움의 상상력으로 발전한다. 그 뿐만 아니라 이것을 어떤 방법으로도 멈추게 할 수 없다는 데서, 비폭력의 심리적 특성이 오히려 비폭력의 ‘힘’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상상력은 자꾸자꾸 공포심을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반테러 전쟁은 자꾸자꾸 테러를 낳는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투쟁으로 테러를 저지하는 것으로 지금이야말로 ‘비전’은 비폭력 직접행동의 초점이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Ⅷ.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무엇인가
생산노동ㆍ창조ㆍ유희
흔히 직접행동이라고 하면 폭력에 호소하는 실력행사를 떠올리고 때로는 폭력의 동의어로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직접행동과 폭력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사전을 뒤져보면 ‘직접’이란 “사이에 아무것도 끼우지 않고 접하는 것, 다른 것을 통하지 않고 곧바로”라고 되어 있다.
우리들에게 직접행동이란 다른 것을 통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자기가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행동이다. 좀더 얘기하면 우리들이 일상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가 아니라, 곧바로 손에 넣기 위해서 취하는 행동이다. 그래서, 특히 폭력적 직접행동이라고 하지 않는 한 그것은 폭력 이외의 모든 방법이라는 데서 비폭력의 직접행동이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이라고 할 때의 ‘물건’이란, 예를 들면 식품으로 대표되는 생활물자일 것이다. 그것을 손에 넣는다는 것은 그것을 생산하기 위한 도구까지 포함해서, 이 경우 헷갈릴 것도 없이, 물건을 만드는 일 ― 생산이고, 그 행동이란 노동이다. 다시 말해서 직접행동의 본질은 우선 첫째로 물건을 만들고 그것을 위해서 노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산과 노동이야말로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인민만이 짊어지고 이룩해 온, 인민만이 할 수 있는 인민 최대의 힘이다. 폭력 이외의 힘이다.
비폭력 직접행동을 단순한 항의행동을 위한 전술이나 마음가짐처럼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비폭력 상황의 일상이 있어야만 가능한 생산과 노동이다. 사람들이 가정을 꾸리고, 삶에 필요한 물건을 생산하는 가운데, 그러한 힘은 명료하게 나타나서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이룬다. 당연하고 별것도 아닌 발현 그 자체인 것이다.
둘째로 그것은 생산과 노동의 결과를 누리는 것이고, 셋째로 일상생활을 즐기는 창조활동으로서 이른바 노래, 춤, 축제 등으로 확대되는 놀이이다. 직접행동이란 주어진 것을 누리는 오락만이 아니라 인민 스스로가 만드는 창조행위이기 때문이다.
자치와 관리
우리들의 생활은 분명히 비폭력적 일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생산과 노동, 기타는 우리들의 평온 무사한 사회생활의 지속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것은 본래 생산과 노동을 위협하는 것, 이를테면 전쟁 등의 폭력과 근원적으로 대립하는 것이다.
폭력은 물리적ㆍ형상적ㆍ적극적ㆍ능동적ㆍ물량적ㆍ순발적이어서 금방 인식할 수 있다. 그 과정도, 결과도 잘 보인다. 그러나 비폭력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추상적ㆍ정신적ㆍ심리적ㆍ지속적ㆍ수동적ㆍ소극적 그리고 일상적이다. 그러니까 아무일도 없는 상황일 뿐, 의식하지 않는 한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이게 비폭력이다” 하는 것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한 비폭력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무엇보다도 직접행동과 결부될 때 비로소 가시화되고 우리들 앞에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아무일도 없는 것으로 있는 비폭력은 우리들의 생명력의 근원이며 우리들의 삶 그 자체의 기반이 되는 힘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갖가지 활동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명확하게 말하면 우리와 이웃동아리들의 교류관계 혹은 자치회나 동네모임과 같은 것을 포함한 자치관리 또는 사회생활이랄 수 있겠다. 그런데서 우리들은 유사이래 현대까지 그 자신이 만들어 온 힘을 자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권력의 지배를 떠받침으로써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을 겪어 왔다고 할 수밖에 없다.
비폭력이 생산노동일 때 그것이 자치관리와 결부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예를 들면, 농민이 볍씨를 심고 익으면 벤다. 그것은 본래는 내년을 위해서 씨를 남기고 식량으로 저장하고 기타 필요한 물건과 교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한 일을 계획적으로 종합해서 스스로 또는 타자와 더불어 관리하고 운영하는 것이 자치관리인 것이다.
