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가 투옥될 때 법치는 진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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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가 투옥될 때 법치는 진보했다

이시우 / 사진가

판사들이 수상하다.
서울지법 이범균 판사는 2월 6일 국정원대선개입사건 당사자인 김용판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원세훈에 대한 판결도 우려된다. 이석기내란음모사건에 대한 김정운 판사의 판결 역시 우려된다.

법에 의한 지배, 즉 권력자가 지배하지 않고 법이 지배하는 곳에 자유가 있다는 칸트의 명제는 근대자유주의의 대원칙이다. 그러나 일본의 석학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 이념이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며 법으로부터 자동적으로 판결이 나올 수 없다는 자명한 이치를 간과하고, 법의 중립적 성격을 참칭하여 오히려 반동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고 지적한다. 법에 의한 지배라는 법치의 원리는 권력집단으로부터 독립한 법관에 의해 완결된다. 법관이 권력에 맞서 싸울 수 있을 때 법치가 진전될 수 있음을 역사는 보여준다.

‘유토피아’의 저자로 유명한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 밑에서 대법관을 지냈다. 당시 대법관은 수상에 해당하는 지위였다. 영국 역사는 그가 대법관으로 있었을 때 모든 송사가 가장 공정하고 신속하게 판결되었다고 평가하곤 한다. 그는 정치인과 부자들이 갖은 방식으로 제공하는 선물을 거부하고 특유의 유머로 조롱했다. 그러나 가난하고 억울한 이들에겐 공정한 판결로 법을 신뢰토록 했다. 그가 사위에게 보낸 편지는 지금도 법치의 교범이다.

“가령 어느 소송에서 옳은 판결을 바라고 법정에 온 사람 중 한편은 나의 부친이고 다른 한편은 악마라고 할 때 악마측이 옳다면 나는 악마에게 승소판결을 내리겠다.”

그가 악마의 편에 선 적은 없지만, 양심에 따라 왕의 뜻을 거역하자 헨리 8세의 총애는 악마의 저주로 돌변했다. 그는 악명 높은 런던탑의 감옥에 갇혀 처형될 때까지도 온화하고 경건하게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대법관 모어의 죽음은 그 뒤 많은 법관들에게 사표가 되었다.

재판장 에드워드 코크(Edward Coke) 역시 투옥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의 권력에 맞섬으로서 마그나카르타를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원천’으로 만들었다. 템즈강변 러미니드에 서 있는 마그나카르타기념비에는 ‘법 아래의 자유’(freedom under the law)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그러나 1215년 6월 15일 서명된 이 대헌장은 중세 영국법에서 국왕이 귀족들에게 부여하는 특혜를 담고 있는 문서에 불과했다. 즉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원천’과는 거리가 먼 문서였다. 이 문서는 300년이 지나서야 제임스 1세와 의회가 대립하는 과정에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에드워드 코크 재판장은 먼지 낀 서가에서 마그나카르타를 발견해 재해석함으로써 ‘법을 통한 지배’라는 개념을 확립했다. 코크는 마그나카르타가 귀족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마그나카르타의 자유들(liberties)은 개인의 자유(individual liberty)와 같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자유로운 군주국의 참된 법’이라는 책까지 썼던 영민한 군주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의 투철한 이론가였다. 제임스 1세가 “어떻게 왕이 법률 아래 있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외치자 에드워드 코크는 “왕이란 모든 인간 위에 있지만 신과 법률의 아래에 있습니다”라고 대꾸했다. 그는 왕이 아니라 법이 절대적이라고 믿었다. 그는 결국 감옥에 갇히고 말았고 의회는 해산되었다. 그러나 투옥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신념으로 마그나카르타는 재해석되었고 법치의 영토는 넓어졌다.

나 역시 법관의 역할을 절감한 경험이 있다. 나는 국가보안법상 28가지의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 끝에 무죄를 받았다. 1심 재판장은 한양석 판사였다. 선고 전 재향군인회 임원단은 ‘이시우에게 법정 최고형을 판결하라’는 탄원서를 제출하며 판사를 압박하고 있었다. 신임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 직후 첫 방문지를 재향군인회로 택할 정도였으니 그들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정치적 외압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판결문 낭독을 가슴 졸이며 청취하던 나는 마지막 대목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내가 인터넷을 통해 군사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에 대해 인터넷에 게재된 글은 ‘도서의 발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이미 인터넷을 통한 표현이 보편화된 때여서 ‘도서의 발간’이 이미 낡은 법리임은 누구나 인정될 수 있었다. 변호인도 이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한 바가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 낡은 법전을 무기로 오히려 사회적 상식의 오류와 싸워준 것이다. 나는 대법원 무죄판결 직후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법의 해석은 법의 영토를 넓히는 것이다.”

칸트는 ‘법이론’에서 “일정기간만이라도 경험적 윈리에서 벗어나 오직 이성 안에서만 판결의 원천을 찾으라”고 주문한다. 사회적 관성에 지배되는 경험원리를 극복하기란 사회관계에 얽힌 당사자로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 법관들은 권력의 시녀가 되고 만다. 그러나 일부 위대한 법관들은 투옥을 불사하면서 경험원리와 싸웠고 그 덕분에 우리는 보다 진보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법관의 양심이 법의 양심이다. 법관의 용기가 법치의 보루이다. 법관의 판결이 법의 피이다. 법관이 출세할 마음으로 판결하면 법치는 후퇴한다. 법관이 감옥 갈 마음으로 판결하면 법치는 진보한다. 이석기내란음모사건에 대한 판결에서 김정운 판사의 결기를 기대한다.