비폭력 사회란, 단순히 폭력이 횡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치관리사회로서 비폭력 상황을 스스로의 힘으로 구현하는 사회다. 그렇다면 생산노동이 자치관리와 결부되지 않을 때 그것은 임금노동, 노예노동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그것이 생산을 한다 해도 의사적(擬似的) 생산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국가가 지배하는 의사비폭력 체제의 현실인 것이다.
간디의 소금행진
여기서 비폭력 직접행동을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 간디가 실행한 소금행진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겠다. 그것은 영국이 인도농민의 제염을 금지하고 소금을 독점 전매함으로써 인민을 많이 수탈하려는 소금 전매법에서 시작되었다. 간디는 각지에서 모여든 농민을 이끌고 수십일간의 데모행진을 조직했지만 다짜고짜로 금지당하고 탄압과 투옥으로 이어졌다. 그런데도 행진은 거리에서, 마을에서, 사람들이 가세해서 해안을 향해 나아갔다. 그 곳에서 해수를 퍼다가 스스로의 손으로 소금을 만들었다는 것은, 필요한 것을 만들었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것은 법을 어겨서까지 행진을 이어갔고, 소금 전매법을 무시하면서까지 필요한 소금을 손수 만듦으로써 직접적으로 국가의 법률과 대립하는 것이었다.
직접행동이란 이처럼, 첫째로, 우리들 스스로의 손으로 우리가 필요한 것을 손에 넣는 것이다. 소금이 필요한 농민이 당사자가 되어 직접 소금을 요구하기 때문에 시위를 한 당연성과, 무한대로 많은 해수에서 소금을 만드는 작업을 한 정당성은, 그 누구도 침해하지 않고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데서 권력자의 무법을 부각시키고 그들의 무법성에 직접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위해서 생산하는 행위을 통해서 권력자와 인민의 관계, 생산자와 생산에 기생해서 수탈하고 낭비하는 자들의 자세까지도 부각시킨다. 이렇게 직접행동은 생산노동 그 자체라는 점에서 생산관계의 진실을 명백하게 한다.
둘째로, 우리들이 자기의 개인책임에서 스스로 행위한다는 것이다. 그가 소금행진에 참가하는 것은 자기의 필요 때문에 결정한, 의지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데모나 전매법 위반에 대한 권력의 탄압을 자신의 몸으로 받는 것이기도 하다. 결과를 누구에게도 전가할 수 없는 장소에 자진해서 자신을 둔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붙잡혀 투옥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상하고 참가한다. 이렇게 직접행동은 개인책임을 명백하게 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주체에 의해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이것은 자치관리이기도 하다.
셋째로, 그것은 합법ㆍ비합법을 초월한 생산행위이다. 행진에 참가해서 항의를 하는 것, 나아가서 그의 필요성에 따라서 소금을 만드는 것은, 정당성에서 법적 시비를 초월한다. 지배자는 반드시 위법을 문제삼지만, 그러한 법은 그의 정당행위를 벌함으로써 스스로의 불법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합법은 권력자의 명분일 뿐 결코 정의의 보증이 아니다. 직접행동에 대해서 법률이 강권을 동원하면 할수록 그것은 법률 그 자체의 부정의를 증명하고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 된다. 합법ㆍ비합법은 우리들에게 전술적 고려 이상의 것이 아니다. 이렇게 직접행동은 권력의 어떤 규칙과도 관련이 없다.
넷째로, 그것은 정치라고 하는 간접수단을 일체 부정하고 배제한다. 길을 따라 바다로 향해서 걸어간다는 것, 해수를 퍼다가 소금을 만드는 것은 그들에게는 가장 빠르게, 확실하게 자기의 소망을 달성하는 길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직접적이고, 누구에게나 당연한 방법이다. 게다가 인민이 그것을 직접 만드는 수밖에, 그 누구도 소금을 만드는 사람이 없다는 데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올바른 길이다. 그렇다면, 소금을 얻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해도 그가 해야 하는 일은 정해져 있다. 그 일 외에는 모두 길이 멀고 불확실한 데다가 완전히 소망을 이룰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가령, 정치에 의존해서 데모의 규제를 완화시켰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이 그 자신의 행동에 의하지 않는 한 인민은 정부와의 대차대조표 한쪽에 빚을 지게 된다. 그뿐인가, 정치는 그들과 그들의 생산물 사이에 개입해서 경비를 사용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구전을 착취한다. 또 그뿐인가, 그렇게 해서 그에게는 언제나 정치꾼을 매개로 하지 않으면 아무일도 못하도록 배후자가 붙는다. 우리들이 자기의 생산물을 사용하는 데 그처럼 귀찮은 방법이 필요할까. 이렇게 직접행동은 정치가 쓸데없는 게재물일뿐 아니라 착취의 방법으로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한다.
다섯째로, 그것은 인민의 존재양식이고 그 자체로 생활과 밀착된 싸움이다. 그의 행위는 생활 그 자체로 그의 실력을 보여주고 그러한 실력의 행사야말로 인민의 유일한 거절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한다. 소금행진을 하는 것은 그것이 나날의 생활과 같은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이고, 살기 위해서 그때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실력을 그의 육체 ― 생활을 가지고 ― 로 실행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민에게 직접행동이란 타인에게 물건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물건을 만드는 것, 그렇기 하기 위해서 방해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직접행동은 방해에 대해서는 실력행사로서 생활의 의미를 명백하게 한다.
여섯째로, 그것은 나날의 생활 ― 생산과 관련해서 자립적으로 나날의 생활을 관리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은 생산의 장소와 도구, 원료를 자신의 생활을 위해서 확보하고 물건을 생산하며 나아가서 올바르게 분배하는 일이다. 방해와 협박, 검거와 투옥에도 불구하고 소금행진이 엄연하게 계속된 것은 참가자 개인 개인이 자주적ㆍ자립적이며 전체로서 행진을 자기의 책임에서 조정하고 관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생활의 질서가 사실은 권력에 의한 통제적 법규의 결과가 아니라 본래부터 인민이 가지는 자연스러운 기능에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렇게 직접행동은 인민의 속성으로서의 비폭력과 결부되어 그것이 매우 능동적인 힘이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현재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생산과 노동은, 사실은 자기의 노동력을 상품으로서 자본에 파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해서 얻은 대금을 중개로 해서 간접적으로밖에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는 데서 우리들의 생산노동은 명백하게 의사화되어 있다. 바꿔 말하면, 직접행동은 본래의 비폭력 상황하에서만 그러하고 사이비 비폭력 체제하에서는 그것과 대응하는 의사 생산활동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현체제내에서의 비폭력은 전체가 의사화․왜소화되어 의사 직접행동이나 권력자신의 폭력행동 밖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을 체제내에서 강탈당한 상황하에서 이루어지는 우리들의 싸움은 정확하게 말하면 직접행동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우선 비폭력 직접행동의 회복과 탈권의 투쟁이다. 소금행진에서 실행된 채염은 일상적인 비폭력 상황하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상징적인 것, 그것이다. 소금행진에 들어 있는 매우 첨예한 정치투쟁은 ― 우리들 자신을 위한, 생산노동을 탈환하기 위한 더욱 엄격하게 말하면 비폭력 직접행동 ‘탈환’의 투쟁이 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노동소외에서 되찾아내서 의사 생산노동을 자신을 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이다.
Ⅸ. 비폭력 직접행동, 몇 가지 문제
소수파의 노동운동
노동운동은 단순히 자기의 노동을 착취하는 자본이나 그를 구성하는 사회기구에 대한 투쟁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기의 의사 생산노동, 그러한 의사를 가져다주는 의사상황에 대한 투쟁이다. 비폭력 직접행동의 탈환이다. 솔직히 말해서, 될 수 있는 한 일하지 않고 벌지 않는 주의다. 자기가 하고 싶고 또한 할 수 있는 것만 한다. 그렇게 일하는 방법을 추구하고 연구하고 생각하는 것을 즐기고 기쁨으로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투쟁이란 노동운동에서의 단순한 임금상승이나 조건개선 투쟁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노동에서의 창조적인 투쟁이다. 그리고 또 이러한 투쟁은 종래의 조합운동과 다른 도시의 잡업(雜業)노동자나 프리아르바이터 등 ‘미조직(未組職)’의 유동적 노동자에 의한 움직임 ― 노동의 거부와도 통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들이 ‘비전(非戰)’이라고 할 때 그것은 군수산업에서의 노동이라면 즉시 생산점의 방기(放棄)를 의미하지만 그 이전에 우선 위장태업, 업무 불이행, 작업실수 다발, 결국에 직무거부 등 갖가지 형태의 경위가 우선 있고 나서 마지막으로 부당해고에 대한 재판으로 이어지는, 자기자신의 처신과 존재방식을 만드는 것이다. 결말에 가서 구조조정이나 실업에도 불구하고 생산점을 버리거나 떠나지 않고 집요하게 최후까지 투쟁을 계속하는 어쩌면 자기 파멸적으로 보이는 소수노동자들의 존재야말로 여기서 말하는 노동운동인 것이다.
한편, 자본가들은 의사비폭력 체제하에서 무엇보다도 자본의 존립기반의 안정과 유지를 필요로 한다. 그러한 의사가 허물어지는 것은 사회적인 혼란과 불안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파들의 움직임은 그 자체가 권력공격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이러한 소수파노조의 투쟁도 권력의 탄압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생산점에서 만든 자치공간에 권력이 치고들어 왔을 때 당연히 그곳에는 피아간의 폭력적 공방의 형태가 출현한다. 그것은 권력이 쓰고 있는 의사비폭력의 가면을 벗겨 그들의 정체를 더욱 명백하게 해서 일견 폭력적으로 보이는 투쟁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직접행동의 부활 ― 생산노동 탈환에서 본질적으로 비폭력을 지향하는 것이며 폭력투쟁과 동질의 것은 아니다. 의사비폭력 체제의 붕괴과정에 대응하는 인민의 반폭력(反暴力), 다시 말하자면 생명력으로서의 힘이 한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생명력과 사회폭력의 가장 다른 점은, 후자가 그의 폭력조직기구를 자기 긍정적으로 더욱더 심화․확대할 수밖에 없는 데 반해서 전자의 폭력은 한정적이고 조건적이고 상황적이며 항상 비폭력으로 수렴되는 반폭력이라는 것이다.
되풀이해서 말하면,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과 인민의 반폭력이 대항할 때 일견 똑같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직접행동의 시점에서 볼 때 그것은 전혀 다른, 이질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찌보면 헷갈리는 것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기준은 그 행위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생산노동과 관련되었는지, 또 생산노동의 확보와 결부되어 있는지이다.
앞서 폭력은, 투쟁이 일시적으로 상황을 타개해도, 마침내 사람들의 버림을 받는다고 말했다. 직접행동은 한정적․조건적․상황적으로 나타난다 ― 는 것은 투쟁이 경직되지 않고 그때 그때에 따라서 다양한 게릴라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게릴라는 폭력투쟁의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확실하다. 즉, 반폭력적 대응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 갖가지 방법으로서 창조적인 투쟁을 창출하는 것이다.
투쟁이란 종래의 비폭력이나 폭력의 개념으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로운 데서 일어날 것이다. 직접행동이 생산노동뿐만 아니라 창조활동이라는 것은 이 경우에 특히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기존의 개념을 깬 새로운 투쟁 ― 비폭력 직접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만 투쟁이 대응의 상대성을 넘어서서 우리들의 힘이 되는 것이다.
거기서는 이제 폭력의 강약에 의해서 승패를 결정하지 않는다. 기존의 비폭력 개념은 흔히 기성의 폭력개념과 밀착해서 오히려 새로운 투쟁형태의 발상을 방해했다. 강령도 규약도 없고 대표도 두지 않는 비조직적 조직의 일반화, 개별적이고 다양 다중한 각각의 문제를 가지고 부분끼리 붙었다 떨어졌다 자유자재로 움직임으로 연결되는 모임 ― 그러한 잡민성의 구경꾼적 방종이나 무뢰한적 성격이야말로 힘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공동체 등의 의미
앞에서는 이를테면 노동조합 ‘연합’ 등이 상징하는, 작금의 노동자와 노동운동 일반의 거의 절망적인 상황을 뇌리에 떠올리면서 일부의 사람들에게 있는 가능성으로 썼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재 더욱 절망적일지도 모를 ‘공동체’의 아주 작은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해서 써두고 싶다.
예를 들어, 70년대경 조금 문제가 된, 소규모지만 각지에 파생했던, 지금은 겨우 두세개만 남은 ‘공동체운동’의 현재는 어떠한가. 그 때를 돌이켜보면, 당시의 이러저러한 공동체건설의 시도는 일상생활의 차원에서 스스로 비폭력 공간을 창출하려는 것이었다. 무의식하에서라도 비폭력 직접행동의 연속적 일상화이고 일상생활의 비폭력 직접행동화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1) 그것은 무엇보다도 체제내의 상품화된 노동에 대해서 비금전적인 노동이라는 점,
2) 공동체의 창설과 운영이 자치관리의 실천이라는 점,
3) 게다가 생활의 공동성을 통해서 개인의 일상영위를 스스로가 엄격하게 따지는 자기관리의 장이라는 점,
4) 생산이 노동의 결과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찾아간 자신의 손에 의한 창조의 기쁨이고 누림이라는 점에서 그러했다.
그러나 또 그것이 무엇보다도 비폭력 직접행동 본래의 의미를 영위하는 것인데도 공동체측에서 누구도 말하는 이가 없고 그것을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이유의 대부분은 순전히 공동체 그 자체 안에 있었다. 즉,
1) 공동체는 농경 등 공동노동을 통해서 내실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처음부터 일상생활 차원의 문제가 집중돼서 미시적인 소(小)상황문제의 처리에 쫒겨서 비폭력 직접행동적 시점이 방기되어 버렸던 것.
2) 예를 들어 공동체의 발기가 무상노동과 같은 자본과의 공존을 거부한 것이었다 해도, 그것이 개인생활의 공동체로의 탈출이라는 사회와의 단절로 완결돼 버린다는 것.
3) 공동체를 외부의 정치적 상황에서 지켜내고 유지하기 위해서 외부와의 접촉 창구를 될 수 있는 한 한정시켜 버리고 탈사회적 폐쇄성으로 전화시켜 버린 것.
여기서 이 항목에 관련해서 반기지투쟁 등에 대해서 약간 덧붙여 두겠다. 예전의 기지투쟁이라고 하면 지금도 오끼나와, 산리즈까, 칸사이 공항, 히주우다이 …… 등과 각 현장에서의 투쟁이 떠오른다. 이러한 기지투쟁은 권력의 토지몰수나 토지수용에 대해서 토지를 내주지 않으면서 생활을 지키는 데서 시작했다. ‘연좌’가 아니라 이른바 ‘입주’같은 것이다. 그것은 공간적 장(場)투쟁이고 동시에 좀더 시간(일상생활)적인 지속투쟁이며, 말하자면 그 두 개의 분리 여부가 비폭력 직접행동의 초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은, 이를테면 기지내의 경작이다(구체적으로 말하면 현재 굉음이 머리 위 수십미터를 비행하는 매수예정토지에 있는 산리즈까의 순환농장과 같은 것인데, 그것은 존재 자체가 비폭력 직접행동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그처럼 우리들의 일상에 큰 의미를 갖고 있는데도 현실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운동이라는 것의 내부에서 무시되고 있는 것은 왜인가.
그것은 지금까지 이러저러한 형태로 이미 나타나고 있는 비폭력 직접행동을 총체로서 파악하고 현재의 시점에 맞춰서 다시 미래를 전망하는 비폭력 직접행동론이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그것을 자각적으로 만들어내는 노력이 전혀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라르자크 공동체의 보베, 기타
여기까지 썼을 때 라르자크 공동체의 보베가 일본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 라르자크는 프랑스 중앙부의 협곡과 석회암의 침식이 이어진 고원지대에 있으며 로크포르치즈나 목공예품을 특산품으로 하는 농촌공동체다. 1970년대 초부터 비폭력 직접행동을 실시하고 프랑스육군의 훈련지확장 반대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의 방법도 특이한데 국민중 남자에게 필수인 군무수첩의 일제 파기운동에서 시작하여 파리 에펠탑 밑의 양떼 데모, 또는 2000두의 양떼로 현 의회봉쇄 작전, 립프시계 노동자와의 공동투쟁 대파업, 트렉터 70대에 의한 공장내 행진, 용수로를 없애려고 한 도로공사에 대한 노농돌격(연대․합작) 수로건설, 공병대사무소에 쳐들어가서 측량서류와 불용도면의 파기(22명의 행동지원자 투옥), 전국에 확대된 라르자크 위원회(GFA)에 의한 모금에서 확장예정지의 4분의 1, 1,515헥터의 입수, 신규입촌자와 지원자에 대한 농장개방, 500두를 수용하는 염소우리 완성, 이주자의 군용지 점령경작, 신규입촌자를 위한 학교만들기, 낙하산 강하부대를 포위하기 위한 풀베기 작전과 이동중인 군대차를 운전해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추방하기, 수확제에 전국에서 모인 10만 3000명 등등. 분방하면서도 언제나 의표를 찌르는 파격적인 비폭력 직접행동의 전술로 이름이 알려졌다. 당시 촌민은 평상시 500명에서 1000명이라는 말도 들었다(각 집마다 자립해서, 그때 그때 출입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당시라는 것은 벌써 지금부터 20년도 더 된 1980년경의 일인데 그것은 라르자크공동체의 창시자 란자 델 파스트가 산리즈까의 공동투쟁을 위해서 일본에 왔고 오오사까의 우리 아지트 살루톤에도 묵어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스트는 그 때 이미 80세, 젊었을 때 인도에 가서 직접 간디에게 오래 사사하고 귀국 후에 라르자크에서 공동체를 시작했다고 한다. 산리즈까에 대한 파스트의 감상은 지금까지 나의 뇌리에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산리즈까는 라르자크의 우리들과 완전히 같은 투쟁을 하고 있다. 라르자크에서는 그것을 비폭력 직접행동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의식하고 하는 투쟁이다. 그런데 산리즈까는 자기들 자신의 투쟁을 비폭력 직접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더욱 무장투쟁으로 돌진하려는 방향에 사로잡혀 오히려 폭력투쟁으로 비난받고 있다. 폭력이 아닌데 그게 비폭력 직접행동이라는 자각이 없다. 확신도 없다. 그것이 최후의 결정타를 날리지 못하게 하고 있다. 비폭력 직접행동은 당연한 일상의 보통행동이지만 그것을 비폭력 직접행동이라고 자각하는 것으로 힘이 된다. 운동이라는 면에서 말하면 라르자크에서는 개별적이며 각자의 과제에 대해서 각자의 입장에 입각한 공동성에서 시작된다. 청년, 부인, 노동자, 카톨릭, 프로테스탄트, 에콜로지스트, 망치와 낫, 유기농업자 등이 당파, 정당, 조직체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 ― 개인의 입장으로 그것이 우선 비폭력 직접행동이라는 공통인식에서 성립된다”
그리고 2년후 파스트가 서거했다는 풍문을 들은 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베는 나에게 처음 접하는 전혀 미지의 사람으로, 처음에는 그저 라르자크라는 직함을 보고 깜짝 놀랐을 뿐이다. 2002년 3월 29일 신문은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에 침입하여 공격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수일 후에는 의장청사까지 포격으로 파괴하는 바람에 아라파트가 집무하는 의장실까지 포위하고 수도, 전기까지 끊고 식량공세를 꾀하는 등 무법행위를 저질렀다. 이에 대해서 ― 비폭력을 표방하는 수십명의 국제시민파견단이 ― 이스라엘군의 작전의 틈을 타고 식량 등을 가지고 의장청사에 돌입하고 그대로 그 의장실에 있으면서 ‘인간방패’로 의장과 측근들을 포격으로부터 지키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런데 그들 뜻있는 이들 속에 마침 라르자크의 보베라는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30여년간, 아직도 라르자크는 건재하고 비폭력 직접행동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우선 그것에 주목했던 것이다.
‘인간방패’의 행동과 전술에 대해서는 그 후에 간행된 『팔레스타인 국제시민파견단 의장부 방위전일기(パレスチナ國際市民派遣団 議長府防衛戰日記)』(太田出版)에 자세하게 실렸다. 그 책의 저자대표로 조제 보베의 이름도 나와 있는데, 그 서문을 조금 인용하면, “이스라엘 시민이 있는 한가운데서 작렬하는 인간폭탄은 무서운 행위이다. 그러나 수일간이라도 팔레스타인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곳에서 몇 년간이나 절망이 재생산되고 있고 폭력이 대규모로 행사되고 있는 것을 반드시 지적할 것이다. 테러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어떤 테러가 다른 테러에서 나온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해서 그 활동의 일단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11월 11일 아사히신문 조간에 돌연 「재수감에서도 투쟁, 유전자조작에 항의 ― 프랑스 활동가 보베씨」 라는 타이틀의 기사가 실려 있었던 것이다.
일본을 방문한 프랑스의 세계화 반대 활동가 조제 보베씨(49세)가 인터뷰에 응하고 유전자조작을 위한 벼를 뽑아버린 사건에서 프랑스 대법원의 판결이 5일 언도가 예견되는 것에 대해 “내가 수감되더라도 투쟁은 형무소 밖에서 계속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미국자본계열의 햄버거 체인 맥도날드의 신축건물을 해체한 행위로 수개월의 금고형을 복역한 보베씨는 대법원 판결에서 실형이 확정되면 다른 사건과 합쳐서 14개월 수감된다. 보베씨는 “합법성보다 운동의 정당성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비폭력 직접행동이 그대로 그의 투쟁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일견 과격하게 보이는 행위는 그에게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당연한 행위가 틀림없다. 그리고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보베씨뿐만 아니라 본래부터 우리들에게도 그런 것이다(이러한 비폭력 직접행동은 그 시점을 조금만 바꾸면 여러가지 실례를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이를테면 원전반대운동에서 시부루크에서 전원이 훈련을 마치고 1700명이 일제히 부지내에 연좌행동을 전개하여 체포거부작전에 나서는 등, 우리는 운동의 가능성이 무한함을 간과하고 권력을 안도하게 하고 있다고도 하겠다).
Ⅹ. 한사람의 무리(群)로
생산점ㆍ생활점과 시민노동자
지금 일반적으로 시민 그리고 이와 동일하게 쓰이는 노동자라는 개념은, 국가와 자본에 생활의 모든 것을 내주고 있으면서 때로 중산계급 의식하에서 한결같이(?) 노동하는 도시 또는 그 주변의 근로자나 샐러리맨 그리고 시간제 근로자 등 주부일반에 대한 지칭일 것이다.
여기서는 일단 ‘시민노동자’라고 부르기로 한다. 시민노동자는 생산점과 생활점이라는 두 개의 장을 축으로 나날이 왔다갔다하면서 일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다. 그와 그녀는 날마다 일터로 출근하고 무엇인가 ‘상품’을 만들기 위한 생산공정에서 일하고 있다. 틀림없이 그것은 생산노동이고, 만들어낸 ‘상품’은 그러한 사람들의 노동이 있었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은 결코 비폭력 직접행동의 생산노동이 아니다. 말할 것도 없이, 완성된 ‘상품’은 생산에 관련된 노동자들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본의 것이다. 만약에 그것을 필요로 한다면 임금에서 얼마의 돈을 꺼내서 대금을 지불할 수밖에 없다. 그는 다만 임금노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그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데서 시민노동자는 억지로 시민생활의 충족 또는 만족을 얻는다.
그러한 시민노동자의 생활의 장으로서 시민사회는, 시민생활의 일상에 사적(私的) 개별사항의 현실성으로 존재한다(그것과 대조해서 정치사회는 관념적․공적(公的) 보편사항의 추상성으로 시민생활과 격리되어 성립한다). 즉, 시민운동은 정치국가와 시민사회의 분열이라는 모순, 본질적으로 생산력과 유통관계의 틈에서 파생되는 여러가지 상극을 개별적으로 해소하려는 데서 거의 체념하면서 때때로 분출되는 것으로서 있다. 이 운동은 시민개개인의 공통이해 또는 문제의식에 기초를 두어 당연히 조건적이고 부분적이고 한계적이다. 설령 운동이 확대되고 앙앙된다 해도 시한적, 국지적인 것으로 멈추고 다른 부분과 결합되거나 누적적 발전이 거의 없으며 쉽게 반권력투쟁이 되지 않는다.
말을 바꿔서, 이른바 노동조합은 산하의 노동자를 규합해서 한결같이 생산점을 지킴으로써 이제는 조합원의 조촐한 물질적 욕구의 충족을 자본과 국가가 ‘풍요롭다’고 말하는 데 맡겨버리고 완전히 관리기구 속에 있다. “잃을 것은 사슬뿐”이라는, 그 자체로 변혁의 요인을 내재한 노동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르크스가 말한 부정적 존재로서의 ― 극빈층, 룸펜프롤레타리아 또는 밀입국한 외국인 노동자들 속에만 존재한다. 따라서 자기의 일상을 의식적으로 비폭력 직접행동의 위치로 밀고 나가서 생산점에서의 의사 생산노동을 방기하는 노동자는 없다. 극히 소수의 노동자와 개인이 가맹한 합동노조 등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가 자본의 톱니바퀴의 하나로, 다시 말해서 사회생활의 기점(基点)을 임금노동에 두고 생산점을 축으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지만 역시 한편에서 생활자적 시민이므로 하루에도 몇번씩 생산점을 이탈해서 노동자라는 것을 그만두는 순간이 있다. 예를 들면, 일하다가 자리를 떠나서 담배를 피울 때, 점심을 먹으면서 주간지를 읽을 때, 술집에서 동아리들과 맥주를 마실 때 등. 그리고 휴식, 소비, 생활의 장으로서의 공간, 즉 거주의 장과 그것과 연관된 생활점으로 돌아갔을 때. 이렇게 노동자는 생산점과 생활점을 왔다갔다하는 왕복을 날마다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생활점은 그만의 장으로 외부로부터 거의 폐쇄되어 있기 때문에 일시적 휴식의 장에 불과하다. 휴식이라기보다 다시 그저 생산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전제로 하는 장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도착점조차도 아니고 생산점 왕복의 반환점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그의 생활은 확실히 생산점을 축으로 해서 회전하고 있는 것이다. 생산점은 그에게 타자 ― 정치사회환경과 결부되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 소외적 생산점에서, 자기회복으로서의 생활점을, 만약에 그가 적극적으로 의식했다 하더라도 그저 생산점에 의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크든 작든 도시잡업 노동자나 프리아르바이터들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의 생산점으로부터의 탈출은, 생산점과 생활점의 두 곳으로 찢겨져서 왕복하고 있는 자기의, 생활점에서의 자기발견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시민노동자로서의 의사 생산노동을 객체화함으로써 노동자의 의미를 새로 발견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것만으로 시민노동자는 자본의 진지 ― 생산점을 내부에서 허물거나 탈취하는 투쟁으로 궐기할 수는 없다. 그리고 여기서 시민사회에서 나온 시민운동이나 그룹이 다양한 모습으로 시민노동자 앞에 등장하게 된다.
시민노동자에서 잡민(雜民)으로
시민운동은 본래 우리들의 생활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 기반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서 생기는 감정적․이해적, 공동성․관계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이 시민운동에 접촉하는 계기는 사회생활 중에 자기의 이해나 생활감정의 공동성의 인지와 관계의 공감성에서 생긴다. 그러나 그것의 모양이나 내용, 과제의 크고 작음, 대상의 구별 등, 실로 천차만별이다. 관계의 설정도 임의이고 자의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와 그녀는 때로 자기의 생산점과 인연에 관계없이 시민운동에 참가한다. 그러나 자기의 생활점 = 시민생활에서는 서로 연결되며 타자와의 최저한의 필요관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것은 각자가 의식적으로 생활점을 시민사회를 향해서 열어나가는 행위라기보다도 오히려 생산점에서 벗어나서 익명화된 개인으로서 시민사회에 섞여들어 가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게 옳다.
그러나 우리들의 생활점으로서의 시민사회도 시대의 커다란 조류와 변화에, 당연하지만, 심하게 흔들린다. 때때로 직면하는 현실적인 정치과제에 비추어 자기의 내부로부터도 변화와 변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와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무관계의 관계로서 현실 속에서 자치관리 의식을 환기시키는 모순적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변화하는 시민사회는 옛날의 시민노동자적 체질을 더 한층 잡민화(雜民化)할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조직이나 당파, 이데올로기나 정치 등과 무관한 이른바 아나키로 취미나 기호에 따르는 개인적이고 어느 의미에서는 무책임하고, 사정이 허락하면 가벼운 마음으로 “와”하고 모여서 움직이고 끝나면 각기 산산이 흩어지는 무조직적(無組織的) 모임이다. 정체가 조금도 명확하지 않고 이합집산이 순탄하지 않은 모임이라고 해도 좋다.
그것은 지금 적지 않은 젊은이들 중에 자치관리의 경향 ― 이를테면 생산점과의 거리를 스스로 유지하면서 기업 사회일반과 다른 생활을 지향하는 잡업자들, 정규직 거부지향의 반실업자군이나 프리아르바이터들 또는 자원봉사자들. 그 이름이 꽤 알려진, ‘아끼노아라시(秋の風, 천황제 반대모임)’나 ‘다메렝(だめ連)’ 등 한때는 끊어지고 또 어느 때는 부활하면서 거품처럼 생겼다가는 어느 사이에 꺼지는 소수집단의 파생, 시민도 인민도 노동자도 그래서 자기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잡민’ 의식의 출현인데 안토니오 네그리가 이름붙인 Multitude(다중)라고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좀더 얘기하면 세계적으로는 반세계화․반자본주의의 이름으로 이를테면 세계정상회의에 각국에서 모여드는 수만명의 잡다하고 카오스적인 그 숫자가 의미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에 공통된 근저에 커다란 흐름으로서, 나는, 지금 ‘비폭력 직접행동’이 다양한 형태로 구체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하겠다.
앞에서 말한 소수노동자는 좀더 시민운동과의 접근이 요구되지만 라르자크나 사파티스타의 구체적 시사는 틀림없이 귀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시민노동자라기보다 오히려 잡민으로, ‘잡민화’됨으로써 더욱 개별과제에 대치하게 되는 여러 운동, ― 차별이나 국가(國歌), 국기(國旗), 야스쿠니나 유사입법, 장애자문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 등 헤아려보면 수십가지도 더 되는 ― 이러한 문제를 하나하나 흩어진 채 밑바닥에서 일반화하는 것이 비폭력 직접행동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개별과제를 과제로 삼아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잡민의 잡민성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비폭력 직접행동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조직으로써가 아닌, 조직운동이 아닌 것을 특징으로 하는 ― 아나키즘에서 말하는 자유연합이다. 이를테면 각각이 취미동호적 친목에서 시작하는 ‘관계’, 그리고 그것의 연계의 연계로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는 비폭력 직접행동의 자의성이야말로 오히려 연결된 네트워크의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한마디만 더. 한 사람의 무리(群)로, 그러한 개인의 이합집산의 토대 위에 있는 비폭력 직접행동을 우리들이 극히 당연한 일상생활 속에 있는 것으로 새삼 자각하고 다시 파악하면, 그러한 시야에서 우리들의 일상은 틀림없이 크게 변할 것이다. 우리들이 변하는 그 때, 마침내 의사비폭력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